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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연] 38년의 감옥 생활을 이긴 단 한 마디 "저항하라"… 뮤지컬 개막
- 뮤지컬 <더 북: 성경이 된 사람들>로 한국 교계에 큰 감동을 전했던 광야아트센터가 종교개혁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뮤지컬 <저항: 찬송이 된 사람들>로 관객들을 다시 찾아온다. 오는 4월 10일부터 10월 31일까지 광야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이번 작품은 18세기 프랑스 위그노(개신교도)들의 꺾이지 않는 불굴의 신앙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펼쳐낼 예정이다. "RÉGISTER(저항하라)", 38년의 암흑을 견뎌낸 한 여인의 외침 극의 주인공인 '마리 뒤랑'은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악명 높은 콩스탕스 탑에 갇혀 무려 38년을 인내한 실존 인물이다. 매일 배급되는 거친 빵 한 조각과 함께 "신앙을 버린다고 한마디만 하면 지옥을 나갈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이 끊임없이 찾아왔지만 , 그녀는 빵 대신 날카로운 돌을 들어 감옥 바닥에 프랑스 남부 방언으로 'RÉGISTER(저항하라)'라는 단 한 마디를 새겼다. 이는 세상의 유혹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고백한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 악취, 질병이 가득한 감옥 안에서 그녀와 여인들을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시편 찬송'이었다. 고통과 압제 속에서 살기 위해 토해냈던 찬송은 절망의 수용소를 숭고한 성전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 포스터의 메인 카피인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라, 모든 상황 속에서"는 그녀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신앙적 고백을 고스란히 상징한다. 믿고 보는 베테랑 제작진의 의기투합, '더 북'의 감동 잇는다 이번 공연은 검증된 뮤지컬계 베테랑들이 빚어내는 영적 전율을 예고하고 있다. 뮤지컬 <호프>로 제4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연출상을 받은 오루피나 연출 , 뮤지컬 <ABBA:아바> 등에서 영감 넘치는 넘버를 선보였던 리카C 작곡가 , 그리고 뮤지컬 <더 플레이>로 제8회 한국뮤지컬대상 극본상을 수상하고 광야의 첫 작품 <루카스>를 집필한 김수경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광야아트센터 측은 "전작 <더 북>이 성경을 지키기 위한 사투였다면, <저항>은 그 말씀을 삶으로 증명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전하며 벅찬 기대를 당부했다. 광야아트미니스트리 20주년 기념, 복음 뮤지컬의 새로운 도약 올해는 2006년 뮤지컬 <루카스>를 시작으로 '복음의 가치를 담은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여온 광야아트미니스트리가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출발해 강남 광야아트센터에 자리 잡기까지 , 광야는 <요한계시록>, <더 북: 성경이 된 사람들>, <요한복음>, 등 성경적 가치관을 무대 언어로 번안한 독보적인 콘텐츠를 꾸준히 무대에 올리며 한국 기독교 문화예술의 지평을 넓혀왔다. 광야 관계자는 "지난 20년이 척박한 땅에서 복음 뮤지컬의 씨앗을 심고 가꾸어온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20년은 세상 한복판에서 진리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간이 될 것"이라며 , 이번 20주년 기념 공연이 그 새로운 도약의 신호탄이 되기를 바란다는 포부를 밝혔다. 역사가 된 위그노의 투쟁,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작품의 배경이 되는 '위그노'는 16세기 프랑스에서 종교적 자유를 갈망하며 가톨릭의 권위에 맞섰던 개신교(칼뱅주의) 신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1572년 발생한 끔찍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등 극심한 핍박과 36년간 지속된 프랑스 종교 전쟁 속에서도 , 숲속과 가정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고 시편을 찬송하며 끝까지 신념을 지켰다. 감옥 벽에 새겨진 그들의 "저항하라(RÉGISTER)"는 외침은 훗날 프랑스 대독 저항 운동인 '레지스탕스'의 정신적 뿌리가 되기도 했다. 기나긴 38년의 세월 끝에 감옥 문이 열리고 고향에 돌아온 마리 뒤랑을 반긴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닌 친척들의 탐욕과 교회의 차가운 소외였다. 하지만 감옥의 벽보다 견고한 세상의 벽 앞에서도 그녀는 타협을 요구하는 세상을 향해 생의 마지막까지 "아니요!"라고 외쳤다. 극한의 환경이 빚어내는 비인간화에 맞서며 신앙 양심과 존엄을 지켜낸 한 여인의 38년 대서사시는 ,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용기가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공연 정보] 공연명 : 뮤지컬 <저항: 찬송이 된 사람들> 공연기간 : 2026년 4월 10일 ~ 10월 31일 공연장소 : 광야아트센터 관람등급 : 8세 이상 관람가 예매문의 : 02-741-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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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연] 38년의 감옥 생활을 이긴 단 한 마디 "저항하라"… 뮤지컬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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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 욕설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문 발표
- 포도원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김문훈 목사의 사과문(캡처) 최근 한국 교계는 한 지도자의 과거 발언을 둘러싼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의 과거 교역자 회의 발언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교계 안팎에서는 실망과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일부 기독 언론은 이를 공익적 보도의 범주를 넘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특정 직분 사퇴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며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2월 22일, 김문훈 목사가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사과문은 이 모든 논란의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깊이 되새기게 한다. 비난의 화살 속에서 선택한 ‘낮아짐’과 ‘회개’ 통상적으로 지도자가 구설에 오르면 변명과 방어로 일관하거나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가 흔히 나타난다. 하지만 김 목사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공개된 사과문에서 그는 어떠한 변명도 구차하게 늘어놓지 않았다. 파문 속에서 김문훈 목사는 별도의 반박이나 해명 대신 교회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시했다. 그는 과거 교역자 회의 중 부적절한 표현이 공개되어 상처를 준 데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밝혔다. "이는 저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자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에 깊이 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일을 통해 더욱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다짐은 변명보다 회개를 선택한 태도로 읽힌다. 이 사과문은 단순한 위기 대응 문서가 아니라, 공동체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목회자의 고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과문의 이 대목은 그가 이 사안을 얼마나 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목회자로서 성도 한 분 한 분을 아끼는 마음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부교역자들에게 상처를 준 자신의 언어 표현이 잘못되었음을 가감 없이 인정했다. 이는 단순한 사과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기독 언론의 정도와 ‘허물을 덮는 사랑’의 실천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안타까운 지점은 일부 언론의 태도였다. 기독 언론의 사명은 교회의 정결함을 유지하는 파수꾼 역할에 있지만, 그것이 비난을 위한 비난이나 정죄를 위한 폭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8)”고 가르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이자 교회의 리더가 실수했을 때, 그 실수를 집요하게 파헤쳐 사퇴를 종용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가장 가까운 동역자이자 지도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비판의 칼날이 날카로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의 논리가 아닌 회복의 눈물이다. 사과문의 울림: "기도로 지켜봐 주시기를" 김문훈 목사는 사과문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노력했음을 밝히는 동시에, 여전히 아픔을 느끼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주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 고백은 한국 교회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이미 자신의 잘못을 통렬히 반성하고 사과한 형제에게 계속해서 정죄의 돌을 던지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다. 성경은 판단하는 자에게 그 판단으로 자신도 심판받을 것임을 경계하고 있다. 이제는 비난의 목소리를 멈추고, 그가 진정으로 새로워질 수 있도록 기도로 지켜봐 주는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죄를 넘어 화해와 일치로 김문훈 목사의 사과문은 한국 교회에 '회개의 정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공동체의 기도를 요청하는 낮은 자세는 많은 성도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이번 시련이 포도원교회와 김 목사 개인에게는 영적 성장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우리 또한 그를 비난의 대상이 아닌, 함께 짐을 지고 가는 지체로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 허물을 들춰내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허물을 덮어주는 하늘의 방식으로 대응할 때 비로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용기 있는 고백을 남긴 김문훈 목사와 그의 사역, 그리고 상처받은 모든 이들의 마음 위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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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와 진단
- 이슈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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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 욕설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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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루틴을 지키라!
- 1.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4)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 농구선수의 징크스와 루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시합 전에 청결을 점검해요. 목욕부터 집안 대청소까지 강박적으로 점검하는데, 그렇게 해야 경기에서 실수를 줄이고 시합에 집중이 잘 된다고 말합니다. 2. 그가 농구 시합 중에 자유투를 던질 때가 있는데요. 던지기 전 공을 바닥에 5번 튕깁니다. 그리고 던졌는데 들어가면 계속 5번씩 공을 튕기고 슛을 던져요. 자유투가 안 들어가면 횟수를 바꿔서 7회 혹은 10회 바닥에 공을 튕기죠. 슛이 성공하면 그 숫자를 기억하고 계속 그 횟수만큼 튕기고, 안 들어갈 때가 오면 다시 공 튕기는 횟수를 조정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도 루틴이 있어요. 타석에 들어서면 꼭 야구 배트를 세 바퀴 돌리고 허리와 팔을 세 번 까딱거립니다. 그래야 자신감이 생기며 실수를 줄이게 된답니다. 이렇게 징크스는 이겨내고, 자신의 좋은 리듬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루틴이라고 하는데요. 3. 저도 신앙의 루틴이 있습니다. (목회자분들마다 영적 루틴이 다를 수 있는데요. 중심은 비슷하거나 같을 것입니다.) 신앙, 목회 본질을 지키는 힘과 삶이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얼마나 잘 지켜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7년 신학생 시절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재발견하였는데 삶과 신앙의 분기점이었어요. 그렇게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교제 나누는 삶을 추구하면서 영적 루틴이 생겼습니다. 충분히 성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삶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 바라보는 시간을 먼저 확보하는 겁니다. 영적 루틴이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 구체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4. 오전에는 가급적 활동하지 않아요. 성령님과 교제 나누며 외부적인 소음을 차단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SNS를 내려놓고 가급적 약속도 잡지 않아요. 사도들의 고백처럼 말씀과 기도 시간으로 선포하고 영적, 정신적, 육체적 쉼과 회복의 시간을 가집니다. 물론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적 루틴으로서 최대한 지키려고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시면 또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지키는 방향성이 제게 유익해요. 5. 현재 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생기기 전에는 참으로 집회 일정이 바빴어요. 매주 부흥회 초청이 있었고, 전국에 정기모임과 정기집회도 25곳이 넘었습니다. 바쁜 집회 일정도 영적 루틴을 지키면서 다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많은 일정 속에서도 일주일에 2일은 집에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가정에 먼저 충실하도록 이끄시며, 사역자가 아니라 아들이요 친구로서 성령님과 교제 나누는 삶에 집중하게 하셨는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머물러 있는 시간입니다. 6. 어떤 시즌에는 한 달 이상 모든 집회를 거절하거나 1달 이후로 날짜를 조정했습니다. 5~6개월에 한 번씩은 집에서 두문불출했어요. 조용히 성령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멈춰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영적인 루틴이 형성되었어요. 이제 제 영혼에 각인되었습니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배우게 하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7. 제 사역이 바빠지기보다, 제 이름이 알려지기보다, 우리 교회가 알려지기보다 예수님이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제 삶을 통해 예수님 알려지시려면 영적 루틴을 목숨같이 지켜야 해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부지런해야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분들 사역과도 비교할 필요 없어요. 누군가의 말처럼 오직 비교의 대상은 어제의 나 자신입니다. 오늘도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지키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숫자에 속지 않고 성장과 성숙을 함께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히 배움의 자세로 연합을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시고 머물러 계시는 분들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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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루틴을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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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준비 말고 진짜 결혼 준비!”… 2026 노아 NCA 결혼가정 컨퍼런스 개최
- "결혼은 알맞은 짝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알맞은 짝이 ‘되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천 청년들의 올바른 결혼관 확립과 성경적 가정을 세우기 위한 '2026 노아 NCA 결혼가정 컨퍼런스(1단계)'가 오는 3월 14일(토) 오후 1시 서울대학교에서 열린다. 노아 NCA 컨퍼런스 준비위원회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화려한 '결혼식' 준비에 밀려 정작 중요한 '결혼'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 준비를 놓치기 쉬운 미혼남녀들을 위해 기획됐다. 만남부터 배우자 선택, 실제 결혼 생활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영적 혼수감'을 마련해 주는 것이 세미나의 핵심 목표다. ■분야별 전문가들이 전하는 '진짜 결혼' 이야기 이날 컨퍼런스는 총 4개의 심도 있는 강의와 종합토론으로 진행된다. 오후 1시 김영한 교수의 기조강의 '성경적 정의론'을 시작으로, 오후 2시에는 김향숙 원장이 '하나님의 결혼설계도; 결혼, 굳이 해야 할까요?'라는 주제로 청년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다룬다. 이어 강태신 교수가 '배우자 선택의 기준; 꼭 이런 사람과 결혼하세요'(오후 3시 20분), 김향숙 원장이 다시 강단에 올라 '데이트의 기술; 두 사람, 이렇게 서로 다르지만요'(오후 4시 20분)를 주제로 실질적인 조언을 건넬 예정이다. 마지막 순서로는 권요한 선교사가 이끄는 종합토론 '결혼과 가정: 생명의 방주'(오후 5시 20분)가 마련되어 참가자들과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 ■ 1단계 참가자, 5월 '결혼매칭 프로그램' 참여 혜택 특히 이번 1단계 컨퍼런스 참가자들에게는 특별한 혜택이 주어진다. 세미나를 통해 성경적 결혼관을 정립한 청년들이 실제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오는 5월로 예정된 '결혼매칭 프로그램(2단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이번 행사는 국제학생사역회의(ISMC),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 인권윤리포럼, 하이패밀리, 서울대학교 노아팀, 코이노니아선교공동체(KMC) 등이 후원한다. 참가 등록비는 10만 원이며, 사전 신청자에 한해 5만 원으로 할인 혜택이 제공된다. 신청은 온라인 구글폼(https://forms.gle/GZ7EYKvJLjsxGjt87)을 통해 필수로 진행해야 하며, 정원 내 선착순으로 마감된다. 행사 장소인 서울대학교 내 정확한 세미나실 위치는 등록비 입금 후 개별 컨펌을 통해 안내받을 수 있다. 자세한 문의는 노아 NCA 컨퍼런스 준비위원회(1566-6842, noncheon@gmail.com)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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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준비 말고 진짜 결혼 준비!”… 2026 노아 NCA 결혼가정 컨퍼런스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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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AGI),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며, 인간의 생존이 기본소득과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미래가 목전에 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술적 적응을 고민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변화는 명백히 ‘인간 이해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기술에 의해 다시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AG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최첨단 기술 대응 전략이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신앙적 재정립이다. 1. 노동이 사라질 때, 소명은 더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노동의 총량이 줄어드는 미래에, 일에서 정체성을 찾던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유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Homo Faber)’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명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 그 자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의 본질이 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미래다. 2. 기본소득의 시대, 탐욕 대신 절제를 배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스템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대한 위기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삶의 치열한 의미 또한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는 풍요가 종종 영적 타락과 궤를 같이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풍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를 절제 없이 향유하는 삶은 경계한다. 인간은 소비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GI 시대에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성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는 태도’다. 단순한 삶, 자발적인 절제,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의 영성은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형태가 될 것이다. 3. 통제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을 해치기보다,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들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통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위협받는 것은 ‘자유’다. 인간은 실수할 자유, 실패할 자유,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진 존재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변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가치 있게 여긴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는 안전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효율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치다. 4. 인간이 잊게 될 질문을 교회가 붙잡아야 한다 AGI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이 완벽히 해결되면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질문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깊은 공허가 들어선다. 교회는 세상이 잊어버릴 이 질문들을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왜 희생해야 하는가?" "왜 진리를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기술은 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답이 주어진다. 5.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험받는 시대다. 노동이 줄어들고 삶이 편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 쉽게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우고, 풍요 속에서도 절제를 배우며, 통제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다. AG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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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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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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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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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가 곧 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영광스러운 신분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인생의 근원적 갈망: 하나님 앞에 설 자격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심장이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놀라운 진리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사탄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태를 가리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었으며, 마치 교도소에 수감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었던 그 ‘의’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고, 이제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감격적인 속량의 드라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속의 신비: 죄가 되신 예수님과 의가 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반을 둡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절인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 안에는 우주적인 교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분이 실제로 ‘죄’ 자체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불의로 인해 그분은 실제로 불의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자신을 떠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육체를 떠난 후, 공의의 요구가 모두 만족될 때까지 고통의 장소에 머무르셨습니다. 인류를 위해 고통당하신 분은 다름 아닌 ‘신성(Deity)’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 인류의 처벌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공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다!”라고 선포하셨을 때, 비로소 예수님은 다시 의롭다 함을 얻으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은 이 사실을 못 박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분을 믿는 우리가 이제 합법적으로 의로워졌다는 영광스러운 영수증과 같습니다. 덮는 죄에서 씻는 의로: 속죄와 재창조의 능력 우리는 구약 시대의 ‘속죄’와 신약의 ‘의’를 구별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속죄(Atonement)’라는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담 이후 예수님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 인간의 죄를 잠시 덮어두셨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17장 11절이 말하는 피의 제사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죄가 잠시 가려질 뿐, 인간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결부되어 ‘속죄(덮음)’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덮는 수준을 넘어, 죄를 완전히 씻어내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너는 죄가 없다, 의롭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창조가 그랬듯이, 우리를 향한 그분이 선언은 곧 그 선언 그대로입니다. 둘째, 실제적인 재창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의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것이 확실한 만큼,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셨음도 확실합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즉시 일어나는 영적 실재입니다. 회복된 통치권과 담대한 교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왜 하나뿐인 아들을 죄로 만드시면서까지 우리를 의롭게 하셨을까요? 그 목적은 단 하나, 바로 ‘교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교제를 끊어버렸고, 인간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잃어버린 그 의와 교제의 특권,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돌려주길 원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회복한 우리에게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정죄함이 없는 평강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 마음에는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이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했으니,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담력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두려움 없이, 열등감 없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셋째,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의가 회복되는 순간, 잃어버린 통치권 역시 회복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인입니다! 이 의가 우리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법정은 움직이고 기적은 일어나게 합니다. 엘리야가 누렸던 그 기도의 능력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된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복음의 열쇠를 쥐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타락한 인간을 합법적으로 회복시켜 당신과 똑같이 의로운 존재로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에 어떤 이의나 의문도 품지 마십시오. "내가 과연 의로울까? 내가 이런 실수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이런 질문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완전한 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롬 1:17). 이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사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주님이라 고백하는 그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의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행위에 집착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하나님은 현재에 의로운 새로운 피조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오늘의 새로운 본성을 집중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삶, 그것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정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아버지가 주시는 화평을 누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한 실재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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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읽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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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가 곧 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영광스러운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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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도어, 동계올림픽 박해국 출신 선수 위해 기도 캠페인 시작
- 유튜브 Olympics 캡처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와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에서 2026년 동계올림픽이 개막한 가운데, 기독교 박해 감시 단체 오픈도어 선교회가 박해 국가 출신 선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에반젤리컬포커스가 11일 보도했다. 이번 올림픽은 2월 6일부터 22일까지 열리며, 93개국에서 3500명 이상의 선수들이 스키, 피겨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등 다양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놓고 경쟁한다. 조직위원회는 20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해 대회를 관람할 것으로 추산했다. 오픈도어는 올림픽이 “전 세계 사람들이 차이를 내려놓고 평화롭게 경쟁하며 공통된 인간성을 확인하는 시간”이라며,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올림픽을 “기도의 기회”로 삼을 것을 권면했다. 오픈도어는 2026년 기독교 박해 국가 순위(WWL)에서 기독교 박해가 심각한 50개국 중,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14개국을 대상으로 기도 캠페인을 전개한다고 밝혔다. 해당 국가는 에리트레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이란,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모로코, 우즈베키스탄, 멕시코, 키르기스스탄,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콜롬비아다. 이들 14개국에서 총 192명의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며, 가장 많은 선수단을 파견한 국가는 중국(125명)으로 집계됐다. 이어 카자흐스탄(36명), 튀르키예(8명), 멕시코(5명), 이란(4명) 순이었다. 나머지 국가들은 1~2명 수준의 참가자로 구성됐다. 오픈도어는 각 국가별 기독교인들이 처한 위험과 필요를 설명하고, 짧은 기도문도 함께 제시했다. 단체는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를 볼 때 그 나라의 형제자매들을 떠올리며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도 제목으로는 에리트레아에서 기독교인들이 겪는 극심한 감시와 폭력적 급습, 기한 없는 구금 문제부터, 나이지리아에서 테러 단체들이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자행하는 지속적 폭력, 파키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이 겪는 차별과 치명적 폭력 위협, 신성모독 혐의 고발 위험 등이 포함됐다. [복음기도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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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도어, 동계올림픽 박해국 출신 선수 위해 기도 캠페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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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가 음해인가… 욕설 녹취 배포까지 한 ‘쌍욕 목사’ 기사, 언론 경계 넘었나
- 한 종교 매체가 보도한 「쌍욕하는 목사와 상처 받고 좌절하는 교역자」 기사가 교계 안팎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기사에는 특정 목사의 욕설 녹취와 SNS 글, 제3자의 증언이 담겼고, 독자가 녹음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어 단순한 문제제기가 아닌 개인적인 명예훼손은 물론 형사적 문제까지 번질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보도의 구성과 방식, 균형성, 공익성 측면에서 언론이 지켜야 할 최소 기준을 충족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전달을 넘어 인물 공격과 여론 조성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지적이다. 공익적 의제는 분명… 그러나 면책이 되지는 않는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이 사안의 주제 자체는 공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도 부총회장 당선과 차기 총회장 가능성을 전면에 놓고 지도자 적격성, 갑질, 언어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공적 지위와 영향력이 큰 종교 지도자의 인격과 리더십은 공익적 관심사에 포함될 수 있다. 공동체를 책임질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면 검증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익적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보도가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공익은 면책의 근거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이다. 기사 작성 방식이 부정확하거나 일방적이라면 오히려 법적 위험은 더 커진다. 공익의 이름을 내세운 채 개인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라면 그 순간 보도는 공익을 잃는다. 반론 없는 기사… 김문훈 목사의 입장은 사라졌다 이 기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지점은 균형의 부재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사 안에는 김문훈 목사 본인의 해명이나 반박, 경위 설명, 사과 여부 등이 직접 인용되거나 확인된 흔적이 거의 없다. 문제 제기는 강하게 전개된다. 욕설 녹취, SNS 글, 제3자의 진술이 이어지고, 기사 톤은 “이제라도 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요구형 결론으로 곧장 나아간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은 비어 있다. 취재 과정에서 확인을 요청했는지, 어떤 답을 받았는지조차 기사 구조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구조는 이렇게 형성된다. 문제 제기는 강하고, 근거는 제3자 자료에 의존하며, 당사자 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균형성, 즉 반론권 보장의 원칙에서 매우 취약한 보도 방식이다. 고발문에 가까운 문체…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기사 기사의 문체와 구성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이 글은 사실 보도라기보다 고발문이나 성명서, 논평에 가까운 형식으로 읽힌다. “인격과 풍문은 소문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식의 표현은 풍문을 사실 근거처럼 제시하는 방식이다. “막장” 같은 낙인성 단어는 평가를 일반화한다. “어떻게 총회를 지도하는 지도자로 세울 수 있겠는가”라는 문장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독자를 설득하려는 문장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독자에게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글’이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 사실관계와 별개로 매도와 편파 논란을 불러오기 쉬운 편집이다. 녹취파일 다운로드 제공… 보도에서 확산으로 넘어간 지점 이번 기사에서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욕설 녹취파일을 독자가 직접 내려받을 수 있도록 안내한 점이다. 이는 사실 전달의 영역을 넘어 개인 발언을 대중에게 직접 확산시키는 행위다. 언론은 필요에 따라 자료를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녹취 전체를 배포하거나 다운로드를 유도하는 방식은 보도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 확산과 낙인의 재생산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독자는 사건의 본질보다 욕설 자체에 집중하게 되고, 인물에 대한 혐오 감정이 강화된다. 언론이 사실 전달자가 아니라 감정 유통자로 변하는 순간이다. 더구나 이런 행위는 형사적 책임의 면책을 벗어날 소지보다 책임을 더 강하게 물을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도 취약… 공익과 인격 침해의 경계 이 기사에는 법적 위험 요소도 적지 않다. 특정 인물의 인격 결함과 지도자 부적격을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반론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녹취와 평가를 결합했다는 점은 명예훼손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녹취파일 다운로드 제공은 공개 범위의 적정성, 동의 여부, 편집 가능성 등 추가적인 법적 쟁점을 낳는다. 사적 발언이 맥락 없이 유통될 경우 인격권 침해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다. 다른 기사- 비난의 칼날 위에 숨은 본질, 김문훈 목사의 사태를 바라보는 언론의 두 얼굴 홈페이지 갈무리 신앙 공동체의 기준에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언론 윤리를 넘어 신앙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은 사랑이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말한다. 이는 잘못을 숨기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경고다. 기사에서 이 문제와 관련된 사역자와 사과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이미 사과와 해결이 있었던 사안이라면 그것을 현재형 공격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공동체 회복과 거리가 멀다. 회개를 촉구하는 보도와 인물을 낙인찍는 보도는 다르다. 전자는 공동체를 살리고, 후자는 공동체를 찢는다. 공익의 이름으로 행해진 판단이라면 종교 지도자 검증은 필요하다. 그러나 검증은 절차와 균형 위에서만 설득력을 가진다. 반론이 없고, 맥락이 비어 있으며, 결론이 먼저 제시되고, 녹취까지 확산시키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보도가 아니다. 이미 판단을 강요하는 행위다. 공익을 말하려면 절차가 먼저다. 비판을 하려면 균형이 먼저다. 고발을 하려면 책임이 먼저다. 언론이 공익의 이름으로 개인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 피해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로 번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폭로가 아니라 성찰이다. 언론이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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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가 음해인가… 욕설 녹취 배포까지 한 ‘쌍욕 목사’ 기사, 언론 경계 넘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