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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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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2026년4월 세계 정국 분석 [길과 생명:양봉식 국장]지금 세계는 단순한 이념 갈등이나 지정학적 패권 경쟁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문명적·영적 충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한편에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질서를 해체하려는 복합적인 전체주의 연합 세력이 있다. 공산주의, 좌파 사회주의, 워키즘(Wokeism), 이슬람 전체주의 세력이 공통의 적—곧 기독교 문명—을 타도하기 위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결탁하고 있다. 본 분석기획은 이 충돌의 구도와 실체, 그리고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가 어떻게 인식하고 응전해야 할 것인지를 심층 검토한다. Ⅰ. 서론: 문명의 충돌인가, 영적 전쟁인가 20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된 지 불과35년, 21세기 세계는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명 충돌의 전선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경제적 패권 다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기초 가치—인간의 존엄, 가족의 신성성, 국가의 정체성, 신앙의 자유—를 둘러싼 전쟁이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하버드 대학교의 고(故)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는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21세기 세계의 주요 갈등이 이념 간이 아닌 문명 간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특히 이슬람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그로부터3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헌팅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선이 복합화·다층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 정국을 단순히 지정학적 대결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 대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엄"을 전제한 기독교 문명과, 그 전제를 파괴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 사이의 영적 싸움이다. 한국교회는 이 구도를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지, 어떤 가치 위에 서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시점이다. Ⅱ. 전 세계적 갈등의 양대 구도: 두 문명의 충돌 1. 기독교 문명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비롯된다는 성경적 인식,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청교도적 정치관,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세속 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적 유산—이 모두가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 오늘날 이 문명 진영의 핵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비록 많은 내부 모순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헌법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보호하는 국가이다. 트럼프2기 행정부(2025~)는 출범과 함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정책의 방향으로 채택하는 신호를 보냈다. 헤리티지 재단이 주도하는 프로젝트2025(Project 2025)에는 기독교 문명 가치에 기반한 정부 재편 구상이 담겨 있다. 이를 진보 진영은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보수 진영은 건국의 정신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 문명 진영의 핵심 구성원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일하게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사법부 독립을 제도적으로 유지하는 국가이다. 의원내각제 공화국인 이스라엘의 의회(크네세트)는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차례의 쿠데타나 불법 권력 장악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이는 중동 전체를 통틀어 키프로스와 함께 가장 양호한 민주주의 지수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한국의 건강한 우파 세력 역시 이 진영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선교의 결과물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건국의 정신과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 세력이 이 문명 진영의 동아시아 파트너이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신앙을 지켜왔다는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2. 전체주의적 결합 세력의 등장 반대편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이 진영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워키즘, LGBTQ 이데올로기, 급진 페미니즘, 환경 급진주의, 이슬람 전체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들(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하지만 실질적으로 결탁한 집합체이다. 이들 세력이 하나로 묶이는 논리는 단순하다. 공통의 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적은 바로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서구 자유민주주의 질서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념적 차이—예컨대 이슬람 전통주의와LGBTQ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다—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 헤게모니"라는 공동의 표적 앞에서 전략적 동맹을 맺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통의 적 앞에서 연합하는 것—이것이21세기 전체주의 연합의 핵심 작동 원리다." 국제 정치 층위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이 이른바"반서방 연대"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의2026년 국제정세전망(2026년1월)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은"미국의 동맹 네트워크 내 불안감을 이용해 권위주의 체제들 간의 결속을 모색하는 한편,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2025년7월 제17차BRICS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의 이란 핵시설 타격과 가자 지역 작전에 대한 규탄이 이루어지면서 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재확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가치 전쟁 구도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협조해야 할 동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중-러 3각 연대가 가시적 형태로 공고화되면서,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Ⅲ. 이슬람화와 정체성의 위기: 유럽이 보내는 경고 1. 인구 통계가 말하는 미래 유럽의 이슬람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2017년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약2,577만 명으로 전체 유럽 인구의 4.9%였다. 주목할 점은 이 수치가 2050년까지 어떻게 변화하느냐이다. 퓨 리서치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민을 전혀 받지 않는"제로 이민" 시나리오에서도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자연증가만으로 7.4%까지 상승한다. 현재 수준의 이민이 유지될 경우 11.2%, 2015~16년의 대규모 난민 유입이 계속될 경우 최대 14%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14% 시나리오대로라면 스웨덴의 경우 전체 인구의30% 이상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 국가별로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 킹스칼리지 런던 국제급진화연구센터(ICSR) 발표에 따르면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 비율이9.19%로 가장 높고, 이어 스웨덴 9.15%, 오스트리아 9.12%, 네덜란드 8.48%, 벨기에 7.87%, 영국 7.18% 순이다. 영국의 경우2001년(152만 명)에서 2021년(380만 명)으로 20년 만에 무슬림 인구가2.5배 이상 증가했으며, 런던의 무슬림 비율은 이미 15%에 근접했다. 단순한 인구 증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동화 거부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사이자 연구자인 유해석 박사(영국FIM 국제대표)는 수년간의 현지 연구를 통해 다음 패턴을 발견했다: 무슬림들이 한 국가에 정착하면, 이민·다산·현지인과의 결혼·개종의 4가지 방식을 통해 세를 불려나간 뒤, 국가의 법이 아닌 자신들의 법 체계인 샤리아(Sharia) 법으로 생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샤리아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조차 진입을 꺼리는 무슬림 자치 구역(no-go zone)이 형성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유해석 박사는 또한 교도소 통계를 근거로 유럽 사회의 이슬람화가 사회 통합 실패를 수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수감자의 약50%, 이탈리아45%, 영국40%가 무슬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사회경제적 소외와 차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통합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주는 지표임은 분명하다. 3. 서구 기독교 정체성의 붕괴와 이슬람의 전진 왜 유럽은 이슬람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그 핵심 원인은 서구 엘리트들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중동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늦어도21세기 말에 유럽의 인구는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며, 유럽은 서부 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지적한 핵심은 유럽이 이슬람의 공세에 밀리는 이유가 이슬람의 힘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의 정체성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2024년에는 개신교의 종주국 독일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퓨 리서치의 미래 종교 예측(2015년 발표)에 따르면 2010~2050년 사이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약1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 내 기독교인들이 2010~2050년 사이 2,382만 명이나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예측되는 반면, 같은 기간 무슬림 인구는 유럽에서 6%에서10%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비대칭적 변화의 배경에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앙 이탈이 있다. 기독교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이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견지한다. 기독교 문명은 자기 부정의 이데올로기 - 워키즘, 탈식민주의, 비판 이론 - 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해체하는 중이고, 이슬람은 그 공백으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Ⅳ. 워키즘: 기독교 문명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 1. 워키즘의 기원과 본질 "워키즘(Wokeism)"이라는 용어는 "깨어 있다(woke)"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인종주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의미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변질되었다. 2017년 옥스퍼드 사전에 "사회적 불의, 특히 인종주의에 대한 경각심"으로 등재되며 시대적 용어로 정착했다. 오늘날 보수주의 진영에서 워키즘을 비판적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서구 사회와 제도, 문화로 인해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격차가 발생했으므로 서구 문명은 본질적으로 부패했다고 보는 세계관." 이 관점에서 워키즘은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억압받는 자"로 분류하며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재편한다. 더 나아가 현존하는 사회의 모든 표현을"파괴"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워키즘이 심각한 이유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정치적 좌파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용어를 도용하여 반기독교적 의제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이 신앙적 각성을 세속적 사회운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사탄이 성경적 용어를 이용하여 그 의미를 역전시키는 전형적인 수법과 같다고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경고한다. 2. 워키즘이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력 워키즘의 실질적 파괴력은 이미 서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미군은 2024년1941년 이후 최악의 신병 모집난을 겪었다.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LGBTQ 이데올로기를 군에 도입한 결과 전통적 군인 정신이 훼손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기업 영역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와 워키즘이 결합하여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직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같은 문화 산업에서는 동성애·성소수자 콘텐츠가 어린이용 작품에도 일상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교회 안으로도 워키즘이 침투했다. 독일의 진보잡지 슈피겔의 르네 피스터 기자는 2024년 출간한 저서 『잘못된 단어들』에서 워키즘이 좌파마저 독단론으로 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주류 교단 일부는 워키즘과의 타협 속에서 동성 결혼 축복, 젠더 이데올로기 수용, 비판적 인종이론(CRT) 채택으로 나아갔다. 이 교단들에서 신자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트럼프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워키즘은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민주당원조차 2024년 대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를 워키즘으로 지목했다(물론 실제적인 원인은 부정선거라는 의혹과 주장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그러나 워키즘의 영향력은 교육 기관, 언론, 문화 산업에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도 이 이데올로기가 빠르게 유입되는 중이다. 3. 이슬람과 워키즘의 기이한 동맹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 중 하나는 이슬람과 워키즘의 전략적 연대이다. 이슬람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 동성애 사형, 신정(神政) 정치를 지지하는 반면, 워키즘은 페미니즘, LGBTQ 권리, 세속주의를 옹호한다. 이 두 세력은 사실상 가장 상극에 있는 이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연합 전선을 형성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공통의 적, 즉 서구 기독교 문명이다. 워키즘은 이슬람 이민자를 "억압받는 소수자"로 프레이밍하여 보호하고, 이슬람은 그 프레임을 이용해 서구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한다. 실제로 서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관련 시위에서 진보 좌파 학생 단체와 이슬람 학생 단체가 공동 행동에 나서는 사례는 이 기이한 동맹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워키즘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로 설명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해체라는 목표 앞에서, 상극의 이념들이 전술적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기이한 동맹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워키즘을 친이슬람적 이민 정책, 반이스라엘 정서, 기독교 역사 부정, 전통 가족 해체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나의 패키지로 이해해야 한다. Ⅴ. 이스라엘: 문명 충돌의 최전선 1. 왜 이스라엘인가: 지정학적·문명적 의미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단순한 동맹 관계나 성경적 예언론의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문명적 관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중동이라는 전체주의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쐐기 역할을 하는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쿠데타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강하게 유지되어—2024년1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네타냐후 연립정부가 추진한 사법개혁 법안을 무효로 판결하기도 했다. 중동의 지도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명확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1979) 이후 미국 지정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신정(神政) 국가이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레바논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무장세력으로 인해 사실상 이란의 영향권 내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왕정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군주제이다.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가 작동하는 국가이다. 2. 반이스라엘 정서의 이념적 계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반이스라엘 정서(BDS 운동, 유엔의 반이스라엘 결의안 등)는 표면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이념적 계보를 추적하면 공산주의·좌파 이데올로기 및 이슬람 전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체계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이 제3세계 해방운동과 연결되었고, 이 흐름이 오늘날의 진보 좌파 진영에 이어지고 있다. 워키즘 이데올로기에서 이스라엘은 "식민지 억압자"로 프레이밍된다. 이 서사에서 유대인은 "성공한 억압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피억압 소수자"이다. 워키즘이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동 내 유일한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악당이 된다. 여기에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반이스라엘 정서는 좌파와 이슬람이 만나는 가장 강력한 공유 지점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지지는 단순한 성경적 명령이나 신학적 입장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문명 진영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반이스라엘 정서에 동조하는 것은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서사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보수 진영이 이스라엘을 전략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Ⅵ. 세계 종교 인구의 변화와 기독교의 과제 세계 종교 인구의 장기 추세도 이 대결 구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1970년 약 5억7천만 명이었던 무슬림 인구는 2024년 약20억3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50년에는 약 28억6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기독교 인구는 12억2천만 명에서 26억3천만 명으로 2.7배 증가하지만, 무슬림은 무려5배가 증가한다. pixabay.com 특히 충격적인 것은 지역별 분포의 변화이다. 기독교 문명의 본거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2024년에서 2050년 사이 감소세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되며, 북미에서도 2010~2050년 사이 약2,770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추산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기독교인 약 6,605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해 무종교인이 6,149만 명 유입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문명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반면 이슬람은 높은 출산율(2010년 기준 합계출산율 3.1명, 기독교는 2.7명)과 견고한 정체성 유지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은 그 공백을 파고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상황도 우려스럽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00년 후 한국 인구가 71%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며, 229개 시군구 중 200개 시군구가 폐지 또는 존폐 위기에 놓일 것으로 예측됐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불가피하게 이민 수용 압력을 증가시키고, 이는 이슬람 인구 유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문화막시즘으로 침투한다. Ⅶ. 신냉전과 한국교회의 지정학적 선택 1. 중·러·북의 반서방 연대와 한반도 2026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사실상 신냉전 구도로 재편됐다. 2026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과 쇼이구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 간의 회담에서 양국은 핵심 이익에 대한 상호 지지를 재확인하고 글로벌 지정학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메커니즘 격상을 선언했다. 세종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중남미·중동·동북아시아는 반서방 연대와 자유민주 진영이 정면 충돌하는 3대 전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구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었고, 서방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이 단행되면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는 더욱 공고화됐다. 특히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면서 북-러 밀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2026년1월에는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강경 성명을 내면서 미-이란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이란의 이슬람 신정 체제는 반서방 연대의 핵심 축으로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편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함으로써 중동 전체를 전쟁의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다. 2. 한국 우파 기독교의 정치적 선택 이 문명 충돌의 구도에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는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가치의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 기독교 문명 기반의 가치—인간 존엄, 가정의 신성성, 신앙의 자유, 생명 존중—를 수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내에서도 이 구도는 명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쟁, 동성결혼 합법화 압력, 과격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 이슬람 할랄 인증의 확산, 좌파 진영의 반이스라엘 정서 조장—이 모두가 동일한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국내적 발현이다. 한국교회는 이 각각의 이슈들을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거대 흐름의 국내적 가지들로 인식해야 한다. Ⅷ. 음모론의 함정과 전략적 분별력 이 거대한 세계 정국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음모론의 함정이다. 유대 자본의 세계 지배 음모론, 글로벌 엘리트의 비밀 지배 시나리오,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모든 것을 계획·조종하고 있다는 극단적 단순화—이런 음모론은 실제로 더 중요한 이슈를 흐리게 만든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세세한 음모론의 진위 여부에 매몰되어, 정작 지금 당장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핵심 질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아무리 연합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전제이다. pixabay.com 따라서 음모론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이렇다. 첫째, 구체적인 음모론의 세부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다. 둘째, 큰 그림—즉 전체주의 결합 세력이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려 한다는 거시적 구도—은 냉철하게 인식한다. 셋째, 음모론이 제기하는 개별 이슈들의 진위를 분별하되, 그것이 나의 가치적 입장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지, 모든 음모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유대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죄악이었다. 유대인 개인이나 유대 자본에 대한 일반화된 부정적 프레이밍은 성경적으로도 잘못되었고, 실천적으로도 이슬람·좌파의 반이스라엘 연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전략적 입장을 음모론과 분리하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이다. Ⅸ. 성경적 보수주의: 응전의 신학적 기반 1.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 이 모든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정치적 보수주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 문명 가치에 근거한 보수주의이다. 정치적 잡음이 많고 보수 진영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는 정책과 세력을 분별력 있게 지지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성경적 보수주의의 기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생명과 가정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지하는가? 낙태 권리 확대, 동성결혼 합법화,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에 반대하는 입장이 기독교 문명의 기본값이다. 둘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차별금지법이나 혐오표현금지법의 형태로 기독교적 발언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질서를 지지하는가? 권위주의적 전체주의—공산주의, 이슬람 신정 정치, 좌파 전체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2. 에베소서 6장의 시대적 적용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장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엡6:12)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을 향한 공세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나 이념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의 연합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교회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 기도, 성결한 삶, 복음의 증거, 공동체의 연대 - 이것이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29:7)고 명령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3.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다섯 가지 자세 첫째, 세계 정국에 대한 성경적 해석 능력을 길러야 한다. 뉴스와 시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의 렌즈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정학·사회·문화에 대한 성경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선거, 입법, 공공 정책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시민적 참여가 요구된다. 이것은 정당 정치에의 맹목적 편입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시민 참여이다. 셋째, 이슬람화와 워키즘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사회적 압력 앞에 침묵하는 것은 묵시적 동조이다. 성경적 진리는 사랑으로, 그러나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강화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된 민족이다. 반이스라엘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도록 성경적 가르침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 내부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거대한 전체주의 연합에 맞서는 힘은 교회의 연합에서 나온다. 신학적 차이와 교파적 경계를 넘어 기독교 문명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교회들이 연대해야 한다. Ⅹ. 결론: 두려워하지 말고, 분별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이 승리의 확신 위에 서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그것을 해체하려는 공산주의·좌파·워키즘·이슬람 전체주의의 결합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정치·경제·문화·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석의 최종 목적은 두려움이 아니다. 분별이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무리 강대한 전체주의 연합이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거대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분별력 있는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읽되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다. 음모론의 미혹에 빠지지 않되, 실제적 위협을 직시한다. 정치적 편협함에 갇히지 않되, 성경적 가치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슬람을 두려워하지 않되, 이슬람화의 문명적 함의를 냉철하게 인식한다. 워키즘의 위선을 분명히 보되,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문명 보루이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선교의 열매 중 하나인 한국교회가21세기 문명 충돌의 시대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굳건히 서는 것—이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분별하라. 그리고 서라. ■ 주요 참고 자료 및 데이터 출처 -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유럽 무슬림 인구 전망」, 2017 / 「미래 종교 예측(2010~2050)」, 2015 - 아산정책연구원, 「2026년 아산 국제정세전망: 심화되는 무질서」, 2026.1 / 「2024 국제정세전망: 연대결성」, 2023.12 -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 「1970~2050년 기독교·이슬람 인구 예측」, 2024 - 유해석,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킹스칼리지 런던ICSR, 「유럽 국가별 무슬림 비율」, 2019 - 르네 피스터(독일 슈피겔), 『잘못된 단어들』(Falsche Worte), 2024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1996 / 버나드 루이스, 유럽 이슬람화 경고 발언 - 전국인력신문, 「중러 연대와 한국의 선택」, 2026.2 / 민주주의평판지수(DP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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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pixabay.com/ko/photos 1. 문제의 출발점: 왜 이 전쟁을 둘러싼 인식이 갈리는가 2024년 이후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시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되기도 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진실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는 단순한 시각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 전제, 이념적 지향, 그리고 정보 선택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란 문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국제 핵 질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중동의 종파 갈등, 에너지 지정학, 미국 패권의 향방,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가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환원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한쪽은 이것을 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으로 축소하고, 다른 한쪽은 이란의 위협성만을 부각해 군사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한다. 어느 쪽도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는 오랫동안 두 흐름이 공존해왔다. 하나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 신학의 흐름이다. 이 두 흐름은 국내 정치적 사안에서도 자주 충돌했지만, 이란과 같은 국제 분쟁 문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계열은 피해자의 시각을 앞세우고, 보수 계열은 안보와 질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교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언어로 이 복잡한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이 글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고,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교회 내 두 시선의 신학적 근거를 점검한 후, 기독교적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말할 때,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복잡한 국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교회의 목소리가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발언은 더욱 엄격한 지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2. 이란 정권의 실체: 간과되거나 축소되는 현실 (1) 신정 독재 체제의 구조와 본질 이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사실은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최고지도자(라흐바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의 종교 권위자이자 정치 권력자로서, 군·사법·방송·외교·안보 전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 이념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권력이 다시 종교 이념을 강요하는 이중 구조다. 대통령과 의회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 후보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선거의 실질적 경쟁성을 박탈한다. 즉, 이란의 선거는 민주주의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치적 반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모두 심각하게 제한된다. 공개 처형은 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집행된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이란의 처형 건수와 방식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치범,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들이 사형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현실은 이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 종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란 헌법은 명목상 일부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배교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란 내 지하 교회 신자들은 끊임없는 위협과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 적발될 경우 체포와 투옥, 고문을 감수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이란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맥락이다. (2) 여성 인권 문제와 국제적 파장 2022년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22세 여성이 히잡 착용 규정 위반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전역에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수백만 명이 저항에 나섰다. 이란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란 신정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들은 이란에서 의복 규정 준수를 강제받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 결혼, 이혼, 여행, 취업 등 다양한 법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이슬람 형법에 따라 여성의 증언 효력은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법적으로 제도화한 인권 침해다. 이 점을 평가에서 제외할 때, 이란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왜곡된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여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히잡을 공개적으로 벗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란 국내의 인권 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내부의 저항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등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해야 한다. (3) 국제적 위협 행위와 대리전 구조 이란의 문제는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다양한 친이란 민병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중동 전역의 무장 세력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이 세력들은 이란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일종의 대리 전력이며, 이란은 이들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도 지역 내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 이것이 소위 '그림자 전쟁(Shadow War)' 혹은 '대리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국제사회의 오랜 우려 사항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합의(JCPOA)에 따른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평화적 핵 활용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할 경우 중동의 안보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여러 아랍 국가들도 핵 보유를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즉, 이란의 핵 문제는 이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태도도 명백하다. 이란 최고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소멸을 선언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실행된 목표다. 헤즈볼라를 통한 레바논 북부에서의 공격,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통한 가자 지구에서의 긴장, 시리아를 통한 이란 군사 인프라 구축 등은 이 목표를 향한 구체적 행동들이다. (4) '약자 프레임'의 한계와 위험 이러한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민간인 피해와 특정 시설 폭격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맥락을 제거한 감정 정치다. '약자 프레임'은 이란 정권의 실제 행위와 책임을 은폐하고, 복잡한 도덕적 판단의 공간을 차단한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중동 전역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노출된 국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은 오류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 성명들이 이란 정권의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군사행동의 결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에 가까워진다. 예언자적 교회의 목소리는 특정 진영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편드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지만, 약자처럼 보이는 자를 무조건 편드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pixabay.com/ko/photos 3. 전쟁의 원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긴장 (1) 핵 문제의 역사와 현재 이란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우려 대상이었다. 2003년 이란이 비밀 핵 시설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 끝에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일명 이란 핵합의를 타결했다. 핵합의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제한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압박' 전략을 내세우며 이란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은 이에 대응하여 우라늄 농축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바이든 행정부가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성과 없이 장기화되었고,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핵무기 개발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다. 이란은 약속을 어겼고, 미국은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외교사적 맥락 없이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결말만 보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현재 시점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불성실이다. (2) 대리전 구조와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갈등은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복잡한 대리전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왔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후티를 통해 예멘과 홍해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군사 자산에 대한 공습을 수시로 단행해왔고, 이란 핵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책임을 단순히 공격을 가한 쪽에만 돌리는 것은 구조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이 민간 거주 지역에 무기를 은닉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책임은 해당 지역에 무기를 배치한 세력에도 있다. 국제 인도주의법은 이른바 '인간 방패' 사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종파 갈등도 중동 불안정의 핵심 요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 분쟁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지에서 시아파 집단을 지원한다. 이 종파 경쟁이 중동 전역의 내전과 갈등을 심화시켜왔다는 사실은 이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맥락이다. (3)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와 윤리적 복잡성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자국의 존립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이란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이스라엘 소멸 발언,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통한 군사적 압박, 이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의 핵 개발 완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중동 지역의 실제 안보 상황을 배경으로 한 실존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평가가 이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완전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란의 이스라엘 소멸 선언과 그를 향한 실제 행동에 대한 동등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쪽에 대한 비판만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향이다. 4. 트럼프의 전략: 단순한 전쟁광인가, 계산된 압박인가 (1) 최대 압박 전략의 구조와 논리 도널드 트럼프의 대이란 정책은 단순히 '호전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불리며, 이는 군사력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이란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이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수백 개의 추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란의 석유 수출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란 화폐인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란 정권 내부에서도 압박의 효과가 감지되었으며,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트럼프 전략의 지지자들은 이 압박이 없었다면 이란이 더 빠르게 핵 개발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도 한계가 있다. 경제 제재로 인한 고통은 이란 정권보다 이란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크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약품과 의료 기기 등 인도주의적 품목에 대한 제재 면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란이 이런 물품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경제적 고통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하는 전략은 일반 시민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 한계도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2) 제한적 군사행동과 전략적 의도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가장 주목받은 군사행동은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작전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대리전 전략을 총괄하는 인물로,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민병대, 후티 등에 대한 지원과 지휘를 담당해온 실세였다.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미국 기지를 공격해 미국 시민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이 작전이 단행되었다. 이 작전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이란이 전면전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제한적 대응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 미사일 공격은 사전에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며, 이란이 실제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즉,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무모한 전쟁 행위가 아니라, 이란의 확전 의지를 시험하고 억제력을 재설정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3) 미디어 왜곡과 교회의 인식 문제 일부 한국교회 성명서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전쟁 유발자'로 규정하고, 그의 대이란 정책을 무조건적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특정 시각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결과다. 진보적 성향의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프레임화해왔으며, 그 서사가 한국교회의 일부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분별은 미디어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전하지 않는 것을 함께 물어야 한다.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오류를 범했고,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때, 이란 정권의 행위와 책임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균형을 잃는다. 교회는 강대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지적이 독재 정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pixabay.com/ko/photos 5. 국제정세 속에서 본 이란 충돌: 더 큰 구조를 보라 (1) 미국 대 반미 축의 구조 이란을 둘러싼 갈등은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양자 문제를 넘어, 더 큰 국제 질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의 대이란 제재에 반대하며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강화해왔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제재를 피해 수입함으로써 이란 경제를 간접 지원해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반미 세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이란 문제를 다루면, 왜 서방 세계가 이란의 핵 개발을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지, 왜 이란에 대한 제재가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아키텍처의 문제로 다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 에너지와 지정학: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의미 이란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 수출량의 약 20~30%가 통과한다.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즉각적이고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 문제는 단지 중동 지역의 안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문제다. 한국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며, 그 수송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란과의 군사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책임 있는 시민적 신학의 요소다. 6. 한국교회의 두 시선: 신학적 구조 분석 (1) 평화 절대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한계 한국교회 내 진보적 흐름에서 이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평화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원수 사랑과 비폭력으로 요약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는 이 입장의 대표적 성경적 근거다. 따라서 어떤 군사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입장의 강점은 전쟁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강자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려는 비판적 저항성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첫째, 악의 현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비폭력적 저항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앞에서 무저항은 옳은 응답이었는가? 둘째, 구조적 불의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억제마저 거부하는 것은 때로 악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는다. 평화 절대주의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의 차원과 교회의 공적 증언의 차원에서는 더 복잡한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화 선포는 개인적 비폭력의 도전이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지만, 그것이 곧 현실 정치에서 모든 강제력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응답이었다. (2) 정의 전쟁론의 전통과 적용의 한계 다른 한편, 한국교회의 보수적 흐름에서는 정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관점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 전쟁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거치며 발전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이 이론은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매우 엄격한 조건들을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정당 전쟁의 조건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과 전쟁 수행의 정당성(jus in bello)이다. 전자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합법적 권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등을 요구한다. 후자는 민간인 보호, 비례적 무력 사용, 금지된 무기 사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이 조건들은 매우 엄격하며, 현실의 전쟁 중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이 엄격한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라는 대원칙만을 내세워 특정 군사행동을 성급하게 정당화하는 경우다. 이란 정권이 분명히 위험하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곧 이란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구체적 행동은 정당 전쟁의 모든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될 때, 보수적 교회의 목소리는 국가 권력의 대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3) 두 시선의 공통된 문제: 진실의 일부만을 보는 것 흥미롭게도, 평화 절대주의와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라는 두 극단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평화 절대주의는 이란의 위협과 책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는 군사행동의 부당한 결과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어느 쪽도 전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 있지 않다. 기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전체 진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만 실현된다. 교회가 이 전쟁 문제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학적·이념적 편향이 진실의 인식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7. 문제의 핵심: 균형 상실과 감정 정치 (1) 성명서의 구조적 편향 분석 이란 문제를 다루는 일부 한국교회 단체들의 성명서를 분석하면 공통적인 구조적 편향이 드러난다. 첫째, 원인 제거다. 이란 정권의 위협적 행위, 핵 개발, 대리전 전략, 국내 억압 등은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되어 다루어진다. 반면 군사행동의 결과, 특히 민간인 피해와 인프라 파괴는 상세하고 감정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군사행동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반응만을 갖도록 유도한다. 둘째, 도덕적 단순화다. 복잡한 도덕적 현실이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한쪽은 절대 악으로, 다른 쪽은 절대 피해자로 규정된다. 이 구도에서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들에게 행한 악은 사라진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가한 측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악마화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연극이다. 셋째, 감정 중심 서술이다. 학교, 병원, 어린이, 피난민 등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서술의 중심을 이루며, 구조적·법적·역사적 책임 분석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공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도덕적 책임의 방기다. 특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선포하는 성명서라면, 그것은 훨씬 더 엄격한 지적 성실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2) 맥락 없는 인도주의의 위험 인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그 생명과 존엄은 보호받아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은 어디서 누가 행했든 비극이며, 교회는 그 비극에 민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인도주의'는 오히려 더 큰 폭력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란 정권이 핵을 개발하고, 중동 전역에 대리 세력을 통해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충돌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가? 단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없는 평화적 현상 유지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재앙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없는 인도주의는 결국 현실 회피가 된다. 나아가, 인도주의적 우려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란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소수 종교인들이 박해받고, 정치범들이 처형될 때 한국교회 단체들은 얼마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란 정권의 내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념적 선택이다. pixabay.com/ko/photos 8. 그렇다면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 전쟁 윤리의 재검토 (1) 성경의 긴장: 평화와 질서 사이 기독교 윤리는 전쟁 문제에 있어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과 그 결과에 대한 탄식도 담고 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 건축의 영광을 허락받지 못했다(대상 22:8).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사람으로, 원수 사랑과 폭력 거부를 가르치셨다.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이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했다.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과 '그것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롬 13:4)라는 말씀이 모두 정경 안에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모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긴장 속에서 신학적 판단은 더욱 섬세해야 하며, 어느 한 구절을 절대화하여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2) 정당 전쟁의 조건과 현실 적용 전통적 정당 전쟁 이론은 다음의 조건들을 제시한다. 정당한 이유(just cause)란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의도(right intention)란 보복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라 선의 달성과 악의 억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legitimate authority)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예상되는 선이 악을 초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에 적용할 때, 쉬운 결론은 없다. 이란 정권의 위협과 핵 개발은 '정당한 이유'의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외교적 수단이 정말 소진되었는가? 제재가 충분한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가? '비례성' 조건과 관련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보다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큰 갈등의 촉발점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으며, 교회는 이 불확실성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정당 전쟁론이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도, 무조건적 반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 조건들을 성실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없이 '평화를 원하니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이란이 위험하니 군사행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신학적 판단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9. 기독교적 평가: 무엇이 옳은 태도인가 (1) 진실을 전체로 보는 용기 기독교적 판단의 첫 번째 요건은 진실을 부분적으로 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란 정권의 억압적 성격, 대리전 전략, 핵 개발 의혹은 진실이다. 민간인의 고통, 전쟁의 파괴적 결과,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도 진실이다. 국제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강대국의 오류 가능성, 전쟁의 비의도적 결과도 진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다. 선택적 진실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즉 '침묵을 통한 거짓(lying by omission)'은 직접적 거짓말 못지않게 사람을 기만한다. 교회가 이 방식으로 공적 성명을 발표하거나 설교를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완전한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다. (2) 정의와 사랑의 통합 기독교 윤리에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가 사랑의 사회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차갑고 억압적인 율법주의가 되며, 정의 없는 사랑은 구조적 불의를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된다.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란 국민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한 정의로운 비판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억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균형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붙드는 것은 항상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판단이 형성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동시적 표현이었다.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는 분별자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분별(discernment)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소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영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다. 이란 전쟁 문제에서 교회의 소명은 특정 정치 세력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PR 창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의 종교적 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그 어느 정치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기준으로 모든 편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모습이다. 분별은 또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즉각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정보 수집과 기도와 신학적 성찰 이후에 나오는 신중한 판단이, 비록 늦더라도 훨씬 더 큰 영적 무게를 갖는다. 교회가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반응하려 할 때, 그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평론가가 되는 길이다. (4) 누구의 편에 서는가: 근본적 질문 이 모든 논의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국의 편인가, 이란의 편인가? 이스라엘의 편인가, 팔레스타인의 편인가? 강자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응답은 이 질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이란 국민의 자유를 원하며,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원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과 예멘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의 의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의 불의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지만, 불의한 평화보다는 고통스러운 정의를 선택한다. 이 입장은 정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진영도 교회를 온전히 자기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권력 구조 안에 흡수되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자리다.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이스라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섰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10. 전쟁의 전망과 교회의 과제 (1) 세 가지 시나리오 이란을 둘러싼 충돌의 향후 전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는 제한적 충돌의 지속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이란과 미국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 시나리오다. 사이버 공격, 표적 암살,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전투 등이 지속되는 '회색 지대' 갈등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서서히 진전되고, 국제 제재의 효과는 점점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확전 시나리오다. 어느 한쪽의 오판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전면전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거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타격을 단행하는 경우다. 이 시나리오는 중동 전역을 충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공격,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미군과 이란 간의 직접 충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셋째는 협상을 통한 현상 관리다. 이란이 경제적 압박과 내부 불만을 이기지 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거나, 강대국들이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란의 완전한 핵 개발 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핵 능력의 부분적 동결과 제재의 부분적 완화를 교환하는 중간 지점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교회의 구체적 과제 이 세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든, 교회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올바른 정보와 균형 있는 분석에 기반한 공적 발언을 해야 한다.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이란의 행위와 국제적 맥락을 함께 언급하며, 어느 편의 서사도 검증 없이 수용하지 않는 지적 성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란 국민과 중동의 모든 민간인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인도주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이란의 지하 기독교 공동체와 박해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위한 연대도 중요하다. 셋째, 이 위기가 복음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동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영원한 소망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란 내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 역설을 보여준다. 교회는 정치적 논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혼란에 응답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 평화 구조 형성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종교 자유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결론: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 이란 전쟁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완전하다. 현실은 그 어느 단어도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이란 국민은 그 억압의 피해자들이다. 군사행동은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민간인의 고통을 수반한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불의 위에 세워진 평화는 결국 더 큰 폭력의 씨앗이 된다. 교회가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명은 때로 긴장 관계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단기적 평화를 방해할 수 있다. 이 긴장들을 직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소명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교회가 어느 진영의 편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진영에 진실을 말했을 때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본회퍼는 독일의 편도, 연합국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섰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에 저항한 데즈몬드 투투는 흑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하나님의 진실의 편에 섰다. 이들은 인기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역사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떤 권력보다도 크다. 미국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어떤 국제 기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인이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국가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군사 동맹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의가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항상 이 세상의 권력 구조 너머에 있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님을 안다.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자리는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 앞에서.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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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붕괴 위험, 지정학을 넘어 영적 전환할 때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격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경제는 마비되고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주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노출돼 있다. 무엇보다 북한을 지탱해온 중국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나 군사 전략의 변화로만 본다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시는 과정, 그리고 어둠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영적 질서의 드러남으로 해석해야 한다. 산사태처럼 오는 통일 많은 이들은 통일이 단계적 대화와 협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역사와 국제정치의 현실은 다르다. 독일, 예멘, 작은 국가들의 병합 사례까지도 모두 ‘붕괴’가 먼저 찾아온 뒤에야 가능했다. 성경은 “빛과 어둠은 섞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와 전체주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통일은 이상적일 수 있으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통일은 대화로 설계되는 구조물이 아니라, 내부 붕괴가 외부 질서와 맞물리는 순간 갑작스럽게 열리는 문과 같다.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체제의 한계 북한의 붕괴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니다. 그 뿌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체제 유지의 도구로 취급한 데 있다. 농부는 생산 수치로, 아이들은 행사 도구로, 노인은 인구 숫자로만 계산되었다. 예배와 성경은 금지되었고, 생각은 통제되었다. 인간 존엄이 철저히 무너진 체제는 결국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죄로 세워진 권력과 우상화된 통치가 역사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이다. 중국의 흔들림, 북한의 비틀거림 북한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신호는 중국의 흔들림이다. 북한의 생명줄은 중국이었고, 그 그림자 권력 역시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도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개방하면 경제가 살아도 정권은 무너지고, 닫으면 정권은 유지되지만 국민 경제가 붕괴한다. 이는 북한과 동일한 딜레마다. 결국 진리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는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북한, 평행선의 대화 최근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핵 문제 때문이지만, 본질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미국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북한은 통제와 국가 우선을 말한다. 겉으로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교제할 수 없듯, 이 구조에서는 대화가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체성,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 북한과 중국의 흔들림은 한국이 체제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할 때라는 신호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거나 ‘두 국가 인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헌법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와도 충돌한다. 현 정권의 북한 체제를 존중한다는 태도는 곧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폭정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유와 양심, 예배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승인하는 것이다. 한국이 체제의 본질을 흐리면 역사의 전환기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붕괴의 영적 의미: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북한의 붕괴는 단순히 냉전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억눌린 백성들을 향해 열어가시는 해방의 시간이며,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순간이다. 북한 붕괴는 비극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가 어둠을 깨뜨리는 영적 승리의 순간이다. 북한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 산사태가 오랜 균열 끝에 무너지고, 빛이 한순간에 어둠을 몰아내듯, 역사의 전환도 그렇게 온다. 그 순간을 준비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의 체제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북한 주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북한의 붕괴는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기독교인들,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 빛 아래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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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사상 실험은 위험한 실험
칼럼/양봉식 목사(길과생명연구소 소장) 내 손에 들어온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를 읽고 느낀 바를 적어보고자 한다. 권력이 새롭게 시작되면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변함없이 이재명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겉표면에 뜬 기름을 보고 말할 뿐, 다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이다. 더구나 이재명 정부가 추구하는 것을 지지차원에서 쓴 논리적인 책처럼 보여서 좀더 상세하게 읽어보고 그것을 나누려고 한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국민주권정부’라는 구호는 듣기에 참 그럴듯하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이라는 비전도, “국민이 하나 되는 정치”라는 목표도 감성적으로는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구호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깊다. 국민이 주인이라면 권력은 어떻게 나뉘고, 책임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 ‘하나 됨’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통합의 언어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원리 자체를 다시 성찰하는 철학적 대화다. 공화주의, 진보적 이상인가 새로운 이념 포장인가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했다. 책은 6인의 학자·활동가가 참여한 좌담을 엮어, 한국 사회의 사상적 지형을 진단하며 ‘새 공화주의’를 모색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제시하는 공화주의가 단순히 제도 개혁이나 정치 구호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동향과 전망』이 제시한 것처럼, 그들은 ‘반자본주의’와 ‘반국가’의 꿈이 좌절된 시대에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혁명” 대신 공화주의적 시민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혁명 대신 광장의 시민정치로 제도권을 변혁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공화주의가 과연 자유주의의 대안일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의 재포장일 뿐일까?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려는 공화주의의 시도는 오래된 정치철학의 과제지만, 지금 이 담론은 마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포장된 또 다른 이념 실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화주의 담론의 이념적 향방 책의 필자들은 한결같이 “사상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구갑우는 반(反)자본주의 혁명의 좌절 속에서 새 공화주의를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백승욱은 자유주의 자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며, 유희석은 공화주의를 자기성찰의 도구로 본다. 장은주는 사이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극복을 말하고, 황순식은 ‘성장과 평등’이라는 이재명 정부의 모순을 지적하며 ‘비지배 자유’와 ‘호혜성’을 제시한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의견의 교차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인 방향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념적으로 보면 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자, 진보적 사회민주주의와 신좌파적 공화주의의 접목 시도로 읽힌다. 다시 말해, 이 담론은 ‘국가·시장·시민’을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정치철학 실험이지만, 동시에 기존 좌파 사상의 재구성으로도 볼 수 있다. 변형된 막시즘의 그림자 특히 “공화주의를 담지한 광장의 시민정치”라는 표현은 그람시의 ‘진지전’(hegemony war)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제도권을 전복하는 대신,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를 통해 국가를 재편하겠다는 전략은, 전통적 마르크시즘의 무장혁명 대신 ‘문화적 전복’을 택한 신(新)마르크시즘의 전략과 닮았다. 이런 맥락에서 ‘새 공화주의’는 변형된 막시즘으로 의심받을 여지를 충분히 안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정치적 비전이 이런 사상적 흐름과 맞물린다면, 그것은 단순한 통치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국민주권을 말하지만, 그 ‘국민’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적 인격의 총합이 아니라 ‘집단적 의식’의 주체로 바뀌는 순간, 공화국은 자유의 기반을 잃는다. 진정한 공화는 어디서 오는가 공화주의는 원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선을 조화시키려는 고대적 이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 그리고 자기비판적 시민의 덕성에 있다. 그것은 ‘국가를 통한 개혁’이 아니라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볼 때, 새 공화주의가 ‘시민정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특정 이념적 방향으로 시민을 재교육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형태의 통치철학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분명 새로운 사상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대화는 ‘사상을 위한 사상’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양심을 지키기 위한 대화여야 한다. 공화주의가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보완이 되려면, 권력의 집중이 아닌 분산, 이념의 선전이 아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는 사상의 실험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정권의 사상적 변명이 되거나 이념의 재포장이 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공화’를 빌미로 자유를 잃게 될 것이다. 진정한 공화는 사상이 아니라, 자기비판과 양심의 자유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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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보이지 않는 전쟁, 체제의 충돌… 경주 APEC 이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한미정상이 만나 선물을 교환하고 악수를 나누었지만, 그 이면에 일어난 협상은 한국을 위험하게 하는 일이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총성 없는 체제의 충돌 지금 세계는 조용한 전쟁 중이다. 탱크도, 미사일도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은 단순한 무역 분쟁이나 군사적 긴장 수준을 넘어섰다. 이 싸움은 ‘체제’의 충돌이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통제와 자유, 전체주의와 시민사회. 이념과 가치, 산업과 기술, 외교와 안보가 얽힌 복합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2025년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이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중 한국과의 관계를 재정의했고, 중국은 자원과 외교를 무기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 무대 뒤에서 세계 질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재편되고 있었다. 중국의 야망과 균열: 일대일로의 그림자 중국은 지난 10년간 ‘일대일로(BRI)’라는 이름 아래 세계 곳곳에 손을 뻗었다. 도로와 항만, 철도와 에너지 인프라를 건설하며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연결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경제 협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 체제를 세계로 확장하려는 전략적 시도였다. 중국은 희토류, 배터리, 태양광 등 핵심 자원을 독점하며, 자원 사슬을 통해 다른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묶어두려 했다. 실제로 희토류의 80%, 폴리실리콘의 70%, 배터리 핵심소재의 75%를 중국이 쥐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 독점 구조는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그 야망은 균열을 맞고 있다. 부동산 위기, 지방정부의 부채, 청년 실업, 소비 침체 등 중국 내부의 경제적 취약성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성장률은 3%대에 머물고, 국제 사회의 신뢰는 흔들리고 있다. 기술 봉쇄와 외교적 고립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을 점차 축소시키고 있다. 미국의 반격: 트럼프 2.0의 질서 재편 미국은 이 싸움을 단순한 패권 경쟁으로 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진영의 재편’을 목표로, 관세와 수출통제, 산업정책을 총동원하고 있다. 보편관세와 상호무역법은 동맹국들에게도 선택을 강요한다. “의무를 이행한 국가에만 혜택을 준다”는 원칙은 한국을 포함한 중간지대 국가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반도체, AI,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통제는 중국의 산업사슬을 정밀하게 봉쇄하고 있다. IRA(인플레이션감축법)와 친환경차 보조금 정책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미국은 이제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재편하는 설계자로 나서고 있다. ▲한미 정상이 겉으로는 웃지만 그의 이면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경주 APEC, 선택을 강요한 무대 2025년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그 상징적 무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중 자동차 관세 인하, 대규모 투자 패키지, 조선·원전 협력 등을 제안하며 한국을 미국 중심축에 묶으려 했다. 동시에 호주와 희토류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중국의 자원 독점 사슬을 끊으려는 전략을 펼쳤다. 중국은 이에 맞서 BRI 계약과 투자를 확대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린 수사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경주는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재편을 위한 거래의 장이었다. 한국의 선택: 전략적 편입인가 종속인가 이재명 정부는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미국과의 안보 협력도 병행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 APEC 이후, 등거리 외교의 여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한국은 이제 자유진영의 핵심 파트너로서, 조건부 혜택을 얻는 구조 속에 있다. 한국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참여하면서도, 자국의 산업·금융·인력 기반을 지켜야 한다. 반도체·HBM·소재·장비 분야에서 미국과의 투트랙 전략을 펼치고, 희토류·배터리·태양광 분야에서는 탈중국 체인을 선점해야 한다. 조선·원전·에너지 분야에서는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기술의 이익을 회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단순히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신앙적 통찰과 공적 소명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의 충돌은 사상·경제·안보를 아우르는 총체 전쟁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라는 이름 아래 전체주의적 통제가 확장되는 순간, 신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훼손된다. 교회는 자유민주주의의 장점—권력분립, 법치, 시장, 시민사회—를 공적 신앙의 무대로 이해하고,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변론해야 한다. 진리와 사실성을 회복하고, 가짜 평화와 가짜 번영을 폭로하며, 성도들에게 사실 기반의 시사 해석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의 실천: 세 가지 우선순위 첫째, 진리 교육이다. 언론, 아카데미, 청년교육을 통해 성도들에게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을 길러야 한다. 둘째, 취약계층 돌봄이다. 세계 질서의 재편은 물가·고용·산업 전환의 비용을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시킨다. 교회는 긴급구호, 직업전환, 멘토링의 공동체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소명경제(Economy of Calling)다. 직업을 소명으로 이해하게 돕고, 청년들에게 기술·언어·윤리를 통합한 사역-직업의 이원통합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시나리오별 대응 전략> ●중국 금융·부동산 쇼크: 한국은 대체 시장을 가속화하고, 교회는 실직자 지원 네트워크를 즉시 전개해야 한다. ●대만 유사·해양 충돌: 한국은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교회는 위기 커뮤니케이션과 재난 대응 매뉴얼을 구비해야 한다. ●장기 경쟁 구도: 한국은 맞춤형 FTA와 공급망 표준을 구축하고, 교회는 지역 돌봄과 청년 훈련을 상시화해야 한다. 누구의 편에 서서, 어떤 질서를 세울 것인가 경주 APEC은 선택을 강요하는 문턱이었다. 트럼프 2.0의 세계관은 ‘미국 우선’을 넘어, 자유진영 중심의 경제·안보 재배열이다. 중국은 BRI와 자원·외교로 대응하고 있지만, 부채·부동산·성장 둔화라는 내상은 깊다. 한국은 ‘종속’이 아니라 ‘편입의 대가를 극대화’하는 정교한 협상과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해석 공동체로서, 성도와 시민에게 사실과 자유의 윤리를 가르치고, 전환기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 이 싸움은 탱크와 미사일이 아니라, 사상·규범·산업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는 싸움이다. 한국은 이 전쟁에서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서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앞으로의 세계 질서는 더욱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유와 인권, 법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이 가치들을 지키고 확장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역사적 전환기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시대를 꿰뚫는 통찰과 용기를 심어주고,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을 품는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신앙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공적 신앙의 모델을 제시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이 싸움은 단순한 정치·경제·군사적 경쟁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총체적 전쟁이다. 한국과 한국교회는 이 전선에서 분명한 입장을 세우고, 지혜와 용기로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부록: 참고 문헌 및 자료 김영수, 『현대 국제정치와 동아시아 질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23. 박지훈, 『중국 일대일로 전략의 경제적 영향』,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4. 이민정, 『미국의 산업정책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고려대학교 출판부, 2025. 최은영, 『한국 외교정책의 변화와 전략적 선택』, 연세대학교 출판부, 2025. 한국교회연합, 『신앙과 사회: 한국교회의 공적 역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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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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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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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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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 2026년4월 세계 정국 분석 [길과 생명:양봉식 국장]지금 세계는 단순한 이념 갈등이나 지정학적 패권 경쟁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문명적·영적 충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한편에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질서를 해체하려는 복합적인 전체주의 연합 세력이 있다. 공산주의, 좌파 사회주의, 워키즘(Wokeism), 이슬람 전체주의 세력이 공통의 적—곧 기독교 문명—을 타도하기 위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결탁하고 있다. 본 분석기획은 이 충돌의 구도와 실체, 그리고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가 어떻게 인식하고 응전해야 할 것인지를 심층 검토한다. Ⅰ. 서론: 문명의 충돌인가, 영적 전쟁인가 20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된 지 불과35년, 21세기 세계는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명 충돌의 전선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경제적 패권 다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기초 가치—인간의 존엄, 가족의 신성성, 국가의 정체성, 신앙의 자유—를 둘러싼 전쟁이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하버드 대학교의 고(故)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는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21세기 세계의 주요 갈등이 이념 간이 아닌 문명 간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특히 이슬람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그로부터3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헌팅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선이 복합화·다층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 정국을 단순히 지정학적 대결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 대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엄"을 전제한 기독교 문명과, 그 전제를 파괴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 사이의 영적 싸움이다. 한국교회는 이 구도를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지, 어떤 가치 위에 서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시점이다. Ⅱ. 전 세계적 갈등의 양대 구도: 두 문명의 충돌 1. 기독교 문명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비롯된다는 성경적 인식,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청교도적 정치관,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세속 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적 유산—이 모두가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 오늘날 이 문명 진영의 핵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비록 많은 내부 모순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헌법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보호하는 국가이다. 트럼프2기 행정부(2025~)는 출범과 함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정책의 방향으로 채택하는 신호를 보냈다. 헤리티지 재단이 주도하는 프로젝트2025(Project 2025)에는 기독교 문명 가치에 기반한 정부 재편 구상이 담겨 있다. 이를 진보 진영은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보수 진영은 건국의 정신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 문명 진영의 핵심 구성원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일하게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사법부 독립을 제도적으로 유지하는 국가이다. 의원내각제 공화국인 이스라엘의 의회(크네세트)는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차례의 쿠데타나 불법 권력 장악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이는 중동 전체를 통틀어 키프로스와 함께 가장 양호한 민주주의 지수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한국의 건강한 우파 세력 역시 이 진영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선교의 결과물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건국의 정신과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 세력이 이 문명 진영의 동아시아 파트너이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신앙을 지켜왔다는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2. 전체주의적 결합 세력의 등장 반대편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이 진영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워키즘, LGBTQ 이데올로기, 급진 페미니즘, 환경 급진주의, 이슬람 전체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들(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하지만 실질적으로 결탁한 집합체이다. 이들 세력이 하나로 묶이는 논리는 단순하다. 공통의 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적은 바로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서구 자유민주주의 질서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념적 차이—예컨대 이슬람 전통주의와LGBTQ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다—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 헤게모니"라는 공동의 표적 앞에서 전략적 동맹을 맺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통의 적 앞에서 연합하는 것—이것이21세기 전체주의 연합의 핵심 작동 원리다." 국제 정치 층위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이 이른바"반서방 연대"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의2026년 국제정세전망(2026년1월)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은"미국의 동맹 네트워크 내 불안감을 이용해 권위주의 체제들 간의 결속을 모색하는 한편,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2025년7월 제17차BRICS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의 이란 핵시설 타격과 가자 지역 작전에 대한 규탄이 이루어지면서 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재확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가치 전쟁 구도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협조해야 할 동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중-러 3각 연대가 가시적 형태로 공고화되면서,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Ⅲ. 이슬람화와 정체성의 위기: 유럽이 보내는 경고 1. 인구 통계가 말하는 미래 유럽의 이슬람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2017년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약2,577만 명으로 전체 유럽 인구의 4.9%였다. 주목할 점은 이 수치가 2050년까지 어떻게 변화하느냐이다. 퓨 리서치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민을 전혀 받지 않는"제로 이민" 시나리오에서도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자연증가만으로 7.4%까지 상승한다. 현재 수준의 이민이 유지될 경우 11.2%, 2015~16년의 대규모 난민 유입이 계속될 경우 최대 14%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14% 시나리오대로라면 스웨덴의 경우 전체 인구의30% 이상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 국가별로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 킹스칼리지 런던 국제급진화연구센터(ICSR) 발표에 따르면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 비율이9.19%로 가장 높고, 이어 스웨덴 9.15%, 오스트리아 9.12%, 네덜란드 8.48%, 벨기에 7.87%, 영국 7.18% 순이다. 영국의 경우2001년(152만 명)에서 2021년(380만 명)으로 20년 만에 무슬림 인구가2.5배 이상 증가했으며, 런던의 무슬림 비율은 이미 15%에 근접했다. 단순한 인구 증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동화 거부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사이자 연구자인 유해석 박사(영국FIM 국제대표)는 수년간의 현지 연구를 통해 다음 패턴을 발견했다: 무슬림들이 한 국가에 정착하면, 이민·다산·현지인과의 결혼·개종의 4가지 방식을 통해 세를 불려나간 뒤, 국가의 법이 아닌 자신들의 법 체계인 샤리아(Sharia) 법으로 생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샤리아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조차 진입을 꺼리는 무슬림 자치 구역(no-go zone)이 형성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유해석 박사는 또한 교도소 통계를 근거로 유럽 사회의 이슬람화가 사회 통합 실패를 수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수감자의 약50%, 이탈리아45%, 영국40%가 무슬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사회경제적 소외와 차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통합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주는 지표임은 분명하다. 3. 서구 기독교 정체성의 붕괴와 이슬람의 전진 왜 유럽은 이슬람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그 핵심 원인은 서구 엘리트들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중동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늦어도21세기 말에 유럽의 인구는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며, 유럽은 서부 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지적한 핵심은 유럽이 이슬람의 공세에 밀리는 이유가 이슬람의 힘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의 정체성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2024년에는 개신교의 종주국 독일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퓨 리서치의 미래 종교 예측(2015년 발표)에 따르면 2010~2050년 사이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약1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 내 기독교인들이 2010~2050년 사이 2,382만 명이나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예측되는 반면, 같은 기간 무슬림 인구는 유럽에서 6%에서10%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비대칭적 변화의 배경에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앙 이탈이 있다. 기독교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이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견지한다. 기독교 문명은 자기 부정의 이데올로기 - 워키즘, 탈식민주의, 비판 이론 - 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해체하는 중이고, 이슬람은 그 공백으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Ⅳ. 워키즘: 기독교 문명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 1. 워키즘의 기원과 본질 "워키즘(Wokeism)"이라는 용어는 "깨어 있다(woke)"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인종주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의미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변질되었다. 2017년 옥스퍼드 사전에 "사회적 불의, 특히 인종주의에 대한 경각심"으로 등재되며 시대적 용어로 정착했다. 오늘날 보수주의 진영에서 워키즘을 비판적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서구 사회와 제도, 문화로 인해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격차가 발생했으므로 서구 문명은 본질적으로 부패했다고 보는 세계관." 이 관점에서 워키즘은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억압받는 자"로 분류하며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재편한다. 더 나아가 현존하는 사회의 모든 표현을"파괴"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워키즘이 심각한 이유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정치적 좌파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용어를 도용하여 반기독교적 의제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이 신앙적 각성을 세속적 사회운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사탄이 성경적 용어를 이용하여 그 의미를 역전시키는 전형적인 수법과 같다고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경고한다. 2. 워키즘이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력 워키즘의 실질적 파괴력은 이미 서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미군은 2024년1941년 이후 최악의 신병 모집난을 겪었다.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LGBTQ 이데올로기를 군에 도입한 결과 전통적 군인 정신이 훼손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기업 영역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와 워키즘이 결합하여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직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같은 문화 산업에서는 동성애·성소수자 콘텐츠가 어린이용 작품에도 일상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교회 안으로도 워키즘이 침투했다. 독일의 진보잡지 슈피겔의 르네 피스터 기자는 2024년 출간한 저서 『잘못된 단어들』에서 워키즘이 좌파마저 독단론으로 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주류 교단 일부는 워키즘과의 타협 속에서 동성 결혼 축복, 젠더 이데올로기 수용, 비판적 인종이론(CRT) 채택으로 나아갔다. 이 교단들에서 신자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트럼프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워키즘은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민주당원조차 2024년 대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를 워키즘으로 지목했다(물론 실제적인 원인은 부정선거라는 의혹과 주장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그러나 워키즘의 영향력은 교육 기관, 언론, 문화 산업에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도 이 이데올로기가 빠르게 유입되는 중이다. 3. 이슬람과 워키즘의 기이한 동맹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 중 하나는 이슬람과 워키즘의 전략적 연대이다. 이슬람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 동성애 사형, 신정(神政) 정치를 지지하는 반면, 워키즘은 페미니즘, LGBTQ 권리, 세속주의를 옹호한다. 이 두 세력은 사실상 가장 상극에 있는 이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연합 전선을 형성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공통의 적, 즉 서구 기독교 문명이다. 워키즘은 이슬람 이민자를 "억압받는 소수자"로 프레이밍하여 보호하고, 이슬람은 그 프레임을 이용해 서구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한다. 실제로 서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관련 시위에서 진보 좌파 학생 단체와 이슬람 학생 단체가 공동 행동에 나서는 사례는 이 기이한 동맹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워키즘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로 설명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해체라는 목표 앞에서, 상극의 이념들이 전술적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기이한 동맹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워키즘을 친이슬람적 이민 정책, 반이스라엘 정서, 기독교 역사 부정, 전통 가족 해체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나의 패키지로 이해해야 한다. Ⅴ. 이스라엘: 문명 충돌의 최전선 1. 왜 이스라엘인가: 지정학적·문명적 의미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단순한 동맹 관계나 성경적 예언론의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문명적 관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중동이라는 전체주의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쐐기 역할을 하는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쿠데타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강하게 유지되어—2024년1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네타냐후 연립정부가 추진한 사법개혁 법안을 무효로 판결하기도 했다. 중동의 지도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명확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1979) 이후 미국 지정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신정(神政) 국가이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레바논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무장세력으로 인해 사실상 이란의 영향권 내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왕정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군주제이다.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가 작동하는 국가이다. 2. 반이스라엘 정서의 이념적 계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반이스라엘 정서(BDS 운동, 유엔의 반이스라엘 결의안 등)는 표면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이념적 계보를 추적하면 공산주의·좌파 이데올로기 및 이슬람 전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체계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이 제3세계 해방운동과 연결되었고, 이 흐름이 오늘날의 진보 좌파 진영에 이어지고 있다. 워키즘 이데올로기에서 이스라엘은 "식민지 억압자"로 프레이밍된다. 이 서사에서 유대인은 "성공한 억압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피억압 소수자"이다. 워키즘이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동 내 유일한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악당이 된다. 여기에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반이스라엘 정서는 좌파와 이슬람이 만나는 가장 강력한 공유 지점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지지는 단순한 성경적 명령이나 신학적 입장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문명 진영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반이스라엘 정서에 동조하는 것은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서사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보수 진영이 이스라엘을 전략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Ⅵ. 세계 종교 인구의 변화와 기독교의 과제 세계 종교 인구의 장기 추세도 이 대결 구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1970년 약 5억7천만 명이었던 무슬림 인구는 2024년 약20억3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50년에는 약 28억6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기독교 인구는 12억2천만 명에서 26억3천만 명으로 2.7배 증가하지만, 무슬림은 무려5배가 증가한다. pixabay.com 특히 충격적인 것은 지역별 분포의 변화이다. 기독교 문명의 본거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2024년에서 2050년 사이 감소세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되며, 북미에서도 2010~2050년 사이 약2,770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추산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기독교인 약 6,605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해 무종교인이 6,149만 명 유입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문명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반면 이슬람은 높은 출산율(2010년 기준 합계출산율 3.1명, 기독교는 2.7명)과 견고한 정체성 유지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은 그 공백을 파고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상황도 우려스럽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00년 후 한국 인구가 71%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며, 229개 시군구 중 200개 시군구가 폐지 또는 존폐 위기에 놓일 것으로 예측됐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불가피하게 이민 수용 압력을 증가시키고, 이는 이슬람 인구 유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문화막시즘으로 침투한다. Ⅶ. 신냉전과 한국교회의 지정학적 선택 1. 중·러·북의 반서방 연대와 한반도 2026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사실상 신냉전 구도로 재편됐다. 2026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과 쇼이구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 간의 회담에서 양국은 핵심 이익에 대한 상호 지지를 재확인하고 글로벌 지정학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메커니즘 격상을 선언했다. 세종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중남미·중동·동북아시아는 반서방 연대와 자유민주 진영이 정면 충돌하는 3대 전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구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었고, 서방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이 단행되면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는 더욱 공고화됐다. 특히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면서 북-러 밀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2026년1월에는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강경 성명을 내면서 미-이란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이란의 이슬람 신정 체제는 반서방 연대의 핵심 축으로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편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함으로써 중동 전체를 전쟁의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다. 2. 한국 우파 기독교의 정치적 선택 이 문명 충돌의 구도에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는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가치의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 기독교 문명 기반의 가치—인간 존엄, 가정의 신성성, 신앙의 자유, 생명 존중—를 수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내에서도 이 구도는 명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쟁, 동성결혼 합법화 압력, 과격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 이슬람 할랄 인증의 확산, 좌파 진영의 반이스라엘 정서 조장—이 모두가 동일한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국내적 발현이다. 한국교회는 이 각각의 이슈들을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거대 흐름의 국내적 가지들로 인식해야 한다. Ⅷ. 음모론의 함정과 전략적 분별력 이 거대한 세계 정국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음모론의 함정이다. 유대 자본의 세계 지배 음모론, 글로벌 엘리트의 비밀 지배 시나리오,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모든 것을 계획·조종하고 있다는 극단적 단순화—이런 음모론은 실제로 더 중요한 이슈를 흐리게 만든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세세한 음모론의 진위 여부에 매몰되어, 정작 지금 당장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핵심 질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아무리 연합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전제이다. pixabay.com 따라서 음모론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이렇다. 첫째, 구체적인 음모론의 세부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다. 둘째, 큰 그림—즉 전체주의 결합 세력이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려 한다는 거시적 구도—은 냉철하게 인식한다. 셋째, 음모론이 제기하는 개별 이슈들의 진위를 분별하되, 그것이 나의 가치적 입장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지, 모든 음모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유대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죄악이었다. 유대인 개인이나 유대 자본에 대한 일반화된 부정적 프레이밍은 성경적으로도 잘못되었고, 실천적으로도 이슬람·좌파의 반이스라엘 연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전략적 입장을 음모론과 분리하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이다. Ⅸ. 성경적 보수주의: 응전의 신학적 기반 1.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 이 모든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정치적 보수주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 문명 가치에 근거한 보수주의이다. 정치적 잡음이 많고 보수 진영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는 정책과 세력을 분별력 있게 지지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성경적 보수주의의 기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생명과 가정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지하는가? 낙태 권리 확대, 동성결혼 합법화,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에 반대하는 입장이 기독교 문명의 기본값이다. 둘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차별금지법이나 혐오표현금지법의 형태로 기독교적 발언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질서를 지지하는가? 권위주의적 전체주의—공산주의, 이슬람 신정 정치, 좌파 전체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2. 에베소서 6장의 시대적 적용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장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엡6:12)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을 향한 공세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나 이념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의 연합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교회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 기도, 성결한 삶, 복음의 증거, 공동체의 연대 - 이것이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29:7)고 명령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3.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다섯 가지 자세 첫째, 세계 정국에 대한 성경적 해석 능력을 길러야 한다. 뉴스와 시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의 렌즈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정학·사회·문화에 대한 성경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선거, 입법, 공공 정책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시민적 참여가 요구된다. 이것은 정당 정치에의 맹목적 편입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시민 참여이다. 셋째, 이슬람화와 워키즘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사회적 압력 앞에 침묵하는 것은 묵시적 동조이다. 성경적 진리는 사랑으로, 그러나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강화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된 민족이다. 반이스라엘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도록 성경적 가르침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 내부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거대한 전체주의 연합에 맞서는 힘은 교회의 연합에서 나온다. 신학적 차이와 교파적 경계를 넘어 기독교 문명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교회들이 연대해야 한다. Ⅹ. 결론: 두려워하지 말고, 분별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이 승리의 확신 위에 서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그것을 해체하려는 공산주의·좌파·워키즘·이슬람 전체주의의 결합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정치·경제·문화·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석의 최종 목적은 두려움이 아니다. 분별이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무리 강대한 전체주의 연합이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거대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분별력 있는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읽되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다. 음모론의 미혹에 빠지지 않되, 실제적 위협을 직시한다. 정치적 편협함에 갇히지 않되, 성경적 가치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슬람을 두려워하지 않되, 이슬람화의 문명적 함의를 냉철하게 인식한다. 워키즘의 위선을 분명히 보되,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문명 보루이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선교의 열매 중 하나인 한국교회가21세기 문명 충돌의 시대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굳건히 서는 것—이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분별하라. 그리고 서라. ■ 주요 참고 자료 및 데이터 출처 -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유럽 무슬림 인구 전망」, 2017 / 「미래 종교 예측(2010~2050)」, 2015 - 아산정책연구원, 「2026년 아산 국제정세전망: 심화되는 무질서」, 2026.1 / 「2024 국제정세전망: 연대결성」, 2023.12 -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 「1970~2050년 기독교·이슬람 인구 예측」, 2024 - 유해석,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킹스칼리지 런던ICSR, 「유럽 국가별 무슬림 비율」, 2019 - 르네 피스터(독일 슈피겔), 『잘못된 단어들』(Falsche Worte), 2024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1996 / 버나드 루이스, 유럽 이슬람화 경고 발언 - 전국인력신문, 「중러 연대와 한국의 선택」, 2026.2 / 민주주의평판지수(DP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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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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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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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 pixabay.com/ko/photos 1. 문제의 출발점: 왜 이 전쟁을 둘러싼 인식이 갈리는가 2024년 이후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시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되기도 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진실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는 단순한 시각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 전제, 이념적 지향, 그리고 정보 선택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란 문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국제 핵 질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중동의 종파 갈등, 에너지 지정학, 미국 패권의 향방,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가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환원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한쪽은 이것을 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으로 축소하고, 다른 한쪽은 이란의 위협성만을 부각해 군사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한다. 어느 쪽도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는 오랫동안 두 흐름이 공존해왔다. 하나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 신학의 흐름이다. 이 두 흐름은 국내 정치적 사안에서도 자주 충돌했지만, 이란과 같은 국제 분쟁 문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계열은 피해자의 시각을 앞세우고, 보수 계열은 안보와 질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교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언어로 이 복잡한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이 글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고,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교회 내 두 시선의 신학적 근거를 점검한 후, 기독교적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말할 때,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복잡한 국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교회의 목소리가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발언은 더욱 엄격한 지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2. 이란 정권의 실체: 간과되거나 축소되는 현실 (1) 신정 독재 체제의 구조와 본질 이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사실은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최고지도자(라흐바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의 종교 권위자이자 정치 권력자로서, 군·사법·방송·외교·안보 전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 이념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권력이 다시 종교 이념을 강요하는 이중 구조다. 대통령과 의회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 후보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선거의 실질적 경쟁성을 박탈한다. 즉, 이란의 선거는 민주주의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치적 반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모두 심각하게 제한된다. 공개 처형은 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집행된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이란의 처형 건수와 방식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치범,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들이 사형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현실은 이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 종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란 헌법은 명목상 일부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배교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란 내 지하 교회 신자들은 끊임없는 위협과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 적발될 경우 체포와 투옥, 고문을 감수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이란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맥락이다. (2) 여성 인권 문제와 국제적 파장 2022년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22세 여성이 히잡 착용 규정 위반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전역에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수백만 명이 저항에 나섰다. 이란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란 신정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들은 이란에서 의복 규정 준수를 강제받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 결혼, 이혼, 여행, 취업 등 다양한 법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이슬람 형법에 따라 여성의 증언 효력은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법적으로 제도화한 인권 침해다. 이 점을 평가에서 제외할 때, 이란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왜곡된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여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히잡을 공개적으로 벗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란 국내의 인권 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내부의 저항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등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해야 한다. (3) 국제적 위협 행위와 대리전 구조 이란의 문제는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다양한 친이란 민병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중동 전역의 무장 세력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이 세력들은 이란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일종의 대리 전력이며, 이란은 이들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도 지역 내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 이것이 소위 '그림자 전쟁(Shadow War)' 혹은 '대리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국제사회의 오랜 우려 사항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합의(JCPOA)에 따른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평화적 핵 활용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할 경우 중동의 안보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여러 아랍 국가들도 핵 보유를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즉, 이란의 핵 문제는 이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태도도 명백하다. 이란 최고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소멸을 선언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실행된 목표다. 헤즈볼라를 통한 레바논 북부에서의 공격,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통한 가자 지구에서의 긴장, 시리아를 통한 이란 군사 인프라 구축 등은 이 목표를 향한 구체적 행동들이다. (4) '약자 프레임'의 한계와 위험 이러한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민간인 피해와 특정 시설 폭격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맥락을 제거한 감정 정치다. '약자 프레임'은 이란 정권의 실제 행위와 책임을 은폐하고, 복잡한 도덕적 판단의 공간을 차단한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중동 전역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노출된 국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은 오류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 성명들이 이란 정권의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군사행동의 결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에 가까워진다. 예언자적 교회의 목소리는 특정 진영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편드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지만, 약자처럼 보이는 자를 무조건 편드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pixabay.com/ko/photos 3. 전쟁의 원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긴장 (1) 핵 문제의 역사와 현재 이란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우려 대상이었다. 2003년 이란이 비밀 핵 시설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 끝에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일명 이란 핵합의를 타결했다. 핵합의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제한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압박' 전략을 내세우며 이란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은 이에 대응하여 우라늄 농축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바이든 행정부가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성과 없이 장기화되었고,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핵무기 개발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다. 이란은 약속을 어겼고, 미국은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외교사적 맥락 없이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결말만 보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현재 시점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불성실이다. (2) 대리전 구조와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갈등은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복잡한 대리전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왔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후티를 통해 예멘과 홍해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군사 자산에 대한 공습을 수시로 단행해왔고, 이란 핵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책임을 단순히 공격을 가한 쪽에만 돌리는 것은 구조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이 민간 거주 지역에 무기를 은닉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책임은 해당 지역에 무기를 배치한 세력에도 있다. 국제 인도주의법은 이른바 '인간 방패' 사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종파 갈등도 중동 불안정의 핵심 요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 분쟁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지에서 시아파 집단을 지원한다. 이 종파 경쟁이 중동 전역의 내전과 갈등을 심화시켜왔다는 사실은 이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맥락이다. (3)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와 윤리적 복잡성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자국의 존립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이란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이스라엘 소멸 발언,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통한 군사적 압박, 이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의 핵 개발 완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중동 지역의 실제 안보 상황을 배경으로 한 실존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평가가 이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완전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란의 이스라엘 소멸 선언과 그를 향한 실제 행동에 대한 동등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쪽에 대한 비판만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향이다. 4. 트럼프의 전략: 단순한 전쟁광인가, 계산된 압박인가 (1) 최대 압박 전략의 구조와 논리 도널드 트럼프의 대이란 정책은 단순히 '호전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불리며, 이는 군사력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이란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이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수백 개의 추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란의 석유 수출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란 화폐인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란 정권 내부에서도 압박의 효과가 감지되었으며,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트럼프 전략의 지지자들은 이 압박이 없었다면 이란이 더 빠르게 핵 개발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도 한계가 있다. 경제 제재로 인한 고통은 이란 정권보다 이란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크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약품과 의료 기기 등 인도주의적 품목에 대한 제재 면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란이 이런 물품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경제적 고통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하는 전략은 일반 시민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 한계도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2) 제한적 군사행동과 전략적 의도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가장 주목받은 군사행동은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작전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대리전 전략을 총괄하는 인물로,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민병대, 후티 등에 대한 지원과 지휘를 담당해온 실세였다.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미국 기지를 공격해 미국 시민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이 작전이 단행되었다. 이 작전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이란이 전면전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제한적 대응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 미사일 공격은 사전에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며, 이란이 실제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즉,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무모한 전쟁 행위가 아니라, 이란의 확전 의지를 시험하고 억제력을 재설정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3) 미디어 왜곡과 교회의 인식 문제 일부 한국교회 성명서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전쟁 유발자'로 규정하고, 그의 대이란 정책을 무조건적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특정 시각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결과다. 진보적 성향의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프레임화해왔으며, 그 서사가 한국교회의 일부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분별은 미디어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전하지 않는 것을 함께 물어야 한다.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오류를 범했고,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때, 이란 정권의 행위와 책임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균형을 잃는다. 교회는 강대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지적이 독재 정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pixabay.com/ko/photos 5. 국제정세 속에서 본 이란 충돌: 더 큰 구조를 보라 (1) 미국 대 반미 축의 구조 이란을 둘러싼 갈등은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양자 문제를 넘어, 더 큰 국제 질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의 대이란 제재에 반대하며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강화해왔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제재를 피해 수입함으로써 이란 경제를 간접 지원해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반미 세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이란 문제를 다루면, 왜 서방 세계가 이란의 핵 개발을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지, 왜 이란에 대한 제재가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아키텍처의 문제로 다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 에너지와 지정학: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의미 이란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 수출량의 약 20~30%가 통과한다.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즉각적이고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 문제는 단지 중동 지역의 안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문제다. 한국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며, 그 수송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란과의 군사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책임 있는 시민적 신학의 요소다. 6. 한국교회의 두 시선: 신학적 구조 분석 (1) 평화 절대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한계 한국교회 내 진보적 흐름에서 이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평화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원수 사랑과 비폭력으로 요약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는 이 입장의 대표적 성경적 근거다. 따라서 어떤 군사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입장의 강점은 전쟁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강자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려는 비판적 저항성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첫째, 악의 현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비폭력적 저항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앞에서 무저항은 옳은 응답이었는가? 둘째, 구조적 불의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억제마저 거부하는 것은 때로 악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는다. 평화 절대주의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의 차원과 교회의 공적 증언의 차원에서는 더 복잡한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화 선포는 개인적 비폭력의 도전이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지만, 그것이 곧 현실 정치에서 모든 강제력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응답이었다. (2) 정의 전쟁론의 전통과 적용의 한계 다른 한편, 한국교회의 보수적 흐름에서는 정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관점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 전쟁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거치며 발전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이 이론은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매우 엄격한 조건들을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정당 전쟁의 조건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과 전쟁 수행의 정당성(jus in bello)이다. 전자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합법적 권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등을 요구한다. 후자는 민간인 보호, 비례적 무력 사용, 금지된 무기 사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이 조건들은 매우 엄격하며, 현실의 전쟁 중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이 엄격한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라는 대원칙만을 내세워 특정 군사행동을 성급하게 정당화하는 경우다. 이란 정권이 분명히 위험하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곧 이란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구체적 행동은 정당 전쟁의 모든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될 때, 보수적 교회의 목소리는 국가 권력의 대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3) 두 시선의 공통된 문제: 진실의 일부만을 보는 것 흥미롭게도, 평화 절대주의와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라는 두 극단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평화 절대주의는 이란의 위협과 책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는 군사행동의 부당한 결과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어느 쪽도 전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 있지 않다. 기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전체 진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만 실현된다. 교회가 이 전쟁 문제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학적·이념적 편향이 진실의 인식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7. 문제의 핵심: 균형 상실과 감정 정치 (1) 성명서의 구조적 편향 분석 이란 문제를 다루는 일부 한국교회 단체들의 성명서를 분석하면 공통적인 구조적 편향이 드러난다. 첫째, 원인 제거다. 이란 정권의 위협적 행위, 핵 개발, 대리전 전략, 국내 억압 등은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되어 다루어진다. 반면 군사행동의 결과, 특히 민간인 피해와 인프라 파괴는 상세하고 감정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군사행동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반응만을 갖도록 유도한다. 둘째, 도덕적 단순화다. 복잡한 도덕적 현실이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한쪽은 절대 악으로, 다른 쪽은 절대 피해자로 규정된다. 이 구도에서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들에게 행한 악은 사라진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가한 측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악마화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연극이다. 셋째, 감정 중심 서술이다. 학교, 병원, 어린이, 피난민 등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서술의 중심을 이루며, 구조적·법적·역사적 책임 분석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공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도덕적 책임의 방기다. 특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선포하는 성명서라면, 그것은 훨씬 더 엄격한 지적 성실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2) 맥락 없는 인도주의의 위험 인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그 생명과 존엄은 보호받아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은 어디서 누가 행했든 비극이며, 교회는 그 비극에 민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인도주의'는 오히려 더 큰 폭력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란 정권이 핵을 개발하고, 중동 전역에 대리 세력을 통해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충돌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가? 단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없는 평화적 현상 유지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재앙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없는 인도주의는 결국 현실 회피가 된다. 나아가, 인도주의적 우려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란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소수 종교인들이 박해받고, 정치범들이 처형될 때 한국교회 단체들은 얼마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란 정권의 내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념적 선택이다. pixabay.com/ko/photos 8. 그렇다면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 전쟁 윤리의 재검토 (1) 성경의 긴장: 평화와 질서 사이 기독교 윤리는 전쟁 문제에 있어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과 그 결과에 대한 탄식도 담고 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 건축의 영광을 허락받지 못했다(대상 22:8).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사람으로, 원수 사랑과 폭력 거부를 가르치셨다.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이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했다.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과 '그것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롬 13:4)라는 말씀이 모두 정경 안에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모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긴장 속에서 신학적 판단은 더욱 섬세해야 하며, 어느 한 구절을 절대화하여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2) 정당 전쟁의 조건과 현실 적용 전통적 정당 전쟁 이론은 다음의 조건들을 제시한다. 정당한 이유(just cause)란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의도(right intention)란 보복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라 선의 달성과 악의 억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legitimate authority)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예상되는 선이 악을 초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에 적용할 때, 쉬운 결론은 없다. 이란 정권의 위협과 핵 개발은 '정당한 이유'의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외교적 수단이 정말 소진되었는가? 제재가 충분한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가? '비례성' 조건과 관련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보다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큰 갈등의 촉발점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으며, 교회는 이 불확실성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정당 전쟁론이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도, 무조건적 반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 조건들을 성실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없이 '평화를 원하니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이란이 위험하니 군사행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신학적 판단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9. 기독교적 평가: 무엇이 옳은 태도인가 (1) 진실을 전체로 보는 용기 기독교적 판단의 첫 번째 요건은 진실을 부분적으로 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란 정권의 억압적 성격, 대리전 전략, 핵 개발 의혹은 진실이다. 민간인의 고통, 전쟁의 파괴적 결과,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도 진실이다. 국제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강대국의 오류 가능성, 전쟁의 비의도적 결과도 진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다. 선택적 진실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즉 '침묵을 통한 거짓(lying by omission)'은 직접적 거짓말 못지않게 사람을 기만한다. 교회가 이 방식으로 공적 성명을 발표하거나 설교를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완전한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다. (2) 정의와 사랑의 통합 기독교 윤리에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가 사랑의 사회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차갑고 억압적인 율법주의가 되며, 정의 없는 사랑은 구조적 불의를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된다.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란 국민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한 정의로운 비판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억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균형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붙드는 것은 항상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판단이 형성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동시적 표현이었다.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는 분별자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분별(discernment)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소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영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다. 이란 전쟁 문제에서 교회의 소명은 특정 정치 세력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PR 창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의 종교적 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그 어느 정치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기준으로 모든 편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모습이다. 분별은 또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즉각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정보 수집과 기도와 신학적 성찰 이후에 나오는 신중한 판단이, 비록 늦더라도 훨씬 더 큰 영적 무게를 갖는다. 교회가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반응하려 할 때, 그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평론가가 되는 길이다. (4) 누구의 편에 서는가: 근본적 질문 이 모든 논의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국의 편인가, 이란의 편인가? 이스라엘의 편인가, 팔레스타인의 편인가? 강자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응답은 이 질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이란 국민의 자유를 원하며,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원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과 예멘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의 의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의 불의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지만, 불의한 평화보다는 고통스러운 정의를 선택한다. 이 입장은 정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진영도 교회를 온전히 자기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권력 구조 안에 흡수되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자리다.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이스라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섰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10. 전쟁의 전망과 교회의 과제 (1) 세 가지 시나리오 이란을 둘러싼 충돌의 향후 전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는 제한적 충돌의 지속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이란과 미국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 시나리오다. 사이버 공격, 표적 암살,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전투 등이 지속되는 '회색 지대' 갈등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서서히 진전되고, 국제 제재의 효과는 점점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확전 시나리오다. 어느 한쪽의 오판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전면전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거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타격을 단행하는 경우다. 이 시나리오는 중동 전역을 충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공격,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미군과 이란 간의 직접 충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셋째는 협상을 통한 현상 관리다. 이란이 경제적 압박과 내부 불만을 이기지 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거나, 강대국들이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란의 완전한 핵 개발 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핵 능력의 부분적 동결과 제재의 부분적 완화를 교환하는 중간 지점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교회의 구체적 과제 이 세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든, 교회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올바른 정보와 균형 있는 분석에 기반한 공적 발언을 해야 한다.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이란의 행위와 국제적 맥락을 함께 언급하며, 어느 편의 서사도 검증 없이 수용하지 않는 지적 성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란 국민과 중동의 모든 민간인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인도주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이란의 지하 기독교 공동체와 박해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위한 연대도 중요하다. 셋째, 이 위기가 복음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동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영원한 소망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란 내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 역설을 보여준다. 교회는 정치적 논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혼란에 응답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 평화 구조 형성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종교 자유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결론: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 이란 전쟁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완전하다. 현실은 그 어느 단어도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이란 국민은 그 억압의 피해자들이다. 군사행동은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민간인의 고통을 수반한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불의 위에 세워진 평화는 결국 더 큰 폭력의 씨앗이 된다. 교회가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명은 때로 긴장 관계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단기적 평화를 방해할 수 있다. 이 긴장들을 직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소명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교회가 어느 진영의 편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진영에 진실을 말했을 때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본회퍼는 독일의 편도, 연합국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섰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에 저항한 데즈몬드 투투는 흑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하나님의 진실의 편에 섰다. 이들은 인기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역사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떤 권력보다도 크다. 미국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어떤 국제 기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인이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국가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군사 동맹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의가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항상 이 세상의 권력 구조 너머에 있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님을 안다.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자리는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 앞에서.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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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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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붕괴 위험, 지정학을 넘어 영적 전환할 때다
-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격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경제는 마비되고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주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노출돼 있다. 무엇보다 북한을 지탱해온 중국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나 군사 전략의 변화로만 본다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시는 과정, 그리고 어둠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영적 질서의 드러남으로 해석해야 한다. 산사태처럼 오는 통일 많은 이들은 통일이 단계적 대화와 협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역사와 국제정치의 현실은 다르다. 독일, 예멘, 작은 국가들의 병합 사례까지도 모두 ‘붕괴’가 먼저 찾아온 뒤에야 가능했다. 성경은 “빛과 어둠은 섞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와 전체주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통일은 이상적일 수 있으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통일은 대화로 설계되는 구조물이 아니라, 내부 붕괴가 외부 질서와 맞물리는 순간 갑작스럽게 열리는 문과 같다.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체제의 한계 북한의 붕괴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니다. 그 뿌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체제 유지의 도구로 취급한 데 있다. 농부는 생산 수치로, 아이들은 행사 도구로, 노인은 인구 숫자로만 계산되었다. 예배와 성경은 금지되었고, 생각은 통제되었다. 인간 존엄이 철저히 무너진 체제는 결국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죄로 세워진 권력과 우상화된 통치가 역사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이다. 중국의 흔들림, 북한의 비틀거림 북한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신호는 중국의 흔들림이다. 북한의 생명줄은 중국이었고, 그 그림자 권력 역시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도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개방하면 경제가 살아도 정권은 무너지고, 닫으면 정권은 유지되지만 국민 경제가 붕괴한다. 이는 북한과 동일한 딜레마다. 결국 진리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는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북한, 평행선의 대화 최근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핵 문제 때문이지만, 본질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미국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북한은 통제와 국가 우선을 말한다. 겉으로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교제할 수 없듯, 이 구조에서는 대화가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체성,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 북한과 중국의 흔들림은 한국이 체제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할 때라는 신호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거나 ‘두 국가 인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헌법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와도 충돌한다. 현 정권의 북한 체제를 존중한다는 태도는 곧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폭정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유와 양심, 예배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승인하는 것이다. 한국이 체제의 본질을 흐리면 역사의 전환기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붕괴의 영적 의미: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북한의 붕괴는 단순히 냉전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억눌린 백성들을 향해 열어가시는 해방의 시간이며,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순간이다. 북한 붕괴는 비극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가 어둠을 깨뜨리는 영적 승리의 순간이다. 북한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 산사태가 오랜 균열 끝에 무너지고, 빛이 한순간에 어둠을 몰아내듯, 역사의 전환도 그렇게 온다. 그 순간을 준비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의 체제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북한 주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북한의 붕괴는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기독교인들,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 빛 아래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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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붕괴 위험, 지정학을 넘어 영적 전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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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사상 실험은 위험한 실험
- 칼럼/양봉식 목사(길과생명연구소 소장) 내 손에 들어온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를 읽고 느낀 바를 적어보고자 한다. 권력이 새롭게 시작되면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변함없이 이재명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겉표면에 뜬 기름을 보고 말할 뿐, 다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이다. 더구나 이재명 정부가 추구하는 것을 지지차원에서 쓴 논리적인 책처럼 보여서 좀더 상세하게 읽어보고 그것을 나누려고 한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국민주권정부’라는 구호는 듣기에 참 그럴듯하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이라는 비전도, “국민이 하나 되는 정치”라는 목표도 감성적으로는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구호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깊다. 국민이 주인이라면 권력은 어떻게 나뉘고, 책임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 ‘하나 됨’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통합의 언어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원리 자체를 다시 성찰하는 철학적 대화다. 공화주의, 진보적 이상인가 새로운 이념 포장인가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했다. 책은 6인의 학자·활동가가 참여한 좌담을 엮어, 한국 사회의 사상적 지형을 진단하며 ‘새 공화주의’를 모색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제시하는 공화주의가 단순히 제도 개혁이나 정치 구호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동향과 전망』이 제시한 것처럼, 그들은 ‘반자본주의’와 ‘반국가’의 꿈이 좌절된 시대에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혁명” 대신 공화주의적 시민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혁명 대신 광장의 시민정치로 제도권을 변혁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공화주의가 과연 자유주의의 대안일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의 재포장일 뿐일까?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려는 공화주의의 시도는 오래된 정치철학의 과제지만, 지금 이 담론은 마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포장된 또 다른 이념 실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화주의 담론의 이념적 향방 책의 필자들은 한결같이 “사상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구갑우는 반(反)자본주의 혁명의 좌절 속에서 새 공화주의를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백승욱은 자유주의 자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며, 유희석은 공화주의를 자기성찰의 도구로 본다. 장은주는 사이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극복을 말하고, 황순식은 ‘성장과 평등’이라는 이재명 정부의 모순을 지적하며 ‘비지배 자유’와 ‘호혜성’을 제시한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의견의 교차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인 방향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념적으로 보면 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자, 진보적 사회민주주의와 신좌파적 공화주의의 접목 시도로 읽힌다. 다시 말해, 이 담론은 ‘국가·시장·시민’을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정치철학 실험이지만, 동시에 기존 좌파 사상의 재구성으로도 볼 수 있다. 변형된 막시즘의 그림자 특히 “공화주의를 담지한 광장의 시민정치”라는 표현은 그람시의 ‘진지전’(hegemony war)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제도권을 전복하는 대신,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를 통해 국가를 재편하겠다는 전략은, 전통적 마르크시즘의 무장혁명 대신 ‘문화적 전복’을 택한 신(新)마르크시즘의 전략과 닮았다. 이런 맥락에서 ‘새 공화주의’는 변형된 막시즘으로 의심받을 여지를 충분히 안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정치적 비전이 이런 사상적 흐름과 맞물린다면, 그것은 단순한 통치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국민주권을 말하지만, 그 ‘국민’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적 인격의 총합이 아니라 ‘집단적 의식’의 주체로 바뀌는 순간, 공화국은 자유의 기반을 잃는다. 진정한 공화는 어디서 오는가 공화주의는 원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선을 조화시키려는 고대적 이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 그리고 자기비판적 시민의 덕성에 있다. 그것은 ‘국가를 통한 개혁’이 아니라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볼 때, 새 공화주의가 ‘시민정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특정 이념적 방향으로 시민을 재교육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형태의 통치철학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분명 새로운 사상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대화는 ‘사상을 위한 사상’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양심을 지키기 위한 대화여야 한다. 공화주의가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보완이 되려면, 권력의 집중이 아닌 분산, 이념의 선전이 아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는 사상의 실험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정권의 사상적 변명이 되거나 이념의 재포장이 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공화’를 빌미로 자유를 잃게 될 것이다. 진정한 공화는 사상이 아니라, 자기비판과 양심의 자유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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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사상 실험은 위험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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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보이지 않는 전쟁, 체제의 충돌… 경주 APEC 이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한미정상이 만나 선물을 교환하고 악수를 나누었지만, 그 이면에 일어난 협상은 한국을 위험하게 하는 일이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총성 없는 체제의 충돌 지금 세계는 조용한 전쟁 중이다. 탱크도, 미사일도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은 단순한 무역 분쟁이나 군사적 긴장 수준을 넘어섰다. 이 싸움은 ‘체제’의 충돌이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통제와 자유, 전체주의와 시민사회. 이념과 가치, 산업과 기술, 외교와 안보가 얽힌 복합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2025년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이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중 한국과의 관계를 재정의했고, 중국은 자원과 외교를 무기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 무대 뒤에서 세계 질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재편되고 있었다. 중국의 야망과 균열: 일대일로의 그림자 중국은 지난 10년간 ‘일대일로(BRI)’라는 이름 아래 세계 곳곳에 손을 뻗었다. 도로와 항만, 철도와 에너지 인프라를 건설하며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연결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경제 협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 체제를 세계로 확장하려는 전략적 시도였다. 중국은 희토류, 배터리, 태양광 등 핵심 자원을 독점하며, 자원 사슬을 통해 다른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묶어두려 했다. 실제로 희토류의 80%, 폴리실리콘의 70%, 배터리 핵심소재의 75%를 중국이 쥐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 독점 구조는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그 야망은 균열을 맞고 있다. 부동산 위기, 지방정부의 부채, 청년 실업, 소비 침체 등 중국 내부의 경제적 취약성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성장률은 3%대에 머물고, 국제 사회의 신뢰는 흔들리고 있다. 기술 봉쇄와 외교적 고립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을 점차 축소시키고 있다. 미국의 반격: 트럼프 2.0의 질서 재편 미국은 이 싸움을 단순한 패권 경쟁으로 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진영의 재편’을 목표로, 관세와 수출통제, 산업정책을 총동원하고 있다. 보편관세와 상호무역법은 동맹국들에게도 선택을 강요한다. “의무를 이행한 국가에만 혜택을 준다”는 원칙은 한국을 포함한 중간지대 국가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반도체, AI,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통제는 중국의 산업사슬을 정밀하게 봉쇄하고 있다. IRA(인플레이션감축법)와 친환경차 보조금 정책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미국은 이제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재편하는 설계자로 나서고 있다. ▲한미 정상이 겉으로는 웃지만 그의 이면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경주 APEC, 선택을 강요한 무대 2025년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그 상징적 무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중 자동차 관세 인하, 대규모 투자 패키지, 조선·원전 협력 등을 제안하며 한국을 미국 중심축에 묶으려 했다. 동시에 호주와 희토류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중국의 자원 독점 사슬을 끊으려는 전략을 펼쳤다. 중국은 이에 맞서 BRI 계약과 투자를 확대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린 수사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경주는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재편을 위한 거래의 장이었다. 한국의 선택: 전략적 편입인가 종속인가 이재명 정부는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미국과의 안보 협력도 병행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 APEC 이후, 등거리 외교의 여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한국은 이제 자유진영의 핵심 파트너로서, 조건부 혜택을 얻는 구조 속에 있다. 한국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참여하면서도, 자국의 산업·금융·인력 기반을 지켜야 한다. 반도체·HBM·소재·장비 분야에서 미국과의 투트랙 전략을 펼치고, 희토류·배터리·태양광 분야에서는 탈중국 체인을 선점해야 한다. 조선·원전·에너지 분야에서는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기술의 이익을 회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단순히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신앙적 통찰과 공적 소명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의 충돌은 사상·경제·안보를 아우르는 총체 전쟁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라는 이름 아래 전체주의적 통제가 확장되는 순간, 신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훼손된다. 교회는 자유민주주의의 장점—권력분립, 법치, 시장, 시민사회—를 공적 신앙의 무대로 이해하고,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변론해야 한다. 진리와 사실성을 회복하고, 가짜 평화와 가짜 번영을 폭로하며, 성도들에게 사실 기반의 시사 해석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의 실천: 세 가지 우선순위 첫째, 진리 교육이다. 언론, 아카데미, 청년교육을 통해 성도들에게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을 길러야 한다. 둘째, 취약계층 돌봄이다. 세계 질서의 재편은 물가·고용·산업 전환의 비용을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시킨다. 교회는 긴급구호, 직업전환, 멘토링의 공동체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소명경제(Economy of Calling)다. 직업을 소명으로 이해하게 돕고, 청년들에게 기술·언어·윤리를 통합한 사역-직업의 이원통합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시나리오별 대응 전략> ●중국 금융·부동산 쇼크: 한국은 대체 시장을 가속화하고, 교회는 실직자 지원 네트워크를 즉시 전개해야 한다. ●대만 유사·해양 충돌: 한국은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교회는 위기 커뮤니케이션과 재난 대응 매뉴얼을 구비해야 한다. ●장기 경쟁 구도: 한국은 맞춤형 FTA와 공급망 표준을 구축하고, 교회는 지역 돌봄과 청년 훈련을 상시화해야 한다. 누구의 편에 서서, 어떤 질서를 세울 것인가 경주 APEC은 선택을 강요하는 문턱이었다. 트럼프 2.0의 세계관은 ‘미국 우선’을 넘어, 자유진영 중심의 경제·안보 재배열이다. 중국은 BRI와 자원·외교로 대응하고 있지만, 부채·부동산·성장 둔화라는 내상은 깊다. 한국은 ‘종속’이 아니라 ‘편입의 대가를 극대화’하는 정교한 협상과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해석 공동체로서, 성도와 시민에게 사실과 자유의 윤리를 가르치고, 전환기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 이 싸움은 탱크와 미사일이 아니라, 사상·규범·산업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는 싸움이다. 한국은 이 전쟁에서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서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앞으로의 세계 질서는 더욱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유와 인권, 법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이 가치들을 지키고 확장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역사적 전환기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시대를 꿰뚫는 통찰과 용기를 심어주고,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을 품는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신앙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공적 신앙의 모델을 제시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이 싸움은 단순한 정치·경제·군사적 경쟁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총체적 전쟁이다. 한국과 한국교회는 이 전선에서 분명한 입장을 세우고, 지혜와 용기로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부록: 참고 문헌 및 자료 김영수, 『현대 국제정치와 동아시아 질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23. 박지훈, 『중국 일대일로 전략의 경제적 영향』,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4. 이민정, 『미국의 산업정책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고려대학교 출판부, 2025. 최은영, 『한국 외교정책의 변화와 전략적 선택』, 연세대학교 출판부, 2025. 한국교회연합, 『신앙과 사회: 한국교회의 공적 역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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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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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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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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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 2026년4월 세계 정국 분석 [길과 생명:양봉식 국장]지금 세계는 단순한 이념 갈등이나 지정학적 패권 경쟁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문명적·영적 충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한편에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질서를 해체하려는 복합적인 전체주의 연합 세력이 있다. 공산주의, 좌파 사회주의, 워키즘(Wokeism), 이슬람 전체주의 세력이 공통의 적—곧 기독교 문명—을 타도하기 위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결탁하고 있다. 본 분석기획은 이 충돌의 구도와 실체, 그리고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가 어떻게 인식하고 응전해야 할 것인지를 심층 검토한다. Ⅰ. 서론: 문명의 충돌인가, 영적 전쟁인가 20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된 지 불과35년, 21세기 세계는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명 충돌의 전선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경제적 패권 다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기초 가치—인간의 존엄, 가족의 신성성, 국가의 정체성, 신앙의 자유—를 둘러싼 전쟁이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하버드 대학교의 고(故)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는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21세기 세계의 주요 갈등이 이념 간이 아닌 문명 간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특히 이슬람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그로부터3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헌팅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선이 복합화·다층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 정국을 단순히 지정학적 대결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 대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엄"을 전제한 기독교 문명과, 그 전제를 파괴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 사이의 영적 싸움이다. 한국교회는 이 구도를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지, 어떤 가치 위에 서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시점이다. Ⅱ. 전 세계적 갈등의 양대 구도: 두 문명의 충돌 1. 기독교 문명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비롯된다는 성경적 인식,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청교도적 정치관,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세속 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적 유산—이 모두가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 오늘날 이 문명 진영의 핵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비록 많은 내부 모순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헌법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보호하는 국가이다. 트럼프2기 행정부(2025~)는 출범과 함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정책의 방향으로 채택하는 신호를 보냈다. 헤리티지 재단이 주도하는 프로젝트2025(Project 2025)에는 기독교 문명 가치에 기반한 정부 재편 구상이 담겨 있다. 이를 진보 진영은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보수 진영은 건국의 정신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 문명 진영의 핵심 구성원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일하게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사법부 독립을 제도적으로 유지하는 국가이다. 의원내각제 공화국인 이스라엘의 의회(크네세트)는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차례의 쿠데타나 불법 권력 장악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이는 중동 전체를 통틀어 키프로스와 함께 가장 양호한 민주주의 지수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한국의 건강한 우파 세력 역시 이 진영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선교의 결과물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건국의 정신과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 세력이 이 문명 진영의 동아시아 파트너이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신앙을 지켜왔다는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2. 전체주의적 결합 세력의 등장 반대편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이 진영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워키즘, LGBTQ 이데올로기, 급진 페미니즘, 환경 급진주의, 이슬람 전체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들(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하지만 실질적으로 결탁한 집합체이다. 이들 세력이 하나로 묶이는 논리는 단순하다. 공통의 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적은 바로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서구 자유민주주의 질서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념적 차이—예컨대 이슬람 전통주의와LGBTQ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다—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 헤게모니"라는 공동의 표적 앞에서 전략적 동맹을 맺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통의 적 앞에서 연합하는 것—이것이21세기 전체주의 연합의 핵심 작동 원리다." 국제 정치 층위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이 이른바"반서방 연대"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의2026년 국제정세전망(2026년1월)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은"미국의 동맹 네트워크 내 불안감을 이용해 권위주의 체제들 간의 결속을 모색하는 한편,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2025년7월 제17차BRICS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의 이란 핵시설 타격과 가자 지역 작전에 대한 규탄이 이루어지면서 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재확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가치 전쟁 구도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협조해야 할 동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중-러 3각 연대가 가시적 형태로 공고화되면서,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Ⅲ. 이슬람화와 정체성의 위기: 유럽이 보내는 경고 1. 인구 통계가 말하는 미래 유럽의 이슬람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2017년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약2,577만 명으로 전체 유럽 인구의 4.9%였다. 주목할 점은 이 수치가 2050년까지 어떻게 변화하느냐이다. 퓨 리서치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민을 전혀 받지 않는"제로 이민" 시나리오에서도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자연증가만으로 7.4%까지 상승한다. 현재 수준의 이민이 유지될 경우 11.2%, 2015~16년의 대규모 난민 유입이 계속될 경우 최대 14%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14% 시나리오대로라면 스웨덴의 경우 전체 인구의30% 이상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 국가별로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 킹스칼리지 런던 국제급진화연구센터(ICSR) 발표에 따르면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 비율이9.19%로 가장 높고, 이어 스웨덴 9.15%, 오스트리아 9.12%, 네덜란드 8.48%, 벨기에 7.87%, 영국 7.18% 순이다. 영국의 경우2001년(152만 명)에서 2021년(380만 명)으로 20년 만에 무슬림 인구가2.5배 이상 증가했으며, 런던의 무슬림 비율은 이미 15%에 근접했다. 단순한 인구 증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동화 거부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사이자 연구자인 유해석 박사(영국FIM 국제대표)는 수년간의 현지 연구를 통해 다음 패턴을 발견했다: 무슬림들이 한 국가에 정착하면, 이민·다산·현지인과의 결혼·개종의 4가지 방식을 통해 세를 불려나간 뒤, 국가의 법이 아닌 자신들의 법 체계인 샤리아(Sharia) 법으로 생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샤리아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조차 진입을 꺼리는 무슬림 자치 구역(no-go zone)이 형성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유해석 박사는 또한 교도소 통계를 근거로 유럽 사회의 이슬람화가 사회 통합 실패를 수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수감자의 약50%, 이탈리아45%, 영국40%가 무슬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사회경제적 소외와 차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통합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주는 지표임은 분명하다. 3. 서구 기독교 정체성의 붕괴와 이슬람의 전진 왜 유럽은 이슬람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그 핵심 원인은 서구 엘리트들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중동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늦어도21세기 말에 유럽의 인구는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며, 유럽은 서부 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지적한 핵심은 유럽이 이슬람의 공세에 밀리는 이유가 이슬람의 힘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의 정체성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2024년에는 개신교의 종주국 독일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퓨 리서치의 미래 종교 예측(2015년 발표)에 따르면 2010~2050년 사이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약1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 내 기독교인들이 2010~2050년 사이 2,382만 명이나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예측되는 반면, 같은 기간 무슬림 인구는 유럽에서 6%에서10%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비대칭적 변화의 배경에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앙 이탈이 있다. 기독교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이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견지한다. 기독교 문명은 자기 부정의 이데올로기 - 워키즘, 탈식민주의, 비판 이론 - 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해체하는 중이고, 이슬람은 그 공백으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Ⅳ. 워키즘: 기독교 문명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 1. 워키즘의 기원과 본질 "워키즘(Wokeism)"이라는 용어는 "깨어 있다(woke)"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인종주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의미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변질되었다. 2017년 옥스퍼드 사전에 "사회적 불의, 특히 인종주의에 대한 경각심"으로 등재되며 시대적 용어로 정착했다. 오늘날 보수주의 진영에서 워키즘을 비판적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서구 사회와 제도, 문화로 인해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격차가 발생했으므로 서구 문명은 본질적으로 부패했다고 보는 세계관." 이 관점에서 워키즘은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억압받는 자"로 분류하며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재편한다. 더 나아가 현존하는 사회의 모든 표현을"파괴"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워키즘이 심각한 이유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정치적 좌파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용어를 도용하여 반기독교적 의제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이 신앙적 각성을 세속적 사회운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사탄이 성경적 용어를 이용하여 그 의미를 역전시키는 전형적인 수법과 같다고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경고한다. 2. 워키즘이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력 워키즘의 실질적 파괴력은 이미 서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미군은 2024년1941년 이후 최악의 신병 모집난을 겪었다.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LGBTQ 이데올로기를 군에 도입한 결과 전통적 군인 정신이 훼손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기업 영역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와 워키즘이 결합하여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직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같은 문화 산업에서는 동성애·성소수자 콘텐츠가 어린이용 작품에도 일상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교회 안으로도 워키즘이 침투했다. 독일의 진보잡지 슈피겔의 르네 피스터 기자는 2024년 출간한 저서 『잘못된 단어들』에서 워키즘이 좌파마저 독단론으로 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주류 교단 일부는 워키즘과의 타협 속에서 동성 결혼 축복, 젠더 이데올로기 수용, 비판적 인종이론(CRT) 채택으로 나아갔다. 이 교단들에서 신자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트럼프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워키즘은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민주당원조차 2024년 대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를 워키즘으로 지목했다(물론 실제적인 원인은 부정선거라는 의혹과 주장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그러나 워키즘의 영향력은 교육 기관, 언론, 문화 산업에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도 이 이데올로기가 빠르게 유입되는 중이다. 3. 이슬람과 워키즘의 기이한 동맹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 중 하나는 이슬람과 워키즘의 전략적 연대이다. 이슬람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 동성애 사형, 신정(神政) 정치를 지지하는 반면, 워키즘은 페미니즘, LGBTQ 권리, 세속주의를 옹호한다. 이 두 세력은 사실상 가장 상극에 있는 이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연합 전선을 형성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공통의 적, 즉 서구 기독교 문명이다. 워키즘은 이슬람 이민자를 "억압받는 소수자"로 프레이밍하여 보호하고, 이슬람은 그 프레임을 이용해 서구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한다. 실제로 서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관련 시위에서 진보 좌파 학생 단체와 이슬람 학생 단체가 공동 행동에 나서는 사례는 이 기이한 동맹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워키즘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로 설명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해체라는 목표 앞에서, 상극의 이념들이 전술적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기이한 동맹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워키즘을 친이슬람적 이민 정책, 반이스라엘 정서, 기독교 역사 부정, 전통 가족 해체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나의 패키지로 이해해야 한다. Ⅴ. 이스라엘: 문명 충돌의 최전선 1. 왜 이스라엘인가: 지정학적·문명적 의미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단순한 동맹 관계나 성경적 예언론의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문명적 관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중동이라는 전체주의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쐐기 역할을 하는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쿠데타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강하게 유지되어—2024년1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네타냐후 연립정부가 추진한 사법개혁 법안을 무효로 판결하기도 했다. 중동의 지도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명확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1979) 이후 미국 지정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신정(神政) 국가이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레바논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무장세력으로 인해 사실상 이란의 영향권 내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왕정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군주제이다.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가 작동하는 국가이다. 2. 반이스라엘 정서의 이념적 계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반이스라엘 정서(BDS 운동, 유엔의 반이스라엘 결의안 등)는 표면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이념적 계보를 추적하면 공산주의·좌파 이데올로기 및 이슬람 전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체계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이 제3세계 해방운동과 연결되었고, 이 흐름이 오늘날의 진보 좌파 진영에 이어지고 있다. 워키즘 이데올로기에서 이스라엘은 "식민지 억압자"로 프레이밍된다. 이 서사에서 유대인은 "성공한 억압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피억압 소수자"이다. 워키즘이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동 내 유일한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악당이 된다. 여기에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반이스라엘 정서는 좌파와 이슬람이 만나는 가장 강력한 공유 지점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지지는 단순한 성경적 명령이나 신학적 입장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문명 진영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반이스라엘 정서에 동조하는 것은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서사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보수 진영이 이스라엘을 전략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Ⅵ. 세계 종교 인구의 변화와 기독교의 과제 세계 종교 인구의 장기 추세도 이 대결 구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1970년 약 5억7천만 명이었던 무슬림 인구는 2024년 약20억3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50년에는 약 28억6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기독교 인구는 12억2천만 명에서 26억3천만 명으로 2.7배 증가하지만, 무슬림은 무려5배가 증가한다. pixabay.com 특히 충격적인 것은 지역별 분포의 변화이다. 기독교 문명의 본거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2024년에서 2050년 사이 감소세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되며, 북미에서도 2010~2050년 사이 약2,770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추산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기독교인 약 6,605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해 무종교인이 6,149만 명 유입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문명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반면 이슬람은 높은 출산율(2010년 기준 합계출산율 3.1명, 기독교는 2.7명)과 견고한 정체성 유지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은 그 공백을 파고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상황도 우려스럽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00년 후 한국 인구가 71%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며, 229개 시군구 중 200개 시군구가 폐지 또는 존폐 위기에 놓일 것으로 예측됐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불가피하게 이민 수용 압력을 증가시키고, 이는 이슬람 인구 유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문화막시즘으로 침투한다. Ⅶ. 신냉전과 한국교회의 지정학적 선택 1. 중·러·북의 반서방 연대와 한반도 2026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사실상 신냉전 구도로 재편됐다. 2026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과 쇼이구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 간의 회담에서 양국은 핵심 이익에 대한 상호 지지를 재확인하고 글로벌 지정학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메커니즘 격상을 선언했다. 세종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중남미·중동·동북아시아는 반서방 연대와 자유민주 진영이 정면 충돌하는 3대 전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구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었고, 서방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이 단행되면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는 더욱 공고화됐다. 특히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면서 북-러 밀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2026년1월에는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강경 성명을 내면서 미-이란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이란의 이슬람 신정 체제는 반서방 연대의 핵심 축으로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편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함으로써 중동 전체를 전쟁의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다. 2. 한국 우파 기독교의 정치적 선택 이 문명 충돌의 구도에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는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가치의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 기독교 문명 기반의 가치—인간 존엄, 가정의 신성성, 신앙의 자유, 생명 존중—를 수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내에서도 이 구도는 명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쟁, 동성결혼 합법화 압력, 과격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 이슬람 할랄 인증의 확산, 좌파 진영의 반이스라엘 정서 조장—이 모두가 동일한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국내적 발현이다. 한국교회는 이 각각의 이슈들을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거대 흐름의 국내적 가지들로 인식해야 한다. Ⅷ. 음모론의 함정과 전략적 분별력 이 거대한 세계 정국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음모론의 함정이다. 유대 자본의 세계 지배 음모론, 글로벌 엘리트의 비밀 지배 시나리오,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모든 것을 계획·조종하고 있다는 극단적 단순화—이런 음모론은 실제로 더 중요한 이슈를 흐리게 만든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세세한 음모론의 진위 여부에 매몰되어, 정작 지금 당장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핵심 질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아무리 연합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전제이다. pixabay.com 따라서 음모론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이렇다. 첫째, 구체적인 음모론의 세부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다. 둘째, 큰 그림—즉 전체주의 결합 세력이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려 한다는 거시적 구도—은 냉철하게 인식한다. 셋째, 음모론이 제기하는 개별 이슈들의 진위를 분별하되, 그것이 나의 가치적 입장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지, 모든 음모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유대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죄악이었다. 유대인 개인이나 유대 자본에 대한 일반화된 부정적 프레이밍은 성경적으로도 잘못되었고, 실천적으로도 이슬람·좌파의 반이스라엘 연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전략적 입장을 음모론과 분리하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이다. Ⅸ. 성경적 보수주의: 응전의 신학적 기반 1.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 이 모든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정치적 보수주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 문명 가치에 근거한 보수주의이다. 정치적 잡음이 많고 보수 진영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는 정책과 세력을 분별력 있게 지지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성경적 보수주의의 기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생명과 가정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지하는가? 낙태 권리 확대, 동성결혼 합법화,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에 반대하는 입장이 기독교 문명의 기본값이다. 둘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차별금지법이나 혐오표현금지법의 형태로 기독교적 발언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질서를 지지하는가? 권위주의적 전체주의—공산주의, 이슬람 신정 정치, 좌파 전체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2. 에베소서 6장의 시대적 적용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장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엡6:12)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을 향한 공세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나 이념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의 연합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교회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 기도, 성결한 삶, 복음의 증거, 공동체의 연대 - 이것이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29:7)고 명령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3.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다섯 가지 자세 첫째, 세계 정국에 대한 성경적 해석 능력을 길러야 한다. 뉴스와 시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의 렌즈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정학·사회·문화에 대한 성경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선거, 입법, 공공 정책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시민적 참여가 요구된다. 이것은 정당 정치에의 맹목적 편입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시민 참여이다. 셋째, 이슬람화와 워키즘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사회적 압력 앞에 침묵하는 것은 묵시적 동조이다. 성경적 진리는 사랑으로, 그러나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강화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된 민족이다. 반이스라엘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도록 성경적 가르침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 내부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거대한 전체주의 연합에 맞서는 힘은 교회의 연합에서 나온다. 신학적 차이와 교파적 경계를 넘어 기독교 문명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교회들이 연대해야 한다. Ⅹ. 결론: 두려워하지 말고, 분별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이 승리의 확신 위에 서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그것을 해체하려는 공산주의·좌파·워키즘·이슬람 전체주의의 결합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정치·경제·문화·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석의 최종 목적은 두려움이 아니다. 분별이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무리 강대한 전체주의 연합이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거대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분별력 있는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읽되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다. 음모론의 미혹에 빠지지 않되, 실제적 위협을 직시한다. 정치적 편협함에 갇히지 않되, 성경적 가치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슬람을 두려워하지 않되, 이슬람화의 문명적 함의를 냉철하게 인식한다. 워키즘의 위선을 분명히 보되,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문명 보루이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선교의 열매 중 하나인 한국교회가21세기 문명 충돌의 시대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굳건히 서는 것—이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분별하라. 그리고 서라. ■ 주요 참고 자료 및 데이터 출처 -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유럽 무슬림 인구 전망」, 2017 / 「미래 종교 예측(2010~2050)」, 2015 - 아산정책연구원, 「2026년 아산 국제정세전망: 심화되는 무질서」, 2026.1 / 「2024 국제정세전망: 연대결성」, 2023.12 -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 「1970~2050년 기독교·이슬람 인구 예측」, 2024 - 유해석,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킹스칼리지 런던ICSR, 「유럽 국가별 무슬림 비율」, 2019 - 르네 피스터(독일 슈피겔), 『잘못된 단어들』(Falsche Worte), 2024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1996 / 버나드 루이스, 유럽 이슬람화 경고 발언 - 전국인력신문, 「중러 연대와 한국의 선택」, 2026.2 / 민주주의평판지수(DP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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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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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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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 pixabay.com/ko/photos 1. 문제의 출발점: 왜 이 전쟁을 둘러싼 인식이 갈리는가 2024년 이후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시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되기도 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진실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는 단순한 시각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 전제, 이념적 지향, 그리고 정보 선택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란 문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국제 핵 질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중동의 종파 갈등, 에너지 지정학, 미국 패권의 향방,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가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환원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한쪽은 이것을 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으로 축소하고, 다른 한쪽은 이란의 위협성만을 부각해 군사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한다. 어느 쪽도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는 오랫동안 두 흐름이 공존해왔다. 하나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 신학의 흐름이다. 이 두 흐름은 국내 정치적 사안에서도 자주 충돌했지만, 이란과 같은 국제 분쟁 문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계열은 피해자의 시각을 앞세우고, 보수 계열은 안보와 질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교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언어로 이 복잡한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이 글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고,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교회 내 두 시선의 신학적 근거를 점검한 후, 기독교적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말할 때,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복잡한 국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교회의 목소리가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발언은 더욱 엄격한 지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2. 이란 정권의 실체: 간과되거나 축소되는 현실 (1) 신정 독재 체제의 구조와 본질 이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사실은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최고지도자(라흐바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의 종교 권위자이자 정치 권력자로서, 군·사법·방송·외교·안보 전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 이념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권력이 다시 종교 이념을 강요하는 이중 구조다. 대통령과 의회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 후보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선거의 실질적 경쟁성을 박탈한다. 즉, 이란의 선거는 민주주의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치적 반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모두 심각하게 제한된다. 공개 처형은 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집행된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이란의 처형 건수와 방식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치범,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들이 사형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현실은 이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 종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란 헌법은 명목상 일부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배교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란 내 지하 교회 신자들은 끊임없는 위협과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 적발될 경우 체포와 투옥, 고문을 감수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이란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맥락이다. (2) 여성 인권 문제와 국제적 파장 2022년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22세 여성이 히잡 착용 규정 위반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전역에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수백만 명이 저항에 나섰다. 이란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란 신정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들은 이란에서 의복 규정 준수를 강제받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 결혼, 이혼, 여행, 취업 등 다양한 법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이슬람 형법에 따라 여성의 증언 효력은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법적으로 제도화한 인권 침해다. 이 점을 평가에서 제외할 때, 이란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왜곡된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여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히잡을 공개적으로 벗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란 국내의 인권 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내부의 저항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등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해야 한다. (3) 국제적 위협 행위와 대리전 구조 이란의 문제는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다양한 친이란 민병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중동 전역의 무장 세력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이 세력들은 이란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일종의 대리 전력이며, 이란은 이들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도 지역 내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 이것이 소위 '그림자 전쟁(Shadow War)' 혹은 '대리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국제사회의 오랜 우려 사항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합의(JCPOA)에 따른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평화적 핵 활용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할 경우 중동의 안보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여러 아랍 국가들도 핵 보유를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즉, 이란의 핵 문제는 이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태도도 명백하다. 이란 최고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소멸을 선언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실행된 목표다. 헤즈볼라를 통한 레바논 북부에서의 공격,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통한 가자 지구에서의 긴장, 시리아를 통한 이란 군사 인프라 구축 등은 이 목표를 향한 구체적 행동들이다. (4) '약자 프레임'의 한계와 위험 이러한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민간인 피해와 특정 시설 폭격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맥락을 제거한 감정 정치다. '약자 프레임'은 이란 정권의 실제 행위와 책임을 은폐하고, 복잡한 도덕적 판단의 공간을 차단한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중동 전역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노출된 국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은 오류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 성명들이 이란 정권의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군사행동의 결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에 가까워진다. 예언자적 교회의 목소리는 특정 진영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편드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지만, 약자처럼 보이는 자를 무조건 편드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pixabay.com/ko/photos 3. 전쟁의 원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긴장 (1) 핵 문제의 역사와 현재 이란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우려 대상이었다. 2003년 이란이 비밀 핵 시설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 끝에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일명 이란 핵합의를 타결했다. 핵합의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제한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압박' 전략을 내세우며 이란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은 이에 대응하여 우라늄 농축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바이든 행정부가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성과 없이 장기화되었고,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핵무기 개발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다. 이란은 약속을 어겼고, 미국은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외교사적 맥락 없이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결말만 보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현재 시점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불성실이다. (2) 대리전 구조와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갈등은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복잡한 대리전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왔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후티를 통해 예멘과 홍해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군사 자산에 대한 공습을 수시로 단행해왔고, 이란 핵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책임을 단순히 공격을 가한 쪽에만 돌리는 것은 구조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이 민간 거주 지역에 무기를 은닉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책임은 해당 지역에 무기를 배치한 세력에도 있다. 국제 인도주의법은 이른바 '인간 방패' 사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종파 갈등도 중동 불안정의 핵심 요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 분쟁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지에서 시아파 집단을 지원한다. 이 종파 경쟁이 중동 전역의 내전과 갈등을 심화시켜왔다는 사실은 이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맥락이다. (3)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와 윤리적 복잡성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자국의 존립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이란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이스라엘 소멸 발언,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통한 군사적 압박, 이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의 핵 개발 완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중동 지역의 실제 안보 상황을 배경으로 한 실존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평가가 이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완전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란의 이스라엘 소멸 선언과 그를 향한 실제 행동에 대한 동등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쪽에 대한 비판만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향이다. 4. 트럼프의 전략: 단순한 전쟁광인가, 계산된 압박인가 (1) 최대 압박 전략의 구조와 논리 도널드 트럼프의 대이란 정책은 단순히 '호전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불리며, 이는 군사력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이란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이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수백 개의 추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란의 석유 수출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란 화폐인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란 정권 내부에서도 압박의 효과가 감지되었으며,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트럼프 전략의 지지자들은 이 압박이 없었다면 이란이 더 빠르게 핵 개발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도 한계가 있다. 경제 제재로 인한 고통은 이란 정권보다 이란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크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약품과 의료 기기 등 인도주의적 품목에 대한 제재 면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란이 이런 물품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경제적 고통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하는 전략은 일반 시민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 한계도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2) 제한적 군사행동과 전략적 의도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가장 주목받은 군사행동은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작전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대리전 전략을 총괄하는 인물로,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민병대, 후티 등에 대한 지원과 지휘를 담당해온 실세였다.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미국 기지를 공격해 미국 시민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이 작전이 단행되었다. 이 작전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이란이 전면전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제한적 대응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 미사일 공격은 사전에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며, 이란이 실제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즉,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무모한 전쟁 행위가 아니라, 이란의 확전 의지를 시험하고 억제력을 재설정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3) 미디어 왜곡과 교회의 인식 문제 일부 한국교회 성명서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전쟁 유발자'로 규정하고, 그의 대이란 정책을 무조건적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특정 시각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결과다. 진보적 성향의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프레임화해왔으며, 그 서사가 한국교회의 일부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분별은 미디어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전하지 않는 것을 함께 물어야 한다.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오류를 범했고,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때, 이란 정권의 행위와 책임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균형을 잃는다. 교회는 강대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지적이 독재 정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pixabay.com/ko/photos 5. 국제정세 속에서 본 이란 충돌: 더 큰 구조를 보라 (1) 미국 대 반미 축의 구조 이란을 둘러싼 갈등은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양자 문제를 넘어, 더 큰 국제 질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의 대이란 제재에 반대하며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강화해왔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제재를 피해 수입함으로써 이란 경제를 간접 지원해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반미 세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이란 문제를 다루면, 왜 서방 세계가 이란의 핵 개발을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지, 왜 이란에 대한 제재가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아키텍처의 문제로 다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 에너지와 지정학: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의미 이란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 수출량의 약 20~30%가 통과한다.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즉각적이고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 문제는 단지 중동 지역의 안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문제다. 한국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며, 그 수송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란과의 군사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책임 있는 시민적 신학의 요소다. 6. 한국교회의 두 시선: 신학적 구조 분석 (1) 평화 절대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한계 한국교회 내 진보적 흐름에서 이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평화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원수 사랑과 비폭력으로 요약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는 이 입장의 대표적 성경적 근거다. 따라서 어떤 군사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입장의 강점은 전쟁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강자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려는 비판적 저항성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첫째, 악의 현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비폭력적 저항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앞에서 무저항은 옳은 응답이었는가? 둘째, 구조적 불의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억제마저 거부하는 것은 때로 악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는다. 평화 절대주의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의 차원과 교회의 공적 증언의 차원에서는 더 복잡한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화 선포는 개인적 비폭력의 도전이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지만, 그것이 곧 현실 정치에서 모든 강제력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응답이었다. (2) 정의 전쟁론의 전통과 적용의 한계 다른 한편, 한국교회의 보수적 흐름에서는 정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관점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 전쟁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거치며 발전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이 이론은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매우 엄격한 조건들을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정당 전쟁의 조건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과 전쟁 수행의 정당성(jus in bello)이다. 전자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합법적 권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등을 요구한다. 후자는 민간인 보호, 비례적 무력 사용, 금지된 무기 사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이 조건들은 매우 엄격하며, 현실의 전쟁 중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이 엄격한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라는 대원칙만을 내세워 특정 군사행동을 성급하게 정당화하는 경우다. 이란 정권이 분명히 위험하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곧 이란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구체적 행동은 정당 전쟁의 모든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될 때, 보수적 교회의 목소리는 국가 권력의 대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3) 두 시선의 공통된 문제: 진실의 일부만을 보는 것 흥미롭게도, 평화 절대주의와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라는 두 극단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평화 절대주의는 이란의 위협과 책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는 군사행동의 부당한 결과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어느 쪽도 전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 있지 않다. 기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전체 진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만 실현된다. 교회가 이 전쟁 문제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학적·이념적 편향이 진실의 인식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7. 문제의 핵심: 균형 상실과 감정 정치 (1) 성명서의 구조적 편향 분석 이란 문제를 다루는 일부 한국교회 단체들의 성명서를 분석하면 공통적인 구조적 편향이 드러난다. 첫째, 원인 제거다. 이란 정권의 위협적 행위, 핵 개발, 대리전 전략, 국내 억압 등은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되어 다루어진다. 반면 군사행동의 결과, 특히 민간인 피해와 인프라 파괴는 상세하고 감정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군사행동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반응만을 갖도록 유도한다. 둘째, 도덕적 단순화다. 복잡한 도덕적 현실이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한쪽은 절대 악으로, 다른 쪽은 절대 피해자로 규정된다. 이 구도에서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들에게 행한 악은 사라진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가한 측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악마화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연극이다. 셋째, 감정 중심 서술이다. 학교, 병원, 어린이, 피난민 등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서술의 중심을 이루며, 구조적·법적·역사적 책임 분석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공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도덕적 책임의 방기다. 특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선포하는 성명서라면, 그것은 훨씬 더 엄격한 지적 성실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2) 맥락 없는 인도주의의 위험 인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그 생명과 존엄은 보호받아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은 어디서 누가 행했든 비극이며, 교회는 그 비극에 민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인도주의'는 오히려 더 큰 폭력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란 정권이 핵을 개발하고, 중동 전역에 대리 세력을 통해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충돌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가? 단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없는 평화적 현상 유지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재앙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없는 인도주의는 결국 현실 회피가 된다. 나아가, 인도주의적 우려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란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소수 종교인들이 박해받고, 정치범들이 처형될 때 한국교회 단체들은 얼마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란 정권의 내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념적 선택이다. pixabay.com/ko/photos 8. 그렇다면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 전쟁 윤리의 재검토 (1) 성경의 긴장: 평화와 질서 사이 기독교 윤리는 전쟁 문제에 있어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과 그 결과에 대한 탄식도 담고 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 건축의 영광을 허락받지 못했다(대상 22:8).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사람으로, 원수 사랑과 폭력 거부를 가르치셨다.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이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했다.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과 '그것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롬 13:4)라는 말씀이 모두 정경 안에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모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긴장 속에서 신학적 판단은 더욱 섬세해야 하며, 어느 한 구절을 절대화하여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2) 정당 전쟁의 조건과 현실 적용 전통적 정당 전쟁 이론은 다음의 조건들을 제시한다. 정당한 이유(just cause)란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의도(right intention)란 보복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라 선의 달성과 악의 억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legitimate authority)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예상되는 선이 악을 초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에 적용할 때, 쉬운 결론은 없다. 이란 정권의 위협과 핵 개발은 '정당한 이유'의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외교적 수단이 정말 소진되었는가? 제재가 충분한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가? '비례성' 조건과 관련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보다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큰 갈등의 촉발점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으며, 교회는 이 불확실성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정당 전쟁론이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도, 무조건적 반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 조건들을 성실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없이 '평화를 원하니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이란이 위험하니 군사행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신학적 판단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9. 기독교적 평가: 무엇이 옳은 태도인가 (1) 진실을 전체로 보는 용기 기독교적 판단의 첫 번째 요건은 진실을 부분적으로 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란 정권의 억압적 성격, 대리전 전략, 핵 개발 의혹은 진실이다. 민간인의 고통, 전쟁의 파괴적 결과,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도 진실이다. 국제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강대국의 오류 가능성, 전쟁의 비의도적 결과도 진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다. 선택적 진실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즉 '침묵을 통한 거짓(lying by omission)'은 직접적 거짓말 못지않게 사람을 기만한다. 교회가 이 방식으로 공적 성명을 발표하거나 설교를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완전한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다. (2) 정의와 사랑의 통합 기독교 윤리에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가 사랑의 사회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차갑고 억압적인 율법주의가 되며, 정의 없는 사랑은 구조적 불의를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된다.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란 국민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한 정의로운 비판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억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균형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붙드는 것은 항상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판단이 형성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동시적 표현이었다.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는 분별자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분별(discernment)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소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영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다. 이란 전쟁 문제에서 교회의 소명은 특정 정치 세력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PR 창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의 종교적 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그 어느 정치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기준으로 모든 편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모습이다. 분별은 또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즉각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정보 수집과 기도와 신학적 성찰 이후에 나오는 신중한 판단이, 비록 늦더라도 훨씬 더 큰 영적 무게를 갖는다. 교회가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반응하려 할 때, 그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평론가가 되는 길이다. (4) 누구의 편에 서는가: 근본적 질문 이 모든 논의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국의 편인가, 이란의 편인가? 이스라엘의 편인가, 팔레스타인의 편인가? 강자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응답은 이 질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이란 국민의 자유를 원하며,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원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과 예멘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의 의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의 불의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지만, 불의한 평화보다는 고통스러운 정의를 선택한다. 이 입장은 정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진영도 교회를 온전히 자기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권력 구조 안에 흡수되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자리다.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이스라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섰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10. 전쟁의 전망과 교회의 과제 (1) 세 가지 시나리오 이란을 둘러싼 충돌의 향후 전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는 제한적 충돌의 지속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이란과 미국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 시나리오다. 사이버 공격, 표적 암살,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전투 등이 지속되는 '회색 지대' 갈등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서서히 진전되고, 국제 제재의 효과는 점점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확전 시나리오다. 어느 한쪽의 오판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전면전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거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타격을 단행하는 경우다. 이 시나리오는 중동 전역을 충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공격,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미군과 이란 간의 직접 충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셋째는 협상을 통한 현상 관리다. 이란이 경제적 압박과 내부 불만을 이기지 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거나, 강대국들이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란의 완전한 핵 개발 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핵 능력의 부분적 동결과 제재의 부분적 완화를 교환하는 중간 지점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교회의 구체적 과제 이 세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든, 교회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올바른 정보와 균형 있는 분석에 기반한 공적 발언을 해야 한다.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이란의 행위와 국제적 맥락을 함께 언급하며, 어느 편의 서사도 검증 없이 수용하지 않는 지적 성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란 국민과 중동의 모든 민간인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인도주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이란의 지하 기독교 공동체와 박해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위한 연대도 중요하다. 셋째, 이 위기가 복음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동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영원한 소망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란 내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 역설을 보여준다. 교회는 정치적 논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혼란에 응답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 평화 구조 형성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종교 자유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결론: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 이란 전쟁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완전하다. 현실은 그 어느 단어도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이란 국민은 그 억압의 피해자들이다. 군사행동은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민간인의 고통을 수반한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불의 위에 세워진 평화는 결국 더 큰 폭력의 씨앗이 된다. 교회가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명은 때로 긴장 관계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단기적 평화를 방해할 수 있다. 이 긴장들을 직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소명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교회가 어느 진영의 편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진영에 진실을 말했을 때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본회퍼는 독일의 편도, 연합국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섰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에 저항한 데즈몬드 투투는 흑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하나님의 진실의 편에 섰다. 이들은 인기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역사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떤 권력보다도 크다. 미국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어떤 국제 기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인이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국가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군사 동맹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의가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항상 이 세상의 권력 구조 너머에 있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님을 안다.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자리는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 앞에서.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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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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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붕괴 위험, 지정학을 넘어 영적 전환할 때다
-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격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경제는 마비되고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주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노출돼 있다. 무엇보다 북한을 지탱해온 중국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나 군사 전략의 변화로만 본다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시는 과정, 그리고 어둠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영적 질서의 드러남으로 해석해야 한다. 산사태처럼 오는 통일 많은 이들은 통일이 단계적 대화와 협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역사와 국제정치의 현실은 다르다. 독일, 예멘, 작은 국가들의 병합 사례까지도 모두 ‘붕괴’가 먼저 찾아온 뒤에야 가능했다. 성경은 “빛과 어둠은 섞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와 전체주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통일은 이상적일 수 있으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통일은 대화로 설계되는 구조물이 아니라, 내부 붕괴가 외부 질서와 맞물리는 순간 갑작스럽게 열리는 문과 같다.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체제의 한계 북한의 붕괴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니다. 그 뿌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체제 유지의 도구로 취급한 데 있다. 농부는 생산 수치로, 아이들은 행사 도구로, 노인은 인구 숫자로만 계산되었다. 예배와 성경은 금지되었고, 생각은 통제되었다. 인간 존엄이 철저히 무너진 체제는 결국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죄로 세워진 권력과 우상화된 통치가 역사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이다. 중국의 흔들림, 북한의 비틀거림 북한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신호는 중국의 흔들림이다. 북한의 생명줄은 중국이었고, 그 그림자 권력 역시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도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개방하면 경제가 살아도 정권은 무너지고, 닫으면 정권은 유지되지만 국민 경제가 붕괴한다. 이는 북한과 동일한 딜레마다. 결국 진리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는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북한, 평행선의 대화 최근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핵 문제 때문이지만, 본질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미국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북한은 통제와 국가 우선을 말한다. 겉으로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교제할 수 없듯, 이 구조에서는 대화가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체성,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 북한과 중국의 흔들림은 한국이 체제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할 때라는 신호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거나 ‘두 국가 인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헌법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와도 충돌한다. 현 정권의 북한 체제를 존중한다는 태도는 곧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폭정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유와 양심, 예배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승인하는 것이다. 한국이 체제의 본질을 흐리면 역사의 전환기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붕괴의 영적 의미: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북한의 붕괴는 단순히 냉전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억눌린 백성들을 향해 열어가시는 해방의 시간이며,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순간이다. 북한 붕괴는 비극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가 어둠을 깨뜨리는 영적 승리의 순간이다. 북한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 산사태가 오랜 균열 끝에 무너지고, 빛이 한순간에 어둠을 몰아내듯, 역사의 전환도 그렇게 온다. 그 순간을 준비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의 체제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북한 주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북한의 붕괴는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기독교인들,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 빛 아래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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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붕괴 위험, 지정학을 넘어 영적 전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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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사상 실험은 위험한 실험
- 칼럼/양봉식 목사(길과생명연구소 소장) 내 손에 들어온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를 읽고 느낀 바를 적어보고자 한다. 권력이 새롭게 시작되면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변함없이 이재명 정부가 잘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겉표면에 뜬 기름을 보고 말할 뿐, 다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이다. 더구나 이재명 정부가 추구하는 것을 지지차원에서 쓴 논리적인 책처럼 보여서 좀더 상세하게 읽어보고 그것을 나누려고 한다.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국민주권정부’라는 구호는 듣기에 참 그럴듯하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이라는 비전도, “국민이 하나 되는 정치”라는 목표도 감성적으로는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구호와 현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깊다. 국민이 주인이라면 권력은 어떻게 나뉘고, 책임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 ‘하나 됨’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통합의 언어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원리 자체를 다시 성찰하는 철학적 대화다. 공화주의, 진보적 이상인가 새로운 이념 포장인가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는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했다. 책은 6인의 학자·활동가가 참여한 좌담을 엮어, 한국 사회의 사상적 지형을 진단하며 ‘새 공화주의’를 모색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제시하는 공화주의가 단순히 제도 개혁이나 정치 구호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동향과 전망』이 제시한 것처럼, 그들은 ‘반자본주의’와 ‘반국가’의 꿈이 좌절된 시대에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혁명” 대신 공화주의적 시민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혁명 대신 광장의 시민정치로 제도권을 변혁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공화주의가 과연 자유주의의 대안일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의 재포장일 뿐일까?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려는 공화주의의 시도는 오래된 정치철학의 과제지만, 지금 이 담론은 마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포장된 또 다른 이념 실험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화주의 담론의 이념적 향방 책의 필자들은 한결같이 “사상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구갑우는 반(反)자본주의 혁명의 좌절 속에서 새 공화주의를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백승욱은 자유주의 자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며, 유희석은 공화주의를 자기성찰의 도구로 본다. 장은주는 사이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극복을 말하고, 황순식은 ‘성장과 평등’이라는 이재명 정부의 모순을 지적하며 ‘비지배 자유’와 ‘호혜성’을 제시한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의견의 교차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인 방향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념적으로 보면 이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자, 진보적 사회민주주의와 신좌파적 공화주의의 접목 시도로 읽힌다. 다시 말해, 이 담론은 ‘국가·시장·시민’을 재구성하려는 새로운 정치철학 실험이지만, 동시에 기존 좌파 사상의 재구성으로도 볼 수 있다. 변형된 막시즘의 그림자 특히 “공화주의를 담지한 광장의 시민정치”라는 표현은 그람시의 ‘진지전’(hegemony war)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제도권을 전복하는 대신, 시민사회의 헤게모니를 통해 국가를 재편하겠다는 전략은, 전통적 마르크시즘의 무장혁명 대신 ‘문화적 전복’을 택한 신(新)마르크시즘의 전략과 닮았다. 이런 맥락에서 ‘새 공화주의’는 변형된 막시즘으로 의심받을 여지를 충분히 안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정치적 비전이 이런 사상적 흐름과 맞물린다면, 그것은 단순한 통치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국민주권을 말하지만, 그 ‘국민’의 개념이 자유민주주의적 인격의 총합이 아니라 ‘집단적 의식’의 주체로 바뀌는 순간, 공화국은 자유의 기반을 잃는다. 진정한 공화는 어디서 오는가 공화주의는 원래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선을 조화시키려는 고대적 이상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 그리고 자기비판적 시민의 덕성에 있다. 그것은 ‘국가를 통한 개혁’이 아니라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중시한다. 이 점에서 볼 때, 새 공화주의가 ‘시민정치’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특정 이념적 방향으로 시민을 재교육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형태의 통치철학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분명 새로운 사상적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대화는 ‘사상을 위한 사상’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양심을 지키기 위한 대화여야 한다. 공화주의가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보완이 되려면, 권력의 집중이 아닌 분산, 이념의 선전이 아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한국의 사상 정세와 새 공화주의』는 사상의 실험으로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정권의 사상적 변명이 되거나 이념의 재포장이 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공화’를 빌미로 자유를 잃게 될 것이다. 진정한 공화는 사상이 아니라, 자기비판과 양심의 자유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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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사상 실험은 위험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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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보이지 않는 전쟁, 체제의 충돌… 경주 APEC 이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 ▲한미정상이 만나 선물을 교환하고 악수를 나누었지만, 그 이면에 일어난 협상은 한국을 위험하게 하는 일이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총성 없는 체제의 충돌 지금 세계는 조용한 전쟁 중이다. 탱크도, 미사일도 없다. 하지만 이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은 단순한 무역 분쟁이나 군사적 긴장 수준을 넘어섰다. 이 싸움은 ‘체제’의 충돌이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통제와 자유, 전체주의와 시민사회. 이념과 가치, 산업과 기술, 외교와 안보가 얽힌 복합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2025년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이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중 한국과의 관계를 재정의했고, 중국은 자원과 외교를 무기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 무대 뒤에서 세계 질서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재편되고 있었다. 중국의 야망과 균열: 일대일로의 그림자 중국은 지난 10년간 ‘일대일로(BRI)’라는 이름 아래 세계 곳곳에 손을 뻗었다. 도로와 항만, 철도와 에너지 인프라를 건설하며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연결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경제 협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 체제를 세계로 확장하려는 전략적 시도였다. 중국은 희토류, 배터리, 태양광 등 핵심 자원을 독점하며, 자원 사슬을 통해 다른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묶어두려 했다. 실제로 희토류의 80%, 폴리실리콘의 70%, 배터리 핵심소재의 75%를 중국이 쥐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 독점 구조는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그 야망은 균열을 맞고 있다. 부동산 위기, 지방정부의 부채, 청년 실업, 소비 침체 등 중국 내부의 경제적 취약성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성장률은 3%대에 머물고, 국제 사회의 신뢰는 흔들리고 있다. 기술 봉쇄와 외교적 고립은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을 점차 축소시키고 있다. 미국의 반격: 트럼프 2.0의 질서 재편 미국은 이 싸움을 단순한 패권 경쟁으로 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유진영의 재편’을 목표로, 관세와 수출통제, 산업정책을 총동원하고 있다. 보편관세와 상호무역법은 동맹국들에게도 선택을 강요한다. “의무를 이행한 국가에만 혜택을 준다”는 원칙은 한국을 포함한 중간지대 국가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반도체, AI,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통제는 중국의 산업사슬을 정밀하게 봉쇄하고 있다. IRA(인플레이션감축법)와 친환경차 보조금 정책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미국은 이제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재편하는 설계자로 나서고 있다. ▲한미 정상이 겉으로는 웃지만 그의 이면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경주 APEC, 선택을 강요한 무대 2025년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는 그 상징적 무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 중 자동차 관세 인하, 대규모 투자 패키지, 조선·원전 협력 등을 제안하며 한국을 미국 중심축에 묶으려 했다. 동시에 호주와 희토류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중국의 자원 독점 사슬을 끊으려는 전략을 펼쳤다. 중국은 이에 맞서 BRI 계약과 투자를 확대하며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린 수사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경주는 단순한 외교 행사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재편을 위한 거래의 장이었다. 한국의 선택: 전략적 편입인가 종속인가 이재명 정부는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미국과의 안보 협력도 병행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 APEC 이후, 등거리 외교의 여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한국은 이제 자유진영의 핵심 파트너로서, 조건부 혜택을 얻는 구조 속에 있다. 한국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에 참여하면서도, 자국의 산업·금융·인력 기반을 지켜야 한다. 반도체·HBM·소재·장비 분야에서 미국과의 투트랙 전략을 펼치고, 희토류·배터리·태양광 분야에서는 탈중국 체인을 선점해야 한다. 조선·원전·에너지 분야에서는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 기술의 이익을 회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단순히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 신앙적 통찰과 공적 소명을 회복해야 한다. 지금의 충돌은 사상·경제·안보를 아우르는 총체 전쟁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라는 이름 아래 전체주의적 통제가 확장되는 순간, 신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훼손된다. 교회는 자유민주주의의 장점—권력분립, 법치, 시장, 시민사회—를 공적 신앙의 무대로 이해하고,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변론해야 한다. 진리와 사실성을 회복하고, 가짜 평화와 가짜 번영을 폭로하며, 성도들에게 사실 기반의 시사 해석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의 실천: 세 가지 우선순위 첫째, 진리 교육이다. 언론, 아카데미, 청년교육을 통해 성도들에게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을 길러야 한다. 둘째, 취약계층 돌봄이다. 세계 질서의 재편은 물가·고용·산업 전환의 비용을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시킨다. 교회는 긴급구호, 직업전환, 멘토링의 공동체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소명경제(Economy of Calling)다. 직업을 소명으로 이해하게 돕고, 청년들에게 기술·언어·윤리를 통합한 사역-직업의 이원통합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시나리오별 대응 전략> ●중국 금융·부동산 쇼크: 한국은 대체 시장을 가속화하고, 교회는 실직자 지원 네트워크를 즉시 전개해야 한다. ●대만 유사·해양 충돌: 한국은 확장억제를 강화하고, 교회는 위기 커뮤니케이션과 재난 대응 매뉴얼을 구비해야 한다. ●장기 경쟁 구도: 한국은 맞춤형 FTA와 공급망 표준을 구축하고, 교회는 지역 돌봄과 청년 훈련을 상시화해야 한다. 누구의 편에 서서, 어떤 질서를 세울 것인가 경주 APEC은 선택을 강요하는 문턱이었다. 트럼프 2.0의 세계관은 ‘미국 우선’을 넘어, 자유진영 중심의 경제·안보 재배열이다. 중국은 BRI와 자원·외교로 대응하고 있지만, 부채·부동산·성장 둔화라는 내상은 깊다. 한국은 ‘종속’이 아니라 ‘편입의 대가를 극대화’하는 정교한 협상과 전략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진리의 해석 공동체로서, 성도와 시민에게 사실과 자유의 윤리를 가르치고, 전환기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 이 싸움은 탱크와 미사일이 아니라, 사상·규범·산업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는 싸움이다. 한국은 이 전쟁에서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서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앞으로의 세계 질서는 더욱 복잡하고 불확실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유와 인권, 법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가치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이 가치들을 지키고 확장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 역사적 전환기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시대를 꿰뚫는 통찰과 용기를 심어주고,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이들을 품는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신앙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공적 신앙의 모델을 제시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희망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이 싸움은 단순한 정치·경제·군사적 경쟁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총체적 전쟁이다. 한국과 한국교회는 이 전선에서 분명한 입장을 세우고, 지혜와 용기로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부록: 참고 문헌 및 자료 김영수, 『현대 국제정치와 동아시아 질서』, 서울대학교 출판부, 2023. 박지훈, 『중국 일대일로 전략의 경제적 영향』,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4. 이민정, 『미국의 산업정책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고려대학교 출판부, 2025. 최은영, 『한국 외교정책의 변화와 전략적 선택』, 연세대학교 출판부, 2025. 한국교회연합, 『신앙과 사회: 한국교회의 공적 역할』,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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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보이지 않는 전쟁, 체제의 충돌… 경주 APEC 이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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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평화·책임’의 key는 교회에 있다
- ▲경주 APEC에 참석한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한반도는 아직 전쟁중이라고 밝혔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1. 역사적 진단: ‘정전 상태’는 미완의 역사, 동시에 은혜의 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외교적으로는 사실 확인이지만, 신학적으로는 “미완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언어입니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는 전쟁을 멈췄을 뿐, 평화를 얻지 못한 땅입니다. 그 사이 70년이 넘는 정전의 시간은 인간의 정치 실패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유예의 시간(grace period) 이기도 합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시며, 땅 끝까지 창을 꺾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 (시편 46:9) 한반도의 정전은 단순히 외교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남과 북 모두를 멸절하지 않으신 역사적 간섭의 흔적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공식 전쟁 상태”라는 말은 심판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는 언어입니다. 2. 정치적 진단: ‘종전 선언’의 정치화와 영적 공백 한국의 진보 정권들이 지속적으로 종전을 주장한 배경에는 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통해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 ② 미군 주둔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의도, ③ 북한 체제와의 상호인정(normalization)을 통한 긴장 완화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접근은 ‘평화의 구조’보다 ‘정치적 선언’에 집중한 한계를 가집니다. 평화는 서명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진정한 평화는 정의와 진실의 토대 위에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나 평화가 없도다.” (렘 6:14) 즉, 하나님 없는 평화는 언제나 거짓 평화입니다. 한반도의 종전 선언이 진정한 평화가 되려면, 그 안에 회개와 정의, 그리고 진리의 영(요 16:13) 이 깃들어야 합니다. 3. 신학적 진단: 국가의 주권인가, 하나님의 주권인가 트럼프의 발언은 “한반도 전쟁의 법적 상태”를 언급했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주권의 문제입니다. 누가 이 땅의 역사를 다스리는가? 남한도 북한도, 미국도 중국도 아닙니다. 이 땅의 주권은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께 속하였으며, 그가 열방을 다스리시리로다.” (시편 22:28) 남북의 체제, 미국의 패권, 중국의 영향력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아래 한정된 도구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은 아시리아와 바벨론을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지만, 그들이 교만해졌을 때 심판하셨습니다(사 10:5-12). ▲한반도는 휴전이지 전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사진은 APEC의 한미정산회담 모습(연합뉴스 제공) 오늘의 한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대국의 외교전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이 주권의 시각을 잃고, 정치 이념의 시각으로만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4. 영적 진단: 이념보다 깊은 분열의 영 남북의 분단은 단순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교만이 만든 영적 분열입니다. 좌·우의 이념 대립은 마치 바벨탑의 언어혼잡처럼,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 현상입니다. “너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15) 이념의 이름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진영의 이름으로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 통일성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교회는 어느 진영의 대변인이 아니라, 양쪽을 향해 회개를 외치는 선지자적 존재여야 합니다. 5. 윤리적 진단: 정의 없는 평화는 불의, 평화 없는 정의는 폭력 하나님의 평화(shalom)는 단지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צֶדֶק, tsedeq)가 강같이 흐르는 상태입니다(암 5:24). 그러나 오늘의 한반도는 정의와 평화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정의 없는 평화를 말하고, 남한의 일부는 평화 없는 정의를 말합니다. 둘 다 복음의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정의와 자비의 입맞춤(시 85:10)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느 편의 언어를 반복하기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언어로 발언해야 합니다. 6. 구속사적 관점: 하나님은 분단의 역사 속에서도 일하신다 한반도의 분단은 비극이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서도 구속의 서사를 이어가십니다. 70년의 분단 속에서도 복음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하에서 하늘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전쟁을 심판으로 쓰시지만, 그 심판의 끝에는 언제나 회복의 약속을 두십니다. “내가 너희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4) 트럼프의 발언은 외교적 발언처럼 들리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역사적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7. 교회의 사명: ‘평화의 중보자’로 서라 이제 교회는 정치적 중재자가 아니라, 영적 중보자로 서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교회가 할 일은 좌·우를 향한 회개의 메시지, 복음 안에서의 화해의 증언, 정의롭고 온유한 그리스도의 통치의 증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마 5:9) 한국 교회가 이 사명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은 돌들로도 외치게 하실 것입니다(눅 19:40). 8. ‘전쟁 상태’의 의미: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에서 평화를 준비하신다 트럼프의 말은 정치적 현실의 진단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재확인하는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한반도는 아직 전쟁 상태이지만, 그것은 “평화를 향한 마지막 여정의 진통기”일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정치의 언어 대신 복음의 언어로, 이념의 대결 대신 진리의 사랑으로, 민족의 상처 위에 하나님의 평화의 깃발을 세워야 합니다. “그가 우리로 화평하게 하셨고,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하나님은 남한의 성도들의 통일에 대한 기도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또한 북한에는 당신의 백성이 계십니다. 여전히 전쟁 중인 한반도의 통일은 열쇠는 교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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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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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평화·책임’의 key는 교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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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
- ■ 또다른 차별을 위한 서곡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명제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법안의 내용과 적용 방식을 놓고는 여전히 첨예한 의견 대립이 존재한다. 특히 종교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우려들은 단순히 보수적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사회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계의 우려를 중심으로, 법안이 가진 잠재적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차별금지라는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안의 구체적 조항들이 야기할 수 있는 부작용과 사회적 갈등 요소들을 냉정히 분석하여, 보다 균형 잡힌 법제화 방향을 모색해보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vs 차별금지, 경계선은 어디인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표현의 자유와 차별금지 사이의 경계선 설정 문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교회 내에서의 설교나 교육이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목회자가 설교 중에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본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종교적 신념 문제를 넘어서, 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교리와 신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와 직결된다. 문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들이 이러한 종교적 표현에 대한 예외 조항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그 범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법조문의 해석은 결국 법원의 판단에 맡겨지게 되는데, 판사의 가치관이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동일한 발언도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해외 사례를 보면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비판이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된 사례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물론 각국의 법제도와 사회문화적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선례들이 한국의 종교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 개념 정의의 모호성과 확대 해석의 위험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핵심 개념들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특히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과 같은 용어들은 그 범위와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자의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성적 지향'이라는 개념 하나만 봐도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하다. 전통적인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성적 지향이 포함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면 법 적용 과정에서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성별 정체성'의 경우에도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 그리고 개인이 인식하는 성별 간의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법적으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적 모호성은 법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시민들로 하여금 어떤 행위나 표현이 법에 저촉되는지를 사전에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종교인들이나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의 신념 표현이 언제든 차별로 해석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게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법안의 일부 조항들이 너무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규정되어 있어, 본래 의도하지 않았던 영역까지도 법의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법의 과잉 금지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권 행사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 역차별 논란과 다수의 권리 침해 가능성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또 다른 쟁점은 소위 '역차별' 문제다.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선의의 목적이 오히려 다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제약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다. 구체적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때, 그것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해석되어 법적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교사가 수업 중에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을 때, 이것이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다. 민주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가치관이 자유롭게 표현되고 토론될 수 있어야 하는데, 특정한 관점의 표현이 법적으로 금지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법적 제재의 가능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 수 있다.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진솔한 생각을 표현하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담론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법과 교육과정에 따라 이와 다른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 교육 현장에서의 혼란과 갈등 교육 분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을 영역 중 하나다. 공교육 기관에서는 국가 정책과 법률에 따라 교육과정이 운영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관련 내용이 교육과정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과 관련된 교육을 실시할 때,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학부모나 교사들과의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서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교육하면서 동성 부모 가정을 소개한다면, 이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또한 이러한 교육에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차별로 간주될 수 있다면, 학부모의 교육권은 어떻게 보장될 것인가? 교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법과 교육과정에 따라 이와 다른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는 교사의 양심의 자유와 교육의 자유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더 나아가, 사립학교나 종교계 학교의 경우에는 더욱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들 학교는 고유한 교육 철학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설립된 것인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이러한 학교들의 교육 자율성을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 ■ 종교 자유와의 충돌 가능성 종교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개인이 종교를 믿을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교리와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한다. 그런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종교 공동체의 신앙 실천이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거나, 동성애자의 교회 직분 취임을 거부하는 것이 차별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도 무제한적인 것은 아니며, 다른 기본권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하지만 종교 공동체 내부의 교리나 신앙 실천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율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문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들이 종교 자유에 대한 예외 조항을 충분히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적 행위나 표현에 대한 예외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가 모호하다면 여전히 갈등의 소지는 남아있게 된다. ■ 사회적 갈등 증폭의 우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찬성 측과 반대 측 간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고 있으며, 상호 이해와 대화보다는 감정적 대립이 앞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법이 제정된 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법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분쟁 사례들이 발생하면, 이를 둘러싸고 또 다른 사회적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 언론과 SNS를 통해 사례들이 확산되면서 여론이 극단화될 위험도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갈등이 사회 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집단들이 법적 다툼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할 때, 사회 전체의 화합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또한 법 제정 과정에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법의 정당성과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법은 사회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바탕으로 할 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외 사례의 교훈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법률들이 이미 시행되고 있는 해외 사례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차별금지와 관련된 법률들이 종교 자유와 충돌하는 사례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성 결혼 케이크 제작을 거부한 베이커리 업주가 법적 분쟁에 휘말린 사건이나,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견해를 표명한 목회자들이 사회적 비난을 받은 사례들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차별금지법이 종교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와 어떻게 충돌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영국에서도 유사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일부 경우에는 법적 제재나 사회적 압박을 받는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물론 각국의 법제도와 사회문화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해외 사례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선례들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는 다양한 기본권 간의 균형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하며, 특히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충분한 보장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창조는 남자와 여자이지 제3의 성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 대안적 접근 방법의 모색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하고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법안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이뤄져야 한다.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의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범위까지 포함하는지를 법조문에 명시해야 한다. 둘째,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예외 조항을 명확하고 강력하게 규정해야 한다. 종교 공동체 내부의 교리나 신앙 실천,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표현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법의 적용 범위를 신중하게 설정해야 한다. 모든 영역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영역별 특성을 고려한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교육 분야의 경우, 학부모의 교육권과 교사의 교육 자유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넷째, 법 제정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해야 한다.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의 우려를 진솔하게 듣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법 시행 후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실제 적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필요시 법 개정을 통해 보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기본권에 충돌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검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법의 구체적 내용과 적용 방식을 놓고는 여전히 많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다른 기본권과의 충돌 가능성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려들을 단순히 보수적 시각이나 기득권 옹호로 치부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관점이 존중되어야 하며, 특히 기본권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라는 목표와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지혜롭고 균형 잡힌 법 제정을 통해 두 가치를 모두 보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대화와 토론, 그리고 상호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진정한 포용 사회는 소수자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이 조화롭게 보장될 때 가능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가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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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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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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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
- 서론: 북한 문제의 근본적 딜레마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할 때, 우리는 종종 북한을 일반적인 국가로 취급하며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기대한다. 그러나 70여 년간 지속된 남북 대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며, 그들과의 대화가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단순히 정책적 미숙함이나 상호 불신 때문만이 아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를 그의 열매로 알리라"(마태복음 7:16)고 가르친다. 북한 정권의 70여 년 역사는 바로 그 '열매'를 통해 그들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북한 정권은 태생적으로 거짓 위에 세워졌으며,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유지되고, 진리를 대표하는 기독교를 본능적으로 적대시하는 체제이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북한과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하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통일 정책은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1. 거짓된 출발: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의 변신 역사적 사기극의 시작 북한 정권의 근본적 문제는 그 출발점에 있다. 1945년 해방 후 북한 지역에 등장한 김일성은 진짜 항일 영웅이 아니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실제 김일성은 1920년대 활동한 항일 무장투쟁 지도자였으나, 북한 정권을 세운 인물은 전혀 다른 김성주였다. 소련은 자신들의 괴뢰 정권을 세우기 위해 젊은 김성주를 전설적 영웅 김일성으로 둔갑시켜 내세웠다. 이는 단순한 개명이 아니라 역사적 사기극이었다. 하나님께서 "거짓 증거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잠언 14:5)라고 경고하신 바와 같이, 북한 정권은 근본적으로 거짓 위에 세워진 체제였다. 정통성 없는 권력은 반드시 거짓과 속임수로 자신을 포장해야 한다.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북한의 출발은 거짓된 영웅을 앞세운 정치적 연극이었다"고 평했다(Andrei Lankov, The Real North Korea, 2013). 소련 문서고에서 발견된 자료들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며, 이는 북한 정권의 허구적 본질을 명확히 드러낸다. 신화 창조의 필요성 정통성이 없는 권력은 반드시 신화를 필요로 한다.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세기 11:4)고 했듯이, 북한 역시 허구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 김일성을 신격화했다. '혁명의 태양', '민족의 수령', '위대한 령도자'라는 호칭들은 모두 김성주라는 평범한 인간을 초인적 존재로 포장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우상화 작업은 성경이 금하는 우상숭배의 전형적 사례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애굽기 20:3)는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 바로 북한의 수령 숭배 체계였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지도자를 앉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체제의 허구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2. 주체사상: 민족 사상이 아닌 왕조 유지 장치 주체사상의 기만적 성격 북한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주체사상은 '자주', '자립', '자위'를 강조하며 민족 자주성을 추구하는 사상인 듯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민족을 위한 사상이 아니라 김일성 일가의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 주체사상의 핵심인 '수령론'을 살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주체사상에 따르면 인민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수령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객체일 뿐이다.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인 인민 주권과 평등 사상은 완전히 왜곡되었고, 대신 수령의 절대 권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마치 "사람의 아들들아 너희가 어느 때까지 내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겠는가"(시편 4:2)라는 성경 말씀이 경고하는 인간의 우상숭배와 정확히 일치한다.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주체사상은 철학적 일관성이 없는 변주곡에 불과하며, 김일성 개인 숭배를 영속화하기 위한 교리"라고 분석했다(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2005). 실제로 주체사상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변했으며,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라기보다는 권력 유지에 필요한 논리를 그때그때 제공하는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세습 정당화의 논리적 모순 사회주의는 본래 계급 철폐와 평등을 추구하며, 혈통에 의한 권력 세습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북한은 '혁명 혈통'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창조해 이를 정당화했다. 김일성의 혈통만이 혁명 정신을 계승할 수 있다는 논리는 사회주의 원리와 완전히 배치되는 봉건적 발상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세기 1:27)라는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등한 존재이다. 특정 혈통만을 절대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철학자 한희주는 "주체사상은 철학이 아니라, 세습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권력 신학"이라 지적했다(『주체사상 연구』, 2001). 이는 정확한 분석이다. 주체사상은 학문적 철학이 아니라 김씨 일가의 권력을 신성화하는 종교적 교리의 성격을 띠고 있다. 3. 기독교 탄압의 심층적 이유 절대 권위의 근본적 충돌 북한 정권이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를 더욱 혹독하게 탄압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본질적 신앙 고백이 주체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12)고 고백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와 구주이시며, 그분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다. 그러나 북한의 주체사상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유일한 수령이자 절대적 권위자임을 강요한다. 수령에 대한 절대 충성과 숭배를 요구하는 북한 체제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곧바로 반체제 사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마땅하니라"(사도행전 5:29)는 사도들의 고백은 북한 정권에게 가장 위험한 선언이 된다. 보편적 진리와 배타적 혈통주의의 대립 기독교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고 가르친다. 이는 인종, 계급, 성별을 초월한 인류의 평등과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의미한다. 반면 북한은 '백두혈통'이라는 신화적 개념으로 김씨 일가만을 절대화한다. 오직 김일성의 혈통만이 특별하고 고귀하며, 다른 모든 인간은 그들을 받들어야 할 존재로 규정한다. 이는 기독교의 보편성과 평등 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극단적 혈통주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사도행전 10:34)고 말씀하셨다. 특정 혈통을 신성시하는 북한의 사상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반하는 우상숭배적 발상이다. 자유와 양심 해방의 위험성 기독교 신앙의 본질 중 하나는 인간을 죄와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참된 신앙은 인간의 영혼을 속박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감시해야만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사상, 언론, 이동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황에서만 허구적 체제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체제의 거짓을 꿰뚫어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갖게 되므로, 북한 당국에게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담은 『북한의 증언』(안찬일 엮음, 2019)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점은 "북한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짜로 기독교를 믿는 자"라는 사실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갖는 체제 전복적 성격을 북한 정권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탄압의 실상과 본질 북한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인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자행해왔다. 지하교회 신자들이 발각되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공개 처형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국제 인권 단체 오픈 도어즈(Open Doors)는 매년 북한을 기독교 박해 1위 국가로 선정하고 있으며, 약 30만 명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극심한 탄압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탄압은 단순한 종교 탄압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북한 정권에게 기독교는 체제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대안 세계관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김씨 왕조의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4. 개방 거부의 구조적 이유 진리 노출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북한이 개방을 거부하는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개방은 곧 외부 세계의 진리와 자유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체제의 허구성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기독교 문명의 자유와 진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강력한 각성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5)는 성경 말씀처럼, 진리의 빛은 거짓의 어두움을 자연스럽게 물러가게 한다. 북한 정권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형태의 진정한 개방도 허용할 수 없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북한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이지만 개인 숭배나 세습 체제는 아니었다. 반면 북한은 개인 숭배와 세습이 체제의 핵심이므로, 개방은 곧 체제 붕괴를 의미한다. 정보 통제의 생존적 필요성 북한 정권에게 정보 통제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바깥 세상의 정보, 특히 기독교 문화와 가치관이 유입되면 주민들의 의식이 각성될 위험이 있다. 실제로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나 기독교 방송을 몰래 시청한 경험이 체제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성경은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아서, 북한과 같은 어두운 체제에 진리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북한 정권이 기독교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 세습 체제가 낳은 구조적 모순 사회주의 원리와 세습의 모순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 3대 세습은 사회주의 원리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와 평등을 추구하며, 특정 집안의 권력 세습을 거부한다. 그러나 북한은 '혁명 혈통'이라는 허구적 논리로 이를 합리화하려 했다. 이는 성경적 관점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왕정에서도 하나님은 불의한 왕들을 심판하셨으며, 혈통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혈통이나 외적 조건보다 내면의 마음을 보신다. 수령 숭배의 종교적 성격 북한의 수령 숭배는 단순한 정치적 충성을 넘어서는 종교적 차원을 갖고 있다. 김일성 일가에 대한 숭배 의식, 우상 숭배, 절대 복종은 사실상 기독교적 신앙 고백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리에 인간 지도자를 앉힌 왜곡된 종교였다. 이는 성경이 경고하는 우상숭배의 전형적 사례이다. "그들의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시편 115:4)는 말씀처럼, 인간이 만든 우상은 결국 허무한 것이다.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숭배 역시 궁극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상이다. 철학자 한희주의 지적처럼, 주체사상은 "철학이 아니라 세습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권력 신학"이다. 이는 참된 신학이 아닌 거짓 신학으로, 인간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신성모독적 발상이다. 6. 남한 대북 정책의 구조적 실패 진보 정권의 반복적 오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부터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진보 정권들은 일관되게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한 변화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20여 년간의 경험은 이러한 접근법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북한은 남한의 경제 지원과 정치적 양보를 받아내면서도,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을 계속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북한의 본질적 변화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국제 제재 완화와 경제 지원을 얻어내려는 전략적 행동이었을 뿐이다. 성경은 "그 행하는 일로 그를 알리라"(마태복음 7:20)고 가르친다. 북한의 지난 70년 행적을 보면, 그들이 진정한 변화를 원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화는 체제 유지를 위한 시간벌기 전술일 뿐이었다. 현 정부의 동일한 착각 이재명 정부 역시 이전 진보 정권들과 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평화 정착을 추구하지만, 북한의 본질적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본질적으로 개방할 수 없는 체제이며, 기독교와 같은 대안적 진리를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경제 지원과 정치적 양보를 해도 북한의 근본적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정책은 북한 정권의 생명력을 연장시켜 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 정치학자 니콜라스 에버스타트는 "북한은 결코 변하지 않을 정권이며, 변화하는 척하면서 대가를 요구하는 체제"라고 지적한다(Nicholas Eberstadt, The End of North Korea, 1999). 이는 정확한 분석이다. 북한의 기만적 협상 전략 북한은 협상을 통해 체제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 체제를 보존하려 한다.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해지면 대화 의지를 보이며 지원을 받아내고, 체제가 안정되면 다시 도발을 재개하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이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마태복음 10:16)는 예수님의 말씀을 악용한 사례이다. 북한은 외교적 지혜를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남한의 선의를 이용해 체제 생존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7.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북한 문제의 본질 영적 전쟁의 차원 북한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는 영적 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서 6:12)는 말씀처럼, 북한 체제는 영적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숭배, 기독교에 대한 극단적 적대감, 진리에 대한 본능적 거부는 모두 영적 어둠의 특징들이다. 이는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적 차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 섭리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가신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물 줄기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언 21:1)는 말씀처럼, 북한의 독재자들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 소련의 해체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체제 변화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마가복음 10:27). 기도와 영적 준비의 필요성 따라서 북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정치적, 군사적 접근보다는 영적 접근에 있다. 북한 땅에 복음이 전해지고, 북한 주민들이 참된 자유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한국교회는 북한을 위한 기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야고보서 5:16)는 말씀을 믿고, 북한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8. 통일의 참된 의미와 준비 체제 통일이 아닌 가치 통일 진정한 통일은 단순히 두 체제를 합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북한의 허구적 이데올로기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절충하는 것이 통일이 아니라, 진리에 기초한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이 참된 통일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통일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한반도 전체에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흘릴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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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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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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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편향과 집단정체성을 통한 한국 및 교회의 사회주의화
- 1. 이단 구조를 닮은 의식화 체계 이단에 빠진 이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자신들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들과 다른 견해는 모두 오류거나 악의적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러한 폐쇄적 신념 구조는 단순한 종교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단들의 신격화 프레임의 구조는 사회주의 의식과 프레임의 구조와 동일하다 오늘날 우리는 유사한 구조가 사회 전반, 특히 정치, 교육, 언론, 문화, 종교 영역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어 가는 것을 목도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이념적 진영 논리가 심화되면서, ‘진보=정의’, ‘보수=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뿌리내렸고, 특정 진영에 속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열등하거나 무지하다고 간주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사회주의적 의식화 전략의 일환으로 작동한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구조적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평등과 연대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자유, 자율성, 양심, 신앙,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강제적인 ‘올바름’의 기준을 설정한다. 그 결과, 반대 의견은 곧 ‘혐오’나 ‘차별’로 낙인찍히고, 진영 내부의 도덕적 정당성은 절대적 신념처럼 기능한다. 이는 집단 내부에서의 자기 정당화와 외부에 대한 적대감 고조로 이어지며, 마치 이단 집단이 외부 세계를 사탄화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단적 구조’가 정치, 교육, 언론, 문화, 종교, 경제 전반에 어떻게 침투했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중심 개념으로는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말한 ‘집단사고(groupthink)’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을 활용할 것이다. 집단사고는 비판적 사고가 억압되고, 구성원들이 의견 일치를 위해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심리적 구조이며, 이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의 심리적 기반이 된다. 또한 확증편향은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이는 이념적으로 고립된 정보 소비와 여론 분열을 촉진시킨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점점 자유민주주의의 건강한 공론장보다는, 폐쇄적 이념 집단들이 각축하는 ‘체제 전환의 장’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이 의식화 전략의 실체를 직시하고, 진정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사상적 방어와 영적 분별을 다시 회복해야 할 시점이다. 1) 참고문헌: Irving L. Janis, Groupthink (1982). 2. 심리적 기반: 확증편향과 집단 정체성의 이념화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심리학적 개념 중 하나는 바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확증편향은 인간이 자신의 기존 신념이나 가치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그에 반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비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이는 특정 정치 성향이나 이념적 진영에 속한 사람들일수록 더욱 강하게 작용하며, 자신이 믿는 진영의 정보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반대 진영의 정보는 ‘가짜뉴스’로 치부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나타난다. 이러한 심리 작용은 단지 개인의 오류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확산될 경우 사회 전체의 인식과 판단 구조를 왜곡하는 위험 요소가 된다. 이와 함께 작동하는 것이 바로 ‘집단 정체성(group identity)’이다. 집단 정체성은 개인이 특정 집단에 속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찾는 심리적 기제이며, 이는 정치 진영, 이념 공동체, 종교, 직장, 학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한다. #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과 종북주의를 국회에서 실천하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 문제는 이러한 집단 정체성이 절대화될 경우, 집단 외부를 향한 배타성과 적대감을 낳는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수도권과 비수도권, 남성과 여성, 시민단체와 기업 등 다양한 대립 구도가 이처럼 절대적 자기정당성과 타자 혐오로 연결되고 있으며, 이는 사회적 갈등을 극단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특히 한국의 586 운동권 세대와 그 후예들은 이러한 확증편향과 집단 정체성에 기반하여, 특정 정치 세력을 ‘민중의 대변자’, 반대 진영을 ‘적폐세력’으로 규정짓는 인식틀을 고착화해 왔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다양성과 비판적 토론은 사라지고, 이념적 진영논리가 절대적 윤리 기준으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정치적·사회적 사안에 대해 이분법적 태도와 감정적 선동이 앞서는 구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념의 전장’으로서 공론장을 왜곡하고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이러한 심리 구조는 SNS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더욱 강화된다.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선호하는 정보만을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며, 이념적으로 균형 잡힌 사고를 가로막는다.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은 ‘확증편향의 생태계’를 형성하며, 사용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에 쉽게 노출되지 않고, 점점 더 강한 주장만을 접하게 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합리적 중재와 타협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확증편향과 집단 정체성은 한국 사회를 논리보다 감정, 사실보다 신념, 토론보다 배제의 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심리 구조 위에 사회주의적 담론과 의식화 전략이 덧입혀질 경우, 비판적 사유는 억제되고, 전체주의적 문화가 대중의 일상 속에 스며들 수 있게 된다. 2) 참고문헌: Jonathan Haidt, The Righteous Mind: Why Good People Are Divided by Politics and Religion (New York: Pantheon Books, 2012). 3. 종북주의와 주사파: 이념 집단의 교리화 1980년대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 열망과 더불어 극단적인 이념 분화가 동시에 일어난 시기였다. 그 중심에는 주사파로 불리는 김일성 주체사상 신봉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북한의 정치체제를 단순한 독재 국가로 보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적 억압을 이겨낸 자주적 국가로 이상화하며, 대한민국의 체제는 친미·친일 세력이 세운 가짜 국가로 간주하였다. 주사파는 단지 북한을 동경하는 정치 집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전복하고자 했던 교리화된 이념 집단이었다. # 주사파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하여 자신들의 이념을 법제화하고 있다 이들은 '의식화'라는 방법론을 통해 대중에게 접근했다. 의식화란 사람들의 일상적 현실을 계급 구조 속에 위치시켜 설명하며, '억압받는 민중'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주입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주사파는 대학가의 학생운동, 지역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갔다. 특히 대학 총학생회를 장악하고, 학내 동아리, 출판물, 교지 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 교육을 시도했다. ‘남한은 식민지, 북한은 자주국가’, ‘미제 타도’, ‘계급 해방’ 등의 구호는 단지 정치적 문구가 아니라, 정체성 재편과 감정적 동원 장치였다. 이러한 주사파 이념은 민주화 이후 지하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며 586세대를 통해 국회, 언론, 교육계, 시민단체, 법조계, 심지어 종교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라는 명분 아래 비판이 불가능한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고, 이후 대중의 인식 속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정의’와 ‘민주’로 재포장하였다. 예컨대, 2000년대 중반 이후 각종 교과서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긍정적 서술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이 역사적 진실로 둔갑되었다. 이들의 전략은 언어 장악과 역사 재해석, 그리고 감성적 피해자 담론 형성에 있다. 과거 군사정권의 탄압 경험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며, 현재 자유민주주의적 반대자에 대한 공격 명분으로 활용된다. 동시에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외면하며, 북핵 문제는 미국 책임이라는 ‘전가 논리’로 회피한다. 이들은 대중의 분노를 체제 부정의 동력으로 전환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전술을 전개해왔다. 결국 주사파는 단순한 과거의 반미운동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집단 정체성과 확증편향, 패거리 윤리로 무장한 이념 교리 집단이며, 현재도 문화·언론·교육·종교를 통해 사회주의적 의식화를 실현하고 있다. 이들의 핵심 전략은 '의심 없는 믿음'을 전제하고, 반대자를 '악'으로 규정하여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한 공론장을 만든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본질적 투쟁이 되어야 한다. 3) 참고문헌: 이정훈, 『자유를 위한 투쟁』 (2021). 4. 전교조: 반자유민주주의적 교육의 기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단순한 교원 노동조합을 넘어선 이념적 교육운동 조직으로서, 교육 현장에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약화시키고 사회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면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1989년 출범 이후 전교조는 일제 잔재 청산, 민주화, 노동운동 연대 등을 주장하며 사회적 지지를 얻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화된 이념을 앞세운 교육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특히 전교조는 민중 중심의 역사관, 해방신학과 유사한 구조적 억압 서사를 학생 교육에 체계적으로 주입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건국 정신,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다. #전교조는 반미와 사회주의 이념교육, 남침이 아닌 북침의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고 교육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부 전교조 교사는 6·25 전쟁을 ‘북침’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거나,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박정희 시대를 단순 독재로만 평가하는 교육 자료를 제공하였다.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등은 맥락 없이 국가 폭력의 상징으로만 다뤄지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태생적으로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역사 교육은 학생들에게 체제 거부감, 국가 불신, 반자본주의 정서를 심어주며, 그들의 정체성을 '억눌린 민중'으로 각인시킨다. 또한 통일교육에서는 북한 체제에 대한 실상보다는 민족 감정과 평화 이데올로기에 집중하며, 주체사상적 사유 구조와 유사한 접근법을 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교조는 이러한 교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학생 인권’과 ‘교육의 중립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특정 정치 이념의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편향적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개인의 자유와 책임, 비판적 사고와 다양성의 존중보다는, 구조적 억압과 계급 해방, 피해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교육 내용이 조직된다. 이는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유 구조로 학생들을 사전 정의하고 의식화하는 ‘교실의 이념화’이며, 그 자체로 교사 권력의 정치화이다. 더 나아가 전교조는 교과서 집필, 교육부 정책 압박, 교육청 장악 등을 통해 교육 행정 전반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2015년 국정교과서 논란 당시, 전교조는 ‘역사 왜곡 반대’라는 명분을 앞세워 좌편향 교육의 기득권을 고수하려 했고, 이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서는 교육의 정치 중립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결국 전교조는 단지 교사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노조가 아니라, 교육이라는 공적 영역을 이용해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확산시키는 전방위적 의식화 기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4) 참고문헌: 김용삼, 『교과서에 숨은 좌익의 음모』 (2017). 5. 민노총: 계급투쟁적 패거리 윤리의 조직화 민주노총(민노총)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순수한 노동조합을 넘어, 정치적 이념 실현을 위한 강력한 전위조직으로 변모하였다. 1995년 출범 이래 민노총은 각종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지만, 점차 좌파 정치 세력과 결합하면서 그 활동 방향은 노동운동을 넘어 계급혁명론에 근거한 정치 투쟁으로 이행하였다. 단순한 권익 요구를 넘어, 정부의 정책과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전복하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투쟁’을 절대화하고 불법적 방식도 정당화하는 집단 윤리가 작동하고 있다. #민노총은 정치권까지 진출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투쟁을 하고 있다. 특히 민노총은 노사 갈등을 조정하거나 대화로 해결하기보다는, 총파업, 점거, 물리적 충돌 등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한다. 이는 2023년 화물연대 파업 사례에서도 확인되었는데, 주요 산업 물류망이 마비되고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이 초래된 상황에서도 민노총은 이를 ‘정의로운 저항’으로 포장하며 사회적 지지를 요청했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이나 비조합원에 대한 폭력, 협박, 물류 차량 방화 등도 보고되었지만, 민노총은 조직 내부에서 이를 제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성 투쟁 노선을 강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노동운동의 정당한 권리를 넘어서 폭력과 강압에 기반한 정치 행동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민노총의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이 구축한 ‘패거리 윤리’이다. 패거리 윤리란 도덕의 기준이 보편적 정의가 아니라, 집단 내 충성도와 이념의 동일성에 따라 결정되는 윤리 체계이다. 민노총은 스스로를 ‘약자’ 또는 ‘민중’의 대변자로 규정하면서, 반대 진영은 곧 ‘기득권’과 ‘적폐’로 낙인찍고 대화와 타협을 거부한다. 이러한 구도는 사회 갈등을 구조화하고, 노동과 자본 간의 협력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아가 정치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국회 입법이나 행정 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노동자’라는 명분으로 실질적인 특권화와 권력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민노총은 정부 정책에도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안에는 즉각적인 반발과 투쟁을 예고한다. 교육청,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인사에도 관여하며, 조직적으로 정무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자유민주주의 질서 속에서 보장된 시민단체 활동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며, 오히려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행동방식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민노총은 전교조와 함께 정치적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교육과 노동을 이념적으로 재편하는 데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사회의 공공성을 좌파 이념으로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민노총은 노동자의 권익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 전반을 ‘투쟁과 계급 전쟁’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으며, 자유와 다양성, 합의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 대신, 강압과 선동, 이념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념적 행동주의 집단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5) 참고문헌: 조전혁,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실체』 (2020). 6. 언론과 미디어의 장악: 이념 확산의 확성기 한국 사회의 언론과 미디어는 원래 권력을 감시하고 공론장을 형성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축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주요 언론과 방송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특정 정치 세력과 이념에 경도된 편향된 보도로 인해 ‘이념 확산의 확성기’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공영방송(KBS, MBC), 지상파 채널, 대형 일간지 등은 ‘진보적 가치’라는 이름 아래 사실 보도보다는 해석과 선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유민주주의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 #광우병 선동을 언론들이 앞장서서 보도 왜곡하였음에도 어떤 반성도 없다 언론 편향은 보수 세력에 대해선 ‘가짜뉴스’, ‘적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진보 성향의 세력에 대해서는 실책과 부도덕함마저도 묵인하거나 축소 보도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광우병 사태, 세월호 보도, 조국 사태, 윤미향 논란 등 수많은 사건에서 언론은 동일한 사실을 보도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프레임을 적용했고, 결과적으로 국민 여론을 이념적 감정선에 따라 분열시켜왔다. 특히 일부 언론은 북한 관련 문제나 북핵 위협,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침묵하거나 미화하는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종북적 관점을 사회적 정당성으로 포장하는 데 일조해왔다. 미디어의 정치화는 기자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특정 정치세력과 연계된 구조적 문제이다. 예컨대 민주당 정부 시절 공영방송 이사진과 사장단 인선 과정에서 친정권 성향 인사들이 대거 임명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논조의 급격한 변화가 관찰되었다. 이러한 보도 편향은 단지 여론 왜곡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정보 주권과 판단 능력을 훼손하는 중대한 자유 침해로 이어진다. 국민은 이제 뉴스를 소비하면서도 ‘이게 진짜일까?’를 먼저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언론은 신뢰보다 불신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디지털 플랫폼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는 이념적 정보 소비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선호하는 정치 성향의 콘텐츠만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정보의 ‘버블’ 속에 갇히게 만든다. 이 같은 정보의 편향성은 단지 개인의 오해를 넘어, 사회 구성원 간의 상호 신뢰를 무너뜨리고 민주적 합의를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결국 언론과 미디어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 중 하나지만, 현재 한국의 언론은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언론은 ‘언론 자유’라는 이름으로 특정 이념의 확산 도구가 되었으며, 다양한 목소리와 균형 잡힌 시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퇴행을 의미하며, 사회주의적 이념이 감성의 언어와 뉴스 프레임을 통해 대중에게 내면화되는 통로로 기능하고 있다. 언론이 본연의 사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회의 건강한 공론장은 회복될 수 없다. 6) 참고문헌: 정규재, 『언론 권력과 이념의 포획』 (2019). 7. 민주당·진보당과 정치의 좌경화 민주당과 진보당 등 좌파 성향 정당은 단순히 진보적 정책을 지향하는 정당이라기보다, 지난 수십 년간 전교조, 민노총,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좌파 시민단체 및 이념 세력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정치권력을 통한 체제 전환을 추진해 왔다. 이들의 전략은 대중적 정당성을 얻는 동시에 제도 내 입법력을 활용하여 점진적이고 체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이는 ‘진보’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유시장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국가의 개입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대표적으로 이들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차별금지법은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등을 법적 보호 대상으로 포함시켜 종교·양심·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반대 의견 자체를 범죄시하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부동산 보유세 및 거래세의 급격한 인상, 종부세 강화 정책은 사유재산권을 사실상 제한하며, 자산을 통한 계층 이동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탈원전 정책 또한 비과학적 여론에 기초해 추진되었으며, 한국의 에너지 주권과 산업 경쟁력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이러한 좌경화 흐름은 단순한 정책 오류라기보다, 민주주의를 외피로 한 '이념 혁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정당들은 좌파 시민단체의 요구를 대의제 정치 시스템 안으로 이식하고, 사법부·언론·교육·문화 전반에 좌파 이념을 제도화했다. 국회 입법, 행정부 지침, 지방자치단체 정책을 통해 이념적 담론이 곧 법제도로 전환되며, 이는 체제 변환의 실질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흐름을 비판하는 세력은 '적폐', '반인권', '극우'라는 프레임으로 낙인찍히며, 공론장 접근 자체가 차단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과 진보당은 정치 영역에서 사회주의적 가치와 의제를 제도권 안에서 구현해낸 정치 기획자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이들이 만들어낸 정책 틀과 담론 구조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7) 참고문헌: 남성일, 『대한민국의 좌경화와 그 해법』 (2020). 8. 문화예술계의 의식화와 반전통성 문화예술계는 본래 자유와 상상력의 공간이며, 다양한 가치와 사유가 공존해야 할 공론의 장이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한국의 문화예술계는 특정 이념, 특히 사회주의적 가치와 급진적 진보 담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왔다. 영화, 드라마, 연극, 대중음악, 미술, 출판 등 거의 모든 문화 산업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메시지는 '기득권은 악하다', '국가는 억압자다', '민중은 순결한 피해자다'라는 도식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서사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체제에 대한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그릇된 시각을 영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구가 권력을 왜곡하였다. 특히 영화 <1987>, <변호인>, <택시운전사> 등은 민주화 서사를 통해 국민 감정을 자극하면서, 국가 권력과 보수 진영을 구조적으로 악마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 작품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지만, 반복되는 서사 구조는 젊은 세대에게 '보수=권위주의=적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동시에 가족, 전통, 신앙, 국가와 같은 보수적 가치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젠더 해체, 정체성 다원화, 탈국가 담론이 미학적으로 치장되어 확산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현상이 단순한 창작 경향이 아니라, 공적 자금과 제도적 지원을 통해 더욱 제도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예기금과 공공 지원사업이 ‘사회적 소수자’, ‘민주화운동’, ‘혐오 반대’ 등의 키워드를 우선적으로 반영하며, 창작 방향이 자유로운 사유보다 ‘정치적 정당성’에 종속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보수적 주제나 국가 정체성을 긍정하는 콘텐츠는 제작 자체가 어렵고, 배급과 상영에서도 불이익을 겪는 경우가 많다. 결국 문화예술은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특정 이념을 미학적으로 정당화하는 훈육의 장이 되고 있다. 이처럼 문화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시민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정치적 판단을 유도하는 ‘의식화의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지켜야 할 문화적 다양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문화계 수상작과 공공 전시, 연극제, 영화제 등을 보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구조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 젠더와 인종, 약자 보호 담론을 반복적으로 변주하며, 이는 예술을 통한 사회주의 감성의 이념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문화예술계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서적으로 해체하는 전위 부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9) 참고문헌: 이우연, 『문화전쟁과 이념투쟁』 (2018). 9. 한국교회와 기독교 내 사회주의 침투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복음 중심, 성경 권위, 반공 이념에 뿌리를 둔 공동체로서, 국가 발전과 시민 의식 향상에 중대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해방신학, 민중신학, 퀴어신학 등 사회주의 성향의 급진 신학이 신학교 및 교회 내에 침투하면서, 점차 그 정체성과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들 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구조적 억압론을 성경 해석에 도입하여, 죄의 개념을 계급 억압이나 구조 불평등으로 환원시키고, 구원의 개념을 사회적 해방과 평등 실현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제도화되었으며, NCCK는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도, 반미·반자본·반보수 담론을 적극 전파하고 있다. ‘평화 통일’, ‘소수자 인권’, ‘기후 정의’라는 이름 아래 사회운동과의 결합을 추구하며, 복음은 점점 '사회적 정의의 구호'로 바뀌고 있다. 특히 동성애와 젠더 이슈를 중심으로 한 퀴어신학은 성경의 남녀 창조 질서를 부정하고, 차별금지법 지지로까지 나아가고 있으며, 많은 목회자와 교회들이 이에 동조하거나 침묵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는 '성소수자 인권 주일'을 선포하고 이를 예배에서 다루었으며, 일부 신학교에서는 퀴어신학 강의를 정규과정에 포함시켰다. 설교에서는 ‘구원’보다 ‘억압받는 민중의 연대’가 더 강조되고, 교회의 선교는 ‘정의 구현’과 ‘사회 변혁’이라는 수사로 포장된다. 이러한 전환은 신학의 진화가 아니라, 성경적 복음이 사회주의 이념에 종속되는 사상적 전복이며, 교회의 존재 목적을 왜곡시키는 심각한 오류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급진 신학은 포스트모던 문화와 결합하여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상대화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한 구주이기보다는, 로마제국에 저항한 급진적 혁명가로 묘사되며, 회개와 믿음은 억압 구조에 대한 저항과 해방의 은유로 대체된다. 결국 교회는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정치 담론과 윤리적 행동주의의 장이 되어가고 있으며, 복음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교회가 본질을 상실하고 시대정신에 휘둘리는 깊은 영적 위기의 징후다.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죄와 구원에 대한 참된 복음을 회복하지 않는 한, 교회는 진리의 등대가 아닌 시대 정신의 앵무새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 사회정의와 문화현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서부터만이 진정한 교회의 개혁과 부흥이 가능하다. 9) 참고문헌: 이승구, 『해방신학 비판』 (2009). 10. 경제 영역에서의 국가주의 강화 한국 사회의 경제정책은 자유시장 원칙을 기반으로 발전해왔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이러한 기조는 점점 후퇴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기를 기점으로 정책 기조는 시장 자율성과 민간 중심 성장에서 국가 주도와 분배 중심 정책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정책의 방향 전환이 아니라, 체제의 성격을 바꾸려는 이념적 기획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가는 점차 ‘계획자’와 ‘통제자’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율성과 재산권, 시장의 경쟁 원리는 위협받고 있다. 부동산 정책을 예로 들면, 임대차 3법, 종합부동산세 인상, 거래세 강화 등은 사유재산권을 제한하고 부의 이전을 강제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시장의 공급과 수요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가격은 정부 규제에 의해 왜곡되었고, 그 결과 전세 대란, 매물 잠김, 공급 부족이라는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부동산을 통한 자산 형성은 죄악시되었고, 다주택자는 '투기 세력'으로 낙인찍혀 정서적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경제관의 재현이라 할 수 있으며, 부의 축적은 불의, 평등한 분배는 정의라는 도식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았다. # 원자력을 핵으로 표현하여 의도적 프레임을 만든 환경단체의 포스터 또한 탈원전 정책 역시 시장 원칙과 과학적 판단보다는 이념적 선호에 의해 추진되었다. 신재생 에너지 확대라는 취지 자체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충분한 준비와 산업적 대안을 갖추지 않은 채 원전을 조기 폐쇄하고 신규 건설을 중단함으로써 전력 수급의 불안정성과 산업 경쟁력 저하라는 문제를 초래했다. 전기요금 인상, 전력 수출 감소, 에너지 안보 악화는 불가피한 결과였으며, 이는 국가의 에너지 주권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해당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과학자, 산업계, 국제사회의 우려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공공일자리 확대도 유사한 흐름을 보여준다. 최저임금 인상은 도덕적 명분 아래 추진되었지만, 생산성 대비 임금 상승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고용 여력을 악화시켰고, 결과적으로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역효과를 낳았다. 정부는 이를 보완한다며 단기 알바성 공공일자리를 양산하였지만, 이는 지속 가능한 고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국가는 고용시장에 직접 개입하면서 민간의 활력을 억제하고, 국민의 삶을 국가에 의존시키는 구조를 강화시켰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통제 경제의 전형이다. 더 나아가,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경제 정책은 소비를 촉진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선의에서 출발했지만, 실질적인 소득이 생산성과 연계되지 않는 이상 성장의 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투자 위축, 외국인 자본 이탈, 고용 감소 등의 부작용이 이어졌고, 중산층은 세금 부담으로 인해 몰락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실험적 정책 실패가 아니라, 체제 전환을 위한 구조적 기획으로 읽혀야 한다. 결국 경제 영역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국가주의 강화는 단순한 복지 확대나 불평등 해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경제 질서의 해체이며, 민간보다 국가가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적 통제 시스템의 확장이다. 국민의 재산권과 자율성이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경제정책의 이념적 함의를 직시하고 체제 수호를 위한 깊은 사유와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10) 참고문헌: 김대호, 『포퓰리즘 국가의 몰락』 (2021). 11. 결론: 체제 전환의 시대, 깨어 있는 시민 의식의 회복 한국 사회는 지금 단순한 정책 실패나 일시적 혼란을 넘어, 체제 전환의 흐름 한복판에 서 있다. 정치, 교육, 언론, 문화, 종교, 경제 등 사회 전 영역에서 확증편향과 집단 정체성, 도덕적 이분법과 패거리 윤리로 무장한 사회주의적 이념이 점진적으로 구조화되어 왔다. 이러한 흐름은 소리 없이, 그러나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핵심 전략은 특정 이념을 ‘정의’로 포장하고, 반대 의견을 ‘악’으로 낙인찍는 데 있다. 이는 이단 종교의 교리화된 폐쇄성, 내부 결속, 외부 악마화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의식화 전략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 체제나 정치 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모든 가치와 규범, 언어와 정서를 통제하고, 개인의 자율성과 신앙, 표현과 소유의 자유를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이념적 장치다. 문제는 그것이 매우 '도덕적' 언어로 위장된 채, ‘인권’, ‘평등’, ‘정의’, ‘민주’라는 말로 대중을 무장해제시킨다는 데 있다. 특히 교회와 신앙 공동체조차도 이러한 사회주의 담론의 침투를 경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프레임 안에서 신학을 변형시키고, 복음을 사회 개혁과 정의 구현으로 축소시키는 오류를 범해왔다. 교회는 시대정신을 추종하는 ‘운동의 플랫폼’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진 공동체여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세상을 바꾸는 조직이기 이전에,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는 사상적·영적 분별력을 회복해야 한다. 교육은 다시 진실을 가르쳐야 하고, 언론은 감시자 역할로 복귀해야 하며, 문화는 상상력의 자유로 되돌아가야 하며, 교회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와 경제는 체제 전환이 아닌 자유의 질서를 지키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 글이 제안한 진단이 오직 절망이 아닌, 분별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자유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지켜내는 자의 몫이다. <참고문헌> 1. Irving L. Janis, Groupthink (1982). 2. Jonathan Haidt, The Righteous Mind (2012). 3. 이정훈, 『자유를 위한 투쟁』 (2021). 4. 김용삼, 『교과서에 숨은 좌익의 음모』 (2017). 5. 조전혁,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실체』 (2020). 6. 정규재, 『언론 권력과 이념의 포획』 (2019). 7. 남성일, 『대한민국의 좌경화와 그 해법』 (2020). 8. 이우연, 『문화전쟁과 이념투쟁』 (2018). 9. 이승구, 『해방신학 비판』 (2009). 10. 김대호, 『포퓰리즘 국가의 몰락』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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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편향과 집단정체성을 통한 한국 및 교회의 사회주의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