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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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 수용자 자녀의 ‘면회 여정’ 조명한 전시 개최
    면회길을 ‘삶의 여정’으로 풀어낸 전시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은 오는 3월 27일부터 4월 10일까지 서울 영등포구 세움 사옥에서 김유나(Una Kim) 작가 초대전 《아빠에게 가는 여정(A Journey of Connection)》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여행(Journey)’을 주제로, 수용자 자녀가 부모를 만나기 위해 교도소로 향하는 과정을 하나의 삶의 여정으로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단순한 이동이 아닌, 단절과 그리움, 그리고 관계 회복의 의미를 담아낸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전시는 사회적 인식 개선과 더불어 실제적인 지원을 동시에 목표로 한다. 작품 판매와 후원을 통해 수용자 자녀의 면회비를 지원하는 기금을 마련하는 ‘모금형 전시’로 기획됐다. 당사자의 목소리 담은 ‘참여형 전시’ 이번 전시에서는 김유나 작가의 기증 작품뿐 아니라, 수용자 자녀 당사자들의 작품도 일부 공간에 함께 전시된다. 이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당사자들의 실제 목소리를 사회에 전달하려는 시도다. 전시 오프닝은 3월 27일 오후 3시에 진행된다. 행사에서는 세움 이경림 대표와 김유나 작가의 인사를 시작으로, 수용자 자녀 면회 지원의 현황과 필요성을 공유하는 시간이 마련된다. 이어 당사자 청년의 작품 소개와 작가 도슨트 프로그램도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관람객이 참여할 수 있는 벽화 포토존이 운영돼, 전시의 메시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단절이 아닌 연결의 여정이 되기를” 세움 이경림 대표는 “아이들이 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이 단절이 아닌 ‘연결의 여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며 “이번 전시가 그 여정에 함께 걷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세움은 수용자 자녀의 건강한 성장과 권리 보호를 위해 설립된 아동복지 전문기관으로, 심리·정서 지원과 교육·생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이번 전시는 무료로 운영되며, 사전 신청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 문화
    • 미술
    2026-03-26
  • “부활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품으라”
    대한민국광역기독교총연합회(대광기총)가 2026년 부활절을 맞아 한국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발표하고, 부활 신앙의 회복과 시대적 사명 감당을 촉구했다. 총회장 심하보 목사는 이번 메시지에서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선언”이라며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신앙의 중심이자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강조했다. “지친 성도들에게 부활은 오늘의 이야기” 대광기총은 오늘의 성도들이 겪는 삶의 무게와 상처, 불안을 언급하며 부활의 의미를 현실 속에서 해석했다. 심 목사는 “부활 신앙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라며 “닫힌 마음과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전했다. 특히 “주님은 지금도 성도들의 삶 속에 임재하시며 평강을 주신다”며 부활을 개인의 현재적 경험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했다. 한국교회 향한 도전… “침묵이 아닌 담대함” 이번 메시지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사회적·정치적 도전도 짚었다. 대광기총은 교회를 향한 비판과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입법 움직임 등을 언급하며 “교회는 권력 앞에 침묵하기 위해 세워진 공동체가 아니라 진리를 선포하는 공동체”라고 밝혔다. 이어 “초대교회가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는 주’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 역시 부활 신앙 위에 담대히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광기총은 부활절을 단순한 기념이 아닌 ‘파송의 사건’으로 규정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며 “오늘의 교회 역시 상처 입은 이들을 치유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이웃을 품으며 화해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교회의 목소리는 분노가 아닌 소망에서 나와야 하며, 저항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광기총은 끝으로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갈 때”라며 “부활의 능력과 평강이 한국교회와 대한민국 위에 함께하기를 기도한다”고 전했다.
    • 선교와 교계뉴스
    • 국내소식
    2026-03-26
  • '이즘'(ism)에 물든 그리스도인들, 복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한국 교회는 복음이 아닌 이념으로 골이 깊어지고 있다. AI제공 균열의 현장 — 정치가 교회를 삼킬 때 대한민국은 지금 깊은 균열 속에 있다. 정치적 사건 하나가 사회 전체를 좌와 우로 갈라놓고, 사람들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재편하고 있다.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적진에 선 것처럼 보인다. 같은 교회에서 나란히 예배드리던 성도가 예배당 밖에서는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2026년의 현실이다. 문제는 그 균열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왔다는 데 있다. 교회는 본래 세상의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 되게 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세상과 다르지 않다. 아니, 때로는 더 격렬하게 갈라져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특정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설교가 울려 퍼지고, 다른 입장을 가진 성도는 조용히 교회를 떠난다. 누군가를 지지하면 곧바로 '극우'라는 낙인이, 다른 누군가를 옹호하면 '종북 좌파'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 낙인은 단순한 정치적 구분을 훌쩍 넘어 도덕적 판단, 심지어 신앙의 진위를 따지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며, 관계를 끊는 모습은 세상의 정치 집회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에서 결코 자연스러운 풍경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의 상당 부분에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멈추고 질문해야 한다. 복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념이 복음의 자리를 빼앗을 때 복음은 단지 개인의 위안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능력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엡 2:14)고 선언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수천 년 된 적대감을 십자가 하나가 무너뜨렸다는 이 선언은,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안의 이 분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경우, 우리는 복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념을 더 신뢰하는 것 같다. 복음을 고백하지만 판단의 기준은 정치적 진영이다. 복음은 우리의 신앙 언어로만 남아 있고, 실제 삶의 기준은 '이즘(ism)'이 되어버렸다. 보수적 정치 이념이든, 진보적 사회 의제든, 그것이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상숭배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그 공장이 이제는 이념이라는 우상을 빚어내고 있다. 이념이 복음을 대체하는 과정은 대개 조용하고 점진적이다. 처음에는 시대적 문제에 대한 정당한 관심으로 시작한다.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분노. 이것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관심들이 복음의 빛 아래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지 않고, 어느새 복음 위에 군림하게 될 때 발생한다. 특정 정치적 운동이나 이념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순간, 우리는 복음을 이념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역사는 이 위험을 여러 차례 증언하고 있다.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은 민족주의라는 이념과 복음을 혼합했고, 그 결과는 나치즘에 협력한 '독일 기독교인' 운동이었다. 칼 바르트는 바로 이 혼합에 맞서 바르멘 선언을 기초했다. 이념·국가·지도자가 복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칼 바르트가 주장한 바르멘 선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AI 제공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선언은, 어떤 이념도, 어떤 국가도, 어떤 지도자도 복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언은 80여 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울려야 한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 이념(ism)이 복음을 대체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다. 첫째는 적아(敵我) 구분의 절대화다. 복음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존재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념이 정체성의 기반이 될 때, 우리는 나와 같은 입장을 가진 자를 '우리'로, 다른 입장을 가진 자를 '그들'로 구분하기 시작한다. 이 구분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마침내 '그들'은 악한 편에 선 자로 규정된다. 같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가 정치적 적군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둘째는 복음의 선택적 사용이다. 이념에 물든 신자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성경 본문은 열정적으로 인용하지만, 그 입장에 불편한 본문은 무시하거나 재해석한다. 권력자의 권위를 강조하는 로마서 13장은 환영하지만,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을 향한 야고보서의 경고는 외면한다. 혹은 반대로, 예언자적 저항 전통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국가 권위에 대한 존중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성경 전체의 권위 앞에 겸손히 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신의 이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는 구원의 공동체의 붕괴다. 교회는 본래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은혜로 하나 된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이념이 중심을 차지하면, 교회는 이념적 동지들의 집합체로 변질된다. 같은 이념을 가진 자들만이 진정한 성도로 인정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배제된다. 이것은 복음이 선포하는 교회가 아니다. 복음의 교회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유대인과 헬라인이, 종과 자유인이 함께 앉는 곳이다. 넷째는 분노의 정당화다. 이념이 우상이 될 때, 그 이념을 위한 분노는 '의로운 분노'로 포장된다. 자신의 진영이 옳고 상대가 그르다는 확신이 강해질수록, 분노는 더 격렬해지고 더 정당화된다. 그러나 야고보는 경고한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노가 이념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는 한, 그것은 아무리 종교적 언어로 포장되어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한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교회의 공적 실패로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은 적은 양으로도 부패를 막는다. 바닷물의 3.5% 염분이 거대한 바다를 썩지 않게 하듯이, 교회는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 비유가 중요한 이유는, 소금이 작동하는 방식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금은 스스로를 주장하지 않는다. 소금은 조용히 녹아 들어가 음식이 썩지 않게 한다. 빛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 소금은 자신을 감추면서 세상을 보존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은 정반대다. 교회가 많아졌음에도 사회는 더 혼탁해졌다. 성도의 숫자가 늘었음에도 부패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외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징후다. 예수께서 이미 경고하셨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맛을 잃은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보존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가 이념에 물들 때 소금은 그 맛을 잃는다. 이념에 물든 교회는 세상의 갈등을 중재하고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을 증폭시키고 재생산한다. 정치적 집회의 언어가 설교단에서 울려 퍼지고, 예배당이 특정 정당의 지지 기반이 되며, 목사가 정치적 선동가로 전락하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묻는다.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물음 앞에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상태가 지속될수록 복음 자체가 무기력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존재함에도 사회가 점점 혼란스러워진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묻는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이 정말로 능력이 있는가? 그리스도가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교회가 사회의 부패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영향력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이유의 문제다. 교회가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는 어느 편에 서 계셨는가 흔히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이념적 편으로 끌어당기려 한다. 보수는 질서와 전통을 강조한 예수를, 진보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선 예수를 전유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는 어느 진영의 포획도 거부하신다. 그분은 헤롯에게도, 빌라도에게도, 바리새인에게도, 젤롯 당원에게도 환원되지 않는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이념 위에 서신 분이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앞에서 칼을 든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의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라는 여호수아의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이제 왔느니라"(수 5:13-14). 그분은 어느 편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모든 편 위에 계신 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며, 인간의 모든 이념을 상대화하는 절대 기준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입장을 가질 수 있고, 때로는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입장은 항상 복음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자신의 입장이 하나님의 절대적 뜻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지도자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자라는 확신은, 예언자적 비판 의식을 마비시키는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다윗을 사랑하셨지만 나단을 보내 그의 죄를 책망하신 하나님은, 어떤 정치 세력도 신성화하지 않으신다. 복음의 정치적 함의는 모든 이념을 초월하면서도 구체적인 삶에 깊이 관여한다. 복음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경제 구조에 침묵하지 않는다. 동시에 복음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과 생명의 질서를 훼손하는 사회 의제에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심은 어느 특정 정당의 강령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음 안에서 동시에 붙들려야 한다. 복음의 통전성(integrity)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이념화의 본질이다. 연합의 신학, 하나 됨은 어디서 오는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복음이 우리의 중심에 있는가, 아니면 이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가? 복음이 중심에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적으로 볼 수 없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지만, 그 다름이 관계를 끊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합은 동일한 생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생명에서 온다. 이것은 중요한 구분이다. 동일한 생각을 가진 자들의 연합은 이념적 동지 관계요, 클럽이지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속해 있다는 존재론적 사실에 근거한다. 바울이 "한 몸과 한 성령 ...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 4:4-5)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신자들의 생각이나 입장이 모두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 같은 생명에 속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연합은 이견(異見)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이견을 품을 수 있는 더 큰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의 연합은 모든 의견이 같아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의견이 다를 때에도 서로를 형제자매로 대하고, 상대의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으며, 함께 말씀 앞에 겸손히 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4-15장에서 가르친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윤리다. 의견의 차이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서로를 세워주는 섬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나 이른바 '관용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 안에서의 연합은 핵심 진리에 대한 타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부활의 역사성, 성경의 권위 — 이 핵심 교리들에 대해서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문제는 이 핵심 교리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차이를 핵심 교리와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자는 진정한 신자가 아니다'라는 판단이 바로 그것이다. 머리된 그리스의 몸으로 교회의 항상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AI 제공 복음으로의 회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논쟁이 아니다. 더 강한 주장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복음으로의 회귀다. 복음이 다시 중심에 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모두 은혜로 하나 된 존재다. 그분이 우리의 머리이며, 우리는 한 몸으로 존재한다. 이 인식이 회복될 때에만 진정한 연합이 가능하다. 복음으로의 회귀는 첫째로 설교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먹여야 하는 자다. 정치적 논평을 제공하는 자가 아니다. 물론 설교는 현실의 삶에 적용되어야 하고, 사회적 불의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논의를 성숙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적용은 항상 복음에서 출발하여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이념이 설교의 중심이 되는 순간, 그 설교단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리가 아니다. 둘째로, 성도 각 개인이 자신의 이념적 편향을 인식하고 복음의 빛 아래 겸손히 검토하는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념적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렌즈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 16:13)는 약속은, 우리가 자신의 편견을 성령 앞에 내어놓을 때 이루어진다. 정기적으로 '나는 지금 복음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이념을 믿고 있는가?'를 자문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영적 점검이다. 셋째로, 교회 공동체가 정치적으로 다양한 성도들이 함께 말씀 앞에 서는 연습을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다양성을 위한 다양성이 아니다.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형제자매를 통해, 내가 복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이념이었던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거울을 보게 된다. 그 불편한 거울을 피하지 않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다. 넷째로, 교회는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는 구체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적대적인 두 진영 사이에 서서, 대화의 자리를 만들고, 서로를 인격체로 대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교회가 갈등의 도구가 아닌 화해의 도구가 될 때, 비로소 세상은 복음의 능력을 보게 된다. 복음은 여전히 강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혼란은 단지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이며,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사회도 회복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역사는 이를 증언한다. 18세기 영국은 혁명 직전의 사회 균열을 겪고 있었다. 그 균열을 막은 것은 존 웨슬리가 이끈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었다. 그 부흥은 노예제 폐지, 노동 환경 개선, 교도소 개혁이라는 구체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졌다. 복음이 살아 역사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세상의 소금이 된다. 복음은 여전히 강하다.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게 하고, 분열된 자들을 하나 되게 하며, 절망 중에 소망을 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복음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의 가장 깊은 정체성이 될 때 — 정치적 입장이나 민족적 자긍심이나 계층적 이해관계보다 더 근본적인 정체성 —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연합과 화해를 경험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세상의 이념적 싸움에 끌려다니며 그 갈등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복음으로 무장한 화해와 변화의 공동체로 서 있을 것인가. 이 선택은 거창한 교회 정치나 제도적 결정이 아니라, 매일 매일 개별 신자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오늘 내가 SNS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정치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동료를 어떻게 대하는지,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이 복음인지 이념인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하는지 — 이 작은 선택들이 모여 한국 교회의 얼굴을 만들어간다. 이념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그 선택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 이슈와 진단
    • 이슈 진단
    2026-03-26
  •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 자키(Zakie)의 이야기
    자키*는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기에도,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에도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인 아프가니스탄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수많은 아프간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용기 있는 여성입니다. 공동체와 가족으로부터의 거절부터, 갓 태어난 아기와 부상당한 남편을 데리고 탈레반을 피해 도망치기까지, 자키의 여정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희망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키의 신앙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들을 사역하며, 한 번에 한 명의 여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삶 인생의 대부분 동안 자키*는 하나님을 주로 무서운 기록원, 즉 피조물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렸다가 지옥에 던져버리는 일종의 우주적 심판관으로 믿었습니다. 신실한 무슬림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기분에 따라 자신을 정죄할 수 있는 하나님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중압감 속에 살았습니다. “이슬람에서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녀는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금식하지 않으면 이슬람에서 순결하지 않은 것이고, 제대로 된 무슬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키는 아프가니스탄의 독실한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일상은 이슬람 법을 지키기 위한 엄격한 시계추처럼 돌아갔습니다. “이슬람에서의 예배는 별도의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자키가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잠에서 깨어나 기도할 때 해가 떠 있으면 안 됩니다. 해가 떠 있으면 그 기도는 무효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또한 밤이 되기 전 저녁에도 기도해야 했습니다. 취침 시간에는 적절한 시간에 맞춰 기도해야 했습니다. 제시간에 하지 않으면 아버지나 집안의 가장으로부터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미혼일 때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이런 식으로 강요를 받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에게 그 사슬은 기도 시간보다 훨씬 더 단단했습니다. 삶의 모든 측면이 엄격한 규칙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머리를 가려야 했고, 얼굴을 가려야 했으며, 큰 옷을 입어야 했고, 손도 가려야 했고, 몸은 발끝까지 가려야 했습니다.” 자키는 설명합니다.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여성은 항상 열등한 존재로 간주됩니다. 여성에게 권리와 특권을 주지 않습니다. 여성을 노예처럼, 성노예처럼 이용합니다.” 이것은 그녀의 삶이 이미 계획되어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녀는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 역시 무슬림이었기에 그녀의 조용한 복종의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권위가 남편의 권위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다른 여성들처럼 자키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집 안에서 그것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변화되다 변화는 설교나 전도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키처럼 그 역시 독실한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주변의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성급하게 보복하고, 가혹하며, 여성을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남편의 성품이 점차 변화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남편의 분노가 사라졌습니다. 애정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용서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남편이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의 존재 안에 변화가 온 것을 보았습니다.” 자키는 회상합니다. “남편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겸손해졌고, 용서할 줄 알게 되었으며, 우리에게 커다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화를 많이 냈고, 용서가 없었으며, 집안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마침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했을 때, 그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의 삶의 변화를 보았을 때 저도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키가 말합니다. “그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더욱 용기를 주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급진적인 사랑에 대해 듣는 것은 그녀가 자라며 가져왔던 화내고 멀리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깨뜨렸습니다. 남편의 변화를 목격한 것은 이 하나님이 실제적이고 강력하며 사랑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증명해 주었습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자유 개종은 자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주로 그들이 불신자(infidel)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무슬림이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그때 저는 불신자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용서가 없거나, 간음하는 자, 악을 행하는 자, 속이는 자, 거짓말쟁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겸손하고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자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습니다.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키와 남편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면서,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을 만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변화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절대요. 그 불통과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이 어깨 위의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이 짐과 문제들이 우리 어깨에서 벗겨졌습니다. 그것들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가벼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키는 한때 아프가니스탄의 엄격한 이슬람 해석에 따른 규칙에 통제받는 삶을 살았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두려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남편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감사하게도 과거 신앙의 사슬과 굴레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언제든지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삶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자키는 이어갑니다. “과거에 저는 매우 상심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했고, 금식하지 못했으며, 희생 제물을 바치지 못했다는 생각만 늘 했습니다.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믿음을 갖게 된 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때, 이제 제가 구원받았고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내 자리가 있고 영원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하지만 그 확신은 곧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키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그리스도인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로 낙인찍히다 자키의 마을처럼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에서는 비밀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곧 부부의 새로운 신앙은 숨기기에 너무 분명해졌습니다. 이슬람을 떠나는 것은 가족과 문화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거절은 신속하고 격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자는 카피르(kafir, 불신자)다. 그녀와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지 마라. 그녀와 같은 식탁에 앉지 마라’며 저를 모욕했습니다.” 자키가 말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애정을 보여주려고 아이들을 안아 올리면, 아이 엄마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아이들을 다시 낚아챘습니다. 그들은 ‘안 돼, 저 여자 근처에 가지 마, 저 여자는 아주 나쁜 여자야. 저 여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야. 불신자가 됐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적대감은 깊었습니다. 자키의 마을 아이들조차 그녀를 혐오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집에 오는데, 아마 12살이나 14살쯤 된 소년이 손에 음료수 병을 들고 있다가 위층에서 저에게 쏟아붓고 도망쳤습니다.” 자키가 말합니다. “너무 속상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회의 모든 사람이 저를 거부합니까?'” 그녀는 가족 모임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심지어 친척이 사망했을 때도 장례식 참석이 금지되었습니다. “친척이 죽으면 꾸란 낭독 의식을 치릅니다.” 그녀는 설명합니다. “그들은 저에게 ‘너는 불신자니까 꾸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곳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슬람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그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자키는 상처의 아픔을 느꼈지만, 기도를 위해 앉을 때면 항상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힘을 얻었습니다. “저는 항상 따로 혼자 앉아서 나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나눕니다. “하나님 자신이 항상 용서하시고 항상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기에, 저도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었고 여전히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들은 제 가족이자 친척이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멀어지거나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자키는 이런 고난 속에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비밀 신자였던 한 친구를 기억합니다. 그 친구는 남편도 친척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몰랐습니다. 자키는 가끔 일요일에 전화를 걸어 교회에 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여가 활동에 초대하는 척했습니다. “나중에 친구 남편이 알게 되었을 때, 친구 남편은 친구가 더 이상 예배를 위해 교회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친구와 저의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자키가 말합니다. “친구 남편이 제 친구에게 ‘자키와 이야기하지 마라. 메시지도 보내지 마라. 거리에서 친구를 보더라도 인사도 하지 마라. 만약 네가 다시 자키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되면, 네 귀와 코를 자르고 집 밖으로 쫓아낼 것이며 아이들도 빼앗아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보호해야 할 네 아이가 있었기에 자키의 친구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키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문자 메시지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사랑하는 자키, 더 이상 메시지 보내지 마. 전화도 하지 마. 내 남편이 ‘귀와 코를 자르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으로 쫓아내겠다’고 경고했기 때문에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어.” 하지만 자키는 남편의 잔인함 속에서도 친구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친구 남편은 친구를 때리고, 항상 모욕하고 굴욕을 주며 거부하곤 했습니다.” 자키가 말합니다. “아내가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서서히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한계점 자키의 가족은 사회적 거절은 견뎌낼 수 있었지만, 곧 적대감은 폭력으로 변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가족을 탈레반에 신고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았고, 탈출구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남편을 두 번이나 잡아갔고, 고문했으며, 우리는 심지어 그들이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자키가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제거하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를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는 단 하루 밤도 우리 집에서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죽이고 딸들을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 늘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탈레반이 2021년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장악하기 불과 3개월 전, 위험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남편과 딸들, 그리고 저는 친척 중 한 명의 집에 갔었습니다.” 자키가 말합니다. “우리가 친척 집에서 나왔을 때, 오토바이 한 대가 길에 멈추더니 한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내려 남편에게 총을 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은 살아남았지만,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떠나거나… 죽거나. “남편을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우리는 너무 무서웠고, 바로 그날 밤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했습니다.” 자키는 말합니다. 떠나기로 한 결정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자키는 막 출산을 한 상태였고, 부상당한 남편을 도우며 갓 태어난 아기를 돌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머무는 것은 어린 소녀들을 신부나 하인으로 데려가는 관습이 있는 탈레반에게 딸들을 납치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희망을 붙들다 오늘날 자키와 그녀의 가족은 중앙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며 그녀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봅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힘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안전한 곳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눕니다.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고국의 여성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현재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은 난민 여성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성들과 제자 훈련을 합니다. 많은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많은 문제를 겪은 여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눕니다.” 자키는 설명합니다. 난민으로서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녀는 여전히 공동체 내에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아프간 사람들은 그녀가 살고 있는 곳에서 권리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박해와 신앙의 시련 속에서도 그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에 희망을 붙잡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치유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의 전부입니다.” 자키는 말합니다. “저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제 마음속에 계시며 제가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나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기쁨을 줍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저와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저의 기쁨이자 평안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오픈도어 협력 사역자들은 자키가 아프간 난민 여성들 사이에서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자키처럼 여성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소명과 열정을 가진 이들이 또 있습니다. 훈련, 문서, 실제적인 도움을 통한 오픈도어의 지원은 이 여성들이 여성들을 강건하게 하고 아프간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소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합니다. 기도 제목 자키의 가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지만, 여전히 정착국에서 반대에 직면해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그녀의 기도에 동참해 주십시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끔 다른 아이들과 격리되기도 합니다.” 그녀는 설명합니다. “아이들이 믿음 안에서 강하고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자키의 가족과 친척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녀의 기도에 동참해 주십시오. 그녀는 말합니다: “제 가족들도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자키는 사역의 실제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녀는 나눕니다: “우리가 모두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며, 성경책도 필요합니다.” 자키 가족에게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기를, 새로운 터전에서 모든 필요가 채워지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비밀 신자들, 특히 여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 그분의 사랑의 통로로 사용하시기를 간구해 주십시오. 중앙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인 아프간 난민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은 처한 상황뿐만 아니라 신앙 때문에 매우 취약한 상태입니다. 그들이 존중받으며 치료받고, 두려움 없이 신앙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를 얻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한국오픈도어즈선교회 제공> *보안상의 이유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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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5
  • “뭐? 기도는 노동이라고?”(2)
    1. 기도할 때 제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조금도 들리는 것 같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영적으로 안고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잠시 나의 사랑 고백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잠시 감사나 회개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십자가로 생명을 내어주신 아버지 사랑이 크고 놀라운 이유입니다. 저는 그냥 존재하고 있는 그 자체로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사랑받기에 합당하고 이미 충분합니다. 2.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나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머물러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기도는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 먼저입니다. 친밀한 교제 말입니다. 그래서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을 확인하시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제가 하나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이 기도 시간입니다. 꼭 말이 존재해야만 기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때로는 말이 없어도 통합니다. 눈빛만 봐도 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요. 3. 그래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로서 기도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요. 종종 점점 말이 줄어들기 시작해요. 완벽한 침묵에 이르곤 합니다. 그분의 마음에 제 온 영혼이 집중하여 바라봅니다. 벅차오르는 감동과 감격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듭니다. 그렇게 영원의 시간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요. 여러분도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어떤 때는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두세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떤 때는 엄청 기쁨의 희열을 느끼며 분명히 오래 기도한 것 같은데 이삼 십 분도 안 지나 있습니다. 영원의 시간을 경험한 겁니다. 4. 결국 기도는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분과의 접촉이 일어나는 감격적인 시간이고요. 더불어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분과의 만남이 일어나는 가장 행복한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할 생각만 해도 너무나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를 정도가 되어야 정상입니다. 기도를 위해 교회 의자에 앉을 생각만 해도 설레임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기도를 위해 나만의 기도 골방에 들어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 가운데 기대감과 감동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5. 그런 친밀한 교제로서의 기도는 시작했다 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이끕니다. 그분의 달콤한 임재에 잠겨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나도 다시금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기도가 기도를 부른다고 할까요. 그 감격이 삶의 순간마다 내 안에, 곁에 계신 성령님을 더욱 찾고 존중해드리며 교제를 나누도록 만들곤 합니다. 6. 기도는 노동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가장 큰 만족과 안정감을 회복하고 누리는 시간입니다. 영적인 충만함을 회복하고 누리는 시간입니다. 감사한 것은 친밀함의 기도로 하나님께 신뢰를 받는 사람들에게 중보적 기도를 맡기십니다. 예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을 나눠주십니다. 보여주십니다. 중보기도의 세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7.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교제를 나누도록 돕는 귀중한 통로입니다. 보다 많은 하나님 자녀들이 기도로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 좋겠습니다. 특히 언제나 예수님만 바라보도록 도우시고자 우리 안에, 곁에 동행하시는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는 통로로 적극 기도의 행복과 즐거움을 얻고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 영성
    • 목회
    2026-03-25
  • “성경적 창조 질서 수호, 선지자적 사명으로 다음 세대 깨우자”
    ▲거룩한방파제 대표회장 이·취임식이 지난 22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엄숙하고 뜻깊게 거행됐다. 세속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한국교회의 영적 순결을 지키고 다음 세대를 보호하기 위한 ‘거룩한방파제’의 사명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거룩한방파제는 지난 22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대표회장 이·취임식을 거행하고, 제7대 대표회장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의 이임과 제8대 대표회장 김운성 목사(영락교회)의 취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번 이·취임식은 단순한 리더십의 교체를 넘어, 시대적 소명인 ‘성경적 절대 가치 사수’라는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결단의 장이었다. 오정호 목사의 3년, ‘거룩한 방어선’ 구축의 밀알 되다 이임하는 오정호 목사는 지난 3년간 포괄적 차별금지법, 동성애 퀴어축제, 학생인권조례 등 반성경적 조류에 맞서 한국교회의 최선봉에서 헌신해 왔다. 특히 오 목사는 주최 측 추산 30만 명이 운집하며 한국교회의 저력을 보여준 ‘거룩한방파제 통합국민대회’를 진두지휘하며 대한문 일대에 거대한 영적 방파제를 구축했다. 또한 전국 단위의 국토순례 특별기도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이 운동이 전국적인 연합 사역으로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오 목사는 이임사를 통해 “한국교회와 다음 세대를 위해 함께 헌신해 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눈물 어린 동역이 있었기에 이 사역이 가능했다”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거룩한방파제 대표회장 이·취임식이 지난 3월 22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거행됐다(왼쪽은 7대 대표회장 오정호 목사 오른쪽은 8대 대표회장 김운성 목사) 김운성 목사, “하나님의 뜻 전하는 ‘선지자적 소리’ 낼 것” 새롭게 키를 잡은 제8대 대표회장 김운성 목사는 사사기 6장을 인용한 설교를 통해 거룩한방파제가 나아갈 본질적인 방향성을 제시했다.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위기 때마다 영웅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는 선지자를 먼저 보내셨다”며 사역의 본질을 역설했다. 그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단순한 정치적 대응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말하는 선지자적 사명”이라며, “시대가 변해도 진리를 전하는 사명은 끝나지 않기에, 우리는 영웅이 아닌 선지자의 외침을 감당하는 자들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취임사에서는 “앞선 사역자들의 고귀한 헌신을 이어받아 무거운 책임감으로 기도의 동역자들과 함께 나아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교계 인사들, “다음 세대 위한 영적 유산… 시대적 필연 사역” 격려 이날 행사에는 교계 및 정계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해 거룩한방파제의 사역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예장합동 부총회장 정영교 목사는 축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합당한 사람을 세워 당신의 사명을 이루신다”며 “거룩한방파제는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소중하고도 중요한 영적 유산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어 대전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류명렬 목사는 “이 사역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가치 있는 사역”이라며 “한국교회와 창조 질서를 수호하는 든든한 영적 보루로서 그 역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복음법률가회 대표 조배숙 의원 역시 “누구나 쉽게 나설 수 없는 좁은 길이지만, 다음 세대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는 가야 할 길”이라며 거룩한방파제의 사명감을 높이 평가했다. 이번 리더십 교체를 기점으로 거룩한방파제는 오정호 목사가 닦아온 연합의 토대 위에 김운성 목사의 선지자적 영성을 더해, 더욱 강력한 성경 수호 운동을 전개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선교와 교계뉴스
    • 국내소식
    2026-03-25
  • “스크린을 끄면 가족이 살아난다”…고난주간 ‘미디어 절제 캠페인’ 확산
    고난주간을 맞아 한국교회 안에서 ‘미디어 절제’를 통해 가정과 신앙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사)놀이미디어교육센터는 ‘2026 고난주간 미디어 절제 캠페인’을 전개하며, 성도들이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줄이고 가족 간의 관계 회복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도록 돕고 있다. 이번 캠페인은 “스크린 타임 OFF, 패밀리 타임 ON”이라는 슬로건 아래, 미디어 과잉 시대 속에서 무너진 가정의 대화와 관계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음세대 두뇌는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란다” 센터 측은 설명자료를 통해 인간의 두뇌 발달이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닌 ‘관계 속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특히 영유아기의 경우 타인의 두뇌와의 연결, 즉 부모와의 언어적·정서적 교류가 필수적이며, 이는 사회성 형성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자료에 따르면 아이의 두뇌는 부모의 표정, 목소리, 대화를 통해 발달하며, 이러한 상호작용이 부족할 경우 사회성 발달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대로 스마트폰과 같은 스크린 중심 환경은 정보 전달은 가능하지만 관계 형성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특히 “아이의 두뇌는 화면이 아니라 부모와 얼굴을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성장한다”는 메시지는 이번 캠페인의 핵심 가치로 제시된다. AI 시대, 관계 없는 교육의 위험성 경고 설명자료는 인공지능 기반 학습의 한계도 지적한다. AI는 지식 전달은 가능하지만 감정 교류와 사회적 신호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감정 읽기 능력을 배우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둑기사 이세돌의 사례를 인용하며, 감정이 없는 기계와의 대면이 인간에게 심리적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센터는 이러한 환경이 지속될 경우, 사회성 발달이 저해되고 반사회적 성향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경고하며, AI 학습은 보조적 수단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난주간, 하루 한 시간이라도 가족을 켜라” 캠페인은 실천적 지침도 함께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밤 9시 이후 스크린 OFF ▲스마트폰 없는 가족 식사 ▲가족 성경 읽기와 중보기도 ▲서로 축복하는 롤링페이퍼 작성 ▲서점·도서관 방문 등의 ‘패밀리 타임’을 통해 가정 내 대화와 교제를 회복할 것을 권장한다. 또한 가정에 스마트폰 보관함을 만들어 일정 시간 이후 모든 기기를 내려놓는 실천도 제안되었다. 고난주간, 영적 절제에서 관계 회복으로 이번 캠페인은 단순한 미디어 사용 제한을 넘어, 고난주간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제의 시간이, 단지 금식이나 개인 경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 공동체의 회복’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미디어교육센터는 “성도들이 미디어를 절제함으로써 영적 성장뿐 아니라 가정의 회복을 경험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히며, 한국교회 안에 건강한 디지털 사용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오늘날 스크린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이번 캠페인은 다시금 인간의 본질적인 관계와 신앙의 자리로 돌아가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고난주간, 스크린을 끄는 작은 결단이 가정을 살리고 다음세대를 회복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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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4
  • “130년 전 양화진의 기억, 디지털로 다시 깨어나다”
    두루마리기행 편지 양화진기록관(관장 강요섭 목사)이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주요 선교사 기록물을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3월 22일 온라인에 전격 공개했다. 이번 아카이브 개설은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와 선교사의 발자취를 보다 폭넓게 공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양화진기록관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가 설립·운영하는 기관으로, 한국 기독교 역사와 외국인 선교사의 삶과 사역을 보존·연구하기 위해 출범했다. 2012년 전택부 선생의 유품 기증을 시작으로, 이듬해 로제타 S. 홀 선교사와 아서 G. 웰본 선교사 가문의 기록이 추가되며 본격적인 기록 보존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기록관은 선교사 유품과 서신, 사진, 일기, 교단 보고서, 친필 원고 등 7천여 건 이상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이 자료들은 19세기 말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 사회 변화와 기독교 형성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로제타홀 친필 일기 특히 홀 가 컬렉션은 의료 선교와 여성·장애인 교육, 결핵 퇴치 운동 등 한국 근대 의료사의 흐름을 담고 있으며, 웰본 가 컬렉션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내륙 선교와 농촌 사회의 변화 과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전택부 컬렉션 역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보존 운동과 시민사회 활동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러한 자료들을 온라인으로 제공함으로써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손쉽게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선교 현장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록관 측은 “기록을 통해 선교와 신앙, 그리고 사회 속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실천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밝혔다. 로제타홀 수첩 양화진기록관은 앞으로도 국내외 기관 및 전문가와 협력해 기록의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기억의 샘, 기록의 터’라는 모토 아래, 양화진에 깃든 신앙과 헌신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기록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비전이다. 웰본 성경과 안경 한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의 관리·운영을 위해 2005년 설립된 교회로, 한국 교회의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 힘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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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소식
    2026-03-24
  • 나무를 깎아 구원의 은혜를 새기다
    십자가는 무겁고 두려운 형틀이 아닌 사랑의 증거라고 고백하는 정지은 작가 ■ 전시 일정 및 관람 안내 목공예 작가 정지은(45)의 2026 사순절 특별기획전 '비워낸 나무, 손끝에 닿은 쉼'(빌 2:5)이 오는 3월 24일(화)부터 4월 4일(토)까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409, 문화공간 JADE409(지하 2층)에서 열린다. 지하철 2호선 및 수인분당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 1분 거리다. 관람 시간은 개관일인 3월 24일에는 오후 2시부터 7시까지(개회식 오전 11시)이며, 평일(월·화·목·금)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수요일과 주일은 오후 2시부터 7시까지 운영된다.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5시에는 작가가 직접 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10명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이 필수이며, 화환과 화분은 정중히 사절한다. 주차는 유료이고, SUV 등 대형 차량은 주차가 어려워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한다. 예약 문의는 02-557-1063. 이번 전시에는 12년간 작업해온 80여 점의 작품 가운데 엄선된 40여 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비움', '닿음', '쉼'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됐다. 최동욱 JADE409 대표(장로)는 “나무를 깎아내는 묵묵한 비움에서 시작해, 십자가를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간절한 닿음을 지나 마침내 평강의 쉼에 이르는 여정을 담았다”며 “결과보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에 순종하며 준비한 작품들을 통해 마음에 잔잔한 울림과 쉼이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12년의 손끝, 나무에 새긴 십자가의 이야기 정지은 작가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금속공예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2014년부터 나무 십자가 작업을 이어온 12년 차 목공예 작가다. 전공이 금속공예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선택한 것은 단순한 재료의 선호가 아니었다. “금속 십자가는 너무 차갑다. 나무로 만드는 것은 나무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서”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그가 만드는 십자가에는 언제나 나무의 따뜻한 질감이 살아 있다. 관람객이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내어놓는 이 따뜻함이, 작가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전하는 매개체다. 십자가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경기도 구리 예닮교회 고대경 담임목사와의 만남이었다. 작가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어 찾아온 저에게 목사님이 말씀으로 양육해 주셨고, 그 양육을 통해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교회 개척의 동반자로 처음 나무의 따뜻한 질감을 알게 된 정 작가는 고대경 목사의 적극적인 권유로 십자가를 처음 만들었다. 첫 작품이 바로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루증 여인'이다. 나무 조각 작업은 보기와 달리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매캐한 나무 분진, 무거운 목재, 날카로운 톱날의 위험이 도사리는 고된 노동이다. “예닮교회 가족들의 도움과 담임 목사님의 후원이 없었다면 홀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첫 작품을 보고 기계를 후원하며 지금껏 작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운 고 목사와 교회 공동체. 그렇기에 정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개인의 창작물이 아닌, 공동체 안에서 빚어진 믿음의 고백”이라고 강조한다. '은혜를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사명 정 작가는 작업 5년 차 무렵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저는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만들어도 됩니까, 그 자격이 있는가를 항상 저에게 묻곤 했다”는 고백처럼, 그에게 이 작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라 끊임없는 신앙의 씨름이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은혜를 기록하는 사람.” 그 말씀이 작가 정지은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 일이 교회를 통해 은혜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그는 말한다. 다음 세대에게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십자가에 담아 남겨주는 것이 사명이 되었다. 작품의 영감은 주로 말씀 묵상과 주일예배 설교에서 얻는다. 큐티 중에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노트에 스케치한 뒤 나무로 옮기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기교를 덧붙이면 하나님의 의도와 멀어지는 것 같아, 최대한 스케치대로 조각하려 한다”고 밝혔다. 스케치 초안이 이미 상당량 쌓여 있어, 앞으로 작품화할 내용이 풍부하다.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주님과 나만의 이야기가 생겨 기쁘다는 그의 말에서, 창작이 곧 기도요 예배임을 느낄 수 있다. 주요 작품으로 보는 세 가지 테마 이번 전시는 세 가지 테마로 작품을 분류하여 구성된다. 첫 번째 테마 '비움'은 나무를 깎아내는 시간, 내려놓음의 자리를 상징한다. 작가는 이탈리아 카타콤을 여행하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려도 되는 것인가'를 깊이 묵상했고, 그 성찰이 작품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테마 '닿음'은 십자가 앞에서의 마주침, 간절한 손끝을 뜻한다. 세 번째 테마 '쉼'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 흔들림 없는 쉼표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혈루증 여인'이다. “혈루증 여인의 간절함과 그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매우 크게 느껴져 만든 작품”이라고 정 작가는 설명한다. 이 십자가에서 한쪽 팔은 각지고 다른 팔은 둥글게 조각되어 있는데, 각진 팔은 주님의 공의를, 둥근 팔은 그분의 사랑을 상징한다. “병을 넘어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관람객이 느꼈으면 한다”는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기도'는 고대경 목사의 유년 시절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가난한 시골 교회 종탑과, 어린 아들을 향해 눈물로 새벽 제단을 쌓으셨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이 십자가를 들고 여러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많은 목사들이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며 “이것이 곧 한국의 신앙이었노라”고 고백한다고 작가는 전한다. '쉼'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는 많은 관람객이 발걸음을 멈춘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한 주님의 초대, 고단한 현대인들의 마음에 가장 깊이 닿는 작품이다. 십자가를 통해 전하는 예수님의 다양한 사랑 정 작가는 여러 차례의 전시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예수님을 하나의 틀 안에 가둬놓고 오해하고 계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랑의 예수님, 두렵고 떨리는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저마다 하나의 모습으로만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은 작고 작은 인간의 사고의 틀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과 방법으로 나타내어 주신 분”이라고 강조한다. “십자가는 무겁고 두려운 형틀이 아닌 사랑의 증거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무게이자 가장 깊은 위로입니다.” 이것이 정지은 작가가 12년간 나무를 깎으며 전하고자 한 메시지다. 그의 작품 앞에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이번 전시 장소인 테헤란로는 서울에서 가장 분주하고 무한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다. 작가는 “이곳이 누군가에게 예수님으로 인해 나를 사랑하시고 지키시길 원하신다는 것, 그분이 계신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 십자가> <내가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날> <소경> 고대경 목사 “K-나무 십자가로 세계를 향해” 고대경 예닮교회 목사는 기자간담회에서 정지은 작가의 작품 세계와 향후 비전을 직접 설명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앞에 수백 명이 줄지어 선 광경을 보며 “인생은 짧고 예술은 영원하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한들 수십 년 후에 들을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하지만 예술 작품은 100년, 천 년이 지나도 수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구원의 복음을 작품으로 끌어내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크고 영원한 사역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고 목사는 정 작가의 첫 스케치인 '혈루증 여인'을 보고 “평생 본 작품 중 가장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 목공예를 권유했다고 밝혔다. 이후 나무와 기계를 직접 후원하며 작가가 생계 걱정 없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후원해왔다. 그는 “구원과 복음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끌어내는 정 작가의 작품이 국내를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K-나무 십자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대형 작품 위주로 나아갈 계획이며, 작가가 평생 동안 구원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주제 아래 작품 활동을 이어가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정지은 작가는 “제 평생에 허락된 시간 안에서 은혜의 이야기를 쉼 없이 기록하고 남기겠다”고 말했다. 안산제일교회, 주안장로교회, 장로회신학대학교 등에서의 전시를 거쳐 이번 서울 강남 한복판의 기획전까지, 그 여정은 단순한 예술가의 발자취가 아닌 신앙 고백의 기록이다. 사순절 기간, 테헤란로의 분주함 속에서 나무 십자가를 통해 잠시 멈추고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 문화
    • 미술/음악/영화/연극/문학
    2026-03-23
  • 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2026년3월16일 건강한 교회와 사회 포럼, 광교산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민주시민모임,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느헤미야교회협의회,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평화촉구연대의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중동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중동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응답을 표방하고 있다. 성경적 언어와 인도주의적 호소로 포장된 이 성명은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면밀히 읽어보면 이 성명은 심각한 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편향된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침묵 성명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전쟁의 배경이 된 이란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수십 년간 자국민을 향해 비인간적인 억압을 자행해 왔다. 2019년 11월의 피의 금요일 사태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조직적인 탄압을 받아왔다. 독립적인 추산에 따르면 이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역내 무장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불안정의 핵심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사망에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명서는 이러한 맥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의 선택적 적용 성명서는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의 초등학교 공습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민간인 희생을 강조한다. 민간인 보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무고한 희생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명서는 그 공습이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폭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대부분 군사시설 — 해군기지, 공군기지,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 공항 등 — 을 겨냥해왔다. 민간 지역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의도적 공격인지 오폭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만약 민간인 학살이 의도적이었다면 동일 지역에 대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었어야 하나, 그러한 패턴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명서는 이러한 사실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근거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방어권에 대한 몰이해 국제법은 모든 국가에 자기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적대적 언사를 공식적으로 반복해왔고, 실제로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한 대량파괴무기 획득 시도 역시 국제 사회가 공인한 위협이다. 더구나 미국의 공습과 함께 이란 정권은 주변의 중동국가에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감행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성명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인 침략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란 국민 상당수는 자국 독재 정권의 몰락을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의 사망 또는 제거 소식에 거리에서 환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자국민에게도 억압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성명서가 진정으로 생명과 인권을 염려한다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신음해온 이란 국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도 동등한 무게로 발언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정치적 압박의 문제 성명서의 세 번째 항목은 한국교회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태도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 성명서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이란 정권에 대한 면죄—을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전쟁 논리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쪽 편의 서사만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불의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며, 그 안에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불의는 단지 ‘폭격’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억압과 위협, 그리고 지속적인 폭력의 구조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정권이 자국민을 억압하고 국제적 위협을 지속해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한 침략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대응이 민간인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진정한 균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 있는 진실 위에 선다 그리스도인의 평화 운동은 정치적 편향을 복음의 언어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성명이라면,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지역 안정에 가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어야 한다. 핵 위협을 방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독재 정권을 묵인하는 것이 생명 존중인지 물어야 했다. 평화촉구연대의 이 성명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중 하나는 철저히 외면한다. 균형을 잃은 평화 호소는 결국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 서려면,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해서도 동등한 용기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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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 진단
    202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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