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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2026년4월 세계 정국 분석 [길과 생명:양봉식 국장]지금 세계는 단순한 이념 갈등이나 지정학적 패권 경쟁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문명적·영적 충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한편에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질서를 해체하려는 복합적인 전체주의 연합 세력이 있다. 공산주의, 좌파 사회주의, 워키즘(Wokeism), 이슬람 전체주의 세력이 공통의 적—곧 기독교 문명—을 타도하기 위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결탁하고 있다. 본 분석기획은 이 충돌의 구도와 실체, 그리고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가 어떻게 인식하고 응전해야 할 것인지를 심층 검토한다. Ⅰ. 서론: 문명의 충돌인가, 영적 전쟁인가 20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된 지 불과35년, 21세기 세계는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명 충돌의 전선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경제적 패권 다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기초 가치—인간의 존엄, 가족의 신성성, 국가의 정체성, 신앙의 자유—를 둘러싼 전쟁이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하버드 대학교의 고(故)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는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21세기 세계의 주요 갈등이 이념 간이 아닌 문명 간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특히 이슬람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그로부터3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헌팅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선이 복합화·다층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 정국을 단순히 지정학적 대결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 대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엄"을 전제한 기독교 문명과, 그 전제를 파괴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 사이의 영적 싸움이다. 한국교회는 이 구도를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지, 어떤 가치 위에 서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시점이다. Ⅱ. 전 세계적 갈등의 양대 구도: 두 문명의 충돌 1. 기독교 문명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비롯된다는 성경적 인식,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청교도적 정치관,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세속 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적 유산—이 모두가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 오늘날 이 문명 진영의 핵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비록 많은 내부 모순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헌법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보호하는 국가이다. 트럼프2기 행정부(2025~)는 출범과 함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정책의 방향으로 채택하는 신호를 보냈다. 헤리티지 재단이 주도하는 프로젝트2025(Project 2025)에는 기독교 문명 가치에 기반한 정부 재편 구상이 담겨 있다. 이를 진보 진영은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보수 진영은 건국의 정신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 문명 진영의 핵심 구성원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일하게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사법부 독립을 제도적으로 유지하는 국가이다. 의원내각제 공화국인 이스라엘의 의회(크네세트)는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차례의 쿠데타나 불법 권력 장악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이는 중동 전체를 통틀어 키프로스와 함께 가장 양호한 민주주의 지수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한국의 건강한 우파 세력 역시 이 진영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선교의 결과물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건국의 정신과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 세력이 이 문명 진영의 동아시아 파트너이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신앙을 지켜왔다는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2. 전체주의적 결합 세력의 등장 반대편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이 진영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워키즘, LGBTQ 이데올로기, 급진 페미니즘, 환경 급진주의, 이슬람 전체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들(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하지만 실질적으로 결탁한 집합체이다. 이들 세력이 하나로 묶이는 논리는 단순하다. 공통의 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적은 바로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서구 자유민주주의 질서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념적 차이—예컨대 이슬람 전통주의와LGBTQ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다—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 헤게모니"라는 공동의 표적 앞에서 전략적 동맹을 맺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통의 적 앞에서 연합하는 것—이것이21세기 전체주의 연합의 핵심 작동 원리다." 국제 정치 층위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이 이른바"반서방 연대"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의2026년 국제정세전망(2026년1월)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은"미국의 동맹 네트워크 내 불안감을 이용해 권위주의 체제들 간의 결속을 모색하는 한편,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2025년7월 제17차BRICS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의 이란 핵시설 타격과 가자 지역 작전에 대한 규탄이 이루어지면서 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재확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가치 전쟁 구도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협조해야 할 동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중-러 3각 연대가 가시적 형태로 공고화되면서,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Ⅲ. 이슬람화와 정체성의 위기: 유럽이 보내는 경고 1. 인구 통계가 말하는 미래 유럽의 이슬람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2017년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약2,577만 명으로 전체 유럽 인구의 4.9%였다. 주목할 점은 이 수치가 2050년까지 어떻게 변화하느냐이다. 퓨 리서치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민을 전혀 받지 않는"제로 이민" 시나리오에서도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자연증가만으로 7.4%까지 상승한다. 현재 수준의 이민이 유지될 경우 11.2%, 2015~16년의 대규모 난민 유입이 계속될 경우 최대 14%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14% 시나리오대로라면 스웨덴의 경우 전체 인구의30% 이상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 국가별로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 킹스칼리지 런던 국제급진화연구센터(ICSR) 발표에 따르면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 비율이9.19%로 가장 높고, 이어 스웨덴 9.15%, 오스트리아 9.12%, 네덜란드 8.48%, 벨기에 7.87%, 영국 7.18% 순이다. 영국의 경우2001년(152만 명)에서 2021년(380만 명)으로 20년 만에 무슬림 인구가2.5배 이상 증가했으며, 런던의 무슬림 비율은 이미 15%에 근접했다. 단순한 인구 증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동화 거부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사이자 연구자인 유해석 박사(영국FIM 국제대표)는 수년간의 현지 연구를 통해 다음 패턴을 발견했다: 무슬림들이 한 국가에 정착하면, 이민·다산·현지인과의 결혼·개종의 4가지 방식을 통해 세를 불려나간 뒤, 국가의 법이 아닌 자신들의 법 체계인 샤리아(Sharia) 법으로 생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샤리아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조차 진입을 꺼리는 무슬림 자치 구역(no-go zone)이 형성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유해석 박사는 또한 교도소 통계를 근거로 유럽 사회의 이슬람화가 사회 통합 실패를 수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수감자의 약50%, 이탈리아45%, 영국40%가 무슬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사회경제적 소외와 차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통합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주는 지표임은 분명하다. 3. 서구 기독교 정체성의 붕괴와 이슬람의 전진 왜 유럽은 이슬람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그 핵심 원인은 서구 엘리트들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중동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늦어도21세기 말에 유럽의 인구는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며, 유럽은 서부 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지적한 핵심은 유럽이 이슬람의 공세에 밀리는 이유가 이슬람의 힘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의 정체성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2024년에는 개신교의 종주국 독일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퓨 리서치의 미래 종교 예측(2015년 발표)에 따르면 2010~2050년 사이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약1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 내 기독교인들이 2010~2050년 사이 2,382만 명이나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예측되는 반면, 같은 기간 무슬림 인구는 유럽에서 6%에서10%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비대칭적 변화의 배경에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앙 이탈이 있다. 기독교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이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견지한다. 기독교 문명은 자기 부정의 이데올로기 - 워키즘, 탈식민주의, 비판 이론 - 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해체하는 중이고, 이슬람은 그 공백으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Ⅳ. 워키즘: 기독교 문명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 1. 워키즘의 기원과 본질 "워키즘(Wokeism)"이라는 용어는 "깨어 있다(woke)"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인종주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의미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변질되었다. 2017년 옥스퍼드 사전에 "사회적 불의, 특히 인종주의에 대한 경각심"으로 등재되며 시대적 용어로 정착했다. 오늘날 보수주의 진영에서 워키즘을 비판적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서구 사회와 제도, 문화로 인해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격차가 발생했으므로 서구 문명은 본질적으로 부패했다고 보는 세계관." 이 관점에서 워키즘은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억압받는 자"로 분류하며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재편한다. 더 나아가 현존하는 사회의 모든 표현을"파괴"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워키즘이 심각한 이유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정치적 좌파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용어를 도용하여 반기독교적 의제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이 신앙적 각성을 세속적 사회운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사탄이 성경적 용어를 이용하여 그 의미를 역전시키는 전형적인 수법과 같다고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경고한다. 2. 워키즘이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력 워키즘의 실질적 파괴력은 이미 서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미군은 2024년1941년 이후 최악의 신병 모집난을 겪었다.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LGBTQ 이데올로기를 군에 도입한 결과 전통적 군인 정신이 훼손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기업 영역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와 워키즘이 결합하여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직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같은 문화 산업에서는 동성애·성소수자 콘텐츠가 어린이용 작품에도 일상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교회 안으로도 워키즘이 침투했다. 독일의 진보잡지 슈피겔의 르네 피스터 기자는 2024년 출간한 저서 『잘못된 단어들』에서 워키즘이 좌파마저 독단론으로 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주류 교단 일부는 워키즘과의 타협 속에서 동성 결혼 축복, 젠더 이데올로기 수용, 비판적 인종이론(CRT) 채택으로 나아갔다. 이 교단들에서 신자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트럼프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워키즘은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민주당원조차 2024년 대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를 워키즘으로 지목했다(물론 실제적인 원인은 부정선거라는 의혹과 주장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그러나 워키즘의 영향력은 교육 기관, 언론, 문화 산업에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도 이 이데올로기가 빠르게 유입되는 중이다. 3. 이슬람과 워키즘의 기이한 동맹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 중 하나는 이슬람과 워키즘의 전략적 연대이다. 이슬람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 동성애 사형, 신정(神政) 정치를 지지하는 반면, 워키즘은 페미니즘, LGBTQ 권리, 세속주의를 옹호한다. 이 두 세력은 사실상 가장 상극에 있는 이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연합 전선을 형성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공통의 적, 즉 서구 기독교 문명이다. 워키즘은 이슬람 이민자를 "억압받는 소수자"로 프레이밍하여 보호하고, 이슬람은 그 프레임을 이용해 서구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한다. 실제로 서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관련 시위에서 진보 좌파 학생 단체와 이슬람 학생 단체가 공동 행동에 나서는 사례는 이 기이한 동맹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워키즘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로 설명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해체라는 목표 앞에서, 상극의 이념들이 전술적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기이한 동맹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워키즘을 친이슬람적 이민 정책, 반이스라엘 정서, 기독교 역사 부정, 전통 가족 해체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나의 패키지로 이해해야 한다. Ⅴ. 이스라엘: 문명 충돌의 최전선 1. 왜 이스라엘인가: 지정학적·문명적 의미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단순한 동맹 관계나 성경적 예언론의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문명적 관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중동이라는 전체주의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쐐기 역할을 하는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쿠데타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강하게 유지되어—2024년1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네타냐후 연립정부가 추진한 사법개혁 법안을 무효로 판결하기도 했다. 중동의 지도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명확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1979) 이후 미국 지정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신정(神政) 국가이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레바논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무장세력으로 인해 사실상 이란의 영향권 내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왕정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군주제이다.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가 작동하는 국가이다. 2. 반이스라엘 정서의 이념적 계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반이스라엘 정서(BDS 운동, 유엔의 반이스라엘 결의안 등)는 표면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이념적 계보를 추적하면 공산주의·좌파 이데올로기 및 이슬람 전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체계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이 제3세계 해방운동과 연결되었고, 이 흐름이 오늘날의 진보 좌파 진영에 이어지고 있다. 워키즘 이데올로기에서 이스라엘은 "식민지 억압자"로 프레이밍된다. 이 서사에서 유대인은 "성공한 억압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피억압 소수자"이다. 워키즘이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동 내 유일한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악당이 된다. 여기에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반이스라엘 정서는 좌파와 이슬람이 만나는 가장 강력한 공유 지점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지지는 단순한 성경적 명령이나 신학적 입장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문명 진영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반이스라엘 정서에 동조하는 것은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서사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보수 진영이 이스라엘을 전략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Ⅵ. 세계 종교 인구의 변화와 기독교의 과제 세계 종교 인구의 장기 추세도 이 대결 구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1970년 약 5억7천만 명이었던 무슬림 인구는 2024년 약20억3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50년에는 약 28억6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기독교 인구는 12억2천만 명에서 26억3천만 명으로 2.7배 증가하지만, 무슬림은 무려5배가 증가한다. pixabay.com 특히 충격적인 것은 지역별 분포의 변화이다. 기독교 문명의 본거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2024년에서 2050년 사이 감소세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되며, 북미에서도 2010~2050년 사이 약2,770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추산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기독교인 약 6,605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해 무종교인이 6,149만 명 유입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문명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반면 이슬람은 높은 출산율(2010년 기준 합계출산율 3.1명, 기독교는 2.7명)과 견고한 정체성 유지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은 그 공백을 파고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상황도 우려스럽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00년 후 한국 인구가 71%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며, 229개 시군구 중 200개 시군구가 폐지 또는 존폐 위기에 놓일 것으로 예측됐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불가피하게 이민 수용 압력을 증가시키고, 이는 이슬람 인구 유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문화막시즘으로 침투한다. Ⅶ. 신냉전과 한국교회의 지정학적 선택 1. 중·러·북의 반서방 연대와 한반도 2026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사실상 신냉전 구도로 재편됐다. 2026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과 쇼이구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 간의 회담에서 양국은 핵심 이익에 대한 상호 지지를 재확인하고 글로벌 지정학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메커니즘 격상을 선언했다. 세종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중남미·중동·동북아시아는 반서방 연대와 자유민주 진영이 정면 충돌하는 3대 전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구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었고, 서방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이 단행되면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는 더욱 공고화됐다. 특히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면서 북-러 밀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2026년1월에는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강경 성명을 내면서 미-이란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이란의 이슬람 신정 체제는 반서방 연대의 핵심 축으로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편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함으로써 중동 전체를 전쟁의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다. 2. 한국 우파 기독교의 정치적 선택 이 문명 충돌의 구도에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는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가치의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 기독교 문명 기반의 가치—인간 존엄, 가정의 신성성, 신앙의 자유, 생명 존중—를 수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내에서도 이 구도는 명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쟁, 동성결혼 합법화 압력, 과격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 이슬람 할랄 인증의 확산, 좌파 진영의 반이스라엘 정서 조장—이 모두가 동일한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국내적 발현이다. 한국교회는 이 각각의 이슈들을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거대 흐름의 국내적 가지들로 인식해야 한다. Ⅷ. 음모론의 함정과 전략적 분별력 이 거대한 세계 정국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음모론의 함정이다. 유대 자본의 세계 지배 음모론, 글로벌 엘리트의 비밀 지배 시나리오,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모든 것을 계획·조종하고 있다는 극단적 단순화—이런 음모론은 실제로 더 중요한 이슈를 흐리게 만든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세세한 음모론의 진위 여부에 매몰되어, 정작 지금 당장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핵심 질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아무리 연합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전제이다. pixabay.com 따라서 음모론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이렇다. 첫째, 구체적인 음모론의 세부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다. 둘째, 큰 그림—즉 전체주의 결합 세력이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려 한다는 거시적 구도—은 냉철하게 인식한다. 셋째, 음모론이 제기하는 개별 이슈들의 진위를 분별하되, 그것이 나의 가치적 입장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지, 모든 음모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유대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죄악이었다. 유대인 개인이나 유대 자본에 대한 일반화된 부정적 프레이밍은 성경적으로도 잘못되었고, 실천적으로도 이슬람·좌파의 반이스라엘 연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전략적 입장을 음모론과 분리하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이다. Ⅸ. 성경적 보수주의: 응전의 신학적 기반 1.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 이 모든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정치적 보수주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 문명 가치에 근거한 보수주의이다. 정치적 잡음이 많고 보수 진영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는 정책과 세력을 분별력 있게 지지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성경적 보수주의의 기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생명과 가정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지하는가? 낙태 권리 확대, 동성결혼 합법화,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에 반대하는 입장이 기독교 문명의 기본값이다. 둘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차별금지법이나 혐오표현금지법의 형태로 기독교적 발언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질서를 지지하는가? 권위주의적 전체주의—공산주의, 이슬람 신정 정치, 좌파 전체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2. 에베소서 6장의 시대적 적용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장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엡6:12)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을 향한 공세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나 이념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의 연합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교회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 기도, 성결한 삶, 복음의 증거, 공동체의 연대 - 이것이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29:7)고 명령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3.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다섯 가지 자세 첫째, 세계 정국에 대한 성경적 해석 능력을 길러야 한다. 뉴스와 시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의 렌즈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정학·사회·문화에 대한 성경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선거, 입법, 공공 정책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시민적 참여가 요구된다. 이것은 정당 정치에의 맹목적 편입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시민 참여이다. 셋째, 이슬람화와 워키즘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사회적 압력 앞에 침묵하는 것은 묵시적 동조이다. 성경적 진리는 사랑으로, 그러나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강화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된 민족이다. 반이스라엘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도록 성경적 가르침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 내부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거대한 전체주의 연합에 맞서는 힘은 교회의 연합에서 나온다. 신학적 차이와 교파적 경계를 넘어 기독교 문명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교회들이 연대해야 한다. Ⅹ. 결론: 두려워하지 말고, 분별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이 승리의 확신 위에 서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그것을 해체하려는 공산주의·좌파·워키즘·이슬람 전체주의의 결합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정치·경제·문화·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석의 최종 목적은 두려움이 아니다. 분별이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무리 강대한 전체주의 연합이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거대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분별력 있는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읽되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다. 음모론의 미혹에 빠지지 않되, 실제적 위협을 직시한다. 정치적 편협함에 갇히지 않되, 성경적 가치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슬람을 두려워하지 않되, 이슬람화의 문명적 함의를 냉철하게 인식한다. 워키즘의 위선을 분명히 보되,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문명 보루이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선교의 열매 중 하나인 한국교회가21세기 문명 충돌의 시대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굳건히 서는 것—이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분별하라. 그리고 서라. ■ 주요 참고 자료 및 데이터 출처 -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유럽 무슬림 인구 전망」, 2017 / 「미래 종교 예측(2010~2050)」, 2015 - 아산정책연구원, 「2026년 아산 국제정세전망: 심화되는 무질서」, 2026.1 / 「2024 국제정세전망: 연대결성」, 2023.12 -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 「1970~2050년 기독교·이슬람 인구 예측」, 2024 - 유해석,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킹스칼리지 런던ICSR, 「유럽 국가별 무슬림 비율」, 2019 - 르네 피스터(독일 슈피겔), 『잘못된 단어들』(Falsche Worte), 2024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1996 / 버나드 루이스, 유럽 이슬람화 경고 발언 - 전국인력신문, 「중러 연대와 한국의 선택」, 2026.2 / 민주주의평판지수(DP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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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pixabay.com/ko/photos 1. 문제의 출발점: 왜 이 전쟁을 둘러싼 인식이 갈리는가 2024년 이후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시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되기도 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진실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는 단순한 시각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 전제, 이념적 지향, 그리고 정보 선택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란 문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국제 핵 질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중동의 종파 갈등, 에너지 지정학, 미국 패권의 향방,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가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환원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한쪽은 이것을 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으로 축소하고, 다른 한쪽은 이란의 위협성만을 부각해 군사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한다. 어느 쪽도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는 오랫동안 두 흐름이 공존해왔다. 하나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 신학의 흐름이다. 이 두 흐름은 국내 정치적 사안에서도 자주 충돌했지만, 이란과 같은 국제 분쟁 문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계열은 피해자의 시각을 앞세우고, 보수 계열은 안보와 질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교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언어로 이 복잡한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이 글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고,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교회 내 두 시선의 신학적 근거를 점검한 후, 기독교적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말할 때,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복잡한 국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교회의 목소리가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발언은 더욱 엄격한 지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2. 이란 정권의 실체: 간과되거나 축소되는 현실 (1) 신정 독재 체제의 구조와 본질 이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사실은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최고지도자(라흐바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의 종교 권위자이자 정치 권력자로서, 군·사법·방송·외교·안보 전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 이념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권력이 다시 종교 이념을 강요하는 이중 구조다. 대통령과 의회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 후보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선거의 실질적 경쟁성을 박탈한다. 즉, 이란의 선거는 민주주의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치적 반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모두 심각하게 제한된다. 공개 처형은 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집행된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이란의 처형 건수와 방식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치범,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들이 사형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현실은 이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 종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란 헌법은 명목상 일부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배교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란 내 지하 교회 신자들은 끊임없는 위협과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 적발될 경우 체포와 투옥, 고문을 감수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이란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맥락이다. (2) 여성 인권 문제와 국제적 파장 2022년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22세 여성이 히잡 착용 규정 위반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전역에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수백만 명이 저항에 나섰다. 이란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란 신정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들은 이란에서 의복 규정 준수를 강제받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 결혼, 이혼, 여행, 취업 등 다양한 법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이슬람 형법에 따라 여성의 증언 효력은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법적으로 제도화한 인권 침해다. 이 점을 평가에서 제외할 때, 이란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왜곡된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여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히잡을 공개적으로 벗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란 국내의 인권 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내부의 저항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등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해야 한다. (3) 국제적 위협 행위와 대리전 구조 이란의 문제는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다양한 친이란 민병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중동 전역의 무장 세력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이 세력들은 이란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일종의 대리 전력이며, 이란은 이들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도 지역 내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 이것이 소위 '그림자 전쟁(Shadow War)' 혹은 '대리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국제사회의 오랜 우려 사항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합의(JCPOA)에 따른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평화적 핵 활용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할 경우 중동의 안보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여러 아랍 국가들도 핵 보유를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즉, 이란의 핵 문제는 이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태도도 명백하다. 이란 최고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소멸을 선언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실행된 목표다. 헤즈볼라를 통한 레바논 북부에서의 공격,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통한 가자 지구에서의 긴장, 시리아를 통한 이란 군사 인프라 구축 등은 이 목표를 향한 구체적 행동들이다. (4) '약자 프레임'의 한계와 위험 이러한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민간인 피해와 특정 시설 폭격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맥락을 제거한 감정 정치다. '약자 프레임'은 이란 정권의 실제 행위와 책임을 은폐하고, 복잡한 도덕적 판단의 공간을 차단한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중동 전역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노출된 국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은 오류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 성명들이 이란 정권의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군사행동의 결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에 가까워진다. 예언자적 교회의 목소리는 특정 진영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편드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지만, 약자처럼 보이는 자를 무조건 편드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pixabay.com/ko/photos 3. 전쟁의 원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긴장 (1) 핵 문제의 역사와 현재 이란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우려 대상이었다. 2003년 이란이 비밀 핵 시설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 끝에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일명 이란 핵합의를 타결했다. 핵합의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제한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압박' 전략을 내세우며 이란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은 이에 대응하여 우라늄 농축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바이든 행정부가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성과 없이 장기화되었고,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핵무기 개발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다. 이란은 약속을 어겼고, 미국은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외교사적 맥락 없이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결말만 보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현재 시점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불성실이다. (2) 대리전 구조와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갈등은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복잡한 대리전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왔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후티를 통해 예멘과 홍해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군사 자산에 대한 공습을 수시로 단행해왔고, 이란 핵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책임을 단순히 공격을 가한 쪽에만 돌리는 것은 구조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이 민간 거주 지역에 무기를 은닉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책임은 해당 지역에 무기를 배치한 세력에도 있다. 국제 인도주의법은 이른바 '인간 방패' 사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종파 갈등도 중동 불안정의 핵심 요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 분쟁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지에서 시아파 집단을 지원한다. 이 종파 경쟁이 중동 전역의 내전과 갈등을 심화시켜왔다는 사실은 이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맥락이다. (3)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와 윤리적 복잡성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자국의 존립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이란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이스라엘 소멸 발언,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통한 군사적 압박, 이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의 핵 개발 완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중동 지역의 실제 안보 상황을 배경으로 한 실존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평가가 이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완전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란의 이스라엘 소멸 선언과 그를 향한 실제 행동에 대한 동등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쪽에 대한 비판만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향이다. 4. 트럼프의 전략: 단순한 전쟁광인가, 계산된 압박인가 (1) 최대 압박 전략의 구조와 논리 도널드 트럼프의 대이란 정책은 단순히 '호전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불리며, 이는 군사력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이란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이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수백 개의 추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란의 석유 수출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란 화폐인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란 정권 내부에서도 압박의 효과가 감지되었으며,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트럼프 전략의 지지자들은 이 압박이 없었다면 이란이 더 빠르게 핵 개발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도 한계가 있다. 경제 제재로 인한 고통은 이란 정권보다 이란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크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약품과 의료 기기 등 인도주의적 품목에 대한 제재 면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란이 이런 물품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경제적 고통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하는 전략은 일반 시민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 한계도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2) 제한적 군사행동과 전략적 의도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가장 주목받은 군사행동은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작전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대리전 전략을 총괄하는 인물로,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민병대, 후티 등에 대한 지원과 지휘를 담당해온 실세였다.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미국 기지를 공격해 미국 시민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이 작전이 단행되었다. 이 작전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이란이 전면전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제한적 대응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 미사일 공격은 사전에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며, 이란이 실제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즉,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무모한 전쟁 행위가 아니라, 이란의 확전 의지를 시험하고 억제력을 재설정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3) 미디어 왜곡과 교회의 인식 문제 일부 한국교회 성명서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전쟁 유발자'로 규정하고, 그의 대이란 정책을 무조건적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특정 시각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결과다. 진보적 성향의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프레임화해왔으며, 그 서사가 한국교회의 일부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분별은 미디어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전하지 않는 것을 함께 물어야 한다.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오류를 범했고,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때, 이란 정권의 행위와 책임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균형을 잃는다. 교회는 강대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지적이 독재 정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pixabay.com/ko/photos 5. 국제정세 속에서 본 이란 충돌: 더 큰 구조를 보라 (1) 미국 대 반미 축의 구조 이란을 둘러싼 갈등은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양자 문제를 넘어, 더 큰 국제 질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의 대이란 제재에 반대하며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강화해왔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제재를 피해 수입함으로써 이란 경제를 간접 지원해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반미 세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이란 문제를 다루면, 왜 서방 세계가 이란의 핵 개발을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지, 왜 이란에 대한 제재가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아키텍처의 문제로 다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 에너지와 지정학: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의미 이란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 수출량의 약 20~30%가 통과한다.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즉각적이고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 문제는 단지 중동 지역의 안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문제다. 한국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며, 그 수송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란과의 군사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책임 있는 시민적 신학의 요소다. 6. 한국교회의 두 시선: 신학적 구조 분석 (1) 평화 절대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한계 한국교회 내 진보적 흐름에서 이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평화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원수 사랑과 비폭력으로 요약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는 이 입장의 대표적 성경적 근거다. 따라서 어떤 군사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입장의 강점은 전쟁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강자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려는 비판적 저항성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첫째, 악의 현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비폭력적 저항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앞에서 무저항은 옳은 응답이었는가? 둘째, 구조적 불의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억제마저 거부하는 것은 때로 악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는다. 평화 절대주의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의 차원과 교회의 공적 증언의 차원에서는 더 복잡한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화 선포는 개인적 비폭력의 도전이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지만, 그것이 곧 현실 정치에서 모든 강제력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응답이었다. (2) 정의 전쟁론의 전통과 적용의 한계 다른 한편, 한국교회의 보수적 흐름에서는 정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관점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 전쟁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거치며 발전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이 이론은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매우 엄격한 조건들을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정당 전쟁의 조건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과 전쟁 수행의 정당성(jus in bello)이다. 전자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합법적 권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등을 요구한다. 후자는 민간인 보호, 비례적 무력 사용, 금지된 무기 사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이 조건들은 매우 엄격하며, 현실의 전쟁 중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이 엄격한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라는 대원칙만을 내세워 특정 군사행동을 성급하게 정당화하는 경우다. 이란 정권이 분명히 위험하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곧 이란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구체적 행동은 정당 전쟁의 모든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될 때, 보수적 교회의 목소리는 국가 권력의 대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3) 두 시선의 공통된 문제: 진실의 일부만을 보는 것 흥미롭게도, 평화 절대주의와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라는 두 극단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평화 절대주의는 이란의 위협과 책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는 군사행동의 부당한 결과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어느 쪽도 전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 있지 않다. 기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전체 진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만 실현된다. 교회가 이 전쟁 문제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학적·이념적 편향이 진실의 인식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7. 문제의 핵심: 균형 상실과 감정 정치 (1) 성명서의 구조적 편향 분석 이란 문제를 다루는 일부 한국교회 단체들의 성명서를 분석하면 공통적인 구조적 편향이 드러난다. 첫째, 원인 제거다. 이란 정권의 위협적 행위, 핵 개발, 대리전 전략, 국내 억압 등은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되어 다루어진다. 반면 군사행동의 결과, 특히 민간인 피해와 인프라 파괴는 상세하고 감정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군사행동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반응만을 갖도록 유도한다. 둘째, 도덕적 단순화다. 복잡한 도덕적 현실이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한쪽은 절대 악으로, 다른 쪽은 절대 피해자로 규정된다. 이 구도에서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들에게 행한 악은 사라진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가한 측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악마화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연극이다. 셋째, 감정 중심 서술이다. 학교, 병원, 어린이, 피난민 등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서술의 중심을 이루며, 구조적·법적·역사적 책임 분석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공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도덕적 책임의 방기다. 특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선포하는 성명서라면, 그것은 훨씬 더 엄격한 지적 성실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2) 맥락 없는 인도주의의 위험 인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그 생명과 존엄은 보호받아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은 어디서 누가 행했든 비극이며, 교회는 그 비극에 민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인도주의'는 오히려 더 큰 폭력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란 정권이 핵을 개발하고, 중동 전역에 대리 세력을 통해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충돌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가? 단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없는 평화적 현상 유지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재앙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없는 인도주의는 결국 현실 회피가 된다. 나아가, 인도주의적 우려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란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소수 종교인들이 박해받고, 정치범들이 처형될 때 한국교회 단체들은 얼마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란 정권의 내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념적 선택이다. pixabay.com/ko/photos 8. 그렇다면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 전쟁 윤리의 재검토 (1) 성경의 긴장: 평화와 질서 사이 기독교 윤리는 전쟁 문제에 있어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과 그 결과에 대한 탄식도 담고 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 건축의 영광을 허락받지 못했다(대상 22:8).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사람으로, 원수 사랑과 폭력 거부를 가르치셨다.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이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했다.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과 '그것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롬 13:4)라는 말씀이 모두 정경 안에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모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긴장 속에서 신학적 판단은 더욱 섬세해야 하며, 어느 한 구절을 절대화하여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2) 정당 전쟁의 조건과 현실 적용 전통적 정당 전쟁 이론은 다음의 조건들을 제시한다. 정당한 이유(just cause)란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의도(right intention)란 보복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라 선의 달성과 악의 억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legitimate authority)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예상되는 선이 악을 초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에 적용할 때, 쉬운 결론은 없다. 이란 정권의 위협과 핵 개발은 '정당한 이유'의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외교적 수단이 정말 소진되었는가? 제재가 충분한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가? '비례성' 조건과 관련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보다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큰 갈등의 촉발점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으며, 교회는 이 불확실성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정당 전쟁론이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도, 무조건적 반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 조건들을 성실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없이 '평화를 원하니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이란이 위험하니 군사행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신학적 판단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9. 기독교적 평가: 무엇이 옳은 태도인가 (1) 진실을 전체로 보는 용기 기독교적 판단의 첫 번째 요건은 진실을 부분적으로 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란 정권의 억압적 성격, 대리전 전략, 핵 개발 의혹은 진실이다. 민간인의 고통, 전쟁의 파괴적 결과,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도 진실이다. 국제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강대국의 오류 가능성, 전쟁의 비의도적 결과도 진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다. 선택적 진실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즉 '침묵을 통한 거짓(lying by omission)'은 직접적 거짓말 못지않게 사람을 기만한다. 교회가 이 방식으로 공적 성명을 발표하거나 설교를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완전한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다. (2) 정의와 사랑의 통합 기독교 윤리에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가 사랑의 사회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차갑고 억압적인 율법주의가 되며, 정의 없는 사랑은 구조적 불의를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된다.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란 국민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한 정의로운 비판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억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균형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붙드는 것은 항상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판단이 형성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동시적 표현이었다.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는 분별자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분별(discernment)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소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영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다. 이란 전쟁 문제에서 교회의 소명은 특정 정치 세력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PR 창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의 종교적 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그 어느 정치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기준으로 모든 편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모습이다. 분별은 또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즉각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정보 수집과 기도와 신학적 성찰 이후에 나오는 신중한 판단이, 비록 늦더라도 훨씬 더 큰 영적 무게를 갖는다. 교회가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반응하려 할 때, 그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평론가가 되는 길이다. (4) 누구의 편에 서는가: 근본적 질문 이 모든 논의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국의 편인가, 이란의 편인가? 이스라엘의 편인가, 팔레스타인의 편인가? 강자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응답은 이 질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이란 국민의 자유를 원하며,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원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과 예멘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의 의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의 불의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지만, 불의한 평화보다는 고통스러운 정의를 선택한다. 이 입장은 정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진영도 교회를 온전히 자기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권력 구조 안에 흡수되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자리다.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이스라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섰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10. 전쟁의 전망과 교회의 과제 (1) 세 가지 시나리오 이란을 둘러싼 충돌의 향후 전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는 제한적 충돌의 지속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이란과 미국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 시나리오다. 사이버 공격, 표적 암살,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전투 등이 지속되는 '회색 지대' 갈등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서서히 진전되고, 국제 제재의 효과는 점점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확전 시나리오다. 어느 한쪽의 오판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전면전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거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타격을 단행하는 경우다. 이 시나리오는 중동 전역을 충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공격,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미군과 이란 간의 직접 충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셋째는 협상을 통한 현상 관리다. 이란이 경제적 압박과 내부 불만을 이기지 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거나, 강대국들이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란의 완전한 핵 개발 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핵 능력의 부분적 동결과 제재의 부분적 완화를 교환하는 중간 지점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교회의 구체적 과제 이 세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든, 교회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올바른 정보와 균형 있는 분석에 기반한 공적 발언을 해야 한다.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이란의 행위와 국제적 맥락을 함께 언급하며, 어느 편의 서사도 검증 없이 수용하지 않는 지적 성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란 국민과 중동의 모든 민간인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인도주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이란의 지하 기독교 공동체와 박해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위한 연대도 중요하다. 셋째, 이 위기가 복음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동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영원한 소망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란 내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 역설을 보여준다. 교회는 정치적 논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혼란에 응답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 평화 구조 형성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종교 자유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결론: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 이란 전쟁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완전하다. 현실은 그 어느 단어도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이란 국민은 그 억압의 피해자들이다. 군사행동은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민간인의 고통을 수반한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불의 위에 세워진 평화는 결국 더 큰 폭력의 씨앗이 된다. 교회가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명은 때로 긴장 관계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단기적 평화를 방해할 수 있다. 이 긴장들을 직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소명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교회가 어느 진영의 편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진영에 진실을 말했을 때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본회퍼는 독일의 편도, 연합국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섰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에 저항한 데즈몬드 투투는 흑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하나님의 진실의 편에 섰다. 이들은 인기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역사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떤 권력보다도 크다. 미국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어떤 국제 기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인이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국가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군사 동맹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의가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항상 이 세상의 권력 구조 너머에 있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님을 안다.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자리는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 앞에서.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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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 2026년4월 세계 정국 분석 [길과 생명:양봉식 국장]지금 세계는 단순한 이념 갈등이나 지정학적 패권 경쟁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문명적·영적 충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한편에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질서를 해체하려는 복합적인 전체주의 연합 세력이 있다. 공산주의, 좌파 사회주의, 워키즘(Wokeism), 이슬람 전체주의 세력이 공통의 적—곧 기독교 문명—을 타도하기 위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결탁하고 있다. 본 분석기획은 이 충돌의 구도와 실체, 그리고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가 어떻게 인식하고 응전해야 할 것인지를 심층 검토한다. Ⅰ. 서론: 문명의 충돌인가, 영적 전쟁인가 20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된 지 불과35년, 21세기 세계는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명 충돌의 전선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경제적 패권 다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기초 가치—인간의 존엄, 가족의 신성성, 국가의 정체성, 신앙의 자유—를 둘러싼 전쟁이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하버드 대학교의 고(故)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는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21세기 세계의 주요 갈등이 이념 간이 아닌 문명 간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특히 이슬람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그로부터3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헌팅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선이 복합화·다층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 정국을 단순히 지정학적 대결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 대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엄"을 전제한 기독교 문명과, 그 전제를 파괴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 사이의 영적 싸움이다. 한국교회는 이 구도를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지, 어떤 가치 위에 서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시점이다. Ⅱ. 전 세계적 갈등의 양대 구도: 두 문명의 충돌 1. 기독교 문명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비롯된다는 성경적 인식,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청교도적 정치관,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세속 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적 유산—이 모두가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 오늘날 이 문명 진영의 핵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비록 많은 내부 모순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헌법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보호하는 국가이다. 트럼프2기 행정부(2025~)는 출범과 함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정책의 방향으로 채택하는 신호를 보냈다. 헤리티지 재단이 주도하는 프로젝트2025(Project 2025)에는 기독교 문명 가치에 기반한 정부 재편 구상이 담겨 있다. 이를 진보 진영은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보수 진영은 건국의 정신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 문명 진영의 핵심 구성원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일하게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사법부 독립을 제도적으로 유지하는 국가이다. 의원내각제 공화국인 이스라엘의 의회(크네세트)는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차례의 쿠데타나 불법 권력 장악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이는 중동 전체를 통틀어 키프로스와 함께 가장 양호한 민주주의 지수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한국의 건강한 우파 세력 역시 이 진영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선교의 결과물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건국의 정신과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 세력이 이 문명 진영의 동아시아 파트너이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신앙을 지켜왔다는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2. 전체주의적 결합 세력의 등장 반대편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이 진영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워키즘, LGBTQ 이데올로기, 급진 페미니즘, 환경 급진주의, 이슬람 전체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들(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하지만 실질적으로 결탁한 집합체이다. 이들 세력이 하나로 묶이는 논리는 단순하다. 공통의 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적은 바로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서구 자유민주주의 질서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념적 차이—예컨대 이슬람 전통주의와LGBTQ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다—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 헤게모니"라는 공동의 표적 앞에서 전략적 동맹을 맺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통의 적 앞에서 연합하는 것—이것이21세기 전체주의 연합의 핵심 작동 원리다." 국제 정치 층위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이 이른바"반서방 연대"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의2026년 국제정세전망(2026년1월)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은"미국의 동맹 네트워크 내 불안감을 이용해 권위주의 체제들 간의 결속을 모색하는 한편,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2025년7월 제17차BRICS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의 이란 핵시설 타격과 가자 지역 작전에 대한 규탄이 이루어지면서 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재확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가치 전쟁 구도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협조해야 할 동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중-러 3각 연대가 가시적 형태로 공고화되면서,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Ⅲ. 이슬람화와 정체성의 위기: 유럽이 보내는 경고 1. 인구 통계가 말하는 미래 유럽의 이슬람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2017년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약2,577만 명으로 전체 유럽 인구의 4.9%였다. 주목할 점은 이 수치가 2050년까지 어떻게 변화하느냐이다. 퓨 리서치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민을 전혀 받지 않는"제로 이민" 시나리오에서도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자연증가만으로 7.4%까지 상승한다. 현재 수준의 이민이 유지될 경우 11.2%, 2015~16년의 대규모 난민 유입이 계속될 경우 최대 14%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14% 시나리오대로라면 스웨덴의 경우 전체 인구의30% 이상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 국가별로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 킹스칼리지 런던 국제급진화연구센터(ICSR) 발표에 따르면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 비율이9.19%로 가장 높고, 이어 스웨덴 9.15%, 오스트리아 9.12%, 네덜란드 8.48%, 벨기에 7.87%, 영국 7.18% 순이다. 영국의 경우2001년(152만 명)에서 2021년(380만 명)으로 20년 만에 무슬림 인구가2.5배 이상 증가했으며, 런던의 무슬림 비율은 이미 15%에 근접했다. 단순한 인구 증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동화 거부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사이자 연구자인 유해석 박사(영국FIM 국제대표)는 수년간의 현지 연구를 통해 다음 패턴을 발견했다: 무슬림들이 한 국가에 정착하면, 이민·다산·현지인과의 결혼·개종의 4가지 방식을 통해 세를 불려나간 뒤, 국가의 법이 아닌 자신들의 법 체계인 샤리아(Sharia) 법으로 생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샤리아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조차 진입을 꺼리는 무슬림 자치 구역(no-go zone)이 형성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유해석 박사는 또한 교도소 통계를 근거로 유럽 사회의 이슬람화가 사회 통합 실패를 수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수감자의 약50%, 이탈리아45%, 영국40%가 무슬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사회경제적 소외와 차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통합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주는 지표임은 분명하다. 3. 서구 기독교 정체성의 붕괴와 이슬람의 전진 왜 유럽은 이슬람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그 핵심 원인은 서구 엘리트들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중동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늦어도21세기 말에 유럽의 인구는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며, 유럽은 서부 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지적한 핵심은 유럽이 이슬람의 공세에 밀리는 이유가 이슬람의 힘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의 정체성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2024년에는 개신교의 종주국 독일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퓨 리서치의 미래 종교 예측(2015년 발표)에 따르면 2010~2050년 사이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약1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 내 기독교인들이 2010~2050년 사이 2,382만 명이나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예측되는 반면, 같은 기간 무슬림 인구는 유럽에서 6%에서10%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비대칭적 변화의 배경에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앙 이탈이 있다. 기독교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이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견지한다. 기독교 문명은 자기 부정의 이데올로기 - 워키즘, 탈식민주의, 비판 이론 - 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해체하는 중이고, 이슬람은 그 공백으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Ⅳ. 워키즘: 기독교 문명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 1. 워키즘의 기원과 본질 "워키즘(Wokeism)"이라는 용어는 "깨어 있다(woke)"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인종주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의미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변질되었다. 2017년 옥스퍼드 사전에 "사회적 불의, 특히 인종주의에 대한 경각심"으로 등재되며 시대적 용어로 정착했다. 오늘날 보수주의 진영에서 워키즘을 비판적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서구 사회와 제도, 문화로 인해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격차가 발생했으므로 서구 문명은 본질적으로 부패했다고 보는 세계관." 이 관점에서 워키즘은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억압받는 자"로 분류하며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재편한다. 더 나아가 현존하는 사회의 모든 표현을"파괴"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워키즘이 심각한 이유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정치적 좌파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용어를 도용하여 반기독교적 의제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이 신앙적 각성을 세속적 사회운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사탄이 성경적 용어를 이용하여 그 의미를 역전시키는 전형적인 수법과 같다고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경고한다. 2. 워키즘이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력 워키즘의 실질적 파괴력은 이미 서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미군은 2024년1941년 이후 최악의 신병 모집난을 겪었다.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LGBTQ 이데올로기를 군에 도입한 결과 전통적 군인 정신이 훼손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기업 영역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와 워키즘이 결합하여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직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같은 문화 산업에서는 동성애·성소수자 콘텐츠가 어린이용 작품에도 일상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교회 안으로도 워키즘이 침투했다. 독일의 진보잡지 슈피겔의 르네 피스터 기자는 2024년 출간한 저서 『잘못된 단어들』에서 워키즘이 좌파마저 독단론으로 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주류 교단 일부는 워키즘과의 타협 속에서 동성 결혼 축복, 젠더 이데올로기 수용, 비판적 인종이론(CRT) 채택으로 나아갔다. 이 교단들에서 신자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트럼프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워키즘은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민주당원조차 2024년 대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를 워키즘으로 지목했다(물론 실제적인 원인은 부정선거라는 의혹과 주장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그러나 워키즘의 영향력은 교육 기관, 언론, 문화 산업에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도 이 이데올로기가 빠르게 유입되는 중이다. 3. 이슬람과 워키즘의 기이한 동맹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 중 하나는 이슬람과 워키즘의 전략적 연대이다. 이슬람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 동성애 사형, 신정(神政) 정치를 지지하는 반면, 워키즘은 페미니즘, LGBTQ 권리, 세속주의를 옹호한다. 이 두 세력은 사실상 가장 상극에 있는 이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연합 전선을 형성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공통의 적, 즉 서구 기독교 문명이다. 워키즘은 이슬람 이민자를 "억압받는 소수자"로 프레이밍하여 보호하고, 이슬람은 그 프레임을 이용해 서구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한다. 실제로 서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관련 시위에서 진보 좌파 학생 단체와 이슬람 학생 단체가 공동 행동에 나서는 사례는 이 기이한 동맹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워키즘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로 설명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해체라는 목표 앞에서, 상극의 이념들이 전술적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기이한 동맹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워키즘을 친이슬람적 이민 정책, 반이스라엘 정서, 기독교 역사 부정, 전통 가족 해체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나의 패키지로 이해해야 한다. Ⅴ. 이스라엘: 문명 충돌의 최전선 1. 왜 이스라엘인가: 지정학적·문명적 의미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단순한 동맹 관계나 성경적 예언론의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문명적 관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중동이라는 전체주의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쐐기 역할을 하는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쿠데타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강하게 유지되어—2024년1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네타냐후 연립정부가 추진한 사법개혁 법안을 무효로 판결하기도 했다. 중동의 지도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명확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1979) 이후 미국 지정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신정(神政) 국가이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레바논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무장세력으로 인해 사실상 이란의 영향권 내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왕정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군주제이다.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가 작동하는 국가이다. 2. 반이스라엘 정서의 이념적 계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반이스라엘 정서(BDS 운동, 유엔의 반이스라엘 결의안 등)는 표면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이념적 계보를 추적하면 공산주의·좌파 이데올로기 및 이슬람 전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체계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이 제3세계 해방운동과 연결되었고, 이 흐름이 오늘날의 진보 좌파 진영에 이어지고 있다. 워키즘 이데올로기에서 이스라엘은 "식민지 억압자"로 프레이밍된다. 이 서사에서 유대인은 "성공한 억압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피억압 소수자"이다. 워키즘이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동 내 유일한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악당이 된다. 여기에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반이스라엘 정서는 좌파와 이슬람이 만나는 가장 강력한 공유 지점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지지는 단순한 성경적 명령이나 신학적 입장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문명 진영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반이스라엘 정서에 동조하는 것은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서사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보수 진영이 이스라엘을 전략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Ⅵ. 세계 종교 인구의 변화와 기독교의 과제 세계 종교 인구의 장기 추세도 이 대결 구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1970년 약 5억7천만 명이었던 무슬림 인구는 2024년 약20억3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50년에는 약 28억6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기독교 인구는 12억2천만 명에서 26억3천만 명으로 2.7배 증가하지만, 무슬림은 무려5배가 증가한다. pixabay.com 특히 충격적인 것은 지역별 분포의 변화이다. 기독교 문명의 본거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2024년에서 2050년 사이 감소세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되며, 북미에서도 2010~2050년 사이 약2,770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추산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기독교인 약 6,605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해 무종교인이 6,149만 명 유입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문명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반면 이슬람은 높은 출산율(2010년 기준 합계출산율 3.1명, 기독교는 2.7명)과 견고한 정체성 유지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은 그 공백을 파고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상황도 우려스럽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00년 후 한국 인구가 71%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며, 229개 시군구 중 200개 시군구가 폐지 또는 존폐 위기에 놓일 것으로 예측됐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불가피하게 이민 수용 압력을 증가시키고, 이는 이슬람 인구 유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문화막시즘으로 침투한다. Ⅶ. 신냉전과 한국교회의 지정학적 선택 1. 중·러·북의 반서방 연대와 한반도 2026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사실상 신냉전 구도로 재편됐다. 2026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과 쇼이구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 간의 회담에서 양국은 핵심 이익에 대한 상호 지지를 재확인하고 글로벌 지정학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메커니즘 격상을 선언했다. 세종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중남미·중동·동북아시아는 반서방 연대와 자유민주 진영이 정면 충돌하는 3대 전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구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었고, 서방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이 단행되면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는 더욱 공고화됐다. 특히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면서 북-러 밀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2026년1월에는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강경 성명을 내면서 미-이란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이란의 이슬람 신정 체제는 반서방 연대의 핵심 축으로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편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함으로써 중동 전체를 전쟁의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다. 2. 한국 우파 기독교의 정치적 선택 이 문명 충돌의 구도에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는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가치의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 기독교 문명 기반의 가치—인간 존엄, 가정의 신성성, 신앙의 자유, 생명 존중—를 수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내에서도 이 구도는 명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쟁, 동성결혼 합법화 압력, 과격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 이슬람 할랄 인증의 확산, 좌파 진영의 반이스라엘 정서 조장—이 모두가 동일한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국내적 발현이다. 한국교회는 이 각각의 이슈들을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거대 흐름의 국내적 가지들로 인식해야 한다. Ⅷ. 음모론의 함정과 전략적 분별력 이 거대한 세계 정국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음모론의 함정이다. 유대 자본의 세계 지배 음모론, 글로벌 엘리트의 비밀 지배 시나리오,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모든 것을 계획·조종하고 있다는 극단적 단순화—이런 음모론은 실제로 더 중요한 이슈를 흐리게 만든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세세한 음모론의 진위 여부에 매몰되어, 정작 지금 당장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핵심 질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아무리 연합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전제이다. pixabay.com 따라서 음모론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이렇다. 첫째, 구체적인 음모론의 세부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다. 둘째, 큰 그림—즉 전체주의 결합 세력이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려 한다는 거시적 구도—은 냉철하게 인식한다. 셋째, 음모론이 제기하는 개별 이슈들의 진위를 분별하되, 그것이 나의 가치적 입장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지, 모든 음모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유대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죄악이었다. 유대인 개인이나 유대 자본에 대한 일반화된 부정적 프레이밍은 성경적으로도 잘못되었고, 실천적으로도 이슬람·좌파의 반이스라엘 연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전략적 입장을 음모론과 분리하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이다. Ⅸ. 성경적 보수주의: 응전의 신학적 기반 1.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 이 모든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정치적 보수주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 문명 가치에 근거한 보수주의이다. 정치적 잡음이 많고 보수 진영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는 정책과 세력을 분별력 있게 지지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성경적 보수주의의 기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생명과 가정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지하는가? 낙태 권리 확대, 동성결혼 합법화,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에 반대하는 입장이 기독교 문명의 기본값이다. 둘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차별금지법이나 혐오표현금지법의 형태로 기독교적 발언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질서를 지지하는가? 권위주의적 전체주의—공산주의, 이슬람 신정 정치, 좌파 전체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2. 에베소서 6장의 시대적 적용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장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엡6:12)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을 향한 공세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나 이념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의 연합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교회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 기도, 성결한 삶, 복음의 증거, 공동체의 연대 - 이것이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29:7)고 명령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3.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다섯 가지 자세 첫째, 세계 정국에 대한 성경적 해석 능력을 길러야 한다. 뉴스와 시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의 렌즈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정학·사회·문화에 대한 성경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선거, 입법, 공공 정책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시민적 참여가 요구된다. 이것은 정당 정치에의 맹목적 편입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시민 참여이다. 셋째, 이슬람화와 워키즘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사회적 압력 앞에 침묵하는 것은 묵시적 동조이다. 성경적 진리는 사랑으로, 그러나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강화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된 민족이다. 반이스라엘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도록 성경적 가르침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 내부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거대한 전체주의 연합에 맞서는 힘은 교회의 연합에서 나온다. 신학적 차이와 교파적 경계를 넘어 기독교 문명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교회들이 연대해야 한다. Ⅹ. 결론: 두려워하지 말고, 분별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이 승리의 확신 위에 서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그것을 해체하려는 공산주의·좌파·워키즘·이슬람 전체주의의 결합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정치·경제·문화·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석의 최종 목적은 두려움이 아니다. 분별이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무리 강대한 전체주의 연합이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거대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분별력 있는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읽되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다. 음모론의 미혹에 빠지지 않되, 실제적 위협을 직시한다. 정치적 편협함에 갇히지 않되, 성경적 가치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슬람을 두려워하지 않되, 이슬람화의 문명적 함의를 냉철하게 인식한다. 워키즘의 위선을 분명히 보되,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문명 보루이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선교의 열매 중 하나인 한국교회가21세기 문명 충돌의 시대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굳건히 서는 것—이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분별하라. 그리고 서라. ■ 주요 참고 자료 및 데이터 출처 -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유럽 무슬림 인구 전망」, 2017 / 「미래 종교 예측(2010~2050)」, 2015 - 아산정책연구원, 「2026년 아산 국제정세전망: 심화되는 무질서」, 2026.1 / 「2024 국제정세전망: 연대결성」, 2023.12 -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 「1970~2050년 기독교·이슬람 인구 예측」, 2024 - 유해석,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킹스칼리지 런던ICSR, 「유럽 국가별 무슬림 비율」, 2019 - 르네 피스터(독일 슈피겔), 『잘못된 단어들』(Falsche Worte), 2024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1996 / 버나드 루이스, 유럽 이슬람화 경고 발언 - 전국인력신문, 「중러 연대와 한국의 선택」, 2026.2 / 민주주의평판지수(DP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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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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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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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 pixabay.com/ko/photos 1. 문제의 출발점: 왜 이 전쟁을 둘러싼 인식이 갈리는가 2024년 이후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시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되기도 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진실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는 단순한 시각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 전제, 이념적 지향, 그리고 정보 선택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란 문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국제 핵 질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중동의 종파 갈등, 에너지 지정학, 미국 패권의 향방,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가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환원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한쪽은 이것을 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으로 축소하고, 다른 한쪽은 이란의 위협성만을 부각해 군사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한다. 어느 쪽도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는 오랫동안 두 흐름이 공존해왔다. 하나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 신학의 흐름이다. 이 두 흐름은 국내 정치적 사안에서도 자주 충돌했지만, 이란과 같은 국제 분쟁 문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계열은 피해자의 시각을 앞세우고, 보수 계열은 안보와 질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교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언어로 이 복잡한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이 글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고,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교회 내 두 시선의 신학적 근거를 점검한 후, 기독교적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말할 때,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복잡한 국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교회의 목소리가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발언은 더욱 엄격한 지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2. 이란 정권의 실체: 간과되거나 축소되는 현실 (1) 신정 독재 체제의 구조와 본질 이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사실은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최고지도자(라흐바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의 종교 권위자이자 정치 권력자로서, 군·사법·방송·외교·안보 전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 이념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권력이 다시 종교 이념을 강요하는 이중 구조다. 대통령과 의회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 후보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선거의 실질적 경쟁성을 박탈한다. 즉, 이란의 선거는 민주주의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치적 반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모두 심각하게 제한된다. 공개 처형은 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집행된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이란의 처형 건수와 방식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치범,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들이 사형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현실은 이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 종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란 헌법은 명목상 일부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배교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란 내 지하 교회 신자들은 끊임없는 위협과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 적발될 경우 체포와 투옥, 고문을 감수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이란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맥락이다. (2) 여성 인권 문제와 국제적 파장 2022년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22세 여성이 히잡 착용 규정 위반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전역에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수백만 명이 저항에 나섰다. 이란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란 신정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들은 이란에서 의복 규정 준수를 강제받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 결혼, 이혼, 여행, 취업 등 다양한 법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이슬람 형법에 따라 여성의 증언 효력은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법적으로 제도화한 인권 침해다. 이 점을 평가에서 제외할 때, 이란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왜곡된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여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히잡을 공개적으로 벗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란 국내의 인권 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내부의 저항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등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해야 한다. (3) 국제적 위협 행위와 대리전 구조 이란의 문제는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다양한 친이란 민병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중동 전역의 무장 세력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이 세력들은 이란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일종의 대리 전력이며, 이란은 이들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도 지역 내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 이것이 소위 '그림자 전쟁(Shadow War)' 혹은 '대리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국제사회의 오랜 우려 사항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합의(JCPOA)에 따른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평화적 핵 활용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할 경우 중동의 안보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여러 아랍 국가들도 핵 보유를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즉, 이란의 핵 문제는 이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태도도 명백하다. 이란 최고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소멸을 선언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실행된 목표다. 헤즈볼라를 통한 레바논 북부에서의 공격,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통한 가자 지구에서의 긴장, 시리아를 통한 이란 군사 인프라 구축 등은 이 목표를 향한 구체적 행동들이다. (4) '약자 프레임'의 한계와 위험 이러한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민간인 피해와 특정 시설 폭격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맥락을 제거한 감정 정치다. '약자 프레임'은 이란 정권의 실제 행위와 책임을 은폐하고, 복잡한 도덕적 판단의 공간을 차단한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중동 전역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노출된 국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은 오류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 성명들이 이란 정권의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군사행동의 결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에 가까워진다. 예언자적 교회의 목소리는 특정 진영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편드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지만, 약자처럼 보이는 자를 무조건 편드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pixabay.com/ko/photos 3. 전쟁의 원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긴장 (1) 핵 문제의 역사와 현재 이란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우려 대상이었다. 2003년 이란이 비밀 핵 시설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 끝에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일명 이란 핵합의를 타결했다. 핵합의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제한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압박' 전략을 내세우며 이란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은 이에 대응하여 우라늄 농축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바이든 행정부가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성과 없이 장기화되었고,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핵무기 개발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다. 이란은 약속을 어겼고, 미국은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외교사적 맥락 없이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결말만 보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현재 시점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불성실이다. (2) 대리전 구조와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갈등은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복잡한 대리전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왔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후티를 통해 예멘과 홍해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군사 자산에 대한 공습을 수시로 단행해왔고, 이란 핵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책임을 단순히 공격을 가한 쪽에만 돌리는 것은 구조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이 민간 거주 지역에 무기를 은닉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책임은 해당 지역에 무기를 배치한 세력에도 있다. 국제 인도주의법은 이른바 '인간 방패' 사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종파 갈등도 중동 불안정의 핵심 요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 분쟁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지에서 시아파 집단을 지원한다. 이 종파 경쟁이 중동 전역의 내전과 갈등을 심화시켜왔다는 사실은 이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맥락이다. (3)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와 윤리적 복잡성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자국의 존립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이란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이스라엘 소멸 발언,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통한 군사적 압박, 이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의 핵 개발 완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중동 지역의 실제 안보 상황을 배경으로 한 실존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평가가 이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완전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란의 이스라엘 소멸 선언과 그를 향한 실제 행동에 대한 동등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쪽에 대한 비판만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향이다. 4. 트럼프의 전략: 단순한 전쟁광인가, 계산된 압박인가 (1) 최대 압박 전략의 구조와 논리 도널드 트럼프의 대이란 정책은 단순히 '호전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불리며, 이는 군사력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이란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이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수백 개의 추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란의 석유 수출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란 화폐인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란 정권 내부에서도 압박의 효과가 감지되었으며,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트럼프 전략의 지지자들은 이 압박이 없었다면 이란이 더 빠르게 핵 개발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도 한계가 있다. 경제 제재로 인한 고통은 이란 정권보다 이란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크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약품과 의료 기기 등 인도주의적 품목에 대한 제재 면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란이 이런 물품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경제적 고통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하는 전략은 일반 시민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 한계도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2) 제한적 군사행동과 전략적 의도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가장 주목받은 군사행동은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작전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대리전 전략을 총괄하는 인물로,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민병대, 후티 등에 대한 지원과 지휘를 담당해온 실세였다.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미국 기지를 공격해 미국 시민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이 작전이 단행되었다. 이 작전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이란이 전면전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제한적 대응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 미사일 공격은 사전에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며, 이란이 실제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즉,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무모한 전쟁 행위가 아니라, 이란의 확전 의지를 시험하고 억제력을 재설정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3) 미디어 왜곡과 교회의 인식 문제 일부 한국교회 성명서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전쟁 유발자'로 규정하고, 그의 대이란 정책을 무조건적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특정 시각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결과다. 진보적 성향의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프레임화해왔으며, 그 서사가 한국교회의 일부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분별은 미디어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전하지 않는 것을 함께 물어야 한다.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오류를 범했고,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때, 이란 정권의 행위와 책임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균형을 잃는다. 교회는 강대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지적이 독재 정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pixabay.com/ko/photos 5. 국제정세 속에서 본 이란 충돌: 더 큰 구조를 보라 (1) 미국 대 반미 축의 구조 이란을 둘러싼 갈등은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양자 문제를 넘어, 더 큰 국제 질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의 대이란 제재에 반대하며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강화해왔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제재를 피해 수입함으로써 이란 경제를 간접 지원해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반미 세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이란 문제를 다루면, 왜 서방 세계가 이란의 핵 개발을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지, 왜 이란에 대한 제재가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아키텍처의 문제로 다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 에너지와 지정학: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의미 이란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 수출량의 약 20~30%가 통과한다.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즉각적이고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 문제는 단지 중동 지역의 안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문제다. 한국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며, 그 수송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란과의 군사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책임 있는 시민적 신학의 요소다. 6. 한국교회의 두 시선: 신학적 구조 분석 (1) 평화 절대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한계 한국교회 내 진보적 흐름에서 이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평화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원수 사랑과 비폭력으로 요약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는 이 입장의 대표적 성경적 근거다. 따라서 어떤 군사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입장의 강점은 전쟁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강자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려는 비판적 저항성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첫째, 악의 현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비폭력적 저항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앞에서 무저항은 옳은 응답이었는가? 둘째, 구조적 불의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억제마저 거부하는 것은 때로 악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는다. 평화 절대주의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의 차원과 교회의 공적 증언의 차원에서는 더 복잡한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화 선포는 개인적 비폭력의 도전이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지만, 그것이 곧 현실 정치에서 모든 강제력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응답이었다. (2) 정의 전쟁론의 전통과 적용의 한계 다른 한편, 한국교회의 보수적 흐름에서는 정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관점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 전쟁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거치며 발전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이 이론은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매우 엄격한 조건들을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정당 전쟁의 조건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과 전쟁 수행의 정당성(jus in bello)이다. 전자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합법적 권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등을 요구한다. 후자는 민간인 보호, 비례적 무력 사용, 금지된 무기 사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이 조건들은 매우 엄격하며, 현실의 전쟁 중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이 엄격한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라는 대원칙만을 내세워 특정 군사행동을 성급하게 정당화하는 경우다. 이란 정권이 분명히 위험하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곧 이란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구체적 행동은 정당 전쟁의 모든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될 때, 보수적 교회의 목소리는 국가 권력의 대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3) 두 시선의 공통된 문제: 진실의 일부만을 보는 것 흥미롭게도, 평화 절대주의와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라는 두 극단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평화 절대주의는 이란의 위협과 책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는 군사행동의 부당한 결과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어느 쪽도 전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 있지 않다. 기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전체 진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만 실현된다. 교회가 이 전쟁 문제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학적·이념적 편향이 진실의 인식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7. 문제의 핵심: 균형 상실과 감정 정치 (1) 성명서의 구조적 편향 분석 이란 문제를 다루는 일부 한국교회 단체들의 성명서를 분석하면 공통적인 구조적 편향이 드러난다. 첫째, 원인 제거다. 이란 정권의 위협적 행위, 핵 개발, 대리전 전략, 국내 억압 등은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되어 다루어진다. 반면 군사행동의 결과, 특히 민간인 피해와 인프라 파괴는 상세하고 감정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군사행동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반응만을 갖도록 유도한다. 둘째, 도덕적 단순화다. 복잡한 도덕적 현실이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한쪽은 절대 악으로, 다른 쪽은 절대 피해자로 규정된다. 이 구도에서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들에게 행한 악은 사라진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가한 측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악마화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연극이다. 셋째, 감정 중심 서술이다. 학교, 병원, 어린이, 피난민 등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서술의 중심을 이루며, 구조적·법적·역사적 책임 분석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공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도덕적 책임의 방기다. 특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선포하는 성명서라면, 그것은 훨씬 더 엄격한 지적 성실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2) 맥락 없는 인도주의의 위험 인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그 생명과 존엄은 보호받아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은 어디서 누가 행했든 비극이며, 교회는 그 비극에 민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인도주의'는 오히려 더 큰 폭력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란 정권이 핵을 개발하고, 중동 전역에 대리 세력을 통해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충돌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가? 단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없는 평화적 현상 유지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재앙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없는 인도주의는 결국 현실 회피가 된다. 나아가, 인도주의적 우려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란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소수 종교인들이 박해받고, 정치범들이 처형될 때 한국교회 단체들은 얼마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란 정권의 내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념적 선택이다. pixabay.com/ko/photos 8. 그렇다면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 전쟁 윤리의 재검토 (1) 성경의 긴장: 평화와 질서 사이 기독교 윤리는 전쟁 문제에 있어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과 그 결과에 대한 탄식도 담고 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 건축의 영광을 허락받지 못했다(대상 22:8).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사람으로, 원수 사랑과 폭력 거부를 가르치셨다.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이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했다.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과 '그것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롬 13:4)라는 말씀이 모두 정경 안에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모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긴장 속에서 신학적 판단은 더욱 섬세해야 하며, 어느 한 구절을 절대화하여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2) 정당 전쟁의 조건과 현실 적용 전통적 정당 전쟁 이론은 다음의 조건들을 제시한다. 정당한 이유(just cause)란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의도(right intention)란 보복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라 선의 달성과 악의 억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legitimate authority)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예상되는 선이 악을 초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에 적용할 때, 쉬운 결론은 없다. 이란 정권의 위협과 핵 개발은 '정당한 이유'의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외교적 수단이 정말 소진되었는가? 제재가 충분한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가? '비례성' 조건과 관련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보다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큰 갈등의 촉발점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으며, 교회는 이 불확실성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정당 전쟁론이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도, 무조건적 반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 조건들을 성실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없이 '평화를 원하니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이란이 위험하니 군사행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신학적 판단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9. 기독교적 평가: 무엇이 옳은 태도인가 (1) 진실을 전체로 보는 용기 기독교적 판단의 첫 번째 요건은 진실을 부분적으로 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란 정권의 억압적 성격, 대리전 전략, 핵 개발 의혹은 진실이다. 민간인의 고통, 전쟁의 파괴적 결과,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도 진실이다. 국제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강대국의 오류 가능성, 전쟁의 비의도적 결과도 진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다. 선택적 진실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즉 '침묵을 통한 거짓(lying by omission)'은 직접적 거짓말 못지않게 사람을 기만한다. 교회가 이 방식으로 공적 성명을 발표하거나 설교를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완전한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다. (2) 정의와 사랑의 통합 기독교 윤리에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가 사랑의 사회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차갑고 억압적인 율법주의가 되며, 정의 없는 사랑은 구조적 불의를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된다.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란 국민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한 정의로운 비판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억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균형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붙드는 것은 항상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판단이 형성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동시적 표현이었다.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는 분별자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분별(discernment)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소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영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다. 이란 전쟁 문제에서 교회의 소명은 특정 정치 세력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PR 창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의 종교적 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그 어느 정치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기준으로 모든 편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모습이다. 분별은 또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즉각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정보 수집과 기도와 신학적 성찰 이후에 나오는 신중한 판단이, 비록 늦더라도 훨씬 더 큰 영적 무게를 갖는다. 교회가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반응하려 할 때, 그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평론가가 되는 길이다. (4) 누구의 편에 서는가: 근본적 질문 이 모든 논의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국의 편인가, 이란의 편인가? 이스라엘의 편인가, 팔레스타인의 편인가? 강자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응답은 이 질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이란 국민의 자유를 원하며,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원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과 예멘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의 의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의 불의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지만, 불의한 평화보다는 고통스러운 정의를 선택한다. 이 입장은 정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진영도 교회를 온전히 자기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권력 구조 안에 흡수되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자리다.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이스라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섰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10. 전쟁의 전망과 교회의 과제 (1) 세 가지 시나리오 이란을 둘러싼 충돌의 향후 전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는 제한적 충돌의 지속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이란과 미국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 시나리오다. 사이버 공격, 표적 암살,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전투 등이 지속되는 '회색 지대' 갈등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서서히 진전되고, 국제 제재의 효과는 점점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확전 시나리오다. 어느 한쪽의 오판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전면전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거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타격을 단행하는 경우다. 이 시나리오는 중동 전역을 충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공격,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미군과 이란 간의 직접 충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셋째는 협상을 통한 현상 관리다. 이란이 경제적 압박과 내부 불만을 이기지 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거나, 강대국들이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란의 완전한 핵 개발 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핵 능력의 부분적 동결과 제재의 부분적 완화를 교환하는 중간 지점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교회의 구체적 과제 이 세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든, 교회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올바른 정보와 균형 있는 분석에 기반한 공적 발언을 해야 한다.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이란의 행위와 국제적 맥락을 함께 언급하며, 어느 편의 서사도 검증 없이 수용하지 않는 지적 성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란 국민과 중동의 모든 민간인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인도주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이란의 지하 기독교 공동체와 박해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위한 연대도 중요하다. 셋째, 이 위기가 복음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동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영원한 소망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란 내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 역설을 보여준다. 교회는 정치적 논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혼란에 응답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 평화 구조 형성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종교 자유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결론: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 이란 전쟁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완전하다. 현실은 그 어느 단어도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이란 국민은 그 억압의 피해자들이다. 군사행동은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민간인의 고통을 수반한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불의 위에 세워진 평화는 결국 더 큰 폭력의 씨앗이 된다. 교회가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명은 때로 긴장 관계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단기적 평화를 방해할 수 있다. 이 긴장들을 직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소명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교회가 어느 진영의 편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진영에 진실을 말했을 때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본회퍼는 독일의 편도, 연합국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섰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에 저항한 데즈몬드 투투는 흑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하나님의 진실의 편에 섰다. 이들은 인기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역사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떤 권력보다도 크다. 미국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어떤 국제 기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인이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국가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군사 동맹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의가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항상 이 세상의 권력 구조 너머에 있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님을 안다.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자리는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 앞에서.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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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 2026년4월 세계 정국 분석 [길과 생명:양봉식 국장]지금 세계는 단순한 이념 갈등이나 지정학적 패권 경쟁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문명적·영적 충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한편에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질서를 해체하려는 복합적인 전체주의 연합 세력이 있다. 공산주의, 좌파 사회주의, 워키즘(Wokeism), 이슬람 전체주의 세력이 공통의 적—곧 기독교 문명—을 타도하기 위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결탁하고 있다. 본 분석기획은 이 충돌의 구도와 실체, 그리고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가 어떻게 인식하고 응전해야 할 것인지를 심층 검토한다. Ⅰ. 서론: 문명의 충돌인가, 영적 전쟁인가 20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된 지 불과35년, 21세기 세계는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명 충돌의 전선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경제적 패권 다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기초 가치—인간의 존엄, 가족의 신성성, 국가의 정체성, 신앙의 자유—를 둘러싼 전쟁이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하버드 대학교의 고(故)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는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21세기 세계의 주요 갈등이 이념 간이 아닌 문명 간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특히 이슬람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그로부터3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헌팅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선이 복합화·다층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 정국을 단순히 지정학적 대결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 대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엄"을 전제한 기독교 문명과, 그 전제를 파괴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 사이의 영적 싸움이다. 한국교회는 이 구도를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지, 어떤 가치 위에 서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시점이다. Ⅱ. 전 세계적 갈등의 양대 구도: 두 문명의 충돌 1. 기독교 문명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비롯된다는 성경적 인식,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청교도적 정치관,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세속 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적 유산—이 모두가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 오늘날 이 문명 진영의 핵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비록 많은 내부 모순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헌법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보호하는 국가이다. 트럼프2기 행정부(2025~)는 출범과 함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정책의 방향으로 채택하는 신호를 보냈다. 헤리티지 재단이 주도하는 프로젝트2025(Project 2025)에는 기독교 문명 가치에 기반한 정부 재편 구상이 담겨 있다. 이를 진보 진영은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보수 진영은 건국의 정신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 문명 진영의 핵심 구성원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일하게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사법부 독립을 제도적으로 유지하는 국가이다. 의원내각제 공화국인 이스라엘의 의회(크네세트)는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차례의 쿠데타나 불법 권력 장악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이는 중동 전체를 통틀어 키프로스와 함께 가장 양호한 민주주의 지수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한국의 건강한 우파 세력 역시 이 진영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선교의 결과물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건국의 정신과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 세력이 이 문명 진영의 동아시아 파트너이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신앙을 지켜왔다는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2. 전체주의적 결합 세력의 등장 반대편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이 진영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워키즘, LGBTQ 이데올로기, 급진 페미니즘, 환경 급진주의, 이슬람 전체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들(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하지만 실질적으로 결탁한 집합체이다. 이들 세력이 하나로 묶이는 논리는 단순하다. 공통의 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적은 바로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서구 자유민주주의 질서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념적 차이—예컨대 이슬람 전통주의와LGBTQ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다—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 헤게모니"라는 공동의 표적 앞에서 전략적 동맹을 맺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통의 적 앞에서 연합하는 것—이것이21세기 전체주의 연합의 핵심 작동 원리다." 국제 정치 층위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이 이른바"반서방 연대"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의2026년 국제정세전망(2026년1월)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은"미국의 동맹 네트워크 내 불안감을 이용해 권위주의 체제들 간의 결속을 모색하는 한편,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2025년7월 제17차BRICS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의 이란 핵시설 타격과 가자 지역 작전에 대한 규탄이 이루어지면서 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재확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가치 전쟁 구도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협조해야 할 동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중-러 3각 연대가 가시적 형태로 공고화되면서,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Ⅲ. 이슬람화와 정체성의 위기: 유럽이 보내는 경고 1. 인구 통계가 말하는 미래 유럽의 이슬람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2017년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약2,577만 명으로 전체 유럽 인구의 4.9%였다. 주목할 점은 이 수치가 2050년까지 어떻게 변화하느냐이다. 퓨 리서치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민을 전혀 받지 않는"제로 이민" 시나리오에서도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자연증가만으로 7.4%까지 상승한다. 현재 수준의 이민이 유지될 경우 11.2%, 2015~16년의 대규모 난민 유입이 계속될 경우 최대 14%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14% 시나리오대로라면 스웨덴의 경우 전체 인구의30% 이상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 국가별로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 킹스칼리지 런던 국제급진화연구센터(ICSR) 발표에 따르면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 비율이9.19%로 가장 높고, 이어 스웨덴 9.15%, 오스트리아 9.12%, 네덜란드 8.48%, 벨기에 7.87%, 영국 7.18% 순이다. 영국의 경우2001년(152만 명)에서 2021년(380만 명)으로 20년 만에 무슬림 인구가2.5배 이상 증가했으며, 런던의 무슬림 비율은 이미 15%에 근접했다. 단순한 인구 증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동화 거부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사이자 연구자인 유해석 박사(영국FIM 국제대표)는 수년간의 현지 연구를 통해 다음 패턴을 발견했다: 무슬림들이 한 국가에 정착하면, 이민·다산·현지인과의 결혼·개종의 4가지 방식을 통해 세를 불려나간 뒤, 국가의 법이 아닌 자신들의 법 체계인 샤리아(Sharia) 법으로 생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샤리아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조차 진입을 꺼리는 무슬림 자치 구역(no-go zone)이 형성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유해석 박사는 또한 교도소 통계를 근거로 유럽 사회의 이슬람화가 사회 통합 실패를 수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수감자의 약50%, 이탈리아45%, 영국40%가 무슬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사회경제적 소외와 차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통합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주는 지표임은 분명하다. 3. 서구 기독교 정체성의 붕괴와 이슬람의 전진 왜 유럽은 이슬람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그 핵심 원인은 서구 엘리트들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중동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늦어도21세기 말에 유럽의 인구는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며, 유럽은 서부 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지적한 핵심은 유럽이 이슬람의 공세에 밀리는 이유가 이슬람의 힘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의 정체성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2024년에는 개신교의 종주국 독일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퓨 리서치의 미래 종교 예측(2015년 발표)에 따르면 2010~2050년 사이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약1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 내 기독교인들이 2010~2050년 사이 2,382만 명이나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예측되는 반면, 같은 기간 무슬림 인구는 유럽에서 6%에서10%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비대칭적 변화의 배경에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앙 이탈이 있다. 기독교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이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견지한다. 기독교 문명은 자기 부정의 이데올로기 - 워키즘, 탈식민주의, 비판 이론 - 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해체하는 중이고, 이슬람은 그 공백으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Ⅳ. 워키즘: 기독교 문명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 1. 워키즘의 기원과 본질 "워키즘(Wokeism)"이라는 용어는 "깨어 있다(woke)"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인종주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의미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변질되었다. 2017년 옥스퍼드 사전에 "사회적 불의, 특히 인종주의에 대한 경각심"으로 등재되며 시대적 용어로 정착했다. 오늘날 보수주의 진영에서 워키즘을 비판적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서구 사회와 제도, 문화로 인해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격차가 발생했으므로 서구 문명은 본질적으로 부패했다고 보는 세계관." 이 관점에서 워키즘은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억압받는 자"로 분류하며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재편한다. 더 나아가 현존하는 사회의 모든 표현을"파괴"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워키즘이 심각한 이유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정치적 좌파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용어를 도용하여 반기독교적 의제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이 신앙적 각성을 세속적 사회운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사탄이 성경적 용어를 이용하여 그 의미를 역전시키는 전형적인 수법과 같다고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경고한다. 2. 워키즘이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력 워키즘의 실질적 파괴력은 이미 서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미군은 2024년1941년 이후 최악의 신병 모집난을 겪었다.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LGBTQ 이데올로기를 군에 도입한 결과 전통적 군인 정신이 훼손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기업 영역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와 워키즘이 결합하여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직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같은 문화 산업에서는 동성애·성소수자 콘텐츠가 어린이용 작품에도 일상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교회 안으로도 워키즘이 침투했다. 독일의 진보잡지 슈피겔의 르네 피스터 기자는 2024년 출간한 저서 『잘못된 단어들』에서 워키즘이 좌파마저 독단론으로 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주류 교단 일부는 워키즘과의 타협 속에서 동성 결혼 축복, 젠더 이데올로기 수용, 비판적 인종이론(CRT) 채택으로 나아갔다. 이 교단들에서 신자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트럼프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워키즘은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민주당원조차 2024년 대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를 워키즘으로 지목했다(물론 실제적인 원인은 부정선거라는 의혹과 주장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그러나 워키즘의 영향력은 교육 기관, 언론, 문화 산업에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도 이 이데올로기가 빠르게 유입되는 중이다. 3. 이슬람과 워키즘의 기이한 동맹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 중 하나는 이슬람과 워키즘의 전략적 연대이다. 이슬람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 동성애 사형, 신정(神政) 정치를 지지하는 반면, 워키즘은 페미니즘, LGBTQ 권리, 세속주의를 옹호한다. 이 두 세력은 사실상 가장 상극에 있는 이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연합 전선을 형성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공통의 적, 즉 서구 기독교 문명이다. 워키즘은 이슬람 이민자를 "억압받는 소수자"로 프레이밍하여 보호하고, 이슬람은 그 프레임을 이용해 서구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한다. 실제로 서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관련 시위에서 진보 좌파 학생 단체와 이슬람 학생 단체가 공동 행동에 나서는 사례는 이 기이한 동맹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워키즘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로 설명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해체라는 목표 앞에서, 상극의 이념들이 전술적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기이한 동맹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워키즘을 친이슬람적 이민 정책, 반이스라엘 정서, 기독교 역사 부정, 전통 가족 해체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나의 패키지로 이해해야 한다. Ⅴ. 이스라엘: 문명 충돌의 최전선 1. 왜 이스라엘인가: 지정학적·문명적 의미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단순한 동맹 관계나 성경적 예언론의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문명적 관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중동이라는 전체주의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쐐기 역할을 하는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쿠데타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강하게 유지되어—2024년1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네타냐후 연립정부가 추진한 사법개혁 법안을 무효로 판결하기도 했다. 중동의 지도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명확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1979) 이후 미국 지정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신정(神政) 국가이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레바논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무장세력으로 인해 사실상 이란의 영향권 내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왕정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군주제이다.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가 작동하는 국가이다. 2. 반이스라엘 정서의 이념적 계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반이스라엘 정서(BDS 운동, 유엔의 반이스라엘 결의안 등)는 표면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이념적 계보를 추적하면 공산주의·좌파 이데올로기 및 이슬람 전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체계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이 제3세계 해방운동과 연결되었고, 이 흐름이 오늘날의 진보 좌파 진영에 이어지고 있다. 워키즘 이데올로기에서 이스라엘은 "식민지 억압자"로 프레이밍된다. 이 서사에서 유대인은 "성공한 억압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피억압 소수자"이다. 워키즘이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동 내 유일한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악당이 된다. 여기에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반이스라엘 정서는 좌파와 이슬람이 만나는 가장 강력한 공유 지점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지지는 단순한 성경적 명령이나 신학적 입장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문명 진영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반이스라엘 정서에 동조하는 것은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서사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보수 진영이 이스라엘을 전략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Ⅵ. 세계 종교 인구의 변화와 기독교의 과제 세계 종교 인구의 장기 추세도 이 대결 구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1970년 약 5억7천만 명이었던 무슬림 인구는 2024년 약20억3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50년에는 약 28억6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기독교 인구는 12억2천만 명에서 26억3천만 명으로 2.7배 증가하지만, 무슬림은 무려5배가 증가한다. pixabay.com 특히 충격적인 것은 지역별 분포의 변화이다. 기독교 문명의 본거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2024년에서 2050년 사이 감소세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되며, 북미에서도 2010~2050년 사이 약2,770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추산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기독교인 약 6,605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해 무종교인이 6,149만 명 유입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문명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반면 이슬람은 높은 출산율(2010년 기준 합계출산율 3.1명, 기독교는 2.7명)과 견고한 정체성 유지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은 그 공백을 파고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상황도 우려스럽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00년 후 한국 인구가 71%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며, 229개 시군구 중 200개 시군구가 폐지 또는 존폐 위기에 놓일 것으로 예측됐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불가피하게 이민 수용 압력을 증가시키고, 이는 이슬람 인구 유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문화막시즘으로 침투한다. Ⅶ. 신냉전과 한국교회의 지정학적 선택 1. 중·러·북의 반서방 연대와 한반도 2026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사실상 신냉전 구도로 재편됐다. 2026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과 쇼이구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 간의 회담에서 양국은 핵심 이익에 대한 상호 지지를 재확인하고 글로벌 지정학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메커니즘 격상을 선언했다. 세종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중남미·중동·동북아시아는 반서방 연대와 자유민주 진영이 정면 충돌하는 3대 전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구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었고, 서방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이 단행되면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는 더욱 공고화됐다. 특히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면서 북-러 밀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2026년1월에는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강경 성명을 내면서 미-이란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이란의 이슬람 신정 체제는 반서방 연대의 핵심 축으로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편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함으로써 중동 전체를 전쟁의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다. 2. 한국 우파 기독교의 정치적 선택 이 문명 충돌의 구도에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는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가치의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 기독교 문명 기반의 가치—인간 존엄, 가정의 신성성, 신앙의 자유, 생명 존중—를 수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내에서도 이 구도는 명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쟁, 동성결혼 합법화 압력, 과격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 이슬람 할랄 인증의 확산, 좌파 진영의 반이스라엘 정서 조장—이 모두가 동일한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국내적 발현이다. 한국교회는 이 각각의 이슈들을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거대 흐름의 국내적 가지들로 인식해야 한다. Ⅷ. 음모론의 함정과 전략적 분별력 이 거대한 세계 정국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음모론의 함정이다. 유대 자본의 세계 지배 음모론, 글로벌 엘리트의 비밀 지배 시나리오,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모든 것을 계획·조종하고 있다는 극단적 단순화—이런 음모론은 실제로 더 중요한 이슈를 흐리게 만든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세세한 음모론의 진위 여부에 매몰되어, 정작 지금 당장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핵심 질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아무리 연합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전제이다. pixabay.com 따라서 음모론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이렇다. 첫째, 구체적인 음모론의 세부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다. 둘째, 큰 그림—즉 전체주의 결합 세력이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려 한다는 거시적 구도—은 냉철하게 인식한다. 셋째, 음모론이 제기하는 개별 이슈들의 진위를 분별하되, 그것이 나의 가치적 입장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지, 모든 음모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유대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죄악이었다. 유대인 개인이나 유대 자본에 대한 일반화된 부정적 프레이밍은 성경적으로도 잘못되었고, 실천적으로도 이슬람·좌파의 반이스라엘 연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전략적 입장을 음모론과 분리하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이다. Ⅸ. 성경적 보수주의: 응전의 신학적 기반 1.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 이 모든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정치적 보수주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 문명 가치에 근거한 보수주의이다. 정치적 잡음이 많고 보수 진영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는 정책과 세력을 분별력 있게 지지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성경적 보수주의의 기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생명과 가정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지하는가? 낙태 권리 확대, 동성결혼 합법화,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에 반대하는 입장이 기독교 문명의 기본값이다. 둘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차별금지법이나 혐오표현금지법의 형태로 기독교적 발언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질서를 지지하는가? 권위주의적 전체주의—공산주의, 이슬람 신정 정치, 좌파 전체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2. 에베소서 6장의 시대적 적용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장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엡6:12)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을 향한 공세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나 이념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의 연합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교회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 기도, 성결한 삶, 복음의 증거, 공동체의 연대 - 이것이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29:7)고 명령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3.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다섯 가지 자세 첫째, 세계 정국에 대한 성경적 해석 능력을 길러야 한다. 뉴스와 시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의 렌즈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정학·사회·문화에 대한 성경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선거, 입법, 공공 정책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시민적 참여가 요구된다. 이것은 정당 정치에의 맹목적 편입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시민 참여이다. 셋째, 이슬람화와 워키즘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사회적 압력 앞에 침묵하는 것은 묵시적 동조이다. 성경적 진리는 사랑으로, 그러나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강화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된 민족이다. 반이스라엘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도록 성경적 가르침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 내부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거대한 전체주의 연합에 맞서는 힘은 교회의 연합에서 나온다. 신학적 차이와 교파적 경계를 넘어 기독교 문명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교회들이 연대해야 한다. Ⅹ. 결론: 두려워하지 말고, 분별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이 승리의 확신 위에 서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그것을 해체하려는 공산주의·좌파·워키즘·이슬람 전체주의의 결합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정치·경제·문화·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석의 최종 목적은 두려움이 아니다. 분별이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무리 강대한 전체주의 연합이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거대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분별력 있는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읽되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다. 음모론의 미혹에 빠지지 않되, 실제적 위협을 직시한다. 정치적 편협함에 갇히지 않되, 성경적 가치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슬람을 두려워하지 않되, 이슬람화의 문명적 함의를 냉철하게 인식한다. 워키즘의 위선을 분명히 보되,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문명 보루이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선교의 열매 중 하나인 한국교회가21세기 문명 충돌의 시대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굳건히 서는 것—이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분별하라. 그리고 서라. ■ 주요 참고 자료 및 데이터 출처 -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유럽 무슬림 인구 전망」, 2017 / 「미래 종교 예측(2010~2050)」, 2015 - 아산정책연구원, 「2026년 아산 국제정세전망: 심화되는 무질서」, 2026.1 / 「2024 국제정세전망: 연대결성」, 2023.12 -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 「1970~2050년 기독교·이슬람 인구 예측」, 2024 - 유해석,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킹스칼리지 런던ICSR, 「유럽 국가별 무슬림 비율」, 2019 - 르네 피스터(독일 슈피겔), 『잘못된 단어들』(Falsche Worte), 2024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1996 / 버나드 루이스, 유럽 이슬람화 경고 발언 - 전국인력신문, 「중러 연대와 한국의 선택」, 2026.2 / 민주주의평판지수(DP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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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과생명연구소
-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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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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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 pixabay.com/ko/photos 1. 문제의 출발점: 왜 이 전쟁을 둘러싼 인식이 갈리는가 2024년 이후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시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되기도 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진실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는 단순한 시각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 전제, 이념적 지향, 그리고 정보 선택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란 문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국제 핵 질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중동의 종파 갈등, 에너지 지정학, 미국 패권의 향방,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가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환원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한쪽은 이것을 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으로 축소하고, 다른 한쪽은 이란의 위협성만을 부각해 군사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한다. 어느 쪽도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는 오랫동안 두 흐름이 공존해왔다. 하나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 신학의 흐름이다. 이 두 흐름은 국내 정치적 사안에서도 자주 충돌했지만, 이란과 같은 국제 분쟁 문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계열은 피해자의 시각을 앞세우고, 보수 계열은 안보와 질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교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언어로 이 복잡한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이 글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고,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교회 내 두 시선의 신학적 근거를 점검한 후, 기독교적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말할 때,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복잡한 국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교회의 목소리가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발언은 더욱 엄격한 지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2. 이란 정권의 실체: 간과되거나 축소되는 현실 (1) 신정 독재 체제의 구조와 본질 이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사실은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최고지도자(라흐바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의 종교 권위자이자 정치 권력자로서, 군·사법·방송·외교·안보 전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 이념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권력이 다시 종교 이념을 강요하는 이중 구조다. 대통령과 의회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 후보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선거의 실질적 경쟁성을 박탈한다. 즉, 이란의 선거는 민주주의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치적 반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모두 심각하게 제한된다. 공개 처형은 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집행된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이란의 처형 건수와 방식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치범,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들이 사형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현실은 이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 종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란 헌법은 명목상 일부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배교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란 내 지하 교회 신자들은 끊임없는 위협과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 적발될 경우 체포와 투옥, 고문을 감수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이란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맥락이다. (2) 여성 인권 문제와 국제적 파장 2022년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22세 여성이 히잡 착용 규정 위반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전역에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수백만 명이 저항에 나섰다. 이란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란 신정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들은 이란에서 의복 규정 준수를 강제받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 결혼, 이혼, 여행, 취업 등 다양한 법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이슬람 형법에 따라 여성의 증언 효력은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법적으로 제도화한 인권 침해다. 이 점을 평가에서 제외할 때, 이란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왜곡된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여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히잡을 공개적으로 벗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란 국내의 인권 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내부의 저항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등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해야 한다. (3) 국제적 위협 행위와 대리전 구조 이란의 문제는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다양한 친이란 민병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중동 전역의 무장 세력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이 세력들은 이란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일종의 대리 전력이며, 이란은 이들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도 지역 내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 이것이 소위 '그림자 전쟁(Shadow War)' 혹은 '대리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국제사회의 오랜 우려 사항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합의(JCPOA)에 따른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평화적 핵 활용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할 경우 중동의 안보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여러 아랍 국가들도 핵 보유를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즉, 이란의 핵 문제는 이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태도도 명백하다. 이란 최고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소멸을 선언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실행된 목표다. 헤즈볼라를 통한 레바논 북부에서의 공격,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통한 가자 지구에서의 긴장, 시리아를 통한 이란 군사 인프라 구축 등은 이 목표를 향한 구체적 행동들이다. (4) '약자 프레임'의 한계와 위험 이러한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민간인 피해와 특정 시설 폭격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맥락을 제거한 감정 정치다. '약자 프레임'은 이란 정권의 실제 행위와 책임을 은폐하고, 복잡한 도덕적 판단의 공간을 차단한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중동 전역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노출된 국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은 오류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 성명들이 이란 정권의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군사행동의 결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에 가까워진다. 예언자적 교회의 목소리는 특정 진영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편드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지만, 약자처럼 보이는 자를 무조건 편드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pixabay.com/ko/photos 3. 전쟁의 원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긴장 (1) 핵 문제의 역사와 현재 이란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우려 대상이었다. 2003년 이란이 비밀 핵 시설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 끝에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일명 이란 핵합의를 타결했다. 핵합의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제한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압박' 전략을 내세우며 이란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은 이에 대응하여 우라늄 농축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바이든 행정부가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성과 없이 장기화되었고,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핵무기 개발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다. 이란은 약속을 어겼고, 미국은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외교사적 맥락 없이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결말만 보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현재 시점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불성실이다. (2) 대리전 구조와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갈등은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복잡한 대리전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왔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후티를 통해 예멘과 홍해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군사 자산에 대한 공습을 수시로 단행해왔고, 이란 핵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책임을 단순히 공격을 가한 쪽에만 돌리는 것은 구조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이 민간 거주 지역에 무기를 은닉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책임은 해당 지역에 무기를 배치한 세력에도 있다. 국제 인도주의법은 이른바 '인간 방패' 사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종파 갈등도 중동 불안정의 핵심 요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 분쟁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지에서 시아파 집단을 지원한다. 이 종파 경쟁이 중동 전역의 내전과 갈등을 심화시켜왔다는 사실은 이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맥락이다. (3)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와 윤리적 복잡성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자국의 존립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이란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이스라엘 소멸 발언,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통한 군사적 압박, 이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의 핵 개발 완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중동 지역의 실제 안보 상황을 배경으로 한 실존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평가가 이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완전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란의 이스라엘 소멸 선언과 그를 향한 실제 행동에 대한 동등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쪽에 대한 비판만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향이다. 4. 트럼프의 전략: 단순한 전쟁광인가, 계산된 압박인가 (1) 최대 압박 전략의 구조와 논리 도널드 트럼프의 대이란 정책은 단순히 '호전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불리며, 이는 군사력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이란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이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수백 개의 추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란의 석유 수출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란 화폐인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란 정권 내부에서도 압박의 효과가 감지되었으며,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트럼프 전략의 지지자들은 이 압박이 없었다면 이란이 더 빠르게 핵 개발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도 한계가 있다. 경제 제재로 인한 고통은 이란 정권보다 이란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크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약품과 의료 기기 등 인도주의적 품목에 대한 제재 면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란이 이런 물품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경제적 고통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하는 전략은 일반 시민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 한계도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2) 제한적 군사행동과 전략적 의도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가장 주목받은 군사행동은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작전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대리전 전략을 총괄하는 인물로,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민병대, 후티 등에 대한 지원과 지휘를 담당해온 실세였다.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미국 기지를 공격해 미국 시민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이 작전이 단행되었다. 이 작전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이란이 전면전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제한적 대응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 미사일 공격은 사전에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며, 이란이 실제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즉,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무모한 전쟁 행위가 아니라, 이란의 확전 의지를 시험하고 억제력을 재설정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3) 미디어 왜곡과 교회의 인식 문제 일부 한국교회 성명서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전쟁 유발자'로 규정하고, 그의 대이란 정책을 무조건적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특정 시각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결과다. 진보적 성향의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프레임화해왔으며, 그 서사가 한국교회의 일부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분별은 미디어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전하지 않는 것을 함께 물어야 한다.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오류를 범했고,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때, 이란 정권의 행위와 책임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균형을 잃는다. 교회는 강대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지적이 독재 정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pixabay.com/ko/photos 5. 국제정세 속에서 본 이란 충돌: 더 큰 구조를 보라 (1) 미국 대 반미 축의 구조 이란을 둘러싼 갈등은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양자 문제를 넘어, 더 큰 국제 질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의 대이란 제재에 반대하며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강화해왔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제재를 피해 수입함으로써 이란 경제를 간접 지원해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반미 세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이란 문제를 다루면, 왜 서방 세계가 이란의 핵 개발을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지, 왜 이란에 대한 제재가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아키텍처의 문제로 다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 에너지와 지정학: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의미 이란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 수출량의 약 20~30%가 통과한다.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즉각적이고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 문제는 단지 중동 지역의 안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문제다. 한국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며, 그 수송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란과의 군사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책임 있는 시민적 신학의 요소다. 6. 한국교회의 두 시선: 신학적 구조 분석 (1) 평화 절대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한계 한국교회 내 진보적 흐름에서 이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평화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원수 사랑과 비폭력으로 요약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는 이 입장의 대표적 성경적 근거다. 따라서 어떤 군사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입장의 강점은 전쟁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강자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려는 비판적 저항성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첫째, 악의 현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비폭력적 저항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앞에서 무저항은 옳은 응답이었는가? 둘째, 구조적 불의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억제마저 거부하는 것은 때로 악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는다. 평화 절대주의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의 차원과 교회의 공적 증언의 차원에서는 더 복잡한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화 선포는 개인적 비폭력의 도전이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지만, 그것이 곧 현실 정치에서 모든 강제력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응답이었다. (2) 정의 전쟁론의 전통과 적용의 한계 다른 한편, 한국교회의 보수적 흐름에서는 정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관점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 전쟁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거치며 발전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이 이론은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매우 엄격한 조건들을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정당 전쟁의 조건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과 전쟁 수행의 정당성(jus in bello)이다. 전자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합법적 권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등을 요구한다. 후자는 민간인 보호, 비례적 무력 사용, 금지된 무기 사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이 조건들은 매우 엄격하며, 현실의 전쟁 중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이 엄격한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라는 대원칙만을 내세워 특정 군사행동을 성급하게 정당화하는 경우다. 이란 정권이 분명히 위험하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곧 이란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구체적 행동은 정당 전쟁의 모든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될 때, 보수적 교회의 목소리는 국가 권력의 대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3) 두 시선의 공통된 문제: 진실의 일부만을 보는 것 흥미롭게도, 평화 절대주의와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라는 두 극단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평화 절대주의는 이란의 위협과 책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는 군사행동의 부당한 결과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어느 쪽도 전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 있지 않다. 기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전체 진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만 실현된다. 교회가 이 전쟁 문제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학적·이념적 편향이 진실의 인식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7. 문제의 핵심: 균형 상실과 감정 정치 (1) 성명서의 구조적 편향 분석 이란 문제를 다루는 일부 한국교회 단체들의 성명서를 분석하면 공통적인 구조적 편향이 드러난다. 첫째, 원인 제거다. 이란 정권의 위협적 행위, 핵 개발, 대리전 전략, 국내 억압 등은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되어 다루어진다. 반면 군사행동의 결과, 특히 민간인 피해와 인프라 파괴는 상세하고 감정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군사행동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반응만을 갖도록 유도한다. 둘째, 도덕적 단순화다. 복잡한 도덕적 현실이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한쪽은 절대 악으로, 다른 쪽은 절대 피해자로 규정된다. 이 구도에서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들에게 행한 악은 사라진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가한 측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악마화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연극이다. 셋째, 감정 중심 서술이다. 학교, 병원, 어린이, 피난민 등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서술의 중심을 이루며, 구조적·법적·역사적 책임 분석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공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도덕적 책임의 방기다. 특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선포하는 성명서라면, 그것은 훨씬 더 엄격한 지적 성실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2) 맥락 없는 인도주의의 위험 인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그 생명과 존엄은 보호받아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은 어디서 누가 행했든 비극이며, 교회는 그 비극에 민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인도주의'는 오히려 더 큰 폭력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란 정권이 핵을 개발하고, 중동 전역에 대리 세력을 통해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충돌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가? 단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없는 평화적 현상 유지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재앙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없는 인도주의는 결국 현실 회피가 된다. 나아가, 인도주의적 우려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란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소수 종교인들이 박해받고, 정치범들이 처형될 때 한국교회 단체들은 얼마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란 정권의 내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념적 선택이다. pixabay.com/ko/photos 8. 그렇다면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 전쟁 윤리의 재검토 (1) 성경의 긴장: 평화와 질서 사이 기독교 윤리는 전쟁 문제에 있어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과 그 결과에 대한 탄식도 담고 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 건축의 영광을 허락받지 못했다(대상 22:8).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사람으로, 원수 사랑과 폭력 거부를 가르치셨다.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이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했다.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과 '그것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롬 13:4)라는 말씀이 모두 정경 안에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모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긴장 속에서 신학적 판단은 더욱 섬세해야 하며, 어느 한 구절을 절대화하여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2) 정당 전쟁의 조건과 현실 적용 전통적 정당 전쟁 이론은 다음의 조건들을 제시한다. 정당한 이유(just cause)란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의도(right intention)란 보복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라 선의 달성과 악의 억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legitimate authority)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예상되는 선이 악을 초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에 적용할 때, 쉬운 결론은 없다. 이란 정권의 위협과 핵 개발은 '정당한 이유'의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외교적 수단이 정말 소진되었는가? 제재가 충분한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가? '비례성' 조건과 관련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보다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큰 갈등의 촉발점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으며, 교회는 이 불확실성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정당 전쟁론이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도, 무조건적 반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 조건들을 성실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없이 '평화를 원하니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이란이 위험하니 군사행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신학적 판단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9. 기독교적 평가: 무엇이 옳은 태도인가 (1) 진실을 전체로 보는 용기 기독교적 판단의 첫 번째 요건은 진실을 부분적으로 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란 정권의 억압적 성격, 대리전 전략, 핵 개발 의혹은 진실이다. 민간인의 고통, 전쟁의 파괴적 결과,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도 진실이다. 국제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강대국의 오류 가능성, 전쟁의 비의도적 결과도 진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다. 선택적 진실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즉 '침묵을 통한 거짓(lying by omission)'은 직접적 거짓말 못지않게 사람을 기만한다. 교회가 이 방식으로 공적 성명을 발표하거나 설교를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완전한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다. (2) 정의와 사랑의 통합 기독교 윤리에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가 사랑의 사회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차갑고 억압적인 율법주의가 되며, 정의 없는 사랑은 구조적 불의를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된다.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란 국민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한 정의로운 비판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억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균형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붙드는 것은 항상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판단이 형성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동시적 표현이었다.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는 분별자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분별(discernment)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소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영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다. 이란 전쟁 문제에서 교회의 소명은 특정 정치 세력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PR 창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의 종교적 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그 어느 정치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기준으로 모든 편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모습이다. 분별은 또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즉각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정보 수집과 기도와 신학적 성찰 이후에 나오는 신중한 판단이, 비록 늦더라도 훨씬 더 큰 영적 무게를 갖는다. 교회가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반응하려 할 때, 그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평론가가 되는 길이다. (4) 누구의 편에 서는가: 근본적 질문 이 모든 논의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국의 편인가, 이란의 편인가? 이스라엘의 편인가, 팔레스타인의 편인가? 강자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응답은 이 질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이란 국민의 자유를 원하며,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원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과 예멘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의 의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의 불의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지만, 불의한 평화보다는 고통스러운 정의를 선택한다. 이 입장은 정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진영도 교회를 온전히 자기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권력 구조 안에 흡수되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자리다.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이스라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섰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10. 전쟁의 전망과 교회의 과제 (1) 세 가지 시나리오 이란을 둘러싼 충돌의 향후 전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는 제한적 충돌의 지속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이란과 미국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 시나리오다. 사이버 공격, 표적 암살,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전투 등이 지속되는 '회색 지대' 갈등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서서히 진전되고, 국제 제재의 효과는 점점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확전 시나리오다. 어느 한쪽의 오판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전면전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거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타격을 단행하는 경우다. 이 시나리오는 중동 전역을 충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공격,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미군과 이란 간의 직접 충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셋째는 협상을 통한 현상 관리다. 이란이 경제적 압박과 내부 불만을 이기지 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거나, 강대국들이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란의 완전한 핵 개발 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핵 능력의 부분적 동결과 제재의 부분적 완화를 교환하는 중간 지점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교회의 구체적 과제 이 세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든, 교회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올바른 정보와 균형 있는 분석에 기반한 공적 발언을 해야 한다.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이란의 행위와 국제적 맥락을 함께 언급하며, 어느 편의 서사도 검증 없이 수용하지 않는 지적 성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란 국민과 중동의 모든 민간인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인도주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이란의 지하 기독교 공동체와 박해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위한 연대도 중요하다. 셋째, 이 위기가 복음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동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영원한 소망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란 내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 역설을 보여준다. 교회는 정치적 논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혼란에 응답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 평화 구조 형성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종교 자유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결론: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 이란 전쟁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완전하다. 현실은 그 어느 단어도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이란 국민은 그 억압의 피해자들이다. 군사행동은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민간인의 고통을 수반한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불의 위에 세워진 평화는 결국 더 큰 폭력의 씨앗이 된다. 교회가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명은 때로 긴장 관계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단기적 평화를 방해할 수 있다. 이 긴장들을 직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소명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교회가 어느 진영의 편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진영에 진실을 말했을 때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본회퍼는 독일의 편도, 연합국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섰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에 저항한 데즈몬드 투투는 흑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하나님의 진실의 편에 섰다. 이들은 인기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역사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떤 권력보다도 크다. 미국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어떤 국제 기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인이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국가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군사 동맹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의가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항상 이 세상의 권력 구조 너머에 있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님을 안다.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자리는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 앞에서.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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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