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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AI 이미지 인권을 말하는 자,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인권이라는 단어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남용되는 언어도 드물다. 누구나 인권을 말하고, 누구나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말해진 인권이 진정한 인권인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는 하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싸고 쏟아낸 발언들은 그 시험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히틀러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넘어, 그의 인권 사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의 대담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침묵에 있다. 같은 입으로, 같은 열정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말한 적이 있는가. 탈북민의 피눈물 나는 증언 앞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수용을 향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택적 인권은 공산주의 인권관의 오랜 문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인권은 본래적 의미의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투쟁의 도구다. 인권은 억압받는 계급, 즉 혁명의 편에 선 세력을 위한 것이며, 계급적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게는 인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인권의 선택적 적용은 모순이 아니라 원칙이다. 오늘날 이른바 진보 진영이 구사하는 인권 담론의 문법은 이 전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 — 2023년 10월 7일, 1,200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240여 명이 납치된 사건 — 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침묵한다. 북한이 자국민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두는 구조적 폭력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위권 행사에는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진영 논리로 포장된 정치적 무기다. 진정한 인권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억압자가 누구이든, 피해자가 어느 진영에 속하든,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비유는 역사적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이재명 대표의 히틀러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과잉이 아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절멸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엄정하게 정의한 이 사건을 하마스 테러 조직의 공격에 맞서 자국을 방어하는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이 논법은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실존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다.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첫날부터 주변 아랍 국가들의 총공세를 받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존적 전쟁 상태가 76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는 그 헌장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를 명시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한 국제법 해석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적 판결이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평행한 운명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948년, 같은 해에 두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모두 건국 즉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외세와 내부 위협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야 했으며, 국제 사회의 냉담 속에서도 홀로 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지고, 국가 생존을 위한 결의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피로 지켜낸 실재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휴전선 너머 핵무기를 개발하며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국내 정치 담론은 그 실존적 위협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한민국의 자위권과 동맹 연대를 부정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흔드는 논리는 곧 대한민국을 흔드는 논리다. 기독교 인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보편적 존엄 이 논의를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우려면 기독교 인권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인권의 근거를 사회 계약이나 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7절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 신학적 선언이 인권의 절대적 보편성의 근거다. 인간의 존엄은 국적도, 민족도, 계급도, 정치적 진영도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를 더욱 구체화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묻는 자에게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답을 주셨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자 앞에서는 진영과 민족을 초월한 응답이 요청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기독교 인권 사상의 핵심이다. 고통은 편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 앞에서는 이념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이 기준으로 이재명의 인권관을 평가하면 판단은 명료해진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은 아파하면서 북한 주민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 하마스의 테러 피해자에게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성토하는 것 — 이것은 Imago Dei에 근거한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진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우상숭배적 인권관이다. 교회의 침묵은 공모다 "정교분리(政敎分離)." 한국 교회가 공적 사안 앞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방패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이다. 교회가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앞에서도 진실을 말했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전체에 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행위를 면전에서 책망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성경적 선지자 전통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것도 이 전통이다.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이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집단학살의 언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Imago Dei의 신학으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인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묵시적 동의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귀하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가자지구의 민간인도, 이스라엘의 납치 피해자도, 북한 수용소의 정치범도,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힌 탈북민도. 그 어떤 생명도 진영의 논리에 따라 가치의 경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인권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편의 고통에도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 — 그것이 Imago Dei에 기초한 기독교 인권 사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 존엄의 이상이다. 이재명의 인권관을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 땅의 공적 담론 속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 일에 교회가, 신앙인이,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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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6
  •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강단을 물든 아첨
    이재명 대통령과 소강석 목사가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청와대 사진단 제공)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기념일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역사적 사건 위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서 있다. 그러므로 부활절 예배는 오직 한 분 ‑ 부활하신 주님 ‑ 만이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예배에 참석했고, 소강석CBS 재단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은 환영사에서 대통령을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 기독교 최고의 절기에 정치 지도자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역사적 좌표를 되묻게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강단에서 울려 퍼진'용비어천가' 소강석 목사는 환영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누구보다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이재명 대통령은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든 자들을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어 '우리 대통령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한반도에 평화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예배당 강단에서, 부활절 예배 환영사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회중을 섬기는 직분이다. 강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이지, 정치 지도자를 위한 헌사(獻辭)의 무대가 아니다. 소강석 목사가 쏟아낸 언어들은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 목적은 하나님을 높여 청중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구린내 나는 인간을 드높이는 것은 강단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설교다." —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이것이 단지 한 목사의 개인적 실수라면 논란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다. 소강석 목사는CBS 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주요 대중적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가 부활절이라는 공적 예배 자리에서 국가 지도자를 향해 이런 찬사를 바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그 지도자를 신앙적으로 인증하는 것처럼 비쳐질 위험이 있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것을 경계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린도전서3:21)고 엄중히 경고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이 닷새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를 외쳤던 것처럼, 정치적 환호와 신앙적 찬사는 본질상 다르다. 강단에서 이 둘이 뒤섞일 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다.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사하는 이재명 정교분리를 말하던 입으로 예배당에 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이 이 자리에 선 배경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불과 수 개월 전,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정교분리 원칙이 깨지는 이러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며 종교단체에 대한 법적 제재까지 거론했다. 그런 사람이 4월 5일 부활절 예배에 직접 참석하여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사도신경을 따라 읊으며, 헌금까지 드렸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교분리를 강조하던 그가 스스로 교회의 정치화를 주도한 것은 아닌가. 교회를 향해서는 정치에서 손 떼라 하면서, 자신은 교회라는 공간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정교분리의 본래 취지는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뒤집어 국가가 종교를 단속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헌법 정신의 왜곡이다. 지난1월 기자회견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사람이, 그것도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또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종교를 향해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들어와 축사를 하고 박수를 받는 것—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성이다. 교회해산법을 추진하며 교회당에 들어선 아이러니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층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집권 이후, 민주당 주도로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었다. 발의자 11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 법안은 종교법인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거나 선거에 개입한 경우 주무관청이 직접 설립허가를 취소하고, 해산된 법인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장 없는 종교법인 사무소 출입·검사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해 기독교계는 '교회폐쇄법'이라 명명하며 격렬히 반발했다. 4월 1일에는 7,000여 명의 개신교인이 국회 본관 앞에 집결해 “종교법인 강제해산 종교의자유 입틀막법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 이재명 대통령은 부활절 예배에 나타났다. 한 손으로는 교회해산법을 밀어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부활절 예배에서 헌금을 드린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아니면 정교한 정치 연출인가. 법무법인 전문가들은 이 법안에 대해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해 공익을 해칠 경우 법인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법학회도 “민법 개정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민법 개정이 아닌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대통령의 부활절 예배 참석이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압박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최대 절기의 예배에 등장하는 것 —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향한 정치적 회유이자, 기독교계의 조직적 반발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예배는 권력의 무대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자들이 있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열왕기상12:28)고 선포했다. 그의 동기는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었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죄가 되게 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정치 지도자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대로 전락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를 저버린 백성의 형식적 예배를 향해 “내가 너희의 다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의 분향을 싫어하노라”(이사야1:11,13)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신다. 부활절 예배에서 정치인이 “아멘”을 외치고 헌금을 드리는 모습이 미디어를 가득 채울 때, 그리고 그 예배의 사회자가 대통령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으로 선포할 때, 그 예배당 안에 계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 군중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배와 권련 앞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아첨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맹목적인 반정부 구호의 집결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길은 예언자적 비판과 복음적 초월성에 있다. 세례 요한은 왕의 잘못을 그 앞에서 직언하다 목이 잘렸다(마가복음6:18). 그는 헤롯 왕의 예배당에 초청받아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라고 환영사를 올리지 않았다. 개혁자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권력에 맞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 독일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교회가 국가에 굴종하는 것을'값싼 은혜'라 이름하며 저항했다. 한국교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향한 환호가 아니라 복음의 언어로 권력에게 말하는 용기다. 소강석 목사는 예배 강단에서 대통령을 높이는 대신, 부활절 예배의 의미를 선포했어야 한다. “권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13:4)이어야 하지만, 그 권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두려움 없이 선포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적 목회자의 직분이다. 부활절은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패배하는 날이다. 빌라도의 법정도, 로마의 군병도, 무덤 앞의 돌도 부활을 막지 못했다. 그 부활의 능력 앞에서 교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부활의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앞에서 주눅 드는 것도, 정치 권력에 아부하며 강단을 내주는 것도—모두 부활 신앙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태복음22:21). 이것이 정교분리의 복음적 원리이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거룩한 공간이 정치적 연출의 무대로 활용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엄중한 경계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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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7
  • ‘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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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0
  • 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2026년3월16일 건강한 교회와 사회 포럼, 광교산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민주시민모임,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느헤미야교회협의회,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평화촉구연대의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중동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중동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응답을 표방하고 있다. 성경적 언어와 인도주의적 호소로 포장된 이 성명은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면밀히 읽어보면 이 성명은 심각한 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편향된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침묵 성명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전쟁의 배경이 된 이란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수십 년간 자국민을 향해 비인간적인 억압을 자행해 왔다. 2019년 11월의 피의 금요일 사태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조직적인 탄압을 받아왔다. 독립적인 추산에 따르면 이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역내 무장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불안정의 핵심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사망에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명서는 이러한 맥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의 선택적 적용 성명서는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의 초등학교 공습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민간인 희생을 강조한다. 민간인 보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무고한 희생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명서는 그 공습이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폭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대부분 군사시설 — 해군기지, 공군기지,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 공항 등 — 을 겨냥해왔다. 민간 지역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의도적 공격인지 오폭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만약 민간인 학살이 의도적이었다면 동일 지역에 대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었어야 하나, 그러한 패턴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명서는 이러한 사실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근거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방어권에 대한 몰이해 국제법은 모든 국가에 자기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적대적 언사를 공식적으로 반복해왔고, 실제로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한 대량파괴무기 획득 시도 역시 국제 사회가 공인한 위협이다. 더구나 미국의 공습과 함께 이란 정권은 주변의 중동국가에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감행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성명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인 침략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란 국민 상당수는 자국 독재 정권의 몰락을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의 사망 또는 제거 소식에 거리에서 환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자국민에게도 억압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성명서가 진정으로 생명과 인권을 염려한다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신음해온 이란 국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도 동등한 무게로 발언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정치적 압박의 문제 성명서의 세 번째 항목은 한국교회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태도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 성명서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이란 정권에 대한 면죄—을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전쟁 논리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쪽 편의 서사만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불의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며, 그 안에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불의는 단지 ‘폭격’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억압과 위협, 그리고 지속적인 폭력의 구조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정권이 자국민을 억압하고 국제적 위협을 지속해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한 침략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대응이 민간인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진정한 균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 있는 진실 위에 선다 그리스도인의 평화 운동은 정치적 편향을 복음의 언어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성명이라면,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지역 안정에 가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어야 한다. 핵 위협을 방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독재 정권을 묵인하는 것이 생명 존중인지 물어야 했다. 평화촉구연대의 이 성명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중 하나는 철저히 외면한다. 균형을 잃은 평화 호소는 결국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 서려면,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해서도 동등한 용기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슈와 진단
    • 시사 진단
    2026-03-21
  • 時論/신앙의 자유인가, 타협의 강요인가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이 워싱턴주 올림푸스 스파(Olympus Spa) 사건에서 내린 판결은 단순한 법리 다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공적 공간으로부터의 축출을 선언한 판결이며, 창조 질서에 근거한 신앙 양심의 경영권을 법의 이름으로 무력화한 사건이다. 법원은 트랜스젠더의 출입을 제한한 스파의 방침을 차별로 규정함으로써, 성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그에 따른 삶의 실천을 공적 영역에서 퇴출시켰다. 이 판결이 낯선 타국의 이야기로 들린다면, 우리는 아직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이 끊임없이 추진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내일의 예고편이다. “중립”이라는 허울과 신앙의 공동화 법원은 차별금지법(WLAD)이“중립적이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이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에 관한 스파 측의 주장은 모두 기각됐다. 법원이 말하는 중립은, 그러나 진정한 중립이 아니다. 특정한 세계관을 법의 언어로 확정하고, 그에 배치되는 신앙을 사적 영역으로 봉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세대를 거슬려 살기를 요구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신앙은 예배당 안에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공적 생활에서 그 분별의 권리를 박탈했다. 신앙을 가질 자유는 허용하되, 신앙대로 살 자유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는 역설이다. 창조 질서의 훼손과 원죄적 오만 이번 판결의 핵심 문제는 생물학적 성(Sex)보다 개인의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 선언을 법적으로 우선시했다는 데 있다. 이는 성경의 선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1:27).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구별은 억압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이며 은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성별을 규정하겠다는 주장은, 창조주의 섭리를 넘어서려는 오만이다. 그것은 에덴의 원죄 -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 -의 현대적 재현이다. 법이 이를 권리로 옹호하는 순간,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질서는 흔들린다. 올림푸스 스파는 한국 전통 목욕 문화(찜질방)에 기반한 시설로, 나체 서비스의 특성상 성별 분리는 운영의 핵심 원칙이었다. 이러한 문화적·윤리적 맥락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 평등 기준을 적용한 것은, 창조 질서를 차별로 낙인찍는 가치 전도의 극치다. 한국 교회가 대비해야 할 세 가지 전선 미국의 이 판결은 차별금지법이 실제로 작동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다음 세 가지 전선에서 진지한 대비가 필요하다. 첫째는 강단의 자유다. 죄를 죄라 말하는 설교, 성경적 인간 이해를 전하는 선포가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4:2)는 사명이 법치의 이름 아래 위협받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둘째는 교육의 영역이다. 기독교 학교에서 창조 질서를 가르치는 것이 혐오 표현으로 규정되고,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이 법적 제약을 받게 될 수 있다. 셋째는 일상의 공간이다.여성 전용 사우나, 탈의실과 같은 최소한의 도덕적 경계마저 평등의 이름으로 허물어지는 날이 올 수 있다. 이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미국에서 이미 현실이 된 문제다. 진리의 기치를 내려놓지 말라 교회는 두 가지 유혹 앞에 서 있다. 세상의 법에 굴복하여 타협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감정적 반발로 소모적 갈등을 자초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답이 아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사도들이 걸어간 그 길이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5:29). 기독교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한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교회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담보로 한 타협은 결국 사랑도, 진리도 아닌 것이 된다. 한국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며 더 깊은 신학적 성찰과 성숙한 공적 발언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5:13).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 바로 진리의 짠맛을 지켜야 할 때다. 진리를 배제한 자유는 방종이며, 하나님을 떠난 평등은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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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2026-03-19

이슈와 진단 검색결과

  • 화제의 책/대한민국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나라
    "22세기에도 대한민국은 살아 있을까." 도발적이다 못해 서늘한 이 질문 하나가 책의 표지를 뚫고 나온다. 2026년 1월, 세이지 출판사가 펴낸 김미영 VON뉴스 대표의 신작 〈숨은민국—주체사상파·부정선거·북한인권 그리고 마이 라이프〉는 출간과 동시에 보수 기독교 지식인 사회와 안보·이념 논쟁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저자가 수십 년에 걸쳐 언론 현장과 북한인권 운동, 국제인권 무대에서 축적해 온 문제의식과 경험을 집대성한 이 책은, 단순한 이념 고발서도 정치 비평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직시된 적 없는 '보이지 않는 나라'의 실체를 추적한, 한국 현대사 최전선의 기록이다. 2024년 12월 3일이 촉발한 각성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오랜 잉태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 계기는 뚜렷하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2024년 12월 3일의 계엄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그 사건을 통해 이 책의 주제를 공유할 독자들이 제법 있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엄 선포와 그 후폭풍으로 한국 사회가 격렬하게 요동치던 그 시점에,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평생 가슴에 품어 온 질문을 세상 앞에 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더 이상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저자가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뿌리를 "보이지 않게 작동해 온 또 하나의 나라", 즉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지만, 저자의 시선에 따르면 분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물리적 분단과 더불어,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수평이 아닌 수직의 분열, 다시 말해 '위의 나라'와 '아래로 숨은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숨은민국'과 '은국민'이란 무엇인가 〈숨은민국〉이 제시하는 개념적 틀은 독특하고 도전적이다. 1945년 38선으로 남북이 갈린 한반도는 6·25전쟁을 거쳐 1953년부터는 휴전선이라는 더 길고 넓은 경계선으로 갈렸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만 갈린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도 다시 두 개의 나라로 갈렸다.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갈렸다. 이 두 개의 나라 중 한 나라는 아래로 '숨은' 나라였다. 저자는 이 숨은 나라의 구성원을 '은국민(隱國民)'이라 명명한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적지 않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존재 이유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실상이 바로 '은국민'이다. 은국민들은 한국인을 통칭하여 극우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저자는 명확한 경고를 덧붙인다. 저자는 숨은민국을 북한이나 중국 공산당의 단순한 하수인으로 축소하는 시각을 경계한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신념·조직·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복잡계'이며, 한국 사회의 문화·지식·정치 영역 깊숙이 뿌리내려 왔다고 주장한다. 책의 제목을 거꾸로 읽으면 '국민은 숨(breath)'이 된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제목을 통해 국민의 목숨이 걸린 대한민국 상황에서 숨은민국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설명하는 저자 김미영 대표(동영상 캡처) 두 개의 지하정당에서 북한인권까지 책은 크게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숨은민국'을 움직여 온 두 개의 지하정당에 대한 역사적 추적이다. 숨은민국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이 책에서 선택한 것은 두 개의 정당에 다가가는 것이다. 은국에 여러 개의 지하정당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정당으로 특정하는 것은 통일혁명당(통혁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저자의 분석은 단호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조용히 점령한 은국의 지도부는 통혁당, 그리고 은국민 대중은 민혁당을 통해서 대거 양산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두 정당은 불법적 비밀정당 형태였지만 실체로서 존재했고, 몸을 숨길 뿐 사라진 적이 없다. 나아가 1960년대의 통혁당은 1990년대의 민혁당과 본질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두 번째 축은 주체사상파, 이른바 주사파에 대한 저자 본인의 장기 취재 기록이다. 1999년 '월간조선'과 '시대정신' 등을 통해 이루어진 김영환 그룹과의 인터뷰, 그리고 '전향'이 아닌 '전환'이라는 표현을 둘러싼 논쟁은 당시 한국 지성계와 운동권 내부의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북한 정권의 건국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발언이 대한민국 헌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사상적 모순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추적한다. 세 번째 축은 북한인권 문제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책은 북한인권 문제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김미영 대표는 1999년 이후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해 전시·전후 납북자 구출 운동·정치범수용소 해체 운동·'통영의 딸' 구출 운동 등 굵직한 현안의 최전선에 서 왔다. 저자가 말하는 7가지 역사적 진단 저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을 7가지로 정리한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의지가 100년 이상 치열하게 지속되어 왔다는 것,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적이 상존한다는 것, 대한민국과 우방국을 위협하는 공작망이 실재한다는 것, 반체제 지식인들에 대한 혁명 세화 공작이 종북 지하당의 건설로 이어졌다는 것(4·19 직후 통일혁명당, 5·18 이후 민족민주혁명당), 통혁당과 민혁당의 특징과 정치 세력화 성공, 지하 정당의 변신과 보수 우파 정당과의 화학적 결합에 따른 합법 정당 설립, 그리고 진정한 대한민국의 제도 정당 실종 상태가 그것이다. 숨은민국의 최종 귀결점에 대한 저자의 진단도 명확하다. 저자는 '숨은민국'의 귀결점은 결국 '원 차이나'이며 주사파·민혁당은 그것을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말로 포장하여 북한의 나아갈 길이라고 말해 왔다고 분석한다.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자유선거가 없는 시장경제'를 말하며 중국이 그런 체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왔다고 선전해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쟁의 끝자락에서 희망을 말하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어떤 전쟁의 끝자락에서"다. 저자는 이 제목 하나로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의 좌표를 압축한다. 이미 수십 년째 이념 전쟁의 한복판을 걸어온 사람의 목소리로, 그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대한민국 사람들, 보통의 선량한 '한국인들'을 위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국적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쓴다.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라는 모종의 불안감이 있는 사람도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한다. 숨은민국은 결코 단순하지도 만만치도 않다. 명백히 '복잡계'다. 그들의 신념도 이해해야 하지만 그들의 실력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과 실력을 압도할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야 한다. 이 결론은 고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호소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저자 김미영은 누구인가 이 책의 무게는 저자의 이력과 분리될 수 없다. 저자 김미영은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한국현대문학 석사)을 마치고,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과 미국 노틀담 대학 법대에서 미국법과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다. 주체사상파(주사파) 학생운동권 전향 문제 특종으로 조선일보에 특채되어 북한문제를 주로 다루는 기자로 일했다. 책을 통해 한국의 현 상황의 위기를 경고하는 김미영 대표 그의 삶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었다. 1999년부터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하여 전후·전시 납북자구출운동에 헌신했고,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연구실장, 정치범수용소 해체운동과 오길남 박사 가족 '통영의 딸 구출운동'을 펼쳤으며, 황장엽 방미 수행단으로 동행했고, 유엔인권이사회에 NGO 활동가 자격으로 사이드이벤트를 여는 등 북한 김일성 3대의 반인도범죄와 전쟁범죄 규정을 위해 일했다.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도 이 책의 저변을 흐른다. 잠시 김 대표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녀는 주사파의 주요 인물로 자리잡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된 것은 하나님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반근대 세력들을 견제하는 데 지금까지 쓰임받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필독서"와 "절규"의 사이에서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한 독자는 "저자 김미영 선생의 그동안의 아픔이 무엇인지, 절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의 소박하지만 거창한 인생목적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알게 해 주었다"며 "이 책은 사회과학 평론도 아니요, 문학작품도 아니요, 단순한 저널리스트의 취재수첩도 아니지만, 그 울림의 강도에 있어 일반 서적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고 평했다. 또 다른 독자는 "부정선거와 법치 파괴를 통해 3권분립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경제노동악법 제정을 통해 산업기반 파괴와 국유화를 진행시키는 현실을 이 책이 홍콩이나 베네수엘라행 급행열차를 탄 느낌으로 그려냈다"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고 밝혔다. 서점 구매 리뷰에서도 "작금의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한편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한 보수 기독교 논자는 "국민 대다수는 이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을 듯싶다. 이유는 그들은 공산주의를 포함한 좌익사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며 이념적 문맹이 이 책의 경고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 시대에 이 책이 갖는 의미 〈숨은민국〉은 특정 진영의 주장을 담은 이념서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공산주의 세력의 100년 권력 투쟁, 북한이라는 상존하는 적의 존재, 남한과 해외에까지 뻗은 공작망, 반체제 지식인에 대한 조직적 포섭, 통혁당과 민혁당의 성격 차이, 운동권 정치세력의 분화와 변신, 그리고 제도 정당의 실종까지를 하나의 체계적 세계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고발서가 아니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한 번도 정면으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 즉 "이 나라 안에 이 나라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김미영은 자신의 평생을 걸고 답한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질문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분단 80년, 건국 78년이 된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생존을 진지하게 묻기 시작해야 할 때, 이 책은 그 불편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 이슈와 진단
    • 이슈 진단
    2026-04-15
  • 팍스 차이나(Pax Sinica)의 야망과 문명의 균열
    미국은 팍스 차이나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AI 이미지 역사에서 강대국은 2인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미국을 제치려는 야망은 ‘일대일로’ 전략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夢’이 세계를 제패할 것인가? 미국은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와 이란의 전쟁을 통해 중국에게 경고장을 날렸다. 2인자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팍스 아메리카를 유지하려는 전략만은 아닐 것으로 보이다. 본지는 중동(이란 루트와 '저항의 축' 지원 배후), 아프리카(채무의 덫과 인프라 식민지 — 아이러니하게도 K-방산의 진출로가 된 역설), 유럽(일대일로 경제 침투 + 이슬람 인구학적 팽창 + 문화막시즘의 3중 포위 — 문 닫은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팔리는 유럽의 현실 The Korea Daily), 동남아(인도네시아 채무 함정 실례), 남미(베네수엘라·멕시코). 그리고 트럼프 반격의 효과와 한계, 기독교 문명의 내부 붕괴 문제를 담는 기획기사를 준비했다. <편집자 주> 서론: 세계를 재편하는 조용한 전쟁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카자흐스탄에서 처음 밝힌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은 단순한 인프라 투자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21세기 팍스 차이나(Pax Sinica), 즉 중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100년 대전략의 출발 신호였다. 아프리카의 항구, 중동의 석유 루트, 유럽의 수도 한복판, 동남아의 철도, 남미의 광산까지 — 중국의 붉은 자본은 이미 지구의 혈관을 장악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 전략의 더 깊은 차원에는 경제적 침투를 넘어선 문명의 교체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전체주의 통치 모델이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 그리고 기독교 문명이 세속주의·이슬람·문화마르크시즘의 연합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이 대전략의 핵심 시나리오다. 아산정책연구원의 2026년 이슈브리프는 "강대국 일방주의와 예외주의가 횡행하며, 기존 국제질서를 규정짓던 정치·경제적 레짐들이 약화됐다"고 진단한다. 세계는 지금 무질서 속의 체제 전환기에 서 있다. "일대일로는 인프라 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중화 세계질서 재건을 위한 100년 전략이다" Ⅰ. 일대일로의 전 지구적 판도: 5개 전선의 실체 1) 제1전선— 중동: 이란과 저항의 축 일대일로의 지정학적 핵심은 이란이다. 이란은 아시아와 유럽, 남반구와 북반구를 연결하는 최대 규모의 국제 수송 회랑이자, 중국의 에너지 안보를 떠받치는 전략 거점이다. 중국은 이란과2021년25년 포괄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석유·가스 개발에서 인프라, 군사 협력까지 전방위 연대를 구축했다. 이란이 하마스·헤즈볼라 등 이른바 「저항의 축」을 지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중·이란 경제 동맹이 자리한다. 그러나 2026년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군사 공격으로 이 구도에 균열이 생겼다. 러시아 분석매체 <프라우다>의 보도에 따르면 "이란 정부가 무너진다면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란을 잃으면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 지배의 핵심 고리를 잃는 셈이다. 현재 중동 지역은 미국-이스라엘-사우디 안보구조가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어 무질서에서 벗어나고 있으나, 불안정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2) 제2전선— 아프리카: 채무의 덫과 인프라 식민지 아프리카는 중국 일대일로의 최대 수혜지이자 최대 피해지다. 중국은 수백억 달러를 투입해 아프리카 주요국에 고속철도, 대형 항구,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케냐는 수도 나이로비와 항구도시 몸바사를 연결하는 고속철도 건설에 필요한 자금 90%를 중국에서 조달했으나, 현재 케냐의 총 공공부채는 GDP의 67%인 757억 달러까지 불어났고 중국은 세계은행에 이어 케냐 최대 채권국이 됐다. 앙골라의 대중국 채무는 190억 달러에 달한다. 이집트는 중국 자본으로 서울보다 큰 신행정수도(700㎢)를 건설 중인데, 중국의 세계 최대 국방부 청사를 본뜬 이집트 국방부 청사,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 등이 여기 포함된다. 수에즈 운하의 통제권이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2년 아프리카 15개국 여론조사에서 영향력 및 긍정 평가 면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했다는 사실은, 아프리카에서의 소프트파워 전쟁도 중국이 앞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도 존재한다. 중국이 수십조 원을 들여 닦아놓은 아프리카의 도로와 항구가 이제 한국의 K2 흑표 전차가 달리는 무대가 되고 있다. 모로코 정부가 K2 전차 400대 도입을 검토하는 배경에는, 중국이 깔아놓은 고하중 인프라가 한국 중무기 체계의 진출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얄궂은 나비효과가 있다. 지정학은 때로 아이러니로 말한다. 중국의 ‘夢’과 미국과의 패권 경쟁은 단순한 1위 싸움이기 보다 자유민주국가의 붕괴와 맞물려있다. AI이지미 제작 3) 제3전선 — 유럽: 두 갈래 침투, 일대일로와 이슬람 유럽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포위되고 있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적 침투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의 인구학적 팽창이다. 이탈리아는 2019년 G7 국가 중 유일하게 일대일로에 서명했다(2023년 탈퇴). 중국은 베네치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상업 부동산을 잠식했고, 독일의 핵심 제조업체들을 인수했다. 2016년 산업용 로봇 분야 세계 최강 쿠카(KUKA)가 중국 자본에 넘어간 것이 그 상징적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독일은 첨단기술 기업에 대한 외국 자본 인수 심사를 강화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위협은 문화의 내부 붕괴다. 유럽에서는 이민과 다문화주의가 기독교 문명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프랑스 전체 인구의 10% 내외가 무슬림이다. 영국에서는 해마다 220개의 교회가 폐쇄되는 반면 110개만 새로 세워지고, 문을 닫은 교회의 상당수가 이슬람 사원으로 팔리고 있다. 독일은 지난 10년간 515개의 가톨릭교회가 공식 폐쇄됐고, 네덜란드에서는 향후 4년 내 700곳 이상의 개신교회가 사라질 전망이다. 카메룬 맘페 교구의 앤드류 은키 대주교는 "유럽의 교회가 잠들었기 때문에 유럽이 이슬람화되고 있다. 역사를 보면 교회가 복음과 멀어진 곳에 이슬람이 기회를 노리고 들어왔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2025 국가안보전략(NSS)조차 "유럽은 이민과 다문화주의로 붕괴되고 있는 문명적 쇠퇴지역"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교회가 잠들면 이슬람이 들어온다. 유럽이 그 생생한 증거다" — 아프리카 대주교의 경고 4) 제4전선 — 동남아: 채무의 덫과 반중 감정의 확산 동남아시아는 중국 일대일로의 '쇼윈도'이자 균열의 진원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는 동남아 최초의 고속철도로 홍보됐지만, 실제 이용객은 예상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속철도 연간 매출이 약1,500억 원인데 중국에 갚아야 할 이자만 매년 1,700억 원에 달해, 2026년 2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결국 국가 예산을 투입해 중국 개발은행 대출금을 갚기로 결정했다. 당초 "국민 세금 없이 민간 자본(B2B)으로만 하겠다"던 약속은 산산조각이 났다. 내부에서 "중국의 채무의 덫에 제대로 걸렸다"는 비판이 거세다. 필리핀은 두테르테 정부 시절 중국과 대규모 일대일로 협력을 맺었지만, 남중국해 분쟁이 격화되면서 친미 노선으로 선회했고, 일대일로 사업들을 재검토하고 있다. 미얀마는 쿠데타 이후 고립 속에서 중국 의존도가 더욱 심화됐다. 라오스는 중국-라오스 철도 완공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GDP가 21% 증가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국가 부채가 GDP의 100%를 돌파하며 사실상 중국의 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동시에 제기된다. 5) 제5전선 — 남미: 베네수엘라와 자원 패권 남미에서 중국의 전략적 베이스캠프는 베네수엘라였다. 마두로 정권에 수십억 달러를 대출해 주고, 원유로 상환받는 구조로 중국은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을 사실상 지배했다. 멕시코에서는 중국 자본이 상권과 건물을 잠식하고, 친중 성향의 정부와 결탁해 현지 소상공인을 고사시키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의 광산 자원 역시 중국 국유기업들의 주요 투자 대상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적극 개입이 이 전선에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마두로 체포 압박과 군사·경제 제재는 중국의 서반구 진출에 실질적 타격을 줬다. 이로 인해 남미에서 중국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나,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좌파 정부와의 관계는 여전히 긴밀하다. Ⅱ. 문화 막르크시시즘과 이슬람: 서구 문명 내부 붕괴의 두 엔진 일대일로가 '외부로부터의 침투'라면, 문화마르크시즘(Cultural Marxism)과 이슬람주의는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주도하는 두 엔진이다. 이 두 세력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문명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공조한다. 문화 마르크시즘은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발원해, 전통 가족·종교·도덕·국가 정체성을 해체하는 이념으로 서구 교육·미디어·문화 전반에 침투했다. 동성애 이념, 젠더 유동성, 낙태 권리, 역사 왜곡, 탈식민주의 담론 등은 모두 이 흐름의 산물이다. 유럽에서는 이 흐름이 기독교 설교를 '혐오 발언'으로 규제하고, 전통 가족 개념을 '차별'로 낙인찍는 법적 환경을 만들어냈다. 서유럽 기독교인들 중 대부분은 명목상 기독교인에 불과하다. 영국의 경우 인구의 약 70%가 문화적·역사적 이유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히지만,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이는 7%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오스트리아·포르투갈·아일랜드에서는 80% 이상이 기독교인이라고 답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동성결혼과 임신중절에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문화마크르시즘이 만들어낸 '탈기독교 기독교인'의 초상이다. 이슬람은 이 공백으로 파고든다. 유럽의 이슬람 인구는 프랑스에서만 약 600만 명(전체 인구의 10%)에 달하고, 영국 400만 명, 독일 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가 2010년대 이후 반복되면서 유럽의 기독교는 "문명 간 충돌"의 전면에 불가피하게 서게 됐다. 유럽 극우 정당들이 기독교를 이민자·세속주의에 맞선 '문화적 방패'로 활용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신앙 부흥이 아니라 정치적 정체성 전쟁이다. "교회가 비어가는 속도만큼 유럽은 포스트-기독교 문명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2기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자처하는 전략을 가지고 중국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 Ⅲ. 미국의 반격: 효과와 한계 트럼프2기 행정부는 이 흐름을 차단하려는 가장 적극적 행위자로 등장했다. 베네수엘라 마두로 체포 압박, 이란 군사 공격, 전 세계 상호관세 부과, NATO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증액 압박 등 일련의 조치들은 중국-이란-베네수엘라 삼각 축을 해체하려는 전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이란 공격은 일대일로의 핵심 육로 통로를 차단하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서반구에서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남미 입지는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동맹국들의 중국 의존 탈피도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역설도 있다. 트럼프의 일방주의는 전통 동맹국인 유럽과의 관계를 약화시키고, 개도국들에게 "미국보다 중국이 더 믿을 만한 파트너"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2025년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잇따라 무역협정을 체결하며 이 틈새를 파고들었다. 또한 트럼프의 상호관세는 2026년 2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위법 판결을 받아 무효화됐다. 이로 인해 대중국 협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설령 관세 압박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중국은 유라시아·아세안·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 일대일로 전략을 계속 확대하며 미국의 압박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반격은 필요하고 일정 부분 효과적이지만 충분하지 않다.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는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뢰, 가치, 그리고 문명의 내적 활력이 함께해야 한다. Ⅳ. 결론: 문명 방파제는 어디에 세워지는가 팍스 차이나의 야망은 경제·외교·문화·정치·이념의 전방위 침투를 통해 전진하고 있다. 그 최종 표적은 자유민주주의이며, 더 깊은 곳에서는 기독교 문명이다. 일대일로는 경제 네트워크처럼 보이지만, 그 핵심은 중국 중심의 문명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재편하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와 문화마르크시즘은 서구 내부에서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는 협력자 역할을 한다. 중국공산당이 이 두 세력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는지의 여부와 별개로, 결과론적으로 이들의 목표는 수렴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5세기 서로마 제국은 외부의 침략보다 내부의 도덕적 해이와 정체성 상실로 무너졌다. 오늘의 서방 문명도 동일한 경로를 걷고 있다. 교회가 비어가고, 가정이 해체되고, 진리의 개념이 해체되는 곳에,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새로운 질서로 들어온다. 이스라엘·미국·한국은 그나마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최전선에 서 있는 나라들이다. 이 세 나라가 각자의 내부 균열을 치유하지 못한다면, 팍스 차이나의 파도를 막을 방파제는 없다. 그 방파제는 군사력도, 경제력도 아니다. 참된 방파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진리에 기반한 공동체, 그리고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목숨으로 지키려는 시민들의 각성이다. 한국 교회와 사회가 이 시대를 읽는 눈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팍스 차이나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는 군사력이 아니다. 진리와 공동체 안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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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4
  • '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 길과생명연구소
    2026-04-10
  • '진일교 목사의 민법 개정안 옹호론' 어디서 어떻게 문제가 있나
    진일교 목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인가’ 2026년 1월 9일, 국회에는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최혁진 의원 대표발의, 의안번호 제2215932호)이 제출되었다. 표면적 목적은 비영리법인의 감독 강화와 반사회적 법인 해산이었으나, 교계는 즉각 이를 '종교법인 해산법', '정교유착방지법'으로 규정하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한교총, 한기총, 대광기총 등 주요 개신교 연합기구들이 일제히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한국교회법학회는 국회에 상세한 검토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진일교 목사가 해당 민법 개정안에 대한 교계의 반발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부끄러움은 왜 우리의 몫인가’는 제목의 글을 페이스북에 3월 28에 올렸다. 그는 개정안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통일교·신천지 같은 특정 반사회적 단체를 겨냥한 합리적 제도 보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교계의 반발이 오히려 개신교를 통일교·신천지와 같은 반사회적 집단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과연 진일교 목사의 주장은 얼마나 정확한가. 그의 주장은 한국교회의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각과 주장에 동조하는 이도 있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다루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본지는 한국교회법학회장인 서헌제 중앙대 명예교수, 전남대 로스쿨 정종휴 명예교수(한국민법학회장·한국법사학회장 역임), 그리고 구병옥 개신대학원대 교수(한국실천신학회 이사장)가 각각 발표한 상세한 법적·신학적 분석을 기초로 진일교 목사 주장의 각 논거를 해부한다. 1. 진일교 목사 주장의 핵심 논지 정리 진일교 목사의 글은 크게 다섯 가지 논지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비판의 출발점이다. ① 개정안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진일교 목사는 "헌법 제20조와 제37조는 개인의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있지만 국가로부터 법인격을 취득해 현실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하는 단체는 실정법을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즉 법인격을 가진 종교단체는 일반 비영리법인과 같은 지위에서 민법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② 개정안은 통일교·신천지만을 겨냥한다 그는 "이번 법안은 눈을 씻고 보아도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의 고유성을 보장하고 본질을 훼손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법안이다"라고 주장하며, 개정안이 통일교·신천지처럼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단체만을 규제 대상으로 한다고 강조한다. ③ 정상적 교회는 해산당할 위험이 없다 진일교 목사는 "정상적으로 고유의 목적을 실행하고 있는 종교단체나 교회를 폐쇄할 근거가 없다"며, 교계의 반발을 '지레 짐작'이라고 치부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격이라는 것이다. ④ 교계의 반발이 개신교를 이단과 동일시하게 만든다 그는 "비그리스도인들은 사실 신천지나 통일교와 개신교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교계의 과잉 반응이 오히려 개신교를 반사회적 집단과 동일시하는 시각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⑤ 종교 혜택을 받으려면 실정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는 "비영리단체나 종교시설로 구분되면 국가는 각종 세금 감면혜택을 준다. 세금감면을 하는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혜택을 누리는 종교단체가 법을 위반하면 혜택을 거두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거를 제시한다. 2. '법인격을 취득하면 실정법을 따라야 한다'는 논거의 오류 진일교 목사의 첫 번째 논거, 즉 법인격을 취득한 단체는 일반 민법 규제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언뜻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이는 법인격의 성격과 민법의 기본 체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법 제38조는 행정법적 규정이다 서헌제 교수는 "민법 제38조의 법인설립취소는 민법에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실질은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하는 행정법적 규정"이라고 명시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기본권 제한 규정이기 때문에, 설립취소 요건 해당 여부를 판단할 때는 헌법 제10조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 내재하는 일반적 행동의 자유에 대한 침해 여부 및 과잉금지의 원칙 등을 엄격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도 이 점을 일관되게 확인해 왔다. 2014년, 2017년, 2023년의 잇따른 판결에서 대법원은 민법 제38조의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해당 법인의 소멸을 명하는 것이 공익 침해 상태를 제거하고 정당한 법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제재수단으로서 '긴요하게 요청되는 경우'여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이다. "민법 제38조의 법인설립취소는 민법에 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실질은 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하는 행정법적 규정이다." —서헌제 한국교회법학회장 법인도 기본권의 주체다 더욱이 법인격을 취득했다고 해서 헌법상 기본권 보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서헌제 교수가 지적하듯, 단체의 기본권에 대해 통설과 판례는 "단체의 구성원과 독립해서 단체 자체의 기본권도 인정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1996년과 2002년 결정에서 이를 확인했다. 우리 헌법 제19조, 제20조 제1항, 제21조 제1항은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한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단체를 설립하고 법인으로 허가받아 활동하는 것은 이들 기본권의 내용에 포함된다. 법인격 취득이 이 보호를 소멸시키지 않는다. 민법은 사적 자치의 기본법이다 정종휴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지점을 짚는다. "민법은 사인(私人) 간의 이해조정의 기본법으로서 사적 자치, 사유재산권 보장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비영리법인의 감독, 해산, 재산몰수 등 행정적 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개정법안은 기존의 민법 체제와는 맞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법기술적 문제가 아니다. 민법의 성격과 취지 자체에 관한 문제다. 정 교수는 민법을 '사회의 기본법(헌법, Constitution)'으로 규정하며, 민법 개정은 헌법 개정에 준할 만큼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기본법에 특정 정치적 목적을 가진 규제 조항을 삽입하는 것은,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해 보여도 법체계 전체를 왜곡하는 것이다. 3. '정상적 교회는 해산 위험이 없다'는 주장의 실상 진일교 목사의 두 번째 주요 논거는 개정안이 통일교·신천지 같은 반사회적 단체만을 겨냥하므로, 정상적인 교회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법률의 실제 작동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면 치명적 결함을 가진 주장임이 드러난다.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불명확한 기준의 위험성 개정안 제38조 제1항 제5호는 법인설립 허가 취소 사유로 "헌법 제20조 제2항에서 정한 정교분리의 원칙 또는 공직선거법 등 관계 법령을 위반하여 선거, 정당 또는 후보자와 관련하여 조직적·체계적으로 정치활동에 조직적·반복적으로 개입하여 공익을 현저히 해한 때"를 명시하고 있다. 서헌제 교수는 이 조항의 명확성 원칙 위반 문제를 네 가지 차원에서 분석한다. 첫째, 행위 주체인 '법인'의 범위에서 '정치활동에 개입하는 구체적인 실행주체 범위가 불명확'하다. 둘째, '정교분리의 원칙'이라는 헌법상 추상적 개념이 구체적 상황에 적용되려면 법률로 구체화되어야 하는데, 이 조항은 그 해석권을 행정기관인 주무관청에 넘기고 있어 행정기관의 자의적 해석 가능성을 초래한다. 셋째, 공직선거법 등 관계 법령을 위반하지 않는 정치활동이라도 정교분리 원칙에 위반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법인설립 허가 취소가 가능하게 되어 법인 및 그 구성원의 정치적 기본권이 침해될 수 있다. 넷째, 판단 주체를 주무관청으로 하는 것은 선거관리위원회나 법원이 전문적으로 해왔던 판단을 행정부에 넘김으로써 정권의 정치적 억압을 가능케 하는 법적 토대로 작용할 수 있다. "코에 걸면 코거리, 귀에 걸면 귀거리"의 자의적 해석·적용을 허용하는 불확정의 법문으로서 법률적용의 남용을 예정하는 악법이다." — 정종휴 전남대 로스쿨 명예교수 '정교분리'가 무엇인지 진일교 목사는 오해하고 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정종휴 교수는 헌법 제20조 제2항의 '정교분리'가 실은 '국교분리(國敎分離)'이며, '종교와 국가의 분리', 즉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을 뜻한다는 것을 상세히 논증한다. 이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로 해석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진일교 목사가 지지하는 개정안은 '정교분리'를 '종교의 정치 불간섭'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헌법학자들의 이해와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정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정교분리' 개념의 이러한 오독은 일제 잔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헌헌법의 '정교분리 규정'은 '대일본국헌법'의 정교분리제를 계승한 '일본국헌법' 제20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Separation of state and religion'을 '정교분리'로 오역함으로써 생긴 해악이라는 것이다. 만약 '정교분리'가 '종교의 정치 불간섭'을 의미한다면, 어떤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정치적 발언을 하는 목사, 사회 이슈에 입장을 표명하는 교단, 집회에서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교회가 모두 이 조항에 의해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 진일교 목사가 '정상적인 교회는 위험이 없다'고 안심시키지만, 그것은 조항이 실제로 어떻게 운용될지에 대한 낙관적 가정일 뿐 법적 보장이 아니다. '조직적·체계적·반복적'이라는 요건도 모호하다 개정안은 '조직적·체계적으로 정치활동에 조직적·반복적으로 개입'이라는 요건을 두고 있다. 진일교 목사는 이 요건이 일반 교회를 보호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불명확한 기준이다. 어느 수준의 정치 개입이 '조직적'인가? 교단 차원에서 특정 법안에 반대하는 집회를 여는 것은 해당하는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설교를 반복하는 것은? 교회가 교인들에게 특정 정당에 투표하도록 권고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주무관청의 자의적 판단에 달리게 된다. 서헌제 교수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개별 교회 또는 교단이 통일교나 신천지처럼 조직적·체계적·반복적으로 정치인에게 헌금을 공여하거나 선거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 막연히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기준만으로 해산당할 위험성은 그다지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 불확정 개념 자체의 헌법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명시한다. 4. 재산 국고귀속 조항이 가져올 심각한 충격 진일교 목사의 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개정안 제80조 제4항, 즉 법인이 제38조 제1항 제4호 또는 제5호에 해당하여 설립허가가 취소된 경우 잔여재산이 국고에 귀속된다는 조항이다. 이는 단순히 법인 해산의 문제가 아니다. 신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재산을 몰수한다 서헌제 교수는 "사이비 종교법인의 재산은, 비록 교주에 현혹되어 갈취당한 것이라도 기본적으로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조성된 교인들의 총유재산"이라고 명시한다. 이 재산을 피해 당사자인 교인들에게 우선 돌려주지 않고 국고로 귀속시키는 것은, 설령 대상이 반사회적 종교법인이라 하더라도 심각한 재산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 정종휴 교수는 더 직접적으로 이를 "성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교회 재산에 대한 무도한 재산권 침해"라고 표현한다. 현행 민법 제80조는 해산한 법인의 재산을 정관으로 지정한 자에게 귀속하거나 총회결의로 재산을 처분하도록 하고, 처분되지 않은 재산만을 최후로 국고에 귀속시키고 있다. 개정안은 이 자율권을 박탈하고 즉각 국고로 귀속시키도록 한다. 서헌제 교수는 "민법상 사적 자치, 헌법상 사유재산권 보장에 대한 중대한 예외 규정으로 이 법이 시행될 경우 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서 그 위헌성 여부가 심하게 다투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한다. 국제 비교법적 관점에서도 흥미롭다. 일본의 종교법인법은 공익을 해하여 법인 해산을 명하는 경우에도 잔여재산의 국고귀속을 강제하지 않는다. 사이비 종교법인의 재산은 기본적으로 교인들의 헌금으로 조성된 총유재산이다. 몰수된 종교재산은 우선적으로 교인들이 입은 피해를 보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형법상 범죄수익 몰수로도 충분하다 서헌제 교수는 반사회적 종교단체의 재산을 환수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굳이 민법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제안한다. "굳이 반사회적 종교단체를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하려면 형법상 범죄수익 몰수와 추징 규정에 추가하면 될 것이다." 이 경로를 통하면 사법부의 통제 아래 엄격한 요건을 충족한 경우에만 몰수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훨씬 안전하다. 5. 주무관청의 광범위한 조사권 신설이 가져올 문제 진일교 목사의 글에서 또 하나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개정안 제37조 제2항 내지 제4항, 그리고 제38조의2이다. 이 조항들은 주무관청의 법인에 대한 조사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이다. 압수수색에 준하는 권한을 사전 영장 없이 부여한다 개정안 제37조 제2항은 주무관청이 ① 관계 서류·장부 등의 제출 명령, ② 소속 공무원의 법인 사무 및 재산 상황 검사, ③ 법인 대표자 또는 임직원에 대한 출석 및 진술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제38조의2는 이를 더 구체화하여 주무관청이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 법인의 사무소, 사업장 또는 그 밖의 장소에 출입하여 장부, 서류, 그 밖의 물건을 검사할 수 있도록 한다. 정종휴 교수는 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객관적 증거가 없어도 주무관청은 '의심'만으로 즉시 조사에 착수할 수 있다. 또 사법부의 통제 없이 행정청 판단만으로 강제 조사권이 발동된다. 헌법상의 영장주의를 위반한다." 사무소·사업장 강제 출입, 장부·서류·물건 검사, 관계인 질문이 모두 가능하여, 사전 영장 없는 압수수색에 준하는 강제력이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기준 변호사(법무법인 우암)도 "법원의 허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압수수색 수준의 권한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 문제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단순히 '통일교·신천지 같은 반사회적 단체'에만 적용될 가능성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정권이든 이 권한을 사용하면 편의에 따라 어떤 교회든 조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다. 주무관청은 수사기관이 아니다 정종휴 교수는 "법인의 대표자와 임원은 범죄자가 아니고, 주무관청은 수사기관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경찰·검찰의 강제수사는 법원의 통제 아래 영장주의에 의해 제한되는데, 개정안은 이보다 낮은 통제 수준에서 주무관청이 이에 준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서헌제 교수도 "자칫 사적 기관인 법인에 대한 정권의 정치적 억압을 가능케 하는 법적 토대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6. '민법 개정' 방식이 왜 잘못인가 진일교 목사는 개정안의 방식(민법 개정)이 왜 문제인지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법학 전문가들은 수단의 문제를 목적의 정당성 못지않게 중요하게 본다. 민법은 일반 사인 관계의 기본법이다 서헌제 교수는 "민법은 사인(私人) 간의 이해조정의 기본법으로서 사적 자치, 사유재산권 보장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비영리법인의 감독, 해산, 재산몰수 등 행정적 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개정법안은 기존의 민법 체제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종휴 교수도 "민법은 일반 시민의 법이다"라는 대원칙을 강조하며, 개정안의 여러 조항이 '민법 조항으로 보기에 부끄러울 정도'라고 평가한다. 서헌제 교수는 교계의 검토 의견서에서 "사이비 종교단체의 반사회적 행위를 제재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면 그 방법은 기본법인 민법을 개정할 것이 아니라 가칭 「반사회적 종교법인의 해산에 관한 법률」과 같은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일본의 비교법적 사례 정종휴 교수가 제시하는 비교법적 관점도 중요하다. 일본은 2006년 민법 개정으로 법인 규정을 대폭 간소화하여 4개 조문만 남기고 나머지는 삭제했다. 대신 일반사단법인 및 재단법인법, 공익법인 인정법, 종교법인법 등 특별법으로 세부 사항을 규율한다. 종교법인의 해산도 별도의 종교법인법(제81조)에 의한 법원의 해산명령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서헌제 교수는 일본 통일교 해산 사례를 인용하면서 중요한 시사점을 지적한다. 일본 도쿄고등재판소가 2026년 3월 4일 통일교에 대한 해산명령 결정을 내렸지만, 이는 '정교유착' 때문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불법적 헌금갈취'라는 민법상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 과정은 문부과학대신이 법원에 청구하고 법원이 결정을 내리는 사법적 통제 아래 진행되었다. 진일교 목사는 일본의 통일교 해산을 이 개정안의 정당성 근거로 암묵적으로 인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일본의 해산 절차는 이 개정안이 설계한 방식(주무관청의 행정처분)이 아닌 사법적 통제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거로서의 일관성이 없다. 7. '교계 반발이 개신교를 이단과 동일시하게 만든다'는 주장의 문제 진일교 목사의 가장 자극적인 주장 중 하나는 교계의 반발이 오히려 개신교를 통일교·신천지와 동일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사실의 층위와 규범의 층위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다 어떤 법안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것이 누구를 겨냥하든 반대하는 것은 정당하다. 개신교 교회들이 이 개정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통일교·신천지처럼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법안의 설계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불명확한 '정교분리 위반' 개념, 주무관청의 광범위한 조사권, 사전 영장 없는 압수수색에 준하는 권한, 잔여재산 국고귀속 강제, 사법부 통제 부재 — 이 문제들은 대상이 반사회적 종교단체든 정통 교회든 동일하게 법치주의 관점에서 문제가 된다. 비유하자면, 한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영장 없이 모든 집을 수색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든다면, 그 법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범죄자가 아님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그들의 반대가 그들을 범죄자와 동일시하게 만드는가? 그렇지 않다. 역사적으로 반복된 경고를 외면한다 심하보 목사(대광기총 총회장)의 성명서는 이 개정안을 '현대판 종교재판'으로 규정했다. 서헌제 교수도 역사적 경고를 인용한다. "중세의 종교재판은 이단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켰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이단 척결을 명분으로 국가 권력이 종교를 통제하면서 신앙의 자유는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든 종교 탄압은 처음부터 '악한 종교를 처벌하겠다'는 명분으로 시작했다. 이단·사이비의 폐해가 실재하고 제재의 필요성이 인정된다 해도, 그 제재 방식이 법치주의와 사법적 통제의 원리를 무너뜨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교계의 반발은 이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범죄를 처벌하는 것과 국가가 종교 자체를 규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국가는 종교를 판단할 권한이 없다. 다만 범죄를 처벌할 권한이 있을 뿐이다." — 서헌제 한국교회법학회장 8. '세금 혜택을 받으면 실정법을 따라야 한다'는 논거의 한계 진일교 목사는 비영리단체나 종교시설이 세금 감면 혜택을 받으므로 실정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거는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이 이 특정 개정안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는가? 준수해야 하는 '실정법'은 이미 존재한다 종교단체가 탈세를 하거나,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사기를 치거나, 선거법을 위반하면 이미 현행법으로 처벌 받는다. 서헌제 교수는 현행 민법 제38조가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법인 설립취소 사유로 규정하고 있으며, 일본 통일교 사례처럼 불법적 헌금 갈취도 이 요건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고경환 목사도 "특검 과정에서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신천지, 통일교와 같은 특정 단체의 불법 혹은 탈법 행위가 있다면, 이는 현행 법체계 또는 이를 강화하는 법안을 통해 충분히 조사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 개정안이 기존 법체계의 보완이 아니라, 불명확한 새 기준을 민법에 삽입하고 행정 권한을 대폭 강화함으로써 체계를 왜곡한다는 데 있다. '세금 혜택을 받으면 실정법을 따라야 한다'는 논거가 이 개정안의 구체적 문제들, 즉 불명확한 요건, 영장 없는 조사권, 잔여재산 몰수, 사법 통제 부재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종교의 공적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 정종휴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종교의 본질적 역할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정이나 국가와 같은 사회들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기본권과 공동선과 인간 구원에 필요한 경우에 경제와 사회 문제에 윤리적 판단을 내림으로써 개입한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은 세금 감면의 반대급부 이상이다. 종교는 국가가 대신할 수 없는 도덕 교육, 공동체 결속, 사회 봉사를 수행한다. 이 역할을 협박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된다. 9. 진일교 목사의 글에서 빠진 것들 진일교 목사의 글을 분석할 때, 그가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것 못지않게 그가 다루지 않은 것들이 중요하다. 개정안이 아닌 '특별법'으로 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대안 교계의 반대가 단순한 '반발'이 아니라 명확한 대안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진일교 목사는 다루지 않는다. 한교총 대표회장 김정석 목사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반사회적 행위를 제재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면 그 방법을 기본법인 민법을 개정할 것이 아니라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서헌제 교수도 가칭 「반사회적 종교법인의 해산에 관한 법률」 특별법의 구체적 방향을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법 적용 대상 법인을 명확히 한정하여 정통 종교에까지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둘째, 법인 해산 기준에 '정교분리'와 같은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종교탄압 우려를 불식할 것. 셋째, 법인 해산 결정은 행정관청이 아니라 법원에 맡겨 사법적 통제에 따를 것. 넷째, 법인 해산 사유에 불법 헌금갈취, 신도에 대한 인권유린 등의 사유를 추가하여 사이비 종교의 피해를 방지할 것. 다섯째, 해산법인의 잔여재산은 불법 헌금의 희생이 된 신도들의 피해구제에 우선 사용할 것. 한국 법원의 경직된 해석도 문제다 서헌제 교수는 교계의 입장을 단순히 대변하지 않는다. 그는 코로나19 확산 과정에서 역학조사를 방해한 신천지 계열 HWPL의 설립취소에 제동을 건 한국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이러한 경직적인 법해석을 통해 결과적으로 반사회적 종교법인의 법인격 남용을 용인한 법원 판결이 정교유착방지법안 제출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현행법의 엄격한 요건도 '현행법을 보다 완화해서 적용'하는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진일교 목사는 이처럼 교계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균형 잡힌 입장, 즉 '반사회적 종교단체 제재'와 '종교의 자유 보호'를 함께 추구하는 대안을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 교계 전체가 반사회적 종교단체를 두둔하는 것처럼 프레임을 설정한다. 법안 발의의 정치적 맥락 서헌제 교수와 정종휴 교수 모두 이 법안이 다수당인 민주당의 공론을 거친 바 없이 일부 의원들이 임의로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이재명 대통령이 2026년 1월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교분리 원칙이 깨지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면서 이 법안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 그리고 대통령의 발언 자체가 정교분리를 '종교의 정치 불간섭'으로 오용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진일교 목사의 글은 이러한 정치적 맥락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어떤 법안이든 그것이 입법 목적의 정당성을 갖추고 있는지, 발의 과정이 민주적 절차를 거쳤는지, 실제 집행권을 누가 갖게 되는지에 대한 분석이 법안 평가에 필수적인데, 이 모든 차원이 생략되어 있다. 10. 신학적 관점에서 본 이단·사이비 대응의 정도(正道) 진일교 목사의 글은 법적 논거뿐만 아니라 신학적 논거에서도 문제가 있다. 구병옥 교수(개신대학원대)는 이단·사이비 종교의 반사회성을 창조질서 원리와 진리·정직 윤리라는 성경적 틀로 분석하면서, 한국교회의 실천신학적 대응 방향을 제시한다. 이단·사이비 문제의 근본 해결은 교회의 내적 갱신에 있다 구병옥 교수는 신천지, JMS, 구원파, 만민중앙교회, 통일교 각각의 반사회적 사례를 창조질서 원리(인간 존엄, 가정, 교회)와 진리·정직 윤리라는 두 축으로 분석한 뒤, 이렇게 결론짓는다. "결국 이단·사이비 종교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외부적 규제보다 교회의 내적 갱신에 달려 있다. 교회가 진리 위에 굳게 서서 개인과 가정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창조질서 원리에 맞도록 세워가고, 정직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역할을 감당할 때, 이단·사이비 종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진일교 목사가 지지하는 외부적 법적 규제만으로는 이단·사이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구병옥 교수가 제시하는 실천신학적 대응은 소그룹 공동체 제공, 신앙교육 강화(창조질서 원리와 진리·정직 윤리 교육, 교리 교육, 교회사 교육, 이단·사이비 소개 교육, 가정예배 회복), 상담과 회복 사역, 연합과 협력을 통한 대응이다. 법적 규제와 신앙 공동체 갱신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구병옥 교수는 "이단·사이비 종교의 반사회성에 대한 사회적 대응과 관련하여 종교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이단·사이비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분별과 대응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종교단체 해산과 같은 포괄적 규제보다는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개별 집단과 개인의 범죄행위에 대해 정밀하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힌다. 서헌제 교수도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마 13:28-30)를 인용하며 이 균형을 강조한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 곡식까지 뽑아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사이비의 폐해는 단호히 처벌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토대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사회적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막는 일과 종교의 자유를 지키는 일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지켜야 할 두 축이다. 진일교 목사의 논거는 어디서 실패하는가 지금까지의 분석을 종합하면, 진일교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핵심적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법인격을 가진 종교단체도 헌법상 기본권의 보호를 받는다는 점을 간과했다. 법인격 취득이 헌법적 보호를 소멸시키지 않으며, 민법 제38조는 행정법적 기본권 제한 규정이므로 엄격한 요건과 사법적 통제 아래서만 적용될 수 있다. 둘째, 개정안의 핵심 기준인 '정교분리 위반'이 헌법학적으로 불명확하고, 대통령의 발언을 포함한 법안 지지 논거들이 '정교분리'의 의미를 일제 잔재적 오해에 기초하여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다루지 않았다. 셋째, '정상적인 교회는 안전하다'는 주장은 법적 보장이 아니라 낙관적 가정에 불과하다. 불명확한 기준, 주무관청의 자의적 해석권, 사법적 통제 부재가 결합하면 어떤 교회든 표적이 될 수 있다. 넷째, 잔여재산 국고귀속 강제, 사전 영장 없는 조사권 등 개정안의 구체적 내용들이 가져올 재산권·영장주의 침해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 다섯째, 교계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명확한 대안, 즉 특별법 제정을 통한 사법적 통제 방식의 반사회적 종교단체 해산 제도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교계의 반대를 단순한 기득권 옹호로 프레임화했다. 여섯째, 교계의 반발이 개신교를 이단과 동일시하게 만든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이다. 잘못된 법안에 반대하는 것은 그 법안이 겨냥하는 대상과 동일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를 법으로 직접 규제하려는 시도는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신중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입법이 필요하다면, 민법 개정이 아니라 특별법 제정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서헌제 한국교회법학회장 서헌제 교수의 마지막 경고는 이 기사의 결론이기도 하다. "국가 권력이 종교단체를 해산시키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면, 그 권력은 언제든지 다른 종교와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종교의 자유는 그렇게 무너진다." 좋은 목적이 나쁜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반사회적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막는 길은 반드시 법치주의와 사법적 통제라는 원칙 위에서 찾아야 한다. ※ 이 기사는 서헌제 한국교회법학회장(중앙대 명예교수·대학교회 목사), 정종휴 전남대 로스쿨 명예교수, 구병옥 개신대학원대학교 교수의 학술 발제문 및 연구 논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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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2
  • "가라지 뽑다 곡식까지 뽑을라"… 교회법학회, 종교단체 해산법 집중 해부
    ▲한국교회법학회는 3월 32일 기독교회관에서 '반사회적 종교단체 해선의 법적 논의'를 주제로 제37회 학술세미나를 개최였다. "반사회적 사이비 규제는 필요하나, 민법 개정 아닌 특별법으로“ 한국교회법학회(학회장 서헌제)가 주최하는 제37회 학술세미나를 3월 30일 오후2시 기독교회관에서 개최하고 정부의 일명 '종교단체해산법'에 대한 강도 높은 학술세미나를 진행하였다. '반사회적 종교단체 해산의 법적 논의'를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는 법학자와 신학자, 목회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회에 제출된 이른바 '정교유착방지법안'(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의 문제점을 심층적으로 논의했다. 발제자로는 한국교회법학회 학회장이자 중앙대 명예교수·대학교회 목사인 서헌제 박사, 개신대학원대학교 교수이자 한국실천신학회 이사장인 구병옥 박사, 전남대학교 로스쿨 명예교수이자 전 주교황청 대사를 지낸 정종휴 박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권철 박사가 참여했다. 지영준 변호사(법무법인 저스티스 대표), 황영복 목사(서울시교회와시청협의회 사무총장), 신동만 목사, 명재진 충남대 교수, 서영국 칼빈대 석좌교수, 송준영 목사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기조발제를 맡은 서헌제 학회장은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를 이날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서 학회장은 이단·사이비 종교의 헌금 강요, 성범죄, 폭력과 인권 유린, 탈세 및 자금세탁 등 반사회적 범죄가 이미 오래된 구조적 문제임을 지적하면서도, "악을 제거하려는 열심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근 통일교와 신천지에 대한 특검 수사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정치 영역에 침투해 왔는지가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서 학회장은 "이제 반사회적 종교집단 문제는 더 이상 종교 내부의 이단 논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상화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라고 규정했다. 이어 그는 국회에 제출된 정교유착방지법안에 대해 교계의 반응이 "교회해산법", "일제의 포교규칙을 연상시키는 반민주적·전체주의적 악법"이라는 강한 반발부터 신중론까지 부정적 견해가 우세하다고 소개했다. 서 학회장은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범죄를 처벌하는 것과 국가가 종교 자체를 규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국가는 종교를 판단할 권한이 없고 다만 범죄를 처벌할 권한이 있을 뿐"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부득이 입법이 필요하다면 민법 개정이 아니라 가칭 '반사회적 종교법인의 해산에 관한 법률'과 같은 특별법 제정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이 법에는 불법 헌금 갈취, 인권 유린 등 구체적 해산 사유를 명시하고, 해산 결정의 주체도 행정부가 아닌 법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서 학회장은 "반사회적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막는 일과 종교의 자유를 지키는 일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함께 지켜야 할 두 축"이라고 강조하며 기조발제를 마쳤다. 신학적 시각에서 본 이단·사이비의 반사회성 제1주제 발제를 맡은 구병옥 교수(개신대학원대학교)는 이단·사이비 종교의 반사회성을 '창조질서 원리'와 '진리·정직 윤리'라는 두 가지 성경적 틀로 분석했다. 구 교수는 "2022년 기준 사이비 종교 인구가 교회 출석 개신교인의 8.2%, 약 31만~59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를 인용하며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했다. 그는 이단·사이비 종교의 반사회적 양상을 네 가지 범주로 정리했다. 첫째, 가스라이팅과 세뇌를 통한 인간 존엄 훼손 및 인간성 파괴, 둘째, 집단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가정을 해체하는 가정 파괴, 셋째, 교회의 이름을 도용하여 정통 기독교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교회 파괴, 넷째, 교주를 신격화하고 거짓·기만을 반복하는 진리·정직 윤리의 붕괴가 그것이다. 구 교수는 신천지, JMS(기독교복음선교회), 구원파, 만민중앙교회, 통일교 등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뒤, 한국교회의 실천신학적 대응으로 건강한 소그룹 공동체 형성, 교리 및 교회사 교육 강화, 상담과 회복 사역의 전문화, 교회 간 연합과 협력을 제시했다. 그는 "이단·사이비에 대한 대응을 단순한 방어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 회복이라는 신학적 과제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최혁진 민법 개정안은 위헌적 악법"… 가톨릭 민법학자의 직격탄 제2주제는 가톨릭 민법학자 정종휴 교수(전남대 로스쿨 명예교수)가 맡아 최혁진 의원 대표발의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정 교수는 "이 개정안은 주무관청을 무소불위의 기관으로 만드는 위태로운 조항"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개정안이 법인의 대표자와 임원에 대한 출석 요구권까지 주무관청에 부여하는데, "법인의 대표자와 임원은 범죄자가 아니고 주무관청은 수사기관이 아니다"라며 "제안자의 법적 소양을 의심케 한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정 교수는 개정안의 정교분리 조항에 대해 "전대미문의 불확정 개념으로 점철된 열린 조항으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자의적 해석을 예정하는 악법의 전형"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해산된 법인의 잔여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는 조항에 대해서는 "신도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교회 재산에 대한 무도한 재산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민법 개정이 아니라 특별법에 의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면서도, "공권력은 도덕 질서의 요구에 따라야 하며, 옳지 못한 법률은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인용해 법의 정당성 문제를 짚었다. 일본 통일교 해산 결정의 시사점 제3주제 발제를 담당한 권철 교수(성균관대 법전원)는 지난 2026년 3월 4일 일본 도쿄고등법원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구 통일교)에 대해 해산명령 결정을 내린 사건을 분석했다. 권 교수는 이번 일본 통일교 해산의 결정적 계기가 "아베 전 총리 암살"이었음을 지적하며, 그 과정에서 드러난 장기간의 고액 헌금 강요와 가정파탄이 해산 사유의 핵심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 통일교 해산은 정교분리 위반이나 선거 개입이 아니라 불법적 헌금 갈취라는 민법상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현재 한국에서 제기되는 정교유착방지법안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통일교가 자민당 장기 집권 시절 보수 정치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정치적 배경은 이번 해산 결정에서 전혀 논점이 되지 않았다는 점도 흥미롭게 짚었다. 권 교수는 한국에 대한 시사점으로 1958년 민법 제정 당시의 비영리법인 규정만으로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비영리단체를 제대로 규율할 수 없다며, 한국형 종교단체 법제 정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교회법학회'를 중심으로, 종교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면서 정통 종교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K-종교단체 법제'를 구축하는 건설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세미나 진행에 앞서 예배를 진행하는 모습. 이날 설교는 송준영 목사가 맡았다. 한편 이단·사이비 종교의 반사회성을 단순한 교리 오류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구조적 악'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신학적 분석이 제기돼 과심을 끌었다. 칼빈대학교 석좌교수이자 고신총회 이단대책연구소장,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이단대책위원장인 서영국 교수는 최근 열린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에 대한 토론문을 통해 이같이 밝히며, 국가 차원의 제도적 대응을 강력히 촉구했다. 창조질서 파괴·진리 붕괴… 이단 문제의 신학적 재조명 서 교수는 이번 토론에서 이단·사이비 종교의 반사회성을 '창조질서 원리'와 '진리·정직 윤리'라는 신학적 틀로 분석한 발제의 학문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기존 이단 연구가 주로 교리 비판에 집중된 것과 달리, 이 연구는 인간·가정·교회라는 창조질서의 구조적 파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재조명했다"면서 "이단을 단순한 신학적 오류가 아닌 공동체를 파괴하는 총체적 현상으로 이해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단·사이비 종교를 단순한 교리 왜곡이 아닌 '거짓의 구조화'로 규정한 발제의 시각에 적극 동의하면서, 성경이 거짓을 단순한 윤리 문제가 아니라 "사탄의 본질적 속성과 연결된 존재론적 문제"(요 8:44)로 규정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종교 자유 뒤에 숨은 착취 구조… 국가가 방치해선 안 돼" 서 교수는 이날 토론에서 특히 국가의 역할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다. 그는 "반사회적 단체를 종교의 범주에 두니 국가와 사회가 어떤 회복 시스템도 구성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성 착취, 이혼 조장, 재산 사실상 횡령이 일상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구체적인 대안으로는 프랑스와 일본 수준의 반사이비 관련 법안 입법, 국무총리실 또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상담지원센터 설치, 실제 피해 실태 파악을 위한 정부 기구 운영을 제안했다. 서 교수는 "현재 개인 전문가의 상담만으로는 이단에 빠진 100명 중 1명도 회복시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제도적 뒷받침의 시급성을 역설했다. 또한 중국 '전능신교' 신도들이 한국에 집단 거주하며 난민 신청을 악용해 강제 퇴거를 피하고 있는 사례를 언급하며, "대한민국이 반사회적 종교의 온상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경고했다. 교회·신학계도 통합적 대응 나서야 교회 내부 대응과 관련해 서 교수는 계시론과 교회론에 대한 교리 교육 강화, 이단 피해자를 위한 체계적 상담과 회복 사역, 개혁주의 변증학 강화를 과제로 제시했다. 그는 "이단 문제는 신학, 목회, 사회 전 영역에서 통합적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단순한 교리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 그리고 진리 자체를 붕괴시키는 구조적 악에 대한 대응"임을 분명히 했다. 이날 세미나는 이단·사이비 종교의 반사회적 폐해에 대한 법적·신학적 대응이 시급하다는 데 발제자와 토론자 모두 공감하면서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민법 개정이라는 손쉬운 길 대신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는 신중한 입법이 요구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한국교회법학회는 이미 한교총의 의뢰로 해당 법안에 대한 검토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한 바 있으며, 이번 세미나를 통해 교계의 입장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었다. 관련 기사 : '진일교 목사 민법개정안 옹호론' 어디서 어떻게 문제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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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1
  • '이즘'(ism)에 물든 그리스도인들, 복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한국 교회는 복음이 아닌 이념으로 골이 깊어지고 있다. AI제공 균열의 현장 — 정치가 교회를 삼킬 때 대한민국은 지금 깊은 균열 속에 있다. 정치적 사건 하나가 사회 전체를 좌와 우로 갈라놓고, 사람들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재편하고 있다.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적진에 선 것처럼 보인다. 같은 교회에서 나란히 예배드리던 성도가 예배당 밖에서는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2026년의 현실이다. 문제는 그 균열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왔다는 데 있다. 교회는 본래 세상의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 되게 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세상과 다르지 않다. 아니, 때로는 더 격렬하게 갈라져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특정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설교가 울려 퍼지고, 다른 입장을 가진 성도는 조용히 교회를 떠난다. 누군가를 지지하면 곧바로 '극우'라는 낙인이, 다른 누군가를 옹호하면 '종북 좌파'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 낙인은 단순한 정치적 구분을 훌쩍 넘어 도덕적 판단, 심지어 신앙의 진위를 따지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며, 관계를 끊는 모습은 세상의 정치 집회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에서 결코 자연스러운 풍경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의 상당 부분에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멈추고 질문해야 한다. 복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념이 복음의 자리를 빼앗을 때 복음은 단지 개인의 위안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엡 2:14)고 선언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수천 년 된 적대감을 십자가 하나가 무너뜨렸다는 이 선언은,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안의 이 분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경우, 우리는 복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념을 더 신뢰하는 것 같다. 복음을 고백하지만 판단의 기준은 정치적 진영이다. 복음은 우리의 신앙 언어로만 남아 있고, 실제 삶의 기준은 '이즘(ism)'이 되어버렸다. 보수적 정치 이념이든, 진보적 사회 의제든, 그것이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상숭배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그 공장이 이제는 이념이라는 우상을 빚어내고 있다. 이념이 복음을 대체하는 과정은 대개 조용하고 점진적이다. 처음에는 시대적 문제에 대한 정당한 관심으로 시작한다.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분노. 이것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관심들이 복음의 빛 아래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지 않고, 어느새 복음 위에 군림하게 될 때 발생한다. 특정 정치적 운동이나 이념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복음을 이념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역사는 이 위험을 여러 차례 증언하고 있다.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은 민족주의라는 이념과 복음을 혼합했고, 그 결과는 나치즘에 협력한 '독일 기독교인' 운동이었다. 칼 바르트는 바로 이 혼합에 맞서 바르멘 선언을 기초했다. 이념·국가·지도자가 복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칼 바르트가 주장한 바르멘 선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AI 제공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선언은, 어떤 이념도, 어떤 국가도, 어떤 지도자도 복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언은 80여 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울려야 한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이념(ism)이 복음을 대체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다. 첫째는 적아(敵我) 구분의 절대화다. 복음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존재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념이 정체성의 기반이 될 때, 우리는 나와 같은 입장을 가진 자를 '우리'로, 다른 입장을 가진 자를 '그들'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 구분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마침내 '그들'은 악한 편에 선 자로 규정된다. 같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가 정치적 적군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의 선택적 사용이다. 이념에 물든 신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성경 본문은 열정적으로 인용하지만, 그 입장에 불편한 본문은 무시하거나 재해석한다. 권력자의 권위를 강조하는 로마서 13장은 환영하지만,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을 향한 야고보서의 경고는 외면한다. 혹은 반대로, 예언자적 저항 전통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국가 권위에 대한 존중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성경 전체의 권위 앞에 겸손히 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신의 이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는 구원의 공동체의 붕괴다. 교회는 본래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은혜로 하나 된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념이 중심을 차지하면, 교회는 이념적 동지들의 집합체로 변질된다. 같은 이념을 가진 자들만이 진정한 성도로 인정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배제된다. 이것은 복음이 선포하는 교회가 아니다. 복음의 교회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종과 자유인이 함께 앉는 곳이다. 넷째는 분노의 정당화다. 이념이 우상이 될 때, 그 이념을 위한 분노는 '의로운 분노'로 포장된다. 자신의 진영이 옳고 상대가 그르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분노는 더 격렬해지고 더 정당화된다. 그러나 야고보는 경고한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노가 이념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는 한, 그것은 아무리 종교적 언어로 포장되어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교회의 공적 실패로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은 적은 양으로도 부패를 막는다. 바닷물의 3.5% 염분이 거대한 바다를 썩지 않게 하듯이, 교회는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 비유가 중요한 이유는, 소금이 작동하는 방식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금은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는다. 소금은 조용히 녹아 들어가 음식이 썩지 않게 한다. 빛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 소금은 자신을 감추면서 세상을 보존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정반대다. 교회가 많아졌음에도 사회는 더 혼탁해졌다. 성도의 숫자가 늘었음에도 부패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외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징후다. 예수께서 이미 경고하셨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맛을 잃은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보존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가 이념에 물들 때 소금은 그 맛을 잃는다. 이념에 물든 교회는 세상의 갈등을 중재하고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을 증폭시키고 재생산한다. 정치적 집회의 언어가 설교단에서 울려 퍼지고, 예배당이 특정 정당의 지지 기반이 되며, 목사가 정치적 선동가로 전락하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묻는다.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물음 앞에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상태가 지속될수록 복음 자체가 무기력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존재함에도 사회가 점점 혼란스러워진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묻는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이 정말로 능력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교회가 사회의 부패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영향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이유의 문제다. 교회가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는 어느 편에 서 계셨는가 흔히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이념적 편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보수는 질서와 전통을 강조한 예수를, 진보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선 예수를 전유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는 어느 진영의 포획도 거부하신다. 그분은 헤롯에게도, 빌라도에게도, 바리새인에게도, 젤롯 당원에게도 환원되지 않는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이념 위에 서신 분이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앞에서 칼을 든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라는 여호수아의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이제 왔느니라"(수 5:13-14). 그분은 어느 편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모든 편 위에 계신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며, 인간의 모든 이념을 상대화하는 절대 기준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입장을 가질 수 있고, 때로는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입장은 항상 복음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자신의 입장이 하나님의 절대적 뜻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지도자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라는 확신은, 예언자적 비판 의식을 마비시키는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다윗을 사랑하셨지만 나단을 보내 그의 죄를 책망하신 하나님은, 어떤 정치 세력도 신성화하지 않으신다. 복음의 정치적 함의는 모든 이념을 초월하면서도 구체적인 삶에 깊이 관여한다. 복음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경제 구조에 침묵하지 않는다. 동시에 복음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과 생명의 질서를 훼손하는 사회 의제에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심은 어느 특정 정당의 강령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음 안에서 동시에 붙들려야 한다. 복음의 통전성(integrity)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이념화의 본질이다. 연합의 신학, 하나 됨은 어디서 오는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복음이 우리의 중심에 있는가, 아니면 이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가? 복음이 중심에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그 다름이 관계를 끊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합은 동일한 생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생명에서 온다. 이것은 중요한 구분이다.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들의 연합은 이념적 동지 관계요, 클럽이지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속해 있다는 존재론적 사실에 근거한다. 바울이 "한 몸과 한 성령 ...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 4:4-5)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신자들의 생각이나 입장이 모두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 같은 생명에 속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연합은 이견(異見)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견을 품을 수 있는 더 큰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의 연합은 모든 의견이 같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의견이 다를 때에도 서로를 형제자매로 대하고, 상대의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함께 말씀 앞에 겸손히 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4-15장에서 가르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윤리다. 의견의 차이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서로를 세워주는 섬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나 이른바 '관용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 안에서의 연합은 핵심 진리에 대한 타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부활의 역사성, 성경의 권위 — 이 핵심 교리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문제는 이 핵심 교리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차이를 핵심 교리와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자는 진정한 신자가 아니다'라는 판단이 바로 그것이다. 머리된 그리스의 몸으로 교회의 항상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AI 제공 복음으로의 회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논쟁이 아니다. 더 강한 주장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복음으로의 회귀다. 복음이 다시 중심에 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모두 은혜로 하나 된 존재다. 그분이 우리의 머리이며, 우리는 한 몸으로 존재한다. 이 인식이 회복될 때에만 진정한 연합이 가능하다. 복음으로의 회귀는 첫째로 설교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먹여야 하는 자다. 정치적 논평을 제공하는 자가 아니다. 물론 설교는 현실의 삶에 적용되어야 하고, 사회적 불의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논의를 성숙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적용은 항상 복음에서 출발하여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이념이 설교의 중심이 되는 순간, 그 설교단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리가 아니다. 둘째로, 성도 각 개인이 자신의 이념적 편향을 인식하고 복음의 빛 아래 겸손히 검토하는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념적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렌즈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는 약속은, 우리가 자신의 편견을 성령 앞에 내어놓을 때 이루어진다. 정기적으로 '나는 지금 복음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이념을 믿고 있는가?'를 자문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영적 점검이다. 셋째로, 교회 공동체가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함께 말씀 앞에 서는 연습을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다양성을 위한 다양성이 아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형제자매를 통해, 내가 복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념이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거울을 보게 된다. 그 불편한 거울을 피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다. 넷째로, 교회는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는 구체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적대적인 두 진영 사이에 서서, 대화의 자리를 만들고, 서로를 인격체로 대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교회가 갈등의 도구가 아닌 화해의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세상은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된다. 복음은 여전히 강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혼란은 단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이며,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사회도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역사는 이를 증언한다. 18세기 영국은 혁명 직전의 사회 균열을 겪고 있었다. 그 균열을 막은 것은 존 웨슬리가 이끈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었다. 그 부흥은 노예제 폐지, 노동 환경 개선, 교도소 개혁이라는 구체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졌다. 복음이 살아 역사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세상의 소금이 된다. 복음은 여전히 강하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게 하고, 분열된 자들을 하나 되게 하며, 절망 중에 소망을 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복음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성이 될 때 — 정치적 입장이나 민족적 자긍심이나 계층적 이해관계보다 더 근본적인 정체성 —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연합과 화해를 경험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세상의 이념적 싸움에 끌려다니며 그 갈등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복음으로 무장한 화해와 변화의 공동체로 서 있을 것인가. 이 선택은 거창한 교회 정치나 제도적 결정이 아니라, 매일 매일 개별 신자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오늘 내가 SNS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동료를 어떻게 대하는지,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이 복음인지 이념인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하는지 — 이 작은 선택들이 모여 한국 교회의 얼굴을 만들어간다. 이념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그 선택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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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2026년3월16일 건강한 교회와 사회 포럼, 광교산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민주시민모임,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느헤미야교회협의회,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평화촉구연대의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중동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중동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응답을 표방하고 있다. 성경적 언어와 인도주의적 호소로 포장된 이 성명은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면밀히 읽어보면 이 성명은 심각한 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편향된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침묵 성명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전쟁의 배경이 된 이란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수십 년간 자국민을 향해 비인간적인 억압을 자행해 왔다. 2019년 11월의 피의 금요일 사태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조직적인 탄압을 받아왔다. 독립적인 추산에 따르면 이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역내 무장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불안정의 핵심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사망에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명서는 이러한 맥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의 선택적 적용 성명서는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의 초등학교 공습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민간인 희생을 강조한다. 민간인 보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무고한 희생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명서는 그 공습이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폭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대부분 군사시설 — 해군기지, 공군기지,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 공항 등 — 을 겨냥해왔다. 민간 지역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의도적 공격인지 오폭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만약 민간인 학살이 의도적이었다면 동일 지역에 대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었어야 하나, 그러한 패턴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명서는 이러한 사실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근거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방어권에 대한 몰이해 국제법은 모든 국가에 자기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적대적 언사를 공식적으로 반복해왔고, 실제로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한 대량파괴무기 획득 시도 역시 국제 사회가 공인한 위협이다. 더구나 미국의 공습과 함께 이란 정권은 주변의 중동국가에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감행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성명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인 침략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란 국민 상당수는 자국 독재 정권의 몰락을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의 사망 또는 제거 소식에 거리에서 환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자국민에게도 억압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성명서가 진정으로 생명과 인권을 염려한다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신음해온 이란 국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도 동등한 무게로 발언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정치적 압박의 문제 성명서의 세 번째 항목은 한국교회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태도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 성명서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이란 정권에 대한 면죄—을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전쟁 논리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쪽 편의 서사만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불의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며, 그 안에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불의는 단지 ‘폭격’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억압과 위협, 그리고 지속적인 폭력의 구조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정권이 자국민을 억압하고 국제적 위협을 지속해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한 침략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대응이 민간인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진정한 균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 있는 진실 위에 선다 그리스도인의 평화 운동은 정치적 편향을 복음의 언어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성명이라면,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지역 안정에 가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어야 한다. 핵 위협을 방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독재 정권을 묵인하는 것이 생명 존중인지 물어야 했다. 평화촉구연대의 이 성명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중 하나는 철저히 외면한다. 균형을 잃은 평화 호소는 결국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 서려면,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해서도 동등한 용기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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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1
  • 대광기총, "교회 해산법은 위헌적 종교 탄압" 강력 규탄
    대한민국광역기독교총연회는 3월 19일 오전 10시 40분 국회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종교해산입법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대한민국광역기독교총연합회(대광기총, 총회장 심하보 목사)가 3월 19일 오전 10시 40분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정부의 이른바 '교회 해산법' 추진에 반대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서울·부산·충남·충북·강원·수도권 기독교총연합회가 공동 주최한 이날 기자회견에는 전국 교계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혁진 의원이 대표 발의한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5932호)'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즉각 폐기를 요구했다. "헌법 위에 선 반종교 입법" 경악…성명서 낭독으로 강경 대응 천명 기자회견은 대광기총 사무총장 노곤채 목사(한국기독언론협회 회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대광기총 대표회장 정영진 목사(부산기독교연합회 직전대표회장), 충남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이구일 목사, 한국침례신학대학교 특임교수 김종걸 교수가 차례로 교계 대표 발언에 나섰으며, 총회장 심하보 목사가 공식 성명서를 낭독함으로써 약 20분간의 기자회견을 마쳤다. 대광기총은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해당 개정안을 "반종교적·위헌적 독소조항을 담은 악법"으로 규정하고, "순교적 각오로 맞설 것"을 선포했다. 성명서는 개정안의 세 가지 독소조항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먼저 개정안 제38조의2가 주무관청으로 하여금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만으로 영장 없이 교회에 출입해 장부를 검사하고 관계인을 조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광기총은 이를 헌법상 영장주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자 공무원이 예배 현장에 잠입해 설교를 감시하는 '현대판 종교 재판'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개정안 제80조가 설립허가가 취소된 종교법인의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킨다고 명시한 데 대해, "성도들의 자발적 헌금으로 형성된 사유재산을 정당한 보상 없이 강제 몰수하는 것은 헌법 제23조 재산권을 침해하는 폭거"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와 함께 이재명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종교의 정치 참여를 '반란'으로 지칭하고 개신교에 대한 수사와 제재 강화를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행정부 수반이 특정 종교를 범죄 집단화하는 처사"라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 "정교분리는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원리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종교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유의 원칙이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 자유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 이구일 목사 성명서를 낭독하는 심하보 목사 "정교분리 왜곡" 비판…이단 판단도 국가가 아닌 교회 몫 교계 대표 발언에 나선 이구일 목사(충남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는 개정안을 지지하는 측이 내세우는 '종교의 정치 개입 방지'와 '이단 정리 필요성'이라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목사는 "국가가 종교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자유로운 공동체가 아니라 정권의 판단에 따라 존재 여부가 결정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고 경고했다. 또한 "이단 여부는 신학과 교리의 문제로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판단해야 할 영역이며, 국가가 이단을 판단하기 시작하는 순간 신앙 통제 국가의 출발점이 된다"고 강조했다. 정영진 목사는 발언에서 해당 법안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교회폐쇄법"이라고 규정하고, "히틀러와 스탈린, 김일성 같은 독재자들이 만들던 법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김종걸 교수는 또한 "동성애와 동성혼은 가정을 해체하고 다음 세대의 가치관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며 "결국 교회의 가르침이 반인권으로 규정되는 역차별 구조가 형성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울러 최근 진보당이 발의한 차별금지법(평등법) 법안이 동성혼 합법화를 사실상 추진하는 조항을 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 해산법까지 추진된다면 교회의 설교와 신앙 표현 자체가 통제 대상이 될 수 있다"며 "한국교회는 이를 결코 좌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요구 거부 시 정권 퇴진 불사"…전국 교계 결집 예고 대광기총은 이날 성명서를 통해 국회와 정부에 세 가지 사항을 공식 요구했다. ▲민법 개정안의 즉각 폐기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에 대한 탄압 중단 ▲영장주의를 무시한 교회 사찰 및 재산 몰수 시도의 즉각 중단이 그것이다. 아울러 "이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전국 7만 교회, 1,200만 성도와 함께 정권 퇴진을 불사하는 강력한 저항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대광기총 관계자들 대광기총은 이번 기자회견을 단순한 성명 발표가 아닌 한국교회 종교 자유 수호 운동의 출발점으로 규정하고, 향후 전국 교회 배포 및 SNS 확산, 관련 법안 대응 및 국회의원 면담, 주요 교단 참여와 대형 교회 목회자 초청 설명회, 거룩한방파제·악대본 등 유관 기관과의 연대 확대를 단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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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0

문화 검색결과

  • 화제의 책/대한민국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나라
    "22세기에도 대한민국은 살아 있을까." 도발적이다 못해 서늘한 이 질문 하나가 책의 표지를 뚫고 나온다. 2026년 1월, 세이지 출판사가 펴낸 김미영 VON뉴스 대표의 신작 〈숨은민국—주체사상파·부정선거·북한인권 그리고 마이 라이프〉는 출간과 동시에 보수 기독교 지식인 사회와 안보·이념 논쟁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저자가 수십 년에 걸쳐 언론 현장과 북한인권 운동, 국제인권 무대에서 축적해 온 문제의식과 경험을 집대성한 이 책은, 단순한 이념 고발서도 정치 비평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직시된 적 없는 '보이지 않는 나라'의 실체를 추적한, 한국 현대사 최전선의 기록이다. 2024년 12월 3일이 촉발한 각성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오랜 잉태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 계기는 뚜렷하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2024년 12월 3일의 계엄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그 사건을 통해 이 책의 주제를 공유할 독자들이 제법 있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엄 선포와 그 후폭풍으로 한국 사회가 격렬하게 요동치던 그 시점에, 저자는 비로소 자신이 평생 가슴에 품어 온 질문을 세상 앞에 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더 이상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저자가 이 책에서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뿌리를 "보이지 않게 작동해 온 또 하나의 나라", 즉 '숨은민국'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1945년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지만, 저자의 시선에 따르면 분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물리적 분단과 더불어,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수평이 아닌 수직의 분열, 다시 말해 '위의 나라'와 '아래로 숨은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숨은민국'과 '은국민'이란 무엇인가 〈숨은민국〉이 제시하는 개념적 틀은 독특하고 도전적이다. 1945년 38선으로 남북이 갈린 한반도는 6·25전쟁을 거쳐 1953년부터는 휴전선이라는 더 길고 넓은 경계선으로 갈렸다. 그러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만 갈린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도 다시 두 개의 나라로 갈렸다.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갈렸다. 이 두 개의 나라 중 한 나라는 아래로 '숨은' 나라였다. 저자는 이 숨은 나라의 구성원을 '은국민(隱國民)'이라 명명한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적지 않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존재 이유를 거부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실상이 바로 '은국민'이다. 은국민들은 한국인을 통칭하여 극우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저자는 명확한 경고를 덧붙인다. 저자는 숨은민국을 북한이나 중국 공산당의 단순한 하수인으로 축소하는 시각을 경계한다. 오히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신념·조직·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복잡계'이며, 한국 사회의 문화·지식·정치 영역 깊숙이 뿌리내려 왔다고 주장한다. 책의 제목을 거꾸로 읽으면 '국민은 숨(breath)'이 된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제목을 통해 국민의 목숨이 걸린 대한민국 상황에서 숨은민국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설명하는 저자 김미영 대표(동영상 캡처) 두 개의 지하정당에서 북한인권까지 책은 크게 세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숨은민국'을 움직여 온 두 개의 지하정당에 대한 역사적 추적이다. 숨은민국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이 책에서 선택한 것은 두 개의 정당에 다가가는 것이다. 은국에 여러 개의 지하정당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정당으로 특정하는 것은 통일혁명당(통혁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저자의 분석은 단호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조용히 점령한 은국의 지도부는 통혁당, 그리고 은국민 대중은 민혁당을 통해서 대거 양산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두 정당은 불법적 비밀정당 형태였지만 실체로서 존재했고, 몸을 숨길 뿐 사라진 적이 없다. 나아가 1960년대의 통혁당은 1990년대의 민혁당과 본질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두 번째 축은 주체사상파, 이른바 주사파에 대한 저자 본인의 장기 취재 기록이다. 1999년 '월간조선'과 '시대정신' 등을 통해 이루어진 김영환 그룹과의 인터뷰, 그리고 '전향'이 아닌 '전환'이라는 표현을 둘러싼 논쟁은 당시 한국 지성계와 운동권 내부의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북한 정권의 건국 정통성을 인정한다는 발언이 대한민국 헌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사상적 모순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추적한다. 세 번째 축은 북한인권 문제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책은 북한인권 문제로 무게중심을 옮긴다. 김미영 대표는 1999년 이후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해 전시·전후 납북자 구출 운동·정치범수용소 해체 운동·'통영의 딸' 구출 운동 등 굵직한 현안의 최전선에 서 왔다. 저자가 말하는 7가지 역사적 진단 저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을 7가지로 정리한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권력 의지가 100년 이상 치열하게 지속되어 왔다는 것,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절대적인 적이 상존한다는 것, 대한민국과 우방국을 위협하는 공작망이 실재한다는 것, 반체제 지식인들에 대한 혁명 세화 공작이 종북 지하당의 건설로 이어졌다는 것(4·19 직후 통일혁명당, 5·18 이후 민족민주혁명당), 통혁당과 민혁당의 특징과 정치 세력화 성공, 지하 정당의 변신과 보수 우파 정당과의 화학적 결합에 따른 합법 정당 설립, 그리고 진정한 대한민국의 제도 정당 실종 상태가 그것이다. 숨은민국의 최종 귀결점에 대한 저자의 진단도 명확하다. 저자는 '숨은민국'의 귀결점은 결국 '원 차이나'이며 주사파·민혁당은 그것을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말로 포장하여 북한의 나아갈 길이라고 말해 왔다고 분석한다. '중국식 개혁 개방'이란 '자유선거가 없는 시장경제'를 말하며 중국이 그런 체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왔다고 선전해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전쟁의 끝자락에서 희망을 말하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어떤 전쟁의 끝자락에서"다. 저자는 이 제목 하나로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의 좌표를 압축한다. 이미 수십 년째 이념 전쟁의 한복판을 걸어온 사람의 목소리로, 그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대한민국 사람들, 보통의 선량한 '한국인들'을 위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국적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쓴다. 실상은 '숨은민국'의 국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라는 모종의 불안감이 있는 사람도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한다. 숨은민국은 결코 단순하지도 만만치도 않다. 명백히 '복잡계'다. 그들의 신념도 이해해야 하지만 그들의 실력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과 실력을 압도할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야 한다. 이 결론은 고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호소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저자 김미영은 누구인가 이 책의 무게는 저자의 이력과 분리될 수 없다. 저자 김미영은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한국현대문학 석사)을 마치고,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과 미국 노틀담 대학 법대에서 미국법과 국제인권법을 공부했다. 주체사상파(주사파) 학생운동권 전향 문제 특종으로 조선일보에 특채되어 북한문제를 주로 다루는 기자로 일했다. 책을 통해 한국의 현 상황의 위기를 경고하는 김미영 대표 그의 삶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었다. 1999년부터 북한인권 운동에 투신하여 전후·전시 납북자구출운동에 헌신했고,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연구실장, 정치범수용소 해체운동과 오길남 박사 가족 '통영의 딸 구출운동'을 펼쳤으며, 황장엽 방미 수행단으로 동행했고, 유엔인권이사회에 NGO 활동가 자격으로 사이드이벤트를 여는 등 북한 김일성 3대의 반인도범죄와 전쟁범죄 규정을 위해 일했다.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도 이 책의 저변을 흐른다. 잠시 김 대표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녀는 주사파의 주요 인물로 자리잡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된 것은 하나님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반근대 세력들을 견제하는 데 지금까지 쓰임받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필독서"와 "절규"의 사이에서 책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한 독자는 "저자 김미영 선생의 그동안의 아픔이 무엇인지, 절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녀의 소박하지만 거창한 인생목적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알게 해 주었다"며 "이 책은 사회과학 평론도 아니요, 문학작품도 아니요, 단순한 저널리스트의 취재수첩도 아니지만, 그 울림의 강도에 있어 일반 서적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고 평했다. 또 다른 독자는 "부정선거와 법치 파괴를 통해 3권분립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경제노동악법 제정을 통해 산업기반 파괴와 국유화를 진행시키는 현실을 이 책이 홍콩이나 베네수엘라행 급행열차를 탄 느낌으로 그려냈다"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고 밝혔다. 서점 구매 리뷰에서도 "작금의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한편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한 보수 기독교 논자는 "국민 대다수는 이 책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을 듯싶다. 이유는 그들은 공산주의를 포함한 좌익사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며 이념적 문맹이 이 책의 경고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 시대에 이 책이 갖는 의미 〈숨은민국〉은 특정 진영의 주장을 담은 이념서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공산주의 세력의 100년 권력 투쟁, 북한이라는 상존하는 적의 존재, 남한과 해외에까지 뻗은 공작망, 반체제 지식인에 대한 조직적 포섭, 통혁당과 민혁당의 성격 차이, 운동권 정치세력의 분화와 변신, 그리고 제도 정당의 실종까지를 하나의 체계적 세계관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고발서가 아니다.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한 번도 정면으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 즉 "이 나라 안에 이 나라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김미영은 자신의 평생을 걸고 답한다.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질문 자체를 외면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분단 80년, 건국 78년이 된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생존을 진지하게 묻기 시작해야 할 때, 이 책은 그 불편한 성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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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5
  • "왜 나만 힘들지?" 그 물음에 다윗이 답한다
    영화 <다윗>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양들을 돌보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집안의 막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아이.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년에게 눈길을 멈추셨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영웅의 순간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홀로 양을 지키던 그 광야의 시간 속에서. 뮤지컬 애니메이션 <다윗>은 그 오래된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펼쳐낸다. 단순한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두려움과 기다림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한 인간의 성장기로.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었다" 2025년12월, 미국 극장가에 조용하지만 강렬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필 커닝햄(Phil Cunningham)과 브렌트 도스(Brent Dawes)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가 개봉 첫 주말 약2,2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썼다. 역대 종교 애니메이션 흥행1위로 불리던<이집트 왕자>의 오프닝 스코어를 가뿐히 넘어섰고, 최근 국내에서도131만 관객을 동원한<킹 오브 킹스>의 글로벌 흥행 실적마저 뛰어넘었다. 그러나 두 감독이 처음부터 노린 것은 흥행 수치가 아니었다. 그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한 문장이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거인을 쓰러뜨리는 다윗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어떻게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영화는 사무엘상·하에 기록된 다윗의 생애 중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순간부터 유다의 왕으로 세워지기까지의 여정을 담는다. 전반부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등 익숙한 성경 장면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후반부는 골리앗을 이긴 뒤 오히려 사울에게 쫓기며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다윗의 기나긴 기다림을 깊이 있게 그린다. 화려한 승리보다 보이지 않는 시간에 더 집중하는 이 선택이, 이 영화를 다른 성경 영화들과 근본적으로 구별 짓는다. "우리는 거인을 쓰러뜨리는 다윗이 아니라, 거인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본 다윗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필 커닝햄 감독 잠베지 강에서 시작된 30년의 꿈 이 영화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감독 본인들의30년 광야 여정이다. 필 커닝햄 감독은 Animation Scoop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출발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 여정은30년 전, 잠베지 강을 따라 카누를 타고 내려가던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거대한 천둥폭풍과 돌진하는 사자, 강둑 위에 피어난 작은 꽃,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독수리를 바라보며 저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읽고 있던 책이 바로 다윗의 이야기였다. 모험과 감동, 음악과 우정, 섬세한 감정과 진실한 삶이 담긴 그 서사 속에서, 커닝햄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창조 세계에서 느꼈던 그 마음을 다윗의 삶에서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30년. 두 감독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를 만들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는 긴 여정을 거쳤고, 마침내 평생의 꿈을 완성했다. 브렌트 도스 감독은 이 제작 과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다윗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제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특권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 세상에 나오기를 원하는 이야기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저 이 이야기를 맡은 청지기로서, 그 본연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도록 귀 기울이고 길을 여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영화 속 다윗의30년 광야 여정과 감독들의30년 제작 여정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영화가 보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이 빚어낸 신앙 간증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노래 "Tapestry" — 믿음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낸 장면 중 하나는 거대한 전투도, 골리앗의 최후도 아니다. 어린 다윗에게 어머니가 불러주는 노래 "Tapestry(태피스트리)"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실타래를 보렴, 엉키고 찢겨 있구나. 색들은 뒤섞여 있고, 지치고 낡아 보이지. 하지만 네가 보는 뒷면만으로 직공(하나님)을 판단하지 마라, 뒷면은 장차 나타날 영광의 그림자일 뿐이란다." 그리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노래한다. "그분은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짜고 계셔, 우리의 어둠을 영광스러운 빛으로 바꾸시며.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하고 영원하며 신성한 걸작품이 된단다." 커닝햄 감독은 이 캐릭터가 자신의 실제 어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성경에서 다윗이 내 어머니의 하나님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삶에 얼마나 깊은 영적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어머니들이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믿음의 유산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영화는 골리앗 앞에서 다윗이 외친 고백 "너는 칼과 창으로 나아오거니와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삼상17:45)"가 전장에서 갑자기 생겨난 용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광야의 별빛 아래서, 오랜 세월 신앙의 씨앗이 자라 맺은 열매였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노래로 가르쳐준다.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한 걸작품이 된단다" — 영화<다윗> 중 어머니의 노래Tapestry 광야의 시간 — "왜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영화가 가장 집중하는 것은 골리앗을 이긴 이후의 다윗이다. 승리 다음에 찾아온 것은 영광이 아니라 도망이었고, 왕좌가 아니라 광야였다. 사울에게 쫓기며,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시간들. 이 부분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가?" 영화는 이 물음에 설교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다윗의 삶을 그대로 따라가게 한다. 사울에게 쫓기는 다윗의 억울함은 노예로 팔렸던 요셉과 닮아 있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모세와도 이어진다. 성경 속 위대한 인물들이 모두 광야를 먼저 통과했다는 것, 그 광야가 실패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준비 시간이었다는 것을 영화는 조용하고 강하게 전한다. 커닝햄 감독은 인터뷰를 이 말로 마무리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보고 이해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큽니다." 오늘 광야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설교 대신 이야기로 그 진리를 건네준다. "단순한 영화 그 이상" — 관객들의 반응 미국 개봉 직후 IMDb에는 이런 관람평들이 쏟아졌다. "드디어 흥행에 타협하지 않는 성경 대작이 나왔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요. 사무엘서에 놀라울 정도로 충실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온 것입니다. 디즈니급의 강력한 애니메이션이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 어른 모두에게 영감을 줍니다." "단순한 영화 그 이상입니다. 사역을 위한 강력한 도구예요. 예배자로서의 다윗의 마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담아냈습니다." 리뷰에서는 어머니의 노래 "Tapestry"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다윗의 어머니가 신앙으로 빚어낸 삶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들에게 당장의 환경이나 형편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더 크고 온전한 계획을 신뢰하도록 가르칩니다. 그 신앙의 지혜와 가르침은 깊은 울림과 은혜를 전해 줍니다." 이 작품은 뮤지컬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아홉 곡의 노래가 삽입돼 극의 흐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엄청난 스케일과 속도, 웅장하고 압도적인 사운드는 기존 기독교 영화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는 수준의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국내 자막 감수는 최성일 명예교수(한신대학교 신학과)가 맡아 성경적 해석과 신학적 검증을 거쳤다. 배급사 <길갈> 대표 김미영— "광야의 시간을 지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국내 홍보를 담당한 기독교 영화 전문 배급사 <길갈>의 김미영 대표는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영웅의 승리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광야의 시간을 지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한 사람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왜 나만 힘들지?라는 질문에 대한 위로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이어 이 영화의 본질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다윗의 이야기는 특별한 영웅의 전설이 아닙니다. 평범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가정과 교회, 다음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국내 개봉을 위해 길갈은 이미 5월부터 6월까지 전국30개 지역에서 목회자 부부 약 4,500명을 초청하는 대규모 시사회를 준비하고 있다. 교회 스티커 이벤트, 단체관람 할인, 수천 개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검증 과정도 함께 추진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수입·배급을 맡고 길갈이 홍보를 담당하는 이 작품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다윗의 이야기는 영웅의 전설이 아닙니다. 평범한 한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 김미영 <길갈> 대표 비기독교인도 부담 없이— 오히려 더 감동받을 수 있는 이유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임에도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종교적 거리감 없이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대놓고 복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다윗의 삶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인생의 의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드는 구조를 택했다. 다윗은 예수님과 달리 세계사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시편의 저자, 골리앗을 이긴 소년 – 어느 문화권에서도 이미 친숙한 이름이다. 여기에 디즈니풍의 친숙한 연출, 풍성한 볼거리와 들을거리가 더해지니 종교적 배경이 없는 관객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영화 속 메시지는 또한 기독교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에서 왜 나만 이렇게 힘든가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는 시간, 억울하게 쫓기는 시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의 시간 — 다윗의 광야는 바로 그 순간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기독교인에게는 한 인물의 성장 이야기와 리더십 서사로, 기독교인에게는 신앙적 도전과 깊은 위로로 각각 다르게, 그러나 똑같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번역과 내용 검수에 참여한 목회자들도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 영화는 다윗을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평범한 소년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내용상 큰 문제가 없고, 번역도 잘 됐다. 교회가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모범적인 작품이라고 본다." "아이들에게는 믿음의 용기를, 청년과 어른들에게는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3대가 함께 앉아야 할 영화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세대를 초월해 온 가족이 함께 앉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전반부의 모험과 액션, 웅장한 음악에 눈을 반짝일 것이다. 청소년들은 왜 나만 힘들지라고 묻는 다윗의 방황과 성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와 조부모 세대는 자녀에게 믿음을 어떻게 심어줄 것인가를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길 것이다. 영화는 특히 오늘날의 교육 문제를 예리하게 건드린다. 부모가 자신의 욕심을 자녀에게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고 너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진정한 양육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성취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의미를 심어주는 것— 이는 기독교 가정뿐 아니라 어떤 가정에서도 깊이 공명할 메시지다. 이 작품은3대가 함께 극장 의자에 앉아야 할 영화다. 할머니가 손자의 손을 잡고, 부모가 자녀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청년이 홀로 앉아 자신의 광야를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이 영화는 각자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건네줄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 영화<다윗>의 핵심 메시지 광야에서 빚어진 이야기가 광야를 걷는 이들에게 30년 전 잠베지 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한 청년의 소망이 마침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3,000년 전 유다 광야를 홀로 걷던 양치기 소년의 노래가 2026년 서울의 극장 안에 울려 퍼진다. 왜 나만 힘들지. 왜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게 하시는가. 이 물음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영화 <다윗>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를 말한다. 모든 매듭은 약속이고, 모든 눈물은 하나의 선이 되어, 거룩하고 영원한 걸작품이 된다고. 광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보고 이해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다고. 영화 <다윗>은 오는 7월15일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배급사 <길갈>은 개봉에 앞서 5월부터 6월까지 전국 30개 지역에서 목회자 시사회를 진행하며 단체 관람도 적극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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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0
  • 뚜벅뚜벅, 아름다운 순례자의 길
    스믈 여섯 번째 개인전을 연 박인옥 작가 인사동 골목 안, 봄바람이 살며시 스미는 4월의 첫 주. 갤러리 인사아트 제2전시관에 들어서면 한 작가의 45년 화업이 켜켜이 쌓인 그림들이 조용히 관람객을 맞는다. 화가 박인옥 작가의 26회 개인전 '아름다운 순례자'가 4월 1일부터 6일까지 열리고 있다. 3년 만의 서울 나들이다. 진주에서 사천으로 거처를 옮긴 후 더 깊어진 자연의 색과,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걸어가는 인간의 뒷모습을 담은 30여 점의 작품이 이곳에 펼쳐졌다. ■ 순례자의 걸음 — 인생을 그리다 이번 전시의 제목 '아름다운 순례자'는 작가 자신의 고백에서 비롯됐다. 작가의 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루 중에도 기쁜 일과 슬픈 일이 공존하는 시간들, 마치 불협화음 같은 서로의 엇갈림과 갈등 속에서 그럼에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하는 우리네 힘든 인생 여정이 마치 순례자와도 같음을 절감합니다.” 순례자의 눈물과 침묵 가까운 이들의 소천, 갑작스러운 이별, 절망의 순간들. 그 무게를 안고서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 순례자의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그 걸음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는다. 30여 점에 이르는 작품들은 그 믿음의 기록이다. '아름다운 순례자', '가족 이야기', '그리움', '교회와 같은 가정을 꿈꾸며',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아름다운 흔적' 등 제목들만으로도 작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 푸른색에서 녹색으로 — 45년 화업의 변주 박인옥 작가의 화업은 45년째다. 대학 시절 다양한 화풍을 접하고, 독일 유학에서 표현주의 미술의 세례를 받은 그는 이후 초현실주의 화풍을 응용하며 유화, 아크릴화, 목판화, 콜라쥬, 혼합매체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두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전시회 풍경 2017년, 그가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13번째 개인전 '새롭게 그려보는 희망의 물결과 역사들'을 열었을 때, 그의 화폭은 온통 푸른색이었다. 작가는 당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평화와 평안을 의미합니다. 시끄러운 시대의 열망이라고 할까요. 희망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촛불 집회, 세월호, 코소보, 87년 민주항쟁—시대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시절의 작품들은 강한 터치와 선명한 파랑으로 가득했다.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작가는 진주를 떠나 사천으로 이사했고, 집 주변의 산야를 매일 바라보며 살았다. 그 시간이 그의 팔레트를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후배들이 작업실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배님 작품이 따뜻해졌어요." 푸른색의 차가운 결의가 녹색의 온기로 물드는 변화였다. 자연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작가의 인생의 반려자로 40년 넘게 그림을 지켜본 사회학자 강수택 경상국립대 명예교수는 이 변화를 이렇게 읽는다. 산책길 두루미가 건네는 초록빛 위로 “근래에 와서는 새, 산, 섬, 나무 등 자연을 점점 더 빈번히 소재로 삼고 있다. 자연이 주는 생명력과 경이감뿐 아니라 자연 속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가족의 사랑, 평화 등 인간세계의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주제를 넓히고 있다.” ■ 새와 나무와 바다 — 자연에서 길어 올린 영성 이번 전시에서도 새는 빠지지 않는다. 두루미, 오리, 갈매기—박인옥의 화폭에 새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일이다. 2017년 전시에서도 새들은 평화와 희망, 갈망의 상징으로 그림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지금도 그 새들은 날고 있다. 다만 이제 그 배경이 달라졌다. 시위 현장의 하늘이 아니라, 사천의 산자락과 파아란 바다 위를 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적었다. "때로는 산책 중 새와 나눈 조용한 대화를, 때로는 파아란 바다를 바라보며 가졌던 희망을, 때로는 소음 중 침묵했던 묵상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옮긴 저의 작품들이 그 누군가에게는 자그만 희망과 위로가 되고 푸른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림은 그의 묵상 일기다. 산책길에서 만난 새 한 마리, 기도 중에 스친 바람, 슬픔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갔던 발걸음이 모두 화폭에 담긴다. 표현 방식에서도 그의 일관된 미학은 유지된다. 섬세한 묘사보다는 강한 터치, 과감한 형태의 단순화, 그리고 청색 계열의 색조 조합. 그러나 지금의 강한 터치에는 예전과 다른 온기가 실려 있다. 강 교수는 이를 가리켜 "일관된 표현방식 속에서도 감정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평했다. 초기 표현주의 작품들이 고통과 외로움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최근 작업들은 기쁨, 가족애, 희망을 더 풍성하게 담는다. ■ 가족 사랑, 하나님 사랑, 자연 사랑 — 변하지 않는 세 축 45년의 화업에서 박인옥 작가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다. 작가 자신이 자주 말하는 그대로, '가족 사랑, 하나님 사랑, 자연 사랑'이 그것이다. 이번 전시 제목 '아름다운 순례자'에도 그 세 가지가 모두 녹아들어 있다. 순례자는 혼자 걷지 않는다. 가족의 격려가 동행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길을 밝히며, 자연의 풍경이 지친 발걸음을 쉬게 한다. 교회와 같은 가정을 꿈꾸며 우리가족 이야기(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2017년 전시에서 작가는 선교를 위한 별도 통장 이야기를 꺼낸 바 있다. 개인 통장은 마이너스여도, 그림이 팔리면 선교사를 지원하겠다는 기도가 매 전시마다 응답을 받아왔다고 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올해도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저의 작품들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계속 허락하심에 감사하며... 나의 남은 생이 아름답고 선하고 향기로운 작품과 생활로 이어지기를 매일 기도하며 작품합니다.“ 부활의 아침(왕사남의 단종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며) 예수님! 부활을 축하해요 아름다운 흔적 기독교 신앙은 그의 세계관의 기초이자 창작의 동력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참여적 민중미술'과는 결이 다르다. 2017년 그가 말했듯, 기독교적 색채가 있는 그림들이 교회 안을 넘어 세상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그것이 그가 꾸준히 전시회를 여는 이유다. 불자들이 예수님 그림 앞에 줄을 서서 감상했던 기억을 그는 여전히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 인사동에 다시 선 순례자 3년 만에 다시 인사동에 선 박인옥 작가의 이번 전시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내면 여정의 공개 보고서다. 진주의 도시적 푸름에서 사천의 자연적 녹색으로 이어진 팔레트의 변화, 시대의 아픔에서 삶의 소소한 아름다움으로 넓어진 주제의 지평, 강한 터치 위에 얹힌 따뜻한 온도. 이 모든 것이 45년의 세월을 뚜벅뚜벅 걸어온 한 작가의 정직한 흔적이다. 강수택 교수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박인옥 작가는 이런 다양한 감정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창작활동을 힘든 노동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놀이로 여기며 즐기는 것 같다." 순례는 고행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설렘이기도 하다. 그 역설을 살아가며 그림으로 옮기는 작가, 박인옥. 그의 아름다운 순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문화
    • 미술
    2026-04-04
  • ‘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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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2026-03-30
  • 나무를 깎아 구원의 은혜를 새기다
    십자가는 무겁고 두려운 형틀이 아닌 사랑의 증거라고 고백하는 정지은 작가 ■ 전시 일정 및 관람 안내 목공예 작가 정지은(45)의 2026 사순절 특별기획전 '비워낸 나무, 손끝에 닿은 쉼'(빌 2:5)이 오는 3월 24일(화)부터 4월 4일(토)까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409, 문화공간 JADE409(지하 2층)에서 열린다. 지하철 2호선 및 수인분당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 1분 거리다. 관람 시간은 개관일인 3월 24일에는 오후 2시부터 7시까지(개회식 오전 11시)이며, 평일(월·화·목·금)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수요일과 주일은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운영된다.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5시에는 작가가 직접 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10명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이 필수이며, 화환과 화분은 정중히 사절한다. 주차는 유료이고, SUV 등 대형 차량은 주차가 어려워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한다. 예약 문의는 02-557-1063. 이번 전시에는 12년간 작업해온 80여 점의 작품 가운데 엄선된 40여 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비움', '닿음', '쉼'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됐다. 최동욱 JADE409 대표(장로)는 “나무를 깎아내는 묵묵한 비움에서 시작해, 십자가를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간절한 닿음을 지나 마침내 평강의 쉼에 이르는 여정을 담았다”며 “결과보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에 순종하며 준비한 작품들을 통해 마음에 잔잔한 울림과 쉼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12년의 손끝, 나무에 새긴 십자가의 이야기 정지은 작가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금속공예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2014년부터 나무 십자가 작업을 이어온 12년 차 목공예 작가다. 전공이 금속공예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선택한 것은 단순한 재료의 선호가 아니었다. “금속 십자가는 너무 차갑다. 나무로 만드는 것은 나무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서”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그가 만드는 십자가에는 언제나 나무의 따뜻한 질감이 살아 있다. 관람객이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내어놓는 이 따뜻함이, 작가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는 매개체다. 십자가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경기도 구리 예닮교회 고대경 담임목사와의 만남이었다. 작가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어 찾아온 저에게 목사님이 말씀으로 양육해 주셨고, 그 양육을 통해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교회 개척의 동반자로 처음 나무의 따뜻한 질감을 알게 된 정 작가는 고대경 목사의 적극적인 권유로 십자가를 처음 만들었다. 첫 작품이 바로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루증 여인'이다. 나무 조각 작업은 보기와 달리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매캐한 나무 분진, 무거운 목재, 날카로운 톱날의 위험이 도사리는 고된 노동이다. “예닮교회 가족들의 도움과 담임 목사님의 후원이 없었다면 홀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첫 작품을 보고 기계를 후원하며 지금껏 작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운 고 목사와 교회 공동체. 그렇기에 정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개인의 창작물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빚어진 믿음의 고백”이라고 강조한다. '은혜를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사명 정 작가는 작업 5년 차 무렵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저는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만들어도 됩니까, 그 자격이 있는가를 항상 저에게 묻곤 했다”는 고백처럼, 그에게 이 작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끊임없는 신앙의 씨름이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은혜를 기록하는 사람.” 그 말씀이 작가 정지은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 일이 교회를 통해 은혜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는 말한다. 다음 세대에게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십자가에 담아 남겨주는 것이 사명이 되었다. 작품의 영감은 주로 말씀 묵상과 주일예배 설교에서 얻는다. 큐티 중에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노트에 스케치한 뒤 나무로 옮기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기교를 덧붙이면 하나님의 의도와 멀어지는 것 같아, 최대한 스케치대로 조각하려 한다”고 밝혔다. 스케치 초안이 이미 상당량 쌓여 있어, 앞으로 작품화할 내용이 풍부하다.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주님과 나만의 이야기가 생겨 기쁘다는 그의 말에서, 창작이 곧 기도요 예배임을 느낄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 보는 세 가지 테마 이번 전시는 세 가지 테마로 작품을 분류하여 구성된다. 첫 번째 테마 '비움'은 나무를 깎아내는 시간, 내려놓음의 자리를 상징한다. 작가는 이탈리아 카타콤을 여행하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려도 되는 것인가'를 깊이 묵상했고, 그 성찰이 작품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테마 '닿음'은 십자가 앞에서의 마주침, 간절한 손끝을 뜻한다. 세 번째 테마 '쉼'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 흔들림 없는 쉼표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혈루증 여인'이다. “혈루증 여인의 간절함과 그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매우 크게 느껴져 만든 작품”이라고 정 작가는 설명한다. 이 십자가에서 한쪽 팔은 각지고 다른 팔은 둥글게 조각되어 있는데, 각진 팔은 주님의 공의를, 둥근 팔은 그분의 사랑을 상징한다. “병을 넘어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관람객이 느꼈으면 한다”는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기도'는 고대경 목사의 유년 시절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난한 시골 교회 종탑과, 어린 아들을 향해 눈물로 새벽 제단을 쌓으셨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이 십자가를 들고 여러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많은 목사들이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며 “이것이 곧 한국의 신앙이었노라”고 고백한다고 작가는 전한다. '쉼'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는 많은 관람객이 발걸음을 멈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 고단한 현대인들의 마음에 가장 깊이 닿는 작품이다. 십자가를 통해 전하는 예수님의 다양한 사랑 정 작가는 여러 차례의 전시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예수님을 하나의 틀 안에 가둬놓고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랑의 예수님, 두렵고 떨리는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저마다 하나의 모습으로만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은 작고 작은 인간의 사고의 틀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과 방법으로 나타내어 주신 분”이라고 강조한다. “십자가는 무겁고 두려운 형틀이 아닌 사랑의 증거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무게이자 가장 깊은 위로입니다.” 이것이 정지은 작가가 12년간 나무를 깎으며 전하고자 한 메시지다. 그의 작품 앞에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이번 전시 장소인 테헤란로는 서울에서 가장 분주하고 무한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다. 작가는 “이곳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으로 인해 나를 사랑하시고 지키시길 원하신다는 것, 그분이 계신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 십자가> <내가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 <소경> 고대경 목사 “K-나무 십자가로 세계를 향해” 고대경 예닮교회 목사는 기자간담회에서 정지은 작가의 작품 세계와 향후 비전을 직접 설명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앞에 수백 명이 줄지어 선 광경을 보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한들 수십 년 후에 들을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하지만 예술 작품은 100년, 천 년이 지나도 수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구원의 복음을 작품으로 끌어내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크고 영원한 사역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고 목사는 정 작가의 첫 스케치인 '혈루증 여인'을 보고 “평생 본 작품 중 가장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 목공예를 권유했다고 밝혔다. 이후 나무와 기계를 직접 후원하며 작가가 생계 걱정 없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후원해왔다. 그는 “구원과 복음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끌어내는 정 작가의 작품이 국내를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K-나무 십자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대형 작품 위주로 나아갈 계획이며, 작가가 평생 동안 구원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주제 아래 작품 활동을 이어가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정지은 작가는 “제 평생에 허락된 시간 안에서 은혜의 이야기를 쉼 없이 기록하고 남기겠다”고 말했다. 안산제일교회, 주안장로교회, 장로회신학대학교 등에서의 전시를 거쳐 이번 서울 강남 한복판의 기획전까지, 그 여정은 단순한 예술가의 발자취가 아닌 신앙 고백의 기록이다. 사순절 기간, 테헤란로의 분주함 속에서 나무 십자가를 통해 잠시 멈추고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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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3
  •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만들어진다"
    진정한 리더가 절실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리더십을 소개한 이장로 교수 혼돈의 시대, 한국 교회와 사회는 '진정한 리더'에 목말라 있다. 권위로 군림하던 리더들이 몰락하고, 성과만을 좇던 조직이 뿌리째 흔들리는 이 시대에, 이장로 교수(고려대학교 명예교수•온누리교회 장로 ; 이하 이 교수)가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으로 새 책을 내놓았다. 두란노 출판사에서 출간된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은 단순한 경영서도, 편의적 신앙 에세이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담긴 리더십 원리를 현대 경영학과 리더십 이론의 언어로 풀어낸 이 책은,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에게 '리더십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이 교수를 만나 책이 탄생한 배경과 그의 리더십 철학, 그리고 한국 교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제언을 들었다. "리더십 위기의 진짜 원인은 내면의 공허함" 이 교수는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한국 사회와 교회 모두에서 리더십의 위기가 심각합니다. 그런데 그 위기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기술의 문제나 전략의 문제가 아니에요. 리더 내면의 공허함, 즉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수십 년간 기업과 교회 현장을 오가며 수많은 리더를 만나왔다. 화려한 외형과 달리 조직을 병들게 하는 리더, 평범해 보여도 구성원들을 살리고 성장시키는 리더.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교수는 그 해답을 2천 년 전 한 인물에게서 찾았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입니다. 그분은 어떤 공식적인 조직도, 물리적 권력도, 막대한 자본도 없었지만, 열두 명의 제자를 통해 세상을 바꾸셨어요. 그 원리를 현대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교수는 이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예수님을 단지 리더십의 아이콘으로 소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분의 리더십은 철저히 섬김과 희생,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4대 리더십 모델과 예수님의 삶: 이론과 신앙의 통합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의 학문적 강점은 현대 리더십 이론과 성경적 통찰을 유기적으로 엮어낸 데 있다. 이 교수는 진정성 리더십(Authentic Leadership), 섬김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임파워먼트 리더십(Empowerment Leadership),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라는 현대 경영학의 4대 리더십 모델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조명한다. "처음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혹자는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읽어나갈수록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예수님의 삶은 이 모든 리더십 이론의 원형이자 완성이었습니다. 이론이 먼저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셨던 거죠." 그는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洗足式) 장면을 예로 든다. 유월절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예수님의 행동은 섬김 리더십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교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동시에 진정성 리더십, 임파워먼트 리더십, 변혁적 리더십을 모두 실천하고 계셨습니다. 말씀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했고, 제자들의 잠재력을 끌어내셨으며,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 자체를 변혁시키셨으니까요.“ 책에는 넬슨 만델라, 마더 테레사, 애플의 스티브 잡스, 그리고 한국의 다양한 교회 지도자들의 사례도 등장한다. 이 교수는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각 리더십 모델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리더십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결정과 관계,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죠. 독자들이 이 실 제 사례들을 통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스스로 물어보길 바랐습니다. 살리는 리더는 구성원들의 가능성을 보고, 죽이는 리더는 자신의 가능성만 봅니다. 살리는 리더는 실패한 사람을 세우고, 죽이는 리더는 실패를 이용합니다. 그 차이의 뿌리에는 결국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리더십': 이 시대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 책의 5부,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이 교수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다. 앞의 네 가지 리더십 모델이 개인, 관계, 조직, 사회 차원을 각각 다룬다면,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이 모든 차원을 하나의 거대한 비전 아래 통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이 교수는 이를 "리더십의 완성형"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리더십 이론들은 대부분 '효율성'과 '성과'를 중심에 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리더십은 다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 질문 앞에 서면, 리더십의 목적 자체가 달라집니다. 더 이상 조직의 성장이나 리더 개인의 명성이 최종 목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목표가 됩니다." 그가 언급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라는 표현은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다. 그는 이 기도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크리스천 리더의 실천 강령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하나님 나라 리더십의 일곱 가지 핵심 요소를 제시한다. 비전의 초월성, 섬김의 철저성, 진정성의 일관성, 공동체의 형성, 변혁의 추구, 영적 민감성, 그리고 고난의 수용이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요소, '고난의 수용'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인상적이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고난을 회피하거나 최소화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더 깊은 열매를 맺는 리더십이에요. 한국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 부분을 잊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교회 리더십의 위기,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 교수는 한국 교회의 현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최근 몇 년간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불거진 세습 논란, 재정 비리, 성 문제 등은 한국 교회의 리더십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교회 내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목회자를 비판하면 불경한 것으로 보는 문화, 교회를 개인 왕국처럼 운영하는 관행, 투명한 재정 공개를 거부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죽이는 리더십'의 전형입니다." 그는 이를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시스템의 문제, 구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견제와 균형이 없는 조직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개인도 변질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은 개인 리더십 역량을 키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는 리더십으로 나아갑니다.“ 이 교수가 특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리더십 모델의 부재'다. "목회자 자녀들이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자랐지만, 그 설교대로 사는 삶을 목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과 삶이 다른 리더십, 그것이 다음 세대를 교회에서 내쫓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그는 여기서 예수님의 진정성 리더십을 다시 소환한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리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여야 합니다.“ 소명에서 시작하는 리더십: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 이 교수의 리더십 철학에서 빠질 수 없는 개념이 '소명(召命)'이다. 책의 각 장 말미에는 '소명 DNA 자기 점검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코너는 독자들이 단순히 리더십 이론을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소명을 재발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리더는 앞장서면서도 끊임없이 아래로 내래가는 섬김의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이장로 교수 "리더십의 출발은 자기 인식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질문을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던져왔다고 고백한다. 이 교수는 30대 초반, 촉망받는 기업인으로서 경력의 절정기에 신앙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때까지 저는 성과와 인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이 모든 것을 얻은들, 그게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멈추게 되었어요." 그는 그 물음이 자신을 성경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리더십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리더로 만난 것은, 제 삶과 일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경험이었습니다. 더 이상 리더십이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죠.“ 그가 강조하는 '리더십 훈련 방법' 역시 실용적이다. 책은 각 장의 말미에서 구체적인 훈련 방법을 제시한다. 섬김을 실천하는 방법, 구성원을 임파워먼트하는 구체적인 기술, 조직 내에서 진정성을 유지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리더십은 세미나 한 번, 책 한 권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선택과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저는 독자들이 이 책을 손에 들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험해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리더십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고난을 피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공동체를 살리는 리더십. 그것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리더의 모습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리더십 교과서 이 교수는 이 책이 특정 계층이나 직분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 직장에서 팀을 이끄는 팀장, 교회에서 청년부를 섬기는 간사, 모두가 리더입니다. 리더십은 직함이 아니라 영향력이에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갑니다." 그는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음 세대 리더십 형성의 시급성을 강조한다. "MZ 세대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에 강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권위에 대한 거부가 곧 리더십의 부재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진정성과 섬김에 기반한 새로운 리더십 모델이 제시되어야 해요.“ 그는 이 책이 교회 지도자들에게 특히 깊이 읽히기를 바란다. "목회자들이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의 리더십을 다시 만나기를 원합니다. 성공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리더가 되는 것.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살리고,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실제로 책의 일부 내용은 기존의 교회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과 대학원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삶 전체로 쓴 책,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 인터뷰 내내 이 교수는 이론가보다 실천가의 면모를 더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이 책이 서재에서만 쓰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저는 이 책에서 제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말하려면, 내가 먼저 섬겨야 했어요. 임파워먼트를 말하려면, 내 제자들과 학생들이 실제로 성장하는 것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수십 년간의 기업 경영과 신학 연구, 그리고 현장 사역의 경험이 이 책 한 권에 녹아 있다. 그는 이 책이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살리는 리더십 죽이는 리더십》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이 교수는 후속 연구로 '하나님 나라 리더십'을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또한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훈련 워크숍과 세미나도 계획 중이다. "책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이 독자의 마음에 심기어져 삶의 현장에서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공동체를, 교회를, 사회를 살리는 리더십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 교수는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리더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 앞에 무릎 꿇을 때, 비로소 진정한 리더십이 시작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시작되는 리더십. 그것이 이 교수가 이 시대의 한국 교회와 사회에 전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다.
    • 문화
    2026-03-20

선교와 교계뉴스 검색결과

  • 기독 지성 운동 공동체 '케일럽포럼' 공식 출범
    케일포럼은 4월 16일 종로구 한국기독교교연합회관에서 창립예배 및 홍호수 목사를 대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출범을 했다. 성경적 진리를 기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공공선 수호에 앞장서는 기독 지성 운동 공동체 '케일럽포럼(Caleb Forum)'이 4월 16일 공식 출범했다. 케일럽포럼은 이날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창립감사예배 및 대표 취임식을 거행하며 다음세대 리더 양성과 공적 영역에서의 성경적 가치 회복을 핵심 사명으로 천명했다. 구약성경의 갈렙처럼 변함없는 순종과 담대한 믿음으로 이 시대의 영적·사회적 과제에 맞서겠다는 이 공동체의 출범은 한국 기독교 지성 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로 주목받고 있다. "오직 여호와만을 온전히 따르며 진리를 수호한다"…케일럽 선언 채택 이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함께 채택한 '케일럽 선언'은 경외와 진리, 분별과 저항, 공공선 실천, 계승과 헌신이라는 네 가지 핵심 가치를 축으로 구성됐다. 선언문은 "오직 여호와만을 온전히 따르며 진리를 수호한다"는 첫 번째 가치에 대해 "세상의 풍조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경외함으로 일상을 시작하고, 성경적 진리를 공공영역의 기준으로 삼아 왜곡된 가치를 바로잡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밝혔다. 두 번째 가치인 분별과 저항에 대해 선언문은 "이념의 편향을 거부하고 신뢰받는 권위를 세운다"고 규정했다. 극단적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시대를 분별하며, 정직한 성품과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지성적 리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가치인 공공선 실천에서는 "침묵하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방침을 천명하며, 신앙을 개인 영역에 가두지 않고 정책·문화·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목소리를 내겠다고 밝혔다. 네 번째 가치인 계승과 헌신의 경우 다음세대를 향한 책임을 분명히 했다. 선언문은 "다음세대에게 바른 방향과 영적 유산을 전수한다"며 "혼탁한 시대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기준을 제시하고 다음세대가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지적·영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모든 역량을 헌신하겠다"고 명시했다. 아울러 "85세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갈렙의 야성으로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사회적 과제와 영적 도전에 담대히 나아갈 것"을 선포했다. 11대의 핵심 사역 비전을 선포하는 참석자들 아카데미·싱크탱크·플랫폼…11대 핵심 사역 비전 제시 케일럽포럼은 선언과 함께 다음세대를 위해 수행해야 할 11대 핵심 사역 비전도 공개했다. 먼저 '케일럽 아카데미'를 통해 성경적 세계관 교육을 제공하고, 정치·경제·문화·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기독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지적 역량을 갖춘 리더를 양성한다. '리더십 아카데미'를 통해서는 청년들이 공공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와 실질적 지원을 제공한다. 목회자와 전문가를 연결하는 '싱크탱크' 기능도 구축한다. 강단과 광장을 잇는 이 역할은 지역별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사회 현안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 방안을 함께 논의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전국 단위 현장 프로젝트인 '케일럽 투어 아카데미'를 통해서는 국민 삶의 현장에서 체감 가능한 실천 모델을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재난 구호와 사회적 약자 지원을 위한 '케일럽 라이프', 문화 콘텐츠 분석과 가치 분별을 위한 'Decode the culture', 역사 현장 탐방 프로그램 '히스토리 메이커스', 전문가 참여형 공익 활동 '프로보노' 등도 주요 사역으로 포함됐다. 교회와 사회를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도 강조됐다. 케일럽포럼은 'K-Church' 비전을 통해 교단 중심의 분열을 넘어 가치 중심의 연대를 제안하며 기독교 공적 가치 위원회 구성 등 공동 정책 지침 마련을 추진한다. 다음세대 교육 플랫폼 구축, 사회공헌 브랜드 통합, 윤리·정책 싱크탱크 상설화 등을 통해 한국교회의 공적 신뢰 회복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이다. 경제 영역에서는 'K-Company' 비전을 통해 기업이 단순 이윤 추구를 넘어 공공선 실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정직과 인격 기반의 리더십 회복을 촉구했다. 대형교회를 향해서도 'K-Megachurch' 제안을 통해 교회 자원이 내부 성장에 머무르지 않고 청년 대상 지적·직업적 기회 제공, 성경적 가치 수호를 위한 연대 강화 등 사회적 가치 회복에 활용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공공 영역에서 성경적 진리를 침묵하지 않고 선포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는 홍호수 목사 홍호수 초대 대표 취임…"신뢰받는 지도자 200명 세우겠다" 이날 초대 대표로 취임한 홍호수 목사(청소년중독예방운동본부 이사장)는 취임사에서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며 케일럽포럼의 사명을 역설했다. 홍 대표는 "대한민국은 지금 가치의 왜곡과 극단적 이념 대립으로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며 "공공 영역에서 성경적 진리가 외면당하는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 대표는 구체적인 임기 중 목표도 밝혔다. 그는 "임기 동안 공공선을 수호하는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고, 신뢰받는 지도자 200명을 세워 사회 각 영역에 영향력을 확장하겠다"며 "다음세대를 위한 영적·지적 자산을 구축해 혼란이 아닌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하겠다"고 역설했다. 특별히 "권위가 아닌 섬김으로 공동체를 이끌겠다"는 다짐도 내놓으며,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현대판 잇사갈 자손으로서 갈렙의 후계자들이 이 시대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갈렙의 믿음으로 순종을 통해 씨앗을 민족을 일군 것처럼 케일포럼을 통해 이 시대에 씨를 뿌려야 한다고 설교하는 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설교 "갈렙의 믿음으로 씨 뿌리는 공동체 되라" 창립감사예배 설교는 이태희 목사(리바이벌광장기도회 대표)가 맡았다. 이 목사는 가나안 정탐 이야기를 통해 케일럽포럼의 존재 이유를 조명했다. 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 대부분의 백성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올라가서 취하자고 선포했다"면서 "갈렙은 믿음과 순종의 씨를 끝까지 뿌린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청교도 정신을 통해 기독 지성 운동의 역사적 선례도 제시했다. 그는 "청교도들은 단순히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사회와 문명의 기초를 세웠다"며 "그들은 교육과 제도를 통해 다음 세대를 세우며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는 미국 건국 정신의 토대가 됐다"고 덧붙였다. 이어 "다가올 통일 한국 역시 성경적 세계관 위에 세워져야 한다"며 "그래야 자유와 정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바로 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목사는 설교를 마무리하며 "케일럽포럼이 갈렙과 같은 믿음으로 이 시대에 씨를 뿌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며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욱 담대하게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취임식에서는 신상철 더복있는교회 목사가 홍호수 대표에게 취임패를 전달하는 순서도 진행됐으며, 이사진 및 관계자들이 사명메달을 들고 기념촬영을 가졌다. 포럼의 공동책임을 받은 첢은 리더들 오는 28일 공동출판기념회로 첫 공식 행보 시작 케일럽포럼은 창립 이후 첫 공식 행보로 오는 28일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에서 젊은 리더들의 공동출판기념회를 개최하며 본격적인 다음세대 사역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는 케일럽포럼이 선언과 비전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실천적 사역 현장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한국 기독교계 안팎에서는 케일럽포럼의 출범이 단순한 단체 창립을 넘어 한국 교회가 공적 신뢰를 회복하고 다음세대에 바른 영적·지적 유산을 전수하려는 흐름의 한 징표로 해석되고 있다. 성경적 진리를 사사화하지 않고 공공 영역에서 실천하는 '갈렙 정신'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지, 케일럽포럼의 향후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 선교와 교계뉴스
    • 국내소식
    2026-04-16
  • 서울대 국제학생사역회의(ISMC), "후속양육"으로 디아스포라 선교 새 지평 연다
    4월 17일에 열리는 서울대 국제학생사역회의(ISMC) 포스터 캠퍼스 복음화에서 열방 제자화로 서울대 국제학생사역회의(ISMC, International Student Ministry Conference)가 오는 4월 17일(금) 오후 1시 서울대학교에서 2026년 봄 학기 연례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회의는 "후속양육"을 주제로, 국내에 유입되는 이주 유학생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 차세대 디아스포라 선교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비전 아래 열린다. ISMC는 캐나다 국제학생사역(ISMC Canada)의 사역 철학을 계승해 서울대 캠퍼스 안팎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한국 생활 적응을 지원하며, 제자훈련과 파송으로 이어지는 통합적 선교 사역을 펼쳐 왔다. 한국어 교실과 언어 교환 프로그램, 금요 소그룹 모임, 홈스테이·호스트 패밀리 연결, 문화 탐방 등 다양한 접근을 통해 유학생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형성해 온 것이 특징이다. 기독교 신자뿐 아니라 종교가 없거나 다른 신앙을 지닌 학생들도 참여하는 열린 공동체를 지향한다. 국내 외국인 유학생 수는 2025년 기준 25만 3,434명 Index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2025년 5월 현재 27만 5,580명을 넘어서는 등 매년 3만 명 이상의 증가세 Chartngraph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해외 선교지에 직접 나가지 않아도 '세계가 캠퍼스로 오는' 선교 환경이 열리고 있음을 방증한다. 자료 출처 : ChartnGraph 자료 화면 캡처 이만석·문창선·민경일 등 현장 전문가 총출동 이번 회의는 3부로 구성된다. 1부 기조연설에서는 1986년부터 이란에서 선교를 시작해 20년 가까이 현지에서 사역하며 이란인 300여 명에게 세례를 베푼 Kosinusa 이만석 선교사(한국이란인교회)가 설교를 맡는다. 이어 서울대 유학생 사역보고(Way Maker Project)가 발표된다. 2부 디아스포라 특강에서는 세 강사가 차례로 마이크를 잡는다. 문창선 목사(WiThee·NextMove 대표, MMTS 강사)는 이주민 리더 양육 및 파송 전략을, 민경일 선교사(대전 이주민 유학생 양육, MMTS 강사)는 이주 유학생 제자 교육 사례를, 전욱 목사(중앙아시아 유학생 센터 대표, MMTS 강사)는 이주민 후속 양육의 실제를 나눈다. 종합토론 주제도 "후속양육"으로, 권요한 선교사(서울대 학원선교사, ISMC 의장)가 사회를 맡는다. 3부 초청만찬(오후 6시)은 유학생 결신자들을 초대하는 시간이자, 서울대 학원 선교의 산증인 권요한 선교사의 파송 30주년을 감사하는 자리로 마련된다. 서울대 국제학생사역회의(ISMC) 행사가 개최되는 서울대학교 캠퍼스 풍경 ISMC·MMTS·KMC 연대로 선교 생태계 구축 이번 행사는 ISMC와 MMTS(이동선교훈련학교), 코이노니아선교공동체(KMC), 서울대 Xee팀, 서울대 관악사채플(SNUDORCH) 등이 공동 주최한다. 여러 사역 단체가 연대해 유학생 전도와 제자화, 이주민 후속양육, 본국 귀환 선교로 이어지는 통합적 선교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사전 신청은온라인(bit.ly/3QiheLJ, 정원 내 선착순)으로 받으며, 문의는 1566-6842 또는 noncheon@gmail.com으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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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소식
    2026-04-07
  • 73개 교단, 부활의 이름으로 하나된 연합예배
    전쟁과 갈등, 경제적 불안이 세계를 뒤덮은 2026년 봄, 한국교회는 부활의 복음 아래 하나로 모였다. 4월 5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는 73개 교단이 연합한 역대 최대 규모의 한국교회 연합 행사로 기록됐다. '생명의 부활, 한반도의 평화'라는 주제 아래 진행된 이날 예배에서, 한국교회는 통일 이후 북한교회 회복을 위한 7원칙을 처음으로 공식 채택하며 통일 준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역대 최대 규모… 73개 교단, 교파 넘어 한 자리에 이번 예배는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주도했으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합동·백석·고신 등 국내 주요 교단들이 망라됐다. 대회장은 기하성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가 맡았고, 상임대회장으로는 기감 감독회장 김정석 감독을 비롯해 예장통합 정훈 목사, 예장합동 장봉생 목사, 기성 안성우 목사, 기장 이종화 목사, 기침 최인수 목사, 예장합신 김성규 목사 등 15개 주요 교단 총회장이 참여했다. 여기에 57개 교단장이 공동대회장을 맡아 명실상부한 범교단 연합 구조를 완성했다. 준비위원장 엄진용 목사(기하성 부총회장)와 공동 준비위원장 김일엽 목사(기침 총무)의 공동 주도하에 기획·예배·언론·홍보·재무 등 10개 위원회가 꾸려져 체계적으로 예배를 준비했다. 1부 예배는 예장통합 부총회장 권위영 목사의 인도로 시작되었으며, 사도신경 고백과 찬송, 광림교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연합찬양대의 장엄한 '할렐루야' 찬양이 부활의 기쁨을 가득 채웠다. 김정석 감독 “어둠 뚫고 오신 부활,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다” 말씀 선포는 상임대회장이자 한교총 대표회장인 김정석 감독(기감)이 맡았다. '부활 생명'(요한복음 20:19–23)이라는 제목으로 강단에 선 김 감독은 부활의 의미를 세 차원에서 풀어냈다. 첫째, 부활은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가져오는 사건이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웅크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시공간을 넘어 찾아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셨다. 김 감독은 '부활의 빛은 의심과 두려움, 불안의 어둠을 밝히고 치유와 생명을 준다'고 역설했다. 둘째, 부활은 절망 가운데 소망을 주는 사건이다. 김 감독은 위르겐 몰트만의 말을 인용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폐기의 시작'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을 끊어내는 '단절에 대한 단절'이며, 십자가 사건은 의심을 압도한 확신의 승리, 죽음을 압도한 생명의 승리라고 선언했다. 셋째, 부활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정의가 실현되고, 정치적 평화와 사회 발전, 자연계의 치유까지 아우르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설교를 마무리하며 '부활의 능력으로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되어, 국가 간·세대 간·젠더 간 갈등과 분열 속에서 참된 평안과 화해를 이루자'고 한국교회를 향해 힘주어 촉구했다. 교계 지도자들 목소리 “부활은 과거가 아닌 오늘의 능력” 대회장 이영훈 목사(기하성 대표회장)는 대회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오늘날 세계는 전쟁과 갈등, 경제적 불안과 가치의 혼란 속에 있으며 미래에 대한 염려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하며,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다시 일어설 힘을 주는 살아있는 진리'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섬기고 국민 대통합에 앞장서는 희망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했다. 환영사를 전한 소강석 목사(CBS 재단이사장·새에덴교회)는 1885년 부활절 아침 제물포 항에 상륙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헌신을 회고했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병원과 학교를 세워 신분 차별 철폐와 여성 인권 향상, 광복운동에 기여했다'며, '부활의 축복이 이너서클의 전유물이 돼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부활의 메시지가 절망을 넘는 소망, 분열을 넘는 화해, 어둠을 밝히는 생명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소강석 목사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환영사가 문제가 되었다. 소 목사의 이재명에 대한 언사가 과유불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베가 끝난 뒤에 이재명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예배 중에 등단한 것은 매우 정치적인 비판이 일고 있다. 준비위원장 엄진용 목사는 '이번 예배는 한반도 평화라는 책임을 안고 진행된다'며 '막힌 담을 허무시는 예수님의 부활이 남북한 복음 통일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밝혔다. 공동 준비위원장 김일엽 목사 역시 '서로의 다름을 넘어 하나의 몸으로 모인 교회의 연합이 곧 부활의 증거이며 복음 화해를 선포하는 공동체의 사명'이라고 확인했다. 네 가지 주제 기도와 부활절 선언문 낭독 이날 예배에서는 '부활·평화·사랑·섬김'의 네 가지 테마로 뜨거운 기도가 이어졌다. 최형영 목사(나성 총회감독)는 소외된 이들에게 부활의 참 기쁨이 전해지기를 기도했고, 정기원 목사(그교협교역자 총회장)는 전쟁과 파괴가 멈추고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간구했다. 안상운 목사(예장 호헌 총회장)는 사랑으로 민족을 변화시킬 것을 다짐했으며, 신용현 목사(예장 개혁개신 총회장)는 연약한 자를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어 안성우 목사(기성 총회장)의 인도로 참석자 전원이 통성기도를 드렸다. 2부 축하·결단 순서에서는 김동기 목사(예장 백석 총회장), 정정인 목사(예장 대신 총회장), 홍사진 목사(예성 총회장)가 '부활절 선언문'을 함께 낭독했다. 선언문은 우리 사회의 이기심과 혐오, 갈등을 참회하는 내용으로 시작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부활 복음을 통한 사회 치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공적 책임 △한반도와 세계의 화해 기원 △다음 세대를 위한 신앙 유산 전수 등 다섯 가지 결단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장종현 대표총회장(예장 백석)의 축도로 1부 예배를 마치고, 김병윤 사관(구세군 사령관)의 파송 기도로 전체 행사가 마무리됐다. 사회적 약자 위해 1억 원 전달… 부활의 공적 책임 실천 준비위원회는 예배의 의미를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가고자 1억 원의 후원금을 국제구호개발 NGO '굿피플'에 전달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와 우원식 국회의장, 여야 정치인들도 참석한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한국교회가 평화와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앞장서 줄 것을 당부했다. 북한교회 회복 7원칙 공식 채택… 통일 준비의 첫걸음 이번 연합예배의 가장 큰 역사적 의미는 '통일 이후 북한교회 회복을 위한 7원칙'을 한국교회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 채택했다는 데 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학계와 각 분야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마련한 이 원칙은, 1995년 한기총 북한교회재건위원회가 확인·집계한 해방 이전 북한 교회 2,850개소의 재건 방향을 구체화한 것이다. 준비위원회 측은 '독일 통일이 도적같이 임했던 것처럼, 갑자기 닥칠 통일에 대비해 무너진 북한 교회의 회복 원칙을 미리 세우는 것이 통일 준비의 첫걸음'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채택된 7원칙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북한 지하교회 중심의 재건 지난 75년간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을 북한교회 재건과 선교의 주역으로 삼는다. ② 한국교회의 섬기는 역할 남한의 한국교회는 주도적 자세를 버리고 철저히 외부인의 위치에서 북한교회 재건을 돕고 섬기는 지원자 역할을 담당한다. ③ 교단 연합·협력 모델 구축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시행했던 선교지 분할정책과 같은 긍정적 교단 연합·협력 모델을 창출한다. ④ '한국 기독교' 이름으로 통합 진행 개교단주의를 철저히 배제하고, 해방 전 교회 역사와 교단 분포를 참고하여 단일화된 '한국 기독교'의 이름으로 교회 회복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⑤ 글로벌 선교 기회 창출 북한교회의 회복을 마중물 삼아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글로벌 선교의 새로운 기회를 창출한다. ⑥ 민족 동질성 회복 및 세계 선교 협력 남한 교회는 재건된 북한교회와 긴밀히 협력해 분단으로 훼손된 민족 동질성 회복에 앞장서며, 세계 선교 사명을 함께 완수한다. ⑦ 순수 복음 전파와 성경적 원형 회복 자교단 교세 확장을 엄격히 지양하고 순수 복음이 전파되도록 공동 노력한다. 화려한 건물 건축에 재정을 낭비하지 않고 성경이 보여주는 참된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는 데 방점을 둔다. 이번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는 단순한 절기 행사를 넘어섰다. '한반도 평화'를 공식 주제로 선포하고, 북한교회 회복 7원칙을 통해 통일을 향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절망의 시대에 생명의 빛으로 다가온 부활의 메시지가 신학적 선언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섬김과 한반도 평화라는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귀중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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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소식
    2026-04-06
  • 서울 도심 뒤덮은 '거룩한 방파제'… 10만 신앙인, 차별금지법 반대 외쳐
    ▲전국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시청광장의 집회에 참석하여 22대국회 차별금지법 반대 거룩한방파제통합국민대회에 참석하였다. 3월 28일 오후, 서울 시청광장에서 대한문을 거쳐 광화문과 효자동에 이르는 세종대로 일대가 거대한 인파로 가득 찼다. '22대 국회 차별금지법 반대 거룩한방파제 통합국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성도와 시민 약 10만 명(주최 측 추산)은 동일한 메시지를 외쳤다.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신앙·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입법 시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집회는 22대 국회에서 손솔 진보당 의원과 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이 각각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우려를 배경으로 마련됐다. 주최 측은 이 법안들에 대해 '2007년 이후 발의된 차별금지법안 가운데 가장 강력한 규제와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고 평가하며,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등을 차별금지 사유에 포함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표현조차 제재 대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구조를 핵심 문제로 지적했다. 기도에서 행진까지… 신앙과 저항의 4부 구성 대회는 총 4부로 구성됐다. 오후 1시 30분 연합기도회로 시작된 집회는 홍호수 목사(거룩한방파제 사무총장)의 사회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회개와 거룩을 위한 기도, 한국 대통령과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 등 7개의 특별기도가 이어졌다. 이후 예배와 국민대회, 그리고 도심 퍼레이드가 순서대로 진행되며, 기도와 찬양으로 시작된 현장은 점차 신앙적 고백과 사회적 문제의식이 결합된 공간으로 확장됐다. ▲박한수 목사는 1부 설교에서 한국교회가 깨어서 국회의 발의된 차별금지법을 막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제1부 설교를 맡은 박한수 목사(제자광성교회·거룩한방파제 특별위원장)는 로마서 13장 11~12절을 본문으로 '지금은 깨어야 할 때'를 강조하며 한국교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는 '22대 국회에서 발의된 차별금지법은 역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역차별과 처벌 조항을 담고 있다'며, '이 법이 통과되면 성경에 입각한 설교가 혐오 표현으로 처벌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악으로 악에 맞서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며 악한 법을 막아내는 것이 나라와 교회와 후대를 지키는 길이라고 호소했다. 제2부 예배에서는 김운성 목사(영락교회·거룩한방파제 대표회장)가 열왕기상 19장 18절을 본문으로 '이 시대 칠천명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차별금지법의 이름은 듣기 좋지만 그 안에 담긴 독성을 모르는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호소하며, '한국교회가 함께 깨어 거룩한 방파제가 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축도를 맡은 박조준 목사(국제독립교회연합회 설립자)는 차별금지법을 창세기의 선악과에 빗대어 '듣기에 달콤하나 그 뒤에 악법이 있다'고 경고했다. 성명서 발표… "위헌적 악법, 즉각 철회하라" 제3부 국민대회에서는 이용희 교수(에스더기도운동·거룩한방파제 준비위원장), 길원평 교수(진평연), 조영길·지영준 변호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차별금지법의 문제점을 법리적·사회적 측면에서 집중 발표했다. 특히 법안에 포함된 시정명령 불이행 시 3천만 원 한도의 이행강제금 무제한 부과, 반복 위반에 따른 최소 500만 원 이상의 손해배상, 형사처벌 가능성, 입증책임 전환 등의 제재 구조가 법치주의 원칙과 충돌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날 발표된 성명서는 집회의 문제의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성명서는 해당 법안이 표현과 신념의 자유를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교육 현장에서 특정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나 토론이 제한될 경우 미래세대의 가치 형성 과정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대규모 집단소송이 제기되면 천문학적 배상의무가 발생해 동성애 반대 설교를 한 개인과 교회들이 경제적 파산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준비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손솔 의원과 정춘생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의 위헌성·반민주성을 규탄하고, 국가와 미래 세대에 끼칠 재앙과 같은 해악을 경고하며, 차별금지법 발의를 즉각 중단·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이날 집회는 예배를 시작으로 제4부에는 광화문을 출발하여 효자사거리까지 약 2km구간을 행진하였다. 광화문 행진으로 대단원… 전국 순회 집회의 정점 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된 제4부 퍼레이드는 광화문을 출발해 동화면세점, 광화문사거리, 경복궁역사거리, 신교동교차로를 거쳐 효자 치안센터 앞까지 약 2km 구간을 행진했다. 흰색 티셔츠를 입은 참가자들이 파란색 깃발과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으며, 가족 단위 참가자와 청년층이 함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대규모 인파에도 질서 있는 이동이 이어졌고, 행진 종착지에서는 참가자들이 손을 맞잡고 나라와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번 서울 집회는 지난 2월부터 광주·부산·대구·대전·전주 등 주요 도시를 돌며 이어온 전국 순회 집회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주최 측은 2024년 10월 서울 도심과 여의도 일대에서 100만 명 이상이 운집했던 집회와, 2025년 6월 30만 명 규모의 서울퀴어반대대회를 상기하며 국민적 반대 의사가 지속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이번 집회는 교계와 시민사회가 단순한 반대 표현을 넘어 법리와 정책, 여론까지 아우르는 조직적 대응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울 도심을 가득 메운 10만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남겼다. 준비위원회는 '국민의 건강한 가정과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해 관련 입법 시도에 지속적으로 대응하겠다'며 '깨어있는 국민들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임을 거듭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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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소식
    2026-03-29
  • 나이지리아의 '크리스천 제노사이드'
    출처: 국제기독교연대(ICC,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2026년 3월 발표 보고서 2023년 크리스마스 이브, 나이지리아 미들벨트(Middle Belt) 지역의 작은 기독교인 마을들에 무장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자행된 학살 속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교회는 불탔고, 살아남은 이들은 짐승처럼 마을을 탈출해야 했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반응은 '유목민과 농부 사이의 토지 분쟁'이라는 상투적인 설명이었다. 그러나 국제기독교연대(ICC)가 2026년 3월 발표한 최신 보고서는 이 '설명'이 얼마나 교묘하고 위험한 거짓인지를 낱낱이 폭로했다. ICC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이후 나이지리아에서 표적 폭력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약 53,000명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지역 분쟁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수치다. 학살의 패턴은 일관되다. 공격 대상은 기독교인 마을이고, 교회와 성직자가 집중 표적이 되며, 생존자들은 영구 이주를 강요받는다. 2025년 말 현재 국내 실향민(IDP) 수는 350만 명에 육박하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적 이유로 쫓겨난 기독교인들이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시민을 국가 스스로 방치하고, 때로는 가해 세력에 문을 열어주고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본 기사는 ICC의 2026년 3월 보고서를 토대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의 실태와 구조적 원인, 그리고 국제사회의 책임을 심층 분석한다. 단순한 종교 갈등이 아니라 '국가 포획(State Capture)'에 의한 체계적 제노사이드가 진행되고 있다는 ICC의 충격적 진단을 정면으로 들여다본다. 1.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기만적 서사: 국제사회를 호도하는 정치적 위장 나이지리아 정부가 수십 년째 반복해온 서사가 있다. '목초지를 둘러싼 농부와 풀라니(Fulani) 유목민 사이의 전통적 갈등'이라는 설명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사막화가 유목민들의 남하를 부추기고, 이것이 농경 공동체와의 마찰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이 설명은, 그러나 실제 현장의 증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성직자 살해와 교회 파괴 — 이것이 '토지 분쟁'인가 ICC 2026년 보고서는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목초지를 얻기 위한 싸움이라면 굳이 기독교 성직자를 조직적으로 살해하거나 교회를 불태울 이유가 없다. 2025년 야하야 캄바사야(Yahaya Kambasaya) 목사가 살해된 사건은 그 단적인 예다. 무장 세력이 그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땅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를 제거하는 표적 행위였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미들벨트 전역에서 반복되고 있다. 학술적 분석 역시 이 분쟁의 주된 동인이 '민족-종교적 요인'임을 일관되게 지목한다. 공격자들이 습격 과정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수사(修辭)는 지하디스트적 성격을 띤다. '이슬람의 땅을 이교도로부터 되찾는다'는 종교적 정당화 담론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소를 얻기 위한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종교적 정화(purification)를 향한 이념적 동기가 폭력의 근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기만적 서사가 국제사회에서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 서방 언론들이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설명을 검증 없이 전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살의 가해자들에게 국제적 면죄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ICC 보고서는 이를 가리켜 '의도치 않은 공모'라고 표현한다. 언론의 무비판적 보도가 제노사이드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 요인 중 하나라는 경고다.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가 이주를 촉진하는 요인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ICC는 이것이 조직적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배경 조건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기후 갈등론'은 나이지리아 정부가 국제사회의 시선을 돌리고, 제노사이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적 도구라는 것이다. 이 신화를 걷어내지 않는 한, 진정한 해법은 요원하다. ▶ 핵심 수치 2009년 이후 표적 폭력으로 사망한 나이지리아 민간인: 약 53,000명 / 2023년 크리스마스 이브 학살: 기독교인 마을 집중 공격 / 2025년 말 국내 실향민(IDP): 약 350만 명 / 레아 샤리부(Leah Sharibu)를 포함한 납치 피해자 다수, 2025년 말까지도 미귀환 상태 (출처: ICC 2026년 3월 보고서) 2. 국가 포획(State Capture): 안보 기관을 장악한 이슬람 극단주의 나이지리아의 안보 위기는 단순한 국가 능력의 부재가 아니다. ICC 보고서가 제시하는 훨씬 더 충격적인 진단은 바로 '국가 포획(State Capture)'이다. 풀라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나이지리아 정부와 안보 기관 내부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으며, 국가 권력 자체가 이슬람주의 확장 의제를 위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심스러운 고위직 인사들 — 안보 체계의 이면 ICC 보고서는 세 명의 고위 인사를 특히 주목한다. 카심 셰티마(Kashim Shettima) 부통령, 누후 리바두(Nuhu Ribadu) 국가안보보좌관, 벨로 마타왈레(Bello Matawalle) 장관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슬람주의 확장론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들로, 현재 나이지리아 최고 안보 기구를 지휘하고 있다. 이들의 지휘 아래 군대가 학살, 처형, 마을 파괴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으나, 어떠한 사법적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안보 구조가 특정 민족-종교 집단에 의해 통제될 때, 전체 국민을 위한 중립적 보호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ICC는 이것이 단순한 부패나 무능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한다. 북부 엘리트 무슬림 집단이 전략적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국방 체계 내에서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조직적으로 배제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위협 정보가 담긴 정보 보고서들이 고위 안보 관리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무시되거나 은폐되는 현상이 이를 뒷받침한다. 아흐마드 구미 셰이크 — '병렬 외교'의 위험성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북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이 수행하는 이른바 '병렬 외교'다. 북부의 저명한 종교 지도자 아흐마드 구미(Ahmad Gumi) 셰이크는 반군과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협상 과정에서 무장 단체에 종교적 명분을 제공해왔다. 국가 공식 채널 밖에서 테러 단체에 신뢰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 '병렬 외교'는 사실상 반군 세력의 국제화를 돕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볼라 티누부(Bola Tinubu) 대통령이 이끄는 현 정부는 북부 이슬람 단체의 이익을 위해 기독교 소수자의 헌법적 권리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 ICC의 판단이다. '소수'라는 표현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나이지리아 기독교 인구가 전체의 약 40%에 달함에도 국가 보호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적 소수가 아니라 권력 구조 속의 소수, 즉 정치적 소외의 문제다. ICC 보고서는 이 구조적 편향이 야하야 캄바사야 목사 살해 사건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기독교 지도자가 살해되었음에도 나이지리아 국가는 어떠한 실질적 수사도,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기독교 공동체의 수호자가 아님을 넘어, 사실상 가해 세력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 ICC 보고서 핵심 개념: '국가 포획(State Capture)' 국가 포획이란 국가 권력 기관이 특정 집단의 사익을 위해 장악되는 현상을 말한다. ICC는 나이지리아에서 풀라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안보 기관을 통제할 정도로 정부에 침투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폭력이 처벌받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분석한다. 3. 범죄-테러의 결탁과 '피의 경제학': 납치·갈취로 돌아가는 잔혹한 생태계 나이지리아의 폭력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조직 범죄와 이슬람 테러리즘의 긴밀한 결탁이다. ICC 보고서는 이를 '피의 경제학(Blood Economy)'이라 규정한다. 범죄와 테러가 서로를 먹여 살리며, 그 희생양은 언제나 기독교 공동체라는 것이다. 산적 행위에서 지하디스트 자금원으로 — 진화하는 폭력의 구조 북부 나이지리아의 산적 행위(banditry)는 이제 단순한 범죄 문제가 아니다. ICC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산적 집단들은 더 큰 지하디스트 목표를 위한 자금 조달 및 전술적 지원의 원천으로 기능하고 있다. 납치, 갈취, 가축 약탈로 벌어들인 자금이 보코하람(Boko Haram)이나 이슬람국가 서아프리카 지부(ISWAP) 등 테러 조직의 자금줄로 흘러들어간다. 이 두 세력은 협력하여 기독교 다수 지역을 체계적으로 불안정화시키고 있다. 납치와 갈취를 통해 공동체 경제를 파괴하고, 그 재원으로 더 많은 무기와 인력을 조달한다. 2026년 현재까지도 이 악순환이 스스로를 영속화하고 있는 것은, 국가가 여전히 종교 폭력을 묵인하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ICC는 단언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안보 예산의 행방이다. 나이지리아는 방대한 규모의 안보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예산이 실제 공동체 보호에 사용되기보다는 위협이 지속되는 데 개인적 이해관계가 있는 관리들의 사적 이익으로 흘러들어가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다고 ICC는 고발한다. 안보 예산이 곧 부패와 공모의 연료가 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현대판 노예제도 — 납치와 인신매매의 공포 ICC 보고서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대규모 납치 문제다. 2009년 이후 납치범들은 수천 명의 어린이를 몸값이나 성 착취의 목적으로 붙잡아두었다. 이것은 현대판 노예제도라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기독교 학교와 종교 기관이 특별히 집중 표적이 되는 것은, 이 행위가 무작위적이 아니라 종교 공동체의 뿌리를 뽑으려는 전략적 의도를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4년 보코하람에 납치된 뒤 개종을 거부하고 11년이 넘도록 억류 중인 레아 샤리부(Leah Sharibu)의 사례는 이 비극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2025년 말까지도 그의 귀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막대한 몸값 없이는 지속적으로 납치 피해자를 구출하지 못하는 현실은, 주권 국가로서의 기본 의무가 얼마나 심각하게 붕괴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중의 고통 속에 있다. 폭력의 직접적 희생자가 되는 동시에, 자신들을 배신하는 안보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내야 한다. 이 구조적 모순이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이 처한 현실의 가장 비극적인 단면이다. 4. 900만 달러의 진실 은폐: 워싱턴 로비전의 민낯 나이지리아 정부의 대응은 두 가지 방향에서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폭력을 묵인하고, 국제무대에서는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ICC 보고서가 폭로한 워싱턴 로비 활동의 실태는 이 두 번째 전선의 충격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DCI 그룹에 900만 달러 — 제노사이드를 포장하는 글로벌 PR ICC에 따르면, 나이지리아 정부는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로비 회사 DCI 그룹(DCI Group)과 계약을 맺고 약 900만 달러를 지불했다. DCI 그룹의 역할은 나이지리아 내부 위기를 '윤색된 버전'으로 포장하여 미국 정책 입안자들과 언론에 유통시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종교적 박해의 흔적을 지우고, 미국 국무부가 나이지리아를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ountry of Particular Concern, CPC)'으로 지정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CPC 지정은 미국이 심각한 종교 자유 침해국에 부과하는 외교적 제재 수단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10월 나이지리아를 CPC로 지정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는 기독교 박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식적 인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의 집중적인 로비 활동은 이 지정을 무력화하거나 번복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이지리아 영부인의 워싱턴 방문이 이루어졌다. ICC는 이 방문이 잔혹 행위의 규모를 직접 부인하기 위한 대규모 외교 이니셔티브의 일부였다고 평가한다. 피해자들의 피로 얼룩진 현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턴에서는 수백만 달러짜리 '이미지 세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자원을 동원한 잔혹 행위 은폐 — 나이지리아 국민에 대한 이중 배신 ICC 보고서는 이 로비 활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써야 할 국가 자원이 그 자국민 학살의 실체를 감추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중적 배신이다. 나이지리아 국민에 대한 배신이자, 국제적 투명성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다. 전문 로비스트들은 미국 정책 입안자들에게 접근하여 나이지리아를 '안정적인 파트너' '테러와의 전쟁에서 협력하는 동맹'으로 포장한다. 이 과정에서 나이지리아의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 '테러'의 희생자라는 불편한 진실은 의도적으로 삭제된다. 국가가 테러를 묵인하는 동시에 테러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다. ICC는 국제 사회와 언론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선전을 검증 없이 전달하는 것을 중단하고, 현장의 피해자들을 직접 바라봐야 한다고. 입안자들은 값비싼 홍보 캠페인에 포장된 이미지가 아니라, 미들벨트의 폐허가 된 마을과 캠프를 가득 채운 실향민들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목할 사실 나이지리아 정부가 미국 로비에 지출한 900만 달러(DCI 그룹 계약금)는 미들벨트 학살 생존자들에게 제공된 심리 상담 예산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국제적 이미지 관리에는 수백만 달러를 쏟아붓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자국 기독교 생존자들을 위한 국가 지원은 사실상 전무하다. (ICC 2026년 3월 보고서) 5. 인도주의적 재난: 350만 실향민의 지워진 삶 숫자는 가끔 인간의 고통을 지운다. 53,000명의 사망자. 350만 명의 실향민. 수천 명의 납치 피해 어린이. 이 수치들 하나하나가 실존하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담고 있다. ICC 보고서는 통계 뒤에 가려진 인도주의적 재앙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기록한다. 트라우마와 방치 — 국가가 외면한 정신 건강 위기 미들벨트 지역의 학살 생존자들이 겪는 심리적 외상은 가늠하기 어렵다.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집을 빼앗기고, 낯선 곳으로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국가는 이들에게 어떠한 전문적 심리 지원도 제공하지 않는다. ICC 보고서는 이 심리적 공격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인구의 사기를 꺾고 영구적으로 몰아내려는 제노사이드 전략의 계산된 요소라고 분석한다. 강제 이주당한 기독교 공동체는 열악한 환경의 캠프로 내몰린다. 깨끗한 물도,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도 없는 과밀한 공간이다. 연구 결과들은 이 캠프에서의 높은 사망률이 중앙 정부의 의도적 방치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총에 맞지 않아도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절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ICC는 이것 역시 제노사이드의 일부라고 본다. 경제적 파괴 — 땅에서 뿌리뽑힌 공동체들 가축과 농장에 대한 표적 파괴는 미들벨트 기독교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을 영구적으로 무너뜨렸다. 이것은 전쟁의 우발적 부작용이 아니다. ICC의 갈등 종단 연구는 이 경제적 파괴가 기독교인들을 영구 이주하게 만들 목적으로 취해진 전략적 조치임을 보여준다. 빈곤과 기아는 총탄만큼 효과적인 '완만한 속도의 제노사이드(Slow-motion genocide)'다. 집도, 땅도, 생계 수단도 빼앗긴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다. 설령 폭력이 잠시 멈추더라도 그들의 공동체는 이미 지워지고 없을 것이다. ICC는 이 점에서 나이지리아에서 진행 중인 과정이 단순 분쟁이 아닌 집단학살의 요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한다. 350만 국내 실향민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들이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혹은 돌아갈 고향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은 불탔고, 교회는 파괴되었으며, 이웃들은 흩어지거나 죽었다. ICC 보고서는 이 인간적 참상을 국제사회가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 ICC 보고서 현황 요약 • 2009년 이후 표적 폭력 사망자: 약 53,000명 • 2025년 말 국내 실향민(IDP): 약 350만 명 • 기독교 학교·교회에 대한 집중 표적 공격 지속 • 국가 지원 심리 상담 프로그램: 사실상 전무 • 레아 샤리부 등 수천 명의 납치 피해자 미귀환 • 미들벨트 지역 경제 인프라: 심각한 영구 손상 6. 국제사회의 책임과 정책적 제언: ICC가 요구하는 6대 행동 ICC 2026년 3월 보고서는 국제사회, 특히 미국을 향해 구체적이고 강력한 행동을 요구한다. 외교적 수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압박과 제재를 통해 나이지리아 정부가 행동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① 나이지리아 CPC 지정 즉각 복원 트럼프 행정부가 2025년 10월 단행한 나이지리아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PC) 지정은 올바른 조치였다. ICC는 이 지정이 어떠한 정치적 이유로도 철회되어서는 안 되며, 조속히 복원·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CPC 지정은 나이지리아 정부가 종교 자유 침해에 대한 국제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외교적 신호다. ② 글로벌 마그니츠키법 적용 — 핵심 인사 제재 ICC는 이 위기의 설계자들에게 직접적 책임을 묻기 위해 미국의 글로벌 마그니츠키 인권 책임법(Global Magnitsky Human Rights Accountability Act)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은 행정명령 13818호의 권한을 사용하여 카심 셰티마 부통령, 누후 리바두 국가안보보좌관, 벨로 마타왈레 장관에 대해 자산 동결 및 비자 금지 조치를 즉각 시행해야 한다. 이러한 표적 제재는 이슬람 지하디스트 작전을 지원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직접적으로 교란할 것이다. ③ 미국의 안보 지원에 명확한 조건 부과 나이지리아에 대한 미국의 안보 지원은 무조건적으로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 ICC는 나이지리아가 차별 없이 모든 종교 집단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확한 조건 하에서만 안보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조건 없는 지원은 현재의 박해 구조를 사실상 보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④ 국제 언론의 비판적 보도 촉구 ICC는 국제 언론이 나이지리아 정부의 공식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관행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프레임을 검증 없이 전달하는 것은 의도치 않게 학살에 면죄부를 주는 행위다. 언론은 현장의 증인들과 독립적 연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나이지리아 정부가 900만 달러를 들여 구매한 '이야기'가 아니라 미들벨트의 피비린내 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⑤ 독립적 국제 조사 기구 구성 ICC는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 실태에 대한 독립적이고 공정한 국제 조사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독립 조사 기구를 유엔 차원에서 구성하고, 학살과 종교 청소의 증거를 체계적으로 문서화해야 한다. 이 기록은 향후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의 기소를 위한 법적 근거가 될 수 있다. ⑥ 인도주의적 지원 채널의 직접화 국제 인도주의 지원이 나이지리아 정부를 경유할 경우 박해받는 기독교 공동체에 실질적으로 닿지 못할 위험이 크다. ICC는 미들벨트 실향민 캠프에 대한 의료, 식량, 심리 지원이 나이지리아 정부를 우회하여 직접 전달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부패한 중간 경로를 차단하고 피해자들에게 직접 자원이 전달되는 투명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나이지리아 비극은 세계교회가 주목하고 기도해야 할 일이다. 이미지 AI제작 6. 한국 교회와 국제 기독교 공동체가 응답해야 할 이유 나이지리아의 비극은 지구 반대편의 먼 이야기가 아니다. 국제기독교연대(ICC)의 보고서는 단지 나이지리아 정부를 향한 고발장이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긴박한 호소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는 이 호소 앞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전 세계 박해 받는 기독교인의 연대 속에서 한국 교회는 역사적으로 박해와 순교의 경험을 가진 공동체다. 일제 강점기의 신사 참배 거부, 6·25 전쟁 중의 순교자들, 그리고 현재도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지하 교회 성도들. 이 역사적 경험은 한국 교회에 박해받는 형제자매들의 고통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응답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ICC와 같은 국제 기독교 인권 단체들이 발간하는 보고서를 적극적으로 주목하고, 교회 안에서 이를 교육하고 기도 제목으로 삼는 것은 한국 교회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국제 인도주의 지원에 동참하는 것이다. 종교 자유는 보편적 가치 — 침묵은 공모다 종교의 자유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보장받아야 할 보편적 기본권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박해를 받는 종교 집단은 기독교인들이다. 오픈도어스(Open Doors)의 세계기독교박해지수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 보고서들이 매년 이 현실을 확인해준다. 나이지리아의 기독교인 학살에 국제사회가 침묵하는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일종의 공모다. 가해자들에게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도 자신들의 편이 없다는 절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ICC 보고서가 강조하듯, '세계의 침묵은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을 멸절시키는 궁극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 침묵을 깨는 목소리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나이지리아의 종교 자유 상황에 관심을 촉구하고, 외교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의 기독교 공동체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 결론: 국가가 배신한 사람들에게 세계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ICC 2026년 3월 보고서가 폭로한 나이지리아의 현실은 인류의 양심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53,000명의 사망자, 350만 명의 실향민, 수천 명의 납치 피해 어린이, 그리고 국가가 방조하는 조직적 종교 학살. 이것은 '불가피한 공동체 마찰'이 아니다. 극단주의자들의 이익에 의해 장악된 국가가 생산해낸 인재(人災)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제도적 무관심, 안보 기관 내부의 공모, 그리고 900만 달러짜리 국제적 오보 공세의 삼각 편대를 통해 자국의 기독교 인구를 사실상 제노사이드에 내맡겨왔다. '농부-유목민 갈등'이라는 기만적 서사는 국제사회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의도적 방어막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CPC 지정은 올바른 방향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작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마그니츠키 제재, 조건부 안보 지원, 독립 국제 조사, 직접적 인도주의 지원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통합된 국제적 압박으로 이어져야 한다. ICC는 국제사회가 국가 행위자들을 단죄하지 않는 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희생자들의 비명은 지금도 미들벨트의 폐허 위에서 울리고 있다. 외교적 편의가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가 응답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 보고서 출처 및 참고 - 국제기독교연대(ICC, International Christian Concern) 2026년 3월 발표 보고서: 나이지리아 기독교인 박해 실태 및 국가 포획 분석 - ICC 웹사이트: persecution.org | 2026년 3월 보고서 전문 게재 - 미국 글로벌 마그니츠키 인권 책임법(Global Magnitsky Human Rights Accountability Act) / 행정명령 13818호 - 미국 국무부 종교자유 특별우려국(CPC) 지정 제도 관련 자료 - 오픈도어스(Open Doors) 세계기독교박해지수(World Watch List) ※ 이 기사는 국제기독교연대(ICC) 2026년 3월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된 심층 기획 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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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외소식
    2026-03-28
  • “성경적 창조 질서 수호, 선지자적 사명으로 다음 세대 깨우자”
    ▲거룩한방파제 대표회장 이·취임식이 지난 22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엄숙하고 뜻깊게 거행됐다. 세속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한국교회의 영적 순결을 지키고 다음 세대를 보호하기 위한 ‘거룩한방파제’의 사명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거룩한방파제는 지난 22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대표회장 이·취임식을 거행하고, 제7대 대표회장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의 이임과 제8대 대표회장 김운성 목사(영락교회)의 취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번 이·취임식은 단순한 리더십의 교체를 넘어, 시대적 소명인 ‘성경적 절대 가치 사수’라는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결단의 장이었다. 오정호 목사의 3년, ‘거룩한 방어선’ 구축의 밀알 되다 이임하는 오정호 목사는 지난 3년간 포괄적 차별금지법, 동성애 퀴어축제, 학생인권조례 등 반성경적 조류에 맞서 한국교회의 최선봉에서 헌신해 왔다. 특히 오 목사는 주최 측 추산 30만 명이 운집하며 한국교회의 저력을 보여준 ‘거룩한방파제 통합국민대회’를 진두지휘하며 대한문 일대에 거대한 영적 방파제를 구축했다. 또한 전국 단위의 국토순례 특별기도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이 운동이 전국적인 연합 사역으로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오 목사는 이임사를 통해 “한국교회와 다음 세대를 위해 함께 헌신해 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눈물 어린 동역이 있었기에 이 사역이 가능했다”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거룩한방파제 대표회장 이·취임식이 지난 3월 22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거행됐다(왼쪽은 7대 대표회장 오정호 목사 오른쪽은 8대 대표회장 김운성 목사) 김운성 목사, “하나님의 뜻 전하는 ‘선지자적 소리’ 낼 것” 새롭게 키를 잡은 제8대 대표회장 김운성 목사는 사사기 6장을 인용한 설교를 통해 거룩한방파제가 나아갈 본질적인 방향성을 제시했다.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위기 때마다 영웅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는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다”며 사역의 본질을 역설했다. 그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단순한 정치적 대응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말하는 선지자적 사명”이라며, “시대가 변해도 진리를 전하는 사명은 끝나지 않기에, 우리는 영웅이 아닌 선지자의 외침을 감당하는 자들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취임사에서는 “앞선 사역자들의 고귀한 헌신을 이어받아 무거운 책임감으로 기도의 동역자들과 함께 나아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교계 인사들, “다음 세대 위한 영적 유산… 시대적 필연 사역” 격려 이날 행사에는 교계 및 정계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해 거룩한방파제의 사역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예장합동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는 축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합당한 사람을 세워 당신의 사명을 이루신다”며 “거룩한방파제는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소중하고도 중요한 영적 유산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어 대전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류명렬 목사는 “이 사역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가치 있는 사역”이라며 “한국교회와 창조 질서를 수호하는 든든한 영적 보루로서 그 역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복음법률가회 대표 조배숙 의원 역시 “누구나 쉽게 나설 수 없는 좁은 길이지만, 다음 세대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이라며 거룩한방파제의 사명감을 높이 평가했다. 이번 리더십 교체를 기점으로 거룩한방파제는 오정호 목사가 닦아온 연합의 토대 위에 김운성 목사의 선지자적 영성을 더해, 더욱 강력한 성경 수호 운동을 전개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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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5

길과생명연구소 검색결과

  • '극우 몰이와 극우 프레임'의 함정을 극복하라
    들어가며 : 낙인은 진리가 아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가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2024년 12·3 비상계엄 선포를 전후하여, 이를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 이 단어가 집중 포화처럼 쏟아지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의 이른바 진보 진영 단체들은 일부 목회자들을 향해 '극우 선동'이라 규정하고, 나아가 보수 성향의 일반 성도들과 교회를 향해서도 '극우'의 이름표를 붙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극우'는 과연 중립적이고 정확한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을 막고 교회 안에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적 무기인가? 한 집단을 '극우'라 부르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도덕으로 포장하는 선동인가? 본고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극우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방향을 모색한다. 1. '극우'라는 단어의 정치적 폭력성극우의 개념적 정의와 그 한계 학문적으로 '극우(extreme right / far-right)'는 단순히 보수적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극우의 핵심적 특징으로는 초보수주의, 권위주의, 국수주의, 극단적·폭력적 반공주의, 에스닉 내셔널리즘, 극단적 반이민 정서 등이 꼽힌다. 무엇보다 극단(極端)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폭력성'과 '반민주적 전체주의'가 극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극우를 대표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다. 단순한 정치적 보수주의나 특정 지도자 지지가 곧 극우를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목회데이터연구소와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이 2025년 공동 발표한 '한국 개신교의 정치 문화 지형 조사'에 따르면,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국민저항권'이라 정당화한 응답자를 극우로 분류했을 때, 한국교회 내 극우 비율은 교인 13.5%, 목회자 12.9%에 그쳤다. 즉 한국교회 내 다수는 극우와 거리가 먼 보수 내지 중도층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극우 교회', '극우 목사'라는 표현이 언론과 진보 교계 단체들에 의해 마치 한국교회 전체를 규정하는 언어인 양 사용되고 있다. 낙인 이론으로 보는 '극우' 프레임 사회학자 베커(Becker, 1963)의 '라벨링 이론(labeling theory)'은 이 문제를 정확히 설명해 준다. 보수적 입장을 '극우'로 규정하는 언어 전략은 단순한 수사를 넘어 '정치적 라벨링의 기능'을 수행한다. 한 번 '극우'라는 라벨이 붙으면, 해당 인물이나 단체는 무슨 주장을 하든 편견과 혐오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기 쉽다. 이처럼 라벨은 개별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했는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극우'라는 프레이밍은 상대 집단을 향한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을 조성한다. 특정 집단이나 의견이 언론을 통해 '사회적 위협'으로 묘사될 때, 대중은 이를 과잉 반응하며 공포와 배제의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거나, 안보를 중시하고, 전통적 가치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자동으로 '반민주', '혐오적', '위험한 극단주의'로 포장될 때, 이는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사람의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 된다. 2.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몰이'가 작동하는 방식비판에서 낙인찍기로의 전환 12·3 계엄 이후 한국교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정당한 비판의 영역을 넘어섰다. 기윤실과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주도한 기자회견에서 이들은 보수 성향 목회자들을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권'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범주에 포함된 것처럼 몰아갔다. 물론 계엄을 법적·헌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다. 그러나 '계엄이 불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탄핵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신앙적·정치적 소신을 가진 성도와 목사를 '극우'로 낙인찍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진보 진영은 스스로를 '정의'와 '공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극우'로 배치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교회 안에 만들어냈다. 이는 신앙의 언어를 빌린 정치적 선동이다. 기윤실 등이 성명에서 계속 사용하는 '공의', '회개', '내란 부역'이라는 표현들은 신학적 언어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동일시하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교회 내 분열을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의 구조 교회개혁실천연대와 기윤실 등의 성명 패턴을 들여다보면 일정한 논리 구조가 드러난다. 첫째,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계엄=내란, 지지=부역)을 성경적 진리로 선언한다. 둘째, 이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극우', '거짓 선지자', '내란 선동자'로 규정한다. 셋째, 이러한 규정을 근거로 교회 안에서의 단절과 배제를 '예언자적 사명'으로 정당화한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개혁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정치적으로 분열시키는 선동의 구조다.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의 분석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극우적 입장을 과잉 조명하면 중도층도 극우 견해에 동조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역설이다. 극우를 문제삼겠다는 진보 진영의 과잉 프레이밍이 오히려 극우적 성향을 강화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반면, 진보 개신교인이 정치에 참여할 때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보수 교회=극우'라는 편향된 인상이 굳어지게 된다. 3. 선동적 극우 프레임이 교회에 미치는 해악신앙 공동체의 해체와 언어 폭력 교회 안에서 '극우'라는 언어가 무기처럼 사용될 때, 그 첫 번째 피해는 신앙 공동체의 신뢰다. 세대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예배하고, 섬기며, 기도해 온 공동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극우'와 '정의파'로 나뉠 때, 교회는 더 이상 복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전장이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낙인찍기는 언어 폭력의 성격을 띤다.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계엄의 합법성에 다른 견해를 가진 성도를 '내란 부역자'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다년간의 신앙 여정과 인격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한국교회의 역사와 전통, 보수 신학의 토양 위에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루아침에 '극우'로 규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심각한 영적 폭력이다. 복음의 공간을 정치로 잠식하는 위험 교회는 본질적으로 정치 집단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데올로기나 보수·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된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보수주의자이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이 활발히 사용될수록, 복음이 울려야 할 공간을 정치 담론이 잠식하게 된다. 기윤실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이 원래는 복음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여야 한다. 정치적 입장을 '교회의 공의'로 포장할 때, 교회는 세상의 다른 정치 세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한국교회 대외 신뢰도의 추가 하락 아이러니하게도 '극우' 프레임을 남발하는 쪽이 한국교회의 외부 신뢰도 하락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교계 내부에서 서로를 '극우'라 부르는 모습은 사회 일반에게 한국교회가 이념 대결로 분열된 집단이라는 인상을 준다. 복음주의 교계 지도자들 스스로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교회가 거짓과 불법을 추종하는 극우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오인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교회 밖에서 보는 시선은 '정의파'와 '극우파'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교회는 그저 정치 싸움을 하는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4. 비판과 낙인의 경계를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정당한 비판과 선동적 낙인의 차이 물론 한국교회 안에 실제로 성경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행태가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부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설교단에서 쏟아내거나, 신도들을 정치 집회에 동원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미화하는 발언을 했다면, 이는 교회 내에서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과 낙인찍기는 엄연히 다르다. 비판은 구체적인 행동과 발언을 대상으로 하고, 당사자가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낙인찍기는 정체성 전체를 타겟으로 삼아 배제와 혐오의 언어로 몰아간다. 특정 목사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면 그 발언을 비판해야지, '극우 목사', '극우 교회'라고 낙인찍어 그 사람과 그 공동체 전체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는 기독교적 가치와 배치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책망하되 소망을 가지고 온유한 영으로 회복시키라고 가르친다(갈 6:1). 정치적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의 역량 성경은 정치 제도나 정당을 지정해 주지 않는다. 로마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이 권세에 순종하라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것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무조건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는 기능으로서의 국가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으로부터 '윤석열 지지'를 도출하거나 '윤석열 반대'를 도출하는 것은 모두 성경 본문의 과도한 정치화다.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품어왔다. 반공주의의 토양 위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다양성은 교회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복음은 좌도 우도 아니다. 복음은 정치를 초월하여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교회가 이 보편성을 잃고 특정 정치 진영의 도구가 될 때, 그것이 진보든 보수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한다. 5. 해결 방안 : 프레임을 넘어 복음으로첫째, 언어의 회복 — '극우' 대신 구체적 기술로 교계 안에서 '극우'라는 단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만약 비판이 필요하다면, 극우라는 일반화된 낙인 대신 구체적 행동과 발언을 기술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전광훈 목사의 이러이러한 발언은 폭력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설교 도중 신도 폄훼 발언은 사목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방식의 구체적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을 '극우 목사들'이라는 통칭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언어의 부정직함이다. 둘째, 교회 내 정치 다양성의 존중과 복음적 원칙의 재확인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복음 위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임을 재확인해야 한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형제자매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는 교회론적으로 심각한 문제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보수도 진보도, 탄핵 찬성도 반대도 있을 수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 판단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셋째, 교계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수립 기윤실, 교회개혁실천연대 등 교계 기관들은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단정적 성명을 내기 전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명의 언어가 신앙적 권위를 빌려 정치적 입장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읽힐 때, 그 기관의 공신력은 오히려 추락한다.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가르쳤듯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살아갈 때다. 교계 기관은 정치 운동의 외곽 기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여야 한다. 넷째,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 비판의 문화 형성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차이를 감정적 낙인이나 윤리적 비난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토론과 사실 기반의 비판으로 풀어가는 성숙한 교회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 목회자들도 설교단에서 정치적 발언을 할 때 그것이 신앙 고백적 차원인지, 단순한 정치적 선호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고, 신중하게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성도들도 다양한 견해를 가진 형제자매를 '극우' 혹은 '좌파 프락치'라고 몰아가는 진영 논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다섯째,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재정립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극우 프레임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길은, 세상의 정치 논리보다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대한민국의 시민이다. 우리의 일차적 정체성이 정치 진영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임을 확인할 때, '극우' 혹은 '좌파'라는 세상의 레이블은 그 힘을 잃는다.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정치 프레임은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나가며 : 교회는 프레임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극우 프레임'을 씌우는 선동적 움직임은 여러 차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부정확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하며,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당한 비판을 넘어 집단 낙인찍기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선동이 된다. '정의'와 '공의'를 외치면서 형제자매를 배제하고, '교회 개혁'의 이름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성경적 예언자 사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쪽 저쪽을 향한 정치적 성명이 아니다. 교회는 좌도 우도 아닌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한다. 세상의 정치가 교회를 분열시키려 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 분열에 저항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의 말씀대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다. 극우 프레임을 넘어서는 힘은 더 강한 정치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복음에서 온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말할 때, 세상의 모든 프레임은 무력해진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낙인찍기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 길과생명연구소
    2026-04-10
  • 거대 전체주의 연합의 등장과 기독교 문명의 위기
    2026년4월 세계 정국 분석 [길과 생명:양봉식 국장]지금 세계는 단순한 이념 갈등이나 지정학적 패권 경쟁을 넘어, 훨씬 더 근원적인 문명적·영적 충돌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한편에는 기독교 문명에 뿌리를 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질서를 해체하려는 복합적인 전체주의 연합 세력이 있다. 공산주의, 좌파 사회주의, 워키즘(Wokeism), 이슬람 전체주의 세력이 공통의 적—곧 기독교 문명—을 타도하기 위해 전례 없는 방식으로 결탁하고 있다. 본 분석기획은 이 충돌의 구도와 실체, 그리고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가 어떻게 인식하고 응전해야 할 것인지를 심층 검토한다. Ⅰ. 서론: 문명의 충돌인가, 영적 전쟁인가 20세기는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으로 규정됐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된 지 불과35년, 21세기 세계는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명 충돌의 전선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경제적 패권 다툼이 아니다. 인류 문명의 기초 가치—인간의 존엄, 가족의 신성성, 국가의 정체성, 신앙의 자유—를 둘러싼 전쟁이다. 새뮤얼 헌팅턴 교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하버드 대학교의 고(故)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교수는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에서 21세기 세계의 주요 갈등이 이념 간이 아닌 문명 간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특히 이슬람 문명과 서구 기독교 문명 사이의 충돌 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그로부터3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헌팅턴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선이 복합화·다층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 정국을 단순히 지정학적 대결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인 접근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이 대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존엄"을 전제한 기독교 문명과, 그 전제를 파괴하려는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 사이의 영적 싸움이다. 한국교회는 이 구도를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 누구와 연대해야 할 것인지, 어떤 가치 위에 서야 할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시점이다. Ⅱ. 전 세계적 갈등의 양대 구도: 두 문명의 충돌 1. 기독교 문명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진영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서 비롯된다는 성경적 인식, 권력은 분산되어야 한다는 청교도적 정치관,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세속 권력이 침해할 수 없다는 종교개혁적 유산—이 모두가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했다. 오늘날 이 문명 진영의 핵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비록 많은 내부 모순과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헌법적으로 신앙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가장 강력하게 보호하는 국가이다. 트럼프2기 행정부(2025~)는 출범과 함께 기독교적 보수주의를 국가 정책의 방향으로 채택하는 신호를 보냈다. 헤리티지 재단이 주도하는 프로젝트2025(Project 2025)에는 기독교 문명 가치에 기반한 정부 재편 구상이 담겨 있다. 이를 진보 진영은 기독교 민족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보수 진영은 건국의 정신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 문명 진영의 핵심 구성원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수많은 권위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일하게 삼권분립, 의회민주주의, 사법부 독립을 제도적으로 유지하는 국가이다. 의원내각제 공화국인 이스라엘의 의회(크네세트)는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차례의 쿠데타나 불법 권력 장악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이는 중동 전체를 통틀어 키프로스와 함께 가장 양호한 민주주의 지수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한국의 건강한 우파 세력 역시 이 진영에 속한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선교의 결과물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건국의 정신과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보수주의 세력이 이 문명 진영의 동아시아 파트너이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신앙을 지켜왔다는 역사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2. 전체주의적 결합 세력의 등장 반대편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연합 세력이 형성되고 있다. 이 진영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워키즘, LGBTQ 이데올로기, 급진 페미니즘, 환경 급진주의, 이슬람 전체주의,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들(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느슨하지만 실질적으로 결탁한 집합체이다. 이들 세력이 하나로 묶이는 논리는 단순하다. 공통의 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공통의 적은 바로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서구 자유민주주의 질서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념적 차이—예컨대 이슬람 전통주의와LGBTQ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다—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 헤게모니"라는 공동의 표적 앞에서 전략적 동맹을 맺고 있다. "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통의 적 앞에서 연합하는 것—이것이21세기 전체주의 연합의 핵심 작동 원리다." 국제 정치 층위에서는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이 이른바"반서방 연대"를 구축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의2026년 국제정세전망(2026년1월)에 따르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은"미국의 동맹 네트워크 내 불안감을 이용해 권위주의 체제들 간의 결속을 모색하는 한편,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들을 공략"하고 있다. 2025년7월 제17차BRICS 정상회의에서는 미국의 이란 핵시설 타격과 가자 지역 작전에 대한 규탄이 이루어지면서 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재확인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가치 전쟁 구도 속에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 협조해야 할 동기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중-러 3각 연대가 가시적 형태로 공고화되면서, 이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Ⅲ. 이슬람화와 정체성의 위기: 유럽이 보내는 경고 1. 인구 통계가 말하는 미래 유럽의 이슬람화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2017년 대규모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약2,577만 명으로 전체 유럽 인구의 4.9%였다. 주목할 점은 이 수치가 2050년까지 어떻게 변화하느냐이다. 퓨 리서치는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민을 전혀 받지 않는"제로 이민" 시나리오에서도 유럽 내 무슬림 인구는 자연증가만으로 7.4%까지 상승한다. 현재 수준의 이민이 유지될 경우 11.2%, 2015~16년의 대규모 난민 유입이 계속될 경우 최대 14%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14% 시나리오대로라면 스웨덴의 경우 전체 인구의30% 이상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 국가별로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2019년 킹스칼리지 런던 국제급진화연구센터(ICSR) 발표에 따르면 프랑스의 무슬림 인구 비율이9.19%로 가장 높고, 이어 스웨덴 9.15%, 오스트리아 9.12%, 네덜란드 8.48%, 벨기에 7.87%, 영국 7.18% 순이다. 영국의 경우2001년(152만 명)에서 2021년(380만 명)으로 20년 만에 무슬림 인구가2.5배 이상 증가했으며, 런던의 무슬림 비율은 이미 15%에 근접했다. 단순한 인구 증가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동화 거부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사이자 연구자인 유해석 박사(영국FIM 국제대표)는 수년간의 현지 연구를 통해 다음 패턴을 발견했다: 무슬림들이 한 국가에 정착하면, 이민·다산·현지인과의 결혼·개종의 4가지 방식을 통해 세를 불려나간 뒤, 국가의 법이 아닌 자신들의 법 체계인 샤리아(Sharia) 법으로 생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샤리아 법정이 비공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조차 진입을 꺼리는 무슬림 자치 구역(no-go zone)이 형성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유해석 박사는 또한 교도소 통계를 근거로 유럽 사회의 이슬람화가 사회 통합 실패를 수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 수감자의 약50%, 이탈리아45%, 영국40%가 무슬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는 사회경제적 소외와 차별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 통합의 심각한 균열을 보여주는 지표임은 분명하다. 3. 서구 기독교 정체성의 붕괴와 이슬람의 전진 왜 유럽은 이슬람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가? 그 핵심 원인은 서구 엘리트들이 기독교적 정체성과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중동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던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늦어도21세기 말에 유럽의 인구는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며, 유럽은 서부 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가 지적한 핵심은 유럽이 이슬람의 공세에 밀리는 이유가 이슬람의 힘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의 정체성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2024년에는 개신교의 종주국 독일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퓨 리서치의 미래 종교 예측(2015년 발표)에 따르면 2010~2050년 사이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약18%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유럽 내 기독교인들이 2010~2050년 사이 2,382만 명이나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예측되는 반면, 같은 기간 무슬림 인구는 유럽에서 6%에서10%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 비대칭적 변화의 배경에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앙 이탈이 있다. 기독교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이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견지한다. 기독교 문명은 자기 부정의 이데올로기 - 워키즘, 탈식민주의, 비판 이론 - 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해체하는 중이고, 이슬람은 그 공백으로 진입하는 형국이다. Ⅳ. 워키즘: 기독교 문명을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이데올로기 1. 워키즘의 기원과 본질 "워키즘(Wokeism)"이라는 용어는 "깨어 있다(woke)"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인종주의, 사회적 불의에 대한 경각심을 의미했으나, 201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 사회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변질되었다. 2017년 옥스퍼드 사전에 "사회적 불의, 특히 인종주의에 대한 경각심"으로 등재되며 시대적 용어로 정착했다. 오늘날 보수주의 진영에서 워키즘을 비판적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서구 사회와 제도, 문화로 인해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격차가 발생했으므로 서구 문명은 본질적으로 부패했다고 보는 세계관." 이 관점에서 워키즘은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억압받는 자"로 분류하며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재편한다. 더 나아가 현존하는 사회의 모든 표현을"파괴"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워키즘이 심각한 이유는, 이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정치적 좌파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용어를 도용하여 반기독교적 의제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의 원동력이었던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의 "깨어남"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여, 이 신앙적 각성을 세속적 사회운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는 사탄이 성경적 용어를 이용하여 그 의미를 역전시키는 전형적인 수법과 같다고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경고한다. 2. 워키즘이 교회와 사회에 미치는 파괴력 워키즘의 실질적 파괴력은 이미 서구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미군은 2024년1941년 이후 최악의 신병 모집난을 겪었다.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LGBTQ 이데올로기를 군에 도입한 결과 전통적 군인 정신이 훼손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기업 영역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기조와 워키즘이 결합하여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직원들이 침묵을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같은 문화 산업에서는 동성애·성소수자 콘텐츠가 어린이용 작품에도 일상적으로 등장하게 됐다. 교회 안으로도 워키즘이 침투했다. 독일의 진보잡지 슈피겔의 르네 피스터 기자는 2024년 출간한 저서 『잘못된 단어들』에서 워키즘이 좌파마저 독단론으로 몰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주류 교단 일부는 워키즘과의 타협 속에서 동성 결혼 축복, 젠더 이데올로기 수용, 비판적 인종이론(CRT) 채택으로 나아갔다. 이 교단들에서 신자 이탈이 급격히 가속화되고 있다. 2025년 트럼프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워키즘은 정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민주당원조차 2024년 대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를 워키즘으로 지목했다(물론 실제적인 원인은 부정선거라는 의혹과 주장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그러나 워키즘의 영향력은 교육 기관, 언론, 문화 산업에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에도 이 이데올로기가 빠르게 유입되는 중이다. 3. 이슬람과 워키즘의 기이한 동맹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 중 하나는 이슬람과 워키즘의 전략적 연대이다. 이슬람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 동성애 사형, 신정(神政) 정치를 지지하는 반면, 워키즘은 페미니즘, LGBTQ 권리, 세속주의를 옹호한다. 이 두 세력은 사실상 가장 상극에 있는 이념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실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연합 전선을 형성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공통의 적, 즉 서구 기독교 문명이다. 워키즘은 이슬람 이민자를 "억압받는 소수자"로 프레이밍하여 보호하고, 이슬람은 그 프레임을 이용해 서구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한다. 실제로 서구 대학 캠퍼스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관련 시위에서 진보 좌파 학생 단체와 이슬람 학생 단체가 공동 행동에 나서는 사례는 이 기이한 동맹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워키즘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적의 적은 친구"라는 원리로 설명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의 해체라는 목표 앞에서, 상극의 이념들이 전술적 동맹을 맺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기이한 동맹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워키즘을 친이슬람적 이민 정책, 반이스라엘 정서, 기독교 역사 부정, 전통 가족 해체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나의 패키지로 이해해야 한다. Ⅴ. 이스라엘: 문명 충돌의 최전선 1. 왜 이스라엘인가: 지정학적·문명적 의미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는 단순한 동맹 관계나 성경적 예언론의 문제가 아니다. 지정학적·문명적 관점에서도 이스라엘은 중동이라는 전체주의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쐐기 역할을 하는 국가이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단 한 번도 쿠데타 없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어왔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강하게 유지되어—2024년1월 이스라엘 대법원은 네타냐후 연립정부가 추진한 사법개혁 법안을 무효로 판결하기도 했다. 중동의 지도를 놓고 보면 이스라엘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명확하다. 이란은 이슬람 혁명(1979) 이후 미국 지정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신정(神政) 국가이다. 시리아, 이라크, 예멘, 레바논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무장세력으로 인해 사실상 이란의 영향권 내에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왕정 국가들은 권위주의적 군주제이다.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법치주의와 민주적 절차가 작동하는 국가이다. 2. 반이스라엘 정서의 이념적 계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반이스라엘 정서(BDS 운동, 유엔의 반이스라엘 결의안 등)는 표면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권 문제를 내세우지만, 그 이념적 계보를 추적하면 공산주의·좌파 이데올로기 및 이슬람 전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련 시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체계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이 제3세계 해방운동과 연결되었고, 이 흐름이 오늘날의 진보 좌파 진영에 이어지고 있다. 워키즘 이데올로기에서 이스라엘은 "식민지 억압자"로 프레이밍된다. 이 서사에서 유대인은 "성공한 억압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피억압 소수자"이다. 워키즘이 성공한 사람들을 억압자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동 내 유일한 번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악당이 된다. 여기에 이슬람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반이스라엘 정서는 좌파와 이슬람이 만나는 가장 강력한 공유 지점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지지는 단순한 성경적 명령이나 신학적 입장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문명 진영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반이스라엘 정서에 동조하는 것은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서사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보수 진영이 이스라엘을 전략적으로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Ⅵ. 세계 종교 인구의 변화와 기독교의 과제 세계 종교 인구의 장기 추세도 이 대결 구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제공한다.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1970년 약 5억7천만 명이었던 무슬림 인구는 2024년 약20억3천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50년에는 약 28억6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기독교 인구는 12억2천만 명에서 26억3천만 명으로 2.7배 증가하지만, 무슬림은 무려5배가 증가한다. pixabay.com 특히 충격적인 것은 지역별 분포의 변화이다. 기독교 문명의 본거지인 유럽의 기독교 인구는 2024년에서 2050년 사이 감소세로 전환될 것으로 예측되며, 북미에서도 2010~2050년 사이 약2,770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할 것으로 추산된다. 퓨 리서치에 따르면 기독교인 약 6,605만 명이 기독교를 이탈해 무종교인이 6,149만 명 유입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문명의 정신적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반면 이슬람은 높은 출산율(2010년 기준 합계출산율 3.1명, 기독교는 2.7명)과 견고한 정체성 유지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기독교화된 서구 사회에서 이슬람은 그 공백을 파고들고 있다. 이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상황도 우려스럽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00년 후 한국 인구가 71%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며, 229개 시군구 중 200개 시군구가 폐지 또는 존폐 위기에 놓일 것으로 예측됐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는 불가피하게 이민 수용 압력을 증가시키고, 이는 이슬람 인구 유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결합은 문화막시즘으로 침투한다. Ⅶ. 신냉전과 한국교회의 지정학적 선택 1. 중·러·북의 반서방 연대와 한반도 2026년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사실상 신냉전 구도로 재편됐다. 2026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과 쇼이구 러시아 연방안보회의 서기 간의 회담에서 양국은 핵심 이익에 대한 상호 지지를 재확인하고 글로벌 지정학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메커니즘 격상을 선언했다. 세종연구소와 아산정책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중남미·중동·동북아시아는 반서방 연대와 자유민주 진영이 정면 충돌하는 3대 전선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구도를 명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되었고, 서방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이 단행되면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의 반서방 연대는 더욱 공고화됐다. 특히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면서 북-러 밀착이 한반도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2026년1월에는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강경 성명을 내면서 미-이란 대결이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이란의 이슬람 신정 체제는 반서방 연대의 핵심 축으로서,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하는 한편 예멘의 후티 반군, 레바논의 헤즈볼라, 가자의 하마스를 지원함으로써 중동 전체를 전쟁의 불안 속에 몰아넣고 있다. 2. 한국 우파 기독교의 정치적 선택 이 문명 충돌의 구도에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는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가치의 문제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 기독교 문명 기반의 가치—인간 존엄, 가정의 신성성, 신앙의 자유, 생명 존중—를 수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내에서도 이 구도는 명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논쟁, 동성결혼 합법화 압력, 과격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 이슬람 할랄 인증의 확산, 좌파 진영의 반이스라엘 정서 조장—이 모두가 동일한 전체주의 결합 세력의 국내적 발현이다. 한국교회는 이 각각의 이슈들을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거대 흐름의 국내적 가지들로 인식해야 한다. Ⅷ. 음모론의 함정과 전략적 분별력 이 거대한 세계 정국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음모론의 함정이다. 유대 자본의 세계 지배 음모론, 글로벌 엘리트의 비밀 지배 시나리오, 특정 개인이나 조직이 모든 것을 계획·조종하고 있다는 극단적 단순화—이런 음모론은 실제로 더 중요한 이슈를 흐리게 만든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세세한 음모론의 진위 여부에 매몰되어, 정작 지금 당장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지킬 것인가 하는 핵심 질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모든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아무리 연합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서 작동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전제이다. pixabay.com 따라서 음모론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이렇다. 첫째, 구체적인 음모론의 세부 내용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는다. 둘째, 큰 그림—즉 전체주의 결합 세력이 기독교 문명을 해체하려 한다는 거시적 구도—은 냉철하게 인식한다. 셋째, 음모론이 제기하는 개별 이슈들의 진위를 분별하되, 그것이 나의 가치적 입장과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지, 모든 음모론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반유대주의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도 심각한 죄악이었다. 유대인 개인이나 유대 자본에 대한 일반화된 부정적 프레이밍은 성경적으로도 잘못되었고, 실천적으로도 이슬람·좌파의 반이스라엘 연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전략적 입장을 음모론과 분리하는 것이 분별 있는 태도이다. Ⅸ. 성경적 보수주의: 응전의 신학적 기반 1.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 이 모든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은 명확하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진정한 정신은 정치적 보수주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 문명 가치에 근거한 보수주의이다. 정치적 잡음이 많고 보수 진영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기독교 정신을 내세우는 정책과 세력을 분별력 있게 지지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이다. 성경적 보수주의의 기준점은 세 가지다. 첫째, 생명과 가정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지지하는가? 낙태 권리 확대, 동성결혼 합법화, 젠더 이데올로기의 교육 침투에 반대하는 입장이 기독교 문명의 기본값이다. 둘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차별금지법이나 혐오표현금지법의 형태로 기독교적 발언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질서를 지지하는가? 권위주의적 전체주의—공산주의, 이슬람 신정 정치, 좌파 전체주의 모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2. 에베소서 6장의 시대적 적용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장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엡6:12)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문명을 향한 공세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 차이나 이념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영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려는 세력들의 연합이다. 이 영적 싸움에서 교회의 무기는 세상의 무기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 기도, 성결한 삶, 복음의 증거, 공동체의 연대 - 이것이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무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사회적·정치적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렘29:7)고 명령받은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자신이 속한 사회의 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3.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다섯 가지 자세 첫째, 세계 정국에 대한 성경적 해석 능력을 길러야 한다. 뉴스와 시사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세계관의 렌즈로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정학·사회·문화에 대한 성경적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선거, 입법, 공공 정책의 과정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기 위한 시민적 참여가 요구된다. 이것은 정당 정치에의 맹목적 편입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시민 참여이다. 셋째, 이슬람화와 워키즘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해야 한다. 사회적 압력 앞에 침묵하는 것은 묵시적 동조이다. 성경적 진리는 사랑으로, 그러나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강화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된 민족이다. 반이스라엘 정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도록 성경적 가르침이 강화되어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 내부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거대한 전체주의 연합에 맞서는 힘은 교회의 연합에서 나온다. 신학적 차이와 교파적 경계를 넘어 기독교 문명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교회들이 연대해야 한다. Ⅹ. 결론: 두려워하지 말고, 분별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 이 승리의 확신 위에 서서, 우리는 두려움 없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기독교 문명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질서와, 그것을 해체하려는 공산주의·좌파·워키즘·이슬람 전체주의의 결합 세력이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정치·경제·문화·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석의 최종 목적은 두려움이 아니다. 분별이다. 기독교인은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무리 강대한 전체주의 연합이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인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거대 세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분별력 있는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읽되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다. 음모론의 미혹에 빠지지 않되, 실제적 위협을 직시한다. 정치적 편협함에 갇히지 않되, 성경적 가치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이슬람을 두려워하지 않되, 이슬람화의 문명적 함의를 냉철하게 인식한다. 워키즘의 위선을 분명히 보되, 사회적 약자를 향한 기독교의 진정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동아시아의 기독교 문명 보루이다. 20세기 가장 극적인 선교의 열매 중 하나인 한국교회가21세기 문명 충돌의 시대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굳건히 서는 것—이것이 이 시대 한국교회에 주어진 소명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분별하라. 그리고 서라. ■ 주요 참고 자료 및 데이터 출처 -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유럽 무슬림 인구 전망」, 2017 / 「미래 종교 예측(2010~2050)」, 2015 - 아산정책연구원, 「2026년 아산 국제정세전망: 심화되는 무질서」, 2026.1 / 「2024 국제정세전망: 연대결성」, 2023.12 -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세계기독교연구센터, 「1970~2050년 기독교·이슬람 인구 예측」, 2024 - 유해석,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킹스칼리지 런던ICSR, 「유럽 국가별 무슬림 비율」, 2019 - 르네 피스터(독일 슈피겔), 『잘못된 단어들』(Falsche Worte), 2024 -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1996 / 버나드 루이스, 유럽 이슬람화 경고 발언 - 전국인력신문, 「중러 연대와 한국의 선택」, 2026.2 / 민주주의평판지수(DPI), 2025
    • 길과생명연구소
    • 세계는 지금
    2026-04-07
  • 이란 전쟁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두 시선
    pixabay.com/ko/photos 1. 문제의 출발점: 왜 이 전쟁을 둘러싼 인식이 갈리는가 2024년 이후 이란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두고 한국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시각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이 '제국주의적 침략'이 되기도 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의 진실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는 단순한 시각 차이 이상의 이유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 전제, 이념적 지향, 그리고 정보 선택의 방식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란 문제는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이것은 국제 핵 질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중동의 종파 갈등, 에너지 지정학, 미국 패권의 향방,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민간인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가치가 동시에 얽혀 있는 복합적 사건이다. 이처럼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단일한 틀로 환원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한쪽은 이것을 강대국의 일방적 폭력으로 축소하고, 다른 한쪽은 이란의 위협성만을 부각해 군사행동을 무조건 정당화한다. 어느 쪽도 전체를 보지 못할 때 진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감정만 남는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는 오랫동안 두 흐름이 공존해왔다. 하나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진보적 신학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수적 신학의 흐름이다. 이 두 흐름은 국내 정치적 사안에서도 자주 충돌했지만, 이란과 같은 국제 분쟁 문제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계열은 피해자의 시각을 앞세우고, 보수 계열은 안보와 질서의 논리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교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분열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단순화를 거부하고, 그렇다고 냉혹한 현실정치의 논리에 함몰되지도 않으면서, 성경과 신학의 언어로 이 복잡한 현실을 해석하는 일이 가능한가? 이 글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도이다. 우리는 이란 정권의 실체를 직시하고, 전쟁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며, 미국의 전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교회 내 두 시선의 신학적 근거를 점검한 후, 기독교적 판단의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아니다. 교회가 공적 공간에서 말할 때,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을 형성하고 사회적 담론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이 복잡한 국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교회의 목소리가 중요한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발언은 더욱 엄격한 지적 책임과 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2. 이란 정권의 실체: 간과되거나 축소되는 현실 (1) 신정 독재 체제의 구조와 본질 이란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사실은 이란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이후 최고지도자(라흐바르)를 정점으로 하는 신정 체제를 유지해왔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의 종교 권위자이자 정치 권력자로서, 군·사법·방송·외교·안보 전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종교 이념이 국가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권력이 다시 종교 이념을 강요하는 이중 구조다. 대통령과 의회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최고지도자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후보 자격을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는 최고지도자에 충성하지 않는 후보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선거의 실질적 경쟁성을 박탈한다. 즉, 이란의 선거는 민주주의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정치적 반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모두 심각하게 제한된다. 공개 처형은 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일부로 정기적으로 집행된다. 국제사면위원회와 유엔 인권이사회는 매년 이란의 처형 건수와 방식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해왔다. 정치범, 성소수자, 소수 종교인들이 사형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으며,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즉결 처형이 이루어진다는 보고도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현실은 이란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 종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이란 헌법은 명목상 일부 소수 종교를 인정하지만,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배교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이란 내 지하 교회 신자들은 끊임없는 위협과 감시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으며, 적발될 경우 체포와 투옥, 고문을 감수해야 한다. 이 사실은 한국교회가 이란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맥락이다. (2) 여성 인권 문제와 국제적 파장 2022년 이란에서는 마흐사 아미니라는 22세 여성이 히잡 착용 규정 위반을 이유로 도덕경찰에 체포된 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란 전역에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여성, 생명, 자유'라는 구호 아래 수백만 명이 저항에 나섰다. 이란 정부는 이 시위를 강경 진압했으며,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란 신정 체제의 억압적 성격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들은 이란에서 의복 규정 준수를 강제받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을 받는다. 결혼, 이혼, 여행, 취업 등 다양한 법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낮은 법적 지위를 갖는다. 이슬람 형법에 따라 여성의 증언 효력은 남성의 절반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법적으로 제도화한 인권 침해다. 이 점을 평가에서 제외할 때, 이란에 대한 서술은 반드시 왜곡된다.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에서는 여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히잡을 공개적으로 벗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 이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활동가들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란 국내의 인권 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이 부당함에 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 내부의 저항과 고통에 대해서도 동등한 관심과 연대를 표명해야 한다. (3) 국제적 위협 행위와 대리전 구조 이란의 문제는 국경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다양한 친이란 민병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중동 전역의 무장 세력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이 세력들은 이란의 국가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일종의 대리 전력이며, 이란은 이들을 통해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면서도 지역 내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 이것이 소위 '그림자 전쟁(Shadow War)' 혹은 '대리전 전략'의 핵심이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은 국제사회의 오랜 우려 사항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핵합의(JCPOA)에 따른 의무를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을 확인했으며,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평화적 핵 활용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완성할 경우 중동의 안보 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이스라엘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여러 아랍 국가들도 핵 보유를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된다. 즉, 이란의 핵 문제는 이란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중동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태도도 명백하다. 이란 최고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이스라엘 국가의 소멸을 선언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실행된 목표다. 헤즈볼라를 통한 레바논 북부에서의 공격, 하마스에 대한 지원을 통한 가자 지구에서의 긴장, 시리아를 통한 이란 군사 인프라 구축 등은 이 목표를 향한 구체적 행동들이다. (4) '약자 프레임'의 한계와 위험 이러한 맥락을 모두 제거한 채, 민간인 피해와 특정 시설 폭격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실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라, 맥락을 제거한 감정 정치다. '약자 프레임'은 이란 정권의 실제 행위와 책임을 은폐하고, 복잡한 도덕적 판단의 공간을 차단한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억압하고 중동 전역에서 불안을 조장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군사적 압박에 노출된 국가다. 이 두 사실은 모두 사실이며,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것은 오류다. 특히 한국교회의 일부 성명들이 이란 정권의 행위에 대한 언급 없이 군사행동의 결과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표명할 때, 그것은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에 가까워진다. 예언자적 교회의 목소리는 특정 진영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편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약자를 편드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지만, 약자처럼 보이는 자를 무조건 편드는 것은 판단의 포기다. pixabay.com/ko/photos 3. 전쟁의 원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긴장 (1) 핵 문제의 역사와 현재 이란과 서방 세계 사이의 갈등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란의 핵 개발 시도는 적어도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의 우려 대상이었다. 2003년 이란이 비밀 핵 시설을 운영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란에 대한 제재를 부과했다.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 끝에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란,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과 함께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일명 이란 핵합의를 타결했다. 핵합의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을 제한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압박' 전략을 내세우며 이란에 대한 제재를 대폭 강화했고, 이란은 이에 대응하여 우라늄 농축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바이든 행정부가 핵합의 복원을 시도했지만 협상은 성과 없이 장기화되었고,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핵무기 개발 직전 단계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다. 이란은 약속을 어겼고, 미국은 합의를 파기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외교사적 맥락 없이 현재의 군사적 긴장을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결말만 보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이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현재 시점의 피해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적 불성실이다. (2) 대리전 구조와 중동의 복잡한 이해관계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갈등은 직접적인 군사 대결보다는 복잡한 대리전 구조 속에서 전개되어왔다. 이란은 헤즈볼라를 통해 레바논과 시리아 일대에서, 후티를 통해 예멘과 홍해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이란 군사 자산에 대한 공습을 수시로 단행해왔고, 이란 핵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들이 반복되었다. 이 구조 속에서 민간인 피해는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 피해의 책임을 단순히 공격을 가한 쪽에만 돌리는 것은 구조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란이 지원하는 세력이 민간 거주 지역에 무기를 은닉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전개할 때, 그 결과로 발생하는 민간인 피해의 책임은 해당 지역에 무기를 배치한 세력에도 있다. 국제 인도주의법은 이른바 '인간 방패' 사용을 명백한 전쟁 범죄로 규정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종파 갈등도 중동 불안정의 핵심 요인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단순한 종교 분쟁이 아니라, 지역 패권을 둘러싼 지정학적 경쟁의 종교적 표현이다. 이란은 시아파 세력의 구심점을 자처하며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바레인, 예멘 등지에서 시아파 집단을 지원한다. 이 종파 경쟁이 중동 전역의 내전과 갈등을 심화시켜왔다는 사실은 이란 문제를 이해하는 데 결코 생략될 수 없는 맥락이다. (3) 이스라엘의 생존 문제와 윤리적 복잡성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개발을 자국의 존립에 대한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이란 지도자들의 반복적인 이스라엘 소멸 발언,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통한 군사적 압박, 이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란의 핵 개발 완성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레드라인으로 설정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과민반응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역사와 중동 지역의 실제 안보 상황을 배경으로 한 실존적 판단이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한 윤리적 평가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 평가가 이란의 위협을 무시한 채 이루어질 때 그것은 불완전하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란의 이스라엘 소멸 선언과 그를 향한 실제 행동에 대한 동등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한쪽에 대한 비판만이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편향이다. 4. 트럼프의 전략: 단순한 전쟁광인가, 계산된 압박인가 (1) 최대 압박 전략의 구조와 논리 도널드 트럼프의 대이란 정책은 단순히 '호전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전략은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으로 불리며, 이는 군사력보다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을 주요 수단으로 삼아 이란이 더욱 불리한 조건에서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강제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전쟁 없이 이란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미국은 이란에 대한 수백 개의 추가 제재를 부과했고, 이란의 석유 수출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이란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란 화폐인 리알의 가치는 폭락했다. 이란 정권 내부에서도 압박의 효과가 감지되었으며, 이란 국민들 사이에서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트럼프 전략의 지지자들은 이 압박이 없었다면 이란이 더 빠르게 핵 개발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전략도 한계가 있다. 경제 제재로 인한 고통은 이란 정권보다 이란 일반 국민들에게 더 크게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약품과 의료 기기 등 인도주의적 품목에 대한 제재 면제가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이란이 이런 물품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보고가 있다. 경제적 고통을 이용해 정권을 압박하는 전략은 일반 시민의 삶을 도구로 삼는다는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이 한계도 함께 인식되어야 한다. (2) 제한적 군사행동과 전략적 의도 트럼프 재임 기간 중 가장 주목받은 군사행동은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작전이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의 대리전 전략을 총괄하는 인물로, 헤즈볼라, 하마스, 이라크 민병대, 후티 등에 대한 지원과 지휘를 담당해온 실세였다.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가 미국 기지를 공격해 미국 시민을 살해하고, 바그다드 미국 대사관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이 작전이 단행되었다. 이 작전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이란이 전면전으로 응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 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하는 제한적 대응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 미사일 공격은 사전에 경고가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으며, 이란이 실제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즉,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무모한 전쟁 행위가 아니라, 이란의 확전 의지를 시험하고 억제력을 재설정하는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3) 미디어 왜곡과 교회의 인식 문제 일부 한국교회 성명서들이 트럼프를 일방적으로 '전쟁 유발자'로 규정하고, 그의 대이란 정책을 무조건적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은 미디어의 특정 시각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결과다. 진보적 성향의 주류 미디어는 트럼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프레임화해왔으며, 그 서사가 한국교회의 일부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적 분별은 미디어 서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전하지 않는 것을 함께 물어야 한다. 미국의 대이란 정책이 완전히 옳다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오류를 범했고, 미국의 중동 정책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을 비판할 때, 이란 정권의 행위와 책임을 함께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은 균형을 잃는다. 교회는 강대국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그 지적이 독재 정권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pixabay.com/ko/photos 5. 국제정세 속에서 본 이란 충돌: 더 큰 구조를 보라 (1) 미국 대 반미 축의 구조 이란을 둘러싼 갈등은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의 양자 문제를 넘어, 더 큰 국제 질서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의 대이란 제재에 반대하며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강화해왔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제재를 피해 수입함으로써 이란 경제를 간접 지원해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는 반미 세력의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 이란 문제를 다루면, 왜 서방 세계가 이란의 핵 개발을 그토록 심각하게 다루는지, 왜 이란에 대한 제재가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아키텍처의 문제로 다루어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2) 에너지와 지정학: 호르무즈 해협의 전략적 의미 이란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해협을 통해 세계 석유 수출량의 약 20~30%가 통과한다. 이란이 이 해협을 봉쇄한다면 세계 에너지 시장은 즉각적이고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 문제는 단지 중동 지역의 안정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직결된 문제다. 한국은 원유의 상당 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며, 그 수송 경로인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이란과의 군사 충돌이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로 이어질 경우, 한국 경제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것은 이란 문제가 한국에도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 문제를 다룰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국민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은 책임 있는 시민적 신학의 요소다. 6. 한국교회의 두 시선: 신학적 구조 분석 (1) 평화 절대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한계 한국교회 내 진보적 흐름에서 이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평화 절대주의적 관점에 기초한다. 이 입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평화의 왕이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원수 사랑과 비폭력으로 요약된다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산상수훈의 팔복 중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9)는 이 입장의 대표적 성경적 근거다. 따라서 어떤 군사행동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입장의 강점은 전쟁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과, 강자의 논리에 쉽게 포섭되지 않으려는 비판적 저항성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몇 가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첫째, 악의 현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비폭력적 저항만으로 대응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가? 홀로코스트 앞에서 무저항은 옳은 응답이었는가? 둘째, 구조적 불의에 대한 소극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악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군사적 억제마저 거부하는 것은 때로 악의 편을 드는 결과를 낳는다. 평화 절대주의는 개인의 윤리적 태도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국가 정책의 차원과 교회의 공적 증언의 차원에서는 더 복잡한 현실을 다루어야 한다. 예수님의 평화 선포는 개인적 비폭력의 도전이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선취이지만, 그것이 곧 현실 정치에서 모든 강제력의 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이 정당 전쟁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신학적 응답이었다. (2) 정의 전쟁론의 전통과 적용의 한계 다른 한편, 한국교회의 보수적 흐름에서는 정의 전쟁론(Just War Theory)의 관점에서 이란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 전쟁론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되어 중세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거치며 발전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전통이다. 이 이론은 전쟁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 매우 엄격한 조건들을 설정함으로써 전쟁의 남용을 제한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정당 전쟁의 조건은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된다. 전쟁 개시의 정당성(jus ad bellum)과 전쟁 수행의 정당성(jus in bello)이다. 전자는 정당한 이유, 올바른 의도, 합법적 권위,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비례성 등을 요구한다. 후자는 민간인 보호, 비례적 무력 사용, 금지된 무기 사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이 조건들은 매우 엄격하며, 현실의 전쟁 중 이 모든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문제는 이 엄격한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악에 대한 정당한 억제'라는 대원칙만을 내세워 특정 군사행동을 성급하게 정당화하는 경우다. 이란 정권이 분명히 위험하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곧 이란에 대한 모든 군사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각각의 구체적 행동은 정당 전쟁의 모든 조건에 비추어 개별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략될 때, 보수적 교회의 목소리는 국가 권력의 대변자가 될 위험에 처한다. (3) 두 시선의 공통된 문제: 진실의 일부만을 보는 것 흥미롭게도, 평화 절대주의와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라는 두 극단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면서도 동일한 구조적 결함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보고,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한다는 점이다. 평화 절대주의는 이란의 위협과 책임을 보지 않으려 하고, 성급한 정의 전쟁 지지는 군사행동의 부당한 결과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긴다. 어느 쪽도 전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 있지 않다. 기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전체 진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불편하고 복잡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에만 실현된다. 교회가 이 전쟁 문제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신학적·이념적 편향이 진실의 인식을 어떻게 제한하고 있는지를 먼저 성찰해야 한다. 7. 문제의 핵심: 균형 상실과 감정 정치 (1) 성명서의 구조적 편향 분석 이란 문제를 다루는 일부 한국교회 단체들의 성명서를 분석하면 공통적인 구조적 편향이 드러난다. 첫째, 원인 제거다. 이란 정권의 위협적 행위, 핵 개발, 대리전 전략, 국내 억압 등은 언급되지 않거나 매우 축소되어 다루어진다. 반면 군사행동의 결과, 특히 민간인 피해와 인프라 파괴는 상세하고 감정적으로 서술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군사행동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결과에 대한 감정적 반응만을 갖도록 유도한다. 둘째, 도덕적 단순화다. 복잡한 도덕적 현실이 '가해자 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환원된다. 한쪽은 절대 악으로, 다른 쪽은 절대 피해자로 규정된다. 이 구도에서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이웃 나라들에게 행한 악은 사라진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가한 측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악마화된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연극이다. 셋째, 감정 중심 서술이다. 학교, 병원, 어린이, 피난민 등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서술의 중심을 이루며, 구조적·법적·역사적 책임 분석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기독교적 미덕이다. 그러나 감정만으로 공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도덕적 책임의 방기다. 특히 교회가 사회를 향해 선포하는 성명서라면, 그것은 훨씬 더 엄격한 지적 성실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2) 맥락 없는 인도주의의 위험 인도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그 생명과 존엄은 보호받아야 한다. 민간인의 죽음은 어디서 누가 행했든 비극이며, 교회는 그 비극에 민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란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정당하다. 그러나 '맥락 없는 인도주의'는 오히려 더 큰 폭력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란 정권이 핵을 개발하고, 중동 전역에 대리 세력을 통해 불안정을 조장하는 행위를 제지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충돌과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누가 책임지는가? 단기적으로 민간인 피해가 없는 평화적 현상 유지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재앙을 향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없는 인도주의는 결국 현실 회피가 된다. 나아가, 인도주의적 우려가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란 내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소수 종교인들이 박해받고, 정치범들이 처형될 때 한국교회 단체들은 얼마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는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행동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이란 정권의 내부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이념적 선택이다. pixabay.com/ko/photos 8. 그렇다면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기독교 전쟁 윤리의 재검토 (1) 성경의 긴장: 평화와 질서 사이 기독교 윤리는 전쟁 문제에 있어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전쟁에 개입하시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전쟁의 비극과 그 결과에 대한 탄식도 담고 있다.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성전 건축의 영광을 허락받지 못했다(대상 22:8).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사람으로, 원수 사랑과 폭력 거부를 가르치셨다. 동시에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이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언했다. 이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단순화되어서도 안 된다.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말씀과 '그것이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롬 13:4)라는 말씀이 모두 정경 안에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모순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긴장 속에서 신학적 판단은 더욱 섬세해야 하며, 어느 한 구절을 절대화하여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2) 정당 전쟁의 조건과 현실 적용 전통적 정당 전쟁 이론은 다음의 조건들을 제시한다. 정당한 이유(just cause)란 실제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나 부당한 침략에 대한 방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의도(right intention)란 보복이나 이익 추구가 아니라 선의 달성과 악의 억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권위(legitimate authority)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 있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수단(last resort)이란 모든 평화적 수단이 소진된 이후에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비례성(proportionality)이란 예상되는 선이 악을 초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을 이란을 둘러싼 군사 충돌에 적용할 때, 쉬운 결론은 없다. 이란 정권의 위협과 핵 개발은 '정당한 이유'의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 조건을 충족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외교적 수단이 정말 소진되었는가? 제재가 충분한 시간 동안 유지되었는가? '비례성' 조건과 관련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제한적 타격이 전면전보다 더 작은 악인가, 아니면 더 큰 갈등의 촉발점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분명하지 않으며, 교회는 이 불확실성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정당 전쟁론이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찬성도, 무조건적 반대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각각의 구체적 상황에서 이 조건들을 성실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없이 '평화를 원하니 전쟁에 반대한다'거나 '이란이 위험하니 군사행동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신학적 판단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9. 기독교적 평가: 무엇이 옳은 태도인가 (1) 진실을 전체로 보는 용기 기독교적 판단의 첫 번째 요건은 진실을 부분적으로 보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란 정권의 억압적 성격, 대리전 전략, 핵 개발 의혹은 진실이다. 민간인의 고통, 전쟁의 파괴적 결과, 군사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도 진실이다. 국제 정치의 복잡한 이해관계, 강대국의 오류 가능성, 전쟁의 비의도적 결과도 진실이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현실에 대한 성실한 태도다. 선택적 진실은 거짓말의 한 형태다. 어떤 사실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거짓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즉 '침묵을 통한 거짓(lying by omission)'은 직접적 거짓말 못지않게 사람을 기만한다. 교회가 이 방식으로 공적 성명을 발표하거나 설교를 전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완전한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책임이다. (2) 정의와 사랑의 통합 기독교 윤리에서 정의와 사랑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가 사랑의 사회적 표현임을 강조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차갑고 억압적인 율법주의가 되며, 정의 없는 사랑은 구조적 불의를 방치하는 감상주의가 된다. 이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란 국민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한 정의로운 비판과 함께 표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민간인을 향한 사랑은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정의로운 억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쉬운 균형이 아니다.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붙드는 것은 항상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긴장을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판단이 형성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그것은 사랑과 정의의 동시적 표현이었다. 죄인을 용서하시면서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3) 교회는 분별자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분별(discernment)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 소명이다. 그것은 단순히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을 넘어,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해내는 영적이고 지적인 작업이다. 이란 전쟁 문제에서 교회의 소명은 특정 정치 세력의 서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외교 정책의 PR 창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반미·반이스라엘 담론의 종교적 포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는 그 어느 정치 세력에도 종속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기준으로 모든 편을 동시에 판단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모습이다. 분별은 또한 시간을 요구한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즉각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교회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정보 수집과 기도와 신학적 성찰 이후에 나오는 신중한 판단이, 비록 늦더라도 훨씬 더 큰 영적 무게를 갖는다. 교회가 세상의 속도에 맞추어 반응하려 할 때, 그것은 선지자가 아니라 평론가가 되는 길이다. (4) 누구의 편에 서는가: 근본적 질문 이 모든 논의의 끝에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교회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국의 편인가, 이란의 편인가? 이스라엘의 편인가, 팔레스타인의 편인가? 강자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기독교적 응답은 이 질문들보다 더 깊은 곳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의는 특정 국가나 민족이나 이념에 포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이란 국민의 자유를 원하며, 이스라엘 국민의 안전을 원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과 예멘의 민간인들의 생명을 원한다. 하나님의 의는 독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으며, 동시에 강대국의 불의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전쟁보다 평화를 원하지만, 불의한 평화보다는 고통스러운 정의를 선택한다. 이 입장은 정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다. 어느 진영도 교회를 온전히 자기편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의 권력 구조 안에 흡수되지 않고 그 위에 서 있을 때 가능한 자리다. 예레미야가 바빌론도, 이스라엘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섰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10. 전쟁의 전망과 교회의 과제 (1) 세 가지 시나리오 이란을 둘러싼 충돌의 향후 전개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로 예측할 수 있다. 첫째는 제한적 충돌의 지속이다. 이것은 현재 상황의 연장선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이란과 미국 사이의 국지적 충돌이 반복되지만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는 시나리오다. 사이버 공격, 표적 암살, 대리 세력을 통한 간접 전투 등이 지속되는 '회색 지대' 갈등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이란의 핵 개발은 서서히 진전되고, 국제 제재의 효과는 점점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확전 시나리오다. 어느 한쪽의 오판이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전면전의 촉발점이 될 수 있다.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거나,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타격을 단행하는 경우다. 이 시나리오는 중동 전역을 충돌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으며,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 공격,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미군과 이란 간의 직접 충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셋째는 협상을 통한 현상 관리다. 이란이 경제적 압박과 내부 불만을 이기지 못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거나, 강대국들이 더 큰 충돌을 막기 위해 외교적 해결을 추진하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란의 완전한 핵 개발 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핵 능력의 부분적 동결과 제재의 부분적 완화를 교환하는 중간 지점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2) 교회의 구체적 과제 이 세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화되든, 교회의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올바른 정보와 균형 있는 분석에 기반한 공적 발언을 해야 한다. 성명서를 발표할 때는 이란의 행위와 국제적 맥락을 함께 언급하며, 어느 편의 서사도 검증 없이 수용하지 않는 지적 성실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이란 국민과 중동의 모든 민간인을 위한 기도와 실질적 인도주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이란의 지하 기독교 공동체와 박해받는 소수 종교인들을 위한 연대도 중요하다. 셋째, 이 위기가 복음 선교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동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이 영원한 소망을 찾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란 내부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는 이 역설을 보여준다. 교회는 정치적 논쟁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시대의 혼란에 응답해야 한다. 넷째, 장기적 평화 구조 형성을 위해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종교 자유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결론: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 이란 전쟁을 단순히 '침략'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의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모두 불완전하다. 현실은 그 어느 단어도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이란 정권은 억압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이란 국민은 그 억압의 피해자들이다. 군사행동은 위협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민간인의 고통을 수반한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불의 위에 세워진 평화는 결국 더 큰 폭력의 씨앗이 된다. 교회가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소명은 때로 긴장 관계에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특정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단기적 평화를 방해할 수 있다. 이 긴장들을 직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예언자적 교회의 소명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가 가장 빛났던 순간들은 교회가 어느 진영의 편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진영에 진실을 말했을 때였다. 나치 독일에 저항한 본회퍼는 독일의 편도, 연합국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편에 섰다.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에 저항한 데즈몬드 투투는 흑인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라는 하나님의 진실의 편에 섰다. 이들은 인기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고, 어느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들의 증언은 역사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교회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어떤 권력보다도 크다. 미국도, 이란도, 이스라엘도, 어떤 국제 기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대리인이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국가 권력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그 어떤 군사 동맹도 신성시하지 않는다. 교회가 서야 할 자리는 하나님의 의가 서는 자리이며, 그 자리는 항상 이 세상의 권력 구조 너머에 있다. 이것이 쉬운 길이 아님을 안다.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 자리는 외롭고 불편하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예레미야가 유다를 향해 말씀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씀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존엄 앞에서. 이것이 이 시대 교회의 마지막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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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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