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분열의 시대, 교회는 왜 하나 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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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교회는 복음이 아닌 이념으로 골이 깊어지고 있다. AI제공

 

균열의 현장 — 정치가 교회를 삼킬 때

대한민국은 지금 깊은 균열 속에 있다. 정치적 사건 하나가 사회 전체를 좌와 우로 갈라놓고, 사람들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재편하고 있다.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적진에 선 것처럼 보인다. 같은 교회에서 나란히 예배드리던 성도가 예배당 밖에서는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2026년의 현실이다.

 

문제는 그 균열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왔다는 데 있다. 교회는 본래 세상의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 되게 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세상과 다르지 않다. 아니, 때로는 더 격렬하게 갈라져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특정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설교가 울려 퍼지고, 다른 입장을 가진 성도는 조용히 교회를 떠난다.

 

누군가를 지지하면 곧바로 '극우'라는 낙인이, 다른 누군가를 옹호하면 '종북 좌파'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 낙인은 단순한 정치적 구분을 훌쩍 넘어 도덕적 판단, 심지어 신앙의 진위를 따지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며, 관계를 끊는 모습은 세상의 정치 집회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에서 결코 자연스러운 풍경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의 상당 부분에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멈추고 질문해야 한다.

 

복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념이 복음의 자리를 빼앗을 때

복음은 단지 개인의 위안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엡 2:14)고 선언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수천 년 된 적대감을 십자가 하나가 무너뜨렸다는 이 선언은,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안의 이 분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경우, 우리는 복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념을 더 신뢰하는 것 같다. 복음을 고백하지만 판단의 기준은 정치적 진영이다. 복음은 우리의 신앙 언어로만 남아 있고, 실제 삶의 기준은 '이즘(ism)'이 되어버렸다.

 

보수적 정치 이념이든, 진보적 사회 의제든, 그것이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상숭배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그 공장이 이제는 이념이라는 우상을 빚어내고 있다.

 

이념이 복음을 대체하는 과정은 대개 조용하고 점진적이다. 처음에는 시대적 문제에 대한 정당한 관심으로 시작한다.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분노. 이것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관심들이 복음의 빛 아래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지 않고, 어느새 복음 위에 군림하게 될 때 발생한다. 특정 정치적 운동이나 이념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복음을 이념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역사는 이 위험을 여러 차례 증언하고 있다.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은 민족주의라는 이념과 복음을 혼합했고, 그 결과는 나치즘에 협력한 '독일 기독교인' 운동이었다. 칼 바르트는 바로 이 혼합에 맞서 바르멘 선언을 기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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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국가·지도자가 복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칼 바르트가 주장한 바르멘 선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AI 제공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선언은, 어떤 이념도, 어떤 국가도, 어떤 지도자도 복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언은 80여 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울려야 한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이념(ism)이 복음을 대체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다.

첫째는 적아(敵我) 구분의 절대화다. 복음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존재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념이 정체성의 기반이 될 때, 우리는 나와 같은 입장을 가진 자를 '우리'로, 다른 입장을 가진 자를 '그들'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 구분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마침내 '그들'은 악한 편에 선 자로 규정된다. 같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가 정치적 적군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의 선택적 사용이다. 이념에 물든 신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성경 본문은 열정적으로 인용하지만, 그 입장에 불편한 본문은 무시하거나 재해석한다. 권력자의 권위를 강조하는 로마서 13장은 환영하지만,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을 향한 야고보서의 경고는 외면한다.

 

혹은 반대로, 예언자적 저항 전통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국가 권위에 대한 존중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성경 전체의 권위 앞에 겸손히 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신의 이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는 구원의 공동체의 붕괴다. 교회는 본래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은혜로 하나 된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념이 중심을 차지하면, 교회는 이념적 동지들의 집합체로 변질된다. 같은 이념을 가진 자들만이 진정한 성도로 인정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배제된다. 이것은 복음이 선포하는 교회가 아니다. 복음의 교회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종과 자유인이 함께 앉는 곳이다.

 

넷째는 분노의 정당화다. 이념이 우상이 될 때, 그 이념을 위한 분노는 '의로운 분노'로 포장된다. 자신의 진영이 옳고 상대가 그르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분노는 더 격렬해지고 더 정당화된다.

 

그러나 야고보는 경고한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노가 이념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는 한, 그것은 아무리 종교적 언어로 포장되어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교회의 공적 실패로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은 적은 양으로도 부패를 막는다. 바닷물의 3.5% 염분이 거대한 바다를 썩지 않게 하듯이, 교회는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 비유가 중요한 이유는, 소금이 작동하는 방식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금은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는다. 소금은 조용히 녹아 들어가 음식이 썩지 않게 한다. 빛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 소금은 자신을 감추면서 세상을 보존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정반대다. 교회가 많아졌음에도 사회는 더 혼탁해졌다. 성도의 숫자가 늘었음에도 부패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외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징후다. 예수께서 이미 경고하셨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맛을 잃은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보존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가 이념에 물들 때 소금은 그 맛을 잃는다. 이념에 물든 교회는 세상의 갈등을 중재하고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을 증폭시키고 재생산한다. 정치적 집회의 언어가 설교단에서 울려 퍼지고, 예배당이 특정 정당의 지지 기반이 되며, 목사가 정치적 선동가로 전락하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묻는다.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물음 앞에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상태가 지속될수록 복음 자체가 무기력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존재함에도 사회가 점점 혼란스러워진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묻는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이 정말로 능력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교회가 사회의 부패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영향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이유의 문제다. 교회가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는 어느 편에 서 계셨는가

흔히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이념적 편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보수는 질서와 전통을 강조한 예수를, 진보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선 예수를 전유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는 어느 진영의 포획도 거부하신다. 그분은 헤롯에게도, 빌라도에게도, 바리새인에게도, 젤롯 당원에게도 환원되지 않는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이념 위에 서신 분이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앞에서 칼을 든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라는 여호수아의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이제 왔느니라"(수 5:13-14).

 

그분은 어느 편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모든 편 위에 계신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며, 인간의 모든 이념을 상대화하는 절대 기준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입장을 가질 수 있고, 때로는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입장은 항상 복음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자신의 입장이 하나님의 절대적 뜻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지도자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라는 확신은, 예언자적 비판 의식을 마비시키는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다윗을 사랑하셨지만 나단을 보내 그의 죄를 책망하신 하나님은, 어떤 정치 세력도 신성화하지 않으신다.

 

복음의 정치적 함의는 모든 이념을 초월하면서도 구체적인 삶에 깊이 관여한다. 복음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경제 구조에 침묵하지 않는다. 동시에 복음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과 생명의 질서를 훼손하는 사회 의제에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심은 어느 특정 정당의 강령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음 안에서 동시에 붙들려야 한다. 복음의 통전성(integrity)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이념화의 본질이다.

 

연합의 신학, 하나 됨은 어디서 오는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복음이 우리의 중심에 있는가, 아니면 이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가? 복음이 중심에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그 다름이 관계를 끊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합은 동일한 생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생명에서 온다. 이것은 중요한 구분이다.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들의 연합은 이념적 동지 관계요, 클럽이지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속해 있다는 존재론적 사실에 근거한다.

 

바울이 "한 몸과 한 성령 ...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 4:4-5)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신자들의 생각이나 입장이 모두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 같은 생명에 속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연합은 이견(異見)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견을 품을 수 있는 더 큰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의 연합은 모든 의견이 같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의견이 다를 때에도 서로를 형제자매로 대하고, 상대의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함께 말씀 앞에 겸손히 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4-15장에서 가르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윤리다. 의견의 차이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서로를 세워주는 섬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나 이른바 '관용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 안에서의 연합은 핵심 진리에 대한 타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부활의 역사성, 성경의 권위 — 이 핵심 교리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문제는 이 핵심 교리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차이를 핵심 교리와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자는 진정한 신자가 아니다'라는 판단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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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된 그리스의 몸으로 교회의 항상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AI 제공 

 

복음으로의 회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논쟁이 아니다. 더 강한 주장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복음으로의 회귀다. 복음이 다시 중심에 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모두 은혜로 하나 된 존재다. 그분이 우리의 머리이며, 우리는 한 몸으로 존재한다. 이 인식이 회복될 때에만 진정한 연합이 가능하다.

 

복음으로의 회귀는 첫째로 설교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먹여야 하는 자다. 정치적 논평을 제공하는 자가 아니다. 물론 설교는 현실의 삶에 적용되어야 하고, 사회적 불의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논의를 성숙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적용은 항상 복음에서 출발하여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이념이 설교의 중심이 되는 순간, 그 설교단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리가 아니다.

 

둘째로, 성도 각 개인이 자신의 이념적 편향을 인식하고 복음의 빛 아래 겸손히 검토하는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념적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렌즈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는 약속은, 우리가 자신의 편견을 성령 앞에 내어놓을 때 이루어진다. 정기적으로 '나는 지금 복음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이념을 믿고 있는가?'를 자문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영적 점검이다.

 

셋째로, 교회 공동체가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함께 말씀 앞에 서는 연습을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다양성을 위한 다양성이 아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형제자매를 통해, 내가 복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념이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거울을 보게 된다. 그 불편한 거울을 피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다.

 

넷째로, 교회는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는 구체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적대적인 두 진영 사이에 서서, 대화의 자리를 만들고, 서로를 인격체로 대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교회가 갈등의 도구가 아닌 화해의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세상은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된다.

 

복음은 여전히 강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혼란은 단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이며,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사회도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역사는 이를 증언한다.

 

18세기 영국은 혁명 직전의 사회 균열을 겪고 있었다. 그 균열을 막은 것은 존 웨슬리가 이끈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었다. 그 부흥은 노예제 폐지, 노동 환경 개선, 교도소 개혁이라는 구체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졌다. 복음이 살아 역사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세상의 소금이 된다.

 

복음은 여전히 강하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게 하고, 분열된 자들을 하나 되게 하며, 절망 중에 소망을 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복음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성이 될 때 — 정치적 입장이나 민족적 자긍심이나 계층적 이해관계보다 더 근본적인 정체성 —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연합과 화해를 경험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세상의 이념적 싸움에 끌려다니며 그 갈등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복음으로 무장한 화해와 변화의 공동체로 서 있을 것인가. 이 선택은 거창한 교회 정치나 제도적 결정이 아니라, 매일 매일 개별 신자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오늘 내가 SNS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동료를 어떻게 대하는지,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이 복음인지 이념인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하는지 — 이 작은 선택들이 모여 한국 교회의 얼굴을 만들어간다.

 

이념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그 선택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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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ism)에 물든 그리스도인들, 복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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