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트럼프안수.jpg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올렸던 AI 생성 이미지

 

한 장의 그림이 세계를 흔들었다. 흰 로브에 붉은 천을 두른 남자가 병상에 누운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그의 손에서는 빛이 쏟아지고, 주변에는 성조기와 독수리, 군인과 간호사가 경건하게 그를 우러러본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내려오고, 자유의 여신상이 배경을 장식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지난 4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이 AI 생성 이미지를 아무런 설명 없이 게시했다. 레오 14세 교황을 향해 "나약하고 형편없다"고 공개 비난한 지 불과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거센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의사로서의 나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흰 로브를 걸치고 병자에게 안수하는 장면을 의사의 이미지로 읽을 사람은 거의 없다. 해명은 해명이 되지 못했다.

 

자기 과시, 그리고 교만이라는 이름의 함정

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그림 한 장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전체 행보를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 그는 이전에도 교황 복장을 한 자신의 이미지를 SNS에 올렸다. 자신의 형사 기소를 "박해받는 메시아"의 서사로 포장했다. 공개 석상에서 "나만이 이 나라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종교특별고문은 그를 예수에 비유했고, 지지자들은 "예수는 나의 구원자,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을 외쳤다. 그는 그 어느 것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충동적 실수의 연속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 나아가 신적 권위를 지닌 구원자로 연출하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교만(驕慢)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형태의 교만, 즉 종교적 언어와 이미지를 빌려 자신을 신격화하는 교만이다.

 

성경은 교만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 반역의 뿌리다. 이사야 14장 13절에서 바벨론 왕의 교만은 이렇게 묘사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이것이 타락의 원형적 언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그것이 노골적이든 이미지로 포장되든, 성경은 그것을 동일한 범주로 본다.

 

잠언 16장 18절은 단호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 자에게 역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청구했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성경이 기록한 교만의 결말들

사도행전 12장의 헤롯 왕은 화려한 왕복을 입고 군중 앞에 섰다.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외쳤을 때, 그는 그 찬사를 묵인했다. 성경은 곧이어 기록한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자기 과시의 절정에서 그는 무너졌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영화를 바라보며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랑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고, 그는 짐승처럼 들판을 기어 다니는 굴욕을 당했다.(단 4장) 권력의 정점에서 터져 나온 자기 과시가 그를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서 불법의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하는 행위, 그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가장 심각한 영적 타락의 징표다.

 

트럼프를 이 인물들과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나 교만의 패턴, 자기 신격화의 언어, 종교적 이미지를 권력 서사에 끌어다 쓰는 행태. 이것이 성경이 반복적으로 경고해 온 바로 그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지지와 우상화 사이, 한국 교회의 분별이 필요하다

이 사건이 한국 교회에 특별한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 진영 일부에서는 트럼프를 "하나님이 세우신 도구" 혹은 "고레스 왕과 같은 지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신 사례는 성경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신학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하는 것과, 그를 신격화하거나 그의 모든 언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가능한 해석이지만, 후자는 우상숭배의 영역에 위험하게 근접한다. 고레스 왕을 도구로 인정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를 예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했고, 고레스는 그분의 손에 들린 수단으로만 이해했다.

 

분별(分別)은 신앙의 덕목 중 하나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권면했다. 분별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다. 사랑에 뿌리를 두되, 진리로 가지를 뻗는 신앙의 성숙함이다. 그 분별이 없을 때, 신앙은 특정 인물을 향한 맹목적 충성으로 변질되고, 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는다.

 

교회 역사는 이 위험을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히틀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앙했던 독일 기독교인들, 권력자의 곁에 서서 예언자의 자리를 포기했던 수많은 어용 성직자들. 그들의 공통점은 지지와 우상화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순간 시작되었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이시다

트럼프는 그림을 삭제했다. 그러나 그 그림이 드러낸 것은 삭제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박수를 보내는 군중이 있는 한, 그 욕망은 더욱 커진다. 교회가 그 군중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구원자는 성조기와 전투기를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 나사렛에서 오셨고, 환호하는 군중을 뒤로하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다. 그분은 병자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리하셨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 앞에서도 신학적 분별력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명백히 잘못된 길로 갈 때,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을 덮지 않을 정직함이 있는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그 교만이 종교의 언어를 빌릴 때, 그 위험은 배가된다. 한국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려면,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어떤 인간 지도자도 아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편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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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예수 이미지' 사건이 한국 교회에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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