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칼럼/양봉식 국장

동영상 갈무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침묵의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선언은 국가가 국민의 영혼에 개입할 수 없음을 천명한 인류 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터져 나온 발언들은 이 거룩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목소리를 거세하려는 시도는, 보호의 언어가 아닌 섬뜩한 통제의 언어였다.
거룩한 강단에 가해진 ‘반란’의 낙인
이재명은 기자회견에서 특정 종교와 일부 개신교를 겨냥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설교를 두고 “국민에게 총구를 겨냥하는 반란행위”라며 형사적·안보적 프레임을 씌웠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비유다.
종교인의 설교는 신앙적 가치에 기반한 양심의 표현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그 자체다. 설교 내용이 위정자의 입맛에 쓰다고 해서 그것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순간, 국가는 이미 신앙의 영역을 검열하는 심판자로 군림하게 된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이 종교의 입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칼을 빼 드는 것은, 이 원칙의 탄생 배경을 완전히 오독한 비극이다.
‘큰 돌부터 제거’라는 섬뜩한 단계론의 정체
가장 날카로운 우려는 “큰 돌부터 집어내고 그다음 자갈, 잔돌을 집어내겠다”는 그의 수사적 비유에서 정점을 찍는다. 법치국가에서 사법적 판단은 개별 범죄 혐의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단계적 제거’를 운운하는 이 언어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정책적 타도 대상을 설정하는 통치자의 서늘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문법이 아니다. 서구 유럽 국가에서 종교 단체나 비영리법인의 해체는 테러나 무장 폭력 같은 명백한 반국가적 범죄가 입증될 때만 사법부의 극히 보수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종교를 ‘국가의 관리 대상’으로 보고 비판 세력을 ‘사회 해악’으로 몰아 해체하는 방식은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적 종교 길들이기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선택적 정의, 그리고 공적 신앙의 사멸
이재명의 분노는 지극히 선택적이다. 정치권에는 특정 정권을 지지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종교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종교적 행위에는 침묵하며, 오직 비판적인 목소리에만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원칙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의 편의를 위한 ‘선택적 정의’일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사적 클럽’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고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갖는다. 정교분리를 이유로 교회를 침묵의 섬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결국 국가 권력을 견제할 마지막 정신적 보루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헌법의 족쇄를 풀지 마라
정교분리는 권력자가 종교를 휘두르기 위해 만든 회칙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국민의 신앙과 양심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채워둔 ‘헌법적 족쇄’다. 위정자가 이 족쇄를 스스로 풀고 “질서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생사여탈권을 쥐려 할 때, 자유의 시대는 저물고 통제의 시대가 밝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사와 해체의 위협이 아니다. 권력 앞에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그리고 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민주적 절제다. 영혼의 영역까지 국가의 발길질 아래 두려는 오만을 멈춰야 한다. 성벽이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뿐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