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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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비율 반등…'불신'보다 무서운 '무관심'의 벽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지속적인 탈종교화 흐름 속에서 마침내 반전의 신호가 감지됐다. 한국갤럽이 최근 공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2년과 2024년에 역대 최저치(37%)까지 떨어졌던 우리나라 종교 인구 비율이 2025년 40%를 회복하며 3년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 특히 기독교인 비율은 2024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서 2025년 18%를 기록, 불교(16%)와 가톨릭(6%)을 제치고 3대 종교 중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이번 조사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7,647명을 대상으로 2025년 3월부터 11월까지 한국갤럽이 면접조사 방식으로 수행한 것으로,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는 ±1.1%p다. 2004년 이후 첫 반등…탈종교화의 '가파른 기세' 일단 저지 한국 사회의 종교 인구는 1983년 44%에서 출발해 2004년 54%로 정점을 찍은 뒤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2013년 50%였던 비율은 10년 사이에 37%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2025년 조사에서는 전년 대비 3%포인트 상승한 40%를 기록하며 장기 하락세에 제동이 걸렸다. 무종교 인구는 여전히 60%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2020년 이후 60%대 초반에서 정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탈종교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별로는 10년 전(2015년)과 비교해 남성 종교인 비율이 41%에서 31%로 10%포인트 하락한 반면, 여성은 55%에서 49%로 6%포인트 떨어져 남성의 감소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전 연령대에서 8~12%포인트 하락했으며, 60세 이상만이 52%로 절반을 지켜낸 것으로 확인됐다. 청년층에서도 기독교 독보적 우위 이번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지점은 청년층에서의 기독교 우위다. 40대 이하 연령층에서 기독교는 불교와 가톨릭을 크게 앞서고 있다. 19~29세 응답자 중 기독교인 비율은 14%로, 불교(4%)와 가톨릭(6%)을 훨씬 웃돈다. 30대에서도 기독교 16%에 비해 불교 6%, 가톨릭 7%로 격차가 뚜렷하다. 이는 기성세대에서 불교 세력이 강한 것과 달리, 젊은 세대로 갈수록 기독교가 종교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60세 이상에서는 불교(27%)가 기독교(18%)를 크게 앞서 세대 간 종교 지형의 뚜렷한 대비를 보여줬다. 성별로는 여성 기독교인 비율이 23%로 남성(13%)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신앙 실천 면에서도 기독교인의 경건 생활은 타 종교를 압도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성경(경전)을 읽는다'는 응답에서 기독교인은 61%로 종교인 전체 평균(38%)을 크게 웃돌았다. 이는 가톨릭(45%)보다 16%포인트, 불교(6%)와 비교하면 무려 10배 이상 높은 수치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기도한다'는 항목에서도 기독교인(43%)이 가톨릭(39%), 종교인 전체 평균(29%), 불교(7%)를 모두 앞섰다. 진짜 위기는 '이탈'이 아니라 '무경험'과 '무관심' 그러나 반등의 소식이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 무종교인의 종교 인식을 들여다보면 더욱 근본적인 과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과거에 종교를 믿은 적이 있다'는 무종교인의 비율이 2025년 2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 무종교인 중 78%가 평생 어떤 종교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순수 무종교인'이라는 뜻이다. 탈종교화가 단순한 신앙 이탈을 넘어 '종교 무경험'이 사회에 고착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다. 과거 신앙 경험이 있는 무종교인 중에서는 기독교 출신이 51%로 가장 많았고, 불교(34%), 가톨릭(15%) 순이었다. 이는 타 종교에 비해 기독교에서 무종교로 이탈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무종교인의 종교 호감도다. 무종교인 3명 중 2명(67%)은 '호감 가는 종교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2004년 33%, 2014년 46%, 2021년 61%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것으로, 종교 전반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이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는 '관심이 없어서'가 52%로 가장 높았고,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어서'(20%),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13%)이 뒤를 이었다. 과거의 탈종교화가 종교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적극적 '이탈'이었다면, 이제는 종교를 삶의 선택지에서 아예 지워버린 '심리적 단절'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무관심의 벽'을 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새 과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게 제언했다. 첫째, 반등의 신호를 발판 삼아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교회를 찾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착시키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단순한 수적 증가를 목표로 하는 전도를 넘어, 새가족 정착과 양육 시스템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무관심의 벽'을 넘기 위해 종교적 권위를 내려놓고 '일상의 접점'을 회복해야 한다. 공격적인 전도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 교회는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는 공간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짐을 덜어주는 안식처이자 의미 있는 관계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매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한편 초자연적 세계관에 관한 조사에서는 우리 국민의 57%가 '기적이 존재한다'고 응답해, 종교인 비율(40%)을 훨씬 웃도는 수치를 나타냈다. 이는 무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초월적 차원에 대한 내면의 갈망이 여전히 존재함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한국 교회가 복음 전도의 접점을 찾는 데 있어 새로운 가능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반등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한국 교회 앞에 놓인 과제는 분명하다. 문을 여는 것, 그리고 찾아오는 이를 진심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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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강단을 물든 아첨

이재명 대통령과 소강석 목사가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청와대 사진단 제공)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기념일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역사적 사건 위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서 있다. 그러므로 부활절 예배는 오직 한 분 ‑ 부활하신 주님 ‑ 만이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예배에 참석했고, 소강석CBS 재단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은 환영사에서 대통령을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 기독교 최고의 절기에 정치 지도자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역사적 좌표를 되묻게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강단에서 울려 퍼진'용비어천가' 소강석 목사는 환영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누구보다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이재명 대통령은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든 자들을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어 '우리 대통령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한반도에 평화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예배당 강단에서, 부활절 예배 환영사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회중을 섬기는 직분이다. 강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이지, 정치 지도자를 위한 헌사(獻辭)의 무대가 아니다. 소강석 목사가 쏟아낸 언어들은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 목적은 하나님을 높여 청중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구린내 나는 인간을 드높이는 것은 강단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설교다." —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이것이 단지 한 목사의 개인적 실수라면 논란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다. 소강석 목사는CBS 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주요 대중적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가 부활절이라는 공적 예배 자리에서 국가 지도자를 향해 이런 찬사를 바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그 지도자를 신앙적으로 인증하는 것처럼 비쳐질 위험이 있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것을 경계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린도전서3:21)고 엄중히 경고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이 닷새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를 외쳤던 것처럼, 정치적 환호와 신앙적 찬사는 본질상 다르다. 강단에서 이 둘이 뒤섞일 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다.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사하는 이재명 정교분리를 말하던 입으로 예배당에 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이 이 자리에 선 배경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불과 수 개월 전,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정교분리 원칙이 깨지는 이러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며 종교단체에 대한 법적 제재까지 거론했다. 그런 사람이 4월 5일 부활절 예배에 직접 참석하여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사도신경을 따라 읊으며, 헌금까지 드렸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교분리를 강조하던 그가 스스로 교회의 정치화를 주도한 것은 아닌가. 교회를 향해서는 정치에서 손 떼라 하면서, 자신은 교회라는 공간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정교분리의 본래 취지는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뒤집어 국가가 종교를 단속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헌법 정신의 왜곡이다. 지난1월 기자회견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사람이, 그것도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또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종교를 향해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들어와 축사를 하고 박수를 받는 것—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성이다. 교회해산법을 추진하며 교회당에 들어선 아이러니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층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집권 이후, 민주당 주도로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었다. 발의자 11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 법안은 종교법인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거나 선거에 개입한 경우 주무관청이 직접 설립허가를 취소하고, 해산된 법인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장 없는 종교법인 사무소 출입·검사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해 기독교계는 '교회폐쇄법'이라 명명하며 격렬히 반발했다. 4월 1일에는 7,000여 명의 개신교인이 국회 본관 앞에 집결해 “종교법인 강제해산 종교의자유 입틀막법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 이재명 대통령은 부활절 예배에 나타났다. 한 손으로는 교회해산법을 밀어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부활절 예배에서 헌금을 드린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아니면 정교한 정치 연출인가. 법무법인 전문가들은 이 법안에 대해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해 공익을 해칠 경우 법인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법학회도 “민법 개정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민법 개정이 아닌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대통령의 부활절 예배 참석이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압박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최대 절기의 예배에 등장하는 것 —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향한 정치적 회유이자, 기독교계의 조직적 반발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예배는 권력의 무대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자들이 있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열왕기상12:28)고 선포했다. 그의 동기는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었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죄가 되게 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정치 지도자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대로 전락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를 저버린 백성의 형식적 예배를 향해 “내가 너희의 다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의 분향을 싫어하노라”(이사야1:11,13)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신다. 부활절 예배에서 정치인이 “아멘”을 외치고 헌금을 드리는 모습이 미디어를 가득 채울 때, 그리고 그 예배의 사회자가 대통령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으로 선포할 때, 그 예배당 안에 계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 군중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배와 권련 앞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아첨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맹목적인 반정부 구호의 집결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길은 예언자적 비판과 복음적 초월성에 있다. 세례 요한은 왕의 잘못을 그 앞에서 직언하다 목이 잘렸다(마가복음6:18). 그는 헤롯 왕의 예배당에 초청받아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라고 환영사를 올리지 않았다. 개혁자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권력에 맞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 독일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교회가 국가에 굴종하는 것을'값싼 은혜'라 이름하며 저항했다. 한국교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향한 환호가 아니라 복음의 언어로 권력에게 말하는 용기다. 소강석 목사는 예배 강단에서 대통령을 높이는 대신, 부활절 예배의 의미를 선포했어야 한다. “권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13:4)이어야 하지만, 그 권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두려움 없이 선포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적 목회자의 직분이다. 부활절은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패배하는 날이다. 빌라도의 법정도, 로마의 군병도, 무덤 앞의 돌도 부활을 막지 못했다. 그 부활의 능력 앞에서 교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부활의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앞에서 주눅 드는 것도, 정치 권력에 아부하며 강단을 내주는 것도—모두 부활 신앙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태복음22:21). 이것이 정교분리의 복음적 원리이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거룩한 공간이 정치적 연출의 무대로 활용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엄중한 경계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2026년3월16일 건강한 교회와 사회 포럼, 광교산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민주시민모임,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느헤미야교회협의회,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평화촉구연대의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중동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중동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응답을 표방하고 있다. 성경적 언어와 인도주의적 호소로 포장된 이 성명은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면밀히 읽어보면 이 성명은 심각한 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편향된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침묵 성명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전쟁의 배경이 된 이란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수십 년간 자국민을 향해 비인간적인 억압을 자행해 왔다. 2019년 11월의 피의 금요일 사태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조직적인 탄압을 받아왔다. 독립적인 추산에 따르면 이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역내 무장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불안정의 핵심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사망에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명서는 이러한 맥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의 선택적 적용 성명서는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의 초등학교 공습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민간인 희생을 강조한다. 민간인 보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무고한 희생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명서는 그 공습이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폭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대부분 군사시설 — 해군기지, 공군기지,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 공항 등 — 을 겨냥해왔다. 민간 지역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의도적 공격인지 오폭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만약 민간인 학살이 의도적이었다면 동일 지역에 대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었어야 하나, 그러한 패턴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명서는 이러한 사실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근거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방어권에 대한 몰이해 국제법은 모든 국가에 자기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적대적 언사를 공식적으로 반복해왔고, 실제로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한 대량파괴무기 획득 시도 역시 국제 사회가 공인한 위협이다. 더구나 미국의 공습과 함께 이란 정권은 주변의 중동국가에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감행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성명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인 침략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란 국민 상당수는 자국 독재 정권의 몰락을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의 사망 또는 제거 소식에 거리에서 환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자국민에게도 억압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성명서가 진정으로 생명과 인권을 염려한다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신음해온 이란 국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도 동등한 무게로 발언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정치적 압박의 문제 성명서의 세 번째 항목은 한국교회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태도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 성명서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이란 정권에 대한 면죄—을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전쟁 논리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쪽 편의 서사만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불의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며, 그 안에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불의는 단지 ‘폭격’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억압과 위협, 그리고 지속적인 폭력의 구조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정권이 자국민을 억압하고 국제적 위협을 지속해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한 침략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대응이 민간인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진정한 균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 있는 진실 위에 선다 그리스도인의 평화 운동은 정치적 편향을 복음의 언어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성명이라면,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지역 안정에 가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어야 한다. 핵 위협을 방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독재 정권을 묵인하는 것이 생명 존중인지 물어야 했다. 평화촉구연대의 이 성명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중 하나는 철저히 외면한다. 균형을 잃은 평화 호소는 결국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 서려면,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해서도 동등한 용기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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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를 내려놓고, 양심으로 다시 서는 기독언론”

한국기독언론협회 회장 2026년 신년사 사랑하는 기독언론인 여러분, 그리고 한국교회를 섬기는 모든 언론 동역자 여러분. 새로운 한 해의 문 앞에서, 우리는 축하보다 먼저 성찰의 질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난 한 해, 기독언론으로서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 있었는가. 교회를 살리는 언론이었는가, 아니면 교회를 소모하는 언론이었는가? 신뢰를 쌓는 언론이었는?, 아니면 신뢰를 앗아간 소란한 언론이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결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습니다. 신년의 첫 고백, 위기의 책임은 시대가 아닌 우리 오늘 기독언론이 처한 위기는 단순한 환경 변화의 결과가 아닙니다. 디지털 전환, AI의 등장, 교회 환경의 변화는 분명 큰 도전이지만, 기독언론의 신뢰가 무너진 근본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있었습니다. 이단과의 유착, 출처가 광고 요구, 기사 거래와 협박성 보도, 검증 없는 기사가 난립은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언론 전체가 함께 짚어야 할 부끄러운 현실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기독언론을 경계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기독언론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년의 첫날, 우리는 이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회개 없는 새 출발은 없습니다. 기독언론, 정체성 다시 세워야 할 2026년 기독언론은 교회의 홍보 수단이 아닙니다. 교회를 미화하는 언론이 아니라, 교회를 살리는 언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분명히 선언합니다. 기독언론은 교회의 공론장이며, 교회의 양심이며, 교회와 사회 사이의 신학적 번역자입니다. 교회 내부의 분쟁과 구조적 문제를 묻는 언론이 아니라, 사실과 문서, 규정에 근거해 교회가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언론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이슈 앞에서 감정적 구호나 정치적 선동이 아니라, 성경과 신학, 공공 윤리에 근거한 해석을 제시하는 언론이 되어야 합니다. 2026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세 가지 약속 첫째, 윤리를 선언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세우겠습니다. 한국기독언론협회는 취재 윤리, 기사 거래 금지, 이해충돌 방지 기준을 분명히 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점검하는 구조를 만들겠습니다. 정치적 언론이 손해 보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협회의 책무입니다. 둘째, 전문성은 열정이 아니라 훈련으로 키우겠습니다. 교회법과 교단 헌법, 비영리 회계, 사회변화와 디지털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언론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기자 교육과 아카데미, 검증 시스템을 통해 ‘일하는 기사’ 이전에 ‘신뢰받는 기사’를 세우겠습니다. 셋째, 공익성을 기준으로 생존 전략을 다시 짜겠습니다. 광고 의존에서 벗어나 구독, 교육, 포럼, 공론장 형성으로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모색하겠습니다. 생존을 위해 원칙을 버리는 언론이 아니라, 원칙 위에서 살아남는 언론이 되겠습니다. 신년의 다짐! 다시, 양심으로 설 것 기독언론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원하지 않는 언론’이 될 것이고, 돌아서면 다시 ‘필요한 언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홍보의 확성기로 남지 않겠습니다. 교회의 눈치를 보는 언론도, 교회를 공격하는 언론도 아닌,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양심의 언론으로 다시 서겠습니다. 2026년은 기독언론이 변명하는 해가 아니라, 증명하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말이 아니라 기사로, 선언이 아니라 실천으로, 신뢰를 다시 쌓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기독언론협회는 그 길의 맨 앞에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2026년 새해를 앞두고 한국기독언론협회 회장

국민노예화, 진리로 해결하라

時事칼럼/양봉식 국장 헌정 질서가 흔들리는 시대 최근 국회에서 논의된 일련의 법안들은 우리 헌정사에 전례 없는 충격을 던지고 있습니다. 내란특별재판부 설치 법안과 사법부 판결에 대한 국회의 직접 개입 시도는 단순한 정치적 논란을 넘어,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사안입니다. 입법부가 사법부를 통제하려 할 때, 권력의 견제와 균형은 무너지고 권력 집중의 길이 열립니다. 이는 법이 국민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위험한 전환점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공의 아래 있습니다. 권력은 하나님께서 질서를 위해 허락하신 도구이지,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한 왕정 아래서 신음할 때마다 예언자들은 외쳤습니다. "너희는 고아의 송사를 도우며 과부의 사정을 변론하라"(이사야 1:17). "의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즐거워하나, 악인이 다스리면 백성이 탄식한다"(잠언 29:2). 정의로운 통치는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타락한 권력은 사람을 종처럼 다룹니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사법 통제 시도와 권력 집중 현상은 성경이 오래전 경고한 바로 그 위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포퓰리즘이 만드는 '의존의 구조' 문제는 정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역사적 최고치를 기록한 국가부채에도 불구하고 현금성 지원과 단기 인기 정책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당장은 달콤해 보이지만, 조세 기반 없이 빚으로 재정을 메우는 방식은 결국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책이 국민을 국가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삶의 기반을 국가에 예속시키는 구조는 시민의 주체적 판단력을 약화시키고, 점차 '국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는 성경이 말한 애굽의 노예 제도와 본질이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에게 종 되었더니, 그 고된 노동으로 신음하매 여호와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출애굽기 2:23). 노예화란 쇠사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적·정치적·정신적 구조 전체가 사람을 예속시킬 때 진정한 노예 상태가 됩니다. 전제주의로 가는 위험한 패턴 언론의 독립성과 감시 기능이 약화되는 현상도 우려스럽습니다. 공영방송 이사회 개편과 방송법 개정 논란은 다양한 목소리를 제한하려는 시도로 비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선언하신 것은 진리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는 순간 자유도 함께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언론이 침묵할 때 국민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기준을 잃게 됩니다. 정보가 통제될수록 시민은 권력이 보여주는 것만 보게 되고, 이것이 바로 내면적 노예화입니다. 정치·경제·언론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사법부 통제 시도, 입법부로의 권력 집중, 포퓰리즘을 통한 국민 예속화, 언론 약화와 정보 통제—이는 역사 속 독재 국가들이 걸어간 전형적인 경로입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바벨탑 체제로의 회귀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창세기 11:4)던 바벨의 비극은 인간 권력의 집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조짐도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단순한 정치적 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책임을 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에, 어떤 권력도 사람을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국민이 권력의 도구가 되거나 권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이는 단순한 정책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영적 침탈입니다. 필요한 것은 영적 각성 오늘의 위기는 정권이나 정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자유의 본질을 잊어버린 데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외칩니다.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4:42),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로마서 12:2). 정치가 타락할 때 필요한 첫 번째 변화는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영적 분별력입니다. 그 분별력이 회복될 때 국민은 포퓰리즘의 달콤함을 거부할 힘을 얻고, 권력 집중의 위험을 파악하며, 거짓에 속지 않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행동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재정이 무너지며, 국민은 국가 의존 구조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시간이 지나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자유는 인간의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자유를 지키려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권력의 피지배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존엄한 존재로 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원점으로의 회복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찰리 커크,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밀알이 될 것”

세계 자유 사랑 운동을 이끌던 찰리 커크(Charlie Kirk)가 9월 10일, 유타밸리대학교 강연 도중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졌다. 이 소식은 전 세계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다. 찰리 커크는 미국 건국 이념에 충실하며 자유를 수호한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국가적 비극으로 받아들여졌고, 국민들은 조기를 게양하며 애도에 동참했다. 그는 불과 18세의 나이에 ‘터닝 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를 창립하고, 청년과 대학생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신앙 회복 운동을 선도했다. 이러한 사역은 전제주의와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저항을 불러왔다. 자유와 거룩을 무시하고 인간을 짐승이나 단순한 도구로 여기는 세력은 인명을 경시할 뿐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고 심지어 반대자를 제거하기까지 한다. 이번 참혹한 사건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찰리 커크는 자유와 신앙의 가치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귀한 존재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역사의 교훈을 전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자유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진리이다. 대한민국의 자유 또한 피로 지켜졌다. 6.25 전쟁에서 자유를 지켜낸 미군 3만 6,500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지금도 약 2만 8,500명의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며 한미 혈맹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왔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가던 찰리 커크에 대한 공격은 단지 개인에 대한 테러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때 자유를 사랑하는 참된 크리스천은 미국과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명한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대한민국도 미국의 아픔을 함께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이 총탄에 쓰러져도 그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듯, 찰리 커크의 피 역시 결코 묻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해 셋을 세우셨듯,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이 바울을 회심시키는 씨앗이 되었듯, 찰리 커크의 죽음 또한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밀알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신앙인으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 세계 자유와 평화를 위한 씨앗이 되리라 믿는다. 자유대한민국과 미국의 건국 이념이 영원히 빛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유선화 사모의 요한계시록 더보기

밧모 섬의 요한(계 1:9)

1. 너희 형제 요한 “나 요한은” 요한은 1절에서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라고 말하였고, 2절에서는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다 증언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1인칭으로 “나 요한은”이라고 하여 서신의 발신자가 자신임을 확실히 짚어줍니다. “나 요한”은 누구입니까?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나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인 “너희 형제”라고 말합니다. 누가 계시록의 수신자입니까? 하나님의 종들(계 1:1),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상징되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계시록의 수신자들입니다(계 1:4). 요한은 우리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왕권)에 동참했지만, 환난과 참음에도 동참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2. 밧모라 하는 섬에 있는 이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증언하였으므로”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 ‘마르튀리아’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섬에 있었습니다. ‘마르튀리아’는 계시록에서 ‘증언’, ‘증거’로 번역되었는데, 믿는 자의 전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의 증거(증언)”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만이 예수의 사람입니다(롬 8:9). 이는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입니다. 또한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인 영생이 증거입니다(요일 5:11).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한 천사는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계 19:10). 예수의 증언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을 가진 자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합니까? “예수의 증언함(‘마르튀리아’)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합니다(계 20:4). 즉 그들은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기 생명이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이 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합니다(계 20:6). 계시록에서 성도에 대해 처음 하신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한 나라(왕)와 제사장이고(계 1:6), 마지막 말씀은 왕 노릇입니다(계 22:5).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려진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입니다(계 5:9,10). 그들은 요한처럼 하나님의 나라 즉 왕권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마르튀리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자기 생명이 죽은 자들)이 제단 아래에서 신원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계 6:9). 용은 여자의 남은 자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마르튀리아’)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 합니다(계 12:17). 그는 박해하는 용(계 12:13), 유혹하는 뱀입니다(계 12:15). 그는 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와 싸웁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도의 인내와 믿음을 말씀합니다(계 13:10, 14:12). 성도가 당하는 환난과 참음입니다. 당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비롯한 모든 교회가 박해와 유혹 가운데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옥에 던져지고 순교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음을 말합니다. 환난과 참음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보고 들은 계시를 기록하여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기 위하여 요한은 어떤 배경에서 계시록의 계시를 받게 되었는가 설명합니다. 그는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가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 기록합니다. 출처 :https://blog.naver.com/rsh6771/223840355442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주하나님(계 1:7,8)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1.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 “볼지어다” 요한은 “보라”라고 말합니다.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그가 즉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하시고(5절),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왕)과 제사장 삼으신 그분(6절)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5절).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52, 눅 21:27).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각 사람의 눈 즉 각각의 사람의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즉 모든 인류가 한 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눅 21:35). 예외의 사람이 없습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그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할 것입니다. 그러하다고 한 번 더 긍정합니다. 마태도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라고 같은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마 24:30). 주님께서 오시는 날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입니다. 그 날에 통곡하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누구이고, 그들은 왜 통곡합니까? 계시록에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믿지 않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땅에 사는 자들”, “땅에 거주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통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남아 있던 자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입니다(살전 4:16,17). 믿는 자들의 휴거입니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 그리스도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입니다(히 9:28). 그들은 통곡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보는 그 때에,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3:26,27). 휴거는 조용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 즉 땅에 사는 모든 족속이 보는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날 자신들이 거절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복음을 거절한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갈 것입니다(요 5:28,29). 주님께서 그분의 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의인들은 영생에, 불의한 자는 영벌에 들어갈 것입니다(마 25:31,32,46). 그분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통곡할 것입니다. 2.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작한 일을 마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지금도 계신 하나님, 전에도 계셨던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것입니다. 앞 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주 하나님께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분은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은 일곱째 나팔을 부는 날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입니다(계 11:18).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계 11:17).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계시록에서 세 번씩 말씀하여 그 말을 확증합니다. 특별히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홉 번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십니다. https://blog.naver.com/rsh6771/223836988362

인사와 경배(계 1:4~6)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 인사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요한은 먼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고 말합니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수신자를 밝힙니다.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는 어느 교회들입니까? 주님은 요한에게 그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그리고 2장과 3장에서 그 교회의 사자들을 각각 지목하시며 그들에게 보낼 말씀을 주십니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는 말로 서신을 시작한 요한은 그들에게 그가 본 것을 기록하여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당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수는 상징입니다. "일곱"은 하나님의 수로 "완전함"과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즉 일곱 교회는 완전하고 충만한 교회로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실질적인 수신자는 모든 믿는 자들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종들(계 1:1, 22:6), 교회들(계 22:16)을 위한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는 말로 시작하였지만, 이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향한 인사가 될 것입니다. 2. 기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어서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하며 그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8절에서도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마침이 되십니다. “전에도”가 아니라 “이제도”가 먼저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이제도 있고”입니다. 순서상 현재가 우선입니다.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의 성도들과 함께 하셨고, 앞으로의 성도들과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2)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함, 온전함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완전하고 온전한 일곱 영은 성령님이십니다.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 4:5). 3)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를 계시하시는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근본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골 1:18). 요한은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3. 경배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어서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며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속하신 피는 오직 흠 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벧전 1:18). 그분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습니다(계 5:9,10). ‘나라’는 ‘바실류스’로 ‘(절대형의)주권자 또는 왕’이라고 정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고. 그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계시록에서 교회에 대해 처음 하신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었고, 영으로는 에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습니다(창 1:28, 2:15). 그러나 인류가 타락함으로 통치권은 빼앗겼고(눅 4:6),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창 3:24).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 안에서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왕,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영광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왕과 제사장 삼았다는 말씀은 앞으로 전개될 계시록의 말씀을 집약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합니다(계 5:10). 요한은 영광과 능력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출처]인사와 경배(계 1:4~6)|작성자말씀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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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끝까지 밝혀야 한다” 전국 신천지 피해자들, 압수수색·특검 촉구 성명 발표

▲전국신천지피해자연대는 최근 진행 중인 압수수색과 관련 특별검 검사를 포함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전피연 사진 제공 코로나19 이후 사회 전반에 깊은 상처를 남긴 각종 범죄와 가정 파괴의 원인으로 지목돼 온 신천지에 대해, 피해자 가족들이 다시 한 번 강력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고 나섰다. 전국신천지피해자연대는 1월 30일 성명서를 통해 최근 진행 중인 압수수색과 관련한 수사가 이번에도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것 아니냐는 깊은 우려를 표하며, 합동수사본부 또는 특별검사 도입을 포함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한민국은 지금, 신천지로 인해 파괴된 가정과 인생, 그리고 각종 범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며 “그러나 그동안 반복돼 온 수사 중단과 미진한 처벌의 전례를 떠올릴 때, 피해자들은 다시 한 번 좌절을 겪을 수 있다는 불안 속에 있다”고 밝혔다. 특히 피해자연대는 과거 수사 과정에서 ‘증거 부족’, ‘고령’을 이유로 핵심 인물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흐려졌던 사례들을 언급하며, 이번 수사에서는 정치권과 검·경 내부의 유착 의혹이 철저히 차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신천지와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는 정치인, 경찰, 검찰 관계자들이 수사에 개입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며 “합수부나 특검이 구성될 경우, 신천지 소속이거나 관련성이 의심되는 검·경 인력은 전면 배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 뿌리내린 신천지 12지파 사무실에 대해서도 동일 범죄의 온상으로 지목하며, 전면적인 압수수색과 실체 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연대는 “청년들이 학업과 직장, 꿈을 포기한 채 교주 이만희의 노예로 전락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며 “이는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사회적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명서는 특히 그간 외부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내부 성폭력 사건과 각종 비리, 조직적 범죄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며, “이번 수사를 통해 정치 개입은 물론 교주를 포함한 범죄집단 신천지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아울러 피해자연대는 신천지를 향해 “부모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자녀들을 즉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라”며 강력히 요구했다. 이들은 “백만 피해 가족들은 이번 수사를 끝까지 지켜볼 것”이라며 “국민들 또한 이 문제를 특정 집단의 갈등이 아닌 사회 정의의 문제로 인식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번 성명은 단순한 처벌 요구를 넘어, 종교를 가장한 조직적 범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사법 정의의 실현을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수사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그리고 과거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수능 이후, 이단 사이비 ‘고3 학생 집중 포섭’…교회·사회 경계 강화 필요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직후, 이단과 사이비 단체들이 고3 학생들을 주요 포교 대상으로 삼아 활동을 강화한다는 경고가 나왔다. 여수종교문제연구소(소장 신외식 목사)는 11월 1일 “수능 이후부터 오는 2026년 3월까지 ‘이단 사이비 주의보’를 발령한다”고 밝히며 전국 교회와 학부모, 교육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경각심을 요청했다. ▲여수종교문제연구소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직후, 이단과 사이비 단체들이 고3 학생들을 주요 포교 대상으로 삼아 활동을 강화하다며 주의를 요망했다(사진은 기사와 무관) 수능을 마친 학생들은 해방감과 진로 불안이 교차하는 심리적 공백기에 놓이기 쉽다. 이를 노린 이단 단체들은 다정한 이미지와 도움을 제공하는 척 접근하며 관계를 형성한 뒤, 조직적 포섭을 시도한다. 연구소는 “특히 수시모집으로 대학을 방문하는 고3 수험생에게 대신 원서를 접수해준다거나 정서적 위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단 단체들의 대표적 포섭 방식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설문조사’를 명목으로 이름, 연락처, 주소 등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형태다. 둘째는 문화·교육센터를 가장해 POP, 종이공예, 서예, 수화 등을 무료로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청소년을 유인한다. 셋째는 같은 학교 출신, 선후배, 동아리 인맥 등 친분을 활용한 접근이며, 넷째는 대학 내 동아리 활동을 통해 신입생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방식이다. 특히 연구소는 “처음에는 따뜻한 관심과 친절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성경 공부 모임이나 교리 교육으로 끌고 가며 본격적인 통제와 세뇌가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통교회 목회자나 선교사’를 사칭하는 경우도 있어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수종교문제연구소는 이번에 ‘수능 이후 이단·사이비 이렇게 대처하자’라는 A4 자료를 전국 교회에 배포했다. 내용에는 ▲수능 이후 교회의 진로지도 및 청소년 프로그램 운영 ▲설문조사 참여 금지 교육 ▲문화센터 및 무료 강좌 출처 확인 ▲대학 신입생의 동아리 가입 시 선교단체를 통한 정보 확인 등이 포함돼 있다. “고3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가 전국 교회에서 열리고 있지만, 동시에 이단 침투에 대한 대비와 기도도 병행돼야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연구소는 각 교회가 고등부 학생과 청년부를 대상으로 예방 교육을 강화하고, 학부모와 교역자, 선배들이 수험생의 생활과 인간관계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단 문제는 사후 처리가 아니라 사전 예방이 가장 효과적이며, 특히 수능 이후 4개월은 가장 취약한 시기”라고 재차 경고했다.

출국금지 류광수, 부산 벡스코서 청소년 집회 강연 논란

부산시의 대표적인 공공시설인 벡스코(BEXCO)가 성범죄 및 700억 원대 횡령 혐의로 수사 중인 류광수 씨가 이끄는 단체에 청소년 대상 대형 행사를 대관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선 행사는 오는 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 열릴 예정인 ‘세계렘넌트대회(World Remnant Conference, 이하 WRC)’다. 세계복음화전도협회와 세계청소년교류연맹이 공동 주관하는 이 대회는 수천 명의 국내외 청소년들이 참석하는 연례행사다. 문제는 이번 대회에서 류광수 총재가 직접 무대에 올라 설교 및 강연을 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류 씨는 현재 법무부로부터 출국금지 처분을 받은 상태로, 성범죄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업무상 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법조계와 시민단체는 이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코람데오연대 자문변호사 김상수(법무법인 선린)는 “수많은 미성년자 청소년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성범죄 수사 중인 인물을 강사로 세운다는 것은 정신건강과 발달에 심각한 위해가 될 수 있다”며 “이는 정서적 학대에 해당할 수 있으며, 아동복지법 및 아동학대방지 차원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벡스코가 부산시의 출자·출연기관이라는 점에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부산시는 벡스코의 최대 주주로 42.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26%를 보유하고 있다. 즉 벡스코는 사실상 공공시설로, 아동과 청소년의 안전과 정신건강 보호에 대한 공적 책무를 지닌다. 이에 대해 벡스코 측은 “해당 대관은 내부 절차에 따라 접수 및 승인된 사안”이라고 설명하면서도, “다락방(세계복음화전도협회)의 성범죄 관련 의혹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유사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와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민단체 측은 이런 입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입장이다. 특히 공공시설 대관의 책임성이 문제가 된 이번 사례는 단순한 행정 절차의 문제를 넘어, 아동 보호와 공공기관의 도덕적 책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편, 류광수 총재는 과거에도 종교적 권위를 이용한 정신적 통제와 성적 착취 문제로 언론 및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으며, 이번 출국금지 및 수사 상황에서도 여전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강연에 나선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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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대한민국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나라

"22세기에도 대한민국은 살아 있을까." 도발적이다 못해 서늘한 이 질문 하나가 책의 표지를 뚫고 나온다. 2026년 1월, 세이지 출판사가 펴낸 김미영 VON뉴스 대표의 신작 〈숨은민국—주체사상파·부정선거·북한인권 그리고 마이 라이프〉는 출간과 동시에 보수 기독교 지식인 사회와 안보·이념 논쟁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저자가 수십 년에 걸쳐 언론 현장과 북한인권 운동, 국제인권 무대에서 축적해 온 문제의식과 경험을 집대성한 이 책은, 단순한 이념 고발서도 정치 비평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직시된 적 없는 '보이지 않는 나라'의 실체를 추적한, 한국 현대사 최전선의 기록이다. 2024년 12월 3일이 촉발한 각성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오랜 잉태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 계기는 뚜렷하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2024년 12월 3일의 계엄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그 사건을 통해 이 책의 주제를 공유할 독자들이 제법 있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엄 선포와 그 후폭풍으로 한국 사회가 격렬하게 요동치던 그 시점에,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평생 가슴에 품어 온 질문을 세상 앞에 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더 이상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저자가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뿌리를 "보이지 않게 작동해 온 또 하나의 나라", 즉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지만, 저자의 시선에 따르면 분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물리적 분단과 더불어,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수평이 아닌 수직의 분열, 다시 말해 '위의 나라'와 '아래로 숨은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숨은민국'과 '은국민'이란 무엇인가 〈숨은민국〉이 제시하는 개념적 틀은 독특하고 도전적이다. 1945년 38선으로 남북이 갈린 한반도는 6·25전쟁을 거쳐 1953년부터는 휴전선이라는 더 길고 넓은 경계선으로 갈렸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만 갈린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도 다시 두 개의 나라로 갈렸다.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갈렸다. 이 두 개의 나라 중 한 나라는 아래로 '숨은' 나라였다. 저자는 이 숨은 나라의 구성원을 '은국민(隱國民)'이라 명명한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적지 않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존재 이유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실상이 바로 '은국민'이다. 은국민들은 한국인을 통칭하여 극우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저자는 명확한 경고를 덧붙인다. 저자는 숨은민국을 북한이나 중국 공산당의 단순한 하수인으로 축소하는 시각을 경계한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신념·조직·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복잡계'이며, 한국 사회의 문화·지식·정치 영역 깊숙이 뿌리내려 왔다고 주장한다. 책의 제목을 거꾸로 읽으면 '국민은 숨(breath)'이 된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제목을 통해 국민의 목숨이 걸린 대한민국 상황에서 숨은민국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설명하는 저자 김미영 대표(동영상 캡처) 두 개의 지하정당에서 북한인권까지 책은 크게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숨은민국'을 움직여 온 두 개의 지하정당에 대한 역사적 추적이다. 숨은민국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이 책에서 선택한 것은 두 개의 정당에 다가가는 것이다. 은국에 여러 개의 지하정당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정당으로 특정하는 것은 통일혁명당(통혁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저자의 분석은 단호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조용히 점령한 은국의 지도부는 통혁당, 그리고 은국민 대중은 민혁당을 통해서 대거 양산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두 정당은 불법적 비밀정당 형태였지만 실체로서 존재했고, 몸을 숨길 뿐 사라진 적이 없다. 나아가 1960년대의 통혁당은 1990년대의 민혁당과 본질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두 번째 축은 주체사상파, 이른바 주사파에 대한 저자 본인의 장기 취재 기록이다. 1999년 '월간조선'과 '시대정신' 등을 통해 이루어진 김영환 그룹과의 인터뷰, 그리고 '전향'이 아닌 '전환'이라는 표현을 둘러싼 논쟁은 당시 한국 지성계와 운동권 내부의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북한 정권의 건국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발언이 대한민국 헌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사상적 모순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추적한다. 세 번째 축은 북한인권 문제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책은 북한인권 문제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김미영 대표는 1999년 이후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해 전시·전후 납북자 구출 운동·정치범수용소 해체 운동·'통영의 딸' 구출 운동 등 굵직한 현안의 최전선에 서 왔다. 저자가 말하는 7가지 역사적 진단 저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을 7가지로 정리한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의지가 100년 이상 치열하게 지속되어 왔다는 것,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적이 상존한다는 것, 대한민국과 우방국을 위협하는 공작망이 실재한다는 것, 반체제 지식인들에 대한 혁명 세화 공작이 종북 지하당의 건설로 이어졌다는 것(4·19 직후 통일혁명당, 5·18 이후 민족민주혁명당), 통혁당과 민혁당의 특징과 정치 세력화 성공, 지하 정당의 변신과 보수 우파 정당과의 화학적 결합에 따른 합법 정당 설립, 그리고 진정한 대한민국의 제도 정당 실종 상태가 그것이다. 숨은민국의 최종 귀결점에 대한 저자의 진단도 명확하다. 저자는 '숨은민국'의 귀결점은 결국 '원 차이나'이며 주사파·민혁당은 그것을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말로 포장하여 북한의 나아갈 길이라고 말해 왔다고 분석한다.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자유선거가 없는 시장경제'를 말하며 중국이 그런 체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왔다고 선전해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쟁의 끝자락에서 희망을 말하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어떤 전쟁의 끝자락에서"다. 저자는 이 제목 하나로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의 좌표를 압축한다. 이미 수십 년째 이념 전쟁의 한복판을 걸어온 사람의 목소리로, 그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대한민국 사람들, 보통의 선량한 '한국인들'을 위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국적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쓴다.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라는 모종의 불안감이 있는 사람도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한다. 숨은민국은 결코 단순하지도 만만치도 않다. 명백히 '복잡계'다. 그들의 신념도 이해해야 하지만 그들의 실력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과 실력을 압도할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야 한다. 이 결론은 고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호소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저자 김미영은 누구인가 이 책의 무게는 저자의 이력과 분리될 수 없다. 저자 김미영은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한국현대문학 석사)을 마치고,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과 미국 노틀담 대학 법대에서 미국법과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다. 주체사상파(주사파) 학생운동권 전향 문제 특종으로 조선일보에 특채되어 북한문제를 주로 다루는 기자로 일했다. 책을 통해 한국의 현 상황의 위기를 경고하는 김미영 대표 그의 삶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었다. 1999년부터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하여 전후·전시 납북자구출운동에 헌신했고,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연구실장, 정치범수용소 해체운동과 오길남 박사 가족 '통영의 딸 구출운동'을 펼쳤으며, 황장엽 방미 수행단으로 동행했고, 유엔인권이사회에 NGO 활동가 자격으로 사이드이벤트를 여는 등 북한 김일성 3대의 반인도범죄와 전쟁범죄 규정을 위해 일했다.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도 이 책의 저변을 흐른다. 잠시 김 대표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녀는 주사파의 주요 인물로 자리잡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된 것은 하나님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반근대 세력들을 견제하는 데 지금까지 쓰임받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필독서"와 "절규"의 사이에서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한 독자는 "저자 김미영 선생의 그동안의 아픔이 무엇인지, 절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의 소박하지만 거창한 인생목적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알게 해 주었다"며 "이 책은 사회과학 평론도 아니요, 문학작품도 아니요, 단순한 저널리스트의 취재수첩도 아니지만, 그 울림의 강도에 있어 일반 서적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고 평했다. 또 다른 독자는 "부정선거와 법치 파괴를 통해 3권분립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경제노동악법 제정을 통해 산업기반 파괴와 국유화를 진행시키는 현실을 이 책이 홍콩이나 베네수엘라행 급행열차를 탄 느낌으로 그려냈다"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고 밝혔다. 서점 구매 리뷰에서도 "작금의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한편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한 보수 기독교 논자는 "국민 대다수는 이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을 듯싶다. 이유는 그들은 공산주의를 포함한 좌익사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며 이념적 문맹이 이 책의 경고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 시대에 이 책이 갖는 의미 〈숨은민국〉은 특정 진영의 주장을 담은 이념서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공산주의 세력의 100년 권력 투쟁, 북한이라는 상존하는 적의 존재, 남한과 해외에까지 뻗은 공작망, 반체제 지식인에 대한 조직적 포섭, 통혁당과 민혁당의 성격 차이, 운동권 정치세력의 분화와 변신, 그리고 제도 정당의 실종까지를 하나의 체계적 세계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고발서가 아니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한 번도 정면으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 즉 "이 나라 안에 이 나라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김미영은 자신의 평생을 걸고 답한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질문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분단 80년, 건국 78년이 된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생존을 진지하게 묻기 시작해야 할 때, 이 책은 그 불편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한국 교회 목회자 절반 이상, 이미 AI로 설교 준비한다

챗GPT가 세상에 등장한 지 불과 2년 반 만에, 한국 교회 강단의 풍경이 조용히 바뀌고 있다. 이제 목회자 두 명 중 한 명 이상은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공지능(AI)의 도움을 받는다. 불과 2년 전만 해도AI로 설교를 준비한다는 목회자는 열 명 중 두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목회 현장 깊숙이 파고든 AI가 한국 교회에 새로운 기회와 심각한 도전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와 희망친구 기아대책이 2025년 5월, 전국 담임목사 500명과 개신교 성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교회 트렌드2026」 조사(AI 목회 코파일럿)에서 이 같은 실태가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됐다. AI가 목회 현장에서 단순한 유행을 넘어 실질적인 사역 도구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과, 그 이면에 한국 교회가 직면한 신학적·영성적 과제를 짚어본다. 2년 새3배 이상 급증… "목사님도AI 씁니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수치는 단연 목회/설교 분야의 AI 사용률이다. 2023년 3월 17%에 불과했던 수치가 2025년 5월 58%로 껑충 뛰었다. 3배 이상의 증가율이다. 목회자의 전반적인 AI 사용률 역시 같은 기간 41%에서 80%로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AI를 아예 쓰지 않는 목회자가 이제는 다섯 명 중 한 명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는 한국 사회 전반의 AI 확산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조사전문기관 컨슈머인사이트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국내18~65세 성인 가운데 생성형 AI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비율은 75%에 달하며, 한 달에 한 번 이상 사용하는 활성 이용자 비중도 61%에 육박한다. 교회가 사회 흐름의 담장 밖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AI 활용 범위도 넓어졌다. 2023년에는 설교 또는 강의 준비를 위한 자료 획득에 집중됐던 반면(95%), 2025년 조사에서는 성경 공부 준비(+8%p), 교회 행사 기획(+6%p), 기도문 생성(+5%p) 등 콘텐츠 생성과 기획 전반으로 활용 영역이 확대됐다. AI가 단순 검색 도구에서 실질적인 사역 보조 수단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족은 절반, 5점 만점에3.5점… "아직은 아쉽다" 그러나 현장의 만족도는 사용률만큼 높지 않다. AI를 목회/설교에 활용해본 목회자들의 55%가 만족한다고 답했지만, 5점 만점 기준 평균은 3.5점에 그쳤다. 10명 중 1명(11%)은 불만족을 표했다. 이는 AI가 설교 준비의 효율성을 높여주지만, 목회자의 고유한 신학적·목양적 필요를 아직 충분히 채우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설교의 어떤 부분에 AI를 쓰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뚜렷한 온도 차가 드러났다. 설교 예화나 자료 수집에 대해서는 목회자의 93%가 적절하다고 답한 반면, 성도는 66%에 그쳤다. 설교문 주제 선정에서도 목회자(68%)가 성도(44%)보다 24%p 높은 긍정률을 보였다. 가장 첨예한 갈등 지점은 설교문 작성이다. 목회자의 44%만이 AI로 설교문을 직접 작성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답했고, 성도는 65%가 적절하지 않다는 반대 의견을 보였다. 성도들에게 설교문은 여전히 목회자의 영혼과 묵상이 담긴 고유한 산물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연령별 차이다. 49세 이하 목회자는 58%가 설교문AI 작성을 적절하다고 봤지만, 60세 이상은 46%로 낮아졌다. 젊은 목회자일수록 AI에 더 열려 있다. 찬성vs 반대, 핵심 논거는"효율" 대"묵상" AI를 설교문 작성에 활용하는 것에 찬성하는 목회자들이 드는 이유는 명확하다. 참고 성경구절이나 문헌을 찾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라는 응답이 60%로 압도적 1위였고,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설교를 준비할 수 있어서(30%)가 뒤를 이었다. AI를 사역의 속도와 질을 높이는 코파일럿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반면 반대 측의 논거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설교 준비에 필요한 개인적 묵상과 연구가 줄어들어서라는 이유가 65%로 단연 1위였다. 설교자의 생각과 노력이 들어가지 않아서(29%)가 그 뒤를 이었다. AI가 주는 편의가 목회자의 영적 사고력과 신학적 치열함을 무디게 할 수 있다는 우려다. 설교를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영적 산물로 보는 한국 교회의 전통적 설교관이 AI와 충돌하는 지점이다. 목회자44% "AI, 설교 준비의 필수 도구 될 것"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목회자의 52%는 AI가 설교 준비에서 제한적인 역할에 그칠 것이라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44%는 필수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절반에 가까운 목회자가 AI를 일시적 유행이 아닌, 미래 사역 환경의 핵심 인프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AI를 목회에 써본 목회자의 63%는 앞으로 AI를 더 많이 사용할 것 같다고 답했다. 아직 목회에는 도입하지 않았지만 AI 사용 경험이 있는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향후 목회 활용 의향이 63%에 달했다. 현장 적용을 관망해온 목회자들이 실제 도입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목회자81%, "성도 맞춤형AI 신앙 서비스 도입하고 싶다" AI를 설교 준비 도구로 쓰는 것을 넘어, 성도를 위한 신앙 서비스에 AI를 도입하고자 하는 열망도 높았다. 개인의 신앙 수준과 영적 필요에 맞춰 설교, 성경공부, 묵상 자료를 제공하는 AI 맞춤형 신앙 서비스에 대해 목회자의 81%가 활용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성도의 61%도 긍정적 반응을 보였지만, 목회자의 열망이 20%p나 더 높았다. 성도들이 가장 원하는 AI 신앙 서비스 1위는 상황에 맞춘 묵상과 찬양 콘텐츠 제공(34%)이었으며, 신앙 상태에 따른 성경공부 안내(28%), 나에게 맞는 설교 추천(22%) 순이었다. AI를 일방적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 상황에 반응하는 맞춤형 영적 동반자로 기대하는 성도들의 심리가 반영됐다. 교회 전산화 분야에서는 목회자와 성도 모두 교회 행정 전산화(각각 64%, 61%)와 회계 및 예산 관리를AI 도입 최우선 과제로 꼽아, 핵심 사역 외 행정 부담을 줄이는 데AI가 먼저 쓰이길 기대했다. 도구는 왔다, 지혜가 남았다 이번 조사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함의는 수치 이면에 있다. AI 사용률의 폭발적 증가 뒤에는 목회자들이 조용히 씨름하는 질문이 있다. 기술이 가져오는 편의성이 영성의 깊이를 대체할 수 있는가. AI가 생산해내는 매끄러운 설교문이 목회자의 치열한 신학적 묵상과 기도에서 우러나온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가. AI 시대 교회의 과제는 기술을 거부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지혜롭게 다루는 영성과 안목을 갖추는 것이다. 연구소 측은AI 도입의 목표는 확보된 시간을 성도를 향한 돌봄과 깊은 영적 묵상에 재투자하는 데 있어야 하며,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성도와의 교제, 심방, 기도라는 본질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전략을 세운 다음에야 전쟁을 할 수 있고, 참모가 많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잠언의 지혜가AI 시대에도 유효한 이유다(잠24:6).

'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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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비율 반등…'불신'보다 무서운 '무관심'의 벽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지속적인 탈종교화 흐름 속에서 마침내 반전의 신호가 감지됐다. 한국갤럽이 최근 공개한 '한국인의 종교 1983~2025'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2년과 2024년에 역대 최저치(37%)까지 떨어졌던 우리나라 종교 인구 비율이 2025년 40%를 회복하며 3년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 특히 기독교인 비율은 2024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서 2025년 18%를 기록, 불교(16%)와 가톨릭(6%)을 제치고 3대 종교 중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이번 조사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7,647명을 대상으로 2025년 3월부터 11월까지 한국갤럽이 면접조사 방식으로 수행한 것으로, 95% 신뢰수준에서 표본오차는 ±1.1%p다. 2004년 이후 첫 반등…탈종교화의 '가파른 기세' 일단 저지 한국 사회의 종교 인구는 1983년 44%에서 출발해 2004년 54%로 정점을 찍은 뒤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2013년 50%였던 비율은 10년 사이에 37%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2025년 조사에서는 전년 대비 3%포인트 상승한 40%를 기록하며 장기 하락세에 제동이 걸렸다. 무종교 인구는 여전히 60%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2020년 이후 60%대 초반에서 정체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탈종교화의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성별로는 10년 전(2015년)과 비교해 남성 종교인 비율이 41%에서 31%로 10%포인트 하락한 반면, 여성은 55%에서 49%로 6%포인트 떨어져 남성의 감소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전 연령대에서 8~12%포인트 하락했으며, 60세 이상만이 52%로 절반을 지켜낸 것으로 확인됐다. 청년층에서도 기독교 독보적 우위 이번 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지점은 청년층에서의 기독교 우위다. 40대 이하 연령층에서 기독교는 불교와 가톨릭을 크게 앞서고 있다. 19~29세 응답자 중 기독교인 비율은 14%로, 불교(4%)와 가톨릭(6%)을 훨씬 웃돈다. 30대에서도 기독교 16%에 비해 불교 6%, 가톨릭 7%로 격차가 뚜렷하다. 이는 기성세대에서 불교 세력이 강한 것과 달리, 젊은 세대로 갈수록 기독교가 종교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 60세 이상에서는 불교(27%)가 기독교(18%)를 크게 앞서 세대 간 종교 지형의 뚜렷한 대비를 보여줬다. 성별로는 여성 기독교인 비율이 23%로 남성(13%)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신앙 실천 면에서도 기독교인의 경건 생활은 타 종교를 압도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성경(경전)을 읽는다'는 응답에서 기독교인은 61%로 종교인 전체 평균(38%)을 크게 웃돌았다. 이는 가톨릭(45%)보다 16%포인트, 불교(6%)와 비교하면 무려 10배 이상 높은 수치다. '하루에 한 번 이상 기도한다'는 항목에서도 기독교인(43%)이 가톨릭(39%), 종교인 전체 평균(29%), 불교(7%)를 모두 앞섰다. 진짜 위기는 '이탈'이 아니라 '무경험'과 '무관심' 그러나 반등의 소식이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다. 무종교인의 종교 인식을 들여다보면 더욱 근본적인 과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선 '과거에 종교를 믿은 적이 있다'는 무종교인의 비율이 2025년 2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현재 무종교인 중 78%가 평생 어떤 종교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순수 무종교인'이라는 뜻이다. 탈종교화가 단순한 신앙 이탈을 넘어 '종교 무경험'이 사회에 고착되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경고다. 과거 신앙 경험이 있는 무종교인 중에서는 기독교 출신이 51%로 가장 많았고, 불교(34%), 가톨릭(15%) 순이었다. 이는 타 종교에 비해 기독교에서 무종교로 이탈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음을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무종교인의 종교 호감도다. 무종교인 3명 중 2명(67%)은 '호감 가는 종교가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2004년 33%, 2014년 46%, 2021년 61%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해온 것으로, 종교 전반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이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는 '관심이 없어서'가 52%로 가장 높았고, '정신적·시간적 여유가 없어서'(20%),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13%)이 뒤를 이었다. 과거의 탈종교화가 종교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적극적 '이탈'이었다면, 이제는 종교를 삶의 선택지에서 아예 지워버린 '심리적 단절'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무관심의 벽'을 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새 과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게 제언했다. 첫째, 반등의 신호를 발판 삼아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교회를 찾는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착시키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단순한 수적 증가를 목표로 하는 전도를 넘어, 새가족 정착과 양육 시스템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무관심의 벽'을 넘기 위해 종교적 권위를 내려놓고 '일상의 접점'을 회복해야 한다. 공격적인 전도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 교회는 종교적 의무를 강요하는 공간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짐을 덜어주는 안식처이자 의미 있는 관계를 제공하는 공동체로서의 매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한편 초자연적 세계관에 관한 조사에서는 우리 국민의 57%가 '기적이 존재한다'고 응답해, 종교인 비율(40%)을 훨씬 웃도는 수치를 나타냈다. 이는 무종교인이라 하더라도 초월적 차원에 대한 내면의 갈망이 여전히 존재함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한국 교회가 복음 전도의 접점을 찾는 데 있어 새로운 가능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반등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한국 교회 앞에 놓인 과제는 분명하다. 문을 여는 것, 그리고 찾아오는 이를 진심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팍스 차이나(Pax Sinica)의 야망과 문명의 균열

미국은 팍스 차이나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AI 이미지 역사에서 강대국은 2인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미국을 제치려는 야망은 ‘일대일로’ 전략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夢’이 세계를 제패할 것인가? 미국은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와 이란의 전쟁을 통해 중국에게 경고장을 날렸다. 2인자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팍스 아메리카를 유지하려는 전략만은 아닐 것으로 보이다. 본지는 중동(이란 루트와 '저항의 축' 지원 배후), 아프리카(채무의 덫과 인프라 식민지 — 아이러니하게도 K-방산의 진출로가 된 역설), 유럽(일대일로 경제 침투 + 이슬람 인구학적 팽창 + 문화막시즘의 3중 포위 — 문 닫은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팔리는 유럽의 현실 The Korea Daily), 동남아(인도네시아 채무 함정 실례), 남미(베네수엘라·멕시코). 그리고 트럼프 반격의 효과와 한계, 기독교 문명의 내부 붕괴 문제를 담는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 주> 서론: 세계를 재편하는 조용한 전쟁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밝힌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은 단순한 인프라 투자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21세기 팍스 차이나(Pax Sinica), 즉 중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100년 대전략의 출발 신호였다. 아프리카의 항구, 중동의 석유 루트, 유럽의 수도 한복판, 동남아의 철도, 남미의 광산까지 — 중국의 붉은 자본은 이미 지구의 혈관을 장악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 전략의 더 깊은 차원에는 경제적 침투를 넘어선 문명의 교체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전체주의 통치 모델이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 그리고 기독교 문명이 세속주의·이슬람·문화마르크시즘의 연합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이 대전략의 핵심 시나리오다. 아산정책연구원의 2026년 이슈브리프는 "강대국 일방주의와 예외주의가 횡행하며, 기존 국제질서를 규정짓던 정치·경제적 레짐들이 약화됐다"고 진단한다. 세계는 지금 무질서 속의 체제 전환기에 서 있다. "일대일로는 인프라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중화 세계질서 재건을 위한 100년 전략이다" Ⅰ. 일대일로의 전 지구적 판도: 5개 전선의 실체 1) 제1전선— 중동: 이란과 저항의 축 일대일로의 지정학적 핵심은 이란이다. 이란은 아시아와 유럽, 남반구와 북반구를 연결하는 최대 규모의 국제 수송 회랑이자, 중국의 에너지 안보를 떠받치는 전략 거점이다. 중국은 이란과2021년25년 포괄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석유·가스 개발에서 인프라, 군사 협력까지 전방위 연대를 구축했다. 이란이 하마스·헤즈볼라 등 이른바 「저항의 축」을 지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중·이란 경제 동맹이 자리한다. 그러나 2026년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군사 공격으로 이 구도에 균열이 생겼다. 러시아 분석매체 <프라우다>의 보도에 따르면 "이란 정부가 무너진다면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란을 잃으면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 지배의 핵심 고리를 잃는 셈이다. 현재 중동 지역은 미국-이스라엘-사우디 안보구조가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어 무질서에서 벗어나고 있으나, 불안정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2) 제2전선— 아프리카: 채무의 덫과 인프라 식민지 아프리카는 중국 일대일로의 최대 수혜지이자 최대 피해지다. 중국은 수백억 달러를 투입해 아프리카 주요국에 고속철도, 대형 항구,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케냐는 수도 나이로비와 항구도시 몸바사를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 90%를 중국에서 조달했으나, 현재 케냐의 총 공공부채는 GDP의 67%인 757억 달러까지 불어났고 중국은 세계은행에 이어 케냐 최대 채권국이 됐다. 앙골라의 대중국 채무는 190억 달러에 달한다. 이집트는 중국 자본으로 서울보다 큰 신행정수도(700㎢)를 건설 중인데, 중국의 세계 최대 국방부 청사를 본뜬 이집트 국방부 청사,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 등이 여기 포함된다.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이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2년 아프리카 15개국 여론조사에서 영향력 및 긍정 평가 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에서의 소프트파워 전쟁도 중국이 앞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도 존재한다. 중국이 수십조 원을 들여 닦아놓은 아프리카의 도로와 항구가 이제 한국의 K2 흑표 전차가 달리는 무대가 되고 있다. 모로코 정부가 K2 전차 400대 도입을 검토하는 배경에는, 중국이 깔아놓은 고하중 인프라가 한국 중무기 체계의 진출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얄궂은 나비효과가 있다. 지정학은 때로 아이러니로 말한다. 중국의 ‘夢’과 미국과의 패권 경쟁은 단순한 1위 싸움이기 보다 자유민주국가의 붕괴와 맞물려있다. AI이지미 제작 3) 제3전선 — 유럽: 두 갈래 침투, 일대일로와 이슬람 유럽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포위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적 침투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의 인구학적 팽창이다. 이탈리아는 2019년 G7 국가 중 유일하게 일대일로에 서명했다(2023년 탈퇴). 중국은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상업 부동산을 잠식했고, 독일의 핵심 제조업체들을 인수했다. 2016년 산업용 로봇 분야 세계 최강 쿠카(KUKA)가 중국 자본에 넘어간 것이 그 상징적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독일은 첨단기술 기업에 대한 외국 자본 인수 심사를 강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위협은 문화의 내부 붕괴다. 유럽에서는 이민과 다문화주의가 기독교 문명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프랑스 전체 인구의 10% 내외가 무슬림이다. 영국에서는 해마다 220개의 교회가 폐쇄되는 반면 110개만 새로 세워지고, 문을 닫은 교회의 상당수가 이슬람 사원으로 팔리고 있다. 독일은 지난 10년간 515개의 가톨릭교회가 공식 폐쇄됐고, 네덜란드에서는 향후 4년 내 700곳 이상의 개신교회가 사라질 전망이다. 카메룬 맘페 교구의 앤드류 은키 대주교는 "유럽의 교회가 잠들었기 때문에 유럽이 이슬람화되고 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복음과 멀어진 곳에 이슬람이 기회를 노리고 들어왔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2025 국가안보전략(NSS)조차 "유럽은 이민과 다문화주의로 붕괴되고 있는 문명적 쇠퇴지역"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교회가 잠들면 이슬람이 들어온다. 유럽이 그 생생한 증거다" — 아프리카 대주교의 경고 4) 제4전선 — 동남아: 채무의 덫과 반중 감정의 확산 동남아시아는 중국 일대일로의 '쇼윈도'이자 균열의 진원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는 동남아 최초의 고속철도로 홍보됐지만, 실제 이용객은 예상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속철도 연간 매출이 약1,500억 원인데 중국에 갚아야 할 이자만 매년 1,700억 원에 달해, 2026년 2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결국 국가 예산을 투입해 중국 개발은행 대출금을 갚기로 결정했다. 당초 "국민 세금 없이 민간 자본(B2B)으로만 하겠다"던 약속은 산산조각이 났다. 내부에서 "중국의 채무의 덫에 제대로 걸렸다"는 비판이 거세다. 필리핀은 두테르테 정부 시절 중국과 대규모 일대일로 협력을 맺었지만, 남중국해 분쟁이 격화되면서 친미 노선으로 선회했고, 일대일로 사업들을 재검토하고 있다. 미얀마는 쿠데타 이후 고립 속에서 중국 의존도가 더욱 심화됐다. 라오스는 중국-라오스 철도 완공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GDP가 21% 증가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국가 부채가 GDP의 100%를 돌파하며 사실상 중국의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된다. 5) 제5전선 — 남미: 베네수엘라와 자원 패권 남미에서 중국의 전략적 베이스캠프는 베네수엘라였다. 마두로 정권에 수십억 달러를 대출해 주고, 원유로 상환받는 구조로 중국은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을 사실상 지배했다. 멕시코에서는 중국 자본이 상권과 건물을 잠식하고, 친중 성향의 정부와 결탁해 현지 소상공인을 고사시키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의 광산 자원 역시 중국 국유기업들의 주요 투자 대상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적극 개입이 이 전선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마두로 체포 압박과 군사·경제 제재는 중국의 서반구 진출에 실질적 타격을 줬다. 이로 인해 남미에서 중국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나,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좌파 정부와의 관계는 여전히 긴밀하다. Ⅱ. 문화 막르크시시즘과 이슬람: 서구 문명 내부 붕괴의 두 엔진 일대일로가 '외부로부터의 침투'라면, 문화마르크시즘(Cultural Marxism)과 이슬람주의는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주도하는 두 엔진이다. 이 두 세력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문명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공조한다. 문화 마르크시즘은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발원해, 전통 가족·종교·도덕·국가 정체성을 해체하는 이념으로 서구 교육·미디어·문화 전반에 침투했다. 동성애 이념, 젠더 유동성, 낙태 권리, 역사 왜곡, 탈식민주의 담론 등은 모두 이 흐름의 산물이다. 유럽에서는 이 흐름이 기독교 설교를 '혐오 발언'으로 규제하고, 전통 가족 개념을 '차별'로 낙인찍는 법적 환경을 만들어냈다. 서유럽 기독교인들 중 대부분은 명목상 기독교인에 불과하다. 영국의 경우 인구의 약 70%가 문화적·역사적 이유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히지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이는 7%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포르투갈·아일랜드에서는 8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답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동성결혼과 임신중절에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문화마크르시즘이 만들어낸 '탈기독교 기독교인'의 초상이다. 이슬람은 이 공백으로 파고든다. 유럽의 이슬람 인구는 프랑스에서만 약 600만 명(전체 인구의 10%)에 달하고, 영국 400만 명, 독일 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2010년대 이후 반복되면서 유럽의 기독교는 "문명 간 충돌"의 전면에 불가피하게 서게 됐다. 유럽 극우 정당들이 기독교를 이민자·세속주의에 맞선 '문화적 방패'로 활용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신앙 부흥이 아니라 정치적 정체성 전쟁이다. "교회가 비어가는 속도만큼 유럽은 포스트-기독교 문명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2기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자처하는 전략을 가지고 중국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Ⅲ. 미국의 반격: 효과와 한계 트럼프2기 행정부는 이 흐름을 차단하려는 가장 적극적 행위자로 등장했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 압박, 이란 군사 공격, 전 세계 상호관세 부과, NATO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증액 압박 등 일련의 조치들은 중국-이란-베네수엘라 삼각 축을 해체하려는 전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이란 공격은 일대일로의 핵심 육로 통로를 차단하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서반구에서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남미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동맹국들의 중국 의존 탈피도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역설도 있다. 트럼프의 일방주의는 전통 동맹국인 유럽과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개도국들에게 "미국보다 중국이 더 믿을 만한 파트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2025년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잇따라 무역협정을 체결하며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또한 트럼프의 상호관세는 2026년 2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위법 판결을 받아 무효화됐다. 이로 인해 대중국 협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설령 관세 압박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중국은 유라시아·아세안·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일대일로 전략을 계속 확대하며 미국의 압박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반격은 필요하고 일정 부분 효과적이지만 충분하지 않다.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는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뢰, 가치, 그리고 문명의 내적 활력이 함께해야 한다. Ⅳ. 결론: 문명 방파제는 어디에 세워지는가 팍스 차이나의 야망은 경제·외교·문화·정치·이념의 전방위 침투를 통해 전진하고 있다. 그 최종 표적은 자유민주주의이며, 더 깊은 곳에서는 기독교 문명이다. 일대일로는 경제 네트워크처럼 보이지만, 그 핵심은 중국 중심의 문명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재편하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와 문화마르크시즘은 서구 내부에서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는 협력자 역할을 한다. 중국공산당이 이 두 세력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는지의 여부와 별개로, 결과론적으로 이들의 목표는 수렴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5세기 서로마 제국은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도덕적 해이와 정체성 상실로 무너졌다. 오늘의 서방 문명도 동일한 경로를 걷고 있다. 교회가 비어가고, 가정이 해체되고, 진리의 개념이 해체되는 곳에,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새로운 질서로 들어온다. 이스라엘·미국·한국은 그나마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나라들이다. 이 세 나라가 각자의 내부 균열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팍스 차이나의 파도를 막을 방파제는 없다. 그 방파제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니다. 참된 방파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진리에 기반한 공동체, 그리고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목숨으로 지키려는 시민들의 각성이다. 한국 교회와 사회가 이 시대를 읽는 눈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팍스 차이나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는 군사력이 아니다. 진리와 공동체 안에 세워진다"

"핵 9·11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 美·이스라엘 군사행동 정당성 주장

The Daily Signal 기사 화면 캡처 "핵무장 이란, 더 이상 가정이 아닌 현실적 위협" 미국 보수 성향 매체 The Daily Signal에 실린 밥 키프니(Bob Kiffney)의 기고문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군사행동을 "핵 재앙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규정하며, 이란의 핵무장이 세계 안보에 미치는 위협을 강하게 제기했다. 키프니는 2001년 9·11 테러를 소환했다. 당시 약 3,00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만약 같은 공격이 핵무기로 이루어졌다면 피해는 수십만 명에 달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맨해튼에서만 최대 80만 명이 즉사할 수 있다"는 가정을 제시하며, 이번 사안이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문명적 재앙 수준의 위협"임을 강조했다. 그는 기고문에서 이번 군사 충돌을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지속되어 온 갈등의 종결 단계"로 해석했다. 이란은 혁명 직후부터 미국을 "위대한 사탄"으로 규정하고, 헤즈볼라·하마스 등 대리세력을 통해 끊임없이 적대 행위를 이어왔다. 1983년 베이루트 미군 막사 폭탄테러, 1996년 코바르 타워 사건, 그리고 2023년 10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까지,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과의 적대가 이란의 일관된 국가 정책"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키프니는 "이란은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이념적 전쟁을 수행하는 체제"라고 규정하며, 외교적 해결 가능성에 대해 깊은 회의를 드러냈다. 핵 프로그램 "이미 임계점 도달" 기고문에서 가장 강조하여 지적한 것은 이란 핵개발의 '임박성'이다. 키프니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이란은 다수의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이미 확보했으며, 실제 핵무기 제조까지 걸리는 시간은 며칠 또는 몇 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국제 사찰 거부, 고급 원심분리기 기술 확보, 탄도미사일 능력 보유까지 더해지며, 이란은 사실상 핵무기 보유 직전 단계에 도달해 있다는 평가다. 2026년 제네바 협상에서 이란은 농축도 60%의 우라늄 460kg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핵무기 약 11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단행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에 대해, 키프니는 "확전이 아니라 자위적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나탄즈, 포르도, 이스파한 핵시설을 타격한 '미드나이트 해머 작전'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약화시키고 미사일·드론 능력을 무력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설명된다. 키프니는 "이제 갈등을 관리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으며, 종결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단언했다. 기고문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란 체제의 종교적 성격이다. "종교적 사명을 수행한다고 믿는 집단은 합리적 억제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냉전 시기 핵억지 전략은 상대방의 합리적 판단을 전제로 했지만, 이란에는 그 전제 자체가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다. "핵무기가 억지력이 아니라 '신적 도구'로 사용될 위험이 있다"는 표현은, 이란을 일반적인 국가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는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키프니는 이번 작전의 목적이 정권 교체 자체에 있지 않으며, "핵 9·11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란이 핵을 보유한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는 9·11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논쟁은 계속된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핵 개발 의혹만으로 선제 군사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국제법적 정당성과 민간인 피해 가능성을 우려한다. 반면 지지하는 측은 "핵을 보유한 이후에는 대응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며, 사전 차단이 유일한 현실적 선택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번 기고문은 단순한 시사 분석을 넘어, 미국 보수 진영의 전략적 세계관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란을 '억제 가능한 국가'가 아닌 '종교적 전쟁 체제'로 규정하는 시각이 군사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논쟁의 중심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이란을 외교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제거해야 할 위협으로 볼 것인가. 그 인식의 차이가 정책 전체를 가른다. 이번 기고문은 그 갈림길에서 한쪽 입장을 분명하게 선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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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은 세상을 바꾼다"

캐나다 크리에이터 재커리 데레니오우스키의 'MDMotivator' 채널 이야기 재커리 데레니오우스키(Zachery Dereniowski)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MDMotivator' (화면캡처) 한 청년이 있었다. 의사의 꿈을 안고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공부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것이 그를 짓눌렀다. 바로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외로움이었다. 그 청년은 어느 날 교과서를 덮고 거리로 나섰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어떠셨어요?" 그 단순한 질문 하나가 수천만 명의 삶을 바꾸는 출발점이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몰랐다. 캐나다 출신 콘텐츠 크리에이터 재커리 데레니오우스키(Zachery Dereniowski).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MDMotivator'의 이야기다. 한 청년의 결단, 의대 강의실에서 거리로 1993년에 태어난 재커리는 어릴 때부터 사람을 돕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길이 바로 의학이었다. 의대에 입학한 그는 치열하게 공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성적은 올랐지만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 그것은 번아웃이었고, 우울감이었다. "의대에서 배우는 것은 몸을 치료하는 방법이었어요. 그런데 저 자신의 마음은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다들 바쁘고 경쟁적이었죠. 누군가에게 '힘들다'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분위기였어요." 재커리는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 날, 그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외로움과 우울감은 의대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직장인도, 노인도, 청소년도 — 저마다 말 못 할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결심했다. 의학 공부보다 먼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Kindness is Cool — 친절은 멋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 재커리 데레니오우스키 처음 카메라를 켰던 날, 두려움을 넘은 첫 걸음 재커리가 처음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섰을 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두려운 일이었다. 거절당할 수도 있었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냈다. 초창기 에피소드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장면이 있다.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중년 남성에게 다가간 날이었다. 남성은 처음에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재커리가 진심으로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묻자 이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전 직장을 잃고 가족에게도 말 못 하며 혼자 고통받고 있었다. 재커리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고, 가진 현금 전부를 꺼내 건넸다. "이것이 당신의 어려움을 다 해결해 주진 못하겠지만, 오늘만큼은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그 영상은 유튜브에 올라간 뒤 수백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댓글창에는 "나도 저 남성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 영상을 보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재커리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제가 남성을 도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분이 저를 구해 주신 거예요. 제게 '계속 하라'는 이유를 주셨으니까요." 재커리의 운영 채널의 목록(화면 캡처) 선한 영향력의 연쇄 , 나눔이 나눔을 낳다 MDMotivator 채널이 다른 감동 채널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다. 단순히 도움을 주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커리는 도움을 받은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이어가도록 유도하는 '선순환 프로젝트'를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재커리가 한 홈리스 남성에게 음식과 현금을 전달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남성은 받은 돈의 일부를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다른 노숙인에게 나눠 주었던 것이다.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긴 그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가진 것을 나눈다는, 성경이 말하는 과부의 헌금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이런 영상들은 단순한 조회수를 넘어 실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 냈다. 한 영상에서 소개된 암 투병 중인 싱글맘의 사연은 며칠 만에 수만 달러의 기부금을 모았고, 재정 위기에 처한 소규모 자영업자를 위한 캠페인은 수천 명의 자발적 참여로 이어졌다. 재커리의 채널은 이미 하나의 '선행 플랫폼'이 되어 있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MDMotivator의 또 다른 축은 정신 건강이다. 재커리는 자신이 의대 시절 겪었던 우울감, 번아웃, 고립감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험을 콘텐츠의 심장으로 삼는다. 그는 거리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가장 개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요즘 가장 힘든 게 뭐예요?"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다. 대도시의 바쁜 거리에서 처음 만난 청년에게 눈물을 흘리며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들. 그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 본 적이 없었어요." 현대 사회의 역설이 그 말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이 연결된 것 같지만, 정작 사람들은 깊은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재커리는 이러한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채널은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용감한 행동입니다." 이 메시지는 영상마다 반복되며 시청자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사연이 나간 뒤에 구독자들이 보낸 모금의 기적, 이 후원금으로 출연자들의 삶을 개선한다(화면 캡처) 전 세계로 퍼진 친절의 물결, 수천만 명이 응답하다 오늘날 MDMotivator는 유튜브에서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틱톡과 인스타그램을 포함한 전체 소셜 미디어 팔로워 수는 수천만 명에 달한다. 한 명의 청년이 카메라 하나를 들고 거리로 나선 지 몇 년 만에 이룬 성과다. 그러나 재커리는 숫자보다 이야기를 더 소중히 여긴다. 채널 댓글에는 매일 수천 개의 메시지가 달린다. "이 영상이 저를 자살 충동에서 살려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낯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당신 덕분에요." 이런 고백들이 재커리를 다시 거리로 이끄는 힘이다. 그의 영향력은 단순히 영상 재생 수치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문화 운동을 만들어 가고 있다. 'Kindness is Cool'이라는 해시태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친절 이야기를 공유하고, 그것이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신앙의 눈으로 보는 MDMotivator 재커리 데레니오우스키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에게 낯설지 않은 울림을 준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약한 자를 돌보라'고, '서로의 짐을 지라'고 명한다(갈라디아서 6:2). MDMotivator가 실천하는 것은 바로 이 성경적 원리의 세속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공원 벤치의 낯선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주머니를 털어 건네는 지폐, 눈물을 흘리는 타인의 손을 꼭 잡는 그 행동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가시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며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미셨던 그 방식과 닮아 있다. 종교를 앞세우지 않지만, 그 콘텐츠의 본질에는 깊은 인도주의적 사랑이 흐른다. 한국 교회는 오늘, MDMotivator에서 하나의 거울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교회 밖으로 나가, 아무 조건 없이 이웃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가. 설교단 위의 말씀이 골목 안의 일상으로 살아 움직일 때, 세상은 비로소 변한다. 재커리는 그것을 카메라로 보여 주고 있다. "오늘 당신이 낯선 누군가에게 건네는 미소 하나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친절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 MDMotivator, Zachery Dereniowski 의학을 포기한 청년이 결국 더 많은 사람을 치료하게 되었다. 청진기 대신 카메라를, 처방전 대신 진심 어린 대화를 택한 재커리 데레니오우스키. 그는 오늘도 거리로 나간다. 우리 곁에도, 말 못 할 상처를 안고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먼저 다가가 묻는 것 — "오늘 어떻게 지내셨어요?" — 그 한 마디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거룩한 사명일지도 모른다.

태초의 말씀, 창조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다

유듀브 동영상 갈무리 1.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비웃음 속에 찾아온 낯선 초대 저는 대구에서 나고 자란 뼛속까지 불교 집안의 자녀였습니다. 제게 교회란 그저 ‘천국과 지옥’이라는 보이지 않는 담보로 사람들을 현혹해 장사를 하는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저 또한 평생을 교회를 욕하며 지냈습니다. 서른다섯 되던 해, 서울에서 사업에 매진하던 제게 뜻밖의 제안이 찾아왔습니다. 평소 신앙이 깊어 보이지 않던 한 지인이 ‘크리스천 CEO 스쿨’을 추천한 것이지요. "저 형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습니다. 이전에도 친구를 따라 새벽기도에 가본 적은 있었으나,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기겁하여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기억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CEO 스쿨의 ‘섬김의 리더십’ 강의는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비록 속으로는 "나중에 저들도 뒤에서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도하겠지"라고 비웃었지만, 그들의 삶에 배어있는 진정성은 제 차가운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녹여갔습니다. 2. 창조의 확증: 원숭이의 후예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여름 방학 중 떠난 ‘미국 창조과학 탐사’ 비전트립이었습니다. 그저 휴가나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신청한 그곳에서 지질학자 출신의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본래 철저한 진화론자였던 그분이 어떻게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강의를 듣는 동안, 제 평생을 지탱해온 진화론의 허구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사실이다. 이것은 팩트다.” 그 외침이 제 심장에 박혔습니다. 제가 우연히 생겨난 원숭이의 후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속에 지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분이 바로 제가 그토록 욕했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자 세상 모든 만물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옆에 앉은 장로님부터 어린아이 한 명까지 모두가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였고, 그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제 안에서 솟구쳤습니다. 3. 주인이 바뀌는 회개: 내 삶의 보좌를 내어드리다 예수님을 창조주로 영접하고 나니 비로소 제가 지은 ‘진짜 죄’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저는 제가 꽤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심은 결국 나를 주인 삼고 내 영광을 위해 살아온 교만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죄는 살인이나 강도가 아니라, 내 생명의 주인인 창조주를 거부하고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고집했던 바로 그 마음이었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제 생명보다 귀한 자식의 생명인데, 하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확증은 없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나니 과거에 함부로 대했던 인연들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관계가 끊겼던 친구들과 퇴사한 직원들에게까지 일일이 전화를 걸어 "당신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인지 몰랐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며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해 나갔습니다. 4. 팩트를 외치는 사명: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다 이제 제 삶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팩트’를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진화론과 공산주의라는 거짓 사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가리고 성경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귀의 전략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 현장이나 대형 교회 앞에서도 이 복음을 타협 없이 전합니다. 때로는 과격하다는 소리를 듣고 불편해하는 시선도 마주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보다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 더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영원한 내일인 ‘천국과 지옥’ 중 어디로 갈 것인지는 반드시 정해야 합니다. 믿음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저처럼 평생 교회를 욕하던 완악한 사람도 창조주를 만나 새 생명을 얻었듯,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삶의 주인을 바꾸는 참된 회개를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간증 출처 : 간증. 풀버전. 국대떡볶이 김상현 대표

“하나님은 사람을 먼저 예비하신 뒤, 길을 여신다”

1997년, 아프리카 중서부 케냐에 들어가 27년 동안 한결같이 케냐를 사랑하고 온몸으로 사랑을 전하다가 2023년 7월 5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토록 사랑하던 그곳에서 하나님께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선교의 삶 가운데 일어났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간증을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TWNt6PiiJg0)에서 발췌하여 싣습니다. -편집자 주- ▲ “제가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그다음에 저를 그 길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케냐의 오지,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 이슬람권 지역에서 사역해 온 이원철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여정에 대해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 고백은 추상적인 신학적 표현이 아니라, 한 아이의 생명이 꺼져가던 시간 속에서 ‘기가 막히게’ 준비되어 있던 사람들, 문, 돈, 그리고 결정을 통해 확인된 현실의 기록이다. 이 간증은 ‘믿으면 된다’는 단순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왜 그 순간에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가’, ‘왜 그 문이 그때 열렸는가’, ‘왜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촘촘히 되짚으며, 한 선교사가 경험한 섭리의 디테일을 따라가게 만든다. 1. “예배 때마다 밀려오던 사랑”이 방향을 바꿨다 그가 처음 선교사의 길을 결심한 계기는 거창한 ‘소명 체험’의 장면이 아니라, 반복되는 예배의 시간이었다. 그는 “매주일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너를 구했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왔다”고 말한다. 그 사랑이 계속해서 그를 압박했다. “내가 나를 위해 살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결론은 단순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이라는 확신. 그 확신은 그를 케냐의 오지로 데려갔다. 2. “현상금이 걸린 사역지”… 그러나 더 큰 전쟁은 ‘집 안’에서 시작됐다 사역지는 험했다. 그는 “무슬림들이 나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죽이면 얼마”라는 말을 담담히 꺼낸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담대한 믿음을 주셔서 두려움 없이 사역한다”고 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가장 깊은 흔들림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가족의 위기’에서 왔다.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보딩스쿨)에 아이를 맡기고 사역하던 어느 때, 큰아이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밤에 잠을 못 자고, 화장실을 자주 가고, 먹지 못하고, 물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마셨다. 체중은 급속도로 줄어들어 마침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내려갔다. 병원은 “이 아이가 이렇게 말라가면 죽는다”고 했다. 케냐에 있던 의료진, 미국에서 온 의료선교사 의사들까지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이 방법도, 저 방법도” 다 해봤지만, 답은 없었다. 3. “회교 병원에 가라”는 권유 앞에서—그는 왜 ‘거절’했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케냐 나이로비에 위장 전문의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예약까지 잡혔다. 병원 이름도 있었다. 아가칸(Aga Khan) 병원.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이상할 만큼 결박되었다. 그는 그 병원을 “회교 병원”이라고 표현하며, 그 문턱을 넘는 순간을 상상했다. 병원 서류에 적힐 “부모 직업: 기독교 선교사”라는 한 줄.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올 것 같은 조롱—“네가 믿는 하나님으로는 아이를 못 살려서 여기 왔느냐.” 의료적 판단만 놓고 보면, ‘가야 한다’는 결론이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받을 수 있다”는 영적 문제로 받아들였다. 간호사 선교사가 격하게 반응할 만큼 그는 단호했다. “나는 이 아이를 회교 병원에 데려갈 수 없다.” 이 대목에서 그의 신앙은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고 싶어 하는 신앙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그 결정이야말로 이후의 모든 길을 여는 ‘첫 단추’였다고 회고한다. 4. “아내의 울음”… 그리고 한 줄기 균열 하지만 믿음의 고백은 흔들리지 않는 강철이 아니었다. 현실은 계속해서 ‘급박’으로 밀어붙였다. 어느 날, 사역 일정 중이던 그에게 아내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 아내는 잘 울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내는 울고 있었다. 흐느끼는 목소리로 전해진 말은 단순했다. “아이(큰아들)가 화장실 갔다가 오면서 쓰러졌어요.” 그는 차를 세웠고, 마음 한가운데로 “이 아이가 죽는구나”라는 직감이 찔러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덮쳤다. “죽을 때 아빠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는 남은 거리(약 한 시간 반)를 달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5. “응답은 받았는데… 왜 현실은 안 변하는가” 기도팀에서 연락이 왔다.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이 이 일을 고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기뻤다. 아이에게 달려가 “하나님이 너를 고치셨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도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하루 이틀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토하고, 힘들어하고,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엔 낙심이 쌓였다. 그때 그가 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는 차를 닦고 있었다. 그 평범한 순간에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셨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지만, 하나님은 이미 고치셨다. 그러나 그 고치신 ‘시점’이 우리에게 도달할 때, 우리는 그 치유를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 그는 이 깨달음을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믿음의 시간표’로 받아들였다. 아이에게 다시 말했다. “인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를 고치셨다. 그 시점까지 믿음을 잃지 말자.” 6. LA로 가라는 낯선 초대—“갈 형편이 아닌데, 길이 열렸다” 그때 또 하나의 의외의 통로가 등장한다. LA로 오라는 메시지. 그것도 넉넉해 보이지 않는 한 전도사에게서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이는 누워 있어야 했고, 선교지 사역은 진행 중이었다. 무엇보다 항공권 값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기도 중 “네가 LA 가서 할 일이 있다”는 마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마치 그 ‘마음’에 반응하듯 한 사람이 나타난다. 이미 고인이 된 한 목회자가 그에게 3천 불을 건네며 말했다. “병원 좀 데려가 봐.” 놀랍게도 그 돈은 “두 사람 비행기 값”과 거의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 돈을 사역비로 쓰고 싶었지만, 마음에 주어진 ‘LA로 가야 한다’는 부르심을 따라 항공권으로 바꿨다. 여기서부터 ‘사람의 예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필요한 순간,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말을, 필요한 액수로 가져온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보내게 하신 것”이라고 표현한다. 7. 비자도, 비행기도—“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통과되었다” LA행의 또 다른 벽은 비자였다. 아이는 대사관 인터뷰를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의자에 앉으면 머리가 무거워서” 버티지 못했다. “거부당할 게 당연”해 보였다. 그는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아이를 대사관 밖에 두고, 아이의 여권만 들고 들어갔다. “아이 비자를 주십시오.” 영사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이 얼굴도 안 보고 비자를 줄 수 없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로 흘렀다. 영사는 결국 비자를 찍어주었다. 인터뷰도 없이. 아이는 비자를 받았다. 비행기에서도 길이 열렸다. 걷지 못하는 아이는 휠체어로 탑승했고, 승무원은 아이를 눕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심지어 그들이 안내한 자리는 “맨 앞자리(1등석)”였다. ‘상식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따라붙는 장면들이 연속된다. 그는 그 연속성 속에서 ‘우연’이 아니라 ‘인도’의 패턴을 읽어낸다. 8. “응급실에 안 가려 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왔다 미국 도착 후에도 그는 쉽게 응급실로 향하지 못했다. “선교사”라는 정체가 또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하나님이 비난받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그때, 링거를 놓아주려 찾아온 간호사와 단기팀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동행했다. 중국인 의사. 그것도 의대 교수. 그 의사는 아이를 보자마자 단정했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의료 조언이 아니었다. 선교사의 마음을 굳게 잠근 ‘종교적 체면’의 문을 강제로 두드리는 선포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망설였지만, 그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살아서 미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는 아이에게 직접 물었다. “병원에 가고 싶니?” 아이는 답했다. “아빠, 왜 이렇게 오래 토했는지 원인이라도 알고 싶어요.” 바로 이 ‘아이의 입’이, 아버지의 완강함을 무너뜨리는 열쇠가 되었다. 그가 문을 열자, 주변 사람들은 기뻐했다. 어떤 이는 “당신 마음이 바뀌도록 우리가 기도했다”고 나중에 말했다고 한다. 9. 응급실의 기적: “절차 없이 들어갔고, 곧바로 CT를 찍었다” 응급실은 피가 흐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쟁터 같았다. 그런데 그 중국인 의사가 미리 전화한 덕분에 “아무 수속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인턴이 아이를 보더니 말했다. “뇌를 찍어야 합니다.” 곧바로 CT. 그리고 아이는 ICU(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때 선교사는 아이 곁을 떠나지 못해 복도 의자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새벽, 의료진이 환자 요약 파일을 복도에 두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무심코 그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 적혀 있던 한 문장이 그를 멈춰 세웠다. “부모에게 알리지 말 것.” 그리고 이어진 내용. “뇌에 종양 2개(1cm, 2cm).” 이 장면이 이 간증의 독특한 역설을 만든다. 보통 ‘종양’은 절망의 단어다. 그런데 그는 “너무 기뻤다”고 말한다. 이유는 분명했다. 케냐에서도, 미국에서도 찾지 못했던 원인을 하나님이 드디어 “알게 하셨다.” “고칠 수 있는 병원에서 원인을 알게 하셨다.” 그는 아이에게 달려가 말했다. “드디어 원인을 알았다. 하나님이 너를 고치시려고 여기로 인도하셨다.” 10. “그때, 그 교수”… 그리고 또 하나의 예비 중환자실에서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키가 크고 머리가 희끗한 교수. 차트를 보더니 묻는다. “너 케냐에서 왔니? 우리 아버지가 케냐 의료선교사였다.” 그리고 그는 거의 ‘개인 담당’처럼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놀랄 정도의 관심. “돈도 없어 보이는 선교사 가족”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말이 뒤이어 나왔다. “네 아이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병원비를 무료로 하겠습니다.” 선교사는 당황했다. 아이와 “평생 갚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것이 무너졌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하나의 확신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고치시려고, 네가 돈이 없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시려고, 여기로 부르셨다.” 이쯤 되면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말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가 된다. 케냐를 아는 교수, 케냐 선교사의 아들을 돕는 의료진, 비용을 감당하는 시스템, 그리고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는 안내자들. 이들은 마치 “누군가가 미리 배치해 둔 것”처럼 움직인다. 11. “머리를 열지 않아도 되는 병원”으로—또 한 번 문이 열렸다 아이의 종양을 제거하려면 머리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의료진은 “머리를 열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더 좋은 병원”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그곳이 사립병원이라는 점. 비용이 또 다른 벽이었다. 하지만 그 병원도 아이를 받아주기로 했다. 의료진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기도 많이 했지? 기도 많이 해서 하나님이 길을 여신 거야.” 아이를 태운 앰뷸런스가 또 한 번 문을 통과했다. 새 병원에 도착하자 젊은 의사는 말했다. “이 아이는 케냐에 있었거나, 한국으로 갔으면 죽었을 겁니다.” 그는 그것을 “럭키”라고 표현했지만, 선교사는 그 ‘럭키’라는 말을 ‘인도’로 번역했다. 12. “우리는 둘 다 ‘사역자의 자녀’야”—마지막 열쇠 같은 한 마디 새 병원에서 또 한 사람이 들어온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 의사. 차트를 쭉 보더니 묻는다. “너의 아버지가 케냐 선교사냐?”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목사다. 너와 나는 둘 다 미니스터의 자녀다.” 이 짧은 문장은, 선교사의 눈에 ‘우연히 만난 의료진’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으로 그를 확정시켰다. 그 의사는 아이를 끝까지 치료했고, 아이는 회복했다.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마침내 케냐로 돌아와 “선교사로” 아버지를 돕고 있다. 13. “그때 병원에 갔으면 오히려 죽었을 것”—하나님이 ‘눈을 가리신’ 시간 그는 한 가지 섬뜩한 결론을 덧붙인다. “제가 (처음부터) 그 병원에 데려갔으면, 얘는 죽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초기에 의료진이 찾은 건 위장 문제가 아니었다. 뇌 문제였다. 케냐에서 섣불리 수술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곳에서 손을 댔다면 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이 ‘수술할 수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셨다. 원인을 못 찾게 하셨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원인을 보게 하셨다. 이 대목에서 그의 간증은 단순한 기적담을 넘어선다. 하나님이 “치유”만 행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가 가능한 “시간과 장소”를 먼저 준비하셨다는 서술이기 때문이다. 14. 선교 재정이 끊겼을 때도—“하나님이 돈은 안 주시고, 말씀을 주셨다” 아이의 치유가 ‘생명의 극적 인도’였다면, 재정의 사건은 ‘사역의 지속을 위한 인도’였다. 그는 한 교단 선교를 통해 파송을 받았고, 초기에는 교회가 생활비와 사역비를 약속했다. 그는 케냐에서 기독교 학교를 세웠다. 그 지역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학교가 되었고, 회교도든 기독교인이든 4년 동안 성경을 배우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 분쟁이 터졌다. 헌금이 ‘재판 비용’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헌금을 멈췄고, 결국 선교 후원이 끊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도저히 못 보낸다”는 통보가 왔다. 그는 현실적으로 ‘신입생을 받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건물을 더 지을 수 없으니, 확장을 멈추자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주신 것은 돈이 아니라 말씀이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는 “돈은 안 주시고 말씀만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을 택했다. 직접 땅을 파고, 가능한 만큼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나이로비로 돌아왔을 때, 은행 계좌에 돈이 들어와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돈. 그는 그 돈으로 건물을 올렸다. 또 필요가 생겼을 때 또 돈이 들어와 있었다. 결국 후원이 끊어진 해에 건물 두 개를 세우려 했던 계획은 더 커져, “보너스로 교회까지” 세웠다. 그는 결론을 이렇게 내린다. “중요한 건 ‘재정이 있느냐’가 아니라,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다. 그분의 뜻이면 재정은 따라온다.” 15.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신다”—그의 간증이 남기는 한 가지 질문 이원철 선교사의 간증은 ‘나는 믿었더니 기적이 왔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묻는다. 왜 그때 3천 불이 ‘항공권 값만큼’ 주어졌는가? 왜 아이는 인터뷰도 없이 비자를 받았는가? 왜 응급실에서 ‘절차 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가? 왜 케냐를 아는 교수, 사역자의 자녀임을 공유하는 의사가 연달아 나타났는가? 왜 ‘원인을 찾지 못하게’ 하셨다가, ‘고칠 수 있는 곳’에서 보게 하셨는가? 그는 이 모든 질문을 하나로 묶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나를 준비시키시고, 길을 준비시키신다.” 그리고 그 준비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계속되는 방식으로 그를 붙들었다. 맺으며: 케냐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 아들의 치유는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와 같이 선교사 하지 않을래?” 아들은 “하겠다”고 답했다. 지금 그 아들은 케냐에서 선교사로 아버지를 돕고 있다. 선교사는 이 결말을 ‘내 아이를 살려보자’는 목적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열매로 본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한 아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미리 배치된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받지 않게 해달라”고 울며 기도하던 한 아버지. 그가 말하는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교리가 아니라 현장 한복판에서 사람과 시간과 길을 정교하게 엮어내는 살아 있는 인도였다. ※ 故 이원철 선교사의 이들 이인 선교사와 그의 장모는 무슬림에 납치되어 2년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기도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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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대한민국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나라

"22세기에도 대한민국은 살아 있을까." 도발적이다 못해 서늘한 이 질문 하나가 책의 표지를 뚫고 나온다. 2026년 1월, 세이지 출판사가 펴낸 김미영 VON뉴스 대표의 신작 〈숨은민국—주체사상파·부정선거·북한인권 그리고 마이 라이프〉는 출간과 동시에 보수 기독교 지식인 사회와 안보·이념 논쟁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저자가 수십 년에 걸쳐 언론 현장과 북한인권 운동, 국제인권 무대에서 축적해 온 문제의식과 경험을 집대성한 이 책은, 단순한 이념 고발서도 정치 비평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직시된 적 없는 '보이지 않는 나라'의 실체를 추적한, 한국 현대사 최전선의 기록이다. 2024년 12월 3일이 촉발한 각성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오랜 잉태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 계기는 뚜렷하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2024년 12월 3일의 계엄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그 사건을 통해 이 책의 주제를 공유할 독자들이 제법 있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엄 선포와 그 후폭풍으로 한국 사회가 격렬하게 요동치던 그 시점에,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평생 가슴에 품어 온 질문을 세상 앞에 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더 이상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저자가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뿌리를 "보이지 않게 작동해 온 또 하나의 나라", 즉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지만, 저자의 시선에 따르면 분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물리적 분단과 더불어,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수평이 아닌 수직의 분열, 다시 말해 '위의 나라'와 '아래로 숨은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숨은민국'과 '은국민'이란 무엇인가 〈숨은민국〉이 제시하는 개념적 틀은 독특하고 도전적이다. 1945년 38선으로 남북이 갈린 한반도는 6·25전쟁을 거쳐 1953년부터는 휴전선이라는 더 길고 넓은 경계선으로 갈렸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만 갈린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도 다시 두 개의 나라로 갈렸다.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갈렸다. 이 두 개의 나라 중 한 나라는 아래로 '숨은' 나라였다. 저자는 이 숨은 나라의 구성원을 '은국민(隱國民)'이라 명명한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적지 않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존재 이유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실상이 바로 '은국민'이다. 은국민들은 한국인을 통칭하여 극우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저자는 명확한 경고를 덧붙인다. 저자는 숨은민국을 북한이나 중국 공산당의 단순한 하수인으로 축소하는 시각을 경계한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신념·조직·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복잡계'이며, 한국 사회의 문화·지식·정치 영역 깊숙이 뿌리내려 왔다고 주장한다. 책의 제목을 거꾸로 읽으면 '국민은 숨(breath)'이 된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제목을 통해 국민의 목숨이 걸린 대한민국 상황에서 숨은민국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설명하는 저자 김미영 대표(동영상 캡처) 두 개의 지하정당에서 북한인권까지 책은 크게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숨은민국'을 움직여 온 두 개의 지하정당에 대한 역사적 추적이다. 숨은민국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이 책에서 선택한 것은 두 개의 정당에 다가가는 것이다. 은국에 여러 개의 지하정당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정당으로 특정하는 것은 통일혁명당(통혁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저자의 분석은 단호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조용히 점령한 은국의 지도부는 통혁당, 그리고 은국민 대중은 민혁당을 통해서 대거 양산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두 정당은 불법적 비밀정당 형태였지만 실체로서 존재했고, 몸을 숨길 뿐 사라진 적이 없다. 나아가 1960년대의 통혁당은 1990년대의 민혁당과 본질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두 번째 축은 주체사상파, 이른바 주사파에 대한 저자 본인의 장기 취재 기록이다. 1999년 '월간조선'과 '시대정신' 등을 통해 이루어진 김영환 그룹과의 인터뷰, 그리고 '전향'이 아닌 '전환'이라는 표현을 둘러싼 논쟁은 당시 한국 지성계와 운동권 내부의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북한 정권의 건국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발언이 대한민국 헌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사상적 모순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추적한다. 세 번째 축은 북한인권 문제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책은 북한인권 문제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김미영 대표는 1999년 이후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해 전시·전후 납북자 구출 운동·정치범수용소 해체 운동·'통영의 딸' 구출 운동 등 굵직한 현안의 최전선에 서 왔다. 저자가 말하는 7가지 역사적 진단 저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을 7가지로 정리한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의지가 100년 이상 치열하게 지속되어 왔다는 것,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적이 상존한다는 것, 대한민국과 우방국을 위협하는 공작망이 실재한다는 것, 반체제 지식인들에 대한 혁명 세화 공작이 종북 지하당의 건설로 이어졌다는 것(4·19 직후 통일혁명당, 5·18 이후 민족민주혁명당), 통혁당과 민혁당의 특징과 정치 세력화 성공, 지하 정당의 변신과 보수 우파 정당과의 화학적 결합에 따른 합법 정당 설립, 그리고 진정한 대한민국의 제도 정당 실종 상태가 그것이다. 숨은민국의 최종 귀결점에 대한 저자의 진단도 명확하다. 저자는 '숨은민국'의 귀결점은 결국 '원 차이나'이며 주사파·민혁당은 그것을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말로 포장하여 북한의 나아갈 길이라고 말해 왔다고 분석한다.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자유선거가 없는 시장경제'를 말하며 중국이 그런 체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왔다고 선전해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쟁의 끝자락에서 희망을 말하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어떤 전쟁의 끝자락에서"다. 저자는 이 제목 하나로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의 좌표를 압축한다. 이미 수십 년째 이념 전쟁의 한복판을 걸어온 사람의 목소리로, 그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대한민국 사람들, 보통의 선량한 '한국인들'을 위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국적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쓴다.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라는 모종의 불안감이 있는 사람도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한다. 숨은민국은 결코 단순하지도 만만치도 않다. 명백히 '복잡계'다. 그들의 신념도 이해해야 하지만 그들의 실력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과 실력을 압도할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야 한다. 이 결론은 고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호소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저자 김미영은 누구인가 이 책의 무게는 저자의 이력과 분리될 수 없다. 저자 김미영은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한국현대문학 석사)을 마치고,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과 미국 노틀담 대학 법대에서 미국법과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다. 주체사상파(주사파) 학생운동권 전향 문제 특종으로 조선일보에 특채되어 북한문제를 주로 다루는 기자로 일했다. 책을 통해 한국의 현 상황의 위기를 경고하는 김미영 대표 그의 삶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었다. 1999년부터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하여 전후·전시 납북자구출운동에 헌신했고,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연구실장, 정치범수용소 해체운동과 오길남 박사 가족 '통영의 딸 구출운동'을 펼쳤으며, 황장엽 방미 수행단으로 동행했고, 유엔인권이사회에 NGO 활동가 자격으로 사이드이벤트를 여는 등 북한 김일성 3대의 반인도범죄와 전쟁범죄 규정을 위해 일했다.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도 이 책의 저변을 흐른다. 잠시 김 대표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녀는 주사파의 주요 인물로 자리잡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된 것은 하나님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반근대 세력들을 견제하는 데 지금까지 쓰임받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필독서"와 "절규"의 사이에서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한 독자는 "저자 김미영 선생의 그동안의 아픔이 무엇인지, 절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의 소박하지만 거창한 인생목적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알게 해 주었다"며 "이 책은 사회과학 평론도 아니요, 문학작품도 아니요, 단순한 저널리스트의 취재수첩도 아니지만, 그 울림의 강도에 있어 일반 서적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고 평했다. 또 다른 독자는 "부정선거와 법치 파괴를 통해 3권분립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경제노동악법 제정을 통해 산업기반 파괴와 국유화를 진행시키는 현실을 이 책이 홍콩이나 베네수엘라행 급행열차를 탄 느낌으로 그려냈다"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고 밝혔다. 서점 구매 리뷰에서도 "작금의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한편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한 보수 기독교 논자는 "국민 대다수는 이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을 듯싶다. 이유는 그들은 공산주의를 포함한 좌익사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며 이념적 문맹이 이 책의 경고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 시대에 이 책이 갖는 의미 〈숨은민국〉은 특정 진영의 주장을 담은 이념서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공산주의 세력의 100년 권력 투쟁, 북한이라는 상존하는 적의 존재, 남한과 해외에까지 뻗은 공작망, 반체제 지식인에 대한 조직적 포섭, 통혁당과 민혁당의 성격 차이, 운동권 정치세력의 분화와 변신, 그리고 제도 정당의 실종까지를 하나의 체계적 세계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고발서가 아니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한 번도 정면으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 즉 "이 나라 안에 이 나라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김미영은 자신의 평생을 걸고 답한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질문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분단 80년, 건국 78년이 된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생존을 진지하게 묻기 시작해야 할 때, 이 책은 그 불편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만들어진다"

진정한 리더가 절실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리더십을 소개한 이장로 교수 혼돈의 시대, 한국 교회와 사회는 '진정한 리더'에 목말라 있다. 권위로 군림하던 리더들이 몰락하고, 성과만을 좇던 조직이 뿌리째 흔들리는 이 시대에, 이장로 교수(고려대학교 명예교수•온누리교회 장로 ; 이하 이 교수)가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으로 새 책을 내놓았다. 두란노 출판사에서 출간된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은 단순한 경영서도, 편의적 신앙 에세이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담긴 리더십 원리를 현대 경영학과 리더십 이론의 언어로 풀어낸 이 책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에게 '리더십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이 교수를 만나 책이 탄생한 배경과 그의 리더십 철학, 그리고 한국 교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제언을 들었다. "리더십 위기의 진짜 원인은 내면의 공허함" 이 교수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한국 사회와 교회 모두에서 리더십의 위기가 심각합니다. 그런데 그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기술의 문제나 전략의 문제가 아니에요. 리더 내면의 공허함, 즉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수십 년간 기업과 교회 현장을 오가며 수많은 리더를 만나왔다. 화려한 외형과 달리 조직을 병들게 하는 리더, 평범해 보여도 구성원들을 살리고 성장시키는 리더.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교수는 그 해답을 2천 년 전 한 인물에게서 찾았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입니다. 그분은 어떤 공식적인 조직도, 물리적 권력도, 막대한 자본도 없었지만, 열두 명의 제자를 통해 세상을 바꾸셨어요. 그 원리를 현대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교수는 이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예수님을 단지 리더십의 아이콘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분의 리더십은 철저히 섬김과 희생,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4대 리더십 모델과 예수님의 삶: 이론과 신앙의 통합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의 학문적 강점은 현대 리더십 이론과 성경적 통찰을 유기적으로 엮어낸 데 있다. 이 교수는 진정성 리더십(Authentic Leadership), 섬김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임파워먼트 리더십(Empowerment Leadership),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라는 현대 경영학의 4대 리더십 모델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조명한다. "처음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혹자는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읽어나갈수록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예수님의 삶은 이 모든 리더십 이론의 원형이자 완성이었습니다. 이론이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셨던 거죠." 그는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洗足式) 장면을 예로 든다. 유월절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예수님의 행동은 섬김 리더십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교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동시에 진정성 리더십, 임파워먼트 리더십, 변혁적 리더십을 모두 실천하고 계셨습니다. 말씀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했고, 제자들의 잠재력을 끌어내셨으며,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 자체를 변혁시키셨으니까요.“ 책에는 넬슨 만델라, 마더 테레사, 애플의 스티브 잡스, 그리고 한국의 다양한 교회 지도자들의 사례도 등장한다. 이 교수는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각 리더십 모델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리더십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결정과 관계,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죠. 독자들이 이 실 제 사례들을 통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스스로 물어보길 바랐습니다. 살리는 리더는 구성원들의 가능성을 보고, 죽이는 리더는 자신의 가능성만 봅니다. 살리는 리더는 실패한 사람을 세우고, 죽이는 리더는 실패를 이용합니다. 그 차이의 뿌리에는 결국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리더십': 이 시대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 책의 5부,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이 교수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다. 앞의 네 가지 리더십 모델이 개인, 관계, 조직, 사회 차원을 각각 다룬다면,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이 모든 차원을 하나의 거대한 비전 아래 통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이 교수는 이를 "리더십의 완성형"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리더십 이론들은 대부분 '효율성'과 '성과'를 중심에 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다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 질문 앞에 서면, 리더십의 목적 자체가 달라집니다. 더 이상 조직의 성장이나 리더 개인의 명성이 최종 목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목표가 됩니다." 그가 언급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라는 표현은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다. 그는 이 기도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크리스천 리더의 실천 강령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하나님 나라 리더십의 일곱 가지 핵심 요소를 제시한다. 비전의 초월성, 섬김의 철저성, 진정성의 일관성, 공동체의 형성, 변혁의 추구, 영적 민감성, 그리고 고난의 수용이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요소, '고난의 수용'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인상적이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고난을 회피하거나 최소화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더 깊은 열매를 맺는 리더십이에요.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 부분을 잊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교회 리더십의 위기,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 교수는 한국 교회의 현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몇 년간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불거진 세습 논란, 재정 비리, 성 문제 등은 한국 교회의 리더십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교회 내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목회자를 비판하면 불경한 것으로 보는 문화, 교회를 개인 왕국처럼 운영하는 관행, 투명한 재정 공개를 거부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죽이는 리더십'의 전형입니다." 그는 이를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문제, 구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견제와 균형이 없는 조직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개인도 변질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은 개인 리더십 역량을 키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는 리더십으로 나아갑니다.“ 이 교수가 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리더십 모델의 부재'다. "목회자 자녀들이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자랐지만, 그 설교대로 사는 삶을 목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과 삶이 다른 리더십, 그것이 다음 세대를 교회에서 내쫓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그는 여기서 예수님의 진정성 리더십을 다시 소환한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리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여야 합니다.“ 소명에서 시작하는 리더십: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이 교수의 리더십 철학에서 빠질 수 없는 개념이 '소명(召命)'이다. 책의 각 장 말미에는 '소명 DNA 자기 점검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코너는 독자들이 단순히 리더십 이론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재발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리더는 앞장서면서도 끊임없이 아래로 내래가는 섬김의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이장로 교수 "리더십의 출발은 자기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질문을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던져왔다고 고백한다. 이 교수는 30대 초반, 촉망받는 기업인으로서 경력의 절정기에 신앙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때까지 저는 성과와 인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것을 얻은들, 그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멈추게 되었어요." 그는 그 물음이 자신을 성경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리더십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리더로 만난 것은, 제 삶과 일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경험이었습니다. 더 이상 리더십이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죠.“ 그가 강조하는 '리더십 훈련 방법' 역시 실용적이다. 책은 각 장의 말미에서 구체적인 훈련 방법을 제시한다. 섬김을 실천하는 방법, 구성원을 임파워먼트하는 구체적인 기술, 조직 내에서 진정성을 유지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리더십은 세미나 한 번, 책 한 권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과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독자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험해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리더십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고난을 피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십. 그것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의 모습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리더십 교과서 이 교수는 이 책이 특정 계층이나 직분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 직장에서 팀을 이끄는 팀장, 교회에서 청년부를 섬기는 간사, 모두가 리더입니다. 리더십은 직함이 아니라 영향력이에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갑니다." 그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음 세대 리더십 형성의 시급성을 강조한다. "MZ 세대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강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권위에 대한 거부가 곧 리더십의 부재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진정성과 섬김에 기반한 새로운 리더십 모델이 제시되어야 해요.“ 그는 이 책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특히 깊이 읽히기를 바란다. "목회자들이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의 리더십을 다시 만나기를 원합니다. 성공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리더가 되는 것.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살리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실제로 책의 일부 내용은 기존의 교회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과 대학원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삶 전체로 쓴 책,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 인터뷰 내내 이 교수는 이론가보다 실천가의 면모를 더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이 책이 서재에서만 쓰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저는 이 책에서 제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말하려면, 내가 먼저 섬겨야 했어요. 임파워먼트를 말하려면, 내 제자들과 학생들이 실제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수십 년간의 기업 경영과 신학 연구, 그리고 현장 사역의 경험이 이 책 한 권에 녹아 있다. 그는 이 책이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이 교수는 후속 연구로 '하나님 나라 리더십'을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또한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훈련 워크숍과 세미나도 계획 중이다. "책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이 독자의 마음에 심기어져 삶의 현장에서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공동체를, 교회를, 사회를 살리는 리더십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 교수는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리더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 앞에 무릎 꿇을 때, 비로소 진정한 리더십이 시작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시작되는 리더십. 그것이 이 교수가 이 시대의 한국 교회와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다.

한국 기독교 출판의 반세기, 미래 향한 ‘문서선교의 원년’ 선포하다

한국기독교출판협회는 2월 25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제52회 정기총회와 창립 5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한국 기독교 출판의 산실이자 문서선교의 보루인 (사)한국기독교출판협회(회장 박종태, 이하 기출협)가 창립 50주년이라는 역사적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기출협은 지난 2026년 2월 25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그레이스홀에서 제52회 정기총회와 창립 50주년 기념 감사예배 및 제42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시상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기독 출판 50년의 발자취, 『한국기독교출판협회 50년사』 봉헌 행사의 시작을 알린 1부 감사예배는 50년의 세월 동안 한국 교회와 사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해 온 기출협의 발자취를 회고하고 감사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정건수 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예배에서는 민병문 이사의 기도와 박종구 목사의 설교가 이어졌으며, 협회의 변천 과정을 담은 50주년 기념 영상이 상영되어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한국기독교출판협회는 2월 25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제52회 정기총회와 창립 5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특히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기출협 50년의 역사를 집대성한 『한국기독교출판협회 50년사(이하 50년사)』 헌정식이었다. 박종태 회장은 이 책자를 3대 회장을 역임한 이승하 고문에게 증정하며 하나님께 봉헌했다. ‘50년사’는 1975년 창립 이후 기출협이 걸어온 주요 활동과 조직 변화, 기독교 출판 환경의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소중한 자료집이다. 이승하, 김기찬, 박종구 목사 등 원로들과 이형규, 민병문, 방주석, 황성연 등 중진 고문들의 생생한 증언이 수록된 이 책자는 한국 기독교 출판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정리했다는 평을 받는다. 예배 중에는 전임 회장들과 고인이 된 회장들의 유가족을 초청해 공로패를 수여하며 그간의 헌신을 기리는 예우의 시간도 가졌다. 제42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양질의 기독 도서’ 성과 조망 2부 순서로 마련된 제42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시상식은 기독교 출판인들의 기획력과 노고를 격려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이번 문화상에는 2024년 9월부터 2025년 8월까지 발행된 도서 중 48개 회원사로부터 총 215종의 도서가 출품되어 뜨거운 경합을 벌였다. 이한민 총무의 사회로 진행된 시상식에서 영예의 대상은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전성민 저, IVP)가 차지했다. 심사위원회는 부문별 최우수상 10종과 우수상 28종을 포함해 총 39종의 수상작을 선정했다. 특히 이번 시상식에서는 신규 회원사들의 참여가 두드러졌으며, ‘신앙일반’ 분야에 가장 많은 80종의 도서가 출품되어 오늘날 독자들의 영적 성숙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한국기독교출판협회는 2월 25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제52회 정기총회와 창립 5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3부 제52회 정기총회에서는 지난 회기 회장이었던 박종태 대표가 2년 임기의 제24대 회장에 재선임됐다. 이 외에 개회선언과 회순채택, 전회의록 채택, 감사·결산·사업 보고, 임원 개선 등이 진행됐다. 회장에 재선임된 박종태 대표는 “부족한 사람을 다시 대표로 세워주셔서 감사드린다. 이 자리는 영광이 아닌 책임의 자리임을 잘 알고 있다. 여러분의 신뢰를 가슴에 새기고 더 낮은 자리에서 더 단단한 결기로 협회를 섬기겠다”며 “지난 회기 동안 쉽지 않은 시간을 걸어왔다. 이제 한걸음 나아가 동반성장위원회를 통해, 한국교회 영적 회복과 기독 출판 생태계 재건을 위한 연합의 길을 열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제24대 회장에 재선임된 박종태 장로 박종태 대표는 “약화된 기독 출판 문화를 다시 세우고 다음 세대에 신앙과 지식과 지혜를 전하는 일을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시대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2026년을 문서선교 연합 사업의 원년으로 힘차게 시작하고자 한다”며 “120여 회원사가 함께하는 기출협은 선배님들의 땀과 눈물 위에 세워졌다. 복음의 가치를 시대 속에 새기는 책임 있는 출판의 길을 더욱 성실하고 담대하게 걸어가겠다.”고 강조했다. 2년 임기의 나머지 임원은 부회장에 정건수 대표(예장출판사), 민상기 대표(드림북), 조애신 대표(토기장이), 총무 이한민 대표(아르카), 재정 김태희 대표(터치북스), 기획 옥명호 대표(잉클링즈), 독서진흥 정종현 대표(누가출판사), 유통 최규식 대표(아바서원), 감사 황성연 대표(하늘기획)와 김혜정 대표(CUP) 등이다. 다음은 수상작이다. 제42회 (부문별) 출판문화상 수상작 선정 표 26.01.23 부 문 수상 도서명 저자 출판사명 대상 한국 기독교 세계관 READER 전성민 IVP 목회국내 최우수 한국 개신교 역사의 최초 72가지 사건 옥성득 새물결플러스 우수 이단 코드 탁지일 한국장로교출판사 우수 마가복음, 삶으로 읽다 한기채 도서출판 토기장이 우수 부흥하는 교회 쇠퇴하는 교회 목회데이터연구소 규장 목회국외 최우수 십자가 중심 변증학 조슈아 채트로우 생명의말씀사 우수 설교핸드북 풀 스콧 윌슨 CLC 우수 토브처치 스캇 맥나이트 야다북스 우수 윌리엄 윌리몬의 설교자와 설교 윌리엄 윌리몬 터치북스 신학국내 최우수 배경으로 읽는 성경의 절기 장재일 쿰란출판사 우수 노화 그리고 죽음 조광호 드림북 우수 개인화와 기독교 임희숙 도서출판 동연 우수 통회 시편 깊이 읽기 이병용 요단출판사 신학국외 최우수 성경적 비판 이론 크리스토퍼 왓킨 IVP 우수 복음서의 여자들 리처드 보컴 죠이북스 우수 성경수업 스캇 듀발 성서유니온 우수 근거가 있는 믿음 피터 젠센 익투스 신앙일반국내 최우수 헤리티지 조영민 죠이북스 우수 윌버포스 윤영휘 홍성사 우수 복음의 다섯 꼭짓점 박순용 (주)아가페출판사 우수 성경통독 레시피 조병호 통독원 신앙일반국외 최우수 그리스도인의 생각 사용법 카일 아이들먼 두란노 우수 예수와 권세 톰 라이트 야다북스 우수 가장 어두운 순간, 가장 가까이에 데이비드 깁슨 템북 우수 에니어그램 영성훈련 더그&아델 칼훈 도서출판 CUP 어린이국내 최우수 아하! 어린이 성경단어사전 서은경 생명의말씀사 우수 내 이름은 다윗 이연경 몽당연필 우수 유아세례 다이어리 총회교육자원부 한국장로교출판사 우수 우리의 좋은 목자 유소희 CLC 어린이국외 최우수 빅 스토리 바이블 톰 라이트 성서유니온 우수 어린이들이 꼭 알아야 할 예수님 이야기 34 싱클레어 퍼거슨 우리시대 우수 예수님이 살았던 세상 마크 올슨 IVP 우수 맥스 루케이도의 넌 정말 특별하단다 3 맥스 루케이도 몽당연필 청소년국내 최우수 정류장교회 이야기 최현석 한사람 우수 안녕, 집 한국해비타트 소북소북 우수 길 잃은 별들과 함께한 수업 김서은 두란노 우수 더 잘할수 없을 만큼 잘하고 있는 너에게 장희연 도서출판 누가 청소년국외 최우수 숨겨진 모험 팀 한셀 아르카 우수 24시간 나의 예수와 존 마크 코머 두란노 총 39개 부문 27개사 선정

죽음은 ‘마지막 원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죽음을 자연스럽게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많은 신자가 죽음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준비하는 구체적인 길을 안내받지 못한 채, ‘사후의 정화 과정’이나 ‘죽음 이후의 또 다른 기회’ 같은 비성경적 관점과 불확실한 정보 사이에서 혼란을 겪곤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약학의 권위자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Guy Prentiss Waters) 교수의 신간 『마지막 원수, 죽음을 마주할 때』(생명의말씀사)가 출간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죽음을 ‘마지막 원수’로 규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 저주가 깨졌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며 성도들이 담대하게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도록 돕는다. 죽음, 타락의 비극이나 그리스도의 승리로 정복되다 저자인 가이 워터스 교수는 죽음이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된 ‘비정상적인 현실’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 신자에게 영원한 생명과 승리를 보장한다는 복음의 결론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단순히 ‘두렵지 않다’는 식의 감정적 자기암시로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성경이라는 정교한 좌표 위에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로 맞이해야 할지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는 중간 상태, 마지막 심판, 몸의 부활, 천국과 지옥 등 자칫 흐릿할 수 있는 내세에 관한 교리들을 성경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하여, 독자들이 막연한 기대가 아닌 ‘교리적 확신’ 위에서 평안을 누리게 한다. 교리를 넘어 실제적인 ‘임종 돌봄’과 ‘윤리적 지침’까지 『마지막 원수, 죽음을 마주할 때』는 이론적인 교리 설명에 머물지 않는다. 책의 후반부인 제2부와 제3부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룬다. 죽음의 준비: 가족과 친구들을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가, 재산 정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장례와 매장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등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성경적 원리 안에서 제시한다. 실제적인 돌봄: 죽음을 앞둔 이에게 필요한 태도, 남은 가족과 함께하는 공동체의 동역, 특히 현대 의학에서 민감한 문제인 ‘연명 치료’를 둘러싼 윤리적 고민까지 다루며 ‘믿음을 살아내는 법’을 안내한다. 함께하는 위로: 죽음을 앞둔 이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려울 때 적게 말하거나 침묵하며 곁을 지키는 지혜를 전한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준비는 결코 죽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데서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부활 신앙, ‘오늘의 삶’을 지탱하는 강력한 동력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유익은 죽음 너머의 소망이 결코 오늘의 삶을 약화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다. 저자는 부활 신앙이 일상의 삶이 허무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울이는 모든 노력과 섬김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해질수록 성도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기를 원하게 되고, 이웃을 섬기는 과업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죽음을 바르게 마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랑과 책임과 거룩한 삶의 동기를 강화하여 ‘가장 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과 같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입을 모아 전하는 ‘필독서’ 세계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 책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엘 R. 비키 총장은 “죽음에 대해 성경적으로 충실하고 찬란한 소망이 담긴 책”이라며, 확신에 찬 소망으로 죽음을 맞고 싶은 모든 이에게 실질적인 답을 준다고 평가했다. 싱클레어 B. 퍼거슨 교수는 “성경적으로 풍부하고 목회적으로 신뢰할 만한 지혜로운 가르침”이라며 “모든 가정에 비치해 둘 가치가 있는 고전”이라고 추천했다. 데릭 W. H. 토머스 목사는 “신약학자의 시각으로 쓰였지만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며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귀중한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지막 원수, 죽음을 마주할 때』는 죽음 앞에서 신앙의 확신을 갖고 싶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임종 사역을 하는 목회자, 사별의 슬픔에 잠긴 이들, 그리고 교리와 삶을 연결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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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만들어진다"

진정한 리더가 절실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리더십을 소개한 이장로 교수 혼돈의 시대, 한국 교회와 사회는 '진정한 리더'에 목말라 있다. 권위로 군림하던 리더들이 몰락하고, 성과만을 좇던 조직이 뿌리째 흔들리는 이 시대에, 이장로 교수(고려대학교 명예교수•온누리교회 장로 ; 이하 이 교수)가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으로 새 책을 내놓았다. 두란노 출판사에서 출간된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은 단순한 경영서도, 편의적 신앙 에세이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담긴 리더십 원리를 현대 경영학과 리더십 이론의 언어로 풀어낸 이 책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에게 '리더십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이 교수를 만나 책이 탄생한 배경과 그의 리더십 철학, 그리고 한국 교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제언을 들었다. "리더십 위기의 진짜 원인은 내면의 공허함" 이 교수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한국 사회와 교회 모두에서 리더십의 위기가 심각합니다. 그런데 그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기술의 문제나 전략의 문제가 아니에요. 리더 내면의 공허함, 즉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수십 년간 기업과 교회 현장을 오가며 수많은 리더를 만나왔다. 화려한 외형과 달리 조직을 병들게 하는 리더, 평범해 보여도 구성원들을 살리고 성장시키는 리더.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교수는 그 해답을 2천 년 전 한 인물에게서 찾았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입니다. 그분은 어떤 공식적인 조직도, 물리적 권력도, 막대한 자본도 없었지만, 열두 명의 제자를 통해 세상을 바꾸셨어요. 그 원리를 현대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교수는 이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예수님을 단지 리더십의 아이콘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분의 리더십은 철저히 섬김과 희생,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4대 리더십 모델과 예수님의 삶: 이론과 신앙의 통합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의 학문적 강점은 현대 리더십 이론과 성경적 통찰을 유기적으로 엮어낸 데 있다. 이 교수는 진정성 리더십(Authentic Leadership), 섬김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임파워먼트 리더십(Empowerment Leadership),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라는 현대 경영학의 4대 리더십 모델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조명한다. "처음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혹자는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읽어나갈수록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예수님의 삶은 이 모든 리더십 이론의 원형이자 완성이었습니다. 이론이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셨던 거죠." 그는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洗足式) 장면을 예로 든다. 유월절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예수님의 행동은 섬김 리더십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교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동시에 진정성 리더십, 임파워먼트 리더십, 변혁적 리더십을 모두 실천하고 계셨습니다. 말씀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했고, 제자들의 잠재력을 끌어내셨으며,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 자체를 변혁시키셨으니까요.“ 책에는 넬슨 만델라, 마더 테레사, 애플의 스티브 잡스, 그리고 한국의 다양한 교회 지도자들의 사례도 등장한다. 이 교수는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각 리더십 모델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리더십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결정과 관계,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죠. 독자들이 이 실 제 사례들을 통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스스로 물어보길 바랐습니다. 살리는 리더는 구성원들의 가능성을 보고, 죽이는 리더는 자신의 가능성만 봅니다. 살리는 리더는 실패한 사람을 세우고, 죽이는 리더는 실패를 이용합니다. 그 차이의 뿌리에는 결국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리더십': 이 시대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 책의 5부,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이 교수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다. 앞의 네 가지 리더십 모델이 개인, 관계, 조직, 사회 차원을 각각 다룬다면,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이 모든 차원을 하나의 거대한 비전 아래 통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이 교수는 이를 "리더십의 완성형"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리더십 이론들은 대부분 '효율성'과 '성과'를 중심에 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다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 질문 앞에 서면, 리더십의 목적 자체가 달라집니다. 더 이상 조직의 성장이나 리더 개인의 명성이 최종 목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목표가 됩니다." 그가 언급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라는 표현은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다. 그는 이 기도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크리스천 리더의 실천 강령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하나님 나라 리더십의 일곱 가지 핵심 요소를 제시한다. 비전의 초월성, 섬김의 철저성, 진정성의 일관성, 공동체의 형성, 변혁의 추구, 영적 민감성, 그리고 고난의 수용이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요소, '고난의 수용'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인상적이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고난을 회피하거나 최소화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더 깊은 열매를 맺는 리더십이에요.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 부분을 잊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교회 리더십의 위기,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 교수는 한국 교회의 현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몇 년간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불거진 세습 논란, 재정 비리, 성 문제 등은 한국 교회의 리더십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교회 내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목회자를 비판하면 불경한 것으로 보는 문화, 교회를 개인 왕국처럼 운영하는 관행, 투명한 재정 공개를 거부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죽이는 리더십'의 전형입니다." 그는 이를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문제, 구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견제와 균형이 없는 조직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개인도 변질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은 개인 리더십 역량을 키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는 리더십으로 나아갑니다.“ 이 교수가 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리더십 모델의 부재'다. "목회자 자녀들이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자랐지만, 그 설교대로 사는 삶을 목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과 삶이 다른 리더십, 그것이 다음 세대를 교회에서 내쫓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그는 여기서 예수님의 진정성 리더십을 다시 소환한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리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여야 합니다.“ 소명에서 시작하는 리더십: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이 교수의 리더십 철학에서 빠질 수 없는 개념이 '소명(召命)'이다. 책의 각 장 말미에는 '소명 DNA 자기 점검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코너는 독자들이 단순히 리더십 이론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재발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리더는 앞장서면서도 끊임없이 아래로 내래가는 섬김의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이장로 교수 "리더십의 출발은 자기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질문을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던져왔다고 고백한다. 이 교수는 30대 초반, 촉망받는 기업인으로서 경력의 절정기에 신앙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때까지 저는 성과와 인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것을 얻은들, 그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멈추게 되었어요." 그는 그 물음이 자신을 성경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리더십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리더로 만난 것은, 제 삶과 일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경험이었습니다. 더 이상 리더십이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죠.“ 그가 강조하는 '리더십 훈련 방법' 역시 실용적이다. 책은 각 장의 말미에서 구체적인 훈련 방법을 제시한다. 섬김을 실천하는 방법, 구성원을 임파워먼트하는 구체적인 기술, 조직 내에서 진정성을 유지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리더십은 세미나 한 번, 책 한 권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과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독자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험해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리더십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고난을 피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십. 그것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의 모습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리더십 교과서 이 교수는 이 책이 특정 계층이나 직분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 직장에서 팀을 이끄는 팀장, 교회에서 청년부를 섬기는 간사, 모두가 리더입니다. 리더십은 직함이 아니라 영향력이에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갑니다." 그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음 세대 리더십 형성의 시급성을 강조한다. "MZ 세대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강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권위에 대한 거부가 곧 리더십의 부재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진정성과 섬김에 기반한 새로운 리더십 모델이 제시되어야 해요.“ 그는 이 책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특히 깊이 읽히기를 바란다. "목회자들이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의 리더십을 다시 만나기를 원합니다. 성공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리더가 되는 것.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살리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실제로 책의 일부 내용은 기존의 교회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과 대학원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삶 전체로 쓴 책,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 인터뷰 내내 이 교수는 이론가보다 실천가의 면모를 더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이 책이 서재에서만 쓰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저는 이 책에서 제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말하려면, 내가 먼저 섬겨야 했어요. 임파워먼트를 말하려면, 내 제자들과 학생들이 실제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수십 년간의 기업 경영과 신학 연구, 그리고 현장 사역의 경험이 이 책 한 권에 녹아 있다. 그는 이 책이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이 교수는 후속 연구로 '하나님 나라 리더십'을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또한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훈련 워크숍과 세미나도 계획 중이다. "책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이 독자의 마음에 심기어져 삶의 현장에서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공동체를, 교회를, 사회를 살리는 리더십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 교수는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리더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 앞에 무릎 꿇을 때, 비로소 진정한 리더십이 시작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시작되는 리더십. 그것이 이 교수가 이 시대의 한국 교회와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다.

네 명의 아버지를 거쳐 만난 ‘진짜 아버지’… 오테레사가 전하는 치유와 화해의 대서사시

인간의 존재는 부모 없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든든한 울타리이자 따뜻한 추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지우고 싶은 상처이자 분노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여기, 한반도의 남과 북, 그리고 중국이라는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인생의 절반씩을 살아온 한 여성이 있습니다. 최근 저서 <진짜 아버지>(아르카)를 출간한 박예영 사모(오테레사)는 자신의 50년 세월을 관통하는 네 명의 아버지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에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북한의 ‘아버지 대원수’부터 육신의 아버지, 그리고 영적 아버지를 지나 ‘진짜 아버지’인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그 파란만장한 여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편집자 주] 1. 북한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그리고 첫 번째 ‘아버지’ 박예영 사모는 북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모든 주민이 그러하듯, 그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동으로 주어지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 대원수님’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그분은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큰 존재감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집마다 걸린 초상화를 보며 매일 감사의 인사를 올렸죠. 매스컴과 교육을 통해 주입된 그 이름은 제 가슴 깊은 곳에 ‘존경과 흠모’라는 단어로 새겨졌습니다.” 어린 박예영에게 그 아버지는 세상의 전부였고, 절대적인 기준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리고 박 사모가 그 땅을 떠나기 전까지도 그분은 인생의 처음이자 단 한 분의 아버지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숙명이기도 했습니다. 2. 가난과 폭력의 그늘 속, 미움의 대상이었던 ‘친아버지’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두 번째 아버지는 자신을 무릎에 앉혀 키워준 육신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박 사모가 성장할수록 가장 미운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북한 체제의 모순 속에서 아버지는 술에 의지했고, 술기운은 곧 폭력과 주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엄마의 출신 성분을 탓하셨습니다. 북한에서 신분이 좋지 않다는 것은 평생 출세할 수 없다는 뜻이었고,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큰 한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술이 깨면 엄마를 위해 밥을 짓기도 하는 다정한 분이었지만, 술만 들어가면 돌변하는 모습에 저는 아버지를 원수처럼 미워하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박 사모는 훗날 한국에 와서야 아버지의 뒷모습에 담긴 눈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영하 50도의 혹한이 몰아치는 러시아에서 3년간 노동을 견뎌냈던 아버지 , 게가 상할까 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를 타던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말입니다. “제가 탈북한 후에도 아버지는 딸이 보고 싶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수백 리 길을 걸어 혜산까지 오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진심을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미워하며 집을 뛰쳐나왔고 , 아버지는 제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2008년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가혹한 후회로 남는 대목입니다.” 3. 태국에서 만난 ‘세 번째 아버지’와 거부할 수 없는 울림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오기 전 태국에 머물던 시절, 박 사모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세 번째 아버지를 만납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제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마 북한에서 ‘아버지 대원수님’이라고 불러왔던 습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하나님 아버지는 제가 이전에 알았던 아버지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부를 때마다 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떨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찾기 위해 방황하던 시간 끝에 만난 진짜 창조주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그냥 좀 잘난 줄로만 알고 살았으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죄인’인지를 깨달으며 참회와 감격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4. 오대원 목사와의 만남, 그리고 ‘오테레사’라는 새 삶 한국에 정착한 박 사모에게 하나님은 네 번째 아버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미국에서 온 데이비드 로스(David E. Ross) 선교사, 한국 이름으로 오대원 목사입니다. “성령께서 ‘오 목사님은 조선의 아버지다’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마’ 하시며 먼저 손을 내밀어주셨죠. 그것은 저를 새로운 딸로 삼아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오 목사가 지어준 새 이름은 ‘테레사’였습니다. 박 사모는 오 목사의 성을 따 ‘오테레사’라는 이름으로 10년 넘게 중보기도 사역을 하며 살았습니다. 실제로 오 목사는 박 사모의 결혼식에서 친아버지를 대신해 그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입장했습니다. 그 손은 단순한 의전이 아닌, 사랑과 축복의 손이었으며 또 다른 삶으로의 연결이었습니다. 5. 이스라엘에서의 충격적 고백: “주님, 왜 우리가 사과해야 합니까?” 박 사모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08년 이스라엘에서 열린 세계 기도집회 ‘컨버케이션’이었습니다. 160여 개국에서 모인 2천 명의 그리스도인 앞에서 그는 북한 대표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강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인 목사 앞에 가서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지하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해서, 북한이 일본을 미워한 죄, 일본인을 납치한 죄를 대신하여 용서를 구하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는 순간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놀란 일본인 목사님도 함께 무릎을 꿇고 서로 용서를 빌었죠.” 다음 날에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로 세계 평화를 위협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또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뒤늦게 억울함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굶주리고 헐벗은 북한 주민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전 세계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며 울었습니다. 그때 들려온 주님의 음성은 명료했습니다. “나는 죄가 있어서 세상에 내려갔니?” 아무 죄 없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박 사모는 다시 한번 주저앉아 엉엉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북한을 사용하시기 위해 먼저 겸손하게 만드시려고 그를 무릎 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크신 계획 앞에서 그는 자신이 그저 작은 도구였음을 깨닫고 무한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6. ‘악의 축’에서 ‘복의 축’으로… 응답받은 기도 박 사모는 북한을 ‘악의 축’이라 부르는 전 세계인의 인식을 ‘복의 축’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집회에서 한 미국인 여성 선교사가 다가와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불렀던 것을 용서해달라”며 눈물로 사과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 선교사에게 박 사모의 기도 제목을 전해주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11일, 1988년부터 이어져 온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이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순간 저는 확신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북한도, 일본도, 미국도 모두 사랑하시는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사실을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미 용서와 화해의 선포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7. 남북통일은 이미 우리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 사모의 곁에는 17년째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 김승근 목사가 있습니다. 숙대 앞에서 ‘킹스컵밥’을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숙대디’라고 불리는 남편은 박 사모에게 때로는 남편으로, 때로는 아빠처럼 아낌없는 사랑을 부어주었습니다. “저희는 ‘통일 가정’입니다. 남한 출신 남편과 북한 출신 제가 만나 신학적 교리로 다툰 적 없이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으니, 이미 우리 가정에는 남북통일이 이루어진 셈이죠.” 그는 이제 고향 김책으로 향할 날을 꿈꿉니다. 가서 아직 고향에 남아있을 동생을 찾고,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묘소를 돌보며 친척들에게 ‘진짜 아버지’를 소개해 주고 싶어 합니다. 또한 고향 아이들이 원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밥을 해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오늘도 기도합니다. 박예영 사모는 인터뷰를 마치며 독자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아버지가 있는데도 아버지를 모르는 것은 스스로 ‘고아’가 되기로 결정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탈북자라 불러도, 저의 분명한 정체성은 ‘하나님의 딸’이라는 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를 만나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회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고난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 온 그의 삶은, 이제 미움을 넘어 사랑으로, 분단을 넘어 통일로 나아가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박예영(오테레사) 1976년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태어나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7월에 한국에 왔다. ‘고난의 행군’ 때문에, 그저 생존을 위해 육신의 아버지와 김일성이라는 아버지 둘을 두고 북한을 떠난다고 생각했으나, 2차에 걸친 탈북 과정에서 만난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인생과 이 민족의 진짜 아버지이심을 뼈저리게 깨닫고 만다. 남한에 와서 신학을 하고 태백산에 올라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운동까지 펼치면서 “통일코리아는 뉴코리아(New Korea)다”라는 비전을 받았고, ‘통일비전캠프’ 등의 통일운동과 기도 사역에 동참하면서 ‘통일소녀’와 ‘부흥소녀’라는 애칭을 얻었다. 예수전도단 DTS 훈련 과정에서 오대원(David O Ross) 목사를 만나 영적 수양딸이 되어 얻은 이름 ‘오테레사’로 한동안 알려졌고, 2009년 남에서 만난 탈북민 정착도우미 김승근과 결혼할 때 저자의 손을 잡고 입장해준 이는 당연히 오대원 목사였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국립통일교육원 교육위원, 코스타 강사 등을 역임했다. 북한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통일운동을 펼쳐오는 가운데 ‘탈북자’ 대신 ‘북한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을 뜻하는 ‘북향민’ 용어가 널리 쓰이도록 앞장서기도 했다. 현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청년미래위원장,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 (사)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평통연대) 전문위원, CBMC 뉴코리아지회 회장 등으로 섬기고 있다. 2021년 민간통일운동 유공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으며, 202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기념 평화 챌린지에 부부가 출연한 영상을 올려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감리교신학대학원 신학석사,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 Wesley Theological Seminary(미국 워싱턴DC) 목회학박사이며,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정치법학과 박사과정 중이다. 어려운 북향민들의 일자리 창출을 돕기도 하며, 통일가정을 이룬 남편과 함께 앞선 통일을 살아가고 있다. 이메일 payy216@gmail.com

“선교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 “선교는 결국 사람이 남는다” “선교는 사람이다.” 이현국 목사는 이 말을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내뱉었다. ▲선교 사역의 핵심은 사람이라고 밝힌 이현국 목사(운화교회) 그의 목소리에는 30여 년의 목회와 선교 여정이 응축된 단단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교회를 세우는 것도,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 남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건물이 크고, 프로그램이 많고, 헌금이 많아도 제자가 세워지지 않으면 그건 잠깐의 열매일 뿐이죠.” 그는 “선교란 사람을 세우는 일이며,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그가 쓴 책 『사람을 세우는 선교』(쿰란출판사)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책 속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도 결국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 이현국 목사는 경기도 성남의 온화교회 담임목사로, 1990년대 초부터 인도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선교 여정은 ‘성공 스토리’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그 안에는 ‘실패’와 ‘절망’, 그리고 ‘회복’을 통한 진정한 선교의 본질 발견이 담겨 있다. ■ “열정과 재정으로 시작했지만… 실패를 통해 배웠다” 그의 인도 선교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같은 노회의 한 목사로부터 인도 마니푸르 지역의 소식을 들었다. “그곳 인구의 4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라 들었어요. 그래서 그곳을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세우면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등으로 복음이 확산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는 곧바로 한 인도인 신학생(D)을 소개받았다. 그는 신학교 건립을 요청했고, 온화교회는 열정적으로 응답했다. “기도하고 헌금하면 하나님이 하시겠지요. 그렇게만 믿었습니다.” 교회는 매월 50만 원으로 시작해 점차 후원 규모를 늘렸다. 2008년 이후에는 1억 원 가까이 지원하기도 했다. 신학교 건물 건축, 운영비, 교회당 건축까지 합쳐 약 1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그 재정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보니 현지인 리더의 사생활 문제, 재정 부정, 관리 실패가 연이어 드러났습니다. 결국 신학교는 무너졌죠.” 그는 “그때 선교의 본질을 몰랐다”며 회고했다. “열정만 있었지, 선교가 뭔지 몰랐어요. 사람을 세우지 않고 돈만 보냈죠. 그게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 “선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현국 목사는 그 실패를 통해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는 겁니다.” 그는 한동안 인도 사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이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선교의 본질을 다시 성경에서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세웠지요. 그게 바로 선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제자 삼는 제자’라는 원리를 붙잡았다. 그제야 그가 말하는 ‘사람을 세우는 선교’의 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피터 티우마이와의 만남 — “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다” 그런 전환의 시기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 그가 바로 인도 나갈랜드 출신의 피터 티우마이(Peter Thiumai) 교수였다. ▲이현국 목사는 선교의 동역자 피터 티우마이(Peter Thiumai) 교수를 통해 선교자의 사람을 세우는 일을 사역하고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40대 젊은 교수였습니다. 신앙이 진실하고, 제자 양육에 열정이 있었어요.” 피터 교수는 기존 신학교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자, 디마푸르 지역의 작은 월세집에서 학생들과 함께 합숙하며 복음 전도를 시작했다. 이 목사는 그에게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는 대신, 단 하나의 원칙을 제시했다. “먼저 교회를 개척하고, 제자를 세워 자립하시오.” 그것이 멘토링의 출발점이었다. 피터는 곧 집을 떠나 한 교단의 수양관을 빌려 신학교를 열었고, 교회를 개척했다. 몇 년 후 그 교회는 스스로 자립했다. “그는 매년 충실하게 보고서를 보내왔고, 사역의 결실이 보였어요. 저는 매년 그를 만나 함께 멘토링을 했습니다.” ■ “제자를 세우는 신학교, 1,000개의 교회를 낳다” 10년이 지난 지금, 피터 티우마이의 신학교는 인도 동북부 6개 지역에 ‘제자훈련센터(DTC)’를 운영하며 1,000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했다. “처음엔 믿기 어려웠죠. 하지만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다시 제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더군요. 바로 이것이 ‘제자 삼는 제자’의 선교였습니다.” 그는 “이 신학교는 단순한 학문 기관이 아니라, ‘제자를 세우는 제자를 양성하는 학교’”라며 “피터의 신실함과 헌신은 ‘사람 중심 선교’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 저서 『사람을 세우는 선교』 ― 선교의 본질로 돌아가다 ▲현지인 한 사람을 멘토링하여 10년만에 천교회를 세운 이야기를 수록한 책 이현국 목사는 이러한 여정과 깨달음을 담아 책 『사람을 세우는 선교』(쿰란출판사)를 펴냈다. 그는 책에서 선교의 실패와 성공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본질을 가르치십니다. 건물을 세우는 선교에서 사람을 세우는 선교로 돌아올 때 비로소 복음의 생명이 살아납니다.” 책은 4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1장은 “멘토링을 통한 제자 양육”을, 2장은 “피터 선교사의 제자 세우기”, 3장은 “제자의 제자가 세운 교회들”, 4장은 “신학교와 훈련센터 운영의 실제”를 다룬다. 그는 각 장에서 ‘사람 중심의 선교’가 어떻게 교회 자립과 선교 확장을 이끌어냈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준다. 책의 부제처럼, “선교는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사람을 통해 진행되며, 결국 사람이 남는다.” ■ “실패의 뿌리는 무지였다” 이 목사는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때 저는 선교를 잘 몰랐습니다. 후원금을 보내면, 현지인이 알아서 잘 하겠지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선교가 아니라 송금이었습니다.” 그는 “선교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라며 “감동으로 시작해도 체계적 훈련과 평가가 없다면 오래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선교사도, 현지인도, 후원 교회도 모두 ‘사람 세우기’ 원리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면 재정은 따라옵니다. 반대로 돈으로 사람을 세우려 하면, 결국 둘 다 잃습니다.” 그는 자립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선교의 목적은 현지의 자립입니다. 하지만 자립은 건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제자 삼는 제자가 세워질 때 자연스럽게 자립이 옵니다.” 그는 현지 교회들이 스스로 땅과 물질을 헌신하며 교회를 세우는 모습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지 성도들이 제자로 성장하면 그들은 주체가 됩니다. 스스로 목회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죠. 그게 진짜 선교입니다.” ■ “한국 교회 선교, 이제 바뀌어야 한다” 그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선교 패러다임에도 경종을 울린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보내는 선교’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우는 선교’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는 ‘후원금 중심 구조’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교회가 돈만 보내면 선교사가 알아서 할 것이라 믿는 구조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그 사역은 반드시 멈춥니다.” 그는 선교사를 의료인 훈련 과정에 비유했다. “의사는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야 전문의가 되잖아요.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훈련, 멘토링, 실제 사역 경험을 거쳐야 진짜 현장에서 설 수 있습니다.” ▲재정과 선물 중심에서 현지인 사람을 먼저 세우는 것을 우선하는 선교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이현국 목사 “선교사를 세우는 목회자, 교회를 세우는 선교사” 이것은 이 목사의 선교의 경험에서 오는 모토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넘어서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목사로 2~3년 함께 사역하며 전도와 제자 양육, 지역 섬김을 실제로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 개척 과정을 지켜보며 훈련받으면, 선교지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온화교회가 실제로 그렇게 해왔음을 밝혔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들 중 몇 분은 그렇게 훈련받고 국내 지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지금은 자립해서 잘하고 있죠. 저는 이걸 ‘국내 선교의 모델’이라 부릅니다.” ■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선교하지 말라” 이현국 목사는 선교의 시작점은 언제나 ‘사람’임을 강조한다. “돈이 있다고 바로 시작하면 안 됩니다. 먼저 준비된 사람을 찾으세요. 제자가 된 사람, 신실한 사람과 함께 하세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을 세우면 나중에 두 배의 고통이 옵니다. 차라리 시간을 두고 기다리십시오. 준비된 한 사람이 천 명의 미숙한 사역자보다 낫습니다.” ■ “인도는 지금,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현국 목사는 여전히 인도를 향한 열정을 멈추지 않는다. “인도는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중 기독교인은 3퍼센트도 안 돼요.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영혼이 너무 많습니다.” 그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했다. “거리마다, 시장마다, 힌두 사원 주변마다 수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일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재정보다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우면 재정은 따라옵니다.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리 건물을 세워도 금세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핵심은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인도의 미종족전도의 현황 ■ 실패에서 성공으로,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이현국 목사의 선교 이야기는 ‘실패에서 출발한 성공’이다. 그는 실패를 통해 진리를 배웠고, 진리를 통해 사람을 세웠으며, 그 사람이 다시 사람을 세우는 순환을 만들어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선교는 제자 삼는 제자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불타는 확신이 있었다. “교회가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소 지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끝까지 사람을 세우는 선교를 하겠습니다. 그게 복음의 길이니까요.” <책 정보> 『사람을 세우는 선교』 | 저자: 이현국 | 출판: 쿰란출판사 | “선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제자 삼는 제자를 세워라.” 실패에서 시작된 참된 선교의 길, 그리고 ‘사람 중심 복음’의 회복. 목회자와 선교사 모두에게 길잡이가 되는 실제적 교본.

“나는 문화로 싸우는 독립군”

▲문화를 통한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장이레 감독 이름에 담긴 사명, 신앙으로 열리다 장이레 감독의 본명은 장석봉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은 ‘장이레’다. 이 별명은 단순한 예명이 아니었다. 청년 시절 그를 만난 고(故) 하용조 목사가 “장은 짱이다”라는 유쾌한 격려와 함께 ‘이레’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나님의 때”를 뜻하는 히브리어적 어감을 품은 이 이름은 장 감독의 이후 여정과 사명을 예고하는 듯했다. 불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우연히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0살 무렵 처음 발을 들인 교회는 그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어린 장석봉에게 신앙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지만, 이후 연예계 아역 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문화예술의 현장을 경험했고, 신앙은 그의 내면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깊이는 30대 초반 한차례의 극적인 체험을 통해 열리게 된다. 그는 당시 폐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밥 잘 먹어야지 무슨 금식이냐”라는 자신의 생각을 뒤엎고, 한 목사의 권유로 10일간의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금식 중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봉사와 설거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10일이 지나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어떻게 이렇게 폐가 깨끗할 수 있느냐”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폐에 남아 있던 병의 흔적은 미미하게 사라져 있었다. 장 감독은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가슴으로 신뢰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신앙은 그에게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실체가 되었다. 우연에서 시작된 역사 탐험 이후 그의 삶은 점차 “복음을 문화로 전하는 길”로 나아갔다. 요한계시록을 주제로 한 뮤지컬 제작, CGN TV 시절 ‘꿈꾸는 요셉’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예술로 구현하는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는 6·25 전쟁 당시 ‘춘천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춘천대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춘천역 앞에서 열린 승전기념 행사를 마주친 것이 시작이었다. 민·관·군·경이 하나 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는 이야기는 처음엔 그에게 과장된 전설처럼 들렸다. 그는 “이게 과연 진짜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고, 오히려 그 의심이 발걸음을 역사 속으로 깊이 이끌었다. 자료를 뒤지고 현장을 찾으며 만난 것은 놀라운 사실의 연속이었다. 공장 여공들이 주먹밥을 쥐고, 학도병과 대한청년들이 폭탄을 나르며, 민초들이 단 한 시간을 버텨 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던 실체적 기록들이 쏟아졌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라는 확신이 생긴 그는 3일간 금식 기도를 드린 끝에,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이 역사를 먼저 증언하기로 결심했다. ▲2024년에 개봉되었던 <춘천대첩 72시간>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터리 「춘천대첩」의 탄생 그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쏟아부은 시간은 6년. 처음엔 영화 「작전명 폭풍」을 구상했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계획’처럼 다큐·영화·뮤지컬 세 가지 형식으로 역사적 진실을 전하겠다는 비전을 품게 됐다. 그는 100명이 넘는 증언자를 만나며 사실 고증을 거듭했고, 국회·CGV·롯데시네마 등에서 시사회를 열며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완성까지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계엄 선포로 인해 극장 상영이 갑자기 중단됐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려는 진보 진영의 조직적 방해가 이어졌다. 동시에 보수 진영의 무관심은 그를 더욱 깊은 실망에 빠뜨렸다. 춘천시의 지원도 끝내 받지 못한 그는 결국 “집을 팔았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좌우 진영 모두에게 외면받았지만, 그는 “나는 좌우를 떠나 사실을 밝히려 한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그의 열망은 신앙적 확신과 맞닿아 있었다. “장이레 감독이 역사와 문화에 천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력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문화 속에 사상을 스며들게 한다”고 경고한다.” 문화는 곧 전쟁터 장이레 감독이 역사와 문화에 천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력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문화 속에 사상을 스며들게 한다”고 경고한다. 히틀러, 김일성, 소련이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온 역사를 예로 들며, “우리는 너무 모른다. 문화가 곧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춘천대첩의 의미는 단순히 과거의 한 전투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전, 민초들이 보여준 결집과 희생은 대한민국 건국의 분수령이었다. “역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그는 춘천대첩이 낙동강 방어선과 UN군의 개입,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존속을 가능케 한 결정적 사건임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의 시각에서, 그날 나라를 지킨 진정한 영웅은 위정자가 아니라 민초들이었다. ▲역사적 인식은 물론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르게 세워야 국가의 미래가 밝다고 말하는 장이레 감독 진보의 공격, 보수의 안일 하지만 그는 좌우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진보 진영은 그의 작업을 방해하거나 왜곡하려 했고, 보수 진영 역시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 “우리 진영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 진보는 (자신의 입맛에 낮게) 조금만 고치라며 미혹한다”는 그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정작 문화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진보 진영의 치밀한 문화 전략에 밀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겉으로는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공산주의적 사고가 깊이 침투했다”고 진단한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거짓과 카르텔적 구조, 그리고 교회마저도 세속적 권력 다툼에 휩쓸린 현실을 그는 성경적 관점에서 통렬히 비판했다. 장 감독은 “공산주의의 첫 번째 작전은 거짓말”이라며, 진영 논리에 갇혀 스스로를 속이는 시대를 향해 “회개와 고백 없이는 진정한 자유도 없다”고 경고했다. 다큐에서 영화, 그리고 뮤지컬로 「춘천대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장 감독은 현재 영화 「작전명 폭풍」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이 6·25 남침 작전명을 ‘폭풍’으로 명명했던 것에서 따온 이 제목은, 그가 3일 금식기도 중에 받은 영감을 담고 있다. 그는 홍천전투까지 포함해 “한국전쟁의 전모”를 영화로 완결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뮤지컬 제작을 통해 젊은 세대가 역사적 진실을 더 깊이 체험하도록 하는 꿈도 품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제작비 조달을 위해 국내외 투자자를 찾고 있지만, 그는 “나는 월세에 살며 집을 팔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열정은 단순히 흥행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는 그의 신앙적 사명감이 이 모든 노력을 지탱한다. ▲춘천대첩을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장 감독은 재정적인 투자가 필요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고 밝혔다. 신앙이 삶을 이끌다 장이레 감독에게 작품 활동은 곧 신앙의 연장이다. 그는 “예수님이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믿을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를 발견하며, 이를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뿌리로 본다. 정치적 좌우를 넘어, 인간의 죄성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복음이 단순한 종교적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역사를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힘임을 믿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다큐나 공연을 넘어, ‘문화 독립 운동’이라는 이름의 영적 전쟁으로 자리 잡는다. 장 감독이 말하는 “문화 독립군”이란 표현에는, 복음을 드러내는 문화가 곧 시대와 사상을 변혁하는 힘이라는 신념이 담겨 있다. “문화는 전쟁터다. 우리는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민초들이 나라를 지켰다” – 후대를 향한 메시지 그가 「춘천대첩」을 통해 가장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나라를 지킨 것은 위정자가 아니라 평범한 민초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민초들이야말로 진정한 주권자이며,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자유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매년 이들을 위한 진정한 예배와 감사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 감독은 이 메시지를 단순한 과거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젊은 세대가 직접 느끼고 고민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는 학교와 교회에서 자비를 들여 상영회를 열며 학생들과 교인들이 “공산주의의 위협과 자유의 가치를 뼈아프게 깨닫는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역사를 잊으면 미래는 없다”는 그의 호소는 단순한 경고를 넘어, 다음 세대가 스스로의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는 간절한 부탁이다. 장이레 감독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이자 신앙의 증언이다. 어린 시절 불교 가정에서 출발해, 금식 기도를 통해 신앙의 깊이에 들어서고, 역사 속 숨겨진 진실을 문화로 드러내기까지—그의 여정은 단순히 한 감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도전이자 초대다. ▲ 정치적 좌우를 넘어, 인간의 죄성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 장 이레 감독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말한다. “문화는 전쟁터다. 우리는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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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힘들지?" 그 물음에 다윗이 답한다

영화 <다윗>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양들을 돌보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집안의 막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아이.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년에게 눈길을 멈추셨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영웅의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홀로 양을 지키던 그 광야의 시간 속에서. 뮤지컬 애니메이션 <다윗>은 그 오래된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펼쳐낸다. 단순한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두려움과 기다림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한 인간의 성장기로.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었다" 2025년12월, 미국 극장가에 조용하지만 강렬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필 커닝햄(Phil Cunningham)과 브렌트 도스(Brent Dawes)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가 개봉 첫 주말 약2,2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썼다. 역대 종교 애니메이션 흥행1위로 불리던<이집트 왕자>의 오프닝 스코어를 가뿐히 넘어섰고, 최근 국내에서도131만 관객을 동원한<킹 오브 킹스>의 글로벌 흥행 실적마저 뛰어넘었다. 그러나 두 감독이 처음부터 노린 것은 흥행 수치가 아니었다. 그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한 문장이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거인을 쓰러뜨리는 다윗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어떻게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영화는 사무엘상·하에 기록된 다윗의 생애 중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순간부터 유다의 왕으로 세워지기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전반부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등 익숙한 성경 장면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후반부는 골리앗을 이긴 뒤 오히려 사울에게 쫓기며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다윗의 기나긴 기다림을 깊이 있게 그린다. 화려한 승리보다 보이지 않는 시간에 더 집중하는 이 선택이, 이 영화를 다른 성경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다. "우리는 거인을 쓰러뜨리는 다윗이 아니라,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본 다윗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필 커닝햄 감독 잠베지 강에서 시작된 30년의 꿈 이 영화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감독 본인들의30년 광야 여정이다. 필 커닝햄 감독은 Animation Scoop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출발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 여정은30년 전, 잠베지 강을 따라 카누를 타고 내려가던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거대한 천둥폭풍과 돌진하는 사자, 강둑 위에 피어난 작은 꽃,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독수리를 바라보며 저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읽고 있던 책이 바로 다윗의 이야기였다. 모험과 감동, 음악과 우정, 섬세한 감정과 진실한 삶이 담긴 그 서사 속에서, 커닝햄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창조 세계에서 느꼈던 그 마음을 다윗의 삶에서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30년. 두 감독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를 만들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긴 여정을 거쳤고, 마침내 평생의 꿈을 완성했다. 브렌트 도스 감독은 이 제작 과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다윗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제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특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 세상에 나오기를 원하는 이야기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저 이 이야기를 맡은 청지기로서, 그 본연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귀 기울이고 길을 여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영화 속 다윗의30년 광야 여정과 감독들의30년 제작 여정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영화가 보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이 빚어낸 신앙 간증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노래 "Tapestry" — 믿음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낸 장면 중 하나는 거대한 전투도, 골리앗의 최후도 아니다. 어린 다윗에게 어머니가 불러주는 노래 "Tapestry(태피스트리)"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실타래를 보렴, 엉키고 찢겨 있구나. 색들은 뒤섞여 있고, 지치고 낡아 보이지. 하지만 네가 보는 뒷면만으로 직공(하나님)을 판단하지 마라, 뒷면은 장차 나타날 영광의 그림자일 뿐이란다." 그리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노래한다. "그분은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짜고 계셔, 우리의 어둠을 영광스러운 빛으로 바꾸시며.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하고 영원하며 신성한 걸작품이 된단다." 커닝햄 감독은 이 캐릭터가 자신의 실제 어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성경에서 다윗이 내 어머니의 하나님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적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어머니들이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믿음의 유산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영화는 골리앗 앞에서 다윗이 외친 고백 "너는 칼과 창으로 나아오거니와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삼상17:45)"가 전장에서 갑자기 생겨난 용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광야의 별빛 아래서, 오랜 세월 신앙의 씨앗이 자라 맺은 열매였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노래로 가르쳐준다.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한 걸작품이 된단다" — 영화<다윗> 중 어머니의 노래Tapestry 광야의 시간 — "왜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영화가 가장 집중하는 것은 골리앗을 이긴 이후의 다윗이다. 승리 다음에 찾아온 것은 영광이 아니라 도망이었고, 왕좌가 아니라 광야였다. 사울에게 쫓기며,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시간들. 이 부분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가?" 영화는 이 물음에 설교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다윗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게 한다.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의 억울함은 노예로 팔렸던 요셉과 닮아 있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모세와도 이어진다. 성경 속 위대한 인물들이 모두 광야를 먼저 통과했다는 것, 그 광야가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준비 시간이었다는 것을 영화는 조용하고 강하게 전한다. 커닝햄 감독은 인터뷰를 이 말로 마무리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보고 이해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큽니다." 오늘 광야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설교 대신 이야기로 그 진리를 건네준다. "단순한 영화 그 이상" — 관객들의 반응 미국 개봉 직후 IMDb에는 이런 관람평들이 쏟아졌다. "드디어 흥행에 타협하지 않는 성경 대작이 나왔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요. 사무엘서에 놀라울 정도로 충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것입니다. 디즈니급의 강력한 애니메이션이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 어른 모두에게 영감을 줍니다." "단순한 영화 그 이상입니다. 사역을 위한 강력한 도구예요. 예배자로서의 다윗의 마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담아냈습니다." 리뷰에서는 어머니의 노래 "Tapestry"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다윗의 어머니가 신앙으로 빚어낸 삶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들에게 당장의 환경이나 형편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더 크고 온전한 계획을 신뢰하도록 가르칩니다. 그 신앙의 지혜와 가르침은 깊은 울림과 은혜를 전해 줍니다." 이 작품은 뮤지컬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아홉 곡의 노래가 삽입돼 극의 흐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엄청난 스케일과 속도, 웅장하고 압도적인 사운드는 기존 기독교 영화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는 수준의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국내 자막 감수는 최성일 명예교수(한신대학교 신학과)가 맡아 성경적 해석과 신학적 검증을 거쳤다. 배급사 <길갈> 대표 김미영— "광야의 시간을 지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국내 홍보를 담당한 기독교 영화 전문 배급사 <길갈>의 김미영 대표는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영웅의 승리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광야의 시간을 지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한 사람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왜 나만 힘들지?라는 질문에 대한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이어 이 영화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다윗의 이야기는 특별한 영웅의 전설이 아닙니다. 평범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가정과 교회, 다음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국내 개봉을 위해 길갈은 이미 5월부터 6월까지 전국30개 지역에서 목회자 부부 약 4,500명을 초청하는 대규모 시사회를 준비하고 있다. 교회 스티커 이벤트, 단체관람 할인, 수천 개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검증 과정도 함께 추진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수입·배급을 맡고 길갈이 홍보를 담당하는 이 작품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다윗의 이야기는 영웅의 전설이 아닙니다. 평범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 김미영 <길갈> 대표 비기독교인도 부담 없이— 오히려 더 감동받을 수 있는 이유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임에도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종교적 거리감 없이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대놓고 복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다윗의 삶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인생의 의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드는 구조를 택했다. 다윗은 예수님과 달리 세계사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시편의 저자, 골리앗을 이긴 소년 – 어느 문화권에서도 이미 친숙한 이름이다. 여기에 디즈니풍의 친숙한 연출, 풍성한 볼거리와 들을거리가 더해지니 종교적 배경이 없는 관객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영화 속 메시지는 또한 기독교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에서 왜 나만 이렇게 힘든가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시간, 억울하게 쫓기는 시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의 시간 — 다윗의 광야는 바로 그 순간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기독교인에게는 한 인물의 성장 이야기와 리더십 서사로,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적 도전과 깊은 위로로 각각 다르게, 그러나 똑같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번역과 내용 검수에 참여한 목회자들도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 영화는 다윗을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평범한 소년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내용상 큰 문제가 없고, 번역도 잘 됐다. 교회가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모범적인 작품이라고 본다." "아이들에게는 믿음의 용기를, 청년과 어른들에게는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3대가 함께 앉아야 할 영화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세대를 초월해 온 가족이 함께 앉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전반부의 모험과 액션, 웅장한 음악에 눈을 반짝일 것이다. 청소년들은 왜 나만 힘들지라고 묻는 다윗의 방황과 성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와 조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믿음을 어떻게 심어줄 것인가를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길 것이다. 영화는 특히 오늘날의 교육 문제를 예리하게 건드린다. 부모가 자신의 욕심을 자녀에게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너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진정한 양육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성취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의미를 심어주는 것— 이는 기독교 가정뿐 아니라 어떤 가정에서도 깊이 공명할 메시지다. 이 작품은3대가 함께 극장 의자에 앉아야 할 영화다. 할머니가 손자의 손을 잡고, 부모가 자녀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청년이 홀로 앉아 자신의 광야를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이 영화는 각자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건네줄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 영화<다윗>의 핵심 메시지 광야에서 빚어진 이야기가 광야를 걷는 이들에게 30년 전 잠베지 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한 청년의 소망이 마침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3,000년 전 유다 광야를 홀로 걷던 양치기 소년의 노래가 2026년 서울의 극장 안에 울려 퍼진다. 왜 나만 힘들지. 왜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이 물음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영화 <다윗>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를 말한다.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하고 영원한 걸작품이 된다고. 광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보고 이해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다고. 영화 <다윗>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배급사 <길갈>은 개봉에 앞서 5월부터 6월까지 전국 30개 지역에서 목회자 시사회를 진행하며 단체 관람도 적극 지원한다.

‘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스크린을 끄면 가족이 살아난다”…고난주간 ‘미디어 절제 캠페인’ 확산

고난주간을 맞아 한국교회 안에서 ‘미디어 절제’를 통해 가정과 신앙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사)놀이미디어교육센터는 ‘2026 고난주간 미디어 절제 캠페인’을 전개하며, 성도들이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줄이고 가족 간의 관계 회복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도록 돕고 있다. 이번 캠페인은 “스크린 타임 OFF, 패밀리 타임 ON”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디어 과잉 시대 속에서 무너진 가정의 대화와 관계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음세대 두뇌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란다” 센터 측은 설명자료를 통해 인간의 두뇌 발달이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닌 ‘관계 속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특히 영유아기의 경우 타인의 두뇌와의 연결, 즉 부모와의 언어적·정서적 교류가 필수적이며, 이는 사회성 형성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자료에 따르면 아이의 두뇌는 부모의 표정, 목소리, 대화를 통해 발달하며, 이러한 상호작용이 부족할 경우 사회성 발달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대로 스마트폰과 같은 스크린 중심 환경은 정보 전달은 가능하지만 관계 형성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특히 “아이의 두뇌는 화면이 아니라 부모와 얼굴을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성장한다”는 메시지는 이번 캠페인의 핵심 가치로 제시된다. AI 시대, 관계 없는 교육의 위험성 경고 설명자료는 인공지능 기반 학습의 한계도 지적한다. AI는 지식 전달은 가능하지만 감정 교류와 사회적 신호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감정 읽기 능력을 배우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둑기사 이세돌의 사례를 인용하며, 감정이 없는 기계와의 대면이 인간에게 심리적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센터는 이러한 환경이 지속될 경우, 사회성 발달이 저해되고 반사회적 성향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경고하며, AI 학습은 보조적 수단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난주간, 하루 한 시간이라도 가족을 켜라” 캠페인은 실천적 지침도 함께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밤 9시 이후 스크린 OFF ▲스마트폰 없는 가족 식사 ▲가족 성경 읽기와 중보기도 ▲서로 축복하는 롤링페이퍼 작성 ▲서점·도서관 방문 등의 ‘패밀리 타임’을 통해 가정 내 대화와 교제를 회복할 것을 권장한다. 또한 가정에 스마트폰 보관함을 만들어 일정 시간 이후 모든 기기를 내려놓는 실천도 제안되었다. 고난주간, 영적 절제에서 관계 회복으로 이번 캠페인은 단순한 미디어 사용 제한을 넘어, 고난주간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제의 시간이, 단지 금식이나 개인 경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 공동체의 회복’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미디어교육센터는 “성도들이 미디어를 절제함으로써 영적 성장뿐 아니라 가정의 회복을 경험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히며, 한국교회 안에 건강한 디지털 사용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오늘날 스크린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이번 캠페인은 다시금 인간의 본질적인 관계와 신앙의 자리로 돌아가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고난주간, 스크린을 끄는 작은 결단이 가정을 살리고 다음세대를 회복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나무를 깎아 구원의 은혜를 새기다

십자가는 무겁고 두려운 형틀이 아닌 사랑의 증거라고 고백하는 정지은 작가 ■ 전시 일정 및 관람 안내 목공예 작가 정지은(45)의 2026 사순절 특별기획전 '비워낸 나무, 손끝에 닿은 쉼'(빌 2:5)이 오는 3월 24일(화)부터 4월 4일(토)까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409, 문화공간 JADE409(지하 2층)에서 열린다. 지하철 2호선 및 수인분당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 1분 거리다. 관람 시간은 개관일인 3월 24일에는 오후 2시부터 7시까지(개회식 오전 11시)이며, 평일(월·화·목·금)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수요일과 주일은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운영된다.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5시에는 작가가 직접 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10명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이 필수이며, 화환과 화분은 정중히 사절한다. 주차는 유료이고, SUV 등 대형 차량은 주차가 어려워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한다. 예약 문의는 02-557-1063. 이번 전시에는 12년간 작업해온 80여 점의 작품 가운데 엄선된 40여 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비움', '닿음', '쉼'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됐다. 최동욱 JADE409 대표(장로)는 “나무를 깎아내는 묵묵한 비움에서 시작해, 십자가를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간절한 닿음을 지나 마침내 평강의 쉼에 이르는 여정을 담았다”며 “결과보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에 순종하며 준비한 작품들을 통해 마음에 잔잔한 울림과 쉼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12년의 손끝, 나무에 새긴 십자가의 이야기 정지은 작가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금속공예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2014년부터 나무 십자가 작업을 이어온 12년 차 목공예 작가다. 전공이 금속공예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선택한 것은 단순한 재료의 선호가 아니었다. “금속 십자가는 너무 차갑다. 나무로 만드는 것은 나무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서”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그가 만드는 십자가에는 언제나 나무의 따뜻한 질감이 살아 있다. 관람객이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내어놓는 이 따뜻함이, 작가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는 매개체다. 십자가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경기도 구리 예닮교회 고대경 담임목사와의 만남이었다. 작가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어 찾아온 저에게 목사님이 말씀으로 양육해 주셨고, 그 양육을 통해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교회 개척의 동반자로 처음 나무의 따뜻한 질감을 알게 된 정 작가는 고대경 목사의 적극적인 권유로 십자가를 처음 만들었다. 첫 작품이 바로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루증 여인'이다. 나무 조각 작업은 보기와 달리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매캐한 나무 분진, 무거운 목재, 날카로운 톱날의 위험이 도사리는 고된 노동이다. “예닮교회 가족들의 도움과 담임 목사님의 후원이 없었다면 홀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첫 작품을 보고 기계를 후원하며 지금껏 작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운 고 목사와 교회 공동체. 그렇기에 정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개인의 창작물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빚어진 믿음의 고백”이라고 강조한다. '은혜를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사명 정 작가는 작업 5년 차 무렵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저는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만들어도 됩니까, 그 자격이 있는가를 항상 저에게 묻곤 했다”는 고백처럼, 그에게 이 작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끊임없는 신앙의 씨름이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은혜를 기록하는 사람.” 그 말씀이 작가 정지은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 일이 교회를 통해 은혜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는 말한다. 다음 세대에게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십자가에 담아 남겨주는 것이 사명이 되었다. 작품의 영감은 주로 말씀 묵상과 주일예배 설교에서 얻는다. 큐티 중에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노트에 스케치한 뒤 나무로 옮기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기교를 덧붙이면 하나님의 의도와 멀어지는 것 같아, 최대한 스케치대로 조각하려 한다”고 밝혔다. 스케치 초안이 이미 상당량 쌓여 있어, 앞으로 작품화할 내용이 풍부하다.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주님과 나만의 이야기가 생겨 기쁘다는 그의 말에서, 창작이 곧 기도요 예배임을 느낄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 보는 세 가지 테마 이번 전시는 세 가지 테마로 작품을 분류하여 구성된다. 첫 번째 테마 '비움'은 나무를 깎아내는 시간, 내려놓음의 자리를 상징한다. 작가는 이탈리아 카타콤을 여행하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려도 되는 것인가'를 깊이 묵상했고, 그 성찰이 작품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테마 '닿음'은 십자가 앞에서의 마주침, 간절한 손끝을 뜻한다. 세 번째 테마 '쉼'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 흔들림 없는 쉼표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혈루증 여인'이다. “혈루증 여인의 간절함과 그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매우 크게 느껴져 만든 작품”이라고 정 작가는 설명한다. 이 십자가에서 한쪽 팔은 각지고 다른 팔은 둥글게 조각되어 있는데, 각진 팔은 주님의 공의를, 둥근 팔은 그분의 사랑을 상징한다. “병을 넘어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관람객이 느꼈으면 한다”는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기도'는 고대경 목사의 유년 시절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난한 시골 교회 종탑과, 어린 아들을 향해 눈물로 새벽 제단을 쌓으셨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이 십자가를 들고 여러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많은 목사들이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며 “이것이 곧 한국의 신앙이었노라”고 고백한다고 작가는 전한다. '쉼'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는 많은 관람객이 발걸음을 멈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 고단한 현대인들의 마음에 가장 깊이 닿는 작품이다. 십자가를 통해 전하는 예수님의 다양한 사랑 정 작가는 여러 차례의 전시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예수님을 하나의 틀 안에 가둬놓고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랑의 예수님, 두렵고 떨리는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저마다 하나의 모습으로만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은 작고 작은 인간의 사고의 틀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과 방법으로 나타내어 주신 분”이라고 강조한다. “십자가는 무겁고 두려운 형틀이 아닌 사랑의 증거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무게이자 가장 깊은 위로입니다.” 이것이 정지은 작가가 12년간 나무를 깎으며 전하고자 한 메시지다. 그의 작품 앞에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이번 전시 장소인 테헤란로는 서울에서 가장 분주하고 무한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다. 작가는 “이곳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으로 인해 나를 사랑하시고 지키시길 원하신다는 것, 그분이 계신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 십자가> <내가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 <소경> 고대경 목사 “K-나무 십자가로 세계를 향해” 고대경 예닮교회 목사는 기자간담회에서 정지은 작가의 작품 세계와 향후 비전을 직접 설명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앞에 수백 명이 줄지어 선 광경을 보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한들 수십 년 후에 들을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하지만 예술 작품은 100년, 천 년이 지나도 수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구원의 복음을 작품으로 끌어내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크고 영원한 사역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고 목사는 정 작가의 첫 스케치인 '혈루증 여인'을 보고 “평생 본 작품 중 가장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 목공예를 권유했다고 밝혔다. 이후 나무와 기계를 직접 후원하며 작가가 생계 걱정 없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후원해왔다. 그는 “구원과 복음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끌어내는 정 작가의 작품이 국내를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K-나무 십자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대형 작품 위주로 나아갈 계획이며, 작가가 평생 동안 구원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주제 아래 작품 활동을 이어가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정지은 작가는 “제 평생에 허락된 시간 안에서 은혜의 이야기를 쉼 없이 기록하고 남기겠다”고 말했다. 안산제일교회, 주안장로교회, 장로회신학대학교 등에서의 전시를 거쳐 이번 서울 강남 한복판의 기획전까지, 그 여정은 단순한 예술가의 발자취가 아닌 신앙 고백의 기록이다. 사순절 기간, 테헤란로의 분주함 속에서 나무 십자가를 통해 잠시 멈추고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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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언론협회, 22개사 체제로 재출발…"신뢰 회복이 첫걸음"

한국기독언론협회(회장 노곤채 목사, 이하 한기언협)가 4월 15일 서울 순복음영산신학원에서 제21-1회 임시총회를 열고, 장기 분담금 미납 회원사 제명과 신규 회원사 가입, 회칙 개정을 일괄 의결하며 22개사 체제로 새 출발을 선언했다. 노곤채 회장이 의장을 맡고, 조성권 부회장(기하성총회신문)이 개회기도를, 유현우 총무(기독일보 CDN)가 회원 점명을 진행한 이날 총회에는 총대 19명 중 9명이 직접 참석하고 8명이 위임 참석해 재적 과반을 충족, 정상적으로 개회됐다. 장기 미납 4개사 제명, 신규 2개사 가입… 책임 있는 연대의 재정비 이번 임시총회의 핵심 안건은 회원사 구조 재편이었다. 장기 회비미납된 4개사가 분담금 장기 미납을 이유로 제명 처리됐다. 이에 앞서 제21회 정기총회는 분담금을 2회 이상 미납한 회원사가 2026년 2월 21일까지 기한 내에 납부하지 않을 경우 임원회에 처리를 위임한 바 있다. 임원회는 이를 '협회 활동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결의하고 해당 회원사들에 공문을 발송했으나, 납부가 이뤄지지 않아 이번 총회에서 최종 제명을 의결한 것이다. 동시에 노바미디어와 순복음영산신문 2개사의 신규 가입을 승인, 기독교라인, 기독종합신문, 기독교한국신문, 기독일보 CDN, 기독일보, 기하성총회신문, 길과생명, 뉴스앤넷, 뉴스앤-C, 목양신문, 복음신문, 본헤럴드, 월드미션신문, 정통개혁신문, 크리스챤월드리뷰, 크리스챤한국, 크리스천투데이, 풀가스펠뉴스, 하야방송, 한국교회공보 등 기존 완납 회원사를 포함한 22개사 체제를 확정했다. 노곤채 회장은 "회원사 재정립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라며 "분담금은 협회에 대한 최소한의 연대 의지이자 기독 언론 생태계를 함께 지켜가겠다는 약속이다. 이번 제명은 아쉽지만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회칙 3개 조항 개정…징계 기준 명문화·전형위원회 구성 강화 회칙 개정도 함께 이뤄졌다. 주요 내용은 세 가지다. 먼저 제2조 소재지 조항에 "본회의 사무소가 개소하기 전까지는 회장의 언론사 주소에 둔다"는 단서를 추가했다. 제10조 징계 조항은 기존 '2년 이상 의무 미이행'에서 '연속 3년 이행하지 않을 때 자동 제명되며, 재가입 시 신규 가입 절차를 거쳐야 한다'로 기준을 강화했다. 또한 제15조 임원 선출 규정에서 전형위원회 구성에 부회장을 추가하고, '유사 언론단체 가입 회원은 임원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해 협회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한편 의장은 박한근 부회장이 개인 사유로 사임한 사실을 알리고, 윤홍식 목사를 후임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기자 세미나·심포지엄 연대·AI 대응·후원 돌파… 4대 실행 과제 제시 총회 이후 한기언협은 신뢰 회복과 역할 강화를 위한 구체적 실행 로드맵을 제시했다. 첫째, 기자 역량 강화다. 보도 전문성 부족과 교단 홍보 기사와 탐사·분석 기사의 경계 모호 등 교계 언론에 대한 사회적 신뢰 저하의 원인을 솔직히 인정하며, 탐사보도 기법, 데이터 저널리즘, 팩트체크 방법론 등 실무 중심의 기자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외부 언론 전문가와 학계 인사를 강사로 초빙하고, 회원사 기자들 간 네트워크 강화의 장으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둘째, 심포지엄 연대와 기획기사 공동 취재다. 시민사회·학술기관·연합기관과 연대해 종교 정책 관련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 결과를 복수 회원사 공동 취재 기획기사로 연결하는 체계를 구축한다. 정부의 종교 예산 배분 형평성, 종교법인법 개정 논의,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소통 구조 등이 주요 의제로 검토되고 있다. 노곤채 회장은 "교계 언론이 교회 안에서만 소비되는 언론이 아니라 사회와 소통하는 공공언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 AI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다. 생성형 AI 활용 실무 교육을 기자 세미나 핵심 과정으로 편성하되, AI가 효율의 도구일 수는 있어도 교회와 신앙 공동체를 향한 언론의 책임까지 대체할 수는 없다는 인식 아래, 기독교 언론이 지켜야 할 윤리적 기준과 복음적 가치의 접점을 함께 모색할 방침이다. 넷째, 후원 저조 타개다. 한국 교회 전반의 재정 위축과 교인 수 감소, 코로나19 이후 후원 문화의 변화로 교계 언론의 재정 기반은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다. 한기언협은 이를 개별 언론사의 생존 문제가 아닌 기독 언론 생태계 전체의 위기로 규정하고, 협회 차원의 공동 후원 캠페인, 독자 참여형 콘텐츠 확대, 디지털 구독 모델 연구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창립 20년을 넘어, 신뢰를 향한 새 출발 2004년 창립 이래 20년 넘게 교계 언론의 연합과 협력을 이끌어 온 한기언협은 이번 임시총회를 자기 점검과 쇄신의 계기로 삼았다. 22개사 체제 확정은 책임 있는 연대의 재출발이고, 기자 세미나와 심포지엄 연대는 전문성과 공공성 확보를 위한 실천이며, AI 대응과 후원 돌파는 미래를 향한 생존 전략이다. 이 모든 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결국 '신뢰'다. 교계 언론이 교회와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때, 한국 교회가 직면한 위기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다시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도심 뒤덮은 '거룩한 방파제'… 10만 신앙인, 차별금지법 반대 외쳐

▲전국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시청광장의 집회에 참석하여 22대국회 차별금지법 반대 거룩한방파제통합국민대회에 참석하였다. 3월 28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대한문을 거쳐 광화문과 효자동에 이르는 세종대로 일대가 거대한 인파로 가득 찼다. '22대 국회 차별금지법 반대 거룩한방파제 통합국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성도와 시민 약 10만 명(주최 측 추산)은 동일한 메시지를 외쳤다.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신앙·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입법 시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집회는 22대 국회에서 손솔 진보당 의원과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이 각각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우려를 배경으로 마련됐다. 주최 측은 이 법안들에 대해 '2007년 이후 발의된 차별금지법안 가운데 가장 강력한 규제와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고 평가하며,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등을 차별금지 사유에 포함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표현조차 제재 대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구조를 핵심 문제로 지적했다. 기도에서 행진까지… 신앙과 저항의 4부 구성 대회는 총 4부로 구성됐다. 오후 1시 30분 연합기도회로 시작된 집회는 홍호수 목사(거룩한방파제 사무총장)의 사회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회개와 거룩을 위한 기도, 한국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 등 7개의 특별기도가 이어졌다. 이후 예배와 국민대회, 그리고 도심 퍼레이드가 순서대로 진행되며, 기도와 찬양으로 시작된 현장은 점차 신앙적 고백과 사회적 문제의식이 결합된 공간으로 확장됐다. ▲박한수 목사는 1부 설교에서 한국교회가 깨어서 국회의 발의된 차별금지법을 막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제1부 설교를 맡은 박한수 목사(제자광성교회·거룩한방파제 특별위원장)는 로마서 13장 11~12절을 본문으로 '지금은 깨어야 할 때'를 강조하며 한국교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차별금지법은 역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역차별과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며, '이 법이 통과되면 성경에 입각한 설교가 혐오 표현으로 처벌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악으로 악에 맞서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며 악한 법을 막아내는 것이 나라와 교회와 후대를 지키는 길이라고 호소했다. 제2부 예배에서는 김운성 목사(영락교회·거룩한방파제 대표회장)가 열왕기상 19장 18절을 본문으로 '이 시대 칠천명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차별금지법의 이름은 듣기 좋지만 그 안에 담긴 독성을 모르는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호소하며, '한국교회가 함께 깨어 거룩한 방파제가 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축도를 맡은 박조준 목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 설립자)는 차별금지법을 창세기의 선악과에 빗대어 '듣기에 달콤하나 그 뒤에 악법이 있다'고 경고했다. 성명서 발표… "위헌적 악법, 즉각 철회하라" 제3부 국민대회에서는 이용희 교수(에스더기도운동·거룩한방파제 준비위원장), 길원평 교수(진평연), 조영길·지영준 변호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차별금지법의 문제점을 법리적·사회적 측면에서 집중 발표했다. 특히 법안에 포함된 시정명령 불이행 시 3천만 원 한도의 이행강제금 무제한 부과, 반복 위반에 따른 최소 500만 원 이상의 손해배상, 형사처벌 가능성, 입증책임 전환 등의 제재 구조가 법치주의 원칙과 충돌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날 발표된 성명서는 집회의 문제의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성명서는 해당 법안이 표현과 신념의 자유를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교육 현장에서 특정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나 토론이 제한될 경우 미래세대의 가치 형성 과정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대규모 집단소송이 제기되면 천문학적 배상의무가 발생해 동성애 반대 설교를 한 개인과 교회들이 경제적 파산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준비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손솔 의원과 정춘생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의 위헌성·반민주성을 규탄하고, 국가와 미래 세대에 끼칠 재앙과 같은 해악을 경고하며, 차별금지법 발의를 즉각 중단·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이날 집회는 예배를 시작으로 제4부에는 광화문을 출발하여 효자사거리까지 약 2km구간을 행진하였다. 광화문 행진으로 대단원… 전국 순회 집회의 정점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된 제4부 퍼레이드는 광화문을 출발해 동화면세점, 광화문사거리, 경복궁역사거리, 신교동교차로를 거쳐 효자 치안센터 앞까지 약 2km 구간을 행진했다. 흰색 티셔츠를 입은 참가자들이 파란색 깃발과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으며, 가족 단위 참가자와 청년층이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규모 인파에도 질서 있는 이동이 이어졌고, 행진 종착지에서는 참가자들이 손을 맞잡고 나라와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번 서울 집회는 지난 2월부터 광주·부산·대구·대전·전주 등 주요 도시를 돌며 이어온 전국 순회 집회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주최 측은 2024년 10월 서울 도심과 여의도 일대에서 100만 명 이상이 운집했던 집회와, 2025년 6월 30만 명 규모의 서울퀴어반대대회를 상기하며 국민적 반대 의사가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번 집회는 교계와 시민사회가 단순한 반대 표현을 넘어 법리와 정책, 여론까지 아우르는 조직적 대응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울 도심을 가득 메운 10만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남겼다. 준비위원회는 '국민의 건강한 가정과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해 관련 입법 시도에 지속적으로 대응하겠다'며 '깨어있는 국민들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임을 거듭 천명했다.

나이지리아의 '크리스천 제노사이드'

출처: 국제기독교연대(ICC,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2026년 3월 발표 보고서 2023년 크리스마스 이브, 나이지리아 미들벨트(Middle Belt) 지역의 작은 기독교인 마을들에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자행된 학살 속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교회는 불탔고, 살아남은 이들은 짐승처럼 마을을 탈출해야 했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반응은 '유목민과 농부 사이의 토지 분쟁'이라는 상투적인 설명이었다. 그러나 국제기독교연대(ICC)가 2026년 3월 발표한 최신 보고서는 이 '설명'이 얼마나 교묘하고 위험한 거짓인지를 낱낱이 폭로했다. ICC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이후 나이지리아에서 표적 폭력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약 53,000명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지역 분쟁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수치다. 학살의 패턴은 일관되다. 공격 대상은 기독교인 마을이고, 교회와 성직자가 집중 표적이 되며, 생존자들은 영구 이주를 강요받는다. 2025년 말 현재 국내 실향민(IDP) 수는 350만 명에 육박하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적 이유로 쫓겨난 기독교인들이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시민을 국가 스스로 방치하고, 때로는 가해 세력에 문을 열어주고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본 기사는 ICC의 2026년 3월 보고서를 토대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의 실태와 구조적 원인, 그리고 국제사회의 책임을 심층 분석한다. 단순한 종교 갈등이 아니라 '국가 포획(State Capture)'에 의한 체계적 제노사이드가 진행되고 있다는 ICC의 충격적 진단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 1.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기만적 서사: 국제사회를 호도하는 정치적 위장 나이지리아 정부가 수십 년째 반복해온 서사가 있다. '목초지를 둘러싼 농부와 풀라니(Fulani) 유목민 사이의 전통적 갈등'이라는 설명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사막화가 유목민들의 남하를 부추기고, 이것이 농경 공동체와의 마찰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 설명은, 그러나 실제 현장의 증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성직자 살해와 교회 파괴 — 이것이 '토지 분쟁'인가 ICC 2026년 보고서는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목초지를 얻기 위한 싸움이라면 굳이 기독교 성직자를 조직적으로 살해하거나 교회를 불태울 이유가 없다. 2025년 야하야 캄바사야(Yahaya Kambasaya) 목사가 살해된 사건은 그 단적인 예다. 무장 세력이 그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땅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를 제거하는 표적 행위였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미들벨트 전역에서 반복되고 있다. 학술적 분석 역시 이 분쟁의 주된 동인이 '민족-종교적 요인'임을 일관되게 지목한다. 공격자들이 습격 과정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수사(修辭)는 지하디스트적 성격을 띤다. '이슬람의 땅을 이교도로부터 되찾는다'는 종교적 정당화 담론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소를 얻기 위한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종교적 정화(purification)를 향한 이념적 동기가 폭력의 근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기만적 서사가 국제사회에서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서방 언론들이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설명을 검증 없이 전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살의 가해자들에게 국제적 면죄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ICC 보고서는 이를 가리켜 '의도치 않은 공모'라고 표현한다. 언론의 무비판적 보도가 제노사이드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 요인 중 하나라는 경고다.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가 이주를 촉진하는 요인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ICC는 이것이 조직적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배경 조건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기후 갈등론'은 나이지리아 정부가 국제사회의 시선을 돌리고, 제노사이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적 도구라는 것이다. 이 신화를 걷어내지 않는 한, 진정한 해법은 요원하다. ▶ 핵심 수치 2009년 이후 표적 폭력으로 사망한 나이지리아 민간인: 약 53,000명 / 2023년 크리스마스 이브 학살: 기독교인 마을 집중 공격 / 2025년 말 국내 실향민(IDP): 약 350만 명 / 레아 샤리부(Leah Sharibu)를 포함한 납치 피해자 다수, 2025년 말까지도 미귀환 상태 (출처: ICC 2026년 3월 보고서) 2. 국가 포획(State Capture): 안보 기관을 장악한 이슬람 극단주의 나이지리아의 안보 위기는 단순한 국가 능력의 부재가 아니다. ICC 보고서가 제시하는 훨씬 더 충격적인 진단은 바로 '국가 포획(State Capture)'이다. 풀라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나이지리아 정부와 안보 기관 내부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으며, 국가 권력 자체가 이슬람주의 확장 의제를 위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심스러운 고위직 인사들 — 안보 체계의 이면 ICC 보고서는 세 명의 고위 인사를 특히 주목한다. 카심 셰티마(Kashim Shettima) 부통령, 누후 리바두(Nuhu Ribadu) 국가안보보좌관, 벨로 마타왈레(Bello Matawalle) 장관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슬람주의 확장론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들로, 현재 나이지리아 최고 안보 기구를 지휘하고 있다. 이들의 지휘 아래 군대가 학살, 처형, 마을 파괴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으나, 어떠한 사법적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안보 구조가 특정 민족-종교 집단에 의해 통제될 때, 전체 국민을 위한 중립적 보호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ICC는 이것이 단순한 부패나 무능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북부 엘리트 무슬림 집단이 전략적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국방 체계 내에서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조직적으로 배제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위협 정보가 담긴 정보 보고서들이 고위 안보 관리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무시되거나 은폐되는 현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흐마드 구미 셰이크 — '병렬 외교'의 위험성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북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이 수행하는 이른바 '병렬 외교'다. 북부의 저명한 종교 지도자 아흐마드 구미(Ahmad Gumi) 셰이크는 반군과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협상 과정에서 무장 단체에 종교적 명분을 제공해왔다. 국가 공식 채널 밖에서 테러 단체에 신뢰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 '병렬 외교'는 사실상 반군 세력의 국제화를 돕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볼라 티누부(Bola Tinubu) 대통령이 이끄는 현 정부는 북부 이슬람 단체의 이익을 위해 기독교 소수자의 헌법적 권리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 ICC의 판단이다. '소수'라는 표현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나이지리아 기독교 인구가 전체의 약 40%에 달함에도 국가 보호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적 소수가 아니라 권력 구조 속의 소수, 즉 정치적 소외의 문제다. ICC 보고서는 이 구조적 편향이 야하야 캄바사야 목사 살해 사건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기독교 지도자가 살해되었음에도 나이지리아 국가는 어떠한 실질적 수사도,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기독교 공동체의 수호자가 아님을 넘어, 사실상 가해 세력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 ICC 보고서 핵심 개념: '국가 포획(State Capture)' 국가 포획이란 국가 권력 기관이 특정 집단의 사익을 위해 장악되는 현상을 말한다. ICC는 나이지리아에서 풀라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안보 기관을 통제할 정도로 정부에 침투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폭력이 처벌받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분석한다. 3. 범죄-테러의 결탁과 '피의 경제학': 납치·갈취로 돌아가는 잔혹한 생태계 나이지리아의 폭력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조직 범죄와 이슬람 테러리즘의 긴밀한 결탁이다. ICC 보고서는 이를 '피의 경제학(Blood Economy)'이라 규정한다. 범죄와 테러가 서로를 먹여 살리며, 그 희생양은 언제나 기독교 공동체라는 것이다. 산적 행위에서 지하디스트 자금원으로 — 진화하는 폭력의 구조 북부 나이지리아의 산적 행위(banditry)는 이제 단순한 범죄 문제가 아니다. ICC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산적 집단들은 더 큰 지하디스트 목표를 위한 자금 조달 및 전술적 지원의 원천으로 기능하고 있다. 납치, 갈취, 가축 약탈로 벌어들인 자금이 보코하람(Boko Haram)이나 이슬람국가 서아프리카 지부(ISWAP) 등 테러 조직의 자금줄로 흘러들어간다. 이 두 세력은 협력하여 기독교 다수 지역을 체계적으로 불안정화시키고 있다. 납치와 갈취를 통해 공동체 경제를 파괴하고, 그 재원으로 더 많은 무기와 인력을 조달한다. 2026년 현재까지도 이 악순환이 스스로를 영속화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여전히 종교 폭력을 묵인하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ICC는 단언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안보 예산의 행방이다. 나이지리아는 방대한 규모의 안보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예산이 실제 공동체 보호에 사용되기보다는 위협이 지속되는 데 개인적 이해관계가 있는 관리들의 사적 이익으로 흘러들어가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다고 ICC는 고발한다. 안보 예산이 곧 부패와 공모의 연료가 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현대판 노예제도 — 납치와 인신매매의 공포 ICC 보고서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대규모 납치 문제다. 2009년 이후 납치범들은 수천 명의 어린이를 몸값이나 성 착취의 목적으로 붙잡아두었다. 이것은 현대판 노예제도라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기독교 학교와 종교 기관이 특별히 집중 표적이 되는 것은, 이 행위가 무작위적이 아니라 종교 공동체의 뿌리를 뽑으려는 전략적 의도를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4년 보코하람에 납치된 뒤 개종을 거부하고 11년이 넘도록 억류 중인 레아 샤리부(Leah Sharibu)의 사례는 이 비극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2025년 말까지도 그의 귀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막대한 몸값 없이는 지속적으로 납치 피해자를 구출하지 못하는 현실은, 주권 국가로서의 기본 의무가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중의 고통 속에 있다. 폭력의 직접적 희생자가 되는 동시에, 자신들을 배신하는 안보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내야 한다. 이 구조적 모순이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이 처한 현실의 가장 비극적인 단면이다. 4. 900만 달러의 진실 은폐: 워싱턴 로비전의 민낯 나이지리아 정부의 대응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폭력을 묵인하고, 국제무대에서는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ICC 보고서가 폭로한 워싱턴 로비 활동의 실태는 이 두 번째 전선의 충격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DCI 그룹에 900만 달러 — 제노사이드를 포장하는 글로벌 PR ICC에 따르면, 나이지리아 정부는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로비 회사 DCI 그룹(DCI Group)과 계약을 맺고 약 900만 달러를 지불했다. DCI 그룹의 역할은 나이지리아 내부 위기를 '윤색된 버전'으로 포장하여 미국 정책 입안자들과 언론에 유통시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박해의 흔적을 지우고, 미국 국무부가 나이지리아를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ountry of Particular Concern, CPC)'으로 지정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CPC 지정은 미국이 심각한 종교 자유 침해국에 부과하는 외교적 제재 수단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10월 나이지리아를 CPC로 지정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는 기독교 박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식적 인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의 집중적인 로비 활동은 이 지정을 무력화하거나 번복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이지리아 영부인의 워싱턴 방문이 이루어졌다. ICC는 이 방문이 잔혹 행위의 규모를 직접 부인하기 위한 대규모 외교 이니셔티브의 일부였다고 평가한다. 피해자들의 피로 얼룩진 현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턴에서는 수백만 달러짜리 '이미지 세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자원을 동원한 잔혹 행위 은폐 — 나이지리아 국민에 대한 이중 배신 ICC 보고서는 이 로비 활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써야 할 국가 자원이 그 자국민 학살의 실체를 감추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중적 배신이다. 나이지리아 국민에 대한 배신이자, 국제적 투명성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다. 전문 로비스트들은 미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접근하여 나이지리아를 '안정적인 파트너' '테러와의 전쟁에서 협력하는 동맹'으로 포장한다. 이 과정에서 나이지리아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 '테러'의 희생자라는 불편한 진실은 의도적으로 삭제된다. 국가가 테러를 묵인하는 동시에 테러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ICC는 국제 사회와 언론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선전을 검증 없이 전달하는 것을 중단하고, 현장의 피해자들을 직접 바라봐야 한다고. 입안자들은 값비싼 홍보 캠페인에 포장된 이미지가 아니라, 미들벨트의 폐허가 된 마을과 캠프를 가득 채운 실향민들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목할 사실 나이지리아 정부가 미국 로비에 지출한 900만 달러(DCI 그룹 계약금)는 미들벨트 학살 생존자들에게 제공된 심리 상담 예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국제적 이미지 관리에는 수백만 달러를 쏟아붓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자국 기독교 생존자들을 위한 국가 지원은 사실상 전무하다. (ICC 2026년 3월 보고서) 5. 인도주의적 재난: 350만 실향민의 지워진 삶 숫자는 가끔 인간의 고통을 지운다. 53,000명의 사망자. 350만 명의 실향민. 수천 명의 납치 피해 어린이. 이 수치들 하나하나가 실존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담고 있다. ICC 보고서는 통계 뒤에 가려진 인도주의적 재앙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트라우마와 방치 — 국가가 외면한 정신 건강 위기 미들벨트 지역의 학살 생존자들이 겪는 심리적 외상은 가늠하기 어렵다.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집을 빼앗기고, 낯선 곳으로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국가는 이들에게 어떠한 전문적 심리 지원도 제공하지 않는다. ICC 보고서는 이 심리적 공격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인구의 사기를 꺾고 영구적으로 몰아내려는 제노사이드 전략의 계산된 요소라고 분석한다. 강제 이주당한 기독교 공동체는 열악한 환경의 캠프로 내몰린다. 깨끗한 물도,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도 없는 과밀한 공간이다. 연구 결과들은 이 캠프에서의 높은 사망률이 중앙 정부의 의도적 방치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총에 맞지 않아도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절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ICC는 이것 역시 제노사이드의 일부라고 본다. 경제적 파괴 — 땅에서 뿌리뽑힌 공동체들 가축과 농장에 대한 표적 파괴는 미들벨트 기독교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을 영구적으로 무너뜨렸다. 이것은 전쟁의 우발적 부작용이 아니다. ICC의 갈등 종단 연구는 이 경제적 파괴가 기독교인들을 영구 이주하게 만들 목적으로 취해진 전략적 조치임을 보여준다. 빈곤과 기아는 총탄만큼 효과적인 '완만한 속도의 제노사이드(Slow-motion genocide)'다. 집도, 땅도, 생계 수단도 빼앗긴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다. 설령 폭력이 잠시 멈추더라도 그들의 공동체는 이미 지워지고 없을 것이다. ICC는 이 점에서 나이지리아에서 진행 중인 과정이 단순 분쟁이 아닌 집단학살의 요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한다. 350만 국내 실향민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이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돌아갈 고향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은 불탔고, 교회는 파괴되었으며, 이웃들은 흩어지거나 죽었다. ICC 보고서는 이 인간적 참상을 국제사회가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 ICC 보고서 현황 요약 • 2009년 이후 표적 폭력 사망자: 약 53,000명 • 2025년 말 국내 실향민(IDP): 약 350만 명 • 기독교 학교·교회에 대한 집중 표적 공격 지속 • 국가 지원 심리 상담 프로그램: 사실상 전무 • 레아 샤리부 등 수천 명의 납치 피해자 미귀환 • 미들벨트 지역 경제 인프라: 심각한 영구 손상 6. 국제사회의 책임과 정책적 제언: ICC가 요구하는 6대 행동 ICC 2026년 3월 보고서는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향해 구체적이고 강력한 행동을 요구한다. 외교적 수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압박과 제재를 통해 나이지리아 정부가 행동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① 나이지리아 CPC 지정 즉각 복원 트럼프 행정부가 2025년 10월 단행한 나이지리아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PC) 지정은 올바른 조치였다. ICC는 이 지정이 어떠한 정치적 이유로도 철회되어서는 안 되며, 조속히 복원·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CPC 지정은 나이지리아 정부가 종교 자유 침해에 대한 국제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외교적 신호다. ② 글로벌 마그니츠키법 적용 — 핵심 인사 제재 ICC는 이 위기의 설계자들에게 직접적 책임을 묻기 위해 미국의 글로벌 마그니츠키 인권 책임법(Global Magnitsky Human Rights Accountability Act)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은 행정명령 13818호의 권한을 사용하여 카심 셰티마 부통령, 누후 리바두 국가안보보좌관, 벨로 마타왈레 장관에 대해 자산 동결 및 비자 금지 조치를 즉각 시행해야 한다. 이러한 표적 제재는 이슬람 지하디스트 작전을 지원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직접적으로 교란할 것이다. ③ 미국의 안보 지원에 명확한 조건 부과 나이지리아에 대한 미국의 안보 지원은 무조건적으로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 ICC는 나이지리아가 차별 없이 모든 종교 집단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확한 조건 하에서만 안보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조건 없는 지원은 현재의 박해 구조를 사실상 보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④ 국제 언론의 비판적 보도 촉구 ICC는 국제 언론이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관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프레임을 검증 없이 전달하는 것은 의도치 않게 학살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다. 언론은 현장의 증인들과 독립적 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나이지리아 정부가 900만 달러를 들여 구매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들벨트의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⑤ 독립적 국제 조사 기구 구성 ICC는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 실태에 대한 독립적이고 공정한 국제 조사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독립 조사 기구를 유엔 차원에서 구성하고, 학살과 종교 청소의 증거를 체계적으로 문서화해야 한다. 이 기록은 향후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의 기소를 위한 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⑥ 인도주의적 지원 채널의 직접화 국제 인도주의 지원이 나이지리아 정부를 경유할 경우 박해받는 기독교 공동체에 실질적으로 닿지 못할 위험이 크다. ICC는 미들벨트 실향민 캠프에 대한 의료, 식량, 심리 지원이 나이지리아 정부를 우회하여 직접 전달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부패한 중간 경로를 차단하고 피해자들에게 직접 자원이 전달되는 투명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나이지리아 비극은 세계교회가 주목하고 기도해야 할 일이다. 이미지 AI제작 6. 한국 교회와 국제 기독교 공동체가 응답해야 할 이유 나이지리아의 비극은 지구 반대편의 먼 이야기가 아니다. 국제기독교연대(ICC)의 보고서는 단지 나이지리아 정부를 향한 고발장이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긴박한 호소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이 호소 앞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전 세계 박해 받는 기독교인의 연대 속에서 한국 교회는 역사적으로 박해와 순교의 경험을 가진 공동체다. 일제 강점기의 신사 참배 거부, 6·25 전쟁 중의 순교자들, 그리고 현재도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지하 교회 성도들. 이 역사적 경험은 한국 교회에 박해받는 형제자매들의 고통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응답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ICC와 같은 국제 기독교 인권 단체들이 발간하는 보고서를 적극적으로 주목하고, 교회 안에서 이를 교육하고 기도 제목으로 삼는 것은 한국 교회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국제 인도주의 지원에 동참하는 것이다. 종교 자유는 보편적 가치 — 침묵은 공모다 종교의 자유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보장받아야 할 보편적 기본권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박해를 받는 종교 집단은 기독교인들이다. 오픈도어스(Open Doors)의 세계기독교박해지수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 보고서들이 매년 이 현실을 확인해준다. 나이지리아의 기독교인 학살에 국제사회가 침묵하는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일종의 공모다. 가해자들에게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도 자신들의 편이 없다는 절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ICC 보고서가 강조하듯, '세계의 침묵은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을 멸절시키는 궁극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 침묵을 깨는 목소리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나이지리아의 종교 자유 상황에 관심을 촉구하고, 외교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의 기독교 공동체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 결론: 국가가 배신한 사람들에게 세계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ICC 2026년 3월 보고서가 폭로한 나이지리아의 현실은 인류의 양심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53,000명의 사망자, 350만 명의 실향민, 수천 명의 납치 피해 어린이, 그리고 국가가 방조하는 조직적 종교 학살. 이것은 '불가피한 공동체 마찰'이 아니다. 극단주의자들의 이익에 의해 장악된 국가가 생산해낸 인재(人災)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제도적 무관심, 안보 기관 내부의 공모, 그리고 900만 달러짜리 국제적 오보 공세의 삼각 편대를 통해 자국의 기독교 인구를 사실상 제노사이드에 내맡겨왔다.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기만적 서사는 국제사회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의도적 방어막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CPC 지정은 올바른 방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작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마그니츠키 제재, 조건부 안보 지원, 독립 국제 조사, 직접적 인도주의 지원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통합된 국제적 압박으로 이어져야 한다. ICC는 국제사회가 국가 행위자들을 단죄하지 않는 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희생자들의 비명은 지금도 미들벨트의 폐허 위에서 울리고 있다. 외교적 편의가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가 응답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 보고서 출처 및 참고 - 국제기독교연대(ICC,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2026년 3월 발표 보고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 실태 및 국가 포획 분석 - ICC 웹사이트: persecution.org | 2026년 3월 보고서 전문 게재 - 미국 글로벌 마그니츠키 인권 책임법(Global Magnitsky Human Rights Accountability Act) / 행정명령 13818호 - 미국 국무부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PC) 지정 제도 관련 자료 - 오픈도어스(Open Doors) 세계기독교박해지수(World Watch List) ※ 이 기사는 국제기독교연대(ICC) 2026년 3월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된 심층 기획 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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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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