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중간사 수업』
『중간사 수업』(샘솟는 기쁨/박양규 지음)
고요 속에 숨겨진 거대한 움직임
역사는 늘 요란하게만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긴 침묵 속에서 더 깊은 변화를 준비한다. 박양규 저자의 『중간사 수업』은 바로 그 고요한 400년,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대를 향해 귀를 기울이게 한다. 흔히 ‘성경의 공백기’라 불리는 이 시기를 저자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준비기로 재조명한다.
이 책은 세종대학교에서 15주간 진행된 강의를 바탕으로 집약된 결과물이다. 지성(로고스), 정서(파토스), 인품(에토스)이 어우러진 강의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단순한 학문적 분석을 넘어, 역사와 신앙을 긴밀히 연결하며 오늘의 독자에게 살아 있는 질문을 던진다.
학문을 넘어 현실을 깨우는 역사서
저자는 중간사를 흔히 쓰이는 ‘제2성전기’라는 학술 용어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신앙과 현실을 연결하는 역사적 해석서이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연구자로 살아온 저자는 단순한 용어 정리를 넘어,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오늘의 독자가 체감할 수 있도록 재구성한다.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을 신약 시대의 형성과 연결하며, 그 시대 성도들의 질문을 오늘 우리의 질문과 겹쳐 읽는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택할 것인가?”
이 물음은 과거의 성도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초대교회의 회복된 정체성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정체성이다. 저자는 우리가 2천 년 전 그들과 같은 성경,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감성적 고백이 아니라, 신앙이 역사성을 지닌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본질을 되찾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방식임을 깨달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문명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삶의 기준이 분명했다 :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도덕적 규범이 아닌 존재의 중심으로 삼았다.
가치의 숭고함을 추구했다 : 권력이나 질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삶으로 구현했다.
삶 자체가 증언이었다 : 복음을 말하는 것보다 복음으로 존재하는 것을 더 중시했다.
오늘 교회가 초대교회의 본질로 돌아간다면, 세상 속에서 다시금 소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문자에 갇힌 신앙은 소멸한다
책의 또 다른 날카로운 통찰은 “성경과 시대의 접점을 찾으려는 고민을 하지 않고 문자에 갇힌다면 결국 소멸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태어난 언어임을 강조한다. ‘복음’, ‘교회’, ‘소망’이라는 단어조차 당시 정치·사회·종교적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말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말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적 장면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삶으로 살아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문자적 정지 상태로 읽어서는 안 된다. 말씀의 역사적 온도, 사람들의 질문, 사회의 긴장까지 함께 읽어내야 한다.
바리새파의 변혁과 유대교의 생존
저자는 유대교가 어떻게 ‘랍비 유대교’로 전환되어 명맥을 이어 왔는지 주목한다. 사두개인은 문자만을 고집하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졌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적용을 고민하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려 했다.
이 점은 오늘 교회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문자주의에 머무는 신앙은 쇠퇴한다. 해석과 적용의 고민을 멈춘 공동체는 현실을 잃고, 결국 미래도 잃는다. 초대교회와 유대교의 변화를 함께 보아야 오늘 교회의 길이 선명해진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또 하나의 중간사
오늘 한국 사회는 정치·종교·문화의 충돌 속에 서 있다. 가치의 붕괴, 정체성의 혼란, 교회의 위상 약화, 급격한 사회 변화… 이 모든 모습은 중간사가 보여준 시대적 긴장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저자는 말한다.
“중간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읽는 해석학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마카비 전쟁’은 무엇일까? 신앙을 압박하는 문화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 초대교회가 보여준 회복의 정체성은 오늘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중간사 수업』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신앙의 본질과 역사의 흐름을 다시 읽어내는 눈을 회복하게 한다.
『중간사 수업』은 단순히 성경 사이의 400년을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깨우는 신앙의 교과서이다. 하나님 나라가 새 질서를 준비하던 격변기를 새롭게 비추며, 오늘의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