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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받는 자매들과 함께 서기 위한 40가지 기도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한 일부 장소에서, 기독교인 여성들은 목소리가 침묵 당하고 정체성이 침식되며 권리를 박탈당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남고 있습니다. 오픈도어(Open Doors)는 이 믿음의 여성들이 박해 속에서도 그들의 삶과 사역을 나눌 때 그들 곁을 함께 걷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여러분이 박해받는 자매들과 연결되고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40가지 기도 제목을 공유하고 25명의 여성을 소개합니다. 기독교인 여성들은 목소리가 침묵 당하고, 정체성이 훼손되며, 권리를 박탈당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이들에게 생명줄과 같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다른 아프간 난민들과 만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한 아프간 여성. 인구의 2%만이 기독교인이며 대부분이 신앙을 숨기고 살아가는 멕시코의 어느 지역에서 여성들을 양육하는 제자 사역자. 자녀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마음을 알도록 가정을 세워가는 한 아내이자 어머니. 이란의 가정교회에서 섬기고 있는 한 청년 리더. 이들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한 장소에서 천국 복음 전파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여성 중 아주 일부일 뿐입니다. 기독교인 여성들은 사는 곳에서 성별과 신앙이라는 이유로 이중적인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목소리가 침묵 당하고, 정체성이 침식되며, 권리를 박탈당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남고 있습니다. 오늘, 자매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고 힘 주시기를 간구하며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나라를 세워갈 때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주세요. 우리는 여러분이 박해받는 자매들과 연결되고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40가지 기도 제목과 25명의 여성을 소개합니다. 이란의 지하 교회를 섬기는 기독교인 여성 마리암(Maryam)*과 함께 기도해 주세요. 그녀는 "우리 국민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들이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들은 것들이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란 기독교인 지바(Ziba)*와 함께 기도해 주세요. 그녀는 자신의 조국과 그곳의 지하 교회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에게 진리와 희망을 가져다주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소망으로 우리 공동체를 사랑하는 법을 보여주시길 기도해 주세요." 이란에서 소규모 제자 양육 그룹을 이끄는 20대 세타레(Setareh)*와 함께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제 삶에 동반자를 보내주시길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의 비전과 소명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이란의 기독교인 어머니 소골(Sogol)*은 최근 전 세계 교회에 부모와 자녀들을 위해 함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부모들은 이제 분쟁이 격화될까 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온라인 교육 옵션도 없으며, 많은 부모가 지치고 압도되어 가정 학습을 온전히 지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평안을 주시며, 교육에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시고, 부모들을 강건하게 하시며, 희망차고 안정된 미래를 보장해 주시길 기도해 주세요."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유로 이란에 수감된 약 48명의 기독교인 중 한 명인 아이다 나자플루(Aida Najaflou)와 같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녀가 구체적이고 분명한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기도해 주세요. 여러분의 중보 기도는 멕시코 중부의 박해가 심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베아트리스(Beatriz)*에게 생명줄입니다. 그녀는 어린 딸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박해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와 가족을 보호하시길 간구해 주세요. 베아트리스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해 가는 여성 그룹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이 여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카르멘(Carmen)*은 베아트리스의 여성 모임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카르멘은 신앙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당했고, 아이들을 빼앗겠다는 전남편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카르멘은 요청합니다. 신앙이 거부되는 곳에서 자녀를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는 어머니들을 위해 중보해 주세요. 카르멘의 말처럼 "내 아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결코 지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해 주세요. 집을 잃고 떠나온 이주 여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두려움이나 의심이 생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평강으로 채워주시길 간구해 주세요. 4월 14일은 나이지리아 치복(Chibok)에서 275명 이상의 소녀들이 납치된 지 12년이 되는 날입니다. 많은 이들이 탈출하거나 구조된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100여 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입니다. 이제 30세 정도가 되었을 이 젊은 여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들이 잊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징표를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놓아주시길 간구해 주세요.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기독교인 여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아프간 여성의 신앙이 발각되면 그녀의 생명과 가족은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웃 나라로 탈출한 아리아나(Ariana)와 자키 (Zakie)같은 아프간 여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들이 살기에 안전한 장소를 찾고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기를 기도해 주세요. 국외에 거주하는 아프간 기독교인 여성 아리아나(Ariana)*는 요청합니다. "아프간 여성들이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에스더처럼 담대함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들에게 안전한 곳이 없기에, 그들이 그곳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발각되면 박해자들은 아이들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지 않고 죽일 것입니다"라고 아리아나는 말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자키(Zakie)*와 함께 기도해 주세요. 공동체와 가족의 거부, 갓난아기와 부상당한 남편을 데리고 탈레반을 피해 중앙아시아로 탈출하기까지, 자키의 여정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소망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오늘날 자키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들을 섬기며 한 번에 한 명씩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오픈도어 협력자들은 자키가 훈련과 문서 사역을 통해 아프간 난민 여성들 사이에서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자키는 사역의 실질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장소와 성경책이 필요합니다." 자키의 가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안전하지만, 그녀와 다른 아프간 난민들에게 삶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녀는 매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아이들과 격리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강건하고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최신 법안은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여, 남편이 아내를 때려도 "뼈를 부러뜨리거나 눈에 띄는 영구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는 한" 허용합니다. 비밀리에 이슬람을 떠난 기독교인 여성들에게 이 법은 이미 끔찍한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 아프간 자매들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세요.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는 동남아시아의 과부 반니다(Vannida)*와 함께 기도해 주세요. 그녀의 남편은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멈추지 않다가 살해당했습니다. 그녀가 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박해받는 믿음의 여성들 곁에서 일하는 오픈도어 사역 협력자들을 들어주소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섬길 때 보호하시고,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해야 할 말을 입술에 담아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해 주세요. 나이지리아의 오픈도어 '샬롬 트라우마 케어 센터'와 상담가 훈련을 받은 시리아에서 폭력으로 충격을 받은 피해자들을 상담하는 여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투옥된 기독교인의 아내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길 하나님께 간구해 주세요. 남편의 부재 중에 가족을 돌볼 수 있는 보호와 공급, 그리고 힘을 주시길 기도해 주세요. 중앙아시아의 나이라(Naira)*와 함께 기도해 주세요. 그녀가 직장 동료들에게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했을 때, 한 직원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이 박해가 그녀의 신앙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고 나이라는 말합니다. 그녀의 담대함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녀의 인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쉴라(Sheila)는 필리핀 남부 수상 가옥 공동체에 사는 17세 소녀 신자입니다. 질병을 앓는 중에도 그녀는 박해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웃들은 그녀를 조롱하고 소외시킵니다. 치유를 위해, 그리고 그녀와 다른 이들이 오픈도어에서 받은 제자 훈련을 통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작년 다마스쿠스 교회 폭격으로 가족 7명을 잃은 시리아 자매 하난(Hanan)*은 요청합니다. "우리가 안전함을 느끼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이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우리는 공포의 삶이 아닌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매 조세피나(Josephina)는 모잠비크의 극단주의자 공격 이후 실종된 남편과 네 자녀를 잃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포함한 수백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위로와 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이슬람 가족에게서 쫓겨난 빈타(Binta)*와 함께 기도해 주세요. "주님께서 저와 가족 사이의 화해를 허락하시길 기도해 주세요"라고 그녀는 요청합니다. 지역 사역을 이끌고 섬기는 여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외부의 반대와 내부의 도전에 직면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앙을 강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이들이 적대 세력의 감시를 받고 있으며, 일부는 자신의 공동체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해함으로부터 보호하시고, 분별력을 주시며, 계속해서 격려와 치유의 목소리로 사용하시길 간구해 주세요. 중국 북서부의 교회 지도자 루 메이(Lu Mei)*와 함께 기도해 주세요. 그녀는 체포, 신문, 구금을 당했습니다. 석방 후에도 그녀와 다른 이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낙담시키기 위해 정기적인 신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베트남의 63세 할머니이자 새 신자인 응옥(Ngoc)*과 함께 기도해 주세요. 신앙이 발각되어 당국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현재 응옥은 딸, 손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집에 잘 정착하도록, 그리고 자녀들이 그녀의 새로운 신앙을 존중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온두라스의 기독교 지도자 노르마(Norma)*는 거의 1년 동안 부모에게 최악의 악몽인 아들의 실종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범죄 집단의 폭력으로 불안정성이 커졌습니다. 오픈도어가 노르마를 만났을 때 생명을 살리는 중요한 상담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오늘 노르마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세요. 알헤리(Alheri)는 12살 때 나이지리아 북부의 마을을 공격한 보코하람 전사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녀는 포로 생활을 하며 강제 결혼을 당하고, 잦은 구타와 두 번의 유산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알헤리는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현지 파트너들은 그녀를 샬롬 트라우마 케어 센터로 초대했고, 그녀는 기도 제목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신앙을 강화하시고, 보코하람에 대한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필리핀 남부의 20세 신자 레일라(Leila)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이슬람 가족 중 유일한 기독교인입니다. 레일라는 아버지로부터 "전통적인 뿌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영원히 의절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픈도어가 지원하는 월간 청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안전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강제로 이슬람 공부를 해야 하는 동안 성령께서 그녀의 마음을 지키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게 하시길 기도해 주세요. 경찰의 급습이 있던 날, 진이(Jinyi’)*의 세상은 뒤집혔습니다. 그녀와 남편의 미등록 가정교회는 폐쇄되었습니다. 남편이 연루되어 투옥되었기 때문에 진이는 두 아이와 홀로 남겨졌습니다. 진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그녀를 강건하게 하시고 위로하시며 가족을 부양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학생 그룹을 계속 섬길 수 있는 지혜와 인도를 주시길 기도해 주세요. 카냐(Kanya)는 라오스에서 신앙 때문에 집을 포함해 거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앙을 지키며 다른 이주 신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카냐는 질병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굳건히 서서 결코 그분을 부인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강한 믿음을 갖도록 기도해 주세요." 최근 오픈도어 제자 훈련에서 만난 지하 신자 링(Ling)*과 함께 기도해 주세요. 인내를 위해 기도합니다. 중국 남서부에서 그녀의 가족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고 산악 마을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기로 한 결정은 기적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거센 반발도 불러일으켰습니다. 카르텔 전쟁 참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쫓겨난 266명의 기독교인 중 한 명인 리아(Lía)*와 함께 기도해 주세요. 그녀는 운영하던 작은 가게도 버려야 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후원을 통해 리아는 다른 가게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족과 남겨진 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길 기도해 주세요." 동아프리카 섬나라의 기독교인 크리스틴(Christine)*과 함께 기도해 주세요. 그녀는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 17세에 이슬람을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2015년 선교사들을 통해 처음 예수님을 접했고, 이후 예수님이 부르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1년 후 그녀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예수님께 삶을 드렸습니다. 신앙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칩니다. "제 가르침을 기뻐하지 않는 부모들이 있어 힘겹습니다. 쉽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항복하며, 그분이 모든 것을 관리하십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없습니다." 그녀의 인도하심과 힘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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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평론가, 예장합동 소강석 목사 행보 강하게 비판
조우석 뉴스스타운 주필이 최근 본인의 유튜브채널에서 소강석 목사의 문제를 제게하였다.영상캡처 중앙일보 기자 출신의 조우석 뉴스타운 주필이 최근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 소강석 총회장의 공적 행보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영상을 공개해 주목을 받고 있다. 조 평론가는 소 목사가 보수 교단의 지도자로서 일관성 있는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집중 거론했다. 코로나19 방역 국면에서의 태도 논란 조 평론가는 코로나19 확산 당시 소 목사가 정부 방역 지침에 협조하며 교회의 자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한 것을 문제 삼았다. 그는 이러한 태도가 당시 정권의 이른바 ‘정치 방역’ 기조에 편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보수 교단의 수장이 교회의 입장을 충분히 변호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비판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조 평론가는 또 소 목사가 일부 신앙 공동체의 신념을 ‘광적인 신앙’이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 이것이 교회 내 보수적 목소리를 스스로 낮추는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소 목사가 ‘좌우 이념에 매몰되지 않는 열린 교회론’을 표방하며 진보 성향 매체와 인터뷰를 가진 것도 보수 교단 지도자로서의 정체성과 괴리된 행동이라고 규정했다. 북한 교회 방문 이력과 대북 교류 활동 조 평론가는 소 목사가 2014년 북한 봉수교회를 방문하는 등 총 10여 차례 평양을 다녀온 공식 이력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봉수교회가 북한 당국이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운영하는 이른바 ‘관제 교회’라는 점을 지적하며, 그곳에서 남북 공동 기도회를 여는 방식의 교류가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조 평론가는 또 소 목사가 “통일은 곧 진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거론하며,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 교단의 기조와 충돌할 수 있는 시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북한 체제의 실상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대북 교류는 북한 정권에 명분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칼빈 신학 해석 논쟁 조우석 평론가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소강석 목사가 스스로 모순된 행보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상캡처 비판의 배경과 한계 조 평론가는 이번 비판이 개인에 대한 감정적 공격이 아니라 한국 교회와 대한민국의 정체성 수호를 위한 문제 제기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교회가 사회적·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는 보루로 서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다만 이번 비판은 조우석 평론가 개인의 시각에 근거한 것이며, 소강석 목사 측의 공식 입장이나 반론은 이 기사에서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향후 소 목사 측의 반론이 있으면 게재할 수 있으며, 소 목사측의 입장을 추가 취재해 보도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본 기사는 조우석 평론가의 공개 방송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보도 기사입니다. 해당 방송에서 제기된 주장 중 일부는 객관적 근거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은 의견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독자 여러분의 비판적 판단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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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언론협회, 22개사 체제로 재출발…"신뢰 회복이 첫걸음"
한국기독언론협회(회장 노곤채 목사, 이하 한기언협)가 4월 15일 서울 순복음영산신학원에서 제21-1회 임시총회를 열고, 장기 분담금 미납 회원사 제명과 신규 회원사 가입, 회칙 개정을 일괄 의결하며 22개사 체제로 새 출발을 선언했다. 노곤채 회장이 의장을 맡고, 조성권 부회장(기하성총회신문)이 개회기도를, 유현우 총무(기독일보 CDN)가 회원 점명을 진행한 이날 총회에는 총대 19명 중 9명이 직접 참석하고 8명이 위임 참석해 재적 과반을 충족, 정상적으로 개회됐다. 장기 미납 4개사 제명, 신규 2개사 가입… 책임 있는 연대의 재정비 이번 임시총회의 핵심 안건은 회원사 구조 재편이었다. 장기 회비미납된 4개사가 분담금 장기 미납을 이유로 제명 처리됐다. 이에 앞서 제21회 정기총회는 분담금을 2회 이상 미납한 회원사가 2026년 2월 21일까지 기한 내에 납부하지 않을 경우 임원회에 처리를 위임한 바 있다. 임원회는 이를 '협회 활동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결의하고 해당 회원사들에 공문을 발송했으나, 납부가 이뤄지지 않아 이번 총회에서 최종 제명을 의결한 것이다. 동시에 노바미디어와 순복음영산신문 2개사의 신규 가입을 승인, 기독교라인, 기독종합신문, 기독교한국신문, 기독일보 CDN, 기독일보, 기하성총회신문, 길과생명, 뉴스앤넷, 뉴스앤-C, 목양신문, 복음신문, 본헤럴드, 월드미션신문, 정통개혁신문, 크리스챤월드리뷰, 크리스챤한국, 크리스천투데이, 풀가스펠뉴스, 하야방송, 한국교회공보 등 기존 완납 회원사를 포함한 22개사 체제를 확정했다. 노곤채 회장은 "회원사 재정립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라며 "분담금은 협회에 대한 최소한의 연대 의지이자 기독 언론 생태계를 함께 지켜가겠다는 약속이다. 이번 제명은 아쉽지만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회칙 3개 조항 개정…징계 기준 명문화·전형위원회 구성 강화 회칙 개정도 함께 이뤄졌다. 주요 내용은 세 가지다. 먼저 제2조 소재지 조항에 "본회의 사무소가 개소하기 전까지는 회장의 언론사 주소에 둔다"는 단서를 추가했다. 제10조 징계 조항은 기존 '2년 이상 의무 미이행'에서 '연속 3년 이행하지 않을 때 자동 제명되며, 재가입 시 신규 가입 절차를 거쳐야 한다'로 기준을 강화했다. 또한 제15조 임원 선출 규정에서 전형위원회 구성에 부회장을 추가하고, '유사 언론단체 가입 회원은 임원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해 협회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한편 의장은 박한근 부회장이 개인 사유로 사임한 사실을 알리고, 윤홍식 목사를 후임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기자 세미나·심포지엄 연대·AI 대응·후원 돌파… 4대 실행 과제 제시 총회 이후 한기언협은 신뢰 회복과 역할 강화를 위한 구체적 실행 로드맵을 제시했다. 첫째, 기자 역량 강화다. 보도 전문성 부족과 교단 홍보 기사와 탐사·분석 기사의 경계 모호 등 교계 언론에 대한 사회적 신뢰 저하의 원인을 솔직히 인정하며, 탐사보도 기법, 데이터 저널리즘, 팩트체크 방법론 등 실무 중심의 기자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외부 언론 전문가와 학계 인사를 강사로 초빙하고, 회원사 기자들 간 네트워크 강화의 장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둘째, 심포지엄 연대와 기획기사 공동 취재다. 시민사회·학술기관·연합기관과 연대해 종교 정책 관련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 결과를 복수 회원사 공동 취재 기획기사로 연결하는 체계를 구축한다. 정부의 종교 예산 배분 형평성, 종교법인법 개정 논의,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소통 구조 등이 주요 의제로 검토되고 있다. 노곤채 회장은 "교계 언론이 교회 안에서만 소비되는 언론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는 공공언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 AI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다. 생성형 AI 활용 실무 교육을 기자 세미나 핵심 과정으로 편성하되, AI가 효율의 도구일 수는 있어도 교회와 신앙 공동체를 향한 언론의 책임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는 인식 아래, 기독교 언론이 지켜야 할 윤리적 기준과 복음적 가치의 접점을 함께 모색할 방침이다. 넷째, 후원 저조 타개다. 한국 교회 전반의 재정 위축과 교인 수 감소, 코로나19 이후 후원 문화의 변화로 교계 언론의 재정 기반은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다. 한기언협은 이를 개별 언론사의 생존 문제가 아닌 기독 언론 생태계 전체의 위기로 규정하고, 협회 차원의 공동 후원 캠페인, 독자 참여형 콘텐츠 확대, 디지털 구독 모델 연구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창립 20년을 넘어, 신뢰를 향한 새 출발 2004년 창립 이래 20년 넘게 교계 언론의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 온 한기언협은 이번 임시총회를 자기 점검과 쇄신의 계기로 삼았다. 22개사 체제 확정은 책임 있는 연대의 재출발이고, 기자 세미나와 심포지엄 연대는 전문성과 공공성 확보를 위한 실천이며, AI 대응과 후원 돌파는 미래를 향한 생존 전략이다. 이 모든 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결국 '신뢰'다. 교계 언론이 교회와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때,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다시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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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비율 반등…'불신'보다 무서운 '무관심'의 벽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지속적인 탈종교화 흐름 속에서 마침내 반전의 신호가 감지됐다. 한국갤럽이 최근 공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2년과 2024년에 역대 최저치(37%)까지 떨어졌던 우리나라 종교 인구 비율이 2025년 40%를 회복하며 3년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 특히 기독교인 비율은 2024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서 2025년 18%를 기록, 불교(16%)와 가톨릭(6%)을 제치고 3대 종교 중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이번 조사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7,647명을 대상으로 2025년 3월부터 11월까지 한국갤럽이 면접조사 방식으로 수행한 것으로,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는 ±1.1%p다. 2004년 이후 첫 반등…탈종교화의 '가파른 기세' 일단 저지 한국 사회의 종교 인구는 1983년 44%에서 출발해 2004년 54%로 정점을 찍은 뒤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2013년 50%였던 비율은 10년 사이에 37%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2025년 조사에서는 전년 대비 3%포인트 상승한 40%를 기록하며 장기 하락세에 제동이 걸렸다. 무종교 인구는 여전히 60%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2020년 이후 60%대 초반에서 정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탈종교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별로는 10년 전(2015년)과 비교해 남성 종교인 비율이 41%에서 31%로 10%포인트 하락한 반면, 여성은 55%에서 49%로 6%포인트 떨어져 남성의 감소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전 연령대에서 8~12%포인트 하락했으며, 60세 이상만이 52%로 절반을 지켜낸 것으로 확인됐다. 청년층에서도 기독교 독보적 우위 이번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지점은 청년층에서의 기독교 우위다. 40대 이하 연령층에서 기독교는 불교와 가톨릭을 크게 앞서고 있다. 19~29세 응답자 중 기독교인 비율은 14%로, 불교(4%)와 가톨릭(6%)을 훨씬 웃돈다. 30대에서도 기독교 16%에 비해 불교 6%, 가톨릭 7%로 격차가 뚜렷하다. 이는 기성세대에서 불교 세력이 강한 것과 달리, 젊은 세대로 갈수록 기독교가 종교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60세 이상에서는 불교(27%)가 기독교(18%)를 크게 앞서 세대 간 종교 지형의 뚜렷한 대비를 보여줬다. 성별로는 여성 기독교인 비율이 23%로 남성(13%)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신앙 실천 면에서도 기독교인의 경건 생활은 타 종교를 압도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성경(경전)을 읽는다'는 응답에서 기독교인은 61%로 종교인 전체 평균(38%)을 크게 웃돌았다. 이는 가톨릭(45%)보다 16%포인트, 불교(6%)와 비교하면 무려 10배 이상 높은 수치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기도한다'는 항목에서도 기독교인(43%)이 가톨릭(39%), 종교인 전체 평균(29%), 불교(7%)를 모두 앞섰다. 진짜 위기는 '이탈'이 아니라 '무경험'과 '무관심' 그러나 반등의 소식이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 무종교인의 종교 인식을 들여다보면 더욱 근본적인 과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과거에 종교를 믿은 적이 있다'는 무종교인의 비율이 2025년 2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 무종교인 중 78%가 평생 어떤 종교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순수 무종교인'이라는 뜻이다. 탈종교화가 단순한 신앙 이탈을 넘어 '종교 무경험'이 사회에 고착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다. 과거 신앙 경험이 있는 무종교인 중에서는 기독교 출신이 51%로 가장 많았고, 불교(34%), 가톨릭(15%) 순이었다. 이는 타 종교에 비해 기독교에서 무종교로 이탈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무종교인의 종교 호감도다. 무종교인 3명 중 2명(67%)은 '호감 가는 종교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2004년 33%, 2014년 46%, 2021년 61%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것으로, 종교 전반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이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는 '관심이 없어서'가 52%로 가장 높았고,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어서'(20%),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13%)이 뒤를 이었다. 과거의 탈종교화가 종교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적극적 '이탈'이었다면, 이제는 종교를 삶의 선택지에서 아예 지워버린 '심리적 단절'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무관심의 벽'을 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새 과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게 제언했다. 첫째, 반등의 신호를 발판 삼아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교회를 찾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착시키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단순한 수적 증가를 목표로 하는 전도를 넘어, 새가족 정착과 양육 시스템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무관심의 벽'을 넘기 위해 종교적 권위를 내려놓고 '일상의 접점'을 회복해야 한다. 공격적인 전도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 교회는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는 공간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짐을 덜어주는 안식처이자 의미 있는 관계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매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한편 초자연적 세계관에 관한 조사에서는 우리 국민의 57%가 '기적이 존재한다'고 응답해, 종교인 비율(40%)을 훨씬 웃도는 수치를 나타냈다. 이는 무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초월적 차원에 대한 내면의 갈망이 여전히 존재함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한국 교회가 복음 전도의 접점을 찾는 데 있어 새로운 가능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반등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한국 교회 앞에 놓인 과제는 분명하다. 문을 여는 것, 그리고 찾아오는 이를 진심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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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지성 운동 공동체 '케일럽포럼' 공식 출범
케일포럼은 4월 16일 종로구 한국기독교교연합회관에서 창립예배 및 홍호수 목사를 대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출범을 했다. 성경적 진리를 기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공공선 수호에 앞장서는 기독 지성 운동 공동체 '케일럽포럼(Caleb Forum)'이 4월 16일 공식 출범했다. 케일럽포럼은 이날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창립감사예배 및 대표 취임식을 거행하며 다음세대 리더 양성과 공적 영역에서의 성경적 가치 회복을 핵심 사명으로 천명했다. 구약성경의 갈렙처럼 변함없는 순종과 담대한 믿음으로 이 시대의 영적·사회적 과제에 맞서겠다는 이 공동체의 출범은 한국 기독교 지성 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로 주목받고 있다. "오직 여호와만을 온전히 따르며 진리를 수호한다"…케일럽 선언 채택 이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함께 채택한 '케일럽 선언'은 경외와 진리, 분별과 저항, 공공선 실천, 계승과 헌신이라는 네 가지 핵심 가치를 축으로 구성됐다. 선언문은 "오직 여호와만을 온전히 따르며 진리를 수호한다"는 첫 번째 가치에 대해 "세상의 풍조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경외함으로 일상을 시작하고, 성경적 진리를 공공영역의 기준으로 삼아 왜곡된 가치를 바로잡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밝혔다. 두 번째 가치인 분별과 저항에 대해 선언문은 "이념의 편향을 거부하고 신뢰받는 권위를 세운다"고 규정했다. 극단적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시대를 분별하며, 정직한 성품과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지성적 리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가치인 공공선 실천에서는 "침묵하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방침을 천명하며, 신앙을 개인 영역에 가두지 않고 정책·문화·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목소리를 내겠다고 밝혔다. 네 번째 가치인 계승과 헌신의 경우 다음세대를 향한 책임을 분명히 했다. 선언문은 "다음세대에게 바른 방향과 영적 유산을 전수한다"며 "혼탁한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기준을 제시하고 다음세대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지적·영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모든 역량을 헌신하겠다"고 명시했다. 아울러 "85세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갈렙의 야성으로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사회적 과제와 영적 도전에 담대히 나아갈 것"을 선포했다. 11대의 핵심 사역 비전을 선포하는 참석자들 아카데미·싱크탱크·플랫폼…11대 핵심 사역 비전 제시 케일럽포럼은 선언과 함께 다음세대를 위해 수행해야 할 11대 핵심 사역 비전도 공개했다. 먼저 '케일럽 아카데미'를 통해 성경적 세계관 교육을 제공하고, 정치·경제·문화·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기독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지적 역량을 갖춘 리더를 양성한다. '리더십 아카데미'를 통해서는 청년들이 공공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와 실질적 지원을 제공한다. 목회자와 전문가를 연결하는 '싱크탱크' 기능도 구축한다. 강단과 광장을 잇는 이 역할은 지역별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사회 현안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 방안을 함께 논의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전국 단위 현장 프로젝트인 '케일럽 투어 아카데미'를 통해서는 국민 삶의 현장에서 체감 가능한 실천 모델을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재난 구호와 사회적 약자 지원을 위한 '케일럽 라이프', 문화 콘텐츠 분석과 가치 분별을 위한 'Decode the culture', 역사 현장 탐방 프로그램 '히스토리 메이커스', 전문가 참여형 공익 활동 '프로보노' 등도 주요 사역으로 포함됐다. 교회와 사회를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도 강조됐다. 케일럽포럼은 'K-Church' 비전을 통해 교단 중심의 분열을 넘어 가치 중심의 연대를 제안하며 기독교 공적 가치 위원회 구성 등 공동 정책 지침 마련을 추진한다. 다음세대 교육 플랫폼 구축, 사회공헌 브랜드 통합, 윤리·정책 싱크탱크 상설화 등을 통해 한국교회의 공적 신뢰 회복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이다. 경제 영역에서는 'K-Company' 비전을 통해 기업이 단순 이윤 추구를 넘어 공공선 실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정직과 인격 기반의 리더십 회복을 촉구했다. 대형교회를 향해서도 'K-Megachurch' 제안을 통해 교회 자원이 내부 성장에 머무르지 않고 청년 대상 지적·직업적 기회 제공, 성경적 가치 수호를 위한 연대 강화 등 사회적 가치 회복에 활용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공공 영역에서 성경적 진리를 침묵하지 않고 선포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는 홍호수 목사 홍호수 초대 대표 취임…"신뢰받는 지도자 200명 세우겠다" 이날 초대 대표로 취임한 홍호수 목사(청소년중독예방운동본부 이사장)는 취임사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며 케일럽포럼의 사명을 역설했다. 홍 대표는 "대한민국은 지금 가치의 왜곡과 극단적 이념 대립으로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며 "공공 영역에서 성경적 진리가 외면당하는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 대표는 구체적인 임기 중 목표도 밝혔다. 그는 "임기 동안 공공선을 수호하는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신뢰받는 지도자 200명을 세워 사회 각 영역에 영향력을 확장하겠다"며 "다음세대를 위한 영적·지적 자산을 구축해 혼란이 아닌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겠다"고 역설했다. 특별히 "권위가 아닌 섬김으로 공동체를 이끌겠다"는 다짐도 내놓으며,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현대판 잇사갈 자손으로서 갈렙의 후계자들이 이 시대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갈렙의 믿음으로 순종을 통해 씨앗을 민족을 일군 것처럼 케일포럼을 통해 이 시대에 씨를 뿌려야 한다고 설교하는 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설교 "갈렙의 믿음으로 씨 뿌리는 공동체 되라" 창립감사예배 설교는 이태희 목사(리바이벌광장기도회 대표)가 맡았다. 이 목사는 가나안 정탐 이야기를 통해 케일럽포럼의 존재 이유를 조명했다. 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 대부분의 백성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올라가서 취하자고 선포했다"면서 "갈렙은 믿음과 순종의 씨를 끝까지 뿌린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청교도 정신을 통해 기독 지성 운동의 역사적 선례도 제시했다. 그는 "청교도들은 단순히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사회와 문명의 기초를 세웠다"며 "그들은 교육과 제도를 통해 다음 세대를 세우며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는 미국 건국 정신의 토대가 됐다"고 덧붙였다. 이어 "다가올 통일 한국 역시 성경적 세계관 위에 세워져야 한다"며 "그래야 자유와 정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설교를 마무리하며 "케일럽포럼이 갈렙과 같은 믿음으로 이 시대에 씨를 뿌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며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취임식에서는 신상철 더복있는교회 목사가 홍호수 대표에게 취임패를 전달하는 순서도 진행됐으며, 이사진 및 관계자들이 사명메달을 들고 기념촬영을 가졌다. 포럼의 공동책임을 받은 첢은 리더들 오는 28일 공동출판기념회로 첫 공식 행보 시작 케일럽포럼은 창립 이후 첫 공식 행보로 오는 28일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에서 젊은 리더들의 공동출판기념회를 개최하며 본격적인 다음세대 사역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는 케일럽포럼이 선언과 비전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실천적 사역 현장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한국 기독교계 안팎에서는 케일럽포럼의 출범이 단순한 단체 창립을 넘어 한국 교회가 공적 신뢰를 회복하고 다음세대에 바른 영적·지적 유산을 전수하려는 흐름의 한 징표로 해석되고 있다. 성경적 진리를 사사화하지 않고 공공 영역에서 실천하는 '갈렙 정신'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지, 케일럽포럼의 향후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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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AI 이미지 인권을 말하는 자,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인권이라는 단어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남용되는 언어도 드물다. 누구나 인권을 말하고, 누구나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말해진 인권이 진정한 인권인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는 하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싸고 쏟아낸 발언들은 그 시험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히틀러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넘어, 그의 인권 사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의 대담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침묵에 있다. 같은 입으로, 같은 열정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말한 적이 있는가. 탈북민의 피눈물 나는 증언 앞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수용을 향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택적 인권은 공산주의 인권관의 오랜 문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인권은 본래적 의미의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투쟁의 도구다. 인권은 억압받는 계급, 즉 혁명의 편에 선 세력을 위한 것이며, 계급적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게는 인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인권의 선택적 적용은 모순이 아니라 원칙이다. 오늘날 이른바 진보 진영이 구사하는 인권 담론의 문법은 이 전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 — 2023년 10월 7일, 1,200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240여 명이 납치된 사건 — 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침묵한다. 북한이 자국민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두는 구조적 폭력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위권 행사에는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진영 논리로 포장된 정치적 무기다. 진정한 인권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억압자가 누구이든, 피해자가 어느 진영에 속하든,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비유는 역사적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이재명 대표의 히틀러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과잉이 아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절멸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엄정하게 정의한 이 사건을 하마스 테러 조직의 공격에 맞서 자국을 방어하는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이 논법은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실존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다.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첫날부터 주변 아랍 국가들의 총공세를 받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존적 전쟁 상태가 76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는 그 헌장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를 명시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한 국제법 해석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적 판결이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평행한 운명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948년, 같은 해에 두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모두 건국 즉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외세와 내부 위협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야 했으며, 국제 사회의 냉담 속에서도 홀로 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지고, 국가 생존을 위한 결의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피로 지켜낸 실재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휴전선 너머 핵무기를 개발하며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국내 정치 담론은 그 실존적 위협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한민국의 자위권과 동맹 연대를 부정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흔드는 논리는 곧 대한민국을 흔드는 논리다. 기독교 인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보편적 존엄 이 논의를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우려면 기독교 인권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인권의 근거를 사회 계약이나 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7절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 신학적 선언이 인권의 절대적 보편성의 근거다. 인간의 존엄은 국적도, 민족도, 계급도, 정치적 진영도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를 더욱 구체화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묻는 자에게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답을 주셨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자 앞에서는 진영과 민족을 초월한 응답이 요청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기독교 인권 사상의 핵심이다. 고통은 편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 앞에서는 이념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이 기준으로 이재명의 인권관을 평가하면 판단은 명료해진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은 아파하면서 북한 주민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 하마스의 테러 피해자에게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성토하는 것 — 이것은 Imago Dei에 근거한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진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우상숭배적 인권관이다. 교회의 침묵은 공모다 "정교분리(政敎分離)." 한국 교회가 공적 사안 앞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방패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이다. 교회가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앞에서도 진실을 말했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전체에 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행위를 면전에서 책망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성경적 선지자 전통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것도 이 전통이다.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이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집단학살의 언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Imago Dei의 신학으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인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묵시적 동의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귀하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가자지구의 민간인도, 이스라엘의 납치 피해자도, 북한 수용소의 정치범도,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힌 탈북민도. 그 어떤 생명도 진영의 논리에 따라 가치의 경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인권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편의 고통에도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 — 그것이 Imago Dei에 기초한 기독교 인권 사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 존엄의 이상이다. 이재명의 인권관을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 땅의 공적 담론 속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 일에 교회가, 신앙인이,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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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대한민국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나라
"22세기에도 대한민국은 살아 있을까." 도발적이다 못해 서늘한 이 질문 하나가 책의 표지를 뚫고 나온다. 2026년 1월, 세이지 출판사가 펴낸 김미영 VON뉴스 대표의 신작 〈숨은민국—주체사상파·부정선거·북한인권 그리고 마이 라이프〉는 출간과 동시에 보수 기독교 지식인 사회와 안보·이념 논쟁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저자가 수십 년에 걸쳐 언론 현장과 북한인권 운동, 국제인권 무대에서 축적해 온 문제의식과 경험을 집대성한 이 책은, 단순한 이념 고발서도 정치 비평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직시된 적 없는 '보이지 않는 나라'의 실체를 추적한, 한국 현대사 최전선의 기록이다. 2024년 12월 3일이 촉발한 각성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오랜 잉태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 계기는 뚜렷하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2024년 12월 3일의 계엄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그 사건을 통해 이 책의 주제를 공유할 독자들이 제법 있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엄 선포와 그 후폭풍으로 한국 사회가 격렬하게 요동치던 그 시점에,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평생 가슴에 품어 온 질문을 세상 앞에 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더 이상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저자가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뿌리를 "보이지 않게 작동해 온 또 하나의 나라", 즉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지만, 저자의 시선에 따르면 분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물리적 분단과 더불어,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수평이 아닌 수직의 분열, 다시 말해 '위의 나라'와 '아래로 숨은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숨은민국'과 '은국민'이란 무엇인가 〈숨은민국〉이 제시하는 개념적 틀은 독특하고 도전적이다. 1945년 38선으로 남북이 갈린 한반도는 6·25전쟁을 거쳐 1953년부터는 휴전선이라는 더 길고 넓은 경계선으로 갈렸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만 갈린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도 다시 두 개의 나라로 갈렸다.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갈렸다. 이 두 개의 나라 중 한 나라는 아래로 '숨은' 나라였다. 저자는 이 숨은 나라의 구성원을 '은국민(隱國民)'이라 명명한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적지 않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존재 이유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실상이 바로 '은국민'이다. 은국민들은 한국인을 통칭하여 극우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저자는 명확한 경고를 덧붙인다. 저자는 숨은민국을 북한이나 중국 공산당의 단순한 하수인으로 축소하는 시각을 경계한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신념·조직·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복잡계'이며, 한국 사회의 문화·지식·정치 영역 깊숙이 뿌리내려 왔다고 주장한다. 책의 제목을 거꾸로 읽으면 '국민은 숨(breath)'이 된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제목을 통해 국민의 목숨이 걸린 대한민국 상황에서 숨은민국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설명하는 저자 김미영 대표(동영상 캡처) 두 개의 지하정당에서 북한인권까지 책은 크게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숨은민국'을 움직여 온 두 개의 지하정당에 대한 역사적 추적이다. 숨은민국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이 책에서 선택한 것은 두 개의 정당에 다가가는 것이다. 은국에 여러 개의 지하정당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정당으로 특정하는 것은 통일혁명당(통혁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저자의 분석은 단호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조용히 점령한 은국의 지도부는 통혁당, 그리고 은국민 대중은 민혁당을 통해서 대거 양산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두 정당은 불법적 비밀정당 형태였지만 실체로서 존재했고, 몸을 숨길 뿐 사라진 적이 없다. 나아가 1960년대의 통혁당은 1990년대의 민혁당과 본질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두 번째 축은 주체사상파, 이른바 주사파에 대한 저자 본인의 장기 취재 기록이다. 1999년 '월간조선'과 '시대정신' 등을 통해 이루어진 김영환 그룹과의 인터뷰, 그리고 '전향'이 아닌 '전환'이라는 표현을 둘러싼 논쟁은 당시 한국 지성계와 운동권 내부의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북한 정권의 건국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발언이 대한민국 헌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사상적 모순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추적한다. 세 번째 축은 북한인권 문제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책은 북한인권 문제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김미영 대표는 1999년 이후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해 전시·전후 납북자 구출 운동·정치범수용소 해체 운동·'통영의 딸' 구출 운동 등 굵직한 현안의 최전선에 서 왔다. 저자가 말하는 7가지 역사적 진단 저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을 7가지로 정리한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의지가 100년 이상 치열하게 지속되어 왔다는 것,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적이 상존한다는 것, 대한민국과 우방국을 위협하는 공작망이 실재한다는 것, 반체제 지식인들에 대한 혁명 세화 공작이 종북 지하당의 건설로 이어졌다는 것(4·19 직후 통일혁명당, 5·18 이후 민족민주혁명당), 통혁당과 민혁당의 특징과 정치 세력화 성공, 지하 정당의 변신과 보수 우파 정당과의 화학적 결합에 따른 합법 정당 설립, 그리고 진정한 대한민국의 제도 정당 실종 상태가 그것이다. 숨은민국의 최종 귀결점에 대한 저자의 진단도 명확하다. 저자는 '숨은민국'의 귀결점은 결국 '원 차이나'이며 주사파·민혁당은 그것을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말로 포장하여 북한의 나아갈 길이라고 말해 왔다고 분석한다.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자유선거가 없는 시장경제'를 말하며 중국이 그런 체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왔다고 선전해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쟁의 끝자락에서 희망을 말하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어떤 전쟁의 끝자락에서"다. 저자는 이 제목 하나로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의 좌표를 압축한다. 이미 수십 년째 이념 전쟁의 한복판을 걸어온 사람의 목소리로, 그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대한민국 사람들, 보통의 선량한 '한국인들'을 위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국적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쓴다.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라는 모종의 불안감이 있는 사람도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한다. 숨은민국은 결코 단순하지도 만만치도 않다. 명백히 '복잡계'다. 그들의 신념도 이해해야 하지만 그들의 실력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과 실력을 압도할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야 한다. 이 결론은 고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호소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저자 김미영은 누구인가 이 책의 무게는 저자의 이력과 분리될 수 없다. 저자 김미영은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한국현대문학 석사)을 마치고,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과 미국 노틀담 대학 법대에서 미국법과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다. 주체사상파(주사파) 학생운동권 전향 문제 특종으로 조선일보에 특채되어 북한문제를 주로 다루는 기자로 일했다. 책을 통해 한국의 현 상황의 위기를 경고하는 김미영 대표 그의 삶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었다. 1999년부터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하여 전후·전시 납북자구출운동에 헌신했고,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연구실장, 정치범수용소 해체운동과 오길남 박사 가족 '통영의 딸 구출운동'을 펼쳤으며, 황장엽 방미 수행단으로 동행했고, 유엔인권이사회에 NGO 활동가 자격으로 사이드이벤트를 여는 등 북한 김일성 3대의 반인도범죄와 전쟁범죄 규정을 위해 일했다.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도 이 책의 저변을 흐른다. 잠시 김 대표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녀는 주사파의 주요 인물로 자리잡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된 것은 하나님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반근대 세력들을 견제하는 데 지금까지 쓰임받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필독서"와 "절규"의 사이에서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한 독자는 "저자 김미영 선생의 그동안의 아픔이 무엇인지, 절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의 소박하지만 거창한 인생목적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알게 해 주었다"며 "이 책은 사회과학 평론도 아니요, 문학작품도 아니요, 단순한 저널리스트의 취재수첩도 아니지만, 그 울림의 강도에 있어 일반 서적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고 평했다. 또 다른 독자는 "부정선거와 법치 파괴를 통해 3권분립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경제노동악법 제정을 통해 산업기반 파괴와 국유화를 진행시키는 현실을 이 책이 홍콩이나 베네수엘라행 급행열차를 탄 느낌으로 그려냈다"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고 밝혔다. 서점 구매 리뷰에서도 "작금의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한편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한 보수 기독교 논자는 "국민 대다수는 이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을 듯싶다. 이유는 그들은 공산주의를 포함한 좌익사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며 이념적 문맹이 이 책의 경고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 시대에 이 책이 갖는 의미 〈숨은민국〉은 특정 진영의 주장을 담은 이념서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공산주의 세력의 100년 권력 투쟁, 북한이라는 상존하는 적의 존재, 남한과 해외에까지 뻗은 공작망, 반체제 지식인에 대한 조직적 포섭, 통혁당과 민혁당의 성격 차이, 운동권 정치세력의 분화와 변신, 그리고 제도 정당의 실종까지를 하나의 체계적 세계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고발서가 아니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한 번도 정면으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 즉 "이 나라 안에 이 나라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김미영은 자신의 평생을 걸고 답한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질문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분단 80년, 건국 78년이 된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생존을 진지하게 묻기 시작해야 할 때, 이 책은 그 불편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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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차이나(Pax Sinica)의 야망과 문명의 균열
미국은 팍스 차이나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AI 이미지 역사에서 강대국은 2인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미국을 제치려는 야망은 ‘일대일로’ 전략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夢’이 세계를 제패할 것인가? 미국은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와 이란의 전쟁을 통해 중국에게 경고장을 날렸다. 2인자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팍스 아메리카를 유지하려는 전략만은 아닐 것으로 보이다. 본지는 중동(이란 루트와 '저항의 축' 지원 배후), 아프리카(채무의 덫과 인프라 식민지 — 아이러니하게도 K-방산의 진출로가 된 역설), 유럽(일대일로 경제 침투 + 이슬람 인구학적 팽창 + 문화막시즘의 3중 포위 — 문 닫은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팔리는 유럽의 현실 The Korea Daily), 동남아(인도네시아 채무 함정 실례), 남미(베네수엘라·멕시코). 그리고 트럼프 반격의 효과와 한계, 기독교 문명의 내부 붕괴 문제를 담는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 주> 서론: 세계를 재편하는 조용한 전쟁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밝힌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은 단순한 인프라 투자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21세기 팍스 차이나(Pax Sinica), 즉 중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100년 대전략의 출발 신호였다. 아프리카의 항구, 중동의 석유 루트, 유럽의 수도 한복판, 동남아의 철도, 남미의 광산까지 — 중국의 붉은 자본은 이미 지구의 혈관을 장악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 전략의 더 깊은 차원에는 경제적 침투를 넘어선 문명의 교체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전체주의 통치 모델이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 그리고 기독교 문명이 세속주의·이슬람·문화마르크시즘의 연합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이 대전략의 핵심 시나리오다. 아산정책연구원의 2026년 이슈브리프는 "강대국 일방주의와 예외주의가 횡행하며, 기존 국제질서를 규정짓던 정치·경제적 레짐들이 약화됐다"고 진단한다. 세계는 지금 무질서 속의 체제 전환기에 서 있다. "일대일로는 인프라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중화 세계질서 재건을 위한 100년 전략이다" Ⅰ. 일대일로의 전 지구적 판도: 5개 전선의 실체 1) 제1전선— 중동: 이란과 저항의 축 일대일로의 지정학적 핵심은 이란이다. 이란은 아시아와 유럽, 남반구와 북반구를 연결하는 최대 규모의 국제 수송 회랑이자, 중국의 에너지 안보를 떠받치는 전략 거점이다. 중국은 이란과2021년25년 포괄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석유·가스 개발에서 인프라, 군사 협력까지 전방위 연대를 구축했다. 이란이 하마스·헤즈볼라 등 이른바 「저항의 축」을 지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중·이란 경제 동맹이 자리한다. 그러나 2026년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군사 공격으로 이 구도에 균열이 생겼다. 러시아 분석매체 <프라우다>의 보도에 따르면 "이란 정부가 무너진다면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란을 잃으면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 지배의 핵심 고리를 잃는 셈이다. 현재 중동 지역은 미국-이스라엘-사우디 안보구조가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어 무질서에서 벗어나고 있으나, 불안정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2) 제2전선— 아프리카: 채무의 덫과 인프라 식민지 아프리카는 중국 일대일로의 최대 수혜지이자 최대 피해지다. 중국은 수백억 달러를 투입해 아프리카 주요국에 고속철도, 대형 항구,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케냐는 수도 나이로비와 항구도시 몸바사를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 90%를 중국에서 조달했으나, 현재 케냐의 총 공공부채는 GDP의 67%인 757억 달러까지 불어났고 중국은 세계은행에 이어 케냐 최대 채권국이 됐다. 앙골라의 대중국 채무는 190억 달러에 달한다. 이집트는 중국 자본으로 서울보다 큰 신행정수도(700㎢)를 건설 중인데, 중국의 세계 최대 국방부 청사를 본뜬 이집트 국방부 청사,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 등이 여기 포함된다.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이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2년 아프리카 15개국 여론조사에서 영향력 및 긍정 평가 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에서의 소프트파워 전쟁도 중국이 앞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도 존재한다. 중국이 수십조 원을 들여 닦아놓은 아프리카의 도로와 항구가 이제 한국의 K2 흑표 전차가 달리는 무대가 되고 있다. 모로코 정부가 K2 전차 400대 도입을 검토하는 배경에는, 중국이 깔아놓은 고하중 인프라가 한국 중무기 체계의 진출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얄궂은 나비효과가 있다. 지정학은 때로 아이러니로 말한다. 중국의 ‘夢’과 미국과의 패권 경쟁은 단순한 1위 싸움이기 보다 자유민주국가의 붕괴와 맞물려있다. AI이지미 제작 3) 제3전선 — 유럽: 두 갈래 침투, 일대일로와 이슬람 유럽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포위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적 침투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의 인구학적 팽창이다. 이탈리아는 2019년 G7 국가 중 유일하게 일대일로에 서명했다(2023년 탈퇴). 중국은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상업 부동산을 잠식했고, 독일의 핵심 제조업체들을 인수했다. 2016년 산업용 로봇 분야 세계 최강 쿠카(KUKA)가 중국 자본에 넘어간 것이 그 상징적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독일은 첨단기술 기업에 대한 외국 자본 인수 심사를 강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위협은 문화의 내부 붕괴다. 유럽에서는 이민과 다문화주의가 기독교 문명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프랑스 전체 인구의 10% 내외가 무슬림이다. 영국에서는 해마다 220개의 교회가 폐쇄되는 반면 110개만 새로 세워지고, 문을 닫은 교회의 상당수가 이슬람 사원으로 팔리고 있다. 독일은 지난 10년간 515개의 가톨릭교회가 공식 폐쇄됐고, 네덜란드에서는 향후 4년 내 700곳 이상의 개신교회가 사라질 전망이다. 카메룬 맘페 교구의 앤드류 은키 대주교는 "유럽의 교회가 잠들었기 때문에 유럽이 이슬람화되고 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복음과 멀어진 곳에 이슬람이 기회를 노리고 들어왔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2025 국가안보전략(NSS)조차 "유럽은 이민과 다문화주의로 붕괴되고 있는 문명적 쇠퇴지역"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교회가 잠들면 이슬람이 들어온다. 유럽이 그 생생한 증거다" — 아프리카 대주교의 경고 4) 제4전선 — 동남아: 채무의 덫과 반중 감정의 확산 동남아시아는 중국 일대일로의 '쇼윈도'이자 균열의 진원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는 동남아 최초의 고속철도로 홍보됐지만, 실제 이용객은 예상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속철도 연간 매출이 약1,500억 원인데 중국에 갚아야 할 이자만 매년 1,700억 원에 달해, 2026년 2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결국 국가 예산을 투입해 중국 개발은행 대출금을 갚기로 결정했다. 당초 "국민 세금 없이 민간 자본(B2B)으로만 하겠다"던 약속은 산산조각이 났다. 내부에서 "중국의 채무의 덫에 제대로 걸렸다"는 비판이 거세다. 필리핀은 두테르테 정부 시절 중국과 대규모 일대일로 협력을 맺었지만, 남중국해 분쟁이 격화되면서 친미 노선으로 선회했고, 일대일로 사업들을 재검토하고 있다. 미얀마는 쿠데타 이후 고립 속에서 중국 의존도가 더욱 심화됐다. 라오스는 중국-라오스 철도 완공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GDP가 21% 증가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국가 부채가 GDP의 100%를 돌파하며 사실상 중국의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된다. 5) 제5전선 — 남미: 베네수엘라와 자원 패권 남미에서 중국의 전략적 베이스캠프는 베네수엘라였다. 마두로 정권에 수십억 달러를 대출해 주고, 원유로 상환받는 구조로 중국은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을 사실상 지배했다. 멕시코에서는 중국 자본이 상권과 건물을 잠식하고, 친중 성향의 정부와 결탁해 현지 소상공인을 고사시키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의 광산 자원 역시 중국 국유기업들의 주요 투자 대상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적극 개입이 이 전선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마두로 체포 압박과 군사·경제 제재는 중국의 서반구 진출에 실질적 타격을 줬다. 이로 인해 남미에서 중국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나,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좌파 정부와의 관계는 여전히 긴밀하다. Ⅱ. 문화 막르크시시즘과 이슬람: 서구 문명 내부 붕괴의 두 엔진 일대일로가 '외부로부터의 침투'라면, 문화마르크시즘(Cultural Marxism)과 이슬람주의는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주도하는 두 엔진이다. 이 두 세력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문명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공조한다. 문화 마르크시즘은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발원해, 전통 가족·종교·도덕·국가 정체성을 해체하는 이념으로 서구 교육·미디어·문화 전반에 침투했다. 동성애 이념, 젠더 유동성, 낙태 권리, 역사 왜곡, 탈식민주의 담론 등은 모두 이 흐름의 산물이다. 유럽에서는 이 흐름이 기독교 설교를 '혐오 발언'으로 규제하고, 전통 가족 개념을 '차별'로 낙인찍는 법적 환경을 만들어냈다. 서유럽 기독교인들 중 대부분은 명목상 기독교인에 불과하다. 영국의 경우 인구의 약 70%가 문화적·역사적 이유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히지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이는 7%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포르투갈·아일랜드에서는 8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답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동성결혼과 임신중절에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문화마크르시즘이 만들어낸 '탈기독교 기독교인'의 초상이다. 이슬람은 이 공백으로 파고든다. 유럽의 이슬람 인구는 프랑스에서만 약 600만 명(전체 인구의 10%)에 달하고, 영국 400만 명, 독일 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2010년대 이후 반복되면서 유럽의 기독교는 "문명 간 충돌"의 전면에 불가피하게 서게 됐다. 유럽 극우 정당들이 기독교를 이민자·세속주의에 맞선 '문화적 방패'로 활용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신앙 부흥이 아니라 정치적 정체성 전쟁이다. "교회가 비어가는 속도만큼 유럽은 포스트-기독교 문명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2기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자처하는 전략을 가지고 중국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Ⅲ. 미국의 반격: 효과와 한계 트럼프2기 행정부는 이 흐름을 차단하려는 가장 적극적 행위자로 등장했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 압박, 이란 군사 공격, 전 세계 상호관세 부과, NATO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증액 압박 등 일련의 조치들은 중국-이란-베네수엘라 삼각 축을 해체하려는 전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이란 공격은 일대일로의 핵심 육로 통로를 차단하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서반구에서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남미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동맹국들의 중국 의존 탈피도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역설도 있다. 트럼프의 일방주의는 전통 동맹국인 유럽과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개도국들에게 "미국보다 중국이 더 믿을 만한 파트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2025년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잇따라 무역협정을 체결하며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또한 트럼프의 상호관세는 2026년 2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위법 판결을 받아 무효화됐다. 이로 인해 대중국 협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설령 관세 압박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중국은 유라시아·아세안·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일대일로 전략을 계속 확대하며 미국의 압박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반격은 필요하고 일정 부분 효과적이지만 충분하지 않다.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는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뢰, 가치, 그리고 문명의 내적 활력이 함께해야 한다. Ⅳ. 결론: 문명 방파제는 어디에 세워지는가 팍스 차이나의 야망은 경제·외교·문화·정치·이념의 전방위 침투를 통해 전진하고 있다. 그 최종 표적은 자유민주주의이며, 더 깊은 곳에서는 기독교 문명이다. 일대일로는 경제 네트워크처럼 보이지만, 그 핵심은 중국 중심의 문명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재편하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와 문화마르크시즘은 서구 내부에서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는 협력자 역할을 한다. 중국공산당이 이 두 세력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는지의 여부와 별개로, 결과론적으로 이들의 목표는 수렴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5세기 서로마 제국은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도덕적 해이와 정체성 상실로 무너졌다. 오늘의 서방 문명도 동일한 경로를 걷고 있다. 교회가 비어가고, 가정이 해체되고, 진리의 개념이 해체되는 곳에,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새로운 질서로 들어온다. 이스라엘·미국·한국은 그나마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나라들이다. 이 세 나라가 각자의 내부 균열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팍스 차이나의 파도를 막을 방파제는 없다. 그 방파제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니다. 참된 방파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진리에 기반한 공동체, 그리고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목숨으로 지키려는 시민들의 각성이다. 한국 교회와 사회가 이 시대를 읽는 눈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팍스 차이나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는 군사력이 아니다. 진리와 공동체 안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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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자기관리, 칼과 칼집
1. 둘째 딸 은별이가 3년 동안의 백혈병 투병 생활을 마치는 시기의 일입니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어요. 중심정맥관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해섭니다. 중심정맥관은 독한 항암 약을 주입하는 케모 포트를 말해요. 어깨 쇄골 아래에 심장에서 나오는 튼튼한 혈관에 연결한 것이 중심정맥관-케모 포트입니다. 팔이나 손등 혈관으로는 독한 항암약물을 견딜 수 없어요. 혈관이 타들어 가고 부작용들이 나타날 수 있어서 처음 항암치료 시작하기 전에 전신마취 후 수술해서 심었던 겁니다. 2. 은별이는 3년 가까이 백혈병 항암치료로 고생했는데 감사하게도 치료과정 중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치료 일정도 잘 지켰어요. 포트 제거 수술 한 이후 10~20% 재발하는 경우가 있어서 앞으로 잘 지켜보면 됩니다. 5년을 지켜보고 이상 없으면 완치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도 부모님들도 3년 치료과정을 마치면 암묵적으로 완치되었다고 보는 듯해요. 아무튼 환자 보호자로서 병원 올 때는 조금 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온통 아픈 분들, 어려움 가운데 있는 보호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입니다. 아픈 게 잘못이 아니건만 더욱 긴장감 있는 병원 생활이 현실입니다. 3. 그런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섬겨주시는 의료진들은 그래서 함께 긴장합니다. 공감해주시고 먼저 잘 챙겨주시려고 애쓰십니다. 말 한마디도 행동 하나도 긴장감 속에 있는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아픔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주의합니다. 위로가 되어 주고자 애쓰십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사명감은 투철하나 공감 능력은 덜떨어진 의사를 볼 때가 있어요.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필 은별이 검사받으러 온 그날 그 모습을 봤습니다. 얼굴은 악의가 전혀 없어요. 투철한 사명감 가지고 <원칙대로!>를 외칩니다. 4. 보호자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이 병원에 와 있는지는 관심 없는 어설픈 인턴, 레지던트더라고요. 누가 원칙을 모를까요. 그걸 설명해주는 의사가 말투와 톤에 따뜻함과 배려가 묻어나지 않음이 안타깝다는 것이죠. 같은 말이라도 ‘아’다르고 ‘어’다르지 않습니까? 아직 어려서 저러겠거니 생각하고 웃고 스쳐 지나갔지만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의사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남아요. 다른 때보다 불편함이 좀 더 길어져요. 불편함도 때로는 성령님의 감동일 수도 있음을 이젠 압니다. 조용히 성령님께 마음으로 여쭤보고 주시는 감동에 귀를 기울여 보니... 맞습니다. 그 꼴, 그 모습이 영혼의 의사라는 제게서 아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편한 이유가 바로 내 모습이었던 겁니다. 5. “어”라고 말해도 “아”라고 해석하시고 자신을 돌아보시는 성숙한 분들도 있습니다. 험한 세상, 치열한 영적 전투로 인하여 상처가 심한 영혼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아”라고 말해도 “어”라고 해석하고 분노합니다. 영혼이 아파서죠. 내면에 여유가 없어서죠. 그래서 영혼의 의사들에게는 말과 말투, 말의 톤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과 함께 세트로 드러나는 손짓, 몸짓 하나도 아픈 영혼을 대하는 의사로서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6. 때로는 말과 글에서, 행동과 태도로 교묘하게 감춘 듯해요.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성령님께서 직면하게 하시는 시간이 꼭 옵니다. 그래서 평소 나를 돌아보는 삶을 부단히 살아내야 합니다. 처음 책 <성령님의 임재를 연습하라>에서 일부 나눴습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제게 목회자로서 주의하라시며 여러 번 당부의 감동을 주셨었습니다. 7. “사랑하는 태성아. 너는 길을 걸을 때 뒷짐 지고 다니지 말아라. 그리고 의자에 앉을 때 다리 꼬고 앉지 말거라. 나는 나의 종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가 않구나. 너는 사람들 앞에서 짝다리 짚고 있지 말거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 다니지 말거라. 나는 나의 종이 버릇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단다. 너는 항상 몸가짐을 단정히 하거라. 나는 너를 보는 사람들이 네가 예의바른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너는 항상 몸가짐을 깨끗하게 하여라. 몸을 청결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너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네가 게으름으로 인하여 나의 성전인 너의 몸이 지저분하거나 더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8. 물론 이런 내용은 율법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또한 다리가 아프거나 허리가 아픈 분들은 짝다리, 뒷짐 질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게는 목사로서 모범이 되기 원하시는 사랑의 권면이십니다. 감사하게도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존중해드리고,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성령님을 사랑하게 되니 그렇게 살고 싶어집니다. 지금도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요. 다만 감동으로 주신 말씀들에 순종하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9. 험한 세상 가운데 내게 맡겨주기 원하시는 영혼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마음 중심도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십자가 사랑으로 따뜻하고, 말과 태도, 자세라는 그릇도 따뜻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진리의 칼이 따뜻함을 품으면 생명의 검이 됩니다. 진리의 칼이 차가우면 죽이는 칼이 됩니다. 망나니 춤추는 칼 됩니다. 은별이 검사하러 온 날, 제가 검사받은 느낌적인 느낌입니다. 영혼의 의사로서 진리의 칼을 잘 갈고 닦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 크신 예수님 십자가 사랑의 따뜻함이라는 칼집을 잊지 말고 들고 다녀야겠습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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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 비율 반등…'불신'보다 무서운 '무관심'의 벽
-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지속적인 탈종교화 흐름 속에서 마침내 반전의 신호가 감지됐다. 한국갤럽이 최근 공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2년과 2024년에 역대 최저치(37%)까지 떨어졌던 우리나라 종교 인구 비율이 2025년 40%를 회복하며 3년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 특히 기독교인 비율은 2024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서 2025년 18%를 기록, 불교(16%)와 가톨릭(6%)을 제치고 3대 종교 중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이번 조사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7,647명을 대상으로 2025년 3월부터 11월까지 한국갤럽이 면접조사 방식으로 수행한 것으로,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는 ±1.1%p다. 2004년 이후 첫 반등…탈종교화의 '가파른 기세' 일단 저지 한국 사회의 종교 인구는 1983년 44%에서 출발해 2004년 54%로 정점을 찍은 뒤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2013년 50%였던 비율은 10년 사이에 37%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2025년 조사에서는 전년 대비 3%포인트 상승한 40%를 기록하며 장기 하락세에 제동이 걸렸다. 무종교 인구는 여전히 60%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2020년 이후 60%대 초반에서 정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탈종교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별로는 10년 전(2015년)과 비교해 남성 종교인 비율이 41%에서 31%로 10%포인트 하락한 반면, 여성은 55%에서 49%로 6%포인트 떨어져 남성의 감소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전 연령대에서 8~12%포인트 하락했으며, 60세 이상만이 52%로 절반을 지켜낸 것으로 확인됐다. 청년층에서도 기독교 독보적 우위 이번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지점은 청년층에서의 기독교 우위다. 40대 이하 연령층에서 기독교는 불교와 가톨릭을 크게 앞서고 있다. 19~29세 응답자 중 기독교인 비율은 14%로, 불교(4%)와 가톨릭(6%)을 훨씬 웃돈다. 30대에서도 기독교 16%에 비해 불교 6%, 가톨릭 7%로 격차가 뚜렷하다. 이는 기성세대에서 불교 세력이 강한 것과 달리, 젊은 세대로 갈수록 기독교가 종교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60세 이상에서는 불교(27%)가 기독교(18%)를 크게 앞서 세대 간 종교 지형의 뚜렷한 대비를 보여줬다. 성별로는 여성 기독교인 비율이 23%로 남성(13%)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신앙 실천 면에서도 기독교인의 경건 생활은 타 종교를 압도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성경(경전)을 읽는다'는 응답에서 기독교인은 61%로 종교인 전체 평균(38%)을 크게 웃돌았다. 이는 가톨릭(45%)보다 16%포인트, 불교(6%)와 비교하면 무려 10배 이상 높은 수치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기도한다'는 항목에서도 기독교인(43%)이 가톨릭(39%), 종교인 전체 평균(29%), 불교(7%)를 모두 앞섰다. 진짜 위기는 '이탈'이 아니라 '무경험'과 '무관심' 그러나 반등의 소식이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 무종교인의 종교 인식을 들여다보면 더욱 근본적인 과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과거에 종교를 믿은 적이 있다'는 무종교인의 비율이 2025년 2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 무종교인 중 78%가 평생 어떤 종교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순수 무종교인'이라는 뜻이다. 탈종교화가 단순한 신앙 이탈을 넘어 '종교 무경험'이 사회에 고착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다. 과거 신앙 경험이 있는 무종교인 중에서는 기독교 출신이 51%로 가장 많았고, 불교(34%), 가톨릭(15%) 순이었다. 이는 타 종교에 비해 기독교에서 무종교로 이탈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무종교인의 종교 호감도다. 무종교인 3명 중 2명(67%)은 '호감 가는 종교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2004년 33%, 2014년 46%, 2021년 61%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것으로, 종교 전반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이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는 '관심이 없어서'가 52%로 가장 높았고,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어서'(20%),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13%)이 뒤를 이었다. 과거의 탈종교화가 종교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적극적 '이탈'이었다면, 이제는 종교를 삶의 선택지에서 아예 지워버린 '심리적 단절'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무관심의 벽'을 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새 과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게 제언했다. 첫째, 반등의 신호를 발판 삼아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교회를 찾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착시키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단순한 수적 증가를 목표로 하는 전도를 넘어, 새가족 정착과 양육 시스템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무관심의 벽'을 넘기 위해 종교적 권위를 내려놓고 '일상의 접점'을 회복해야 한다. 공격적인 전도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 교회는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는 공간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짐을 덜어주는 안식처이자 의미 있는 관계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매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한편 초자연적 세계관에 관한 조사에서는 우리 국민의 57%가 '기적이 존재한다'고 응답해, 종교인 비율(40%)을 훨씬 웃도는 수치를 나타냈다. 이는 무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초월적 차원에 대한 내면의 갈망이 여전히 존재함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한국 교회가 복음 전도의 접점을 찾는 데 있어 새로운 가능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반등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한국 교회 앞에 놓인 과제는 분명하다. 문을 여는 것, 그리고 찾아오는 이를 진심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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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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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AI 이미지 인권을 말하는 자,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인권이라는 단어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남용되는 언어도 드물다. 누구나 인권을 말하고, 누구나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말해진 인권이 진정한 인권인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는 하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싸고 쏟아낸 발언들은 그 시험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히틀러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넘어, 그의 인권 사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의 대담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침묵에 있다. 같은 입으로, 같은 열정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말한 적이 있는가. 탈북민의 피눈물 나는 증언 앞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수용을 향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택적 인권은 공산주의 인권관의 오랜 문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인권은 본래적 의미의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투쟁의 도구다. 인권은 억압받는 계급, 즉 혁명의 편에 선 세력을 위한 것이며, 계급적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게는 인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인권의 선택적 적용은 모순이 아니라 원칙이다. 오늘날 이른바 진보 진영이 구사하는 인권 담론의 문법은 이 전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 — 2023년 10월 7일, 1,200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240여 명이 납치된 사건 — 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침묵한다. 북한이 자국민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두는 구조적 폭력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위권 행사에는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진영 논리로 포장된 정치적 무기다. 진정한 인권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억압자가 누구이든, 피해자가 어느 진영에 속하든,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비유는 역사적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이재명 대표의 히틀러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과잉이 아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절멸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엄정하게 정의한 이 사건을 하마스 테러 조직의 공격에 맞서 자국을 방어하는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이 논법은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실존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다.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첫날부터 주변 아랍 국가들의 총공세를 받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존적 전쟁 상태가 76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는 그 헌장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를 명시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한 국제법 해석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적 판결이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평행한 운명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948년, 같은 해에 두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모두 건국 즉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외세와 내부 위협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야 했으며, 국제 사회의 냉담 속에서도 홀로 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지고, 국가 생존을 위한 결의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피로 지켜낸 실재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휴전선 너머 핵무기를 개발하며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국내 정치 담론은 그 실존적 위협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한민국의 자위권과 동맹 연대를 부정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흔드는 논리는 곧 대한민국을 흔드는 논리다. 기독교 인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보편적 존엄 이 논의를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우려면 기독교 인권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인권의 근거를 사회 계약이나 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7절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 신학적 선언이 인권의 절대적 보편성의 근거다. 인간의 존엄은 국적도, 민족도, 계급도, 정치적 진영도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를 더욱 구체화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묻는 자에게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답을 주셨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자 앞에서는 진영과 민족을 초월한 응답이 요청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기독교 인권 사상의 핵심이다. 고통은 편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 앞에서는 이념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이 기준으로 이재명의 인권관을 평가하면 판단은 명료해진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은 아파하면서 북한 주민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 하마스의 테러 피해자에게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성토하는 것 — 이것은 Imago Dei에 근거한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진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우상숭배적 인권관이다. 교회의 침묵은 공모다 "정교분리(政敎分離)." 한국 교회가 공적 사안 앞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방패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이다. 교회가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앞에서도 진실을 말했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전체에 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행위를 면전에서 책망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성경적 선지자 전통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것도 이 전통이다.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이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집단학살의 언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Imago Dei의 신학으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인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묵시적 동의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귀하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가자지구의 민간인도, 이스라엘의 납치 피해자도, 북한 수용소의 정치범도,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힌 탈북민도. 그 어떤 생명도 진영의 논리에 따라 가치의 경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인권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편의 고통에도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 — 그것이 Imago Dei에 기초한 기독교 인권 사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 존엄의 이상이다. 이재명의 인권관을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 땅의 공적 담론 속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 일에 교회가, 신앙인이,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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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강단을 물든 아첨
이재명 대통령과 소강석 목사가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청와대 사진단 제공)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기념일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역사적 사건 위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서 있다. 그러므로 부활절 예배는 오직 한 분 ‑ 부활하신 주님 ‑ 만이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예배에 참석했고, 소강석CBS 재단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은 환영사에서 대통령을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 기독교 최고의 절기에 정치 지도자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역사적 좌표를 되묻게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강단에서 울려 퍼진'용비어천가' 소강석 목사는 환영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누구보다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이재명 대통령은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든 자들을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어 '우리 대통령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한반도에 평화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예배당 강단에서, 부활절 예배 환영사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회중을 섬기는 직분이다. 강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이지, 정치 지도자를 위한 헌사(獻辭)의 무대가 아니다. 소강석 목사가 쏟아낸 언어들은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 목적은 하나님을 높여 청중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구린내 나는 인간을 드높이는 것은 강단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설교다." —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이것이 단지 한 목사의 개인적 실수라면 논란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다. 소강석 목사는CBS 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주요 대중적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가 부활절이라는 공적 예배 자리에서 국가 지도자를 향해 이런 찬사를 바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그 지도자를 신앙적으로 인증하는 것처럼 비쳐질 위험이 있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것을 경계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린도전서3:21)고 엄중히 경고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이 닷새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를 외쳤던 것처럼, 정치적 환호와 신앙적 찬사는 본질상 다르다. 강단에서 이 둘이 뒤섞일 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다.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사하는 이재명 정교분리를 말하던 입으로 예배당에 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이 이 자리에 선 배경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불과 수 개월 전,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정교분리 원칙이 깨지는 이러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며 종교단체에 대한 법적 제재까지 거론했다. 그런 사람이 4월 5일 부활절 예배에 직접 참석하여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사도신경을 따라 읊으며, 헌금까지 드렸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교분리를 강조하던 그가 스스로 교회의 정치화를 주도한 것은 아닌가. 교회를 향해서는 정치에서 손 떼라 하면서, 자신은 교회라는 공간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정교분리의 본래 취지는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뒤집어 국가가 종교를 단속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헌법 정신의 왜곡이다. 지난1월 기자회견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사람이, 그것도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또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종교를 향해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들어와 축사를 하고 박수를 받는 것—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성이다. 교회해산법을 추진하며 교회당에 들어선 아이러니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층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집권 이후, 민주당 주도로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었다. 발의자 11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 법안은 종교법인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거나 선거에 개입한 경우 주무관청이 직접 설립허가를 취소하고, 해산된 법인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장 없는 종교법인 사무소 출입·검사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해 기독교계는 '교회폐쇄법'이라 명명하며 격렬히 반발했다. 4월 1일에는 7,000여 명의 개신교인이 국회 본관 앞에 집결해 “종교법인 강제해산 종교의자유 입틀막법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 이재명 대통령은 부활절 예배에 나타났다. 한 손으로는 교회해산법을 밀어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부활절 예배에서 헌금을 드린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아니면 정교한 정치 연출인가. 법무법인 전문가들은 이 법안에 대해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해 공익을 해칠 경우 법인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법학회도 “민법 개정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민법 개정이 아닌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대통령의 부활절 예배 참석이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압박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최대 절기의 예배에 등장하는 것 —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향한 정치적 회유이자, 기독교계의 조직적 반발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예배는 권력의 무대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자들이 있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열왕기상12:28)고 선포했다. 그의 동기는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었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죄가 되게 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정치 지도자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대로 전락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를 저버린 백성의 형식적 예배를 향해 “내가 너희의 다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의 분향을 싫어하노라”(이사야1:11,13)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신다. 부활절 예배에서 정치인이 “아멘”을 외치고 헌금을 드리는 모습이 미디어를 가득 채울 때, 그리고 그 예배의 사회자가 대통령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으로 선포할 때, 그 예배당 안에 계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 군중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배와 권련 앞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아첨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맹목적인 반정부 구호의 집결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길은 예언자적 비판과 복음적 초월성에 있다. 세례 요한은 왕의 잘못을 그 앞에서 직언하다 목이 잘렸다(마가복음6:18). 그는 헤롯 왕의 예배당에 초청받아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라고 환영사를 올리지 않았다. 개혁자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권력에 맞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 독일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교회가 국가에 굴종하는 것을'값싼 은혜'라 이름하며 저항했다. 한국교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향한 환호가 아니라 복음의 언어로 권력에게 말하는 용기다. 소강석 목사는 예배 강단에서 대통령을 높이는 대신, 부활절 예배의 의미를 선포했어야 한다. “권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13:4)이어야 하지만, 그 권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두려움 없이 선포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적 목회자의 직분이다. 부활절은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패배하는 날이다. 빌라도의 법정도, 로마의 군병도, 무덤 앞의 돌도 부활을 막지 못했다. 그 부활의 능력 앞에서 교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부활의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앞에서 주눅 드는 것도, 정치 권력에 아부하며 강단을 내주는 것도—모두 부활 신앙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태복음22:21). 이것이 정교분리의 복음적 원리이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거룩한 공간이 정치적 연출의 무대로 활용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엄중한 경계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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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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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정죄의 돌팔매를 멈추고, 회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라
AI이미지 그림 광장의 소음, 그 너머의 본질을 묻다 최근 한국 교계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듯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의 십수 년 전 과거 발언이 담긴 녹취가 공개되면서 시작된 이 파장은, 디지털 광장이라는 확성기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기독교 언론은 물론, 수많은 유튜브 채널과 SNS 공간은 연일 이 사건을 중계하듯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흐르는 정서입니다. 사실을 전달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상대의 인격 전체를 난도질하는 ‘감정적 해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자극적인 파편들은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정죄의 서사’가 되어 소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 가쁜 비난의 속도를 늦추고 복음의 본질을 직시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이 뜨거운 분노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향해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적 쾌락인가를 말입니다. ‘온유한 심령’이라는 이름의 거울 성경은 죄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언제나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돌이킴과 회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던진 권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준엄한 울림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 6:1)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심령’은 단순히 성격이 부드러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허물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나 또한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 또한 저 상황이었다면 넘어졌을지 모른다”는 처절한 자기 인식이 전제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바로잡을’ 자격을 얻습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는 정죄는 독이 든 칼날과 같아서, 상대를 죽일 뿐만 아니라 정죄하는 자의 영혼마저 황폐하게 만듭니다. 내려놓음,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무게 사건의 본질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입니다. 김문훈 목사는 12년 전의 부적절한 언행이 수면 위로 떠 오르자,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와 교단 신문을 통해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고, 상처 입은 이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개척하여 척박한 땅에서 일군 대형 교회의 담임직을 사임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지도자의 허물이 드러났을 때 이토록 신속하고 단호하게 책임을 지는 모습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대개는 공소시효를 논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며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역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근간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그가 선택한 사임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처절한 순종이었습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 무거운 결단을, 우리는 마땅히 복음적인 책임 의식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확인사살’이라는 이름의 잔인함을 경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교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사과했고, 책임을 졌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나간 이를 향해 다시 돌을 던지는 행위는 무엇을 위함입니까? 이는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확인사살’에 가깝습니다. 이미 엎드러진 자의 등 위에 다시 칼을 꽂는 행위는 십자가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징계한 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공동체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라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2:6-7) 바울은 ‘족하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책임을 물었으니 이제는 그의 영혼이 절망이라는 늪에 잠식되지 않도록 공동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한 지체가 병들었다고 해서 그 부위를 도려내 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피를 통하게 하고, 살려내어 다시 몸의 일부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십자가는 ‘대신 죽음’이지 ‘대신 죽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신 방식을 떠올려 봅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광기 어린 군중의 양심을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긍정하지 않으셨지만, 죄인만큼은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하나님이 직접 목숨을 내어놓으실 만큼 처절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형제를 향한 끝없는 정죄는, 사실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누군가의 처절한 대가 지불로 얻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는 머리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암덩어리도 아니며, 한몸에 일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령 손가락에 무좀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 손가락을 내 몸이 아니라고 잘라버리는 정신나간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먹고 아픈 부분에 약을 발라 치료를 할 것입니다.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지체로써 치료를 위한 방편으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 정죄의 문화에서 회복의 문화로 이번 사태는 김문훈 목사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 교회 전체의 성숙도를 묻는 시험대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소중한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첫째, 지도자의 책임 있는 결단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완악함입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명예와 기도할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의 지체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쉽지만, 함께 울며 회복을 돕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비판하는 공동체’에서 ‘싸매어 주는 공동체’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적 공론장의 형성입니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자극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의 가치관으로 사건을 해석하며 말의 무게를 지키는 성도들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덮는다’는 것은 죄를 은폐하거나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와 책임 지불이 이루어진 후, 그 죄를 더 이상 비난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합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덮개입니다. 정죄의 문화는 교회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차갑게 얼어붙게 만듭니다. 반면, 회복의 문화는 교회를 깊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김문훈 목사의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돌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수건을 들고 있는가?” 죄는 단호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이를 향해 격려와 회복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십자가를 통과한 교회의 진짜 얼굴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난의 광장에서 내려와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 목회자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정죄의 독기를 빼내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길을 선택한다면, 이 아픈 상처는 오히려 더 큰 성숙을 향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확인사살이 아니라 회복으로. 그 좁고 험한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웃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련기사 ● 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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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커크,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밀알이 될 것”
세계 자유 사랑 운동을 이끌던 찰리 커크(Charlie Kirk)가 9월 10일, 유타밸리대학교 강연 도중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졌다. 이 소식은 전 세계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다. 찰리 커크는 미국 건국 이념에 충실하며 자유를 수호한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국가적 비극으로 받아들여졌고, 국민들은 조기를 게양하며 애도에 동참했다. 그는 불과 18세의 나이에 ‘터닝 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를 창립하고, 청년과 대학생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신앙 회복 운동을 선도했다. 이러한 사역은 전제주의와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저항을 불러왔다. 자유와 거룩을 무시하고 인간을 짐승이나 단순한 도구로 여기는 세력은 인명을 경시할 뿐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고 심지어 반대자를 제거하기까지 한다. 이번 참혹한 사건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찰리 커크는 자유와 신앙의 가치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귀한 존재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역사의 교훈을 전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자유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진리이다. 대한민국의 자유 또한 피로 지켜졌다. 6.25 전쟁에서 자유를 지켜낸 미군 3만 6,500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지금도 약 2만 8,500명의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며 한미 혈맹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왔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가던 찰리 커크에 대한 공격은 단지 개인에 대한 테러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때 자유를 사랑하는 참된 크리스천은 미국과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명한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대한민국도 미국의 아픔을 함께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이 총탄에 쓰러져도 그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듯, 찰리 커크의 피 역시 결코 묻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해 셋을 세우셨듯,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이 바울을 회심시키는 씨앗이 되었듯, 찰리 커크의 죽음 또한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밀알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신앙인으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 세계 자유와 평화를 위한 씨앗이 되리라 믿는다. 자유대한민국과 미국의 건국 이념이 영원히 빛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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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정부업무보고 -외교안보 분야: 튼튼한 외교안보, 착실한 통일준비-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2016년 정부업무보고(외교안보분야)에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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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사칭 악성 이메일 합동수사…북 움직임 철저감시”
청와대는 15일 “최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대량 유포된 청와대 사칭 악성 이메일 사건은 현재 관계당국 합동으로 면밀히 수사 중에 있다”고 밝혔다. 정연국 대변인은 이날 ‘최근 국내외 안보·안전 관련 서면브리핑’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정 대변인은 “북한이 4차 핵실험 이후 전단 살포 및 무인기 침범 등 대남 자극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에 대해 철저하고도 면밀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 대변인은 “정부는 국민의 불안을 덜어드리기 위해 보유한 정보 자산을 통해 북한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고 높은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등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최근 터키와 자카르타에서 잇따라 발생한 민간인 대상 테러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갖고 주시하면서 해외여행 국민의 안전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국민 불안을 해소하고 국민이 편안해 할 수 있도록 테러방지법 등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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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협력업체 전부 주저앉을 판인데 원샷법 막혀”
박근혜 대통령은 21일 “지금 우리 학령인구도 자꾸 줄고 그래서 어차피 대학구조개혁은 안 할 도리가 없다”며 대학구조개혁법의 국회통과를 거듭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청년일자리 창출 및 맞춤형 복지’를 주제로 교육부와 고용노동부 등 4개 부처로부터 합동 업무보고를 받은 뒤 민간 전문가 및 일반인들과 가진 토론회에서 교육개혁을 강조하면서 이 같이 말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청년일자리 창출 및 맞춤형 복지’를 주제로 교육부와 고용노동부 등 4개 부처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어떤 데는 (인력 공급이)과잉이 되고, 어떤 데는 수요가 많은데 모자라는게 있어서 어차피 대학구조개혁은 안 할 도리가 없는데 이것을 쉽게 촉진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면 참 힘을 받을 텐데 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 교육이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중점을 둬야 되고 또 청년들이 취업과 창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며 “대학에서는 지속적인 구조개혁 추진과 더불어서 사회 맞춤형 학과 같은 것을 확대하고 산학 협력을 활성화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인력의 미스매치 문제를 해결 하는데 노력해야 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박 대통령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중인 ‘원샷법(기업활력제고특별법)’과 관련, “원샷법도 마찬가지 아닌가”라면서 “산업계에서 너무 과잉이 돼서 어차피 이렇게 되다보면 딸린 협력 업체까지 전부 주저앉을 판이다. 미리미리 구조개혁을 해서 다 같이 좀 경쟁력도 키우고 살자는 건데 원샷법도 막혀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런 딱한 사정이 우리나라에 있는데 계속 두들겨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국민 삶속에 뿌리 내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것”이라면서 “발로 뛰면서 현장에서 답을 찾고 열린 자세로 국민의 의견을 정책에 담아달라”고 당부했다.
다시 읽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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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가 곧 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영광스러운 신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인생의 근원적 갈망: 하나님 앞에 설 자격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심장이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놀라운 진리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사탄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태를 가리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었으며, 마치 교도소에 수감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었던 그 ‘의’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고, 이제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감격적인 속량의 드라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속의 신비: 죄가 되신 예수님과 의가 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반을 둡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절인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 안에는 우주적인 교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분이 실제로 ‘죄’ 자체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불의로 인해 그분은 실제로 불의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자신을 떠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육체를 떠난 후, 공의의 요구가 모두 만족될 때까지 고통의 장소에 머무르셨습니다. 인류를 위해 고통당하신 분은 다름 아닌 ‘신성(Deity)’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 인류의 처벌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공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다!”라고 선포하셨을 때, 비로소 예수님은 다시 의롭다 함을 얻으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은 이 사실을 못 박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분을 믿는 우리가 이제 합법적으로 의로워졌다는 영광스러운 영수증과 같습니다. 덮는 죄에서 씻는 의로: 속죄와 재창조의 능력 우리는 구약 시대의 ‘속죄’와 신약의 ‘의’를 구별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속죄(Atonement)’라는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담 이후 예수님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 인간의 죄를 잠시 덮어두셨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17장 11절이 말하는 피의 제사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죄가 잠시 가려질 뿐, 인간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결부되어 ‘속죄(덮음)’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덮는 수준을 넘어, 죄를 완전히 씻어내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너는 죄가 없다, 의롭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창조가 그랬듯이, 우리를 향한 그분이 선언은 곧 그 선언 그대로입니다. 둘째, 실제적인 재창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의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것이 확실한 만큼,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셨음도 확실합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즉시 일어나는 영적 실재입니다. 회복된 통치권과 담대한 교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왜 하나뿐인 아들을 죄로 만드시면서까지 우리를 의롭게 하셨을까요? 그 목적은 단 하나, 바로 ‘교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교제를 끊어버렸고, 인간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잃어버린 그 의와 교제의 특권,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돌려주길 원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회복한 우리에게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정죄함이 없는 평강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 마음에는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이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했으니,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담력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두려움 없이, 열등감 없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셋째,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의가 회복되는 순간, 잃어버린 통치권 역시 회복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인입니다! 이 의가 우리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법정은 움직이고 기적은 일어나게 합니다. 엘리야가 누렸던 그 기도의 능력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된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복음의 열쇠를 쥐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타락한 인간을 합법적으로 회복시켜 당신과 똑같이 의로운 존재로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에 어떤 이의나 의문도 품지 마십시오. "내가 과연 의로울까? 내가 이런 실수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이런 질문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완전한 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롬 1:17). 이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사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주님이라 고백하는 그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의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행위에 집착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하나님은 현재에 의로운 새로운 피조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오늘의 새로운 본성을 집중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삶, 그것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정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아버지가 주시는 화평을 누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한 실재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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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의와 하나님의 의: 죄의식의 종에서 의의 통치자로
양봉식 목사(길과생명연구소 소장) AI 이미지 그림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겪는가장 큰 내적 갈등은 "분명 구원받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를 때 더 마음이 편한가?"라는 의문입니다. 많은 성도가 "나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을 교만으로 여기고, "나는 비천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겸손이라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거듭난 당신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의'그 자체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사탄의 참소와 환경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 글을 통해 율법의 의를 넘어 하나님의 의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는 구체적인 훈련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율법의 의: 인간의 한계와 정죄의 법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Law)'는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행위와 노력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시도를 뜻합니다. 행위의 완전성 요구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율법은 99%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함을 요구하기에,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이 법으로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폭로하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판결문 : 하나님의 법은 거룩하지만, 죄인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아무리 선하게 살려 노력해도 결국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판결 아래 갇히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전환 율법이 우리의 무능함을 증명했다면, 복음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낸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선물합니다. ① 법정적 전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이것은 영적 교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 '죄 자체'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의를 넘겨받아 '의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과거가 아닌, 우리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 ② 생명의 기원: 조에(Zoe)의 소유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Zoe)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7)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순히 '죄가 없다'는 상태를 넘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인 '조에'를 소유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태어났기에, 그분의 본성인 의로움을 본질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③ 존재론적 재창조: 의로 지어진 새 사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새 사람은 행동이 고쳐진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창조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은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는 의로운 본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AI 이미지 그림 3. 의의 회복이 가져오는 5가지 권세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누리셨던 것과 동일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당당한 위치(Standing):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더 이상 정죄감에 눌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가 대화할 권리를 가집니다. 친밀한 교제(Fellowship):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의 두려움이 아닌 자녀의 친밀함으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환경을 다스리는 믿음: 예수님이 폭풍을 꾸짖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부르셨던 것처럼, 의의 의식을 가진 자는 환경 앞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명령하여 다스립니다. 사탄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사탄의 참소는 의의 방패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왕의 통치: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질병, 가난, 저주를 다스리는 왕의 신분을 가집니다. 4. 실전 훈련 가이드: '의의 의식'을 세우는 4단계 의로운 신분을 가졌더라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죄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의 구체적인 훈련을 통해 당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십시오. 1단계: 매일 아침 '신분 선포' (Affirmation) 눈을 뜨자마자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선포하십시오. 이것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진리의 선포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합법적인 권리가 있다!" "나는 오늘 죄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의의 본성으로 행한다!“ 2단계: '죄의식'의 언어 삭제하기 자신의 언어 습관에서 '영적 열등감'이 담긴 표현을 지워버리십시오. 수정 전 : "하나님, 이 비천한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수정 후 : "아버지, 저를 의롭게 하시고 아들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나의 공급자이시며 나의 승리이십니다!“ 주의 :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백하되, 그 죄가 당신의 '의인'이라는 신분을 파괴할 수 없음을 믿고 즉시 의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3단계: 말씀 묵상과 동화 (Identification) 다음 세 구절을 매일 3번씩 소리 내어 읽고, 그것이 당신의 현재 모습임을 받아들이십시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음을 묵상) 로마서 8:1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요한일서 4:17 :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4단계: 즉각적인 대적 훈련 정죄감이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십시오. 상황:과거의 실수나 죄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질 때. 대응 : "사탄아, 너는 거짓말쟁이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그 안에서 이미 의로워졌다. 나는 이 정죄감을 거절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 지배자로 사십시오 의(Righteousness)는 단순히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의 교제를 나누고, 사탄과 질병과 환경을 발아래 두는 지배자의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보며 "내 의로운 아들아,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그 음성에 화답하십시오. 당신의 의의 의식이 견고해질 때, 당신의 삶에는 기적과 승리가 일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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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죽음
양봉식 목사(길과생명 연구소 소장)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6: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생명으로 가는 길에 놓인 역설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깊은 역설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복된 소식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얻는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복된 소식에는 언제나 함께 따라오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은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죽음이 결국 육신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인류에게 들어온 죽음은 바로 이 영적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건이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는 이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로마서 5:19) 비록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으로는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영적인 존재로 살지 못하고, 육신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으며, 그 삶의 열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절망과 어둠, 비참함과 슬픔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말합니다. 죽음이 유익하다고 말입니다. 물론 아무 죽음이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죽음의 비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살려고 애쓰는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구약의 모형이 실체로 드러난 삶이었습니다.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삶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의 삶,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왕 노릇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삶은 통치와 다스림의 삶이었고, 동시에 섬김과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부요할 수 있고, 왕이면서도 종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단절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하십니다. 그분 안에 충만하셨던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는 경험을 하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가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연합해 계셨던 독생자께서, 죄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처절한 기도였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버림받으셨고, 참으로 죄가 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셨을 때는 우리와 같지 않으셨지만, 십자가에서는 우리와 완전히 같아지셨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종말 죄 없는 분이 죄가 되어 죽으셨을 때, 그분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로마서 6:6–7) 예수님이 죄인으로 우리와 동일시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여 동일시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종말이며,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완전한 해방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결정적 분기점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이 주는 모든 생명을 폐합니다. 자랑도, 채무도, 얽매임도 함께 끝납니다. 우리는 악한 것뿐 아니라, 선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분별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이제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해방이며 자유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성, 그리고 믿음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현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지” 하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은 완료된 사실입니다. 죽음 안에 있는 생명 예수님과 연합한 온전한 죽음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사실 때, 이전의 나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이 펼쳐집니다. 연합된 죽음은 삶의 자리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내가 애써서 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자아를 꺾으려 할 때는 언제나 억울함과 자기 의가 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생명으로 충만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삶의 십자가 자리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십시오. 그곳에서 죽고,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관련기사 :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 부르는가? 관련기사 :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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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양봉식 목사(길과 생명연구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담의 자손들을 다시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을 실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 전에,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그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을 때, 성령님으로 잉태하셨으며,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얻게 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들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죽음이며, 그 죽음을 통해 비로소 인류 가운데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6)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이 생명은 오직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믿는 자는 땅에서 태어난 육신의 출생과 다른 하늘에서 오는 새로운 출생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태어나신 것처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늘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며, 그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 자라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소식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사함이 아닌 하니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것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마귀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어둠에서 빛의 존재가 된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복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 제칩니다. 현실에 있으면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낯설면서도 가장 친밀한 삶,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 경이로운 세계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실상의 세계, 즉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셰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 경이로운 세계와 보이는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입니다. 이 생명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태초부터 예정하신 계획이 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삶에 의미가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다가올 미래의 일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생명을 간절히 원하고 믿는다고 예수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주셨음을 고백하는 자는 누리기 시작합니다. 삶의 유일한 기적은 바로 이 생명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똑같은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아무런 대가 없이 오직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조에, ζωὴ)은 단순히 “죽지 않는 생명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인간 안에 들어와 작동하는 실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이미 이 생명을 받았습니다(요 5:24).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이 말씀은 왜 이미 받은 생명이 더 풍성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생명이 실제 삶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를 묻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1. 왜 하나님의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충만’이어야 하는가 첫 번째, 생명은 씨앗이 아니라 ‘통치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은 씨앗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러나 씨앗은 심어졌다고 자동으로 숲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은 “새로운 피조물”의 신분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10은 그 신분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상태로 확장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즉, 조에는 단순한 ‘출생 사건’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는 생명 질서’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왜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하지 않으면 ‘구원받은 옛 사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은 받았지만, 사고방식은 여전히 육신 중심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육신이 중심이 되면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따르지 않게 되면 삶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두려움과 분노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리고 삶의 결정은 세상 논리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는 생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이 통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골 2:6) 받은 생명으로 ‘행하지 않으면’, 생명은 잠재력에 머물 뿐입니다. 2.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질 때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일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생명은 ‘죄를 참는 힘’이 아니라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작동합니다 로마서 8장은 조에의 작동 방식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롬 8: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 원리입니다. 죄를 참는 윤리가 아니라 죄를 넘어서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그리스도인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게 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생명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씀의 지배가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가득할 때, 그 말씀은 생명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생명은 정체성을 ‘증명’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부족할수록 사람은 인정받으려 애쓰고, 자기 의를 세우고 비교와 경쟁 속에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지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아들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드러날 뿐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존재는 변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하고 착하게 살아도 죄인이자 마귀 자녀입니다. 노력해도 그 정체성은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천상에서 빛나는 존재입니다. 흰 옷을 입은 의롭고 거룩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찮아 보이고, 성공하지 못하고, 잘 못살아도 영의 세계에서는 빛나는 존재입니다. 숨어있어도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냥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마귀도 알고 천사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즉 아들이면 이렇게 해 봐 라고 미혹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짜 아들이다”라고 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보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뭐래도 유일하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처럼 생각하고 아들처럼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인을 ‘애써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을 흘려보내는 존재’로 만듭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생명은 고난의 의미를 바꿉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세력이 약해지면 고난은 항상 질문이 됩니다. “왜 나에게?” “왜 하나님이 허락하셨지?” 그러나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고난은 차단막이 아니라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의 생명은 고난을 제거하기보다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게 합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은 교회를 ‘조직’이 아니라 ‘몸’으로 작동하게 합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조직 논리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풍성해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몸의 조직인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유연하게 서로를 위해 헌신합니다. “온 몸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 조에는 교회를 규칙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이 흐르며 자라는 몸으로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새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계속 변화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게 되어 있고 변화하는 것만이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또한 이 초점에 맞추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율법적인 완전함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 생명의 욕구를 제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함은 '생명의 성장'입니다. 매일매일 생명의 영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새사람의 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때 생명의 언약을 주십니다. 그 뜻이 주어지는 것은 10년, 20년, 후은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씨는 아무리 작아도 생명이기에 반드시 자라고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비밀에 속한 영역은 알 수 없기에. 그 언약이 실현되는 동안 매일 깨어나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뜻은 단순히 일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기경하고 영적 실상을 바라보는 눈이 깨어나야 합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미와 아직) 어둠의 진영은 끊임없이 이 단순한 믿음을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실현되는 것을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히셨을 때 드디어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승리를 믿고 나갈 때 우리의 옛사람, 자아가 깨지면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점점 알게 됩니다.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중요한 일이 함께 따라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옛사람의 영역을 다루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고 하나님께 생명을 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옛사람으로 살아오며 무의식적으로 고집했던 지-정-의의 삶의 방식들까지 모두 정복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믿음은 '이미(already)' 이루어졌지만 '아직(not yet)' 이루어지지 않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망의 옛 영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영역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짧은 기도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또 하나의 산고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길은 목자되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가야 하는 길입니다. 3. 결국, 왜 하나님의 생명은 풍성해야 하는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존재의 신분이 아니라 삶의 통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풍성하지 않으면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육신의 방식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죄, 두려움, 죽음, 고난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풍성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 증거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으셨고, 그 생명이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7)
이슈와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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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비율 반등…'불신'보다 무서운 '무관심'의 벽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지속적인 탈종교화 흐름 속에서 마침내 반전의 신호가 감지됐다. 한국갤럽이 최근 공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2년과 2024년에 역대 최저치(37%)까지 떨어졌던 우리나라 종교 인구 비율이 2025년 40%를 회복하며 3년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 특히 기독교인 비율은 2024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서 2025년 18%를 기록, 불교(16%)와 가톨릭(6%)을 제치고 3대 종교 중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이번 조사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7,647명을 대상으로 2025년 3월부터 11월까지 한국갤럽이 면접조사 방식으로 수행한 것으로,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는 ±1.1%p다. 2004년 이후 첫 반등…탈종교화의 '가파른 기세' 일단 저지 한국 사회의 종교 인구는 1983년 44%에서 출발해 2004년 54%로 정점을 찍은 뒤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2013년 50%였던 비율은 10년 사이에 37%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2025년 조사에서는 전년 대비 3%포인트 상승한 40%를 기록하며 장기 하락세에 제동이 걸렸다. 무종교 인구는 여전히 60%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2020년 이후 60%대 초반에서 정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탈종교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별로는 10년 전(2015년)과 비교해 남성 종교인 비율이 41%에서 31%로 10%포인트 하락한 반면, 여성은 55%에서 49%로 6%포인트 떨어져 남성의 감소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전 연령대에서 8~12%포인트 하락했으며, 60세 이상만이 52%로 절반을 지켜낸 것으로 확인됐다. 청년층에서도 기독교 독보적 우위 이번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지점은 청년층에서의 기독교 우위다. 40대 이하 연령층에서 기독교는 불교와 가톨릭을 크게 앞서고 있다. 19~29세 응답자 중 기독교인 비율은 14%로, 불교(4%)와 가톨릭(6%)을 훨씬 웃돈다. 30대에서도 기독교 16%에 비해 불교 6%, 가톨릭 7%로 격차가 뚜렷하다. 이는 기성세대에서 불교 세력이 강한 것과 달리, 젊은 세대로 갈수록 기독교가 종교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60세 이상에서는 불교(27%)가 기독교(18%)를 크게 앞서 세대 간 종교 지형의 뚜렷한 대비를 보여줬다. 성별로는 여성 기독교인 비율이 23%로 남성(13%)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신앙 실천 면에서도 기독교인의 경건 생활은 타 종교를 압도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성경(경전)을 읽는다'는 응답에서 기독교인은 61%로 종교인 전체 평균(38%)을 크게 웃돌았다. 이는 가톨릭(45%)보다 16%포인트, 불교(6%)와 비교하면 무려 10배 이상 높은 수치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기도한다'는 항목에서도 기독교인(43%)이 가톨릭(39%), 종교인 전체 평균(29%), 불교(7%)를 모두 앞섰다. 진짜 위기는 '이탈'이 아니라 '무경험'과 '무관심' 그러나 반등의 소식이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 무종교인의 종교 인식을 들여다보면 더욱 근본적인 과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과거에 종교를 믿은 적이 있다'는 무종교인의 비율이 2025년 2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 무종교인 중 78%가 평생 어떤 종교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순수 무종교인'이라는 뜻이다. 탈종교화가 단순한 신앙 이탈을 넘어 '종교 무경험'이 사회에 고착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다. 과거 신앙 경험이 있는 무종교인 중에서는 기독교 출신이 51%로 가장 많았고, 불교(34%), 가톨릭(15%) 순이었다. 이는 타 종교에 비해 기독교에서 무종교로 이탈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무종교인의 종교 호감도다. 무종교인 3명 중 2명(67%)은 '호감 가는 종교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2004년 33%, 2014년 46%, 2021년 61%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것으로, 종교 전반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이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는 '관심이 없어서'가 52%로 가장 높았고,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어서'(20%),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13%)이 뒤를 이었다. 과거의 탈종교화가 종교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적극적 '이탈'이었다면, 이제는 종교를 삶의 선택지에서 아예 지워버린 '심리적 단절'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무관심의 벽'을 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새 과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게 제언했다. 첫째, 반등의 신호를 발판 삼아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교회를 찾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착시키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단순한 수적 증가를 목표로 하는 전도를 넘어, 새가족 정착과 양육 시스템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무관심의 벽'을 넘기 위해 종교적 권위를 내려놓고 '일상의 접점'을 회복해야 한다. 공격적인 전도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 교회는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는 공간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짐을 덜어주는 안식처이자 의미 있는 관계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매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한편 초자연적 세계관에 관한 조사에서는 우리 국민의 57%가 '기적이 존재한다'고 응답해, 종교인 비율(40%)을 훨씬 웃도는 수치를 나타냈다. 이는 무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초월적 차원에 대한 내면의 갈망이 여전히 존재함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한국 교회가 복음 전도의 접점을 찾는 데 있어 새로운 가능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반등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한국 교회 앞에 놓인 과제는 분명하다. 문을 여는 것, 그리고 찾아오는 이를 진심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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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차이나(Pax Sinica)의 야망과 문명의 균열
미국은 팍스 차이나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AI 이미지 역사에서 강대국은 2인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미국을 제치려는 야망은 ‘일대일로’ 전략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夢’이 세계를 제패할 것인가? 미국은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와 이란의 전쟁을 통해 중국에게 경고장을 날렸다. 2인자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팍스 아메리카를 유지하려는 전략만은 아닐 것으로 보이다. 본지는 중동(이란 루트와 '저항의 축' 지원 배후), 아프리카(채무의 덫과 인프라 식민지 — 아이러니하게도 K-방산의 진출로가 된 역설), 유럽(일대일로 경제 침투 + 이슬람 인구학적 팽창 + 문화막시즘의 3중 포위 — 문 닫은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팔리는 유럽의 현실 The Korea Daily), 동남아(인도네시아 채무 함정 실례), 남미(베네수엘라·멕시코). 그리고 트럼프 반격의 효과와 한계, 기독교 문명의 내부 붕괴 문제를 담는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 주> 서론: 세계를 재편하는 조용한 전쟁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밝힌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은 단순한 인프라 투자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21세기 팍스 차이나(Pax Sinica), 즉 중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100년 대전략의 출발 신호였다. 아프리카의 항구, 중동의 석유 루트, 유럽의 수도 한복판, 동남아의 철도, 남미의 광산까지 — 중국의 붉은 자본은 이미 지구의 혈관을 장악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 전략의 더 깊은 차원에는 경제적 침투를 넘어선 문명의 교체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전체주의 통치 모델이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 그리고 기독교 문명이 세속주의·이슬람·문화마르크시즘의 연합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이 대전략의 핵심 시나리오다. 아산정책연구원의 2026년 이슈브리프는 "강대국 일방주의와 예외주의가 횡행하며, 기존 국제질서를 규정짓던 정치·경제적 레짐들이 약화됐다"고 진단한다. 세계는 지금 무질서 속의 체제 전환기에 서 있다. "일대일로는 인프라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중화 세계질서 재건을 위한 100년 전략이다" Ⅰ. 일대일로의 전 지구적 판도: 5개 전선의 실체 1) 제1전선— 중동: 이란과 저항의 축 일대일로의 지정학적 핵심은 이란이다. 이란은 아시아와 유럽, 남반구와 북반구를 연결하는 최대 규모의 국제 수송 회랑이자, 중국의 에너지 안보를 떠받치는 전략 거점이다. 중국은 이란과2021년25년 포괄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석유·가스 개발에서 인프라, 군사 협력까지 전방위 연대를 구축했다. 이란이 하마스·헤즈볼라 등 이른바 「저항의 축」을 지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중·이란 경제 동맹이 자리한다. 그러나 2026년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군사 공격으로 이 구도에 균열이 생겼다. 러시아 분석매체 <프라우다>의 보도에 따르면 "이란 정부가 무너진다면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란을 잃으면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 지배의 핵심 고리를 잃는 셈이다. 현재 중동 지역은 미국-이스라엘-사우디 안보구조가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어 무질서에서 벗어나고 있으나, 불안정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2) 제2전선— 아프리카: 채무의 덫과 인프라 식민지 아프리카는 중국 일대일로의 최대 수혜지이자 최대 피해지다. 중국은 수백억 달러를 투입해 아프리카 주요국에 고속철도, 대형 항구,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케냐는 수도 나이로비와 항구도시 몸바사를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 90%를 중국에서 조달했으나, 현재 케냐의 총 공공부채는 GDP의 67%인 757억 달러까지 불어났고 중국은 세계은행에 이어 케냐 최대 채권국이 됐다. 앙골라의 대중국 채무는 190억 달러에 달한다. 이집트는 중국 자본으로 서울보다 큰 신행정수도(700㎢)를 건설 중인데, 중국의 세계 최대 국방부 청사를 본뜬 이집트 국방부 청사,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 등이 여기 포함된다.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이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2년 아프리카 15개국 여론조사에서 영향력 및 긍정 평가 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에서의 소프트파워 전쟁도 중국이 앞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도 존재한다. 중국이 수십조 원을 들여 닦아놓은 아프리카의 도로와 항구가 이제 한국의 K2 흑표 전차가 달리는 무대가 되고 있다. 모로코 정부가 K2 전차 400대 도입을 검토하는 배경에는, 중국이 깔아놓은 고하중 인프라가 한국 중무기 체계의 진출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얄궂은 나비효과가 있다. 지정학은 때로 아이러니로 말한다. 중국의 ‘夢’과 미국과의 패권 경쟁은 단순한 1위 싸움이기 보다 자유민주국가의 붕괴와 맞물려있다. AI이지미 제작 3) 제3전선 — 유럽: 두 갈래 침투, 일대일로와 이슬람 유럽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포위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적 침투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의 인구학적 팽창이다. 이탈리아는 2019년 G7 국가 중 유일하게 일대일로에 서명했다(2023년 탈퇴). 중국은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상업 부동산을 잠식했고, 독일의 핵심 제조업체들을 인수했다. 2016년 산업용 로봇 분야 세계 최강 쿠카(KUKA)가 중국 자본에 넘어간 것이 그 상징적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독일은 첨단기술 기업에 대한 외국 자본 인수 심사를 강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위협은 문화의 내부 붕괴다. 유럽에서는 이민과 다문화주의가 기독교 문명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프랑스 전체 인구의 10% 내외가 무슬림이다. 영국에서는 해마다 220개의 교회가 폐쇄되는 반면 110개만 새로 세워지고, 문을 닫은 교회의 상당수가 이슬람 사원으로 팔리고 있다. 독일은 지난 10년간 515개의 가톨릭교회가 공식 폐쇄됐고, 네덜란드에서는 향후 4년 내 700곳 이상의 개신교회가 사라질 전망이다. 카메룬 맘페 교구의 앤드류 은키 대주교는 "유럽의 교회가 잠들었기 때문에 유럽이 이슬람화되고 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복음과 멀어진 곳에 이슬람이 기회를 노리고 들어왔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2025 국가안보전략(NSS)조차 "유럽은 이민과 다문화주의로 붕괴되고 있는 문명적 쇠퇴지역"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교회가 잠들면 이슬람이 들어온다. 유럽이 그 생생한 증거다" — 아프리카 대주교의 경고 4) 제4전선 — 동남아: 채무의 덫과 반중 감정의 확산 동남아시아는 중국 일대일로의 '쇼윈도'이자 균열의 진원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는 동남아 최초의 고속철도로 홍보됐지만, 실제 이용객은 예상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속철도 연간 매출이 약1,500억 원인데 중국에 갚아야 할 이자만 매년 1,700억 원에 달해, 2026년 2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결국 국가 예산을 투입해 중국 개발은행 대출금을 갚기로 결정했다. 당초 "국민 세금 없이 민간 자본(B2B)으로만 하겠다"던 약속은 산산조각이 났다. 내부에서 "중국의 채무의 덫에 제대로 걸렸다"는 비판이 거세다. 필리핀은 두테르테 정부 시절 중국과 대규모 일대일로 협력을 맺었지만, 남중국해 분쟁이 격화되면서 친미 노선으로 선회했고, 일대일로 사업들을 재검토하고 있다. 미얀마는 쿠데타 이후 고립 속에서 중국 의존도가 더욱 심화됐다. 라오스는 중국-라오스 철도 완공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GDP가 21% 증가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국가 부채가 GDP의 100%를 돌파하며 사실상 중국의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된다. 5) 제5전선 — 남미: 베네수엘라와 자원 패권 남미에서 중국의 전략적 베이스캠프는 베네수엘라였다. 마두로 정권에 수십억 달러를 대출해 주고, 원유로 상환받는 구조로 중국은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을 사실상 지배했다. 멕시코에서는 중국 자본이 상권과 건물을 잠식하고, 친중 성향의 정부와 결탁해 현지 소상공인을 고사시키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의 광산 자원 역시 중국 국유기업들의 주요 투자 대상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적극 개입이 이 전선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마두로 체포 압박과 군사·경제 제재는 중국의 서반구 진출에 실질적 타격을 줬다. 이로 인해 남미에서 중국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나,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좌파 정부와의 관계는 여전히 긴밀하다. Ⅱ. 문화 막르크시시즘과 이슬람: 서구 문명 내부 붕괴의 두 엔진 일대일로가 '외부로부터의 침투'라면, 문화마르크시즘(Cultural Marxism)과 이슬람주의는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주도하는 두 엔진이다. 이 두 세력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문명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공조한다. 문화 마르크시즘은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발원해, 전통 가족·종교·도덕·국가 정체성을 해체하는 이념으로 서구 교육·미디어·문화 전반에 침투했다. 동성애 이념, 젠더 유동성, 낙태 권리, 역사 왜곡, 탈식민주의 담론 등은 모두 이 흐름의 산물이다. 유럽에서는 이 흐름이 기독교 설교를 '혐오 발언'으로 규제하고, 전통 가족 개념을 '차별'로 낙인찍는 법적 환경을 만들어냈다. 서유럽 기독교인들 중 대부분은 명목상 기독교인에 불과하다. 영국의 경우 인구의 약 70%가 문화적·역사적 이유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히지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이는 7%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포르투갈·아일랜드에서는 8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답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동성결혼과 임신중절에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문화마크르시즘이 만들어낸 '탈기독교 기독교인'의 초상이다. 이슬람은 이 공백으로 파고든다. 유럽의 이슬람 인구는 프랑스에서만 약 600만 명(전체 인구의 10%)에 달하고, 영국 400만 명, 독일 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2010년대 이후 반복되면서 유럽의 기독교는 "문명 간 충돌"의 전면에 불가피하게 서게 됐다. 유럽 극우 정당들이 기독교를 이민자·세속주의에 맞선 '문화적 방패'로 활용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신앙 부흥이 아니라 정치적 정체성 전쟁이다. "교회가 비어가는 속도만큼 유럽은 포스트-기독교 문명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2기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자처하는 전략을 가지고 중국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Ⅲ. 미국의 반격: 효과와 한계 트럼프2기 행정부는 이 흐름을 차단하려는 가장 적극적 행위자로 등장했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 압박, 이란 군사 공격, 전 세계 상호관세 부과, NATO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증액 압박 등 일련의 조치들은 중국-이란-베네수엘라 삼각 축을 해체하려는 전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이란 공격은 일대일로의 핵심 육로 통로를 차단하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서반구에서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남미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동맹국들의 중국 의존 탈피도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역설도 있다. 트럼프의 일방주의는 전통 동맹국인 유럽과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개도국들에게 "미국보다 중국이 더 믿을 만한 파트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2025년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잇따라 무역협정을 체결하며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또한 트럼프의 상호관세는 2026년 2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위법 판결을 받아 무효화됐다. 이로 인해 대중국 협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설령 관세 압박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중국은 유라시아·아세안·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일대일로 전략을 계속 확대하며 미국의 압박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반격은 필요하고 일정 부분 효과적이지만 충분하지 않다.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는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뢰, 가치, 그리고 문명의 내적 활력이 함께해야 한다. Ⅳ. 결론: 문명 방파제는 어디에 세워지는가 팍스 차이나의 야망은 경제·외교·문화·정치·이념의 전방위 침투를 통해 전진하고 있다. 그 최종 표적은 자유민주주의이며, 더 깊은 곳에서는 기독교 문명이다. 일대일로는 경제 네트워크처럼 보이지만, 그 핵심은 중국 중심의 문명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재편하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와 문화마르크시즘은 서구 내부에서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는 협력자 역할을 한다. 중국공산당이 이 두 세력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는지의 여부와 별개로, 결과론적으로 이들의 목표는 수렴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5세기 서로마 제국은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도덕적 해이와 정체성 상실로 무너졌다. 오늘의 서방 문명도 동일한 경로를 걷고 있다. 교회가 비어가고, 가정이 해체되고, 진리의 개념이 해체되는 곳에,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새로운 질서로 들어온다. 이스라엘·미국·한국은 그나마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나라들이다. 이 세 나라가 각자의 내부 균열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팍스 차이나의 파도를 막을 방파제는 없다. 그 방파제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니다. 참된 방파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진리에 기반한 공동체, 그리고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목숨으로 지키려는 시민들의 각성이다. 한국 교회와 사회가 이 시대를 읽는 눈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팍스 차이나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는 군사력이 아니다. 진리와 공동체 안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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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목회자 절반 이상, 이미 AI로 설교 준비한다
챗GPT가 세상에 등장한 지 불과 2년 반 만에, 한국 교회 강단의 풍경이 조용히 바뀌고 있다. 이제 목회자 두 명 중 한 명 이상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는다. 불과 2년 전만 해도AI로 설교를 준비한다는 목회자는 열 명 중 두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목회 현장 깊숙이 파고든 AI가 한국 교회에 새로운 기회와 심각한 도전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와 희망친구 기아대책이 2025년 5월, 전국 담임목사 500명과 개신교 성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교회 트렌드2026」 조사(AI 목회 코파일럿)에서 이 같은 실태가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됐다. AI가 목회 현장에서 단순한 유행을 넘어 실질적인 사역 도구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과, 그 이면에 한국 교회가 직면한 신학적·영성적 과제를 짚어본다. 2년 새3배 이상 급증… "목사님도AI 씁니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수치는 단연 목회/설교 분야의 AI 사용률이다. 2023년 3월 17%에 불과했던 수치가 2025년 5월 58%로 껑충 뛰었다. 3배 이상의 증가율이다. 목회자의 전반적인 AI 사용률 역시 같은 기간 41%에서 80%로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AI를 아예 쓰지 않는 목회자가 이제는 다섯 명 중 한 명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는 한국 사회 전반의 AI 확산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조사전문기관 컨슈머인사이트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국내18~65세 성인 가운데 생성형 AI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비율은 75%에 달하며, 한 달에 한 번 이상 사용하는 활성 이용자 비중도 61%에 육박한다. 교회가 사회 흐름의 담장 밖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AI 활용 범위도 넓어졌다. 2023년에는 설교 또는 강의 준비를 위한 자료 획득에 집중됐던 반면(95%), 2025년 조사에서는 성경 공부 준비(+8%p), 교회 행사 기획(+6%p), 기도문 생성(+5%p) 등 콘텐츠 생성과 기획 전반으로 활용 영역이 확대됐다. AI가 단순 검색 도구에서 실질적인 사역 보조 수단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족은 절반, 5점 만점에3.5점… "아직은 아쉽다" 그러나 현장의 만족도는 사용률만큼 높지 않다. AI를 목회/설교에 활용해본 목회자들의 55%가 만족한다고 답했지만, 5점 만점 기준 평균은 3.5점에 그쳤다. 10명 중 1명(11%)은 불만족을 표했다. 이는 AI가 설교 준비의 효율성을 높여주지만, 목회자의 고유한 신학적·목양적 필요를 아직 충분히 채우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설교의 어떤 부분에 AI를 쓰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뚜렷한 온도 차가 드러났다. 설교 예화나 자료 수집에 대해서는 목회자의 93%가 적절하다고 답한 반면, 성도는 66%에 그쳤다. 설교문 주제 선정에서도 목회자(68%)가 성도(44%)보다 24%p 높은 긍정률을 보였다. 가장 첨예한 갈등 지점은 설교문 작성이다. 목회자의 44%만이 AI로 설교문을 직접 작성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답했고, 성도는 65%가 적절하지 않다는 반대 의견을 보였다. 성도들에게 설교문은 여전히 목회자의 영혼과 묵상이 담긴 고유한 산물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연령별 차이다. 49세 이하 목회자는 58%가 설교문AI 작성을 적절하다고 봤지만, 60세 이상은 46%로 낮아졌다. 젊은 목회자일수록 AI에 더 열려 있다. 찬성vs 반대, 핵심 논거는"효율" 대"묵상" AI를 설교문 작성에 활용하는 것에 찬성하는 목회자들이 드는 이유는 명확하다. 참고 성경구절이나 문헌을 찾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라는 응답이 60%로 압도적 1위였고,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설교를 준비할 수 있어서(30%)가 뒤를 이었다. AI를 사역의 속도와 질을 높이는 코파일럿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반면 반대 측의 논거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설교 준비에 필요한 개인적 묵상과 연구가 줄어들어서라는 이유가 65%로 단연 1위였다. 설교자의 생각과 노력이 들어가지 않아서(29%)가 그 뒤를 이었다. AI가 주는 편의가 목회자의 영적 사고력과 신학적 치열함을 무디게 할 수 있다는 우려다. 설교를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영적 산물로 보는 한국 교회의 전통적 설교관이 AI와 충돌하는 지점이다. 목회자44% "AI, 설교 준비의 필수 도구 될 것"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목회자의 52%는 AI가 설교 준비에서 제한적인 역할에 그칠 것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44%는 필수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절반에 가까운 목회자가 AI를 일시적 유행이 아닌, 미래 사역 환경의 핵심 인프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AI를 목회에 써본 목회자의 63%는 앞으로 AI를 더 많이 사용할 것 같다고 답했다. 아직 목회에는 도입하지 않았지만 AI 사용 경험이 있는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향후 목회 활용 의향이 63%에 달했다. 현장 적용을 관망해온 목회자들이 실제 도입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목회자81%, "성도 맞춤형AI 신앙 서비스 도입하고 싶다" AI를 설교 준비 도구로 쓰는 것을 넘어, 성도를 위한 신앙 서비스에 AI를 도입하고자 하는 열망도 높았다. 개인의 신앙 수준과 영적 필요에 맞춰 설교, 성경공부, 묵상 자료를 제공하는 AI 맞춤형 신앙 서비스에 대해 목회자의 81%가 활용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성도의 61%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목회자의 열망이 20%p나 더 높았다.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AI 신앙 서비스 1위는 상황에 맞춘 묵상과 찬양 콘텐츠 제공(34%)이었으며, 신앙 상태에 따른 성경공부 안내(28%), 나에게 맞는 설교 추천(22%) 순이었다. AI를 일방적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황에 반응하는 맞춤형 영적 동반자로 기대하는 성도들의 심리가 반영됐다. 교회 전산화 분야에서는 목회자와 성도 모두 교회 행정 전산화(각각 64%, 61%)와 회계 및 예산 관리를AI 도입 최우선 과제로 꼽아, 핵심 사역 외 행정 부담을 줄이는 데AI가 먼저 쓰이길 기대했다. 도구는 왔다, 지혜가 남았다 이번 조사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함의는 수치 이면에 있다. AI 사용률의 폭발적 증가 뒤에는 목회자들이 조용히 씨름하는 질문이 있다. 기술이 가져오는 편의성이 영성의 깊이를 대체할 수 있는가. AI가 생산해내는 매끄러운 설교문이 목회자의 치열한 신학적 묵상과 기도에서 우러나온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가. AI 시대 교회의 과제는 기술을 거부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지혜롭게 다루는 영성과 안목을 갖추는 것이다. 연구소 측은AI 도입의 목표는 확보된 시간을 성도를 향한 돌봄과 깊은 영적 묵상에 재투자하는 데 있어야 하며,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성도와의 교제, 심방, 기도라는 본질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전략을 세운 다음에야 전쟁을 할 수 있고, 참모가 많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잠언의 지혜가AI 시대에도 유효한 이유다(잠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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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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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자기관리, 칼과 칼집
1. 둘째 딸 은별이가 3년 동안의 백혈병 투병 생활을 마치는 시기의 일입니다.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어요. 중심정맥관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해섭니다. 중심정맥관은 독한 항암 약을 주입하는 케모 포트를 말해요. 어깨 쇄골 아래에 심장에서 나오는 튼튼한 혈관에 연결한 것이 중심정맥관-케모 포트입니다. 팔이나 손등 혈관으로는 독한 항암약물을 견딜 수 없어요. 혈관이 타들어 가고 부작용들이 나타날 수 있어서 처음 항암치료 시작하기 전에 전신마취 후 수술해서 심었던 겁니다. 2. 은별이는 3년 가까이 백혈병 항암치료로 고생했는데 감사하게도 치료과정 중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치료 일정도 잘 지켰어요. 포트 제거 수술 한 이후 10~20% 재발하는 경우가 있어서 앞으로 잘 지켜보면 됩니다. 5년을 지켜보고 이상 없으면 완치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도 부모님들도 3년 치료과정을 마치면 암묵적으로 완치되었다고 보는 듯해요. 아무튼 환자 보호자로서 병원 올 때는 조금 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온통 아픈 분들, 어려움 가운데 있는 보호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입니다. 아픈 게 잘못이 아니건만 더욱 긴장감 있는 병원 생활이 현실입니다. 3. 그런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섬겨주시는 의료진들은 그래서 함께 긴장합니다. 공감해주시고 먼저 잘 챙겨주시려고 애쓰십니다. 말 한마디도 행동 하나도 긴장감 속에 있는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아픔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주의합니다. 위로가 되어 주고자 애쓰십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든다고 했던가요. 사명감은 투철하나 공감 능력은 덜떨어진 의사를 볼 때가 있어요.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필 은별이 검사받으러 온 그날 그 모습을 봤습니다. 얼굴은 악의가 전혀 없어요. 투철한 사명감 가지고 <원칙대로!>를 외칩니다. 4. 보호자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이 병원에 와 있는지는 관심 없는 어설픈 인턴, 레지던트더라고요. 누가 원칙을 모를까요. 그걸 설명해주는 의사가 말투와 톤에 따뜻함과 배려가 묻어나지 않음이 안타깝다는 것이죠. 같은 말이라도 ‘아’다르고 ‘어’다르지 않습니까? 아직 어려서 저러겠거니 생각하고 웃고 스쳐 지나갔지만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의사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남아요. 다른 때보다 불편함이 좀 더 길어져요. 불편함도 때로는 성령님의 감동일 수도 있음을 이젠 압니다. 조용히 성령님께 마음으로 여쭤보고 주시는 감동에 귀를 기울여 보니... 맞습니다. 그 꼴, 그 모습이 영혼의 의사라는 제게서 아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편한 이유가 바로 내 모습이었던 겁니다. 5. “어”라고 말해도 “아”라고 해석하시고 자신을 돌아보시는 성숙한 분들도 있습니다. 험한 세상, 치열한 영적 전투로 인하여 상처가 심한 영혼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아”라고 말해도 “어”라고 해석하고 분노합니다. 영혼이 아파서죠. 내면에 여유가 없어서죠. 그래서 영혼의 의사들에게는 말과 말투, 말의 톤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과 함께 세트로 드러나는 손짓, 몸짓 하나도 아픈 영혼을 대하는 의사로서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6. 때로는 말과 글에서, 행동과 태도로 교묘하게 감춘 듯해요.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성령님께서 직면하게 하시는 시간이 꼭 옵니다. 그래서 평소 나를 돌아보는 삶을 부단히 살아내야 합니다. 처음 책 <성령님의 임재를 연습하라>에서 일부 나눴습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제게 목회자로서 주의하라시며 여러 번 당부의 감동을 주셨었습니다. 7. “사랑하는 태성아. 너는 길을 걸을 때 뒷짐 지고 다니지 말아라. 그리고 의자에 앉을 때 다리 꼬고 앉지 말거라. 나는 나의 종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가 않구나. 너는 사람들 앞에서 짝다리 짚고 있지 말거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 다니지 말거라. 나는 나의 종이 버릇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단다. 너는 항상 몸가짐을 단정히 하거라. 나는 너를 보는 사람들이 네가 예의바른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너는 항상 몸가짐을 깨끗하게 하여라. 몸을 청결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너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네가 게으름으로 인하여 나의 성전인 너의 몸이 지저분하거나 더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8. 물론 이런 내용은 율법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원하시는 모습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또한 다리가 아프거나 허리가 아픈 분들은 짝다리, 뒷짐 질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게는 목사로서 모범이 되기 원하시는 사랑의 권면이십니다. 감사하게도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존중해드리고,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성령님을 사랑하게 되니 그렇게 살고 싶어집니다. 지금도 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요. 다만 감동으로 주신 말씀들에 순종하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9. 험한 세상 가운데 내게 맡겨주기 원하시는 영혼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마음 중심도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십자가 사랑으로 따뜻하고, 말과 태도, 자세라는 그릇도 따뜻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진리의 칼이 따뜻함을 품으면 생명의 검이 됩니다. 진리의 칼이 차가우면 죽이는 칼이 됩니다. 망나니 춤추는 칼 됩니다. 은별이 검사하러 온 날, 제가 검사받은 느낌적인 느낌입니다. 영혼의 의사로서 진리의 칼을 잘 갈고 닦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 크신 예수님 십자가 사랑의 따뜻함이라는 칼집을 잊지 말고 들고 다녀야겠습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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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기도는 노동이라고?” (1)
1.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기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저는 기도라는 표현보다 대화라는 표현이 더 좋습니다. 누군가는 “기도는 노동이다.”라고 했는데요. 저는 어떤 측면에서는 이 말이 싫은데요. 싫어도 너~~무 싫습니다. 기도가 노동이라는 개념이 꽉 들어찬 사람들은 하루 종일 힘들게 일(노동)하고 왔는데요. 또 자기 전에 기도라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질려버립니다. 아니면 출근해야 하는데 일어나자마자 노동이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피곤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2. 종종 경험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건 막상 기도를 하면 처음엔 힘든데 점점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보람되고 기쁩니다. 하지만 노동으로 인식한 기도 시간이 끝나고 다시 노동이라는 기도 시간이 다가올 때 즈음 부담감부터 올라옵니다. 기도가 노동이라는 생각에 기도를 떠올리면 부담부터 느끼게 만듭니다. 3. 물론 노동이라고 표현할 만큼 힘든 때가 있습니다. 잘 아시듯이 중보적 기도가 그렇습니다. 나라와 민족, 열방과 세계를 위한 기도는 씨름의 기도입니다. 남을 위한 중보적 기도도 고통의 기도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발생하면 더 힘든 씨름 기도가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 많은 경우 기도는 본질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의 시간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말입니다. 4.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기도의 행복을 많이 배웠어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많이 배웠습니다. 체험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말입니다. 딸내미들이 어릴 때였어요. 한별이, 은별이가 새벽에 반드시 화장실을 갑니다. 거실에서 기도하던 저는 딸내미가 사랑스러워서 제 옆을 지나갈 때 꼭 안아줍니다. 안아주면서 그녀들의 온기를 느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5. 한별이는 가볍게 안아주고 금방 들어갑니다. 은별이는 제가 안아준 팔을 풀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요. 피곤한 나머지 제게 기댑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안겨 있습니다. 나도 딸내미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습니다. 순간 제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간질거려요. 부인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안고 있는 그 자체로 온 영혼과 마음, 생각이 사랑으로 소통되고 있음을 느끼며 전율이 일어납니다. 6. 딸내미는 들어가고 저는 사랑의 전율 속에서 다시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갑자기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와 깊은 아버지 사랑이 느껴집니다. 십자가에서 생명 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눈물이 한 방울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랑에 제 영혼이 벅차오릅니다. 성령님의 친밀하심이 느껴집니다. 성령님의 임재로 내 몸을 감싸 안아주십니다. 이거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성삼위일체 하나님 마음에 잠겨있는 시간이 기도 시간입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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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루틴을 지키라!
1.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4)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 농구선수의 징크스와 루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시합 전에 청결을 점검해요. 목욕부터 집안 대청소까지 강박적으로 점검하는데, 그렇게 해야 경기에서 실수를 줄이고 시합에 집중이 잘 된다고 말합니다. 2. 그가 농구 시합 중에 자유투를 던질 때가 있는데요. 던지기 전 공을 바닥에 5번 튕깁니다. 그리고 던졌는데 들어가면 계속 5번씩 공을 튕기고 슛을 던져요. 자유투가 안 들어가면 횟수를 바꿔서 7회 혹은 10회 바닥에 공을 튕기죠. 슛이 성공하면 그 숫자를 기억하고 계속 그 횟수만큼 튕기고, 안 들어갈 때가 오면 다시 공 튕기는 횟수를 조정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도 루틴이 있어요. 타석에 들어서면 꼭 야구 배트를 세 바퀴 돌리고 허리와 팔을 세 번 까딱거립니다. 그래야 자신감이 생기며 실수를 줄이게 된답니다. 이렇게 징크스는 이겨내고, 자신의 좋은 리듬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루틴이라고 하는데요. 3. 저도 신앙의 루틴이 있습니다. (목회자분들마다 영적 루틴이 다를 수 있는데요. 중심은 비슷하거나 같을 것입니다.) 신앙, 목회 본질을 지키는 힘과 삶이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얼마나 잘 지켜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7년 신학생 시절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재발견하였는데 삶과 신앙의 분기점이었어요. 그렇게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교제 나누는 삶을 추구하면서 영적 루틴이 생겼습니다. 충분히 성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삶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 바라보는 시간을 먼저 확보하는 겁니다. 영적 루틴이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 구체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4. 오전에는 가급적 활동하지 않아요. 성령님과 교제 나누며 외부적인 소음을 차단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SNS를 내려놓고 가급적 약속도 잡지 않아요. 사도들의 고백처럼 말씀과 기도 시간으로 선포하고 영적, 정신적, 육체적 쉼과 회복의 시간을 가집니다. 물론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적 루틴으로서 최대한 지키려고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시면 또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지키는 방향성이 제게 유익해요. 5. 현재 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생기기 전에는 참으로 집회 일정이 바빴어요. 매주 부흥회 초청이 있었고, 전국에 정기모임과 정기집회도 25곳이 넘었습니다. 바쁜 집회 일정도 영적 루틴을 지키면서 다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많은 일정 속에서도 일주일에 2일은 집에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가정에 먼저 충실하도록 이끄시며, 사역자가 아니라 아들이요 친구로서 성령님과 교제 나누는 삶에 집중하게 하셨는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머물러 있는 시간입니다. 6. 어떤 시즌에는 한 달 이상 모든 집회를 거절하거나 1달 이후로 날짜를 조정했습니다. 5~6개월에 한 번씩은 집에서 두문불출했어요. 조용히 성령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멈춰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영적인 루틴이 형성되었어요. 이제 제 영혼에 각인되었습니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배우게 하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7. 제 사역이 바빠지기보다, 제 이름이 알려지기보다, 우리 교회가 알려지기보다 예수님이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제 삶을 통해 예수님 알려지시려면 영적 루틴을 목숨같이 지켜야 해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부지런해야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분들 사역과도 비교할 필요 없어요. 누군가의 말처럼 오직 비교의 대상은 어제의 나 자신입니다. 오늘도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지키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숫자에 속지 않고 성장과 성숙을 함께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히 배움의 자세로 연합을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시고 머물러 계시는 분들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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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2)
1. 내가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평소 이런 노력이 찬양을 인도하는 실전에서 빛을 발합니다. 찬양 인도가 목적이라서 평소 성령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 가운데 많은 은혜 끼치고 싶어서가 목적이 아닙니다. 2. 다시 말씀드리지만 친밀하게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나도 순수하게 사랑해서 존중해드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찬양 사역에서도 성령님께서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준비가 이뤄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순수함과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태도, 감동 주실 때 메모하며 기록하는 습관들이 어우러져 비로소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 인도를 잘하는 것보다 동기의 점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동기는 평소 삶의 태도에서 점검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찬양들이 모이면 다시금 성령님께 여쭤봅니다. 3. “성령님, 어떤 순서로 찬양드리기 원하세요? 가르쳐 주시겠어요?” 여쭤보고 기도드리며 잠잠히 기다리고 있으면 결코 늦지 않게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감동 가운데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그 순서대로 정리하고 준비합니다. 찬양 인도할 때는 내 안에 계시며 이 장소에 계신 성령님을 친밀하게 느끼고 인식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드리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또한 목소리에도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름부으시기를 끊임없이 간구합니다. 4.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 인도를 위해 성령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랑해서 성령님을 찾으려는 영적인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을 점검하며 강대상 앞에서 좀 더 집중하여 조용히 성령님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며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함께 찬양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드립니다.” 5. 조용히 마음 가운데 이런 고백을 드리며 첫 찬양을 살펴봅니다.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영적 상태인지 또 점검한다는 겁니다. 내면에 성령님 함께하심으로 인한 안정감과 평안함, 설레임과 기대감, 나의 진심이 담겨질 수 있겠다는 확신 속에 조용히 입을 엽니다. 찬양을 시작합니다. 찬양 인도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쉬운 사역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평상시에 순수하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며 살아간다면 사역 현장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도우심 받는 것이 자연스러우리라 믿습니다. 6. 우리 모두 찬양 인도자로 살지 말고 평소 찬양 드림을 기뻐하는 자로 사시길 소망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는 찬양”도 인도할 때가 아니라 평소 개인적인 찬양에서 먼저 성공적으로 사용하시길 소망합니다. 순수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쁨 드리는 찬양을 합시다. 그러다 보면 찬양 인도의 현장에서도 성령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심을 자연스레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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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인생의 오후, 길을 잃은 당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이정표: 『인생 오후의 질문』
청춘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늙었다고 인정하기에는 아직 서운한 나이. 우리는 이 시기를 '중년'이라 부른다. 인생의 오전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시절에도 수많은 질문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인생의 오후에 마주하는 질문은 훨씬 더 진지하고 절박하다. 곧 해가 질 것만 같은 유한한 시간과 삶의 무거운 무게를 비로소 실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잘 살아온 걸까?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심리학적 통찰과 깊은 신앙의 언어를 결합한 황정회 저자의 신간『인생 오후의 질문』(아르카)이 출간되었다. 중년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역자의 시선 저자 황정회는 분당우리교회와 사랑의교회에서 오랜 세월 상담가이자 교구 전도사로 사역하며, 교회 안의 수많은 중년 성도를 가까이에서 돌봐왔다. 그는 사역 현장에서 성도들의 기도 제목을 들을 때면 그가 중년인지 아닌지 금세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중년의 삶에는 자녀와 부모를 위한 기도는 넘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기도’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볼 틈 없이 달려온 중년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던 모습과는 멀리 떨어진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저자는 이런 이들을 위해 심리학자 다니엘 레빈슨이 말한 ‘인생의 가을’이라는 개념과 논어의 ‘지천명(知天命)’을 연결한다. 중년은 단순한 쇠퇴의 시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는 진중한 전환기라는 것이다. 중년의 뇌가 가진 놀라운 강점: "다르게 생각하는 힘" 흔히 중년이 되면 기억력이 감퇴하고 뇌 기능이 쇠퇴한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현대 뇌과학의 성과를 빌려 이러한 오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중년의 뇌는 청년기의 뇌처럼 '빠르게' 생각하지는 못할지라도, 훨씬 안정되고 성숙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 통찰과 노련함 : 중년의 뇌는 정보를 단순히 처리하는 것을 넘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더 넓고 깊은 답을 내놓는다. • 감정적 안정성 : 젊은 시절의 감정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문제를 다각도로 조망하며 여유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된다. • 사회적 자산 : 이러한 중년의 지혜와 통찰은 사회와 다음 세대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저자는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생식 활동이 끝난 뒤에도 수십 년을 더 살게 된 것은 ‘중년 유전자’ 덕분이며, 이 시기는 인류에게 허락된 ‘축복의 구간’이자 진정한 자아 성취의 시간이라고 강조한다 . 상실의 파도를 넘어서는 '애도의 여정' 중년의 삶에서 가장 주된 이슈 중 하나는 ‘상실’이다. 이전과 같지 않은 건강, 변해가는 외모, 사회적 역할의 축소,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까지, 중년은 원치 않는 수많은 이별과 적응을 강요받는다. 저자는 상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실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느냐'라고 말한다. 책에서는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한 성경적이고 심리학적인 ‘애도의 과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1. 비움과 수용 : 과거의 익숙했던 것들을 보내주는 것은 새로운 인생의 국면을 맞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상실을 삶의 그림자로 받아들이고, 억지로 거부하기보다 그 아픔을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 2. 동반과 위로 : 홀로 견디기 힘든 상실의 계절에는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동반자가 필요하다. 저자는 교회 공동체가 신앙 안에서 서로의 희로애락을 공유하고 배울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 3. 의미의 재발견 : 상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점이다 . "이제 무엇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남은 날들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 실천적인 관계 회복과 자아 찾기 저자는 상담 사례를 통해 중년의 4대 인간관계(자녀, 부모, 배우자, 나 자신)를 회복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를 제시한다. • 자녀와의 관계 : 중년 부모가 배워야 할 사랑은 자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축복의 사랑'이다. 부모가 당당하게 자기 자신으로 설 때 자녀도 비로소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 배우자와의 관계 : 사랑은 젊은 부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년의 부부관계 역시 확장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세월 따라 함께 걷는 지혜가 필요하다. • 나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감정적 반응에 갇힌 미분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오롯이 자신을 대면하며 잃어버린 자율성을 찾는 시간은 중년에게 필수적이다. 중년은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시간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교계 지도자들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는 "의무감으로 점철된 중년의 삶을 이해하고 인생 오후의 의미와 소망을 찾게 해줄 것"이라고 추천했다. 하진호 목사 또한 "중년은 노래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시간"이라며 이 책이 성숙의 계기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 황정회 저자는 "천년을 버티는 집을 지으려면 천년을 견딘 소나무가 필요하듯, 우리 인생도 견딘 만큼 쓰이게 된다"라고 한다. 삶의 고갯마루에서 지쳐 있는 당신에게, 『인생 오후의 질문』은 다시 일어설 용기와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인생 후반전의 찬란한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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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신앙
『중간사 수업』(샘솟는 기쁨/박양규 지음) 고요 속에 숨겨진 거대한 움직임 역사는 늘 요란하게만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긴 침묵 속에서 더 깊은 변화를 준비한다. 박양규 저자의 『중간사 수업』은 바로 그 고요한 400년,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대를 향해 귀를 기울이게 한다. 흔히 ‘성경의 공백기’라 불리는 이 시기를 저자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준비기로 재조명한다. 이 책은 세종대학교에서 15주간 진행된 강의를 바탕으로 집약된 결과물이다. 지성(로고스), 정서(파토스), 인품(에토스)이 어우러진 강의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단순한 학문적 분석을 넘어, 역사와 신앙을 긴밀히 연결하며 오늘의 독자에게 살아 있는 질문을 던진다. 학문을 넘어 현실을 깨우는 역사서 저자는 중간사를 흔히 쓰이는 ‘제2성전기’라는 학술 용어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신앙과 현실을 연결하는 역사적 해석서이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연구자로 살아온 저자는 단순한 용어 정리를 넘어,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오늘의 독자가 체감할 수 있도록 재구성한다.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을 신약 시대의 형성과 연결하며, 그 시대 성도들의 질문을 오늘 우리의 질문과 겹쳐 읽는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택할 것인가?” 이 물음은 과거의 성도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초대교회의 회복된 정체성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정체성이다. 저자는 우리가 2천 년 전 그들과 같은 성경,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감성적 고백이 아니라, 신앙이 역사성을 지닌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본질을 되찾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방식임을 깨달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문명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삶의 기준이 분명했다 :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도덕적 규범이 아닌 존재의 중심으로 삼았다. 가치의 숭고함을 추구했다 : 권력이나 질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삶으로 구현했다. 삶 자체가 증언이었다 : 복음을 말하는 것보다 복음으로 존재하는 것을 더 중시했다. 오늘 교회가 초대교회의 본질로 돌아간다면, 세상 속에서 다시금 소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문자에 갇힌 신앙은 소멸한다 책의 또 다른 날카로운 통찰은 “성경과 시대의 접점을 찾으려는 고민을 하지 않고 문자에 갇힌다면 결국 소멸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태어난 언어임을 강조한다. ‘복음’, ‘교회’, ‘소망’이라는 단어조차 당시 정치·사회·종교적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말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말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적 장면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삶으로 살아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문자적 정지 상태로 읽어서는 안 된다. 말씀의 역사적 온도, 사람들의 질문, 사회의 긴장까지 함께 읽어내야 한다. 바리새파의 변혁과 유대교의 생존 저자는 유대교가 어떻게 ‘랍비 유대교’로 전환되어 명맥을 이어 왔는지 주목한다. 사두개인은 문자만을 고집하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졌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적용을 고민하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려 했다. 이 점은 오늘 교회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문자주의에 머무는 신앙은 쇠퇴한다. 해석과 적용의 고민을 멈춘 공동체는 현실을 잃고, 결국 미래도 잃는다. 초대교회와 유대교의 변화를 함께 보아야 오늘 교회의 길이 선명해진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또 하나의 중간사 오늘 한국 사회는 정치·종교·문화의 충돌 속에 서 있다. 가치의 붕괴, 정체성의 혼란, 교회의 위상 약화, 급격한 사회 변화… 이 모든 모습은 중간사가 보여준 시대적 긴장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저자는 말한다. “중간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읽는 해석학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마카비 전쟁’은 무엇일까? 신앙을 압박하는 문화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 초대교회가 보여준 회복의 정체성은 오늘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중간사 수업』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신앙의 본질과 역사의 흐름을 다시 읽어내는 눈을 회복하게 한다. 『중간사 수업』은 단순히 성경 사이의 400년을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깨우는 신앙의 교과서이다. 하나님 나라가 새 질서를 준비하던 격변기를 새롭게 비추며, 오늘의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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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신앙의 통합: 이념 아닌 '실제적 연결'의 새로운 마음 지도 그려라
11월 4일 오후 3시 신촌 품는교회(김영한 목사)에서 열린 권요셉 목사의 신간 《변화의 반복》 (샘솟는기쁨) 북토크가 진행되었다. 이날 북토크에서 권 목사는 자신의 목회 현장과 임상 현장을 오가며 길어 올린 사유를 차분히 풀어냈다. ▲11월 4일 오후 3시 신촌 품는교회에서 진행된 권요셉 목사의 북토크. 오른쪽은 진행을 맡은 김영한 목사 강연은 한 편의 증언록처럼 시작했다. 전도사 시절 새벽 두 시, 드물게 교회에 오던 여학생의 전화에 “내일 얘기하자”고 답했던 그날. 불과 2주 뒤 그는 학생의 자살 소식과 함께 유가족을 통해 학생의 일기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일기 속에서 자신의 설교 기록과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에 대한 감상이 빼곡히 채워진 페이지를 마주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울먹였던 권 목사는 “내가 살릴 수도 있었겠다.”라는 자책은 곧 관점의 전환이 되었다. 교회 앞에서 쫓겨나던 경계청소년들을 찾아 교회 청소년부실을 밤 쉼터로 열었고, 인근 분식집에 선결제해 “김밥은 언제든”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깔았다. 이 경험은 훗날 선교지의 전쟁과 맞물리며 ‘트라우마’라는 언어로 재명명된다. 외국인이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부족에서 교회가 600명 규모로 성장하던 무렵 내전이 터졌다. 밤이면 총성이, 낮이면 시신 수습이 일상이었다. 대사관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나, 귀국 후 낙관적 성격을 가졌던 아내는 우울·무감동·대인부정에 시달렸다. 정작 권 목사에게는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 목사에게는 지연성 증상 —얼굴 피부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는 듯한 환촉, 붉은 음식에서 피 냄새가 나는 과각성— 이 몰려왔다. 그는 “환시가 왔으면 쉽게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 않고 감각적인 확촉을 통해 얼굴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이 와서 거울을 보며 확인하는 병식 덕에 정신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 기존 상담이 하나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경향에 의문이 생겼고, 들레즈·가타리의 ‘분열분석’(schizoanalysis)에 눈을 떴다. 욕망·무의식·사회구조의 다층 연결을 전제하고, 몰입과 집착을 쪼개 분산·개체화·재조합하는 방식이 자신의 경험을 더 정확히 포착해 준다는 것이다. 국내 전문가가 드물던 시절 해외 분열분석 전문가들에게 슈퍼비전을 받으며 국내에서 경험하지 못한 전문성을 다졌다. 강연의 중반부는 트라우마 이론의 갱신을 점검하는 자리였다. 그는 “전쟁·재난 같은 빅 트라우마만 중요하다는 통념이 흔들리고 있다”며 “촘촘한 스몰 트라우마의 축적이 언어·기억 처리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설명했다. 빅 트라우마의 표지는 ‘침투적 재경험’ — 의도와 무관하게 과거가 현재를 덮치는 현상 — 이지만, 스몰 트라우마는 자각이 어렵고 성격과 감정의 밑결을 묵묵히 변형시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몰입과 집착, 애착 왜곡, 편집적 해석, 중독 등은 그 표현형일 수 있다. 이론 비교도 간명했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개인사로서의 무의식을, 라캉은 “언어처럼 구조화된” 사회적 무의식을 보았다. 들레즈·가타리는 분자적 흐름들의 연결망을 전제해, 보편/개인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나의 생성’을 지향한다. ‘가족 세우기’ 같은 구조주의적 기법은 “정해진 해답 범주 안에서 문제를 배치”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라캉 사이의 중간 단계로 읽힐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분열분석은 개인의 욕구들을 쪼개고(분열) 흩어(분산) 다시 새로 엮어(재조합) 집착의 에너지를 다중의 건강한 접속으로 분배한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디에 서 있는가. 권 목사는 상담·뇌과학·사회이론을 “하나님이 지으신 질서가 일반은총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해한다. 기도와 성령, 영적 돌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 협력이 가능하며, 경계의 분별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교회가 학문을 배척하면 현장의 언어와 데이터를 잃고 공적 담론에서 소외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배우고,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청중의 질문에 그는 “세상의 이론을 맹신하지도, 배타적으로 잠그지도 말라. 분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강연 말미, 그는 ‘이념’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선교사·목사·신자에게 부과된 당위적 모델이 죄책과 경직을 낳을 때, 사람은 모델을 위해 소모된다.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이상적 목회자상’이든 모두 이념이 될 수 있다. 그 이념을 잘게 쪼개 하나님과의 실제적 연결, 먹고 자고 일하는 소박한 일상 속 은총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넥타이를 풀고 설교하려다 다시 매고 올라간 소소한 고백은, ‘형식’이 아닌 ‘관계’로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비췄다. 진행을 맡았던 김영한 목사는 “교회 안팎에 불안과 중독, 트라우마가 만연한 시대에 실천 언어와 신학적 분별을 겸비한 안내서”라며 후속 강좌를 제안했다. 권요셉 목사는 한 문장으로 책의 주제를 가려냈다. “충격보다 우리를 더 옭아매는 것은 이념입니다. 이념 대신, 하나님과의 실제적 연결로.” 그의 북토크는 거창한 해법보다, 그 연결을 가능케 하는 태도 — 즉, 곁에 머무는 시간·열린 공간·작은 예산·지속적 배움 — 이야말로 교회가 지금 당장 선택할 수 있는 길임을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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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속에서 과감한 행동을 이끄는 5가지 전략
하버드비즈니스리뷰(Harvard Business Review, 2025년 9–10월호)에 실린 란제이 굴라티(Ranjay Gulati) 교수의 「불확실성 속에서 과감한 행동을 이끄는 5가지 전략」(Five Strategies for Acting Boldly in Uncertain Times) 의 주요 내용이다. ● 핵심 주제 “용기(Courage)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리더십 역량이다.” 란제이 굴라티 교수는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리더들이 ‘두려움의 마비’를 극복하고 과감하게 행동하기 위한 다섯 가지 전략을 제시합니다. 1. 두려움을 인식하고 다루기 불확실성 상황에서 사람들은 위험보다 두려움 자체에 지배당한다. 리더는 두려움을 억누르기보다 직시하고 이해해야 한다.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팀 안에서 두려움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화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두려움을 인정할 때 오히려 통제할 수 있게 된다. 2. 자신감 키우기 (Self-Efficacy) 자신의 역량을 신뢰하는 힘이 과감한 행동의 기반이다. 단,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작은 성공 경험을 축적하여 생기는 실질적 자신감이어야 한다. 실패 경험도 “학습 자산”으로 삼아 점진적으로 자신감을 키우는 과정이 중요하다. 즉, 용기는 성공한 결과보다 시도한 경험에서 자란다. 3. 명확한 목적과 의미 찾기 불확실한 시기일수록 ‘왜 이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리더를 붙잡아 준다. 개인적 이익보다 조직의 사명·가치와 연결된 의미 있는 목표를 분명히 할 때, 두려움을 넘어 행동할 수 있다. 목적의식은 불안정한 외부 상황 속에서도 방향 감각을 유지하게 해 준다. 4. 관계와 신뢰를 기반으로 협력 강화 용기는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공동체적 역량이다. 리더가 관계 속에서 신뢰를 구축하면, 팀원들도 더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상호의존적 용기(Interdependent Courage) 가 필요하다 — 즉, “함께 도전하고, 함께 책임지는 문화.” 신뢰가 강한 팀일수록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5. 반복적 학습과 행동 실험 용기는 단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다.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완벽한 계획’보다 작은 실험을 반복하며 배우는 자세가 중요하다. “시도 → 학습 → 조정”의 사이클을 통해 행동력과 자신감을 동시에 키운다. 리더는 실패를 처벌하지 않고, 시도를 장려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결론: “용기 있는 조직은 학습하는 조직이다.” 용기는 리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조직 문화적 자산이다. 리더가 솔직히 두려움을 인정하고, 의미 있는 목적을 공유하며, 관계 속 신뢰를 키울 때 조직 전체가 불확실성 속에서도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즉, “용기는 배워서 성장시킬 수 있는 리더십의 핵심 근육”이다. ※ 참고 정보 원문 : Ranjay Gulati, “Five Strategies for Acting Boldly in Uncertain Times,” Harvard Business Review, Sept–Oct 2025. 관련 저서 : 『How to Be Bold: The Surprising Science of Everyday Courage』 (Harper Business, 2025).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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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파도 앞에 선 부모에게 "성적 관리보다 정서 조율이 먼저다"
『AI 시대, 자녀 진로 어떻게 할까?』(기독교포털뉴스)라는 책을 낸 조성철 목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공지능(AI)이 일상 깊숙이 파고드는 시대, 자녀의 진로를 걱정하는 부모들의 불안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아이에게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하는지, 어떤 직업이 미래에도 살아남을지, 10년 후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이 물음 앞에서 부모들은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최근 출간된 한 책은 그 불안에 대해 전혀 다른 방향의 답을 내놓아 주목받고 있다. 조성철 목사(한우리기독학교 설립자·대전 한사랑감리교회 담임)가 펴낸 『AI 시대, 자녀 진로 어떻게 할까?』(기독교포털뉴스)가 그것이다. 이 책은 AI 활용 기술서가 아니다. 대신 AI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의 '정서적 토대'와 부모의 역할을 정면으로 다룬다. "진로는 성적표가 아니라 부모의 눈빛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책은 출간 직후부터 교회 공동체와 학부모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저자 조성철 목사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게임 과학고 사감에서 AI 교육 전문가로 조성철 목사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미국 HIS 유니버시티에서 가정사역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첫발을 디딘 곳은 목회 현장이 아니라 한국게임과학고등학교였다. 2012년부터 7년간 사감으로 일하며 게임에 빠진 300여 명의 청소년들과 먹고 자고 생활했다. "처음에는 체육 선생님들이 사감을 맡다 보니 군대 문화가 형성됐던 학교였어요. 사랑의 문화가 필요하다고 해서 목사님을 찾던 중에 저를 뽑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갈 데가 없어서 갔어요(웃음). 하지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고, 아이들과 진심으로 호흡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현장에서 그는 AI와 미래 사회를 처음 직면하게 됐다. 과학 분야에 재능 있는 학생들이 미래 기술과 씨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조 목사는 스스로 AI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2015년 대안학교 '하누리 기독학교'를 설립하면서 이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을 기숙으로 받았는데, 10년 후 이 아이들이 선택해야 할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그때 AI를 만나게 됐습니다.“ 처음 AI를 주제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주변 반응은 냉담했다. "AI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찾아오고, 2022년 말 챗GPT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가 10년 전 학교를 시작하면서 예상했던 바로 그 시점이 도래한 것이다. "제가 학교를 시작하면서 10년 후를 예측했는데, 정말 비슷한 시기에 AI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면 앞으로의 10년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그 고민에 대한 답을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쓰게 됐습니다.“ 조성철 목사는 AI시대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닌 인간다움이라고 강조한다. AI 시대의 책, 기술이 아닌 '인간다움'에 집중 챗GPT 등장 이후 AI 관련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은 AI 활용법이나 기술의 이해를 다룬다. 조 목사의 책은 그 흐름과 선명하게 구별된다. 그는 이 책의 차별점을 '인간다움'이라는 단어로 요약한다. "인공지능이라는 말 자체의 목표가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를 만들자'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 인간이 그 기계를 닮아가려는 현상 속에 놓여 있고, 그것과 경쟁하려 하고 있어요. 저는 AI를 잘 사용하는 방법보다, AI를 사용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정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조 목사는 "진로는 정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보다, 그 사람이 어떤 내면을 가지고 있는가가 먼저라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AI 책들이 기술 활용과 직업 전망에 집중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다. "이 책은 기술 서적이라기보다, 아이들의 정서와 마음을 다루는 책입니다. 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직업을 가진 분들을 향해서 정서적 조율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썼습니다." 그의 말처럼, 책의 독자층은 자녀를 둔 부모만이 아니다. 출간 직후 받은 피드백은 이를 증명한다. 청년들이 "이 책은 청년들이 모두 읽어야 한다"고 문자를 보냈고, 손주를 키우는 조부모들이 책을 다 읽고 자녀에게 전달하는 일이 생겼다. 부모의 역할: 성적 관리자가 아닌 정서 조율사 이 책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부모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많은 부모가 자녀 교육을 '성적 관리 → 대학 입시 → 직업 선택'의 순서로 이해한다. 조 목사는 이 구도를 근본부터 뒤집는다. "부모의 역할은 성적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서를 조율해 주는 사람입니다. 모든 진로는 그 존재로부터 시작됩니다. 직업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것이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이었다면, 이제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알고, 그것을 통해 사명을 찾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가는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직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상담 현장에서 만난 청년 사례를 소개했다.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일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 같아서" 그만둬야 하는지 고민하는 청년이었다. 조 목사는 이를 이원론적 직업관의 문제로 진단했다. "직업을 생계 수단으로만 보고, 예배와 신앙을 직업과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문제입니다. 삶의 현장이 바로 예배가 되어야 하고, 그것이 복음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이든 아니든,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세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런 이원론적 직업관을 가진 청년들이 생긴 원인은 어릴 때부터 받아온 부모의 교육과 학교 교육에 있다는 것이 조 목사의 분석이다. 이것이 그가 부모 교육을 향해 책을 쓴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를 안고 있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부모 조 목사는 현대 부모의 모습을 담은 인상적인 사례를 하나 제시했다. 상담 대기실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는 대신 화면을 응시하는 그 모습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 "아이를 안고 있긴 한데, 아이와 눈을 맞추지 않는 거예요. 그 시간이 힘드니까 자기만의 눈맞춤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게 현대 젊은 엄마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영아부터 3세까지의 시기는 아이가 언어가 아니라 정서로 소통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기 부모와의 정서적 연결이 아이의 전 생애 진로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아이의 진로는 부모의 눈빛에서, 부모의 언어에서, 부부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정서적 토대에서 시작된다"는 명제를 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성적은 지금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지만,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AI 시대의 진짜 역량: 성품·회복탄력성·자아존중감 조 목사는 책에서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으로 능력·지식·정보 활용 같은 기술적 요소보다 성품, 회복탄력성, 자아존중감을 꼽는다. 이 선택의 배경에는 신학적·심리학적·인문학적 분석이 녹아 있다. "신학적 접근에서는 영성·지성·전문성을 강조하고, 심리학적 접근에서는 창조적 상상 능력·공감 능력·협동력·적응력을 꼽습니다. 거기에 자아존중감과 회복탄력성, 그릿(Grit), 문해력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역량의 뿌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바로 공동체성 회복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는 AI 시대에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라고 강조한다. 역설적이게도 AI가 발달하는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과 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현실에서 출발한 통찰이다. "AI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감 능력, 협동력, 적응력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자아존중감이에요.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힘—이것이 자아존중감입니다.“ 자아존중감은 회복탄력성과 직결된다. 회복탄력성의 핵심은 '자기 조절 능력'과 '대인관계 능력'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힘이 바로 긍정성이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실패했다가 다시 도전하는 힘—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관계'다. 그리고 조 목사는 이 관계와 공동체성을 가장 잘 회복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교회를 지목한다. "다음 세대에 대해서 교회가 AI를 쫓아갈 것이 아니라, 가장 인간다움, 가장 신앙의 본질을 향해 가다 보면 AI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재와 대안의 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조성철 목사는 자녀를 예수님에게 내어드리는 과감한 결단을 요구한다. 불안한 부모에게: "아이를 예수님 손에 넘겨드리라" AI 시대 앞에서 부모들의 불안은 극에 달해 있다. 이전 세대 부모들은 적어도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자녀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부모들은 자신도 모르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어 막막하다. 조 목사는 이 불안에 대해 책 표지에 담긴 그림을 통해 답을 전한다. 표지에는 거대한 AI의 파도를 서핑하는 어린아이와, 그 아이를 잡아주는 손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손이 부모의 손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이다. "서핑을 못 하는 사람에게 파도의 크기는 두려움의 크기입니다. 하지만 서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 파도의 크기는 즐거움의 크기가 됩니다. 더 큰 파도를 찾아가게 되죠. 그런데 부모들은 이 파도를 안 타봤습니다. 그러니 불안하죠. 그 불안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예수님께 넘겨드리면 어떨까요?“ 그는 "내 자녀"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시각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AI보다 인간을 더 잘 아신다는 것이다. "AI가 인간을 닮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AI와 미래 시대를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께 아이들을 맡기면, 그 불안으로 아이를 붙잡고 있는 손이 아니라, 아이를 예수님께 넘겨주는 손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잔소리와 불안으로 아이를 붙들고 있다면, 그건 아이를 발전시키는 손이 아니라 아이를 묶어두는 손이 됩니다.“ 마을을 잃어버린 시대, 교회가 공동체가 되어야 조 목사는 현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마을 공동체의 소멸'을 꼽는다. 이 주제는 AI와 청소년 문제, 교회의 역할을 관통하는 그의 핵심 키워드다. "저희 세대까지만 해도 마을이 아이를 키웠습니다. 학교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교회가 아이를 키웠어요. 마을에는 어른도 있고 위아래 관계가 있어서 서로 돌보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가 어린이집부터 대학교 졸업까지 또래하고만 지냅니다.“ 이 마을의 부재가 직장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분석한다. 입사 2년 만에 퇴사하는 '잡포핑(Job Popping)' 현상의 이면에는, 위아래 관계를 맺어본 경험의 부재가 있다는 것이다. 마을 안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던 '수직·수평 관계의 사회성'을 익힐 공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마을을 회복할 수 있을까. 조 목사의 답은 단호하다. "교회입니다. 다른 단체는 마을을 회복해 줄 수 없습니다. 교회는 공간도 있고 세대가 함께 모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마을 공동체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한 시간짜리 예배 공간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로 기능한다면, 그것이 AI 시대에 가장 강력한 대안이 됩니다." 한국 교회의 교세 감소와 위기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그의 이 발언은 도전이자 희망의 메시지다.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는 지금, 교회가 기술 트렌드를 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공동체로 회복되는 것이 해법이라는 역설적 통찰이다. 게임 중독? 아이들이 마을을 찾아 들어간 것 7년간 300명의 게임 과학고 학생들을 돌본 조 목사는 게임 중독에 대해서도 남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다음 책의 주제이기도 한 이 주제에서 그는 기존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우리가 아이들이 '게임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아이들의 놀이를 빼앗았기 때문에 새로운 놀이로 들어간 것입니다. 아이들은 공동체가 필요하고 마을이 필요했는데, 그 마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게임 속의 마을을 찾아 들어간 것이에요. 우리가 이것을 오해했습니다.“ 게임 속에는 실제로 '마을'의 요소가 있다. 팀원들과 협력하고, 역할을 나누고, 승리와 실패를 함께 겪는다. 아이들이 찾던 것은 게임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관계와 공동체였다는 분석이다. 그가 7년의 현장 경험을 통해 게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게 된 것은, 이후 대안학교 운영과 청소년 상담에 큰 자산이 됐다. 게임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게임의 구조와 아이들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이 경험을 담은 다음 책—게임과 스마트폰, 청소년 문제를 다룬 책—도 현재 집필 중이다. AI시대에 아이들이 잃어버린 마을공동체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조성철 목사 변하는 시대, 변하지 않는 것들 AI 시대에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까. 일론 머스크는 3~5년 안에 현재의 모든 직업에 '파괴'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조 목사는 이 예언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어떤 직업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느냐'에 있다. 그는 이미 이를 자신의 인생에서 경험했다. 37세에 미국 유학을 떠나 42세에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지만, 5년의 경력 단절로 갈 데가 없었다. 결국 찾아간 곳이 게임 과학고등학교였다.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7년을 보냈고, 그 경험이 쌓여 지금의 사역이 됐다. "어떤 자리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능력치입니다. 한 직업 딱 잡으면 평생 가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마치기까지 다섯 개 이상의 직업을 바꾸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직업을 선택하느냐보다, 어떤 직업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잘 산다'의 기준도 그는 새롭게 정의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아니라, '무언가를 살리기 위한 직업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의사는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고, 변호사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직업이라는 원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이 부분이 깨질 것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핫한 직업도 10년 후 현장에 들어갔을 때는 지금과는 다른 현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특정 직업을 찾아주는 것보다, 현재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능력치를 키우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청년들이 직면한 또 다른 위기: 경력 단절의 덫 조 목사는 인터뷰 과정에서 현재 청년 세대가 처한 구조적 위기를 날카롭게 짚었다. AI의 등장으로 화이트칼라 직업이 먼저 흔들리고 있고, 경력직을 요구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반면, 정작 청년들이 경력을 쌓을 현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AI가 블루칼라 일자리를 먼저 빼앗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공장 자동화 같은 것들요. 그런데 실제로는 프로그래머, 회계 업무, 컴퓨터 기반 직업들이 먼저 흔들렸습니다. 기성세대는 이미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지만, 청년들은 경력을 쌓을 현장 자체를 잃어버린 상황입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현실에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스스로 경력을 만들어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대기업 입사를 위한 스펙 쌓기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만의 경력을 창출해낼 수 있는 근본적 역량이다. 이는 결국 그가 책 전체에서 강조하는 '정체성에 기반한 진로관'과 연결된다. 책의 활용: 체크리스트·소그룹 나눔·가족 대화 『AI 시대, 자녀 진로 어떻게 할까?』의 각 챕터 끝에는 부모를 위한 체크리스트와 소그룹 나눔 질문이 수록되어 있다. 조 목사는 이 구성이 개인 독서를 넘어 공동체 안에서 활용되기를 바란다. "체크리스트는 자신을 반성하라는 게 아니라, 방향성을 잡기 위한 도구입니다. 자녀 교육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소그룹 나눔을 통해 서로 발전해 가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한 대형 교회는 이 책을 교재로 활용해 12주 과정을 운영하기로 했다. 50대 이상 장년층을 위한 별도의 소그룹 교재도 현재 개발 중이다. 가장 인상적인 활용 사례 중 하나는 책을 읽은 부모가 자녀에게 선물하며 사과하는 경우다. 책을 읽고 나서 "내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자녀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사과의 말을 전했다는 이야기들이 저자에게 전해졌다. 조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에서는 출간 직후 매일 15분 독서 프로그램에 이 책을 선정했다. 사순절 40일 동안 교인들이 함께 읽는 방식으로 운영했는데, 바쁜 부모들보다 오히려 손주를 어린이집에 보낸 할머니들이 이틀 만에 책을 다 읽었다는 피드백도 들어왔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쉬운 언어로 쓰려 했다는 저자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집필의 어려움: "내용보다 언어의 싸움" 책을 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조 목사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하는 것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언어의 싸움'이었다. "오랫동안 강의해 온 내용들이라 내용 자체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강의에서는 제가 직접 설명하고 소통할 수 있는데, 책에서는 독자가 저를 만나지 않고 글만 접합니다. 어떻게 하면 쉽게 읽힐까, 전문적인 용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는 것—이 작업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이 노력의 결과로,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쉬운 문체 안에 깊이 있는 신학적·심리학적 통찰이 담긴 책이 탄생했다. 인터뷰를 진행한 정윤석 기자는 "글이 정말 쉽다. 중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는 수준인데, 담고 있는 내용은 이 세대에 꼭 필요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향후 계획: 부모 교육 세미나·게임 중독 책·샬롬 조 목사는 앞으로의 사역 방향을 이 책의 연장선 위에서 구상하고 있다. 청소년 사역도 계속하지만, 초점을 부모 교육과 조부모 교육 쪽으로 더 맞출 계획이다. 전국 투어 세미나도 추진 중이다. 방송국 측에서 부모 교육 전국 투어를 함께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 현재 조율 중이다. 목회자이자 상담가이자 교육가이자 미래 연구가—이 모든 역할을 겸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강의는 차별화된 현장성을 가진다. 집필 계획도 풍성하다. 현재 준비 중인 다음 책은 세 방향이다. 첫째는 게임과 스마트폰 중독 문제를 다룬 책이다. 7년간 300명의 게임 과학고 학생들과 함께한 현장 경험이 그 토대다. 둘째는 자녀를 다 키운 중년 부모들을 위한 책, '빈둥지 증후군'과 마음의 회복을 다룬 '샬롬'이다. 셋째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으며 대화할 수 있는 52주 성품 학교 교재다. "하나님께서 제게 다양한 현장과 경험을 주신 것은 이것을 사용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들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으면, 아이들의 진로도 흔들립니다. 부모 교육이 곧 자녀 교육입니다." 위기의 시대가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는 조성철 목사 기자의 시각: 역설이 진실이 되는 시대 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조성철 목사의 '역설적 통찰'이었다. AI 시대를 다루는 책이지만 기술을 논하지 않는다. 직업과 진로를 다루지만 성적 관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AI가 발달할수록 사람과 일하기 싫어 AI를 쓰게 되는 역설 속에서, 그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위기라고 말하는 시대에, 그는 오히려 교회가 AI 시대의 대안이라고 외친다. 마을이 사라진 자리에 교회가 마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 교회 감소를 탄식하는 목소리가 높을 때, 그는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면 오히려 이 시대의 가장 필요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변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변하지 않는 것들이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성품, 관계, 공동체, 하나님 앞에서의 정체성—조 목사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들은 모두 그 '변하지 않는 것들'이다. AI 파도가 무서운 부모들에게, 이 책은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기술이 아닌 신앙으로 알려준다. 조성철 목사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파도의 크기가 즐거움의 크기가 됩니다—서핑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요." AI 파도 앞에서 우리 부모들도, 교회도, 그 서핑을 배울 때다. ▶ 책 소개 ■ 도서명: 『AI 시대, 자녀 진로 어떻게 할까?』 ■ 저자: 조성철 목사 (한우리 기독학교 설립자, 대전 한사랑감리교회 담임) ■ 구성: 크리스천 부모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11가지 이야기 ■ 특징: 각 챕터 말미에 부모 체크리스트·소그룹 나눔 질문 수록 ■ 저자 소개: 미국 HIS 유니버시티 가정사역 박사, 전 한국게임과학고등학교 사감(7년), 하누리 기독학교 설립·운영, 청소년·청년·가정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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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아버지를 거쳐 만난 ‘진짜 아버지’… 오테레사가 전하는 치유와 화해의 대서사시
인간의 존재는 부모 없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든든한 울타리이자 따뜻한 추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지우고 싶은 상처이자 분노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여기, 한반도의 남과 북, 그리고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인생의 절반씩을 살아온 한 여성이 있습니다. 최근 저서 <진짜 아버지>(아르카)를 출간한 박예영 사모(오테레사)는 자신의 50년 세월을 관통하는 네 명의 아버지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에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북한의 ‘아버지 대원수’부터 육신의 아버지, 그리고 영적 아버지를 지나 ‘진짜 아버지’인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그 파란만장한 여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편집자 주] 1. 북한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그리고 첫 번째 ‘아버지’ 박예영 사모는 북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모든 주민이 그러하듯, 그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동으로 주어지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 대원수님’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그분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큰 존재감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집마다 걸린 초상화를 보며 매일 감사의 인사를 올렸죠. 매스컴과 교육을 통해 주입된 그 이름은 제 가슴 깊은 곳에 ‘존경과 흠모’라는 단어로 새겨졌습니다.” 어린 박예영에게 그 아버지는 세상의 전부였고,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리고 박 사모가 그 땅을 떠나기 전까지도 그분은 인생의 처음이자 단 한 분의 아버지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숙명이기도 했습니다. 2. 가난과 폭력의 그늘 속, 미움의 대상이었던 ‘친아버지’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두 번째 아버지는 자신을 무릎에 앉혀 키워준 육신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박 사모가 성장할수록 가장 미운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북한 체제의 모순 속에서 아버지는 술에 의지했고, 술기운은 곧 폭력과 주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엄마의 출신 성분을 탓하셨습니다. 북한에서 신분이 좋지 않다는 것은 평생 출세할 수 없다는 뜻이었고,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큰 한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술이 깨면 엄마를 위해 밥을 짓기도 하는 다정한 분이었지만, 술만 들어가면 돌변하는 모습에 저는 아버지를 원수처럼 미워하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박 사모는 훗날 한국에 와서야 아버지의 뒷모습에 담긴 눈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영하 50도의 혹한이 몰아치는 러시아에서 3년간 노동을 견뎌냈던 아버지 , 게가 상할까 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를 타던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말입니다. “제가 탈북한 후에도 아버지는 딸이 보고 싶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수백 리 길을 걸어 혜산까지 오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진심을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미워하며 집을 뛰쳐나왔고 , 아버지는 제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2008년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가혹한 후회로 남는 대목입니다.” 3. 태국에서 만난 ‘세 번째 아버지’와 거부할 수 없는 울림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오기 전 태국에 머물던 시절, 박 사모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세 번째 아버지를 만납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제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마 북한에서 ‘아버지 대원수님’이라고 불러왔던 습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하나님 아버지는 제가 이전에 알았던 아버지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부를 때마다 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떨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찾기 위해 방황하던 시간 끝에 만난 진짜 창조주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그냥 좀 잘난 줄로만 알고 살았으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죄인’인지를 깨달으며 참회와 감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4. 오대원 목사와의 만남, 그리고 ‘오테레사’라는 새 삶 한국에 정착한 박 사모에게 하나님은 네 번째 아버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미국에서 온 데이비드 로스(David E. Ross) 선교사, 한국 이름으로 오대원 목사입니다. “성령께서 ‘오 목사님은 조선의 아버지다’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마’ 하시며 먼저 손을 내밀어주셨죠. 그것은 저를 새로운 딸로 삼아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오 목사가 지어준 새 이름은 ‘테레사’였습니다. 박 사모는 오 목사의 성을 따 ‘오테레사’라는 이름으로 10년 넘게 중보기도 사역을 하며 살았습니다. 실제로 오 목사는 박 사모의 결혼식에서 친아버지를 대신해 그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입장했습니다. 그 손은 단순한 의전이 아닌, 사랑과 축복의 손이었으며 또 다른 삶으로의 연결이었습니다. 5. 이스라엘에서의 충격적 고백: “주님, 왜 우리가 사과해야 합니까?” 박 사모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08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세계 기도집회 ‘컨버케이션’이었습니다. 160여 개국에서 모인 2천 명의 그리스도인 앞에서 그는 북한 대표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강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인 목사 앞에 가서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해서, 북한이 일본을 미워한 죄, 일본인을 납치한 죄를 대신하여 용서를 구하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순간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놀란 일본인 목사님도 함께 무릎을 꿇고 서로 용서를 빌었죠.” 다음 날에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로 세계 평화를 위협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또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뒤늦게 억울함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북한 주민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전 세계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며 울었습니다. 그때 들려온 주님의 음성은 명료했습니다. “나는 죄가 있어서 세상에 내려갔니?” 아무 죄 없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박 사모는 다시 한번 주저앉아 엉엉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북한을 사용하시기 위해 먼저 겸손하게 만드시려고 그를 무릎 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크신 계획 앞에서 그는 자신이 그저 작은 도구였음을 깨닫고 무한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6. ‘악의 축’에서 ‘복의 축’으로… 응답받은 기도 박 사모는 북한을 ‘악의 축’이라 부르는 전 세계인의 인식을 ‘복의 축’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집회에서 한 미국인 여성 선교사가 다가와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불렀던 것을 용서해달라”며 눈물로 사과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 선교사에게 박 사모의 기도 제목을 전해주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11일, 1988년부터 이어져 온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이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순간 저는 확신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북한도, 일본도, 미국도 모두 사랑하시는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사실을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미 용서와 화해의 선포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7. 남북통일은 이미 우리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 사모의 곁에는 17년째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 김승근 목사가 있습니다. 숙대 앞에서 ‘킹스컵밥’을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숙대디’라고 불리는 남편은 박 사모에게 때로는 남편으로, 때로는 아빠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부어주었습니다. “저희는 ‘통일 가정’입니다. 남한 출신 남편과 북한 출신 제가 만나 신학적 교리로 다툰 적 없이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으니, 이미 우리 가정에는 남북통일이 이루어진 셈이죠.” 그는 이제 고향 김책으로 향할 날을 꿈꿉니다. 가서 아직 고향에 남아있을 동생을 찾고,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묘소를 돌보며 친척들에게 ‘진짜 아버지’를 소개해 주고 싶어 합니다. 또한 고향 아이들이 원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밥을 해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오늘도 기도합니다. 박예영 사모는 인터뷰를 마치며 독자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아버지가 있는데도 아버지를 모르는 것은 스스로 ‘고아’가 되기로 결정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탈북자라 불러도, 저의 분명한 정체성은 ‘하나님의 딸’이라는 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를 만나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회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고난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 온 그의 삶은, 이제 미움을 넘어 사랑으로, 분단을 넘어 통일로 나아가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박예영(오테레사) 1976년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태어나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7월에 한국에 왔다. ‘고난의 행군’ 때문에, 그저 생존을 위해 육신의 아버지와 김일성이라는 아버지 둘을 두고 북한을 떠난다고 생각했으나, 2차에 걸친 탈북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인생과 이 민족의 진짜 아버지이심을 뼈저리게 깨닫고 만다. 남한에 와서 신학을 하고 태백산에 올라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운동까지 펼치면서 “통일코리아는 뉴코리아(New Korea)다”라는 비전을 받았고, ‘통일비전캠프’ 등의 통일운동과 기도 사역에 동참하면서 ‘통일소녀’와 ‘부흥소녀’라는 애칭을 얻었다. 예수전도단 DTS 훈련 과정에서 오대원(David O Ross) 목사를 만나 영적 수양딸이 되어 얻은 이름 ‘오테레사’로 한동안 알려졌고, 2009년 남에서 만난 탈북민 정착도우미 김승근과 결혼할 때 저자의 손을 잡고 입장해준 이는 당연히 오대원 목사였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국립통일교육원 교육위원, 코스타 강사 등을 역임했다. 북한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통일운동을 펼쳐오는 가운데 ‘탈북자’ 대신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을 뜻하는 ‘북향민’ 용어가 널리 쓰이도록 앞장서기도 했다. 현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청년미래위원장,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 (사)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평통연대) 전문위원, CBMC 뉴코리아지회 회장 등으로 섬기고 있다. 2021년 민간통일운동 유공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으며, 202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기념 평화 챌린지에 부부가 출연한 영상을 올려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감리교신학대학원 신학석사,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 Wesley Theological Seminary(미국 워싱턴DC) 목회학박사이며,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정치법학과 박사과정 중이다. 어려운 북향민들의 일자리 창출을 돕기도 하며, 통일가정을 이룬 남편과 함께 앞선 통일을 살아가고 있다. 이메일 payy2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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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 “선교는 결국 사람이 남는다” “선교는 사람이다.” 이현국 목사는 이 말을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내뱉었다. ▲선교 사역의 핵심은 사람이라고 밝힌 이현국 목사(운화교회) 그의 목소리에는 30여 년의 목회와 선교 여정이 응축된 단단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교회를 세우는 것도,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 남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건물이 크고, 프로그램이 많고, 헌금이 많아도 제자가 세워지지 않으면 그건 잠깐의 열매일 뿐이죠.” 그는 “선교란 사람을 세우는 일이며,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그가 쓴 책 『사람을 세우는 선교』(쿰란출판사)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책 속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도 결국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 이현국 목사는 경기도 성남의 온화교회 담임목사로, 1990년대 초부터 인도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선교 여정은 ‘성공 스토리’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그 안에는 ‘실패’와 ‘절망’, 그리고 ‘회복’을 통한 진정한 선교의 본질 발견이 담겨 있다. ■ “열정과 재정으로 시작했지만… 실패를 통해 배웠다” 그의 인도 선교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같은 노회의 한 목사로부터 인도 마니푸르 지역의 소식을 들었다. “그곳 인구의 4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라 들었어요. 그래서 그곳을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세우면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등으로 복음이 확산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는 곧바로 한 인도인 신학생(D)을 소개받았다. 그는 신학교 건립을 요청했고, 온화교회는 열정적으로 응답했다. “기도하고 헌금하면 하나님이 하시겠지요. 그렇게만 믿었습니다.” 교회는 매월 50만 원으로 시작해 점차 후원 규모를 늘렸다. 2008년 이후에는 1억 원 가까이 지원하기도 했다. 신학교 건물 건축, 운영비, 교회당 건축까지 합쳐 약 1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그 재정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보니 현지인 리더의 사생활 문제, 재정 부정, 관리 실패가 연이어 드러났습니다. 결국 신학교는 무너졌죠.” 그는 “그때 선교의 본질을 몰랐다”며 회고했다. “열정만 있었지, 선교가 뭔지 몰랐어요. 사람을 세우지 않고 돈만 보냈죠. 그게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 “선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현국 목사는 그 실패를 통해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는 겁니다.” 그는 한동안 인도 사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이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선교의 본질을 다시 성경에서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세웠지요. 그게 바로 선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제자 삼는 제자’라는 원리를 붙잡았다. 그제야 그가 말하는 ‘사람을 세우는 선교’의 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피터 티우마이와의 만남 — “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다” 그런 전환의 시기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 그가 바로 인도 나갈랜드 출신의 피터 티우마이(Peter Thiumai) 교수였다. ▲이현국 목사는 선교의 동역자 피터 티우마이(Peter Thiumai) 교수를 통해 선교자의 사람을 세우는 일을 사역하고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40대 젊은 교수였습니다. 신앙이 진실하고, 제자 양육에 열정이 있었어요.” 피터 교수는 기존 신학교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자, 디마푸르 지역의 작은 월세집에서 학생들과 함께 합숙하며 복음 전도를 시작했다. 이 목사는 그에게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는 대신, 단 하나의 원칙을 제시했다. “먼저 교회를 개척하고, 제자를 세워 자립하시오.” 그것이 멘토링의 출발점이었다. 피터는 곧 집을 떠나 한 교단의 수양관을 빌려 신학교를 열었고, 교회를 개척했다. 몇 년 후 그 교회는 스스로 자립했다. “그는 매년 충실하게 보고서를 보내왔고, 사역의 결실이 보였어요. 저는 매년 그를 만나 함께 멘토링을 했습니다.” ■ “제자를 세우는 신학교, 1,000개의 교회를 낳다” 10년이 지난 지금, 피터 티우마이의 신학교는 인도 동북부 6개 지역에 ‘제자훈련센터(DTC)’를 운영하며 1,000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했다. “처음엔 믿기 어려웠죠. 하지만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다시 제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더군요. 바로 이것이 ‘제자 삼는 제자’의 선교였습니다.” 그는 “이 신학교는 단순한 학문 기관이 아니라, ‘제자를 세우는 제자를 양성하는 학교’”라며 “피터의 신실함과 헌신은 ‘사람 중심 선교’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 저서 『사람을 세우는 선교』 ― 선교의 본질로 돌아가다 ▲현지인 한 사람을 멘토링하여 10년만에 천교회를 세운 이야기를 수록한 책 이현국 목사는 이러한 여정과 깨달음을 담아 책 『사람을 세우는 선교』(쿰란출판사)를 펴냈다. 그는 책에서 선교의 실패와 성공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본질을 가르치십니다. 건물을 세우는 선교에서 사람을 세우는 선교로 돌아올 때 비로소 복음의 생명이 살아납니다.” 책은 4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1장은 “멘토링을 통한 제자 양육”을, 2장은 “피터 선교사의 제자 세우기”, 3장은 “제자의 제자가 세운 교회들”, 4장은 “신학교와 훈련센터 운영의 실제”를 다룬다. 그는 각 장에서 ‘사람 중심의 선교’가 어떻게 교회 자립과 선교 확장을 이끌어냈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준다. 책의 부제처럼, “선교는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사람을 통해 진행되며, 결국 사람이 남는다.” ■ “실패의 뿌리는 무지였다” 이 목사는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때 저는 선교를 잘 몰랐습니다. 후원금을 보내면, 현지인이 알아서 잘 하겠지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선교가 아니라 송금이었습니다.” 그는 “선교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라며 “감동으로 시작해도 체계적 훈련과 평가가 없다면 오래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선교사도, 현지인도, 후원 교회도 모두 ‘사람 세우기’ 원리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면 재정은 따라옵니다. 반대로 돈으로 사람을 세우려 하면, 결국 둘 다 잃습니다.” 그는 자립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선교의 목적은 현지의 자립입니다. 하지만 자립은 건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제자 삼는 제자가 세워질 때 자연스럽게 자립이 옵니다.” 그는 현지 교회들이 스스로 땅과 물질을 헌신하며 교회를 세우는 모습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지 성도들이 제자로 성장하면 그들은 주체가 됩니다. 스스로 목회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죠. 그게 진짜 선교입니다.” ■ “한국 교회 선교, 이제 바뀌어야 한다” 그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선교 패러다임에도 경종을 울린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보내는 선교’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우는 선교’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는 ‘후원금 중심 구조’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교회가 돈만 보내면 선교사가 알아서 할 것이라 믿는 구조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그 사역은 반드시 멈춥니다.” 그는 선교사를 의료인 훈련 과정에 비유했다. “의사는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야 전문의가 되잖아요.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훈련, 멘토링, 실제 사역 경험을 거쳐야 진짜 현장에서 설 수 있습니다.” ▲재정과 선물 중심에서 현지인 사람을 먼저 세우는 것을 우선하는 선교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이현국 목사 “선교사를 세우는 목회자, 교회를 세우는 선교사” 이것은 이 목사의 선교의 경험에서 오는 모토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넘어서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목사로 2~3년 함께 사역하며 전도와 제자 양육, 지역 섬김을 실제로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 개척 과정을 지켜보며 훈련받으면, 선교지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온화교회가 실제로 그렇게 해왔음을 밝혔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들 중 몇 분은 그렇게 훈련받고 국내 지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지금은 자립해서 잘하고 있죠. 저는 이걸 ‘국내 선교의 모델’이라 부릅니다.” ■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선교하지 말라” 이현국 목사는 선교의 시작점은 언제나 ‘사람’임을 강조한다. “돈이 있다고 바로 시작하면 안 됩니다. 먼저 준비된 사람을 찾으세요. 제자가 된 사람, 신실한 사람과 함께 하세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을 세우면 나중에 두 배의 고통이 옵니다. 차라리 시간을 두고 기다리십시오. 준비된 한 사람이 천 명의 미숙한 사역자보다 낫습니다.” ■ “인도는 지금,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현국 목사는 여전히 인도를 향한 열정을 멈추지 않는다. “인도는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중 기독교인은 3퍼센트도 안 돼요.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영혼이 너무 많습니다.” 그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했다. “거리마다, 시장마다, 힌두 사원 주변마다 수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일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재정보다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우면 재정은 따라옵니다.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리 건물을 세워도 금세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핵심은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인도의 미종족전도의 현황 ■ 실패에서 성공으로,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이현국 목사의 선교 이야기는 ‘실패에서 출발한 성공’이다. 그는 실패를 통해 진리를 배웠고, 진리를 통해 사람을 세웠으며, 그 사람이 다시 사람을 세우는 순환을 만들어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선교는 제자 삼는 제자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불타는 확신이 있었다. “교회가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소 지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끝까지 사람을 세우는 선교를 하겠습니다. 그게 복음의 길이니까요.” <책 정보> 『사람을 세우는 선교』 | 저자: 이현국 | 출판: 쿰란출판사 | “선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제자 삼는 제자를 세워라.” 실패에서 시작된 참된 선교의 길, 그리고 ‘사람 중심 복음’의 회복. 목회자와 선교사 모두에게 길잡이가 되는 실제적 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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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화로 싸우는 독립군”
▲문화를 통한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장이레 감독 이름에 담긴 사명, 신앙으로 열리다 장이레 감독의 본명은 장석봉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은 ‘장이레’다. 이 별명은 단순한 예명이 아니었다. 청년 시절 그를 만난 고(故) 하용조 목사가 “장은 짱이다”라는 유쾌한 격려와 함께 ‘이레’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나님의 때”를 뜻하는 히브리어적 어감을 품은 이 이름은 장 감독의 이후 여정과 사명을 예고하는 듯했다. 불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우연히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0살 무렵 처음 발을 들인 교회는 그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어린 장석봉에게 신앙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지만, 이후 연예계 아역 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문화예술의 현장을 경험했고, 신앙은 그의 내면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깊이는 30대 초반 한차례의 극적인 체험을 통해 열리게 된다. 그는 당시 폐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밥 잘 먹어야지 무슨 금식이냐”라는 자신의 생각을 뒤엎고, 한 목사의 권유로 10일간의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금식 중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봉사와 설거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10일이 지나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어떻게 이렇게 폐가 깨끗할 수 있느냐”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폐에 남아 있던 병의 흔적은 미미하게 사라져 있었다. 장 감독은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가슴으로 신뢰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신앙은 그에게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실체가 되었다. 우연에서 시작된 역사 탐험 이후 그의 삶은 점차 “복음을 문화로 전하는 길”로 나아갔다. 요한계시록을 주제로 한 뮤지컬 제작, CGN TV 시절 ‘꿈꾸는 요셉’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예술로 구현하는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는 6·25 전쟁 당시 ‘춘천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춘천대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춘천역 앞에서 열린 승전기념 행사를 마주친 것이 시작이었다. 민·관·군·경이 하나 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는 이야기는 처음엔 그에게 과장된 전설처럼 들렸다. 그는 “이게 과연 진짜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고, 오히려 그 의심이 발걸음을 역사 속으로 깊이 이끌었다. 자료를 뒤지고 현장을 찾으며 만난 것은 놀라운 사실의 연속이었다. 공장 여공들이 주먹밥을 쥐고, 학도병과 대한청년들이 폭탄을 나르며, 민초들이 단 한 시간을 버텨 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던 실체적 기록들이 쏟아졌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라는 확신이 생긴 그는 3일간 금식 기도를 드린 끝에,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이 역사를 먼저 증언하기로 결심했다. ▲2024년에 개봉되었던 <춘천대첩 72시간>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터리 「춘천대첩」의 탄생 그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쏟아부은 시간은 6년. 처음엔 영화 「작전명 폭풍」을 구상했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계획’처럼 다큐·영화·뮤지컬 세 가지 형식으로 역사적 진실을 전하겠다는 비전을 품게 됐다. 그는 100명이 넘는 증언자를 만나며 사실 고증을 거듭했고, 국회·CGV·롯데시네마 등에서 시사회를 열며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완성까지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계엄 선포로 인해 극장 상영이 갑자기 중단됐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려는 진보 진영의 조직적 방해가 이어졌다. 동시에 보수 진영의 무관심은 그를 더욱 깊은 실망에 빠뜨렸다. 춘천시의 지원도 끝내 받지 못한 그는 결국 “집을 팔았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좌우 진영 모두에게 외면받았지만, 그는 “나는 좌우를 떠나 사실을 밝히려 한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그의 열망은 신앙적 확신과 맞닿아 있었다. “장이레 감독이 역사와 문화에 천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력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문화 속에 사상을 스며들게 한다”고 경고한다.” 문화는 곧 전쟁터 장이레 감독이 역사와 문화에 천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력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문화 속에 사상을 스며들게 한다”고 경고한다. 히틀러, 김일성, 소련이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온 역사를 예로 들며, “우리는 너무 모른다. 문화가 곧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춘천대첩의 의미는 단순히 과거의 한 전투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전, 민초들이 보여준 결집과 희생은 대한민국 건국의 분수령이었다. “역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그는 춘천대첩이 낙동강 방어선과 UN군의 개입,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존속을 가능케 한 결정적 사건임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의 시각에서, 그날 나라를 지킨 진정한 영웅은 위정자가 아니라 민초들이었다. ▲역사적 인식은 물론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르게 세워야 국가의 미래가 밝다고 말하는 장이레 감독 진보의 공격, 보수의 안일 하지만 그는 좌우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진보 진영은 그의 작업을 방해하거나 왜곡하려 했고, 보수 진영 역시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 “우리 진영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 진보는 (자신의 입맛에 낮게) 조금만 고치라며 미혹한다”는 그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정작 문화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진보 진영의 치밀한 문화 전략에 밀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겉으로는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공산주의적 사고가 깊이 침투했다”고 진단한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거짓과 카르텔적 구조, 그리고 교회마저도 세속적 권력 다툼에 휩쓸린 현실을 그는 성경적 관점에서 통렬히 비판했다. 장 감독은 “공산주의의 첫 번째 작전은 거짓말”이라며, 진영 논리에 갇혀 스스로를 속이는 시대를 향해 “회개와 고백 없이는 진정한 자유도 없다”고 경고했다. 다큐에서 영화, 그리고 뮤지컬로 「춘천대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장 감독은 현재 영화 「작전명 폭풍」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이 6·25 남침 작전명을 ‘폭풍’으로 명명했던 것에서 따온 이 제목은, 그가 3일 금식기도 중에 받은 영감을 담고 있다. 그는 홍천전투까지 포함해 “한국전쟁의 전모”를 영화로 완결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뮤지컬 제작을 통해 젊은 세대가 역사적 진실을 더 깊이 체험하도록 하는 꿈도 품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제작비 조달을 위해 국내외 투자자를 찾고 있지만, 그는 “나는 월세에 살며 집을 팔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열정은 단순히 흥행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는 그의 신앙적 사명감이 이 모든 노력을 지탱한다. ▲춘천대첩을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장 감독은 재정적인 투자가 필요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고 밝혔다. 신앙이 삶을 이끌다 장이레 감독에게 작품 활동은 곧 신앙의 연장이다. 그는 “예수님이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믿을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를 발견하며, 이를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뿌리로 본다. 정치적 좌우를 넘어, 인간의 죄성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복음이 단순한 종교적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역사를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힘임을 믿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다큐나 공연을 넘어, ‘문화 독립 운동’이라는 이름의 영적 전쟁으로 자리 잡는다. 장 감독이 말하는 “문화 독립군”이란 표현에는, 복음을 드러내는 문화가 곧 시대와 사상을 변혁하는 힘이라는 신념이 담겨 있다. “문화는 전쟁터다. 우리는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민초들이 나라를 지켰다” – 후대를 향한 메시지 그가 「춘천대첩」을 통해 가장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나라를 지킨 것은 위정자가 아니라 평범한 민초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민초들이야말로 진정한 주권자이며,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자유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매년 이들을 위한 진정한 예배와 감사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 감독은 이 메시지를 단순한 과거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젊은 세대가 직접 느끼고 고민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는 학교와 교회에서 자비를 들여 상영회를 열며 학생들과 교인들이 “공산주의의 위협과 자유의 가치를 뼈아프게 깨닫는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역사를 잊으면 미래는 없다”는 그의 호소는 단순한 경고를 넘어, 다음 세대가 스스로의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는 간절한 부탁이다. 장이레 감독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이자 신앙의 증언이다. 어린 시절 불교 가정에서 출발해, 금식 기도를 통해 신앙의 깊이에 들어서고, 역사 속 숨겨진 진실을 문화로 드러내기까지—그의 여정은 단순히 한 감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도전이자 초대다. ▲ 정치적 좌우를 넘어, 인간의 죄성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 장 이레 감독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말한다. “문화는 전쟁터다. 우리는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술/음악/영화/연극/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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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힘들지?" 그 물음에 다윗이 답한다
영화 <다윗>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양들을 돌보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집안의 막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아이.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년에게 눈길을 멈추셨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영웅의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홀로 양을 지키던 그 광야의 시간 속에서. 뮤지컬 애니메이션 <다윗>은 그 오래된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펼쳐낸다. 단순한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두려움과 기다림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한 인간의 성장기로.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었다" 2025년12월, 미국 극장가에 조용하지만 강렬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필 커닝햄(Phil Cunningham)과 브렌트 도스(Brent Dawes)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가 개봉 첫 주말 약2,2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썼다. 역대 종교 애니메이션 흥행1위로 불리던<이집트 왕자>의 오프닝 스코어를 가뿐히 넘어섰고, 최근 국내에서도131만 관객을 동원한<킹 오브 킹스>의 글로벌 흥행 실적마저 뛰어넘었다. 그러나 두 감독이 처음부터 노린 것은 흥행 수치가 아니었다. 그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한 문장이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거인을 쓰러뜨리는 다윗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어떻게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영화는 사무엘상·하에 기록된 다윗의 생애 중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순간부터 유다의 왕으로 세워지기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전반부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등 익숙한 성경 장면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후반부는 골리앗을 이긴 뒤 오히려 사울에게 쫓기며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다윗의 기나긴 기다림을 깊이 있게 그린다. 화려한 승리보다 보이지 않는 시간에 더 집중하는 이 선택이, 이 영화를 다른 성경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다. "우리는 거인을 쓰러뜨리는 다윗이 아니라,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본 다윗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필 커닝햄 감독 잠베지 강에서 시작된 30년의 꿈 이 영화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감독 본인들의30년 광야 여정이다. 필 커닝햄 감독은 Animation Scoop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출발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 여정은30년 전, 잠베지 강을 따라 카누를 타고 내려가던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거대한 천둥폭풍과 돌진하는 사자, 강둑 위에 피어난 작은 꽃,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독수리를 바라보며 저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읽고 있던 책이 바로 다윗의 이야기였다. 모험과 감동, 음악과 우정, 섬세한 감정과 진실한 삶이 담긴 그 서사 속에서, 커닝햄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창조 세계에서 느꼈던 그 마음을 다윗의 삶에서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30년. 두 감독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를 만들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긴 여정을 거쳤고, 마침내 평생의 꿈을 완성했다. 브렌트 도스 감독은 이 제작 과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다윗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제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특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 세상에 나오기를 원하는 이야기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저 이 이야기를 맡은 청지기로서, 그 본연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귀 기울이고 길을 여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영화 속 다윗의30년 광야 여정과 감독들의30년 제작 여정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영화가 보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이 빚어낸 신앙 간증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노래 "Tapestry" — 믿음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낸 장면 중 하나는 거대한 전투도, 골리앗의 최후도 아니다. 어린 다윗에게 어머니가 불러주는 노래 "Tapestry(태피스트리)"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실타래를 보렴, 엉키고 찢겨 있구나. 색들은 뒤섞여 있고, 지치고 낡아 보이지. 하지만 네가 보는 뒷면만으로 직공(하나님)을 판단하지 마라, 뒷면은 장차 나타날 영광의 그림자일 뿐이란다." 그리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노래한다. "그분은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짜고 계셔, 우리의 어둠을 영광스러운 빛으로 바꾸시며.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하고 영원하며 신성한 걸작품이 된단다." 커닝햄 감독은 이 캐릭터가 자신의 실제 어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성경에서 다윗이 내 어머니의 하나님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적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어머니들이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믿음의 유산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영화는 골리앗 앞에서 다윗이 외친 고백 "너는 칼과 창으로 나아오거니와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삼상17:45)"가 전장에서 갑자기 생겨난 용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광야의 별빛 아래서, 오랜 세월 신앙의 씨앗이 자라 맺은 열매였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노래로 가르쳐준다.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한 걸작품이 된단다" — 영화<다윗> 중 어머니의 노래Tapestry 광야의 시간 — "왜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영화가 가장 집중하는 것은 골리앗을 이긴 이후의 다윗이다. 승리 다음에 찾아온 것은 영광이 아니라 도망이었고, 왕좌가 아니라 광야였다. 사울에게 쫓기며,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시간들. 이 부분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가?" 영화는 이 물음에 설교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다윗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게 한다.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의 억울함은 노예로 팔렸던 요셉과 닮아 있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모세와도 이어진다. 성경 속 위대한 인물들이 모두 광야를 먼저 통과했다는 것, 그 광야가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준비 시간이었다는 것을 영화는 조용하고 강하게 전한다. 커닝햄 감독은 인터뷰를 이 말로 마무리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보고 이해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큽니다." 오늘 광야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설교 대신 이야기로 그 진리를 건네준다. "단순한 영화 그 이상" — 관객들의 반응 미국 개봉 직후 IMDb에는 이런 관람평들이 쏟아졌다. "드디어 흥행에 타협하지 않는 성경 대작이 나왔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요. 사무엘서에 놀라울 정도로 충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것입니다. 디즈니급의 강력한 애니메이션이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 어른 모두에게 영감을 줍니다." "단순한 영화 그 이상입니다. 사역을 위한 강력한 도구예요. 예배자로서의 다윗의 마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담아냈습니다." 리뷰에서는 어머니의 노래 "Tapestry"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다윗의 어머니가 신앙으로 빚어낸 삶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들에게 당장의 환경이나 형편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더 크고 온전한 계획을 신뢰하도록 가르칩니다. 그 신앙의 지혜와 가르침은 깊은 울림과 은혜를 전해 줍니다." 이 작품은 뮤지컬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아홉 곡의 노래가 삽입돼 극의 흐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엄청난 스케일과 속도, 웅장하고 압도적인 사운드는 기존 기독교 영화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는 수준의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국내 자막 감수는 최성일 명예교수(한신대학교 신학과)가 맡아 성경적 해석과 신학적 검증을 거쳤다. 배급사 <길갈> 대표 김미영— "광야의 시간을 지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국내 홍보를 담당한 기독교 영화 전문 배급사 <길갈>의 김미영 대표는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영웅의 승리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광야의 시간을 지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한 사람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왜 나만 힘들지?라는 질문에 대한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이어 이 영화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다윗의 이야기는 특별한 영웅의 전설이 아닙니다. 평범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가정과 교회, 다음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국내 개봉을 위해 길갈은 이미 5월부터 6월까지 전국30개 지역에서 목회자 부부 약 4,500명을 초청하는 대규모 시사회를 준비하고 있다. 교회 스티커 이벤트, 단체관람 할인, 수천 개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검증 과정도 함께 추진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수입·배급을 맡고 길갈이 홍보를 담당하는 이 작품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다윗의 이야기는 영웅의 전설이 아닙니다. 평범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 김미영 <길갈> 대표 비기독교인도 부담 없이— 오히려 더 감동받을 수 있는 이유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임에도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종교적 거리감 없이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대놓고 복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다윗의 삶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인생의 의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드는 구조를 택했다. 다윗은 예수님과 달리 세계사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시편의 저자, 골리앗을 이긴 소년 – 어느 문화권에서도 이미 친숙한 이름이다. 여기에 디즈니풍의 친숙한 연출, 풍성한 볼거리와 들을거리가 더해지니 종교적 배경이 없는 관객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영화 속 메시지는 또한 기독교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에서 왜 나만 이렇게 힘든가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시간, 억울하게 쫓기는 시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의 시간 — 다윗의 광야는 바로 그 순간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기독교인에게는 한 인물의 성장 이야기와 리더십 서사로,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적 도전과 깊은 위로로 각각 다르게, 그러나 똑같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번역과 내용 검수에 참여한 목회자들도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 영화는 다윗을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평범한 소년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내용상 큰 문제가 없고, 번역도 잘 됐다. 교회가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모범적인 작품이라고 본다." "아이들에게는 믿음의 용기를, 청년과 어른들에게는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3대가 함께 앉아야 할 영화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세대를 초월해 온 가족이 함께 앉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전반부의 모험과 액션, 웅장한 음악에 눈을 반짝일 것이다. 청소년들은 왜 나만 힘들지라고 묻는 다윗의 방황과 성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와 조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믿음을 어떻게 심어줄 것인가를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길 것이다. 영화는 특히 오늘날의 교육 문제를 예리하게 건드린다. 부모가 자신의 욕심을 자녀에게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너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진정한 양육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성취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의미를 심어주는 것— 이는 기독교 가정뿐 아니라 어떤 가정에서도 깊이 공명할 메시지다. 이 작품은3대가 함께 극장 의자에 앉아야 할 영화다. 할머니가 손자의 손을 잡고, 부모가 자녀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청년이 홀로 앉아 자신의 광야를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이 영화는 각자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건네줄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 영화<다윗>의 핵심 메시지 광야에서 빚어진 이야기가 광야를 걷는 이들에게 30년 전 잠베지 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한 청년의 소망이 마침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3,000년 전 유다 광야를 홀로 걷던 양치기 소년의 노래가 2026년 서울의 극장 안에 울려 퍼진다. 왜 나만 힘들지. 왜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이 물음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영화 <다윗>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를 말한다.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하고 영원한 걸작품이 된다고. 광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보고 이해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다고. 영화 <다윗>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배급사 <길갈>은 개봉에 앞서 5월부터 6월까지 전국 30개 지역에서 목회자 시사회를 진행하며 단체 관람도 적극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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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아멘 요즘 대심방 기간이다 몇해 전까지 함께 심방받았던 어느 젊은 집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가서 집이 멀어져 가까운 교회로 옮긴 집사님은 그래도 여동생이 우리 교회에 다닌다고 하며 이광재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듣는 주일을 기쁘게 기다린다는 동생의 말을 전하며 그래서 본인도 영상으로 보게되었는데 너무 감동하고 그 후로 계속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요즘도 멀리서 오는 새신자들이 있다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 물어보면 영상으로 본 설교말씀이 너무 와 닿아서 오게 되었다는 대답이다 세상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다 했던가? 목사님은 떠남을 의식하시며 말씀의 사과 나무를 설교 때마다 교회 곳곳에 심고 계신다 당신이 없는 자리에 믿음으로 우리가 반듯하게 서기를 원하는듯 용서가 실력이 되는 교회를 지향하는 2026년 표어를 "사랑과 용서로 새로워지는 교회" 로 정하고 1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는 교회 2 용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교회 3 사랑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 4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 5 사랑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교회 그리스도의 본질인 사랑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목사님의 의지가 나타나는 표어다 도대체 목사님이 떠난 후에 동숭교회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이렇게까지 ᆢ ●°°◇□ 그동안 우리 행태를 지켜보니 당신이 떠난 후에 교회모습이 불보듯 뻔할거라는 것을 생각해서 일까 새로 오는 어떤 목사님이라도 판단하면서 마치 좌파 우파 갈리는 정치판처럼 흔들고 흔들리며 몸살을 앓을 게 보이기에 더이상 성도들간에 다툼이나 분열을 그치게 하고 성도들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려는 목자의 사명을 이어가는 거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과연 우리가 변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 정의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맞다고 하면 거슬러서 아니라고 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의견이 센사람이 리더격이 되면 거기에 얹혀서 한 편이 되기도 하는 거 그렇게 그렇게 세력이 되는 거 같다 십여년 전 쯤인가? 내가 운전하는 차에 권사 한사람이 타고 있었다 남편이 장로인 그녀는 그 당시 목사님을 비난하면서 이런 일들이 마음에 안든다며 열변을 토하다가 다른 권사들한테 전화를 해서 공론화 시키겠다고 한다 듣고 있는 내가 볼 때에 별일도 아닌데 그래서 한마디 하게 되었다 권사님 집에 기도제목 없어요? 나를 쳐다보더니 응, 아이들 결혼문제 그리고 쏱아져 나오는 기도할 문제들 그문제들 기도나 하세요~ 목사님 어쩔 생각말고 ~ 권사님댁 기도받으실 하나님이 목사님 해치는 계획을 하는 사람 기도를 어떻게 받으실까요 ~ 그 후에 그문제는 더이상 언급이 없었다 그 후에 그권사 조용하게 살았냐고? 아니다 별거아닌 문제에 바람을 불어넣어 문제거리를 양산하는 거 보고 참 참 했다 그래도 은혜받고 잘살고 있냐고? 그게 은혜인가? 어쩌면 은혜일지 모르겠다 더이상 나설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린거 지금은 그림자처럼 살고 있다 °■◇°○● 이십여년전 진전도사 라는 분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진전도사가 동숭교회에 맞지않는다고 생각한 일부 교인들에 의해 떠나게 된거다 그런데 그의 고난은 동숭교회를 떠난데서 그치지않았다 그후에 부산의 모교회에서 시무를하게 되었는데 몇몇 발빠른 교인들이 부산의 진전도사가 있는 교회를 찾아내어 그 교회 성도들에게 연락해서는 진전도사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하며 악성 루머를 퍼뜨려 그 교회마져 그만두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로 진전도사는 지방의 어느 이름모를 교회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인간이 어디까지 악할 수 있는지 한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이런사람들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자신이 상처받고 살았다고 생각한다는 거 자신의 말한마디에 무리를 짓고 세력이 되어 한사람의 인생을 가족과 헤어지게 만들고 떨어뜨리고 무너지게 한 것은 잊어버린다는 거다 이웃이 그런 생산적이지 못한 일을 만들 때 말려야 하는 거다 힘을 실어 세력이 되어주면 안되는 거 그런 사람 옆에 있어주면서 머리수 채워주면 공범이 되는거다 동조하지 않았어요 그냥 있기 뭐해서 고개만 끄덕거렸을 뿐예요~ 나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어요 옆에서 웃어주기만 했어요~ 비난하는 사람 옆에 있었다면 그의 테두리를 넓혀 세력이 되어준거다 지각 있는 누군가가 처음에 끊어준다면 가라앉고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을거다 어떻게 이런 말들을 부끄러움 없이 할까 목사님 머리 가운데 가르마 있는 거도 보기 싫었고 새벽기도 설교 후 강대상 아래서 기도하는 모습도 싫고 마침기도 길게 하는 것도 마땅치 않고 성도들 일하는데 찾아와서 인사하는 것도 싫고 인사 안하고그냥 지나가는 건 더 싫고 .... ◇°■○■ 목사님이 정말 할 말이 없을까? 어느 설교 때인가 지나가는 듯이 그냥 지나가듯이 "목사가 자기 말을 하면 교인들이 서로 다칩니다" 한 것 같다 말을 하자면 할 말이 얼마나 많으실까 자기 변명 한마디 안하고 소설처럼 떠도는 소문들을 그저 하늘에맡기고 묵묵히 있다는 거 그런 애먼소리들 들으면 분당의 이찬수목사님도 난리를 칠거다 착하다 소문난 유기성목사님도 참지 않을 거 같다 목사님이 예배마치고 식당 앞에서 줄 서 있으면 불편해 하는 성도들이 있고 식당 한 쪽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니 왜 거기서 밥을 먹냐고 ᆢ 눈에 가시속눈썹을 붙이고 사는 거 같다 왜 그렇게 거슬리게 보는지 그런 일들이 있은 후 한동안은 목사님은 이른 시간에 오시는 주일에 거의 종일 굶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정말 숨이 막힐지경이다 목사님을 떠나서 한사람의 최소한 기본권도 지켜지지 않는 이 현실이 뭔가? 사랑? 거기까지 안가도 좋다 이렇게 이광재목사님을 보내고 어떤 누구 목사님을 만나서 이 후회를 삭힐 수 있을까 단아한 모습 보기 좋은 태도를 갖추고 오신 목사님은 얼굴살이 빠져서 불과 2~3년만에 모습이 변해버린 것을 보면서 우린 무슨 짓을 했는지 ᆢ ᆢ 지금 목사님은 예배 때마다 자신이 떠날 교회 성도들을 향한 마치 유언같은 한마디 한마디 설교말씀은 소리가 보이는 거라면 핏빛으로 물들어 있을거 같다 한 편에서는 청빙위원회를 열어 새로운 목사님을 찾기 위해 가동하고 있다고 한다 참 민망한 일이다 나만 그런가? 모든 것을 떠나서 다 떠나서 이광재 목사님은 고품격 설교로 우리 귀의 지성을 높여놓았다 누가 와서 이 스폿(spot)을 맞춰줄 것인가? 주기도문에서 이말씀이 참 무섭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원좌 동숭교회 권사 종로문학 신인상 수상 시집 <시가 왜 거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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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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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을 끄면 가족이 살아난다”…고난주간 ‘미디어 절제 캠페인’ 확산
고난주간을 맞아 한국교회 안에서 ‘미디어 절제’를 통해 가정과 신앙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사)놀이미디어교육센터는 ‘2026 고난주간 미디어 절제 캠페인’을 전개하며, 성도들이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줄이고 가족 간의 관계 회복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도록 돕고 있다. 이번 캠페인은 “스크린 타임 OFF, 패밀리 타임 ON”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디어 과잉 시대 속에서 무너진 가정의 대화와 관계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음세대 두뇌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란다” 센터 측은 설명자료를 통해 인간의 두뇌 발달이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닌 ‘관계 속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특히 영유아기의 경우 타인의 두뇌와의 연결, 즉 부모와의 언어적·정서적 교류가 필수적이며, 이는 사회성 형성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자료에 따르면 아이의 두뇌는 부모의 표정, 목소리, 대화를 통해 발달하며, 이러한 상호작용이 부족할 경우 사회성 발달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대로 스마트폰과 같은 스크린 중심 환경은 정보 전달은 가능하지만 관계 형성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특히 “아이의 두뇌는 화면이 아니라 부모와 얼굴을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성장한다”는 메시지는 이번 캠페인의 핵심 가치로 제시된다. AI 시대, 관계 없는 교육의 위험성 경고 설명자료는 인공지능 기반 학습의 한계도 지적한다. AI는 지식 전달은 가능하지만 감정 교류와 사회적 신호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감정 읽기 능력을 배우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둑기사 이세돌의 사례를 인용하며, 감정이 없는 기계와의 대면이 인간에게 심리적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센터는 이러한 환경이 지속될 경우, 사회성 발달이 저해되고 반사회적 성향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경고하며, AI 학습은 보조적 수단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난주간, 하루 한 시간이라도 가족을 켜라” 캠페인은 실천적 지침도 함께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밤 9시 이후 스크린 OFF ▲스마트폰 없는 가족 식사 ▲가족 성경 읽기와 중보기도 ▲서로 축복하는 롤링페이퍼 작성 ▲서점·도서관 방문 등의 ‘패밀리 타임’을 통해 가정 내 대화와 교제를 회복할 것을 권장한다. 또한 가정에 스마트폰 보관함을 만들어 일정 시간 이후 모든 기기를 내려놓는 실천도 제안되었다. 고난주간, 영적 절제에서 관계 회복으로 이번 캠페인은 단순한 미디어 사용 제한을 넘어, 고난주간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제의 시간이, 단지 금식이나 개인 경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 공동체의 회복’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미디어교육센터는 “성도들이 미디어를 절제함으로써 영적 성장뿐 아니라 가정의 회복을 경험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히며, 한국교회 안에 건강한 디지털 사용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오늘날 스크린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이번 캠페인은 다시금 인간의 본질적인 관계와 신앙의 자리로 돌아가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고난주간, 스크린을 끄는 작은 결단이 가정을 살리고 다음세대를 회복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선교와 교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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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의 '크리스천 제노사이드'
출처: 국제기독교연대(ICC,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2026년 3월 발표 보고서 2023년 크리스마스 이브, 나이지리아 미들벨트(Middle Belt) 지역의 작은 기독교인 마을들에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자행된 학살 속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교회는 불탔고, 살아남은 이들은 짐승처럼 마을을 탈출해야 했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반응은 '유목민과 농부 사이의 토지 분쟁'이라는 상투적인 설명이었다. 그러나 국제기독교연대(ICC)가 2026년 3월 발표한 최신 보고서는 이 '설명'이 얼마나 교묘하고 위험한 거짓인지를 낱낱이 폭로했다. ICC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이후 나이지리아에서 표적 폭력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약 53,000명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지역 분쟁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수치다. 학살의 패턴은 일관되다. 공격 대상은 기독교인 마을이고, 교회와 성직자가 집중 표적이 되며, 생존자들은 영구 이주를 강요받는다. 2025년 말 현재 국내 실향민(IDP) 수는 350만 명에 육박하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적 이유로 쫓겨난 기독교인들이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시민을 국가 스스로 방치하고, 때로는 가해 세력에 문을 열어주고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본 기사는 ICC의 2026년 3월 보고서를 토대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의 실태와 구조적 원인, 그리고 국제사회의 책임을 심층 분석한다. 단순한 종교 갈등이 아니라 '국가 포획(State Capture)'에 의한 체계적 제노사이드가 진행되고 있다는 ICC의 충격적 진단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 1.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기만적 서사: 국제사회를 호도하는 정치적 위장 나이지리아 정부가 수십 년째 반복해온 서사가 있다. '목초지를 둘러싼 농부와 풀라니(Fulani) 유목민 사이의 전통적 갈등'이라는 설명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사막화가 유목민들의 남하를 부추기고, 이것이 농경 공동체와의 마찰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 설명은, 그러나 실제 현장의 증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성직자 살해와 교회 파괴 — 이것이 '토지 분쟁'인가 ICC 2026년 보고서는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목초지를 얻기 위한 싸움이라면 굳이 기독교 성직자를 조직적으로 살해하거나 교회를 불태울 이유가 없다. 2025년 야하야 캄바사야(Yahaya Kambasaya) 목사가 살해된 사건은 그 단적인 예다. 무장 세력이 그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땅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를 제거하는 표적 행위였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미들벨트 전역에서 반복되고 있다. 학술적 분석 역시 이 분쟁의 주된 동인이 '민족-종교적 요인'임을 일관되게 지목한다. 공격자들이 습격 과정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수사(修辭)는 지하디스트적 성격을 띤다. '이슬람의 땅을 이교도로부터 되찾는다'는 종교적 정당화 담론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소를 얻기 위한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종교적 정화(purification)를 향한 이념적 동기가 폭력의 근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기만적 서사가 국제사회에서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서방 언론들이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설명을 검증 없이 전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살의 가해자들에게 국제적 면죄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ICC 보고서는 이를 가리켜 '의도치 않은 공모'라고 표현한다. 언론의 무비판적 보도가 제노사이드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 요인 중 하나라는 경고다.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가 이주를 촉진하는 요인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ICC는 이것이 조직적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배경 조건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기후 갈등론'은 나이지리아 정부가 국제사회의 시선을 돌리고, 제노사이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적 도구라는 것이다. 이 신화를 걷어내지 않는 한, 진정한 해법은 요원하다. ▶ 핵심 수치 2009년 이후 표적 폭력으로 사망한 나이지리아 민간인: 약 53,000명 / 2023년 크리스마스 이브 학살: 기독교인 마을 집중 공격 / 2025년 말 국내 실향민(IDP): 약 350만 명 / 레아 샤리부(Leah Sharibu)를 포함한 납치 피해자 다수, 2025년 말까지도 미귀환 상태 (출처: ICC 2026년 3월 보고서) 2. 국가 포획(State Capture): 안보 기관을 장악한 이슬람 극단주의 나이지리아의 안보 위기는 단순한 국가 능력의 부재가 아니다. ICC 보고서가 제시하는 훨씬 더 충격적인 진단은 바로 '국가 포획(State Capture)'이다. 풀라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나이지리아 정부와 안보 기관 내부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으며, 국가 권력 자체가 이슬람주의 확장 의제를 위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심스러운 고위직 인사들 — 안보 체계의 이면 ICC 보고서는 세 명의 고위 인사를 특히 주목한다. 카심 셰티마(Kashim Shettima) 부통령, 누후 리바두(Nuhu Ribadu) 국가안보보좌관, 벨로 마타왈레(Bello Matawalle) 장관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슬람주의 확장론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들로, 현재 나이지리아 최고 안보 기구를 지휘하고 있다. 이들의 지휘 아래 군대가 학살, 처형, 마을 파괴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으나, 어떠한 사법적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안보 구조가 특정 민족-종교 집단에 의해 통제될 때, 전체 국민을 위한 중립적 보호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ICC는 이것이 단순한 부패나 무능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북부 엘리트 무슬림 집단이 전략적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국방 체계 내에서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조직적으로 배제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위협 정보가 담긴 정보 보고서들이 고위 안보 관리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무시되거나 은폐되는 현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흐마드 구미 셰이크 — '병렬 외교'의 위험성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북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이 수행하는 이른바 '병렬 외교'다. 북부의 저명한 종교 지도자 아흐마드 구미(Ahmad Gumi) 셰이크는 반군과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협상 과정에서 무장 단체에 종교적 명분을 제공해왔다. 국가 공식 채널 밖에서 테러 단체에 신뢰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 '병렬 외교'는 사실상 반군 세력의 국제화를 돕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볼라 티누부(Bola Tinubu) 대통령이 이끄는 현 정부는 북부 이슬람 단체의 이익을 위해 기독교 소수자의 헌법적 권리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 ICC의 판단이다. '소수'라는 표현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나이지리아 기독교 인구가 전체의 약 40%에 달함에도 국가 보호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적 소수가 아니라 권력 구조 속의 소수, 즉 정치적 소외의 문제다. ICC 보고서는 이 구조적 편향이 야하야 캄바사야 목사 살해 사건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기독교 지도자가 살해되었음에도 나이지리아 국가는 어떠한 실질적 수사도,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기독교 공동체의 수호자가 아님을 넘어, 사실상 가해 세력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 ICC 보고서 핵심 개념: '국가 포획(State Capture)' 국가 포획이란 국가 권력 기관이 특정 집단의 사익을 위해 장악되는 현상을 말한다. ICC는 나이지리아에서 풀라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안보 기관을 통제할 정도로 정부에 침투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폭력이 처벌받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분석한다. 3. 범죄-테러의 결탁과 '피의 경제학': 납치·갈취로 돌아가는 잔혹한 생태계 나이지리아의 폭력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조직 범죄와 이슬람 테러리즘의 긴밀한 결탁이다. ICC 보고서는 이를 '피의 경제학(Blood Economy)'이라 규정한다. 범죄와 테러가 서로를 먹여 살리며, 그 희생양은 언제나 기독교 공동체라는 것이다. 산적 행위에서 지하디스트 자금원으로 — 진화하는 폭력의 구조 북부 나이지리아의 산적 행위(banditry)는 이제 단순한 범죄 문제가 아니다. ICC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산적 집단들은 더 큰 지하디스트 목표를 위한 자금 조달 및 전술적 지원의 원천으로 기능하고 있다. 납치, 갈취, 가축 약탈로 벌어들인 자금이 보코하람(Boko Haram)이나 이슬람국가 서아프리카 지부(ISWAP) 등 테러 조직의 자금줄로 흘러들어간다. 이 두 세력은 협력하여 기독교 다수 지역을 체계적으로 불안정화시키고 있다. 납치와 갈취를 통해 공동체 경제를 파괴하고, 그 재원으로 더 많은 무기와 인력을 조달한다. 2026년 현재까지도 이 악순환이 스스로를 영속화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여전히 종교 폭력을 묵인하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ICC는 단언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안보 예산의 행방이다. 나이지리아는 방대한 규모의 안보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예산이 실제 공동체 보호에 사용되기보다는 위협이 지속되는 데 개인적 이해관계가 있는 관리들의 사적 이익으로 흘러들어가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다고 ICC는 고발한다. 안보 예산이 곧 부패와 공모의 연료가 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현대판 노예제도 — 납치와 인신매매의 공포 ICC 보고서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대규모 납치 문제다. 2009년 이후 납치범들은 수천 명의 어린이를 몸값이나 성 착취의 목적으로 붙잡아두었다. 이것은 현대판 노예제도라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기독교 학교와 종교 기관이 특별히 집중 표적이 되는 것은, 이 행위가 무작위적이 아니라 종교 공동체의 뿌리를 뽑으려는 전략적 의도를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4년 보코하람에 납치된 뒤 개종을 거부하고 11년이 넘도록 억류 중인 레아 샤리부(Leah Sharibu)의 사례는 이 비극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2025년 말까지도 그의 귀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막대한 몸값 없이는 지속적으로 납치 피해자를 구출하지 못하는 현실은, 주권 국가로서의 기본 의무가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중의 고통 속에 있다. 폭력의 직접적 희생자가 되는 동시에, 자신들을 배신하는 안보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내야 한다. 이 구조적 모순이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이 처한 현실의 가장 비극적인 단면이다. 4. 900만 달러의 진실 은폐: 워싱턴 로비전의 민낯 나이지리아 정부의 대응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폭력을 묵인하고, 국제무대에서는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ICC 보고서가 폭로한 워싱턴 로비 활동의 실태는 이 두 번째 전선의 충격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DCI 그룹에 900만 달러 — 제노사이드를 포장하는 글로벌 PR ICC에 따르면, 나이지리아 정부는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로비 회사 DCI 그룹(DCI Group)과 계약을 맺고 약 900만 달러를 지불했다. DCI 그룹의 역할은 나이지리아 내부 위기를 '윤색된 버전'으로 포장하여 미국 정책 입안자들과 언론에 유통시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박해의 흔적을 지우고, 미국 국무부가 나이지리아를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ountry of Particular Concern, CPC)'으로 지정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CPC 지정은 미국이 심각한 종교 자유 침해국에 부과하는 외교적 제재 수단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10월 나이지리아를 CPC로 지정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는 기독교 박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식적 인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의 집중적인 로비 활동은 이 지정을 무력화하거나 번복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이지리아 영부인의 워싱턴 방문이 이루어졌다. ICC는 이 방문이 잔혹 행위의 규모를 직접 부인하기 위한 대규모 외교 이니셔티브의 일부였다고 평가한다. 피해자들의 피로 얼룩진 현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턴에서는 수백만 달러짜리 '이미지 세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자원을 동원한 잔혹 행위 은폐 — 나이지리아 국민에 대한 이중 배신 ICC 보고서는 이 로비 활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써야 할 국가 자원이 그 자국민 학살의 실체를 감추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중적 배신이다. 나이지리아 국민에 대한 배신이자, 국제적 투명성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다. 전문 로비스트들은 미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접근하여 나이지리아를 '안정적인 파트너' '테러와의 전쟁에서 협력하는 동맹'으로 포장한다. 이 과정에서 나이지리아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 '테러'의 희생자라는 불편한 진실은 의도적으로 삭제된다. 국가가 테러를 묵인하는 동시에 테러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ICC는 국제 사회와 언론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선전을 검증 없이 전달하는 것을 중단하고, 현장의 피해자들을 직접 바라봐야 한다고. 입안자들은 값비싼 홍보 캠페인에 포장된 이미지가 아니라, 미들벨트의 폐허가 된 마을과 캠프를 가득 채운 실향민들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목할 사실 나이지리아 정부가 미국 로비에 지출한 900만 달러(DCI 그룹 계약금)는 미들벨트 학살 생존자들에게 제공된 심리 상담 예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국제적 이미지 관리에는 수백만 달러를 쏟아붓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자국 기독교 생존자들을 위한 국가 지원은 사실상 전무하다. (ICC 2026년 3월 보고서) 5. 인도주의적 재난: 350만 실향민의 지워진 삶 숫자는 가끔 인간의 고통을 지운다. 53,000명의 사망자. 350만 명의 실향민. 수천 명의 납치 피해 어린이. 이 수치들 하나하나가 실존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담고 있다. ICC 보고서는 통계 뒤에 가려진 인도주의적 재앙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트라우마와 방치 — 국가가 외면한 정신 건강 위기 미들벨트 지역의 학살 생존자들이 겪는 심리적 외상은 가늠하기 어렵다.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집을 빼앗기고, 낯선 곳으로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국가는 이들에게 어떠한 전문적 심리 지원도 제공하지 않는다. ICC 보고서는 이 심리적 공격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인구의 사기를 꺾고 영구적으로 몰아내려는 제노사이드 전략의 계산된 요소라고 분석한다. 강제 이주당한 기독교 공동체는 열악한 환경의 캠프로 내몰린다. 깨끗한 물도,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도 없는 과밀한 공간이다. 연구 결과들은 이 캠프에서의 높은 사망률이 중앙 정부의 의도적 방치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총에 맞지 않아도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절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ICC는 이것 역시 제노사이드의 일부라고 본다. 경제적 파괴 — 땅에서 뿌리뽑힌 공동체들 가축과 농장에 대한 표적 파괴는 미들벨트 기독교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을 영구적으로 무너뜨렸다. 이것은 전쟁의 우발적 부작용이 아니다. ICC의 갈등 종단 연구는 이 경제적 파괴가 기독교인들을 영구 이주하게 만들 목적으로 취해진 전략적 조치임을 보여준다. 빈곤과 기아는 총탄만큼 효과적인 '완만한 속도의 제노사이드(Slow-motion genocide)'다. 집도, 땅도, 생계 수단도 빼앗긴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다. 설령 폭력이 잠시 멈추더라도 그들의 공동체는 이미 지워지고 없을 것이다. ICC는 이 점에서 나이지리아에서 진행 중인 과정이 단순 분쟁이 아닌 집단학살의 요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한다. 350만 국내 실향민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이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돌아갈 고향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은 불탔고, 교회는 파괴되었으며, 이웃들은 흩어지거나 죽었다. ICC 보고서는 이 인간적 참상을 국제사회가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 ICC 보고서 현황 요약 • 2009년 이후 표적 폭력 사망자: 약 53,000명 • 2025년 말 국내 실향민(IDP): 약 350만 명 • 기독교 학교·교회에 대한 집중 표적 공격 지속 • 국가 지원 심리 상담 프로그램: 사실상 전무 • 레아 샤리부 등 수천 명의 납치 피해자 미귀환 • 미들벨트 지역 경제 인프라: 심각한 영구 손상 6. 국제사회의 책임과 정책적 제언: ICC가 요구하는 6대 행동 ICC 2026년 3월 보고서는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향해 구체적이고 강력한 행동을 요구한다. 외교적 수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압박과 제재를 통해 나이지리아 정부가 행동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① 나이지리아 CPC 지정 즉각 복원 트럼프 행정부가 2025년 10월 단행한 나이지리아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PC) 지정은 올바른 조치였다. ICC는 이 지정이 어떠한 정치적 이유로도 철회되어서는 안 되며, 조속히 복원·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CPC 지정은 나이지리아 정부가 종교 자유 침해에 대한 국제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외교적 신호다. ② 글로벌 마그니츠키법 적용 — 핵심 인사 제재 ICC는 이 위기의 설계자들에게 직접적 책임을 묻기 위해 미국의 글로벌 마그니츠키 인권 책임법(Global Magnitsky Human Rights Accountability Act)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은 행정명령 13818호의 권한을 사용하여 카심 셰티마 부통령, 누후 리바두 국가안보보좌관, 벨로 마타왈레 장관에 대해 자산 동결 및 비자 금지 조치를 즉각 시행해야 한다. 이러한 표적 제재는 이슬람 지하디스트 작전을 지원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직접적으로 교란할 것이다. ③ 미국의 안보 지원에 명확한 조건 부과 나이지리아에 대한 미국의 안보 지원은 무조건적으로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 ICC는 나이지리아가 차별 없이 모든 종교 집단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확한 조건 하에서만 안보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조건 없는 지원은 현재의 박해 구조를 사실상 보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④ 국제 언론의 비판적 보도 촉구 ICC는 국제 언론이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관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프레임을 검증 없이 전달하는 것은 의도치 않게 학살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다. 언론은 현장의 증인들과 독립적 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나이지리아 정부가 900만 달러를 들여 구매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들벨트의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⑤ 독립적 국제 조사 기구 구성 ICC는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 실태에 대한 독립적이고 공정한 국제 조사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독립 조사 기구를 유엔 차원에서 구성하고, 학살과 종교 청소의 증거를 체계적으로 문서화해야 한다. 이 기록은 향후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의 기소를 위한 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⑥ 인도주의적 지원 채널의 직접화 국제 인도주의 지원이 나이지리아 정부를 경유할 경우 박해받는 기독교 공동체에 실질적으로 닿지 못할 위험이 크다. ICC는 미들벨트 실향민 캠프에 대한 의료, 식량, 심리 지원이 나이지리아 정부를 우회하여 직접 전달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부패한 중간 경로를 차단하고 피해자들에게 직접 자원이 전달되는 투명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나이지리아 비극은 세계교회가 주목하고 기도해야 할 일이다. 이미지 AI제작 6. 한국 교회와 국제 기독교 공동체가 응답해야 할 이유 나이지리아의 비극은 지구 반대편의 먼 이야기가 아니다. 국제기독교연대(ICC)의 보고서는 단지 나이지리아 정부를 향한 고발장이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긴박한 호소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이 호소 앞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전 세계 박해 받는 기독교인의 연대 속에서 한국 교회는 역사적으로 박해와 순교의 경험을 가진 공동체다. 일제 강점기의 신사 참배 거부, 6·25 전쟁 중의 순교자들, 그리고 현재도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지하 교회 성도들. 이 역사적 경험은 한국 교회에 박해받는 형제자매들의 고통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응답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ICC와 같은 국제 기독교 인권 단체들이 발간하는 보고서를 적극적으로 주목하고, 교회 안에서 이를 교육하고 기도 제목으로 삼는 것은 한국 교회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국제 인도주의 지원에 동참하는 것이다. 종교 자유는 보편적 가치 — 침묵은 공모다 종교의 자유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보장받아야 할 보편적 기본권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박해를 받는 종교 집단은 기독교인들이다. 오픈도어스(Open Doors)의 세계기독교박해지수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 보고서들이 매년 이 현실을 확인해준다. 나이지리아의 기독교인 학살에 국제사회가 침묵하는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일종의 공모다. 가해자들에게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도 자신들의 편이 없다는 절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ICC 보고서가 강조하듯, '세계의 침묵은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을 멸절시키는 궁극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 침묵을 깨는 목소리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나이지리아의 종교 자유 상황에 관심을 촉구하고, 외교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의 기독교 공동체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 결론: 국가가 배신한 사람들에게 세계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ICC 2026년 3월 보고서가 폭로한 나이지리아의 현실은 인류의 양심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53,000명의 사망자, 350만 명의 실향민, 수천 명의 납치 피해 어린이, 그리고 국가가 방조하는 조직적 종교 학살. 이것은 '불가피한 공동체 마찰'이 아니다. 극단주의자들의 이익에 의해 장악된 국가가 생산해낸 인재(人災)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제도적 무관심, 안보 기관 내부의 공모, 그리고 900만 달러짜리 국제적 오보 공세의 삼각 편대를 통해 자국의 기독교 인구를 사실상 제노사이드에 내맡겨왔다.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기만적 서사는 국제사회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의도적 방어막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CPC 지정은 올바른 방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작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마그니츠키 제재, 조건부 안보 지원, 독립 국제 조사, 직접적 인도주의 지원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통합된 국제적 압박으로 이어져야 한다. ICC는 국제사회가 국가 행위자들을 단죄하지 않는 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희생자들의 비명은 지금도 미들벨트의 폐허 위에서 울리고 있다. 외교적 편의가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가 응답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 보고서 출처 및 참고 - 국제기독교연대(ICC,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2026년 3월 발표 보고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 실태 및 국가 포획 분석 - ICC 웹사이트: persecution.org | 2026년 3월 보고서 전문 게재 - 미국 글로벌 마그니츠키 인권 책임법(Global Magnitsky Human Rights Accountability Act) / 행정명령 13818호 - 미국 국무부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PC) 지정 제도 관련 자료 - 오픈도어스(Open Doors) 세계기독교박해지수(World Watch List) ※ 이 기사는 국제기독교연대(ICC) 2026년 3월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된 심층 기획 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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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전 양화진의 기억, 디지털로 다시 깨어나다”
두루마리기행 편지 양화진기록관(관장 강요섭 목사)이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주요 선교사 기록물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3월 22일 온라인에 전격 공개했다. 이번 아카이브 개설은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와 선교사의 발자취를 보다 폭넓게 공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양화진기록관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가 설립·운영하는 기관으로, 한국 기독교 역사와 외국인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보존·연구하기 위해 출범했다. 2012년 전택부 선생의 유품 기증을 시작으로, 이듬해 로제타 S. 홀 선교사와 아서 G. 웰본 선교사 가문의 기록이 추가되며 본격적인 기록 보존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기록관은 선교사 유품과 서신, 사진, 일기, 교단 보고서, 친필 원고 등 7천여 건 이상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19세기 말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 사회 변화와 기독교 형성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로제타홀 친필 일기 특히 홀 가 컬렉션은 의료 선교와 여성·장애인 교육, 결핵 퇴치 운동 등 한국 근대 의료사의 흐름을 담고 있으며, 웰본 가 컬렉션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내륙 선교와 농촌 사회의 변화 과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전택부 컬렉션 역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보존 운동과 시민사회 활동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러한 자료들을 온라인으로 제공함으로써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손쉽게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선교 현장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록관 측은 “기록을 통해 선교와 신앙, 그리고 사회 속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실천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밝혔다. 로제타홀 수첩 양화진기록관은 앞으로도 국내외 기관 및 전문가와 협력해 기록의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기억의 샘, 기록의 터’라는 모토 아래, 양화진에 깃든 신앙과 헌신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기록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비전이다. 웰본 성경과 안경 한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의 관리·운영을 위해 2005년 설립된 교회로, 한국 교회의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 힘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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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기노회, ‘사회복지·이주민 선교’ 엔진 달았다… 청림교회 장윤제 목사 영입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남경기노회가 현대 목회의 핵심 과제인 사회복지와 이주민 선교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하며, 교단 내 ‘복지 노회’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남경기노회(노회장 유병구 목사)는 지난 3월 17일, 경기도 용인시 소재 양문교회(담임 정영교 목사)에서 제49회 1차 임시노회를 소집했다. 이번 노회의 핵심 안건은 황동노회 소속이었던 청림교회와 장윤제 목사의 이적 및 가입 건으로, 노회원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환영 속에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유병구 노회장 “목사의 정체성은 곧 순종과 사명” 회무 처리에 앞서 진행된 개회 예배에서 노회장 유병구 목사(사랑하는교회)는 로마서 1장 1절을 본문으로 ‘목사의 정체성’이라는 제하의 설교를 전하며 사명자의 자세를 역설했다. 유 목사는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칭한 것은 자신의 의지를 꺾고 주인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겠다는 결단”이라며, “목회자가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질 때 비로소 사역의 방향성이 바로 선다”고 강조했다. 이는 새로운 터전에서 사역을 시작하는 장윤제 목사와 노회원들에게 사역의 본질을 다시금 일깨우는 메시지였다. ‘사회복지 인재’로 파격 영입… 노회 역량 강화 기대 이어진 회무에서는 청림교회와 장윤제 목사의 가입 절차가 심도 있게 논의됐다. 유병구 노회장은 이번 영입이 단순한 소속 변경을 넘어 ‘사회복지 인재 추대 방식’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유 노회장은 “장윤제 목사는 그동안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작은도서관 운동’과 ‘이주민 사역’의 모델을 제시하며 헌신해 온 인물”이라며, “청림교회의 합류는 남경기노회가 지역사회 복지 분야에서 독보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영입 배경을 밝혔다. 장윤제 목사 “300만 이주민 시대, 교회가 평생교육의 거점 되어야” 남경기노회의 일원이 된 장윤제 목사는 답사를 통해 향후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 장 목사는 특히 국내 체류 외국인 300만 명 시대를 맞아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글로컬(Glocal)’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 목사는 “글로컬 작은도서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에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선교적 안전망을 구축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교회 공간을 활용한 주중 교육과 지역사회 평생교육 시스템을 공고히 하여, 다음 세대와 지역 주민이 자연스럽게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가입으로 남경기노회는 장윤제 목사가 보유한 복지 및 교육 콘텐츠를 노회 산하 교회들과 공유하며, 급변하는 목회 환경 속에서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새로운 교회 모델을 구축하는 데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한편, 이날 노회에서는 정민영 목사의 평양제일노회(삼일교회) 이거 청원 건도 함께 처리되며 모든 회무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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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기독청년들, 성경적 가정 회복을 모색하다
인구절벽 시대, 성경적 결혼을 다시 묻다 한국 사회가 심각한 인구 감소와 가정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기독청년들이 성경적 결혼과 가정의 의미를 다시 세우기 위한 의미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2026 노아(NCA) 결혼가정 컨퍼런스’가 지난 3월 14일 서울 삼모아트센터 라벤나홀에서 개최됐다. 이번 행사는 결혼을 앞둔 기독청년들과 가정 사역에 관심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결혼과 가정의 본질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재조명하는 강의와 토론, 기도 시간이 이어졌다. 컨퍼런스는 “결혼은 알맞은 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알맞은 짝이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김향숙 하이패밀리 공동대표, 강태신 교수 등이 강사로 참여해 결혼과 가정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심도 있게 제시했다. 행사 관계자는 “오늘날 결혼을 개인의 선택이나 사회적 계약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경은 결혼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있는 거룩한 제도로 본다”며 “이번 컨퍼런스는 기독청년들이 결혼을 신앙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완성” 첫 강의를 맡은 김향숙 원장은 결혼과 가정의 본질을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찾았다. 김향숙 원장 김 원장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는 크게 두 가지, 곧 가정과 교회”라며 “가정은 창조 사역의 완성이고 교회는 구원 사역의 절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창세기 2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결혼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며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관계적 존재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결혼과 가정을 선물하셨다”며 “결혼은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신 창조 질서”라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결혼을 단순한 감정적 사랑이나 사회적 제도로 이해하는 현대 문화의 흐름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오늘날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나 이벤트처럼 소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혼을 하나님이 주신 신비와 축복의 선물로 말합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완성된 상태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이 만나 완성을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그는 결혼을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라고 표현하며 “결혼은 서로를 변화시키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서로가 성장하고 회복되는 여정”이라고 설명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가정 공동체 기조 강의를 맡은 김영한 교수(기독교학술원장)는 ‘성경적 정의론’을 주제로 강의하며 가정과 공동체의 윤리적 기초를 설명했다. 김영한 교수 김 교수는 구약 성경에서 정의를 나타내는 두 개념인 ‘체다카(tsedaqah)’와 ‘미쉬파트(mishpat)’를 소개했다. 체다카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되는 의로움이며, 미쉬파트는 공동체 속에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공의를 의미한다. 김 교수는 “성경적 정의는 단순한 법적 공정성을 넘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윤리에서 이해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성경에서 정의는 언제나 약자를 향한 책임과 연결된다”며 구약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라는 말씀을 강조했다. 이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구속적 정의(Redemptive Justice)’와 관계를 회복하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가 중심이 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성경적 정의는 단순한 법적 질서를 넘어 사랑에 기반한 공동체적 삶을 의미한다”며 “가정은 바로 이러한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는 가장 작은 공동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가정은 작은 교회”라며 “성령 안에서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가정”이라고 강조했다. 배우자 선택의 기준, ‘영적 탄력성’ 세 번째 강의를 맡은 강태신 교수는 ‘배우자 선택의 기준’을 제시하며 결혼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실제적인 통찰을 제공했다. 강태신 교수 강 교수는 특히 ‘영적 탄력성(Spiritual Resilience)’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그는 “행복한 결혼은 조건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형성된 내면의 성숙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영적 탄력성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로 다음을 제시했다. 1. 자족함(Self-Satisfaction) 2. 하나님 나라의 자아상(Kingdom Image) 3.영적 만족지연(Spiritual Delay) 그는 “영적 탄력성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간다”며 “이런 신앙적 성숙이 결혼과 가정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특히 결혼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좋은 배우자를 찾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데이트는 배우자를 찾아가는 과정” 이어 진행된 김향숙 원장의 두 번째 강의는 ‘데이트의 기술’을 주제로 진행됐다. 김 원장은 “모든 데이트는 배우자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훈련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강의에 열중하는 참가자들 그는 남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소통과 인격적 성숙을 강조했다. “남녀는 생각과 감정,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갈등이 생기지만 이해하면 사랑이 깊어집니다.” 김 원장은 특히 건강한 관계를 위한 ▲배우려는 태도 ▲상대를 수용하는 태도 ▲사랑할 용기 ▲분별하는 지혜 등 네 가지 태도를 제시했다. 그는 “결혼은 완벽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며 성장하는 과정”이라며 “사랑과 믿음이 깊어질 때 가정의 행복도 깊어진다”고 말했다. 청년운동으로 확산되는 결혼가정 사역 컨퍼런스 마지막 시간에는 권요한 선교사의 진행으로 참가자 토론과 합심기도가 이어졌다. 권요한 선교사 권 선교사는 “이번 결혼가정 컨퍼런스는 단순한 세미나가 아니라 한국교회 청년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지금 인구절벽과 가정 해체라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며 “성경적 결혼과 가정의 회복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교회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또한 “각 대학과 지역 교회에서 결혼과 가정을 위한 청년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며 한국교회의 관심과 협력을 요청했다. 높은 참여와 뜨거운 호응 이번 컨퍼런스는 청년들의 높은 관심 속에 진행됐다. 행사 후 실시된 설문 조사에서 강의 만족도는 평균 7.44점(10점 만점)을 기록했다. 또한 참가자의 81% 이상이 향후 진행될 ‘2단계 매칭 프로그램’ 참여 의사를 밝히며 실제적인 결혼 준비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준비위원회 관계자는 “결혼을 두려움이나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이번 컨퍼런스의 가장 큰 열매”라고 평가했다. “생명의 방주 같은 믿음의 가정 세워지길” 행사를 마친 뒤 노아 NCA 결혼가정 컨퍼런스 준비위원회는 감사 메시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기독청년들이 결혼과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방주와 같은 믿음의 가정들이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준비위원회는 또한 “강사들과 준비위원, 후원자들, 그리고 행사 소식을 널리 알린 언론 관계자들에게 깊이 감사한다”며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건강한 가정 회복을 위해 지속적인 사역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결혼을 기피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이번 컨퍼런스는 기독청년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결혼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창조적 소명이며,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믿음 위에 세워진 가정은 오늘의 교회를 살리고 내일의 사회를 세우는 가장 작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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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깨뜨린 생명, 전쟁의 위험 속에 한반도를 품다
봄이 문을 두드리는 3월의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한편에서 한국교회의 봄을 준비하는 부활절연합예배 준비기도회 및 기자회견이 열렸다. 2026년 3월 11일 오후 1시, '2026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준비위원회'(대회장 이영훈 목사, 준비위원장 엄진용 목사·김일엽 목사, 이하 준비위원회)는 언론을 향해 공식 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교회가 교단의 벽을 넘어 하나의 목소리로 부활과 평화를 외치는 날, 오는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 4시를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이번 연합예배의 표어는 '생명의 부활, 한반도 평화!', 주제는 '부활! 평화! 사랑!'이다. 주제 성구는 요한복음 20장 19절부터 23절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시고,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신 그 말씀을 중심으로 한다. 준비위원회는 이 성경적 장면이 오늘날 분열과 갈등의 시대, 그리고 분단 80년을 향해 가는 한반도의 현실과 깊이 공명한다고 강조한다. 한국교회 연합의 현재 72개 교단이 하나로 이번 2026 한국교회 부활절연합예배에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한국침례회(기침),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예장개혁·개신·고신·대신·백석·통합·합동·합신, 호헌 등 주요 교단 15개를 비롯하여 총 72개 교단이 참여한다. 대회장은 이영훈 목사(기하성 대표회장)가, 설교는 김정석 감독회장(기감)이 맡는다. 준비위원회는 지난 2025년 12월 한국교회교단장회의에서 이영훈 목사를 대회장으로, 엄진용 목사와 김일엽 목사를 공동 준비위원장으로 선임하고, 2026년 1월 7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출범예배를 드리며 공식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이후 기획·예배·언론·홍보·재무·동원·안내·기록·행정·대외협력 등 10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체계적인 준비를 이어왔다. 1월과 2월에 걸쳐 수차례 위원장 회의와 전체 모임을 거치며 설교자 확정, 재정 계획, 예배 순서 조율, 17개 광역시도 단체와의 협력 등을 점검했고, 3월부터는 섬네일·스팟광고·포스터·국민일보·교단지 광고 등 본격적인 홍보에 들어간 상태다. 4월 1일 최종 위원장 회의를 거쳐 4월 4일 토요일 실무모임에서 예배를 최종 점검한 뒤,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 4시 역사적인 연합예배의 막이 오른다. 부활 선포, 교회 연합, 사회적 사명 등 세 가지 목표 준비위원회가 이번 예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세 가지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다시 선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분열과 갈등을 넘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회복하는 것이며, 셋째는 한국교회가 사회와 민족 앞에서 평화와 희망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목표는 단순한 교회 내부 행사의 차원을 훌쩍 넘는다. 준비위원회는 발표문에서 '최근 중동 지역에서 이어지는 전쟁과 갈등,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이번 부활절연합예배는 단순한 교회 행사를 넘어 생명과 평화를 선포하는 한국교회의 공동 기도와 선언의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전쟁과 분열의 시대 속에서 인류에게 참된 평화를 제시하며, 한국교회는 이를 통해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한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하고자 한다는 것이 준비위원회의 입장이다. 준비위원회는 또한 전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세 가지를 요청했다. ▲부활절 연합예배를 위한 기도에 동참해 달라는 것 ▲교단과 교회를 넘어 연합의 정신으로 함께해 달라는 것, ▲부활의 복음이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의 화해를 위한 기도로 이어지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번 부활절연합예배가 단순한 행사에 그치지 않고, 한국교회가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민족과 사회 앞에 희망을 선포하는 영적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준비위원회의 간절한 바람이다. 부활-평화-사랑의 삼중주 — 주제 신학의 깊이 이번 연합예배의 주제 해설은 '부활, 평화, 사랑'이라는 세 개념이 '십자가'라는 하나의 중심점 위에서 어떻게 순환하고 상호작용하는지를 심도 있게 풀어낸다. 주제 해설에 따르면, 부활은 과거의 신비로운 기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절망을 생명의 소망으로 뒤바꾸신 하나님의 주권적 승리'이자, 우리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여정의 출발점이다. 첫 번째 주제인 '부활'은 세 차원으로 전개된다. 부활의 전제는 '사랑', 곧 죽음보다 강한 아가페의 심연이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십자가는 그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현장이다. 부활의 결과는 '평화',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며 주어지는 영혼의 안식이다. 그리고 부활의 본질은 '새 창조'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낡은 창조 질서를 폐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를 개막하는 우주적 전환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주제인 '평화(샬롬)'의 차원도 세 단계로 펼쳐진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품었던 '샬롬의 약속'은 부활을 내다보는 간절한 기다림이었다. 이사야의 '평강의 왕' 예언과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은 모두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생명의 능력을 전제한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샬롬의 완성'으로 실현되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셨을 때, 이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상흔을 평화의 증표로 제시하신 사건이었다. 이제 그 평화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샬롬의 나라'로 가시화되어 세상 한복판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워가고 있다. 세 번째 주제인 '사랑'은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으로 전개된다. 부활의 능력은 먼저 자기중심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이웃을 향해 눈을 뜨게 하는 내면의 혁명을 일으킨다. 부활을 경험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부활 신앙은 이웃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공감적 사랑을 일으킨다. 나아가 이 사랑은 교회 연합의 능력으로 확장된다. 교파의 담장을 뛰어넘는 연합은 인위적 타협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하나의 몸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사랑은 한반도 평화와 회복을 향한 역사적 화해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제 해설의 결론이다. 설교를 맡은 김정석 감독회장 한반도를 향한 부활 신앙 — 분단 80년의 아픔을 껴안다 이번 연합예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한반도 평화'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주제 해설은 한반도의 분단을 단순히 땅이 나뉜 것이 아니라, '형제애가 깨어지고 생명의 소통이 단절된 영적 질병의 상태'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분단의 어둠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부활 신앙에서 찾는다. 주제 해설은 부활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세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본다. 첫째, 부활은 증오의 사슬을 끊어내는 '용서의 권세'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에게 먼저 평강을 선포하신 것처럼, 한반도의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품고 있는 적대감을 녹일 수 있는 열쇠는 부활의 첫 인사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부활은 깨어진 관계를 잇는 '샬롬의 회복'이다. 정치적 계산이나 군사적 균형이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만 참된 평화가 성취될 수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제 해설은 강조한다. 셋째, 교회는 한반도에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기를 구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철조망이 걷히고 끊어진 철길이 이어지는 외적 통일을 넘어, 남과 북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껴안는 진정한 의미의 회복을 꿈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셨기에, 우리 민족을 짓누르는 분단의 어둠 또한 반드시 물러갈 것'이라는 고백은 이번 연합예배가 품고 있는 가장 뜨거운 기도이기도 하다. 주제 해설은 또한 이 세 가지 주제—부활, 평화, 사랑—가 '십자가'라는 단 하나의 중심점을 공유하며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점을 도식으로 제시하며 강조한다. 부활의 소망이 십자가의 낮아짐을 잃으면 승리주의에 빠지고, 이 땅의 평화가 십자가의 희생을 망각하면 인간적 타협이 되며,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십자가의 은혜를 놓치면 자기만족에 그친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를 중심으로 빚어진 부활·평화·사랑의 하모니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라는 거룩한 열매를 맺는다. 부활절연합예배 준비기도회에 참석한 성도들 '연합예배'의 역사적 의미 — 한국교회, 왜 지금 하나가 되는가 한국교회가 교단과 지역을 초월하여 하나의 예배 공동체로 모인다는 것은 단순한 연례행사가 아니다. 부활절 연합예배는 한국교회가 오랜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뒤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고백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준비위원회가 밝힌 세 가지 기본 방향—부활 신앙의 재선포, 연합과 일치의 회복, 회복과 희망의 방향 제시—은 한국교회가 현재 어떤 도전 앞에 서 있는지를 역으로 드러낸다. 주제 해설은 교회 연합의 가능성을 부활 신학으로부터 끌어낸다. 부활은 모든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증명한 사건이며,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분 아래에서 '형제와 자매'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연합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의 생명으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믿음으로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신학적 통찰은 이번 연합예배가 왜 단순한 행사 이상인지를 잘 설명해준다. 더 나아가 준비위원회는 교회 연합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부활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분열과 갈등이 일상이 된 세상 속에서, 서로 다른 교단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하나만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연합하는 모습 자체가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외침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져진 교회의 일치는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짊어질 '한반도 평화와 회복'을 향한 든든한 영적 토대가 된다는 논리는,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가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한국 사회를 향한 예언자적 선언임을 시사한다. 72개교단들이 모여서 부활절연합예배를 준비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예배 현장의 준비 — 수도권을 넘어 전국이 함께 이번 연합예배는 특정 교단이나 단체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준비하고 함께 드리는 예배로 기획되었다. 수도권뿐 아니라 전국 교회와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참여하는 부활절 예배가 될 예정이며, 17개 광역시도 단체와의 협력을 통해 전국적 동원 체계를 갖추었다. 준비위원회는 기획·예배·언론·홍보·재무·동원·안내·기록·행정·대외협력 등 10개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체계적으로 준비를 진행해왔다. 주제 찬송으로는 '무덤에 머물러'(새찬송가 160장)가 선정되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찬양으로, 예배의 분위기와 주제를 가장 잘 담아낼 찬송이라는 게 준비위원회의 판단이다. 설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김정석 감독회장이 맡아, '부활! 평화! 사랑!'이라는 주제를 요한복음 20장의 말씀 위에서 풀어낼 예정이다. 대회장 이영훈 목사는 기하성 대표회장으로서 72개 교단의 연합을 상징하는 자리에서 이 예배를 이끈다. 이번 예배에서 낭독될 선언문은 '부활의 능력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할 것'을 한국교회가 공동으로 서약하는 내용을 담을 예정이다. 또한 예배 이후에는 결산 및 감사예배를 드림으로써, 이번 연합예배가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인 연합과 실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갈라진 세상을 향한 한국교회의 응답 — 부활, 그 이후를 묻다 지구촌은 지금도 전쟁 중이다. 중동의 분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우크라이나의 포성도 멈추지 않았다. 한반도 역시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으며, 분단 80년의 상처는 깊고 넓다. 이처럼 갈라지고 무너진 세계 앞에서, 한국교회는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를 통해 하나의 대답을 내놓으려 한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답—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주제 해설이 강조하듯, 부활 신앙은 단순히 내세의 위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낡은 세상의 가치관인 증오와 분열, 탐욕의 문화를 거부하고 생명과 평화의 문화를 일구어가는 삶의 방식이다. 성령의 능력을 입은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세상의 불의와 갈등을 변혁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가시화되는 것이 부활 신앙의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의 한복판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자리하고 있다. 준비위원회는 이번 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민족과 사회 앞에 희망을 선포하는 영적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 '부활-평화-사랑'의 하모니를 이 땅 위에서 연주하는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한국교회가 서기를 촉구하는 이 선언은, 4월 5일 부활주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수만 명의 성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드리는 예배로 그 결실을 맺을 것이다. 봄은 겨울이 끝난 자리에서 온다. 죽음이 끝난 자리에서 생명이 움튼다. 그 생명의 복음을 붙들고, 72개 교단이 하나의 목소리로 외치는 '생명의 부활, 한반도 평화!'의 함성이 여의도 하늘 아래 울려 퍼질 4월 5일을 향해, 한국교회의 봄이 무르익고 있다. 대회장 이영훈 목사 ◆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 개요 ▶일 시 : 2026년 4월 5일(주일) 오후 4시 ▶ 장 소 : 여의도순복음교회 ▶ 대회장 : 이영훈 목사(기하성 대표회장) ▶ 설 교 : 김정석 감독회장(기감) ▶준비위원장 : 엄진용 목사(기하성 대외총무), 김일엽 목사(기침 총무) ▶사무총장 : 정성엽 목사(예장합신 총무) ▶참여 교단 : 총 72개 교단 ▶ 표 어 : 생명의 부활! 한반도 평화! ▶주 제 : 부활! 평화! 사랑! ▶주제 성구 : 요한복음 20:19~23 ▶ 주제 찬송 : 무덤에 머물러 (새찬송가 160장)
길과생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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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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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pixabay.com/ko/photos 1. 문제의 출발점: 왜 이 전쟁을 둘러싼 인식이 갈리는가 2024년 이후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시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되기도 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진실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는 단순한 시각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 전제, 이념적 지향, 그리고 정보 선택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란 문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국제 핵 질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중동의 종파 갈등, 에너지 지정학, 미국 패권의 향방,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가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환원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한쪽은 이것을 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으로 축소하고, 다른 한쪽은 이란의 위협성만을 부각해 군사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한다. 어느 쪽도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는 오랫동안 두 흐름이 공존해왔다. 하나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 신학의 흐름이다. 이 두 흐름은 국내 정치적 사안에서도 자주 충돌했지만, 이란과 같은 국제 분쟁 문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계열은 피해자의 시각을 앞세우고, 보수 계열은 안보와 질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교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언어로 이 복잡한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이 글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고,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교회 내 두 시선의 신학적 근거를 점검한 후, 기독교적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말할 때,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복잡한 국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교회의 목소리가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발언은 더욱 엄격한 지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2. 이란 정권의 실체: 간과되거나 축소되는 현실 (1) 신정 독재 체제의 구조와 본질 이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사실은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최고지도자(라흐바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의 종교 권위자이자 정치 권력자로서, 군·사법·방송·외교·안보 전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 이념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권력이 다시 종교 이념을 강요하는 이중 구조다. 대통령과 의회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 후보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선거의 실질적 경쟁성을 박탈한다. 즉, 이란의 선거는 민주주의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치적 반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모두 심각하게 제한된다. 공개 처형은 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집행된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이란의 처형 건수와 방식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치범,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들이 사형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현실은 이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 종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란 헌법은 명목상 일부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배교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란 내 지하 교회 신자들은 끊임없는 위협과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 적발될 경우 체포와 투옥, 고문을 감수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이란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맥락이다. (2) 여성 인권 문제와 국제적 파장 2022년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22세 여성이 히잡 착용 규정 위반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전역에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수백만 명이 저항에 나섰다. 이란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란 신정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들은 이란에서 의복 규정 준수를 강제받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 결혼, 이혼, 여행, 취업 등 다양한 법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이슬람 형법에 따라 여성의 증언 효력은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법적으로 제도화한 인권 침해다. 이 점을 평가에서 제외할 때, 이란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왜곡된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여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히잡을 공개적으로 벗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란 국내의 인권 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내부의 저항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등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해야 한다. (3) 국제적 위협 행위와 대리전 구조 이란의 문제는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다양한 친이란 민병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중동 전역의 무장 세력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이 세력들은 이란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일종의 대리 전력이며, 이란은 이들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도 지역 내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 이것이 소위 '그림자 전쟁(Shadow War)' 혹은 '대리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국제사회의 오랜 우려 사항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합의(JCPOA)에 따른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평화적 핵 활용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할 경우 중동의 안보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여러 아랍 국가들도 핵 보유를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즉, 이란의 핵 문제는 이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태도도 명백하다. 이란 최고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소멸을 선언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실행된 목표다. 헤즈볼라를 통한 레바논 북부에서의 공격,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통한 가자 지구에서의 긴장, 시리아를 통한 이란 군사 인프라 구축 등은 이 목표를 향한 구체적 행동들이다. (4) '약자 프레임'의 한계와 위험 이러한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민간인 피해와 특정 시설 폭격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맥락을 제거한 감정 정치다. '약자 프레임'은 이란 정권의 실제 행위와 책임을 은폐하고, 복잡한 도덕적 판단의 공간을 차단한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중동 전역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노출된 국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은 오류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 성명들이 이란 정권의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군사행동의 결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에 가까워진다. 예언자적 교회의 목소리는 특정 진영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편드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지만, 약자처럼 보이는 자를 무조건 편드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pixabay.com/ko/photos 3. 전쟁의 원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긴장 (1) 핵 문제의 역사와 현재 이란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우려 대상이었다. 2003년 이란이 비밀 핵 시설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 끝에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일명 이란 핵합의를 타결했다. 핵합의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제한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압박' 전략을 내세우며 이란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은 이에 대응하여 우라늄 농축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바이든 행정부가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성과 없이 장기화되었고,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핵무기 개발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다. 이란은 약속을 어겼고, 미국은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외교사적 맥락 없이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결말만 보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현재 시점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불성실이다. (2) 대리전 구조와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갈등은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복잡한 대리전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왔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후티를 통해 예멘과 홍해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군사 자산에 대한 공습을 수시로 단행해왔고, 이란 핵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책임을 단순히 공격을 가한 쪽에만 돌리는 것은 구조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이 민간 거주 지역에 무기를 은닉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책임은 해당 지역에 무기를 배치한 세력에도 있다. 국제 인도주의법은 이른바 '인간 방패' 사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종파 갈등도 중동 불안정의 핵심 요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 분쟁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지에서 시아파 집단을 지원한다. 이 종파 경쟁이 중동 전역의 내전과 갈등을 심화시켜왔다는 사실은 이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맥락이다. (3)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와 윤리적 복잡성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자국의 존립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이란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이스라엘 소멸 발언,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통한 군사적 압박, 이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의 핵 개발 완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중동 지역의 실제 안보 상황을 배경으로 한 실존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평가가 이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완전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란의 이스라엘 소멸 선언과 그를 향한 실제 행동에 대한 동등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쪽에 대한 비판만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향이다. 4. 트럼프의 전략: 단순한 전쟁광인가, 계산된 압박인가 (1) 최대 압박 전략의 구조와 논리 도널드 트럼프의 대이란 정책은 단순히 '호전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불리며, 이는 군사력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이란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이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수백 개의 추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란의 석유 수출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란 화폐인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란 정권 내부에서도 압박의 효과가 감지되었으며,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트럼프 전략의 지지자들은 이 압박이 없었다면 이란이 더 빠르게 핵 개발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도 한계가 있다. 경제 제재로 인한 고통은 이란 정권보다 이란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크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약품과 의료 기기 등 인도주의적 품목에 대한 제재 면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란이 이런 물품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경제적 고통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하는 전략은 일반 시민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 한계도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2) 제한적 군사행동과 전략적 의도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가장 주목받은 군사행동은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작전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대리전 전략을 총괄하는 인물로,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민병대, 후티 등에 대한 지원과 지휘를 담당해온 실세였다.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미국 기지를 공격해 미국 시민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이 작전이 단행되었다. 이 작전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이란이 전면전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제한적 대응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 미사일 공격은 사전에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며, 이란이 실제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즉,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무모한 전쟁 행위가 아니라, 이란의 확전 의지를 시험하고 억제력을 재설정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3) 미디어 왜곡과 교회의 인식 문제 일부 한국교회 성명서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전쟁 유발자'로 규정하고, 그의 대이란 정책을 무조건적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특정 시각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결과다. 진보적 성향의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프레임화해왔으며, 그 서사가 한국교회의 일부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분별은 미디어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전하지 않는 것을 함께 물어야 한다.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오류를 범했고,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때, 이란 정권의 행위와 책임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균형을 잃는다. 교회는 강대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지적이 독재 정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pixabay.com/ko/photos 5. 국제정세 속에서 본 이란 충돌: 더 큰 구조를 보라 (1) 미국 대 반미 축의 구조 이란을 둘러싼 갈등은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양자 문제를 넘어, 더 큰 국제 질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의 대이란 제재에 반대하며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강화해왔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제재를 피해 수입함으로써 이란 경제를 간접 지원해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반미 세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이란 문제를 다루면, 왜 서방 세계가 이란의 핵 개발을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지, 왜 이란에 대한 제재가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아키텍처의 문제로 다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 에너지와 지정학: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의미 이란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 수출량의 약 20~30%가 통과한다.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즉각적이고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 문제는 단지 중동 지역의 안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문제다. 한국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며, 그 수송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란과의 군사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책임 있는 시민적 신학의 요소다. 6. 한국교회의 두 시선: 신학적 구조 분석 (1) 평화 절대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한계 한국교회 내 진보적 흐름에서 이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평화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원수 사랑과 비폭력으로 요약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는 이 입장의 대표적 성경적 근거다. 따라서 어떤 군사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입장의 강점은 전쟁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강자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려는 비판적 저항성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첫째, 악의 현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비폭력적 저항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앞에서 무저항은 옳은 응답이었는가? 둘째, 구조적 불의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억제마저 거부하는 것은 때로 악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는다. 평화 절대주의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의 차원과 교회의 공적 증언의 차원에서는 더 복잡한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화 선포는 개인적 비폭력의 도전이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지만, 그것이 곧 현실 정치에서 모든 강제력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응답이었다. (2) 정의 전쟁론의 전통과 적용의 한계 다른 한편, 한국교회의 보수적 흐름에서는 정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관점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 전쟁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거치며 발전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이 이론은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매우 엄격한 조건들을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정당 전쟁의 조건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과 전쟁 수행의 정당성(jus in bello)이다. 전자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합법적 권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등을 요구한다. 후자는 민간인 보호, 비례적 무력 사용, 금지된 무기 사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이 조건들은 매우 엄격하며, 현실의 전쟁 중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이 엄격한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라는 대원칙만을 내세워 특정 군사행동을 성급하게 정당화하는 경우다. 이란 정권이 분명히 위험하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곧 이란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구체적 행동은 정당 전쟁의 모든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될 때, 보수적 교회의 목소리는 국가 권력의 대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3) 두 시선의 공통된 문제: 진실의 일부만을 보는 것 흥미롭게도, 평화 절대주의와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라는 두 극단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평화 절대주의는 이란의 위협과 책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는 군사행동의 부당한 결과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어느 쪽도 전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 있지 않다. 기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전체 진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만 실현된다. 교회가 이 전쟁 문제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학적·이념적 편향이 진실의 인식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7. 문제의 핵심: 균형 상실과 감정 정치 (1) 성명서의 구조적 편향 분석 이란 문제를 다루는 일부 한국교회 단체들의 성명서를 분석하면 공통적인 구조적 편향이 드러난다. 첫째, 원인 제거다. 이란 정권의 위협적 행위, 핵 개발, 대리전 전략, 국내 억압 등은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되어 다루어진다. 반면 군사행동의 결과, 특히 민간인 피해와 인프라 파괴는 상세하고 감정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군사행동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반응만을 갖도록 유도한다. 둘째, 도덕적 단순화다. 복잡한 도덕적 현실이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한쪽은 절대 악으로, 다른 쪽은 절대 피해자로 규정된다. 이 구도에서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들에게 행한 악은 사라진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가한 측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악마화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연극이다. 셋째, 감정 중심 서술이다. 학교, 병원, 어린이, 피난민 등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서술의 중심을 이루며, 구조적·법적·역사적 책임 분석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공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도덕적 책임의 방기다. 특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선포하는 성명서라면, 그것은 훨씬 더 엄격한 지적 성실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2) 맥락 없는 인도주의의 위험 인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그 생명과 존엄은 보호받아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은 어디서 누가 행했든 비극이며, 교회는 그 비극에 민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인도주의'는 오히려 더 큰 폭력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란 정권이 핵을 개발하고, 중동 전역에 대리 세력을 통해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충돌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가? 단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없는 평화적 현상 유지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재앙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없는 인도주의는 결국 현실 회피가 된다. 나아가, 인도주의적 우려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란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소수 종교인들이 박해받고, 정치범들이 처형될 때 한국교회 단체들은 얼마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란 정권의 내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념적 선택이다. pixabay.com/ko/photos 8. 그렇다면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 전쟁 윤리의 재검토 (1) 성경의 긴장: 평화와 질서 사이 기독교 윤리는 전쟁 문제에 있어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과 그 결과에 대한 탄식도 담고 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 건축의 영광을 허락받지 못했다(대상 22:8).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사람으로, 원수 사랑과 폭력 거부를 가르치셨다.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이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했다.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과 '그것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롬 13:4)라는 말씀이 모두 정경 안에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모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긴장 속에서 신학적 판단은 더욱 섬세해야 하며, 어느 한 구절을 절대화하여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2) 정당 전쟁의 조건과 현실 적용 전통적 정당 전쟁 이론은 다음의 조건들을 제시한다. 정당한 이유(just cause)란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의도(right intention)란 보복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라 선의 달성과 악의 억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legitimate authority)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예상되는 선이 악을 초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에 적용할 때, 쉬운 결론은 없다. 이란 정권의 위협과 핵 개발은 '정당한 이유'의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외교적 수단이 정말 소진되었는가? 제재가 충분한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가? '비례성' 조건과 관련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보다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큰 갈등의 촉발점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으며, 교회는 이 불확실성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정당 전쟁론이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도, 무조건적 반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 조건들을 성실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없이 '평화를 원하니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이란이 위험하니 군사행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신학적 판단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9. 기독교적 평가: 무엇이 옳은 태도인가 (1) 진실을 전체로 보는 용기 기독교적 판단의 첫 번째 요건은 진실을 부분적으로 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란 정권의 억압적 성격, 대리전 전략, 핵 개발 의혹은 진실이다. 민간인의 고통, 전쟁의 파괴적 결과,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도 진실이다. 국제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강대국의 오류 가능성, 전쟁의 비의도적 결과도 진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다. 선택적 진실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즉 '침묵을 통한 거짓(lying by omission)'은 직접적 거짓말 못지않게 사람을 기만한다. 교회가 이 방식으로 공적 성명을 발표하거나 설교를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완전한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다. (2) 정의와 사랑의 통합 기독교 윤리에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가 사랑의 사회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차갑고 억압적인 율법주의가 되며, 정의 없는 사랑은 구조적 불의를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된다.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란 국민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한 정의로운 비판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억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균형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붙드는 것은 항상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판단이 형성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동시적 표현이었다.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는 분별자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분별(discernment)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소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영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다. 이란 전쟁 문제에서 교회의 소명은 특정 정치 세력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PR 창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의 종교적 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그 어느 정치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기준으로 모든 편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모습이다. 분별은 또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즉각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정보 수집과 기도와 신학적 성찰 이후에 나오는 신중한 판단이, 비록 늦더라도 훨씬 더 큰 영적 무게를 갖는다. 교회가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반응하려 할 때, 그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평론가가 되는 길이다. (4) 누구의 편에 서는가: 근본적 질문 이 모든 논의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국의 편인가, 이란의 편인가? 이스라엘의 편인가, 팔레스타인의 편인가? 강자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응답은 이 질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이란 국민의 자유를 원하며,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원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과 예멘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의 의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의 불의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지만, 불의한 평화보다는 고통스러운 정의를 선택한다. 이 입장은 정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진영도 교회를 온전히 자기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권력 구조 안에 흡수되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자리다.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이스라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섰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10. 전쟁의 전망과 교회의 과제 (1) 세 가지 시나리오 이란을 둘러싼 충돌의 향후 전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는 제한적 충돌의 지속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이란과 미국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 시나리오다. 사이버 공격, 표적 암살,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전투 등이 지속되는 '회색 지대' 갈등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서서히 진전되고, 국제 제재의 효과는 점점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확전 시나리오다. 어느 한쪽의 오판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전면전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거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타격을 단행하는 경우다. 이 시나리오는 중동 전역을 충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공격,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미군과 이란 간의 직접 충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셋째는 협상을 통한 현상 관리다. 이란이 경제적 압박과 내부 불만을 이기지 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거나, 강대국들이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란의 완전한 핵 개발 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핵 능력의 부분적 동결과 제재의 부분적 완화를 교환하는 중간 지점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교회의 구체적 과제 이 세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든, 교회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올바른 정보와 균형 있는 분석에 기반한 공적 발언을 해야 한다.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이란의 행위와 국제적 맥락을 함께 언급하며, 어느 편의 서사도 검증 없이 수용하지 않는 지적 성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란 국민과 중동의 모든 민간인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인도주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이란의 지하 기독교 공동체와 박해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위한 연대도 중요하다. 셋째, 이 위기가 복음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동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영원한 소망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란 내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 역설을 보여준다. 교회는 정치적 논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혼란에 응답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 평화 구조 형성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종교 자유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결론: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 이란 전쟁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완전하다. 현실은 그 어느 단어도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이란 국민은 그 억압의 피해자들이다. 군사행동은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민간인의 고통을 수반한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불의 위에 세워진 평화는 결국 더 큰 폭력의 씨앗이 된다. 교회가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명은 때로 긴장 관계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단기적 평화를 방해할 수 있다. 이 긴장들을 직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소명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교회가 어느 진영의 편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진영에 진실을 말했을 때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본회퍼는 독일의 편도, 연합국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섰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에 저항한 데즈몬드 투투는 흑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하나님의 진실의 편에 섰다. 이들은 인기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역사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떤 권력보다도 크다. 미국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어떤 국제 기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인이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국가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군사 동맹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의가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항상 이 세상의 권력 구조 너머에 있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님을 안다.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자리는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 앞에서.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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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붕괴 위험, 지정학을 넘어 영적 전환할 때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격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경제는 마비되고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주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노출돼 있다. 무엇보다 북한을 지탱해온 중국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나 군사 전략의 변화로만 본다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시는 과정, 그리고 어둠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영적 질서의 드러남으로 해석해야 한다. 산사태처럼 오는 통일 많은 이들은 통일이 단계적 대화와 협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역사와 국제정치의 현실은 다르다. 독일, 예멘, 작은 국가들의 병합 사례까지도 모두 ‘붕괴’가 먼저 찾아온 뒤에야 가능했다. 성경은 “빛과 어둠은 섞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와 전체주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통일은 이상적일 수 있으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통일은 대화로 설계되는 구조물이 아니라, 내부 붕괴가 외부 질서와 맞물리는 순간 갑작스럽게 열리는 문과 같다.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체제의 한계 북한의 붕괴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니다. 그 뿌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체제 유지의 도구로 취급한 데 있다. 농부는 생산 수치로, 아이들은 행사 도구로, 노인은 인구 숫자로만 계산되었다. 예배와 성경은 금지되었고, 생각은 통제되었다. 인간 존엄이 철저히 무너진 체제는 결국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죄로 세워진 권력과 우상화된 통치가 역사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이다. 중국의 흔들림, 북한의 비틀거림 북한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신호는 중국의 흔들림이다. 북한의 생명줄은 중국이었고, 그 그림자 권력 역시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도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개방하면 경제가 살아도 정권은 무너지고, 닫으면 정권은 유지되지만 국민 경제가 붕괴한다. 이는 북한과 동일한 딜레마다. 결국 진리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는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북한, 평행선의 대화 최근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핵 문제 때문이지만, 본질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미국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북한은 통제와 국가 우선을 말한다. 겉으로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교제할 수 없듯, 이 구조에서는 대화가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체성,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 북한과 중국의 흔들림은 한국이 체제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할 때라는 신호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거나 ‘두 국가 인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헌법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와도 충돌한다. 현 정권의 북한 체제를 존중한다는 태도는 곧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폭정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유와 양심, 예배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승인하는 것이다. 한국이 체제의 본질을 흐리면 역사의 전환기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붕괴의 영적 의미: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북한의 붕괴는 단순히 냉전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억눌린 백성들을 향해 열어가시는 해방의 시간이며,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순간이다. 북한 붕괴는 비극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가 어둠을 깨뜨리는 영적 승리의 순간이다. 북한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 산사태가 오랜 균열 끝에 무너지고, 빛이 한순간에 어둠을 몰아내듯, 역사의 전환도 그렇게 온다. 그 순간을 준비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의 체제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북한 주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북한의 붕괴는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기독교인들,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 빛 아래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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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평화·책임’의 key는 교회에 있다
▲경주 APEC에 참석한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한반도는 아직 전쟁중이라고 밝혔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1. 역사적 진단: ‘정전 상태’는 미완의 역사, 동시에 은혜의 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외교적으로는 사실 확인이지만, 신학적으로는 “미완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언어입니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는 전쟁을 멈췄을 뿐, 평화를 얻지 못한 땅입니다. 그 사이 70년이 넘는 정전의 시간은 인간의 정치 실패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유예의 시간(grace period) 이기도 합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시며, 땅 끝까지 창을 꺾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 (시편 46:9) 한반도의 정전은 단순히 외교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남과 북 모두를 멸절하지 않으신 역사적 간섭의 흔적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공식 전쟁 상태”라는 말은 심판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는 언어입니다. 2. 정치적 진단: ‘종전 선언’의 정치화와 영적 공백 한국의 진보 정권들이 지속적으로 종전을 주장한 배경에는 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통해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 ② 미군 주둔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의도, ③ 북한 체제와의 상호인정(normalization)을 통한 긴장 완화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접근은 ‘평화의 구조’보다 ‘정치적 선언’에 집중한 한계를 가집니다. 평화는 서명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진정한 평화는 정의와 진실의 토대 위에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나 평화가 없도다.” (렘 6:14) 즉, 하나님 없는 평화는 언제나 거짓 평화입니다. 한반도의 종전 선언이 진정한 평화가 되려면, 그 안에 회개와 정의, 그리고 진리의 영(요 16:13) 이 깃들어야 합니다. 3. 신학적 진단: 국가의 주권인가, 하나님의 주권인가 트럼프의 발언은 “한반도 전쟁의 법적 상태”를 언급했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주권의 문제입니다. 누가 이 땅의 역사를 다스리는가? 남한도 북한도, 미국도 중국도 아닙니다. 이 땅의 주권은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께 속하였으며, 그가 열방을 다스리시리로다.” (시편 22:28) 남북의 체제, 미국의 패권, 중국의 영향력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아래 한정된 도구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은 아시리아와 바벨론을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지만, 그들이 교만해졌을 때 심판하셨습니다(사 10:5-12). ▲한반도는 휴전이지 전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사진은 APEC의 한미정산회담 모습(연합뉴스 제공) 오늘의 한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대국의 외교전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이 주권의 시각을 잃고, 정치 이념의 시각으로만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4. 영적 진단: 이념보다 깊은 분열의 영 남북의 분단은 단순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교만이 만든 영적 분열입니다. 좌·우의 이념 대립은 마치 바벨탑의 언어혼잡처럼,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 현상입니다. “너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15) 이념의 이름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진영의 이름으로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 통일성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교회는 어느 진영의 대변인이 아니라, 양쪽을 향해 회개를 외치는 선지자적 존재여야 합니다. 5. 윤리적 진단: 정의 없는 평화는 불의, 평화 없는 정의는 폭력 하나님의 평화(shalom)는 단지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צֶדֶק, tsedeq)가 강같이 흐르는 상태입니다(암 5:24). 그러나 오늘의 한반도는 정의와 평화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정의 없는 평화를 말하고, 남한의 일부는 평화 없는 정의를 말합니다. 둘 다 복음의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정의와 자비의 입맞춤(시 85:10)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느 편의 언어를 반복하기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언어로 발언해야 합니다. 6. 구속사적 관점: 하나님은 분단의 역사 속에서도 일하신다 한반도의 분단은 비극이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서도 구속의 서사를 이어가십니다. 70년의 분단 속에서도 복음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하에서 하늘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전쟁을 심판으로 쓰시지만, 그 심판의 끝에는 언제나 회복의 약속을 두십니다. “내가 너희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4) 트럼프의 발언은 외교적 발언처럼 들리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역사적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7. 교회의 사명: ‘평화의 중보자’로 서라 이제 교회는 정치적 중재자가 아니라, 영적 중보자로 서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교회가 할 일은 좌·우를 향한 회개의 메시지, 복음 안에서의 화해의 증언, 정의롭고 온유한 그리스도의 통치의 증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마 5:9) 한국 교회가 이 사명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은 돌들로도 외치게 하실 것입니다(눅 19:40). 8. ‘전쟁 상태’의 의미: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에서 평화를 준비하신다 트럼프의 말은 정치적 현실의 진단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재확인하는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한반도는 아직 전쟁 상태이지만, 그것은 “평화를 향한 마지막 여정의 진통기”일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정치의 언어 대신 복음의 언어로, 이념의 대결 대신 진리의 사랑으로, 민족의 상처 위에 하나님의 평화의 깃발을 세워야 합니다. “그가 우리로 화평하게 하셨고,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하나님은 남한의 성도들의 통일에 대한 기도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또한 북한에는 당신의 백성이 계십니다. 여전히 전쟁 중인 한반도의 통일은 열쇠는 교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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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
■ 또다른 차별을 위한 서곡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명제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법안의 내용과 적용 방식을 놓고는 여전히 첨예한 의견 대립이 존재한다. 특히 종교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우려들은 단순히 보수적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사회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계의 우려를 중심으로, 법안이 가진 잠재적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차별금지라는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안의 구체적 조항들이 야기할 수 있는 부작용과 사회적 갈등 요소들을 냉정히 분석하여, 보다 균형 잡힌 법제화 방향을 모색해보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vs 차별금지, 경계선은 어디인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표현의 자유와 차별금지 사이의 경계선 설정 문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교회 내에서의 설교나 교육이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목회자가 설교 중에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본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종교적 신념 문제를 넘어서, 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교리와 신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와 직결된다. 문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들이 이러한 종교적 표현에 대한 예외 조항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그 범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법조문의 해석은 결국 법원의 판단에 맡겨지게 되는데, 판사의 가치관이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동일한 발언도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해외 사례를 보면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비판이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된 사례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물론 각국의 법제도와 사회문화적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선례들이 한국의 종교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 개념 정의의 모호성과 확대 해석의 위험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핵심 개념들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특히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과 같은 용어들은 그 범위와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자의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성적 지향'이라는 개념 하나만 봐도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하다. 전통적인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성적 지향이 포함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면 법 적용 과정에서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성별 정체성'의 경우에도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 그리고 개인이 인식하는 성별 간의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법적으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적 모호성은 법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시민들로 하여금 어떤 행위나 표현이 법에 저촉되는지를 사전에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종교인들이나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의 신념 표현이 언제든 차별로 해석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게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법안의 일부 조항들이 너무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규정되어 있어, 본래 의도하지 않았던 영역까지도 법의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법의 과잉 금지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권 행사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 역차별 논란과 다수의 권리 침해 가능성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또 다른 쟁점은 소위 '역차별' 문제다.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선의의 목적이 오히려 다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제약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다. 구체적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때, 그것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해석되어 법적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교사가 수업 중에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을 때, 이것이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다. 민주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가치관이 자유롭게 표현되고 토론될 수 있어야 하는데, 특정한 관점의 표현이 법적으로 금지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법적 제재의 가능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 수 있다.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진솔한 생각을 표현하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담론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법과 교육과정에 따라 이와 다른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 교육 현장에서의 혼란과 갈등 교육 분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을 영역 중 하나다. 공교육 기관에서는 국가 정책과 법률에 따라 교육과정이 운영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관련 내용이 교육과정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과 관련된 교육을 실시할 때,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학부모나 교사들과의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서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교육하면서 동성 부모 가정을 소개한다면, 이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또한 이러한 교육에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차별로 간주될 수 있다면, 학부모의 교육권은 어떻게 보장될 것인가? 교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법과 교육과정에 따라 이와 다른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는 교사의 양심의 자유와 교육의 자유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더 나아가, 사립학교나 종교계 학교의 경우에는 더욱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들 학교는 고유한 교육 철학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설립된 것인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이러한 학교들의 교육 자율성을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 ■ 종교 자유와의 충돌 가능성 종교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개인이 종교를 믿을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교리와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한다. 그런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종교 공동체의 신앙 실천이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거나, 동성애자의 교회 직분 취임을 거부하는 것이 차별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도 무제한적인 것은 아니며, 다른 기본권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하지만 종교 공동체 내부의 교리나 신앙 실천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율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문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들이 종교 자유에 대한 예외 조항을 충분히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적 행위나 표현에 대한 예외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가 모호하다면 여전히 갈등의 소지는 남아있게 된다. ■ 사회적 갈등 증폭의 우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찬성 측과 반대 측 간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고 있으며, 상호 이해와 대화보다는 감정적 대립이 앞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법이 제정된 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법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분쟁 사례들이 발생하면, 이를 둘러싸고 또 다른 사회적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 언론과 SNS를 통해 사례들이 확산되면서 여론이 극단화될 위험도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갈등이 사회 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집단들이 법적 다툼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할 때, 사회 전체의 화합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또한 법 제정 과정에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법의 정당성과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법은 사회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바탕으로 할 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외 사례의 교훈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법률들이 이미 시행되고 있는 해외 사례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차별금지와 관련된 법률들이 종교 자유와 충돌하는 사례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성 결혼 케이크 제작을 거부한 베이커리 업주가 법적 분쟁에 휘말린 사건이나,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견해를 표명한 목회자들이 사회적 비난을 받은 사례들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차별금지법이 종교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와 어떻게 충돌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영국에서도 유사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일부 경우에는 법적 제재나 사회적 압박을 받는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물론 각국의 법제도와 사회문화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해외 사례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선례들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는 다양한 기본권 간의 균형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하며, 특히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충분한 보장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창조는 남자와 여자이지 제3의 성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 대안적 접근 방법의 모색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하고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법안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이뤄져야 한다.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의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범위까지 포함하는지를 법조문에 명시해야 한다. 둘째,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예외 조항을 명확하고 강력하게 규정해야 한다. 종교 공동체 내부의 교리나 신앙 실천,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표현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법의 적용 범위를 신중하게 설정해야 한다. 모든 영역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영역별 특성을 고려한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교육 분야의 경우, 학부모의 교육권과 교사의 교육 자유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넷째, 법 제정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해야 한다.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의 우려를 진솔하게 듣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법 시행 후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실제 적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필요시 법 개정을 통해 보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기본권에 충돌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검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법의 구체적 내용과 적용 방식을 놓고는 여전히 많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다른 기본권과의 충돌 가능성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려들을 단순히 보수적 시각이나 기득권 옹호로 치부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관점이 존중되어야 하며, 특히 기본권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라는 목표와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지혜롭고 균형 잡힌 법 제정을 통해 두 가치를 모두 보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대화와 토론, 그리고 상호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진정한 포용 사회는 소수자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이 조화롭게 보장될 때 가능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가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